4세 단군 오사구 재위 38년 갑신 원년(BC 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으니 인삼이라고도 하고 선약이라고도 한다. 이 때 이후 신선 불사의 설은 삼을 채집하여 정기를 보호하는일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간혹 이를 얻은 이들이 하는 말이 있으니 '이상스럽고 영험스러워서 매우 기적 같은 경험이 많다'고 했다.무자 5년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는 하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를 구해갔으며 10월엔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경인 7년 배 만드는 곳을 살수의 상류에 설치했다. 임인 19년 하나라 왕 상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는 식달에게 명하여 람藍진眞변弁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신유 38년 6월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 구을이 즉위하였다.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 임술 원년(BC 2099) 명을 내려 태백산에 단을 쌓고 사자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하다. 계해 2년 5월 황충의 떼가 크게 일어나 온통 밭과 들에 가득 찼다. 단제께서 친히 황충이 휩쓸고 간 밭과 들을 둘러보시고는 삼신에게 고하여 이를 없애주기를 비니,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을축 4년 처음으로 60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다. 기사 8년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하다.정축 16년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셔서 삼신의 단을 봉축하고 많은 환화를 심다. 7월 단제께서 남쪽을 순수하사 풍류강을 건너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으시니 곧 붕어하시어 대박산에 묻혔다. 우가인 달문이 뭇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계승하였다.
6세 단군 달문 재위 36년 무진 원년(BC 2083) 임자 35년 모든 한을 상춘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에 제사케하고 신지인 발리로 하여금 서요사를 짓게 하였다. 그 사에 가로대.'아침해를 먼저 받는 동녁의 땅에 삼신께서 밝히 임하셨네. 환인께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시고 덕을 심으시니 넓고 깊게 하시니라. 뭇 신들이 환웅을 보내고자 의논하니 조서를 받으사 처음으로 개천하셨네. 치우는 청구에 우뚝서 만고에 무력으로 명성을 떨치니, 희대지방이 치우천왕에게 돌아오더라. 이에 천하는 능히 넘볼수 없었더라. 왕검은 대명을 받아 그의 환성은 구한을 움직이더라. 어수의 백성은 이에 되살아나고 바람결에 풀잎이 한결같이 나부끼듯 덕화는 새롭기만 하더라. 원한있는 자 먼저 원한을 풀고 병있는 자 먼저 제거하며, 한마음으로 오직 어질고 효도함에 마음을 두시니, 사해에는 모두 남김없이 광명이 있어라.
진한은 나라안을 진압하고 모한은 왼쪽을 보필하고 번한은 그 남쪽에 대비하여 험준한 바윗돌이 사방의 벽을 에워쌈과 같으니라. 성스러운 단군님께서 신경에 나아가심은 마치 저울추 저울그릇과 같으니라. 저울그릇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라. 저울추는 안덕향이니 앞뒤가 균형이 잡혀 평균을 이뤄 나란히 있고 , 덕을 신뢰하고 신정을 지키며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유지하니라. 정사를 하매 70국을 항복시키고 길이 삼한의 뜻을 간직하니라. 왕업은 일어났다가 망하는 법. 흥폐를 함부로 말하지 말지니라. 정성은 오직 천신을 섬기는 일에 있나니라.'고 하였다.
마침내 뭇 한들과 약속을 세우시사 말씀하시기를 '대저 나와 함께 이를 약속하는 사람은 한국의 오훈 신시의 오사를 가지고 끝없이 지켜나갈 일로 삼는도다.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이루는 길은 먹는 것을 우선으로 하나니, 농사는 사람사는 모든 일의 근본이요 제사는 다섯 가르침의 근원이라.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다스려 산업을 일으킬지니라.'라고 하셨다.
먼저 겨레가 소중함을 가르치시고는 다음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아울러 사형과 남을 대신하여 책임지고 화를 입는 일을 없앴다. 국경을 지키고 화백회의 결과를 공개하며, 서로 위하고 다 화합하는 마음으로써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스스로의 힘을 길렀으니, 바로 어진 정치의 비롯함이 여기에서 시작된 듯 하였다. 때에 동맹을 맺어 공물을 바쳤던 곳은 대국이 둘이요 소국이 스물이요 부락이 3624곳이었다.계축 36년 단제께서 돌아가시니 양가인 한율이 즉위하였다.
7세 단군 한율 재위 54년 갑인 원년(BC 2047) 정미 54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서한 즉위하다.
8세 단군 우서한 재위 8년 무신 원년(BC 1993) 이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며,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보충하도록 하였다.기유 2년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개의 이삭이 맺혔다. 신해 4년 단제께서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궁궐을 나서서 하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관제를 크게 고쳤다.갑인 7년 세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을묘 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인 아슬이 즉위했다.
