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의 서정(敍情), 시적 에티카(Poetic Ethica)를 위해:
배정웅의 ‘아메리카’ 시 읽기
강수영(영문학자, 재미 문학평론가)
1. 디아스포라, 시를 쓰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멈추지 않는다. 디아스포라는 경계를 넘어 움직인다. 디아스포라는 바깥의 존재이다. 정의상 ‘이산(離散)’을 의미하며, 애초 망명 유대인을 일컬었던 디아스포라는 20세기 후반 전지구화 시대에 유대인 뿐 아니라 흑인노예, 아르메니아와 팔레스타인 난민 등 역사적 정치적 풍랑을 겪으며 민족국가의 경계선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과, 상업적 혹은 교육적 목적의 자발적 이민자까지 확장, 적용된다. 근대의 시작과 함께 견고하게 틀을 다져온 단일국가의 장벽은 디아스포라의 물결로 구멍이 뚫려간다. 재일한국인 작가 서경식은 디아스포라를 ‘근대이후’를 살아갈 인간의 존재형식이 구현된 것이라 한다. 디아스포라는 그러므로 존재의 미래완료형이다.
한반도의 20세기는 민족과 디아스포라, 두 겹의 이야기를 써왔다. 왕조체제가 무너진 후 근대적 국민국가를 향한 도정은 고통스러운 식민과 분단을 통과해서 한인디아스포라를 낳았다. 중국과 만주, 일본과 아메리카 등지를 향한 이주민과 망명인 들이 국경을 넘었다. 국경 안에서 ‘민족’을 외치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국경 밖으로 민족의 주변인, ‘나’와 닮은 타자가 늘어갔다. 경계 밖은 언제나 또 다른 경계 ‘안’이 된다. 삶의 터전을 찾아 땅과 물을 바꾼 디아스포라는 이 낯선 ‘안’에서 소수자 이방인으로 머문다.
미국의 한인이주역사가 이미 백년을 넘어섰다. 하와이 사탕수수밭의 일꾼, 캘리포니아의 과일노점상, 농부, 소매상, 목회자, 지식인, 또는 정치적 망명객의 신분으로 재외한인은 이주의 역사를 써왔다. 디아스포라는 복화술을 하듯 모국어를 품고 ‘고향’을 그리워한다. ‘고향’은 그들의 꿈에, 기억에, 무의식적 갈망 속에 머문다. 그러다가 모국으로 애써 돌아와 마주친 현실은 ‘고향상실’이기 마련이다. 떠남과 돌아옴 사이에서 서성대는 디아스포라의 감성을 시인 배정웅은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아직도 귀가할 수 없다.
대전차 장애물로 지은 한반도의 아파트를 뒤에 두고서, 총구를 거꾸
로 잡은 일단의 군인들을 뒤에 두고서, ..(중략)
이렇듯 아득히 뒤에 두고 멀어지기만 해서 나는 귀가할 수가 없다.
돌아가도 다시 집 지을 수 없다, 집 지을 수 없다.
-- 「남미통신 31 - ‘96서울에서」중에서
디아스포라에 불가피한 상실감과 ‘뿌리뽑힘’의 정서는 문학을 통해 기록된다. 우리 문학은 벌써부터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증언해왔다. 가령 20세기 초 한설야의 단편소설「과도기」는 만주에서 귀향한 창선이 말 그대로 사라져버린 ‘고향’앞에서 망연자실한 모습을 그려냈다. 앞에 인용된 배정웅의 시는 디아스포라 주체가 맞닥뜨린 정주(定住)의 어려움(“집 지을 수 없다”)을 시인 특유의 열거와 반복 효과를 통해 극화해냈다. 디아스포라의 심신에 각인된 그리움과 상실감, 특히 이 시가 고백하고 있는, 디아스포라에 고유한 어떤 ‘불가능성’은 불가피하게 문학의 언어를 요구한다. 역사의 연대기적 기록은 사실(fact)을 담아내지만 진실(truth)을 위한 언어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디아스포라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디아스포라의 복화술적 언어는 시적(poetic)이다. 박탈과 소외, 상처와 갈등, 그리움과 기다림, 꿈과 기억은 시가 될 수밖에 없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구분해보면 산문이 대체로 서술적 언어로 진술과 설명, 분류와 정리정돈을 지향한다면, 시는 날것 그대로의 체험과 정서를 비유와 이미지라는 뜰채로 건져 올린다. 미국 내 한인문학이 시와 산문 - 주로 수필과 칼럼- 에 집중되어 있고, 특히 시 장르에서 생산성이 높은 현상은 디아스포라문학의 특수성에 대해 시사해주는 점이 많다.
