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의 기사입니다.
혜종 2년(945)
○ 대광 왕규(王規)의 딸이 태조의 열여섯째 비가 되어 아들 하나를 낳으니 광주원군(廣州院君)이다. 어느 날 왕규가 왕의 아우인 요(堯)와 소(昭)가 반역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참소하였으나, 왕은 그것이 무고임을 알아 그들을 더욱 두터운 은혜로 대우하였다. 이때 사천공봉(司天供奉) 최지몽(崔知夢)이 아뢰기를, “유성(流星)이 자미성(紫微星)을 범했으니 나라에 반드시 역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왕규가 요와 소를 해치려는 징험인 줄 짐작했으나, 역시 왕규를 죄주지는 않고 이내 맏공주를 소의 아내로 삼아 그 세력을 강성하게 하였다. ……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도모하여, 일찍이 밤에 왕이 깊이 잠들었는가를 엿보고 자기 편을 보내어 몰래 왕의 침실 안으로 들어가 왕을 해치려고 하였는데, 왕이 잠에서 깨어나 한 주먹으로 그들을 때려 죽이고 측근에서 시중하는 신하를 시켜 끌어내게 하고는 다시 묻지 않았다.
어느 날 왕이 병환이 나서 신덕전(神德殿)에 있는데, 최지몽(崔知夢)이 또 아뢰기를, “가까운 시일 내에 변고가 있을 것이니 곧 옮기셔야 합니다." 하므로, 왕이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옮기었다. 왕규가 밤에 사람을 시켜 벽에 구멍을 뚫고 왕의 침실에 들어오니 방은 벌써 비어 있었다. 왕은 왕규가 한 짓인 줄 알면서도 역시 그를 죄주지 않았다. 그 후에 왕규가 최지몽을 보자 칼을 빼들고 꾸짖기를, “임금이 침실을 옮긴 것은 반드시 너의 꾀일 것이다." 하였다.
왕은 왕규의 역모가 있은 후로는 의심하고 꺼려하는 바가 많아 항상 갑사(甲士)에게 호위하도록 하고, 기뻐하고 성냄이 일정치 않았으며, 소인들이 한꺼번에 등용되고, 장사(將士)에게 상을 내려주는 것이 절도가 없으니, 조정 안팎이 한탄하고 원망하였다.
○ (그해 9월 무신일에 혜종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기유일에 왕규가 대광 박술희(朴述熙)를 죽였다. 술희는 성품이 용감하여 나이 18세에 궁예의 위사(衛士)가 되었으며, 후에 태조를 섬겨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유명(遺命)을 받아 혜종을 보좌하였다. 혜종이 병환이 나자, 드디어 왕규와 서로 미워해서 군사 백여 명을 데리고 다녔는데, 왕이 그가 딴마음을 품었는가 의심하여 갑곶(甲串 경기 강화(江華))으로 귀양보냈더니, 왕규가 이어 임금의 명이라 속이고 그를 죽였다. ……
○ 왕규가 처형을 받았다. 그전에 왕이 왕규의 역모를 알고 은밀히 서경(西京)에 있던 대광 왕식렴(王式廉)과 모의하여 변고에 대비하게 하였다. 왕규가 난을 일으키려 하자, 왕식렴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호위하니, 왕규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왕규를 갑곶으로 귀양보냈다가 사람을 뒤쫓아 보내어 그를 베어 죽이고, 그 도당 3백여 명을 베어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