9세 단군 아슬 재위 35년 병진 원년(BC 1985) 단제께서는 어진 덕이 있으시사 백성이 금지하는 법을 위반하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길 '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릴때도 있는 법이다.'하시며 그 죄진자를 그냥 놔 두시고는 벌하지 않으셨으니, 죄를 졌던 사람도 마침내 그 덕에 감화되어 버렸다. 이에 잘 조화된 교화가 크게 떨쳐졌다. 이날 두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와 이를 보는 자 마치 넓은 울타리 같았다. 정사 2년 청해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단제께선 상춘으로 몸을 피하신후, 새궁궐을 구월산의 남쪽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와 우율등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죽여버리도록 하시고는 삼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경인 35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노을이 즉위하였다.
10세 단군 노을 재위 59년 신묘 원년(BC 1950) 처음으로 큰 동물우리를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들을 길렀다. 임진 2년 몸소 마을로 행차하셔서 안부를 물으셨는데, 어가가 야외에 머무르니 현자들이 많이 주위에 몰려들었다.을미 5년 궁문 밖에 신원목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으시니 멀리 사는 이들까지 크게 기뻐했다. 병오 16년 동문밖 십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줄 모르고, 누워있던 돌들이 저절로 일어섰다. 천하에서 거북이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윷판과 같은 것이었다. 발해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섬이었다.을축 35년 처음으로 감성을 두었다. 기축 5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도해가 즉위하였다.
11세 단군 도해 재위 57년 경인 원년(BC 1891) 단제께서는 오가에게 명을 내려 열두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셨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이라 이름했다. 이 때 국자랑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길,'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는 실로 환웅천왕께옵서 개천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이에 천경신고는 위에 조술하신바요 의관대일은 기꺼이 밑으로 본을 보이는 것이니, 백성들은 범하는 일없고 함께 다스려져 들에는 도적떼도 없이 스스로 평안하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 병도 없이 장수하며 주리는 이 없이 풍요로우니, 산에 올라 노래 부르며 달을 맞아 춤추었습니다. 먼곳이라도 이르지 못하는 곳 없고 흥하지 않는 곳 없게 되었으니 덕이 넘치는 가르침은 만백성에게 주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뜨거운 정이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대시전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니 매우 장려하였다. 돌아가신 천제 환웅의 모습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마치 큰해와 같았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며 박달나무 밑 환화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원의 한 가운데 앉아 있는것 같았다. 천부의 인을 가지고 대원일의 그림을 누전에 걸어 놓으셨으니 이를 일러 커발한이라 하였다. 사흘동안 재계하시고 이레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를 움직이는 듯 했다. 이를 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하늘은 깊고 고요함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온 누리에 막힘이 없이 가득하리리 모든 것은 다만 참된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땅은 가득 품고 있음에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나 막힘이 없이 드러나리니 모든 일은 다만 부지런히 힘쓰는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사람은 살펴 아는 것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서나 막힘이 없이 고르고 구별함이니 모든 일은 다만 조화를 이룸으로부터 비롯됨이라. 그렇기 때문에 신은 정성스러운 마음에 내려와 성품은 광명을 이루어 세상에 바른 가르침을 펴서 온 누리를 이롭게 하나니 이에 돌에 이글을 새겼다.
정사 28년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방물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정묘 38년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을해 46년 송화강 기슭에 관청을 세우니 배와 그에 관계되는 여러가지 물건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 3월에 삼신의 단을 산의 남쪽에서 제사지냈으니 술과 음식을 갖추어 올리고 치사를 드리며 제사를 올렸다.
그날 밤 특별히 널리 술을 하사하시어 여러사람들과 더불어 술잔을 돌려가며 술을 마시면서, 여러가지 재주를 관람하시었다. 이 자리가 끝나자 마침내 누각에 오르셔서 천부경에 대하서 논하시고 삼일신고를 강연하시더니 오가를 돌아보시고 말씀하셨다.'이제부터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며 옥문을 열고, 떠도는 사람에게 밥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하며 사형제도를 없애노라.'이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병술 57년 단제 붕어하시니 만백성이 이를 슬프게 여김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함과 같아서, 삼년동안 근신하며 온 누리에 음악, 노래소리가 끊겼다. 뒤를 이어 우가 아한이 즉위하다.