그 중에서도 필자가 주목하는 배정웅의 시는 소위 ‘동포문학’에서 흔치않은 ‘탈주’(flight)의 궤적을 보여준다. 근대의 산물인 국민국가의 국경선과 시민권의 법적 경계선을 넘어서는 시인의 상상력은 어떤 고정된 의미에 붙잡히지 않고, 시인의 언어는 한국어와 스페인어를 접합시켜 이질적(heterogeneous) 텍스트를 생산한다. 아메리카의 낯선 문화를 품은 주석이 달린 시들을 읽기 위해서는 색다른 문화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익숙하지 않은 이방(異邦)의 문화는 종종 한국의 역사, 전설 등과 결합되면서 ‘디아스포라 시’를 생산한다. 나는 배정웅의 시가 디아스포라문학의 전범(典範)을 제시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그의 시에서 발견한 디아스포라문학의 맹아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이제 곧 도래할 문학의 가능태를 상상해보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 특히 풍부한 이야기, 간(間)문화적 이미지와 짙은 서정적 어조에 담긴 시적 언어의 음악성에 집중해서 배정웅의 시를 읽어 보겠다. 이 과정은 단지 내용적 차원에서 디아스포라 경험의 중요성 뿐 아니라 언어예술로서의 시와 문학적 윤리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
2. 빈센트와 뻬드로를 기억하기: 서정시의 서사적 확장과 ‘타자의 윤리’
디아스포라의 문학은 짧게 잡아 20세기초엽부터 주류문학에 등장했지만 늘 국민국가의 경계에 귀속된 문학의 범주들로 분류되어 왔다(가령 서구문학의 경우 카프카, 조이스, 헤밍웨이 등을 떠올려보라). 디아스포라는 근본적으로 재현불가능하다. 디아스포라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문학을 비롯한 예술영역에서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재현하는 기획은 최근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우리의 사고와 재현양식이 민족, 인종, 계급, 성 등 근대성의 범주들에 오래 의존해왔기 때문에 근대성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디아스포라는 종종 현존하는 재현체계를 통해 가시화되지 못한다.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둘러싼 일련의 논의를 보면 디아스포라의 주체 역시 단일종족성과 다원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를 디아스포라가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변증법에 던지는 도전으로 받아들여 문학적 사유와 실천의 경계를 확장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배정웅의 시는 여러 면에서 한국디아스포라 문학의 맹아적 형태를 제시한다. 우선 그의 시는 튼튼한 시적 소화력을 갖고 있다. 그가 만들어내는 시적 ‘아메리카’는 한국적 정서와 기억을 통해 생산된 문학적 장소이다. 가령「신 남미통신 1」에서 시인은 국경마을에서 목각인형 삐까로를 보면서 고향의 천하대장군을 떠올린다. 시인은 고향의 기억에 머물기보다는 고향마을사람들이 “무색해져 돌아앉을 [목각인형의] 거대한 거시기”를 유머러스하게 다룬다. 이렇게 배정웅 시의 ‘아메리카’는 종종 어떤 지도나 정치 혹은 문화적 영토구획보다 생생하고 현실적이다. 그의 시에서 아메리카대륙은 수많은 인종이 교차하고 넘나드는 다문화적 생산지이며, 망명과 귀양, 이주와 월경(越境)이 일어나는 21세기 디아스포라 현장이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한국어로 시를 쓰는 일이 미국의 패권주의로부터 이 활기차고 다원적 ‘아메리카’를 떼어놓을 적극적 실천이 될 수도 있을 가능성을 느끼게 된다.
1970년대에 “느닷없이 한국을 떠나” ‘노마드’(nomad)로 떠돌며 살아온 그의 이력은 고유한 시적 세계를 형성한다. 시인 황동규는 배정웅의 시에 대해 “남미라는 외지의 삶과 직접 부딪친 것을 형상화”했다고 말한다. 삶과의 부딪침은 ‘사건’을 만들어 문학적 자양분을 제공한다. 황동규는 계속해서 배정웅의 시를 “여행시나 풍물시”로 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는데 이는 그의 시가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부딪침, 이 경우에는 이민의 경험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시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시인의 자서(自序)에 따르면 “황금과 사랑의 자유 같은 것을 찾아서 열정만 가지고” 남아메리카로 떠난 그는 그리스 신화 속 사이렌의 마술에 사로잡힌 듯 아직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그의 표현대로 디아스포라는 일종의 마술에 걸린 존재들인지 모른다. 그 마술은 ‘아메리칸드림’같은 성공신화의 신기루이거나 노예매매나 강제수용과 같이 외부적 폭력일 때도 있고 때로는 시인의 고백하듯 낭만적 사랑의 매혹일 수도 있다.
