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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에서 영수는 ‘우리들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도 모두 난쟁이였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난쟁이는 단순히 신체적인 기형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화하지 않는 가장 약하고 빈곤한 계층임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1970년대 서울은 보릿고개를 겪으며 빈곤에 허덕이던 농촌 주민들이 아등바등 살아보고자 향했던 곳이다. 4년동안 무려 약 60만 명의 농민들이 서울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무렵 서울에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집들이 모여있는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의 도시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고, 시작한지 2년만에 판자촌 9만동이 강제 철거되었다. 이렇게 급진적이어도 너무 급진적이었던 재개발로 인해, 가난한 계층은 사회의 모서리로 더욱 몰려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양극화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난쏘공’에서 나오는 영수네 가족은 사회 소외 계층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영수네 가족을 비롯한 소외층들의 삶의 원인을 ‘자수성가’ 케이스에 비교하며 단순히 그들의 노력 부족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법과 제도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더욱 보장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그러나 법은 우리 사회의 난쟁이들에겐 한없이 가혹한 존재일 뿐이었다.
책 초반부에 ‘아버지의 친부와 고조부 증조부가 모두 노비 출신이었다’ 라는 말이 있다. 근대화를 맞이하고 인간 평등과 존엄성이라는 개념이 당도하면서 신분 질서는 제도 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여기서 알 수 있다 싶이, 당시 우리나라의 제도는 표면만 번지르르 했다. 겉으론 근대화의 물결에 자연스럽게 따라가고 있는 하지만, 하위 계층의 삶은 하나도 변한 거 없이 그대로 노비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근로권도 보장받지 못하며 비정규직 막노동으로만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이들의 삶이 진정한 근대화 사회의 시민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만약 이때 최소수혜자의 이익을 고려하는 재분배 정책이나 일자리 창출이 활발히 이루어졌다면 달나라는 아니더라도, 당시 난쟁이들이 이 죽은 땅을 조금이라도 일구어 갈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40년이 흐르고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난쟁이들이 존재한다. 1970년 대 이후 사회 양극화 현상은 해결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신분 상승에 성공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난쏘공에서처럼 기생충에서도, 가난은 노력의 정도에 비례하는 건 아님을 보여준다. 기우는 명문대에 합격하기 위해 홀로 4수에 뛰어드는 학생이고, 기정이도 뛰어난 포토샵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기택도 해보지 않은 사업이 없을 정도로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21세기 한국 사회는, 상위 10%가 국문 소득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이 부자와 빈곤층의 경계가 확실해졌다. 이처럼,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리 복지와 평등이 중요해지고 다양한 길들이 있는 듯해도 ‘지하’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햇빛은 공동의 자원이 아님을, 기생충과 난쏘공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겉으로 치장한 정책과 제도가 아닌, 가난한 이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한 것 같다. 또한 빈곤층에 대해서 가지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혐오감도 변화해야 하는 부분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들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아파하고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차이점
난쟁이 가족이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직하게 일하기만 한다. 불법행위도 하지 않고, 본인들이 쏟을 수 있는 온 힘을 쏟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아마 이 정직한 노력은 ‘바르게 노력한만큼 언젠가 꿈만 꾸어왔던 천국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외 계층의 선한 희망에서 비롯된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난쟁이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이 선한 노력과 희망이 당시 사회에선 쓸모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리고 살아 남기 위해선 더 악독해질 수 밖에 없다는 씁쓸한 메시지를 작품 후반부 영희의 모습에서 보여주는 것 같다.
1970년 대 이후 사회 양극화 현상은 해결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신분 상승에 성공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더 높은 삶의 퀄리티를 향한 부자들의 활동 범위는 정말 넓다. 원래 가진 돈이 있기 때문에 여러 사업에 도전해도 경우의 수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 기우네 가족은 길이 너무 좁다. 그렇기에 기우네 가족은 좀 더 일찍 불법적인 방법을 택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들은 해결되지 않은 불평등과, 사회의 모순을 이미 지난 몇 십년간 경험해왔고, 도덕적인 방식만을 통해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생충은 난쏘공보다 , 시간이 지날수록 더 처절해지고 영악해지는 빈민 계층의 생존 투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난쏘공’의 주제의식은 확실하다. 선하지만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소외계층을 연민어린 시각으로 바라보지만, 이들에게 한없이 가혹하기만한 있는 자들의 횡포는 철저하게 부정적으로 그려낸다.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중요한 삶의 가치들까지 무시되어버리는 현상이, 당시의 큰 문제점이었기 때문에 작가는 상위 계층의 모습을 통해 이를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투기업자들의 모습)
하지만 기생충에서는 부자들을 나쁘게 표현하지 않는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구조적 불평등은 개인과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 고질적인 사회 문제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 같기도 하다. 무조건 부자들은 비리가 많고 정도 없는 악인들로 묘사하는 대신에, 같은 본성을 지닌 똑같은 인간들인 만큼, 하위 계층을 위한 적절한 제도가 만들어진다면 충분히 빈부계층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 하지만 박사장의 행동에서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할 태도를 보여준다. 아무리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아졌다 하더라도, 박사장이 기택의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무의식적인 혐오감이 존재할지 모른다. 즉, 기생충은 선함과 악함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되, 평등한 사회를 위해선 ‘악취에만’ 후각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악취의 원인’을 찾아 모든 신경을 기울임으로써 방안을 모색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다.
Chapter 3. 느낀점, 진로와 연계점
‘난쏘공’과 ‘기생충’ 모두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살짝 무거운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러한 작품들로 인해 우리는 당연시 여겼던 문제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나는 평소에 ‘난쏘공’에 나오는 인식처럼 부자와 가난한 이들을 부자들은 나쁘고 가난한 사람은 착하다 라는 생각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기생충을 보고 인식이 변화하게 되었다. 최근 가벼운 소재들의 문학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 작품들도 충분히 의미있고 많은 귀감을 주지만, 여기에 가려 사회문제를 풀어낸 작품들이 가려지지 않았으면 한다. 나도 평소 국문학에 관심이 많고 국어 쪽 진로를 생각해보고 있는데, 미래 국어 관련 진로를 택하게 되었을 때 개선되어야 할 사회문제를 흥미롭게 작품으로 그려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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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자꾸 파일 첨부가 안된다 떠서 내용 복사하느라 2분 늦어버렸어요뮤ㅠㅠ 죄송합니당
수고 많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