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 정해 원년(BC 1834) 무자 2년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였는데 요하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 뒤에 저 창해역사 여홍성은 이 비석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마을 밖 변한이라 이르는 곳에 홀로 뛰어난 돌 하나 있었네 받침은 깨지고 철쭉만 붉었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푸르구나 다듬어져 처음 생겼을 때 그대로 흥망의 황혼에 우뚝 서있으니 글에 보이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이 어찌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을묘 29년 청아의 욕살 비신과 서옥저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왕으로 삼으셨다. 무인 52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 홀달이 즉위하였다.
13세 단군 홀달(혹은 대음달) 재위 61년 기묘 원년(BC 1782)갑오 16년 주와 현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였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 없고 정치는 법칙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백성은 고향을 떠나는 일 없이 스스로 일하는 곳에서 편안하여,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넘쳤다. 이 해 겨울에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홀달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하니, 은나라의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 기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
무술 20년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무진 50년 오성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기묘 6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백성들은 모두 밥도 먹지 않았으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명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고 산것을 죽이지 않으며 널리 놓아주도록 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지낸후 우가인 고불이 즉위하였다.
14세 단군 고불 재위 60년 경진 원년(BC 1721)을유 6년 이해에 큰 가뭄이 있었다. 단제께서 몸소 하늘에 기도하여 비오기를 빌며 말씀하시길,'하늘이 크다 하나 백성이 없으면 무엇에게 베풀것이며 비는 기름지다 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일체일진대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는가? 이제 비는 곡식을 기름지게 할지며 때 맞춰 구제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말을 마치자 큰 비가 수천리에 삼대처럼 내렸다.신유 42년 9월 말라 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을해 56년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게 하니 총계 1억 8천만인이었다.기묘 60년 단제 붕어하시고 대음이 즉위하였다.
15세 단군 대음(혹은 후흘달) 재위 51년 경진 원년(BC 1661) 은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구했다. 이 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신사 2년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이에 단제께서는 매우 불쌍하게 여기셔서 곡식을 창해사수의 땅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다. 겨울 10월 양운국과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기축 10년 단제께서는 서쪽으로 약수로 가시더니 신지 우속에게 명하여 금철 및 고유를 채취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우루국 사람 20인이 투항해 오니 염수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하였다. 정미 28년 단제께서는 태백산에 오르사 비석을 세워 역대 단군들의 이름과 역대왕들의 공적을 새겼다. 기미 40년 단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사 남선비의 대인으로 삼다.경오 5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우가 위나가 즉위하였다.
16세 단군 위나 재위 58년 신미 원년(BC 1610)무술 28년 구한의 여러 한들을 영고탑에 모여 삼신과 상제에게 제사지냈으니 환인 환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모시었다. 닷새 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 쪽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애한의 노래를 불렀다. 애한이란 곧 옛날 신에게 올리는 노래의 종류를 말함이다. 선인들은 환화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한의 노래(지금으로치면 애국가)는 다음과 같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무신 5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을이 즉위하였다.
17세 단군 여을 재위 68년 기사 원년(BC 1552)갑신 52년 단제께서는 오가와 함께 나라를 돌아보셨는데, 개사성의 근처에 이르르니 푸른 도포를 입은 노인이 있어 하례를 드려 말했다.'오래 선인의 나라에 살며 선인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지만 단제의 덕은 두루 미쳐 그르침 없고 왕의 다스림은 편벽되지 않고 백성들은 이웃에서 수심 고통 책화를 구경하지 못하고, 믿음으로써 경계를 관찰하고, 은혜로써 성도 나라도 전쟁을 겪지 않았거니.' 이에 단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마워라, 고마워라, 짐이 덕을 닦은지 오래지 못해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할까 두렵게 여기노라.병자 68년 붕어하시고 태자 동엄이 즉위하였다.
18세 단군 동엄 재위 49년 정축 원년(BC 1484) 병신 20년 지백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을축 4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구모소가 즉위 하였다.
19세 단군 구모소 재위 55년 병인 원년(BC 1435) 기축 24년 남상인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 왔다. 기미 54년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 을 짓다. 경신 55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고흘이 즉위하였다.
20세 단군 고흘 재위 43년 신유 원년(BC 1380) 신미 11년 가을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 병신 36년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경자 40년 공공인 공흘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계묘 43년 세상이 아직 평화롭지 못한데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소태가 즉위하였다.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 갑진 원년(BC 1337) 은나라왕 소을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경인 47년 은나라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 영지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임진 4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 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으려 했는데 거듭하여 이를 청하매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도록 하였다. 을미 52년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에 이르러 부로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는 오가를 불러 이들과 더불어 제위를 물려줄 것을 의논하셨는데 스스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 어렵다하시며 정치를 서우여에게 맞기고 싶어 하셨다. 이에 살수의 땅 백리를 둘러보시고 이를 그에게 봉하시사 명을 내려 섭주로 하여 기수(奇首)라 부르게 하였다. 우현왕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종래 이를 듣지 않으셨다. 이에 우현왕은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단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하셨다. 이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아갔다.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병신 원년(BC 1285) 단제 명하사 녹산을 개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를 세우고 고등왕을 제사지냈다. 11월 몸소 9한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번한의 백성들을 회대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신축 6년 신지인 육우는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 합니다.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고 상주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신도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째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을묘 20년 이 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쫒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골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의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신미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이 이에 따랐다. 계미 4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아흘이 즉위하였다.