나는 사랑의 자유를 찾아 잉카의 나라로 건너왔다. 잉카의 나라는 마추피추보다 일리마니
보다 너무 높아서 높아서, 감히 오를 수가 없었다. 쳐다 볼 수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 사랑
의 자유도 너무 높아서 오르가즘에, 오르가즘에 오를 수가 없었다.
-- 「남미통신 36- 내 사랑에 대하여」, 전문
디아스포라의 발목을 묶어둔 마술의 실체가 무엇이든 일단 길을 떠나면 디아스포라 주체는 외부의 길을 내면화하게 된다. 배정웅은 아메리카 방랑의 경험을 두 권의 시집『새들은 뻬루에서 울지 않았다』(1999)와 『반도네온이 한참 울었다』(2007)로 묶어내어 자신이 지나온 길의 자취를 새겨놓았다. 이 두 시집 이후 써온 신작시들과 두 시집에서 자선한 시들을 함께 묶은 최근의 시집『국경 간이역에서』(2016)는 그의 ‘아메리카’ 시의 결정판이며 메타시적 통찰까지 담고 있다.
신세훈은 1999년 시집 발문에서 배정웅의 시를 ‘서사적 서정시’로 읽으면서 “시간과 공간, 조국과 남미의 음양정서로 엮어 복합적 대위법으로 풀어낸” 시라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배정웅의 서사적 서정시는 시의 두 가지 기둥인 서사와 서정을 결합시켜 복합성과 대위법을 스타일의 특징으로 나타낸다. 이를 디아스포라문학의 가능성이라는 우리의 관심사에 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서사성이란 대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역사성이다. 이 두 가지 서사성이 완벽히 구현된 호메로스의 영웅시에서 볼 수 있듯이 서사시는 원래 영웅의 일대기를 뮤즈에게 고매하고 웅장하게 읊어가는 형식을 갖는다. 호메로스의 시대에 시는 역사적 기록이자 이야기로 구전문학의 구술성과 음악성을 특징으로 한다. 배정웅이 자신을 “영웅은 아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오디세우스에 비유하는 대목은 매우 시사적이다. 더 이상 호메로스의 영웅시가 가능하지 않은 시대에 사회역사성이란 왕이나 전사(warrior)의 정복이야기에 담긴 모험과 전투 따위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시적 화자가 이국땅에서 목도하는 매우 구체적인 삶의 질곡이 서사의 자리를 차지한다.
멕시코에 가면 어떤 기차가 있다네
데드 트레인이라 부르는
은밀히 아주 은밀히 미국국경을 넘으려는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기차난간이건 지붕이건
가리지 않고 잠시 둥지를 틀긴 틀지만
차마 어쩌지 못하는 생의 졸음으로 한 해의 낙과처럼 떨어지기도 하고
사흘 밤 나흘 낮을 애리조나 사막을 넘다가
혹독한 더위에 목타서 쓰러지고 밤 추위에도 금방 쓰러진다네
(중략)
국경병원의 영안실에는 그렇게 죽어서도
두고 온 고향과 가족의 꿈을 끊지 못하고
차마 눈 감지 못하는 주검들이 누워있다네
내가 아는 볼리비아노 갓 스무살의 빈센트도
두어 해 전 그 기차를 타고 떠났다는데
그가 어디에 어떻게 안착은 했는지
아무도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네
그의 어머니 로사여사는 지금도 저자바닥에서 사람들을 붙들고
내 아들 못 보았느냐고 내 아들 못 보았느냐고
입안 누런 틀니를 오무작거리며 실성한 듯 묻고 다닌다네
-- 「멕시코 국경열차- 데드트레인」 중에서
배정웅은 서정시의 형식에 참담한 현실의 서사를 들여온다. 서정적 화자 ‘나’가 자신이 목도한 현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순간 서정시의 사적인 공간이 확장되어 타자와 공동체를 아우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서사적 확장은 시적 화자의 개인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볼리비아노” 빈센트는 익명의 희생자가 아니며, 다른 누구도 아닌 화자 ‘나’의 지인이기 때문이다. 자칫 추상적인 묘사로 치우칠 불법이민문제가 ‘나’라는 고유한 화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그가 불러내는 빈센트라는 개인이 데드트레인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겪는 ‘이야기’로 구체화된다. 더욱이 빈센트의 어머니를 묘사하는 대목에 이르면 그 이야기의 서정적 슬픔이 고조되고 “내 아들 못 보았냐고”를 반복하는 행에선 한국독자에게도 익숙한 아들을 잃은 어미의 심정이 공감을 자아내 보편성이 획득된다.
