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타 조에쓰3 - 벚꽃이 만개한 다카다성을 구경하고 오다가 결혼식장을 보다!
여행 11일째인 2019년 4월 14일 새벽에 일어나 걸어서 니가타현 조에쓰시 다카다공원 안에 자리한
다카다성 을 찾아 가는데 강에 이르니 먼 산에는 눈 이 쌓였지만 강변에는 벚꽃 이 만개했으니
화려하기 짝이 없는데... 2년전에 왔을때는 초여름이라 강에 벚꽃 대신 연꽃 이 피었던걸 회상합니다.
다카다성의 해자 인 강 에 놓인 붉은색 다리 를 건너 가니 개중에는 막 분홍빛깔 연꽃 이
피어나는 모습도 보이고 춘하추동을 읊은 시비며 조각상 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오늘은
벚꽃이 만개한 강변 을 걸어서 중세 시대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다카다성 高田城 을 봅니다.
연(蓮) 은 전쟁과 흉작 으로 빈궁해진 16 ~ 17세기 센고쿠(戰國 전국) 시대에 다카다한 高田藩
(고전번) 의 재정 을 세우기 위해서 다카다성 바깥 해자에 연을 심어 연근 을 수확한
것이 시작이라고 합니다. 다카다성 해자에 연꽃 은 아름다움과 규모에서 동양 제일
이라니 해마다 연꽃 이 피는 7월 하순 부터 8월 16일 까지 연(蓮) 마쯔리 가 열린다고 합니다.
다카다성 (高田城 고전성) 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6남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松平忠輝
가 부임해 1610년에 축성했는데 설계와 감독은 다다테루의 장인 인 센다이의
다테 마사무네 가 도와준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다테 마사무네는 센다이의 용 으로
2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일본의 주인 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야심찬 인물이라고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돈 이자 센다이번의 번주 인 다테 마사무네 는 일본 동북지방
의 미야기현에 센다이시 를 건설 한후 태평양을 넘어 "에스파냐와의 통상" 을
꾀했으니... 1613년 센다이 영내를 방문한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의 사절
세바스티안 의 협력을 받아서는 갤리온선 인 "산 주앙 바우티스타호" 를 건조합니다.
에도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인 을 얻은 마사무네는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를 사절 로 임명해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 (세례명 돈 펠리페 프란시스코) 등
180명이 탄 배는 쓰키노우라(月浦) 에서 출항해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 아카풀코 에
상륙후 내륙을 걸어 베라크루즈 에 도착해 이번에는 스페인 배를 타고 대서양 을 건넙니다.
센다이 번주 다테 마사무네 의 사절 하세쿠라 쓰네나가 는 세비야에서 스페인왕을 알현 하고
다시 지중해를 건너 로마 교황도 알현 했는데 17세기에 일본인이 로마 교황 을
알현한 사실은 일본의 외교사에서도 특필되고 있는 실적으로 7년후에 귀국 하니....
일본에 천주교 금지령 이 내린지라 그의 이름은 과자 하세쿠라 야키 로만 남았습니다.
지금도 스페인 세비야 근교 코리아 델 리오 (Coria del Rio) 에는 하세쿠라를 따라갔다가
그리스도교인 생활을 갈망해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고 머무른 센다이 번사 6명의 후손
800여명 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일본” 을 뜻하는 “자폰 Japon” 을 성씨로 삼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유럽에 사람을 보낸건 이보다 더 빠른 임진왜란 10년전인 1582년 인데....