23세 단군 아흘 재위 76년 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 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무자 5년 이한및 오가를 불러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기해 7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가 즉위하였다.
24세 단군 연나 재위 11년 경자 원년(BC 1161)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다.신축 2년 여러 한들은 조서를 받들고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사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이 있으면 전적으로 여기에 기도하여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경술 11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솔나가 즉위하였다.
25세 단군 솔나 재위 88년 신해 원년(BC 1150) 정해 37년 기자(箕子)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정유 47년 단제께서 상소도에 계시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의례를 강론하시다가 영신과 직신의 구분을 물으셨다. 이에 삼랑 홍윤성이 나서서 대답했다.'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이옵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이오며 임금은 근원이요 신하는 흘러가는 물입니다. 근원이 이미 흐렸으면 그 흐름이 맑기를 구하여도 이것이 될 수 없는 일이나니, 때문에 임금이 성인이 된 후라야 신하가 바른 법입니다.' 단제 가로되 '옳은 말인지고'라 하였다.기유 59년 밭 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개 이삭의 조가 있었다.무인 8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추로가 즉위하였다.
26세 단군 추로 재위 65년 기묘 원년(BC 1062) 가을 7월 백악산의 계곡에 흰사슴 200마리가 무리지어 와서 뛰놀았다.계미 65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두밀이 즉위하였다.
27세 단군 두밀 재위 26년 갑신 원년(BC 997) 천해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신묘 8년 큰 가뭄 뒷끝에 큰 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기유 26년 단제 붕어하시니 해모가 즉위하였다.
28세 단군 해모 재위 28년 경술 원년(BC 971) 단제 앓으시니 백의동자로 하여금 하늘에 기도하도록 하니 곧 병이 나으셨다. 경신 11년 여름 4월 태풍이 크게 불어 폭우가 쏟아져 내리니 땅위에 물고기가 쏟아져 내렸다. 정묘 18년 빙해의 뭇한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정축 28년 단제 붕어하시니 마휴가 즉위하였다.
29세 단군 마휴 재위 34년 무인 원년(BC 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 8년 여름 지진이 있었다. 병술 9년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갔다. 신해 34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내휴가 즉위하였다.
30세 단군 내휴 재위 35년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는 엄독골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들과 만난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 사람들과도 수교를 맺었다. 병진 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병술 3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등올이 즉위하였다.
31세 단군 등올 재위 30년 정해 원년(BC 874) 임인 16년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에서 노닐었다. 신해 25년 단제 붕어하시고 아들 추밀이 즉위하였다.
32세 단군 추밀 재위 30년 임자 원년(BC 849) 갑인 3년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갑자 13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병인 15년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 신사 43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감물이 즉위하다.
33세 단군 감물 재위 24년 임오 원년(BC 819) 계미 2년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무자 7년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 밑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렸다. 맹세하여 올린글이 있으니,'삼성의 존귀하심은 신과 더불어 그 공이 나란하시오며 삼신의 덕은 성인에 의해 더욱 크시어라. 빈 것과 큰 것은 한 몸이라 하겠고, 하나는 또 모두와 한가지로 같음이라. 지혜와 삶을 함께 닦고 모습과 얼을 함께 넓힌다면 참 된 가르침은 이에 서고 믿음이 오래 갈 것은 보이는 이치라. 그 기세를 귀하게 여기고 스스로 살피고 되돌아 본다면 저 백악은 어딜가나 끝 없이 푸르리니 여러 성인들은 끝없이 이어나고 글은 흥하고 예와 악은 이로써 크리니 도술은 그 연원이 넓어서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 셋을 합쳐서 하나로 돌아오네. 크게 하늘 가르침을 펴시고 영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라.'라고 하였다.을사 24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오루문 즉위하다.
34세 단군 오루문 재위 23년 병오 원년(BC 795) 이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들 모두 기뻐하며 도리가를 지어 부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엔 아침해 맑은 빛 내려 비추고 나라엔 어진이 큰 가르침 널리 내려와 큰 나라 배달나라 사람마다 마음 편하고 밝고 밝은 노래 속에 끝없이 태평하라.