식모살이 갔다 주인에게 겁탈당한 14살 소녀의 아버지가 술에 취에 길에 누워 통곡하는 장면이 담긴「남미통신 26」에서도 이 서정적 화자가 등장해서 “내 친구” 빼드로의 이야기를 전한다. “내 원주민 친구 빼드로 딸은/ 이제 겨우 열너댓살/ 식모살이 간 사흘만에/ 에스빠냐 피섞인 주인에게/ 채 여물지 않은 몸/ 꼬까닢처럼 짓밟혔다/ (중략) / 딸아이 소식에 내 친구 빼드로는/ 알콜을 병나발로 불고/ 온갖 개떼가 어슬렁거리는 볼리비아 시장바닥에/ 큰 대자로 뻗어있었다/ 꽃다운 딸아이 짓밟힌 칙칙한 그 밤 속에 / 개똥벌레도 뜨지 않는 후진국의 그 어둠속에 갇혀서/ 갇혀서 무슨 짐승처럼 흐느끼고 있었다”. 시의 전반부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강간을 당한 어린 소녀의 배가 점점 불러오자 억지로 아이를 떼려고 민간요법을 무리하게 사용하다가 소녀는 응급실로 실려 간다. 이후 마지막 일곱 행은 소녀의 아버지 빼드로가 술에 취해 시장바닥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전하는데, 그 묘사가 서늘하다. 빼드로가 누워있는 곳은 “온갖 개떼가 어슬렁거리”고 “개똥벌레도 뜨지않”아 어둡고 칙칙하다. 이 후진국의 어둠속에서 빼드로는 “무슨 짐승처럼” 흐느끼고 있는데, 그 울음은 인간성의 한계를 넘어선 동물의 소리일 터이다. 이 일곱 행의 묘사는 여느 사실적 기록물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고통과 상처의 시적 진실을 전달한다.
배정웅의 서정적 서사시는 디아스포라 시의 한 형식을 예고한다. 그의 시적 화자 ‘나’는 자신이 체험하는 이민의 설움을 토로하거나 이국적 풍경을 스케치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이 화자의 어조는 설움을 담고 있되 자신의 헐벗은 이민생활뿐 아니라 그가 ‘친구’라고 부르는 현지인들, 즉 ‘타자’의 신산한 삶을 향해있다. 화자는 줄곧 디아스포라의 시선을 유지시킨다. 자칫 풍물기의 에피소드에 불과할 수도 있는 현지의 인물군상을 ‘친구’로 호명하는 순간 이미 배정웅의 시적화자는 어떤 윤리적 차원을 획득한다. 이 시적 윤리성은 화자가 타자와 ‘부딪치는’ 과정에서 일종의 디아스포라적 주체로서 그 만남을 서사화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진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을 잠시 빌어 설명하면, 이민자로서 개인화자가 현지인의 고통 받는 얼굴(아들 잃은 어미와 딸의 불행을 목도한 아비)과의 만남에 응답하는 것을 통해 비로소 디아스포라 주체가 된다. 그리고 타자와 주체사이에는 서러움의 유대가 생겨난다. 주체는 이민자로서의 자신 뿐 아니라 현지인의 서러움에도 반응하는 공감의 서정으로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며, 타자에 관한 이야기 표층 밑으로 한국적 경험과 기억을 환기시키는 이미지와 음악성을 갖춘 시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3. 서러움의 시작(詩作), 불가능한 언어를 마중하기
앞에서 소개한 두 권의 ‘아메리카’ 시집 각각의 표제작인「새들은 뻬루에서 울지 않았다」와「반도네온이 한참 울었다 - 탱고, 아르헨티나에서」는 남아메리카의 식민주의와 노예, 그리고 이주의 현대사를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시각으로 재구성해낸다. 새를 역사의 목격자이자 서러운 망명자에 빗대어 페루와 한국의 현대사를 연결시키는「새들은 뻬루에서 울지 않았다」에서는 3행과 4행에서 “우리처럼”이 반복된다. 이국의 현대사에서 비롯된 서러움을 담고 있는 시가 대명사 ‘우리’를 삽입시켜 한국의 역사를 불러낸다. 이 ‘우리’는「반도네온이 한참 울었다」에서 아르헨티나의 탱고를 보는 이주민으로 개체화된다. 탱고는 남아메리카의 식민주의와 노예제의 역사가 문화적으로 응축된 것으로 시적 화자는 춤동작에 매혹됨과 동시에 소외감을 느끼는 디아스포라적 경험을 “한참”, “조히”같은 부사표현으로 전달한다. 탱고 댄서의 다리가 얽혀 들어가는 모습을 강과 강의 만남에 비유할 때 모국과 정착지의 두 줄기 역사가 병치, 교접, 분산되어 독특한 간문화적 디아스포라의 텍스트가 출현한다. 이 두 시에서 이민자의 설움이나 향수는 정착지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여과되면서 구체적인 이야기와 장면으로 형상화된다.
