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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황찬란한 홍콩의 밤과 낮 김원중 밥그릇 싸움으로 얼룩진 국회의원 선거가 예상 밖의 3당 체제로 나타난 후 3박4일의 일정으로 2016.4.21아침 일찍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오후 1시20분에 출발하는 LJ113항공기에 몸을 실었다.그동안 해외여행은 여러 번 했으나 홍콩 및 마카오는 가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친구들과 함께 가보게 되어 많은 기대와 설레임에 가슴은 뛰었다.번거로운 출국절차를 끝내고서야 비행기좌석에 앉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말로만 들었던 저가 항공여행을 체험하게 되었다. 비행기 내부에는 비행시간, 항속거리. 출발 및 도착시각 등을 알려주는 전광판도 없고 시시각각의 안내방송과 읽어볼 신문조차 없었다. 또한 승무원의 유니폼도 소박하고 수수한 옷차림이다. 4시간 넘게 비행한 후 이윽고 홍콩국제공항에 도착했다.일반적으로 공항에서 입국할 때 입국신고서는 필요 없고 세관신고서를 써야 하는데 홍콩공항은 세관신고서는 필요 없고 입국신고서를 쓰라고 하기에 의아스럽게 생각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홍콩은 국제자유무역항이고 중계무역항이기 때문에 일반개인의 소소한 물품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로 청마대교를 통과하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섬과 섬을 연결해 주는 도로와 다리, 화물선, 카페리,유람선의 모습들이 국제항구 더웠다. 홍콩은 옛날부터 중국의 영토로써 19세기에 이르러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영국이 비단과 마시는 차들을 중국(그 당시 청나라)에서 은을 주고 지불하고 구입하여 유럽으로 가져가 막대한 이익을 올렸는데 이로 인한 은의 유출이 늘어나자 이를 회수하기 위하여 아편을 불법으로 청나라에 수출했다. 청나라는 아편의 폐해가 발생하자 이를 몰수하여 불태워 버렸다. 영국은 아편소각을 문제 삼아 1839년에 제1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결과는 영국의 승리로 1841년에 난징(南京) 조약에 의하여 베이징(北京)조약에 따라 영국은 홍콩섬과 남쪽의 구룡반도, 스톤커터스 아일랜드를 99년간조차 받았다. 그 후 1941년12월에 일본군이 홍콩을 침략하여 몇 년간 지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에 중국에 반환되어 현재는 홍콩특별행정구로 되어있다. 홍콩시내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들른 곳은 홍콩의 인사동이라고 하는 헐리우드거리이었다. 헐리우드는 100년전부터 외국상인 들과 선원들이 많이 모여 들었던 곳으로 유럽등지에서 손질해온 물권들을 팔기 시작하면서 골동품시장의 면모를 다져왔다.
미로같은 좁은 길에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빌딩숲사이로 비집고 다니다 보니 호기심은 잠깐이고 짜증이 끊어 오른 탓인지 특별히 사고 싶은 물건은 눈에 띠지 않았다. 낮에는 런던시내에서 보았던 2층버스를 타보고 밤에는 야시장에 가보았는데 남대문시장의 밤풍경과는 전혀 달라 기대보다는 실망이 컸다. 그 보다는 네온사인으로 휘황찬란한 밤거리와 유람선을 타고 홍콩섬을 한바퀴 돌아보는 바닷경치가 홍콩여행의 하이라이트처럼 느껴졌다. 첫날밤은 홍콩호텔의 한방에서 남자 셋이서 함께 자게 되었다. 친구 두명은 부부동반이었는데 혼자인 나 때문에 여자끼리 한방, 남자끼리 한방을 쓰게 되었다.
홍콩구경을 끝내고 이튿날 아침에는 마카오로 갔는데 또다시 출국과 입국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출국심사 때 4매가 붙은 증명서를 붙여 주는 이유는 홍콩과 마카오에 들락날락하는 신원을 확인하여 불법 출입국에 따른 범죄의 예방 및 범법자의 검거를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마카오의 인구는 약55만명, 언어는 약 96%가 중국어(광동어)와 약2%가 포르투칼어을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1557년 남중국해를 항해하던 포르투칼 사람은 물에 젖은 화물을 말린다는 구실로 처음으로 마카오에 상륙했다. 그리고 나서 같은 해 중국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거주권 획득하여 살게 되었다. 그 이후 300년간 사는 도안에 세금도 냈기 때문에 중국당국과의 사이도 좋았다. 그러던 중 1849년에 영국이 아편전쟁을 일으켜 홍콩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자 포르투칼도 마카오를 자유무역항으로 선포하고 점령통치 하게 되었다.