13세의 신학생 소년 4명 을 포함 12명 이 나가사키 를 출발해 인도와 희망봉
을 돌아 포르투갈 스페인을 경유해 3년후 로마에 도착해 교황을 알현 하고
3년간 유럽에서 공부한 후에 1590년 서양 문물를 가지고 일본으로 귀국 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일본 상인 들은 임진왜란 이전에 벌써 동남아로 진출해 필리핀, 베트남, 태국
말레이 에 거류지 저팬타운 을 건설하고 무역 에 종사했으며 태국 아유타야 저팬타운
사람들은 칼을 들고 태국 왕위계승 전쟁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는데.... 그 이전인
14세기 무렵에는 고려(조선) 와 명나라 해안 지대를 약탈하는 해적 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저팬타운 을 생각하니 유원모 기자는 D 일보에 “왜인 2500명 상주․․․ 조선시대 최대규모 ‘저팬타운’”
이라는 기사를 썼습니다. "15, 16세기 조선과 일본의 자유무역 지대였던 ‘삼포왜관(三浦倭館)’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제포왜관 터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한일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조선과 왜(일본) 의 선린 우호 교류 를 보여 주는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 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조선 초부터 사량진왜변 이 발발하기 전까지 운영한 제포왜관 터를 확인" 했으니 창원시 제덕만과
인근 냉이고개 사이에 위치한 7302 m² 4층 규모로 조성된 계단식 지형 이 확인됐다. 축대와
담장, 기단 건물지 등 주거지 관련 유적뿐 아니라.... 당시 사용한 도자기와 기와 파편 등
수백 점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조선시대 왜관의 실제 유적지 를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한반도의 일본인 집단거주지, 조선시대판 ‘저팬타운 ’7일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의 냉이고개. 서남쪽으로 제덕만이, 남쪽으로는 대규모 제포왜관 터 가
아래에 놓여 있었다. 새 주둥이처럼 생긴 U자형 해안 마을 인 이곳에는
500여년 전 2500여명의 왜인(倭人)이 집단으로 거주 했다. 바로 제포 왜관 이다. "
웅천읍성 을 비롯한 진해 의 내륙 지방이 벌판처럼 펼쳐졌다. 냉이고개 능선 에는 150m
토성 이 쌓여 있었다. 왜인들이 몰래 조선 내지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제덕 토성’ 이다. 15세기초 조선 조정은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 의
침탈 이 골칫거리 였다. 이에 일부 지역에 왜 와의 자유무역지대인 왜관 을 설치했다
1407년 부산포와 내이포(제포) 2개 포를 개항하고, 1426년 울산 염포 를 추가로 개항해 ‘삼포 왜관’
체제를 갖췄다. 당시 왜관은 말 그대로 일본인 집단 거주지 였다. 일본 자료 ‘중세왜인전
(中世倭人傳)’ 에 따르면 1494년 제포왜관에는 347가구, 2500여 명의 왜인 이 머물렀다.
같은 시기 부산포왜관은 453명, 염포왜관에는 152명 에 머무른 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큰 규모였다.
그간 제포를 비롯한 삼포왜관은 신숙주 (1417∼1475)의 ‘해동제국기’ (1471년)에 수록된
고지도 등에서 위치를 추정해 왔다. 이날 동행한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은 “당시 조선 정부는 왜인들이 몰래
내륙으로 들어와 밀매를 하거나 약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덕토성 을 쌓고 왜관을 통제했다”
“ ‘해동제국기’ 에 표시된 모습 그대로 제포왜관과 제덕토성, 감시초소 등이 대거 확인됐다” 라고 설명
했다. “공단 위해 도로 개설” vs “역사관광자원 활용” 제포 왜관 터에서 발견된
‘대명정덕팔년춘조 (大明正德八年春造 · 조선은 독자 연호를 쓰는 일본과 달리 중국 연호를 썼음)’
1513년 제작된 기와 라는 뜻으로 학계에서는 당시 이곳에 지은 건물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 제포왜관 발굴 현장에서는 객사 등 관공서 건물로 추정되는 길이 24.6m, 너비 11.9m
규모 건물터가 확인됐다. 유물 가운데는‘대명정덕팔년춘조 (大明正德八年春造)’
라고 적힌 기와 가 눈에 띈다. ‘정덕’ 은 중국 명나라의 제10대 황제인
무종 (재위 1505∼1521년) 황제의 연호 로 1513년 봄에 만들어진 기와라는 뜻이다.
제포왜관 이 500여년 만에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은 상대적으로 개발이 더뎠기 때문이다.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이 제포왜관 터에서 동남쪽으로 3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웅동경제자유구역과 국도 2호선을 잇기 위한 간선도로 개설하면서 유적지
가 발견됐다. 문화재위원회는 최근 제포왜관 터를 경남도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권고했다.