이처럼 디아스포라의 시는 기본적으로 역사적 시공간에 기반을 둔다. 떠나온 모국(과거)과 생활의 터전으로 삼은 이식된 땅(현재)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며 고향상실성과 이민생활사이의 이원적 정서에 예리하게 반응하는 디아스포라적 감수성은 과거와 현재의 공존 속에 놓여있다. 기존의 동포문학은 향수문학으로만 한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디아스포라는 발터 벤야민의 저 유명한 짝짝이 눈을 가진 천사의 이미지(폴 클리의 그림)처럼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며 현재를 살아가는 복합적 시공간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고향상실성에의 예민한 감각과 이민생활의 꿈을 담은 미래적 지향성이 현재라는 시공간 속에서 편집, 재구성된다. 게다가 배정웅의 시에는 개인의 기억 속에 묻힌 저 먼 과거의 역사적 질곡도 디아스포라적 형상화에 포함됨으로써 그 시적 감수성이 배가된다. 시의 중요한 서사인 ‘아메리카’ 이야기의 우물 밑으로 부터 아시아대륙, 특히 베트남과 한국에서의 경험이 길어 올려 진다.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내 어릴적 어디서든 개구리가 울었다
마을 풀섶에서, 논둑에서 낭랑한 언어로
울음 울었다. 내가 혈기 방장해지자
베트남에서 빠빠이야 열매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로 개구리가 우는 것을 들었다
사람들이 저승에 가는 날은 더욱 섧게
우는 것을 보았다. 세월이 흘러서
까맣게 잊은 그 개구리 울음소리를
이즈음은 삐라이 강가에서 듣고 있다.
바람이 불면 우기(雨期)라도 예감하는지,
어드메 나무열매가 떨어져 그들의 곤한
잠과 생애를 깨우는지, 개구리가 더욱
자지러지게 울고 있다. 나도 잘 모르는
에스파놀어로 울고 있다.
-- 「남미통신 1- 볼리비아에서」전문
이 시가 암시하듯 배정웅의 디아스포라적 경험은 이미 베트남참전으로 시작되었다. 시의 화자는 남아메리카의 어느 강가에서 듣는 개구리울음소리에서 한국과 베트남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울다’는 표현이 4-5행 간격으로 반복 등장하는데 “울었다”-“우는 것을 들었다”-“우는 것을 보았다”-“울음소리를 듣고 있다”-“울고 있다”-“울고 있다”의 형태로 변화하면서 과거의 이중적 기억과 현재의 소리를 연결시킨다. 이런 변전의 중간에 화자는 ‘들었다’의 청각과 ‘보았다’의 시각을 연결시키며, 끝 세 마디에서는 ‘있다’가 세 번 반복해서 현재성을 강조한다. 처음의 ‘울었다’가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객관화시켜 부각시킨다면 그 뒤에 이어지는 ‘울다’의 변화과정은 주체의 경험에 집중해있고, 다시 마지막에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전면 부각된다. 마지막 행의 화자는 “에스파놀어”로 우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잘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이 대목은 기억에 관한 어떤 진실을 암시한다. 즉 기억은 근본적으로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경험이 늘 주체에게 이해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체의 이해여부와 무관하게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이 있고, 이 시의 ‘개구리소리’처럼 어떤 기억의 덩어리를 형성하기도 한다. 스페인어로 우는 개구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기억 속 한국과 베트남에서의 개구리소리를 화자가 남아메리카의 개구리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구리소리는 장소 불문 변함없기 때문이다. 마치 개구리가 현지 언어로 우는 듯이 감정이입을 통해 화자가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은 설명될 수 없고 무슨 뜻인지 모르는 기억이지만 의식차원에선 알 수 없는 어떤 진실을 가리킨다. 가령 “사람들이 저승에 가는 날은 더욱 섧게/ 우는 것을 보았다”는 대목은 ‘개구리소리’에 담긴 화자의 무의식적 기억을 암시한다. 물론 그 기억은 베트남참전과 관련되어있다. 다음 대목에서 화자는 자신이 “까맣게 잊은” 기억이 지금 강가에서 들리는 개구리소리로 다시 생각났다고 말한다. 세 가지 시점의 개구리소리를 대조, 병치함으로써 지나간 과거로부터의 괴리감과 뒤늦은 기억, 기억에서 풀려나온 현재의 소외감이 강하게 드러난다.