1987년 마카오 반환협정이 체결되고 1999년에 정식으로 중국에 반환되어 홍콩과 같은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되어있다. 홍콩과 마카오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곳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페리편으로 약 1시간이나 걸려 섬과 섬 사이를 끼고 달렸기 때문에 세차게 불어오는 바닷 바람이 꽤나 상쾌하고 시원했다. 성바울 성당은 1594년에 설립되어 1726년에 문을 닫은 마터데이교회로써 성바울대학 가운데 일부이었으며 극동에 지어진 첫 유럽스타일 대학이었다.
성바울성당은 1580년에 지어졌으나 그 후 3번이나 발생한 화재로 불타 버리고 현재는 건물의 토대와 돌계단만 남아서 동서양문화의 독특한 결합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건축양식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마카오만의 매력으로 손꼽히고 있다.
성바울 성당을 건축할 때 첫번째와 두번째는 주로 목재를 사용했고 3번째는 석재를 사용했는데 세번째 불로 소실되자 이를 천주님의 뜻으로 여겨 재건축하지 않고 건물의 토대와 정문의 돌계단만을 그대로 남겨 놓고 있다고 한다. 나도 정면의 돌계단을 배경으로 단체사진과 독사진을 찍었다. 정면의 돌계단에 차분히 앉아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하면서 주위를 둘려보니 오드리헵번과 그레고리팩이 주연했던 영화 "로마의 휴일 "에 나오는 스페광장의 추억이 떠올랐다.안드레아 김대건신부가 우리나라 최초로 24살때 카톡릭 사제서품을 받았고 그의 목상과 유해의 일부가 있다는 성안토니오 성당은 안타깝게도 가보지 못했다.이어서 돌계단 밑으로 내려와서 이곳저곳 상점과 물건을 구경하는데 친구들이 망고쥬스를 살까해서 US달러를 보여주면서 하우머취 했더니 판매원이 노노하면서 몇집건너 환전소를 가르키기에 얼른 알아듣고 찾아가서 홍콩달러로 바꿔서 사먹은 망고쥬스가 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 주었다.외국에 나가 비록 그나라 언어를 몰라도 큰돈,작은돈을 내보이면서 손짓,몸짓으로 흥정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 아닐까 한다.홍콩과 마카오는 US달러나 중국의 위안( 원 )화를 받지않고 홍콩 달러만을 고집하는 그들만의 자존심이 대단했다. 포르투칼이 마카오를 공식적인 행사와 축제들이 열리고 있는 세나두광장을 거쳐 마카오타워로 향했다. 2001년에 문을 연 마카오타워는 21세기 마카오의 대표적인 렌드마크로 높이가 338미터이다.관광객들에게는 스릴만점의 엑티비티를 즐길수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특히 233미터 지점에서 뛰어 내릴 수 있는 번지점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번지점프중 하나이다. 이외에도 번지 점프와는 약간 다른 느낌의 스카이점프,마카오타워의 데크를 즐길 수 있는 스카이워크.마지막으로 338미터 탑 최상부까지 올라 갈 수 있는 클라임도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번지점프를 경험해 볼려면 우선 제복으로 완전무장하고 기본교육을 받고나서 조교의 지시에 따라 고공에서 지상을 향하여 낙하하면 이광경을 찍어서 사진과 기념품을 주는데 비용이 무려 60만원이 넘는다고 하니 깜짝 놀랄 수 밖에 .....또한 점프대 바로 옆 난간에 서서 한발을 들어 올리고 점프하려는 미습을 찍어 주는데만도 15만원이라고 한다. 전망대의 유리바닥에서 수십미터 아래로 떨어진 땅위를 내려다 보니 아찔하고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마카오타워에서 내려와서 마카오의 명물 카지노장에도 가보았는데 서울의 워커힐이나 힐튼호텔의 카지노장과 별다른 점은 없으나 호기심으로 눈알을 바삐 굴러 보기만 했다.마카오의 야경도 구경할겸 윈호텔(水晶宮)앞에서 벌어지는 분수쇼가 장관인데 수면에서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파랑, 노랑, 빨강, 연보라 색깔 물보라가 그야말로 휘황 찬란한 빛의 향연이다.