부산진해경제청 관계자는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쳐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이청규 한국고고학회장(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은 “한반도에 남아있는 일본 관련
유적 은 대부분 치욕의 역사 를 상기시키는 반면 제포왜관 은 조선이 교역을 희망
하는 왜에 토지를 할애하고, 건물을 조성한 유적지 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일본 지방의 일개 영주(다이묘, 번주) 가 어떻게 서양식 배인 범선 까지
건조해 수만리 떨어진 유럽에 사신 을 파견하나? 이는 일본 전국에
260여명이 넘는 영주 들이 사실상 "국왕" 이었기 때문이니... 번주(영주)
신분은 자식으로 "세습" 되며 대를 이어 충성하는 가신과 무사 들을 거느립니다.
영지에서 세금 을 징수해 가신과 무사들에게 녹봉 을 지급하며 백성에게 사법권 을 행사
하고 이웃나라와 외교 를 하여 혼인 동맹 을 맺으며 군대를 양성해 이웃 지방을
침략해 영토 를 넓히는데... 일본에서 忠(충) 이라고 하면 일왕(천황)이나 막부
쇼군이 아닌 지방 영주(번주)인 다이묘 에게 바치는 것이니 유럽의 봉건제 와 흡사 합니다.
일본 260여개 번에서 백성들이 이웃 번으로 장사나 여행 을 가자면 사전에 번주(영주)
다이묘에게 허락을 받아 여권인 통행증 을 지참하는데... 이웃 번과의
경계에 "관소" 를 설치하고 통행증 검사 와 소지한 물품에 "관세" 를 거두었습니다.
1636년 다테 마사무네 가 병으로 죽었을 때에 함께 죽어 무덤에 같이 묻힌
"순사자" 는 가신 15명에 배신 5명 합하여 스무명 이나 되었으니....
저승에 함께 따라 가서라도 주군을 모시겠다는 갸륵한(?) 忠(충) 이라?
젊은 시녀 5명은 몰라도... 늙은 가신들은 진심 이니 스스로 자원 했다고 합니다!
장인 인 다테 마사무네 에게 영향을 받아 대외 팽창을 꿈꾸는 욕심을 부렸던 다다테루 는
쇼군에 대항했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 당하고 구금된후 유배 에 처해지는데
여러 유배지를 돌아다니다가 최종적으로는 시나노의 스와 에 정착하였으니...
히데타다 치세에는 대우가 나쁘지 않았고 3대 쇼군 이에미쓰 경우에는 집 까지 지어줍니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는 스와에서 60년간을 평화롭게 살다 1683년 향년 91세로 사망하는데
문예, 노래, 춤 등 기예에 뛰어났다고 전해지며 위 사진에 나오는 御用(어용) 은...
번주는 영지에서는 사실상 왕 으로 무사들은 천황이나 쇼군 이 아닌 번주에게 충성 했지요?
이에야스의 7남, 8남은 어린나이에 사망하였으나 그 다음인 9남 요시나오는 오와리번,
10남 요리노부는 기슈번 그리고 11남 요리후사는 미토번주 가 되었는데... 에도
종가에서 대가 끊어지면 쇼군 에 오를수 있으니 고산케 (御三家 어삼가) 라 불립니다.
다카다성 은 메이지 시대 육군 13사단 의 주둔지 로 사용된 탓에 성루 및 해자가 매몰
되어 혼마루를 포함해 성루, 해자 일부만 남아 있고 공원으로 정비되었는데
현재는 옛날 성의 서쪽 반 정도 만 남아 있으며 3층 망루 는 1993년에 재건 했습니다.
다카다성 을 나와 돌아오다가 골목길에 단독 주택 들이 늘어서 있는데 도둑이 없는지
"담장" 이 없거나 있어도 나지막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아파트가 대세이지만
예전에는 단독주택이니 도둑이 많은지라 높은 담장과 철대문 을 갖추고 담장 위에는
쇠창살 이나 혹은 유리병을 깨어 유리조각 을 빈틈없이 꽂아 두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또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자동차 를 도로변은 물론이고 골목 자기집 앞에도 일체
주차 하지 않는지라, 집을 들여지어 집집마다 주차장 을 갖춘 것을 봅니다.