‘뻬루’에서 울지 못한 ‘망명자’가 강을 건너고 국경을 넘어 “남몰래 울음 울었”고, 레꼴레따 언덕에서 이민자가 타지의 음악을 들으며 서러워하고, 삐라이 강가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개구리울음소리를 듣는다면, 이 화자는 무엇보다도 필경 모국어를 그리워할 터이다. “꼬까울새”, “몸점박이 비둘기”, “검은 바람 까마귀”, “검은 이마 직박구리” “장다리물떼새” 등 한글이름을 불러주는 시「황홀한 모국어」는 새 이름의 향연이다. 시인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펌프질을 하기 위해 부었던 마중물을 회상한다. 기억 속 어머니의 사투리가 들려온다. “미물일망정/ 이렇듯 내가 먼저 저를 부르고 저를 반길 양이면/ 저 보이지 않는 땅 밑 지심 아득한 곳에서부터/ 찰랑찰랑 몸 흔들고 춤추듯 쏟아진다”(「마중물」). 마치 “저 보이지 않는 땅 밑 지심 아득한 곳”에서 오는 듯 시인이 부은 마중물에 비둘기, 까마귀, 직박구리, 떼새가 ‘황홀한 모국어’를 새로 차려입고 “찰랑찰랑” 춤추며 등장한다. 여기서 시인은 순수 한글 표현에 대한 흔한 칭송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 모국어에 매료된 사정은 사실 “시나 쓰는 바보”라서 “만년설을 화관처럼” 쓰고 있는 “안데스 산간마을에서/ 들개처럼 컹컹 거리고 산” 자신의 이력을 부끄러워하면서 모국어의 황홀함을 모르고 있었다는 자각 때문이다. 더욱이 시인의 모국어 재발견은 순수 한글이름의 새들도 “홍도나 흑산도나 어청도나 독도 울릉도”에 있다가 “청청바다를 건너 따뜻한 남국”으로 날아가면 “그곳의 낯선 풍속과 그곳의 이름”따라 불릴 것이라는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이런 태도는 순수 한국적인 것을 음미하면서도 다른 곳의 문화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문화와 문화사이의 틈새와 그 소통을 충분히 향유할 줄 아는 마음이다. 이 시에서 진정한 황홀감은 어떤 고양된 것, 즉 순수우리말이 주는 강한 매력에서 시작되어 새를 ‘호명하는’ 언어의 다양성에 대한 통찰력으로부터 새의 회귀본능이 우리말의 사투리에 담긴 “아득함”때문이라는 시적 감성을 뽑아내는 과정이다.
배정웅의 시가 담고 있는 이런 언어적 감수성은 모국어에만 머물지 않고 빈번이 등장하는 ‘에스노그라피적(ethnographical)’ 어휘와 소재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시에서 유칼립투스나무는 ‘에우칼립또’, 바퀴벌레는 ‘쭈루삐’, 아보카도는 ‘빨따’ 등으로 표기되고, 반도네온, 또보로치, 데드마스크 등 남아메리카의 고유한 문화형태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시적 에스노그라피는 언제나 시인의 디아스포라적 감성, 즉 떠나온 땅에 대한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민속설화라는 여과지를 통해 재구성된다. 그의 시는 이방(異邦)의 문화형태를 소개하거나 신기한 풍물로 다루지 않는다. 여타의 여행기와 배정웅의 시를 구별해주는 중요한 차이는 바로 ‘문화적 혼종성’(cultural hybridity)이다. 그의 시는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등지의 문물과 자연환경을 전경에 두고 한국적 정서와 문화로 그 의미를 견인해낸다. 다음의 시를 보자.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창틈으로 빼꿈히 건너다 보이는
에우깔립또 한 그루
바람이 불 적마다
아, 저건 살사춤이다
저건 메렝게 아니 꿈비아
저건 저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능수능란하게 추는 탱고다
하체는 거의 고정시킨 채 용이 될려다 만 이무기처럼
천의무봉의 상체로만
기이하게 흔들며 추는 춤의 달인
이윽고 어둠이 몰려오면