또한 마카오는 미국의 라스베가스 처럼 카지노시설들로 꽉 차있어 과연 카지노천국이구나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저녁은 중국 전통의 만두정식으로 칭따오맥주와 꼬량주를 곁들여 입맛을 돋군 후 호텔로 와서 마카오 밤의 별빛을 벗 삼았다. 셋쨋날 아침은 로만스 해안으로도 불리는 바닷의 영화촬영 셋트장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복잡한 출입국 절차를 거쳐 중국의 심천으로 들어갔다.심천은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으로 40여년전에 건설 된 공업도시이다.홍콩 및 마카오에 인접해 있고 인구는 1,600만명으로 북경, 상해, 광주에 이은 중국의 4대 도시로서 도시계획으로 녹지공간이 잘 확보되어 있고 중심가의 대도로는 신호등이 없어 쭉쭉 시원스럽게 뻗어 있다.그러므로 이렇다 할 문화유적이나 명승고적이 없기 때문에 새로 만든 유락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금수중화문화촌으로 갔다 그런데 들어갈 때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통 테마파크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용인 민속촌, 에버랜드 일본의 토오쿄오 디즈니랜드, 나가사키의 하우스템포스가 있는데 금수중화문화촌은 규모가 아주 크고 시설이 다양해서 단연코 압도적이다. 미니열차를 타고 테마파크 경내를 한바퀴 돌아 보는데 시설의 곳곳에 중국의 대표적인 만리장성, 자금성, 서안에 있는 진시황의 용병, 적벽등을 표상물로 축소해서 상직적으로 설치해 놓고 있다. 이어서 경내에 있는 실내 공연장에 들어가서 대형 바라이어티쇼를 관람한후 옆에 있는 대형식당에서 저녁을 마치고 다시 야외공연장에서 밤공연을 보고 나서야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맛사지센터에 들러 그동안 쌓인 피로를 확 풀 수 있었다.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은 심천에서 보내고 24일 아침에 짐을 꾸려 홍콩국제공항에 나가서 JL114편 항공기 탑승절차를 밟았다. 귀국하는 비행기안에서 점심이라고 카스테라 한조각, 바나나 한개, 그리고 생수 한컵을 받아 먹고보니 이것은 점심이라기보다 간식이었다.그대신 캔맥1개 5,000원, 컵라면 4,000원, 새우깡 1,000원 등으로 팔고 있어서 푼돈으로 가볍게 사먹을 수 있게 장사하고 있는 것이 기똥차고 재미있게 느껴졌다.나는 20,000원을 꺼내 컵라면을 사서 우리일행 다섯명이 다함께 맛있게 먹었다. 그밖에 기내면세품으로 화장품, 향수, 양주, 악세사리 등은 팔고 있으나 담배는 팔지 않고 있다. 어쨋든간에 저가 항공사의 경영활동이 그야말로 합리적이고 능률적이라는 점에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국내여행이건,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라는 관점에서 삶의 보람을 찾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민병갈 박사와 천리포 수목원
수필가 김원중
2016년 초가을은 북한의 5차 핵실험과 그에 따른 UN의 대북제제결의 그리고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 탓인지 우중충한 9월25일( 토) 아침7시에 서울 서부역에 도착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7시18분이 되자 천리포 수목행이라고 쓰여 있는 (주 )아름여행사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섰다.
버스에 올라 맨 뒷자리에 앉으니 젊고 예쁘장한 미남청년이 예약자 명부를 들고 승차인원체크를 했다. 나는 두 사람 예약을 했는데 친구가 못 간다고 해서 혼자 왔다고 했더니 그럼 예약금은 환불이 안 된다고 하기에 아뿔싸! 아침부터 손재수가 생겼구나 하고 느꼈지만 별수 없었다.
버스는 남산1호 터널을 지나서 한남대교를 건너자 한강물위를 신나게 달리는 수상스키도 눈에 들어왔다.