을묘 10년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무진 23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사벌이 즉위하다.
35세 단군 사벌 재위 68년 기사 원년(BC 772) 갑술 6년 이 해에 황충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임오 14년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임진 24년 큰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 단제께서 조을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병자 6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매륵이 즉위했다.
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 정축 원년(BC 704) 갑진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무신 32년 서촌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신해 35년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더라.갑인 38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는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무진 52년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갑술 5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마물이 즉위하다.
37세 단군 마물 재위 56년 을해 원년(BC 646) 경오 56년 단제께서는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기수에 이르러 붕어하시니 태자 다물이 즉위하다.
38세 단군 다물 재위 45년 신미 원년(BC 590) 을묘 4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홀이 즉위하다
39세 단군 두홀 재위 36년 병진 원년(BC 545) 신묘 3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달음이 즉위하다.
40세 단군 달음 재위 18년 임진 원년(BC 509) 기유 1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음차 즉위하다.
41세 단군 음차 재위 20년 경술 원년(BC491) 기사 20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을우지 즉위하다.
42세 단군 을우지 재위 10년 경오 원년(BC 471) 기묘 10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물리 즉위하다.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경진 원년(BC 461) 을묘 36년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이 해에 백민성 욕살 구물이 어명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을 점령하니 구지의 군사들이 이에 따라서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병진 원년(BC 425) 3월 큰 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단제께서는 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괴멸하니 마침내 우화충을 죽여버렸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는바 되어, 마침내 3월 16일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이름을 대부여라고 고치고 삼한은 삼조선이라고 바꿔불렀다. 이 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했지만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애오라지 한 분에게만 맡겨 두지는 않게 되었다. 7월에는 해성을 개축하도록 하여 평양이라고 부르도록 하시고, 이궁을 짓도록 하였다.
정사 2년 예관이 청하여 삼신영고의 제사를 지냈다. 곧 3월 16일이었는데 단제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경배하시니 첫번째 절에 세번 머리를 조아리고 두번째 절에 여섯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번째절에 아홉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데, 무리를 거느리고는 특별히 열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를 삼육의 대례라고 한다. 임신 17년 감찰관을 각 주와 군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살펴보아 효도를 잘하는 자와 청렴결백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무인 23년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갑신 2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루가 즉위하였다.
45세 단군 여루 재위 55년 을유 원년(BC 396)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다.신축 17년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을 침범하매 수비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병진 32년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에 까지 육박해왔다. 이에 번조선이 대장군 우문헌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하고 진조선 막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정사 33년 연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에 주둔하며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헌이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신미 47년 북막의 추장 액니거길이 조정에 찾아와서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청했다. 마침내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로 하여금 병력 만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을 공격하고 이를 도와 성읍을 쌓게 하였다.무인 54년 상곡의 싸움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오더니 이 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기묘 55년 여름 크게 가물었다. 죄 없이 옥에 갖힌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크게 사면하고 몸소 나아가서 기우제를 드렸다. 9월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보을이 즉위하였다.
46세 단군 보을 재위 46년 경진 원년(BC 341) 12월 번조선왕 해인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오가가 다투어 일어났다.무술 19년 정월 읍차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하여 번조선 왕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 윤허를 구하매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정사 38년 도성에 큰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고 단제께서는 해성의 이궁으로 피난하였다.
계해 44년 북막의 추장 이사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을축 46년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단제께서는 서울로 돌아오셔서 대사령을 내리셨는데 이 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수 없었다.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후사가 없으매, 고열가가 단군 물리의 현손으로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터라 마침내 즉위하였다.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 병진 원년(BC 295)기묘 14년 단군왕검의 묘를 백악산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을 내려 사철 이에 제 지내게 하고 단제께서는 1년에 한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기유 44년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인사를 올려왔다. 이해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했으나 단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 때부터 원망하며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임술 57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사람이었다.
계해 58년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하늘에 제사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여 가로대'옛 우리 선조 열성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컨대 그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고 하시니 크게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이틑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 하였다이 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 금상폐하의 천조후 12년 계묘에 이르기까지 약 *3696년이라. 이해 10월 3일 흥행촌의 늙은이가 강화도의 해운당에서 쓰다.
* 행촌 이암이 이글을 쓴 연대가 고려 31대왕 공민왕 12년 서기로1,363년이다. 그러니까 기원전 2,333년에다 1363년을 더하면 단기로 3,696년이 된다.단군 조선은 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 계해 58년(B.C 238 ) 고열가 단제의 조선 폐관 까지 2,096년간 지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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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다시 생각해하는 좋은글 질 읽었습니다
퍼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