그 어둠의 손수건 자락으로
대낮에 흘린 땀을 닦으며
내일 또 다시 불어올 만만개 바람의 손을 잡아
껴안고 추스르고 어우러지고 보듬어
어떤 형식의 춤을 한바탕 추어 볼 것인가
그 리허설을 준비하느라 어떤 날은
어쩌다 관객이 된 한 생애 고요와 몽환의 깊은 잠 속
나까지 흔들어 깨우고
나까지 아닌 밤중에 춤바람 나게 하느니
-- 「에우깔립또의 춤」전문
시인은 유칼립투스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을 탱고에 비유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미완의 꿈을 안고 사는 이무기와 같다고 한다. 뿌리를 한 곳에 고정하고 상체만 흔들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기 때문이다. 정착해 있는 것들도 다른 세상으로의 꿈을 간직할 수 있다. 시인은 나무의 고정상태를 “거의”라는 부사의 수식에 묶어둠으로써 이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또 한편의 시「베니강에서」는 구렁이가 등장한다. 볼리비아의 베니 강에서 인디오들이 구렁이를 잡았는데 배를 갈라보니 어린 소녀가 들어있었다. 이 전설 같은 삽화에서 시인은 한국의 단군설화를 차용해서(“곰도 원시의 동굴에서 백일 동안만/ 마늘과 쑥을 먹고 기도하면 우리 같은 사람이 된다는데/ 바람과 해일을 자유자재로 부리던/ 저 구렁이의 꿈인들 얼마나 절절했으리”) 현재의 상태를 탈피 혹은 환골탈태하고 싶은, “이 세상 목숨 있는 것들의/ 未完의 꿈”(16-17행)을 상상한다.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목숨 있는 것들”은 모두 한 곳에 ‘거의 고정된’ 상태로 꿈꾸며 살아가다가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 뿌리를 뽑아들고 승천하고 싶지 않을까? 이 두 편의 시에서 ‘거의’라는 표현에 담긴 미완은 따라서 불완전이나 실패가 아니라 가능성이며 희망이 된다.
「에우칼립또의 춤」의 내용은 단순하다. 창을 통해 화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움직임을 보고 있다. 이 응시의 행위 속에서 시인은 탱고-이무기를 거쳐 마지막행의 춤바람이란 한국적 표현을 불러내어 화자의 출렁이는 내면을 형상화한다. 흥미롭게도 두 문화를 관통하는 시적 상상력을 표현한 이 시는 또한 시를 쓰는 과정에 대한 은유를 제공한다. 이 시에서 사물을 향한 화자의 응시가 관련 이미지와 비유를 불러오고 최종적으로 사물이 불러일으킨 화자의 내면적 변화를 드러낸다. 이처럼 한 편의 시가 시작과정의 은유가 되는 예는 최근시집『국경간이역에서』의 표제작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아르헨티나 국경으로 가는 열차가 느린 속도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데 조랑말, 망아지, 들개떼가 철로를 막아서고 간이역에는 잡상인들이 “마적떼처럼” 모여든다. 그 중 한 행상소녀가 화자가 앉은 자리의 차창으로 손을 들이민다. 구걸하는 소녀의 손을 보고 화자는 딸아이가 생각나 그 손을 살짝 쥐어본다. 이게 전부다. 여행 중에 일어난 간단한 일화지만 시인은 마지막 두 행을 이렇게 적는다. “마른 꼬까닢이 내 손안에서 퍼석거렸다/사람의 온기라고는 한 점 없었다.” 어린 소녀의 손에서 기대되는 감촉과는 먼, 퍼석거림이란 표현이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이미 앞에서 화자가 소녀와 이름이 똑같은 “집에 두고온 어린 딸아이”가 아련하게 떠오른다고 했으므로 소녀와 화자의 딸 사이의 유사성이 준비되었으리라. 하지만 마지막 대목에서 화자와 함께 독자는 예상하지 못한 손의 감촉에 당황하고 종국에는 허망해진다. 이 두 행이 불러일으키는 정서는 어떤 구구한 해설보다도 오직 시가 전하는 서정적 진실에 오롯이 담겨있다. 직접 시를 읽는 행위가 여러 편의 해설서보다 값진 경험임을 이 시가 다시 일깨워 준다.