잠실운동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을 태우고 나니 45인승 좌석이 꽉 찼다.승객의 대부분이 남녀쌍쌍인데 부부인지 아니면 애인관계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간에 보기 좋았다.8시쯤되자 가이드가 우선 반찬이 들어 있는 접이와 물을 나누어 주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여행이라 김밥이나 찰떡을 줄 것으로는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따끈한 흰밥에 멸치볶음, 김부각, 김치 몇조각이 입맛을 끝내 주는 것 같았다.오늘의 여행목적지는 천리포 수목원,안면도백사장,개심사의 세곳이지만 천리포수목원이 목표지점이고 나머지 두곳은 지나가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둘러리에 불과했다.그래서 제일 먼저 천리포수목원에 도착했다. 천리포수목원은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푸른 눈의 민병갈 박사(민병갈:Cari Ferris Miller:1921~2002)가 1962년에 황무지나 다름없는 논 4마지기를 매입하여 수목원으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2002년 숨을 거둘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다바쳐 이룩한 민간수목원이다.민병갈박사님은 1921년 미국 펜실바니아주 웨스트 째츠텐에서 태어나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미국 정보장교로 한국에 와서 한국과의 인연을 맺었다.그후 1979년에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한국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2002년에는 마침내 한국땅에 뼈를 묻었다.수목원의 규모는 18만평의 부지에 400여종의 목련,370여종의 호랑가시나무,250여종의 무궁화,380여종의 동백나무,200여종의 단풍나무외에도 곰취,앵초,노루귀,복수초,노루오즘 등이 있다. 특히 세계최다의 목련 수집수목원으로서 미국 홀리(Holly)학회가 인증한 수목원이기도 하다.수목원 내부에는 주제별로 원추리원,수생식물원,동백원,수국원,습지원,왜생 침엽수원,겨울정원,호랑가시나무원,우드랜드,무늬원,억새원,암석원,마취목원,자생식물원,노루오줌원,만병초원,클레마티스원등 18개로 구성되어 있다.국립광릉수목원( 600만평)과는 여러가지로 비교되고 있다.
또한 2001년부터 수목원 전문가 양성교육을 시작하여 2009년에는 산림청으로부터 2013년에 산림생명자원교육센터로 2014년에 환경부로 부터 생물다양성관리기관으로도 지정받았다. 천리포수목원은 설립이후 연구목적이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비개방 수목원이었으나 2009년 3월1일에 7개의 관리지역중 첫번째 정원인 밀러가든(Miller Garden)을 개방하여 2010년에는 밀러의 사색 길과 목련원을 추가로 개방하였다.
민병갈기념관 홀리카페는 2층구조의 건물로서 2층에는 민박사님이 한국에 와서 수목원을 조성하는 과정과 생활하였던 흔적이 담겨있는 자료와 유품이 전시되어 있고 1층에는 과자 및 커피를 마시며 쉴 수 있는 휴식공간과 곤충표본 집처럼 나뭇잎 표본집도 벽면에 걸려 있다.또한 2층은 박사님이 수목원을 조성하여 관리하면서 집무실로 사용했는데 사방이 확 트여 있으며 빛바랜 식물도감( 한국어), 일련번호가 며겨져 있는 수목의 목록집(영어 )과 박사님의 유품으로서 수집한 고가구, 골동품, 민예품, 미술품 등이 명함,손목시계,돋보기 안경,쌍안경 등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경내에는 미리 예약하면 숙박할 수 있는 여러 채의 가든스테이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소나무집은 바로 눈앞에 바다를 끼고 있어 천하의 절경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아 보는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라 입구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는 잠깐 들러 눈요기만 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안면도 백사장에 있는 식당가로 향했다.
안면도는 현재 연육교로 연결되어 이미 섬이 아니라서 그런지 횟집과 관광버스 및 관광객들로 북적대고 활기가 넘쳐흘렀다. 그시간 동안의 자유시간에 각자 알아서 점심을 해결하고 주머니와 상의해서 젖갈과 건어물을 사고 이곳저곳을 둘러봐야 했다. 나도 점심해결 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안면도 특산물이 대하와 꽃게라서 이름 붙여진 " 대하랑 꽃게랑 인도교"에 똬리 지그재그로 올라가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다리밑에서는 강태공들이 고기를 낚고 있었다.가는 길에 해미읍성을 옆으로 끼고 통과하여 마지막코스인 개심사입구에 도착했다.백제시대에 창건된 개심사는 충남지역 4대사찰로서 고색이 창연하다 또한 김일엽스님의 청춘을 불살랐던 예산 수덕사의 말사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의 특색은 쇼핑위주의 관광에서 벗어나 차분하고 실속있는 여행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여행사도 관광목적을 충실히 이행하고 여행객도 각자 기본질서를 지킴으로서 선진 문화사회로 나가기를 기대하고 싶을 뿐이다.
*약력 = 추가 국제펜클럽회원 넣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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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여행을 다녀 오셨군요. 한번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