예전에 도로 까지 붙여 지어진 집에서는 1층을 부수어 3대 가량의 차를
집안 1층에 주차 하니..... 이웃 3집 가운데 한 집만 1층을 부수면 되는 것이지요!
일본에서는 직장에 주차장이 20면 가량 되면 교장이나 사장등 임원만 차를 주차할수
있고 나머지 일부는 사무실 공용차 나 업무차 들르는 기관이나 업체 차량
그리고 나머지는 학부형 방문시 사용한다니 교사나 회사원등 직장인들은
자가용은 집에 세워두고.... 자전거나 전철 로 출근하는게 일반적 이라고 합니다.
초등학교를 지니고 골목길을 걸어서 이윽고 대로로 나오니 현대식 건물이
보이고 웨딩드레스 를 입은 신부의 사진 아래에 “Duo Cerezo"
라고 적힌 글귀를 보는데...... 듀오란 듀엣 일테지만.... 세르조란 벚꽃???
일본에서는 신사(神社) 에서 양가 부모와 가족등 소수가 참석해 전통 결혼식 을 가진
다음에 이처럼 예식장이나 또는 레스토랑 에서 초청장 회신을 받은 사람 들을
대상으로 피로연을 겸한 결혼식 을 또 올린다니..... 그 비용이 만만치 않을 터입니다?
유럽은 독일처럼 대학 학비가 완전 무료 이거나 프랑스 처럼 고등학교 수준 의 학비를
받으니 별 부담이 없지만 미국은 학비 를 내야 하니 본인이 대출 을 받고
졸업후 갚는게 원칙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미국의 젊은이들은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하는지라 재학 중에 휴학하고 군에 입대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대학교에 다니다가 휴학하고 군에 입대한 젊은이가 인종학대로 매스컴 을 탔으니,
"벌거벗겨진 채 얼굴이 가려진 이라크인들의 맨몸을 담배를 입에 물고 손가락질 하며
웃는 여군, 나체의 이라크인 인간 피라미드 앞에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는 여성…"
"전 세계를 분노에 떨게 한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에 연루된 미군들
중 유일한 여성으로 관심을 모았던 린다 잉글랜드 이병(21) 은 사진 속에 드러난
‘악마성’ 과 달리 평소 학구적이고 성실했던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버지니아주 출신으로 대학 진학을 위한 학비를 벌기 위해 입대한 여성 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에서는 유럽이나 마국과는 달리 부모가 학비를 부담해야 하는
걸로 인식하는데, 대학 졸업후 결혼은 일본에서는 본인 책임 이지만...
한국에서는 그것마저도 부모가 일부 를 부담하니 세계에서 가장 힘들었는데,
최근 미국과 유럽도 취직이 힘드니 부모 집에 세들어 사는 젊은이 들이 는다고 하네요?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은 고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하든 대학 진학을 하든 상관없이
부모에게서 독립 하며 동양에서도 일본은 대학 졸업후에는 홀로 서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결혼식 때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손주 까지 돌보아 주는 것이라?
일본인들은 어릴때 부모로 부터 반복해서 받은 첫번째 교육이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 는 "히또니 메이와쿠오 카케나이" ひと)に迷惑めいわく をかけない 이니!
일본에서는 자식은 결혼식 때는 부모에게 손벌리지 않고 본인 책임 으로 한다고 합니다.
그 때문인지 이후 손주를 돌봐 달라는 그런 부탁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부모
또한 자식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려고 부양을 바라지 않으니 따로 사는 것이라,
"히또니 메이와쿠오 카케나이" 는 남에게는 물론 부모와 자식간에도 유효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은퇴후 5년 정도 살았지만 지금은 30년은 살아야하는 시대에... 한국에서도
이제는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지 않으니 몰빵했다가는 만년이 비참해 지는 것이라!
그러니 우리나라 부모들도 저 돈을 아껴 자신의 노후생활비 를 저축 해야 할러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