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야곡’(1951) - 신세영 노래
12.06.25
“전선야곡”(戰線夜曲, 1951)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노래 신세영
(1)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거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 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
(2)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수 떠 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여 울었소.
아~ 쓸어안고 싶었소.
(3)
방아쇠를 잡은 손에 쌓이는 눈물
손등으로 씻으며 적진을 노려보니
총소리 멎어버린 고지 위에 꽂히여
마음대로 나부끼는 태극기는 찬란해.
아~ 다시 한번 보았소.
‘전선야곡’ - 신세영 노래
‘전선야곡’ - 은방울자매
전선야곡(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신세영 노래, 1951년 10월 발표).
‘불멸의 보초가’로 병영 막사에서 군가보다도 많이 불리는 ‘전선야곡’의 가수,
그리고 ‘청춘을 돌려다오’의 작곡가이기도 한 신세영 선생(82). 지난 4월 18일,
대한가수협회 원로가수 회장으로 재선출되어 또다시 원로가수들의 권익과 가요계 발전을
위한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나이를 잊은 듯 완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신세영 선생의 활동을 재조명해본다.
‘신세영’이라는 예명은 당시 유명가수들이었던 申카나리아의 ‘申’, 장世정의 ‘世’, 이난影의
‘影’자를 한 글자씩 조합해 만든 이름이다. 흔히 그를 일컬어 ‘해방 이후 현인에 이어
두 번째로 가수가 된 인물'이라 칭한다.
그도그럴것이 당시엔 음반을 찍어낼 물자와 시설이 턱없이 부족해 누구나 쉽게 음반을
낼 수 없었던 탓이다. 그만큼 가수 또한 귀했던 시절이다. 1948년,
대구 오리엔트 레코드사를 통해 데뷔곡 ‘로맨스 항로’를 발표한 데 이어 ‘병원선’,
‘무영탑 사랑’, ‘이백리 푸른 달밤’, ‘십자성’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신세영의 본명은 정정수. 그는 1925년 광산업을 하는 부친 정자경과 포목점을 운영했던
모친 김옥경 사이 3남매 중 외아들로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어릴 때 대구로 이사했다.
운동신경이 뛰어나 복싱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콩쿠르에 참여하면서부터 점차 노래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이 무렵 이재호, 백년설, 이인권 선생 등 대가들을 만나게 되면서 가수에의 꿈을 한껏
키우던 1945년 초, 해방을 불과 얼마 앞둔 시점에 그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징집된다.
이때 평소 아껴주던 백년설씨가 역까지 마중 나와 어깨를 두드려주며 ‘외동아들인
만큼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고 당부하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고 회고한다.
그뒤 만주 봉천을 거쳐 항구 전선에 투입되는데 이때 그는 ‘B 29’의 폭격을 받아 대부분의
전우들을 잃고 그도 역시도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으로 이송, 생사의 갈림길에서
감격적인 해방과 일본 패망 소식을 듣는다.
이 무렵 그는 정신대의 참혹상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더구나 그 주인공 중
한 여성을 최근 서울 방송국에서 다시 재회하는 감격을 맛보기도 했다. 이역만리에서
통한의 시간을 보냈던 정신대 할머니와 징용군이었던 신세영씨, 당시 절박한 상황만큼
60년 만의 해후는 믿기 어려려우리만치 감동적이었으리라.
일본 패망과 함께 중국에서 한달 반 가량 수용소 수감생활을 거친 뒤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전개하던 때 그의 대표곡 ‘전선야곡’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에
취입한 노래다. 그리고 이 노래는 그에게는 개인적으로 대표곡 이상으로 의미가 각별하다.
취입했던 바로 그날 어머니가 운명하셨기 때문에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항시 목이 메였다고 한다.
‘전선에서 그리는 고향 어머니’에 대한 심경을 고스란히 담은 이 ‘전선야곡’은
대표적인 전쟁가요로 그 무렵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길가다가도 느닷없이
징집되어 전쟁터에 나선 바람에 정작 어머니 얼굴조차 뵙지 못보고 고향을 떠난
이들도 적지 않았던 탓이다. 때문에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하는
부분에서는 특히 가슴이 북받쳐 올라 부르는 이도, 듣는 이도 함께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희생을 강요했다. 그 역시 이듬해 정훈국 공작대에
소속되어 국군들의 작전을 따라 최전방 덕천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에게 포위되었는데,
이틀 만에 탈출하는 등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이때 생사를 함께 한 7사단 군예대원
중에는 가수 손인호씨도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작곡 활동도 함께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노래가 ‘청춘을
돌려다오(신행일, 현철, 나훈아 등 취입)’, 그 외에 ‘정처 없는 방랑자(최무룡)’,
‘화전민(배호)’, ‘비에 젖은 로맨스(안다성)’ 등을 작곡했다.
가족은 부인 박목련 여사와 슬하에 2남 2녀가 있다. 특히 장남 정태진씨는 한때
‘태일’이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하며 그의 작곡인 ‘추억의 동백섬’과
‘남포동 소야곡’과 ‘저 달이 엿볼까봐’ 등을 발표했다. 나머지 가족들은
지난 1974년 미국으로 이민하였고 이어 신세영씨도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가
가족들과 합류한 이후 틈틈이 한국을 오가다가 3년 전 2004년에는
비자를 반납하고 귀국했다.
‘묻혀도 한국 땅에 묻혀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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