자체의 시작과정을 함축하고 있는 또 다른 시「쓸쓸히 빈방을 지키는 이에게」는 “차마 죽지 못하는 목숨”(「작은 개 한 마리」)으로 살아가는 초로의 사내를 등장시킨다. 이 사내는 “시가 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실로 알면서”도 (「박용래시집」) 아내와 아이들이 일터와 학교로 떠난 뒤 ‘텅 빈’ 방에서 “태평양 너머 누구던가/ 나처럼 쓸쓸히 빈방을 지키는 이에게/어떤 상징이나 은유도 없는/그런 편지를 쓰고 있다”. 이 시에서 배정웅 시의 성격이 태평양너머 모국을 향해 보내는 디아스포라의 담백하고 ‘순수한’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비단 「남미통신」과 「신남미통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작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시를 시인과 독자, 혹은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메시지로 보는 시각이 배정웅 시에 깔려있는 듯하다. 그의 시는 개인적 감정의 토로에 치중하는 대신 시가 가닿을 곳을 염두에 둔 의사소통을 지향한다.
이번 시집에는「시인에게」를 필두로 시에 대한 메타적 사유가 담긴 시들이 수록되어 있어서 배 정웅 시인의 시론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시는 어떤 순수성을 지향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문명의 오염된 불빛에서 “쓰여졌거나 쓰여질 시는 다 가짜”라고 선언하며 오직 사랑하는 이의 순수한 눈빛 아래서 두어 줄의 시를 쓰기를 소망한다(「H 시인 에게」).「무의 가면이 그려졌다」에서는 70년대 말 한국시인들을 묘사하면서 ‘바람’ 위에 쓴 시라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방랑, 혹은 노마드적 존재방식은 그에게 시의 물질적 토대임과 동시에 그의 시가 지향하는 순수성을 구현하는 삶의 형태이다. 이 시에서 묘사되는 시인 천 상병과 김 종삼의 “비정상적인 걸음걸이”에서 꼿꼿이 걷는 걸음과 달리 방랑자의 시란 “세상을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것이라는 인식도 엿볼 수 있다. 또 순수 한글 모국어의 재발견에서는 순수에의 매혹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한글표현이 새, 즉 사물의 다양한 이름들 중 하나이듯 배정웅의 순수성은 물화된 본질주의가 아니라 타자의 경험과 시각이 포용된 윤리적 정향을 갖는다.
시의 절창을 희구하는「마두금 소고」는 “생의 목울대 깊이 쌓인 슬픔 퍼내어/ 사막의 마른 알갱이 단 몇이라도 적시어” 보고 싶은 불가능한 소망을 피력한다. 마두금은 몽골 사막의 유목민들이 낙타나 말의 뼈로 만든 피리이다. 시인은 마두금을 연주하면 그 소리가 낙타새끼가 어미를 찾는 소리와 같기 때문에 낙타가 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시의 전반부가 마두금에 얽힌 전설같은 이야기를 전한다면 후반부에서 시인은 감정이입이 되어 마두금 소리 같은 시를 쓰고 싶다고 한다. “그 마두금 뼈 울음에 말 못하는 짐승의 한 세상 숨 넘어가듯/ 내 울음도 그렇게 사무치어 숨 한번 숨 한번 넘어갔으면.” 하지만 시인의 소망은 실현불가능하다. 우선 마두금 소리에 눈물을 흘린다는 낙타란 동물은 “모질고 무정”해서 “생전 잘 울지도 않”고 “막막한 사막에서 배가 고프면 뜨거운 모래도 씹고/제 살도 뜯어 씹는” 짐승이다. 그런 낙타를 울릴 소리라면 동물적 근원을 건드리는, 말하자면 “어린 낙타새끼가/ 제 애미 찾는 울음소리”같아야 한다. 게다가 시인이 희구하는 것은 “사막의 마른 모래 알갱이 단 몇이라도 적시어서/ 풀꽃처럼 별빛처럼 춤추게” 할 소리인데 그 자체로 불가능한 소망이다. 하지만 시인은 시와 결별해야 “자신의 불행이 끝날” 것을 알면서도 차마 헤어지지 못해 더 깊어진 고뇌로 불면의 밤을 보내며(「시인에게」) “시를 쓰는 한 인간의 눈물을 엿보려고/ 전인미답의 모래 위에 발자국 찍으며/ 낯선 낙타들도 여럿 달려”(「마두금소고」) 올 때 까지, 즉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시를 쓸 수밖에 없다.
4. 외다리로 서서 꿈꾸기: 응시의 지속, 詩
방랑의 세월을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 시인은 다음과 같은 장면을 목격한다.
로스앤젤레스 소재 자바시장에는
수시로 빠알간 외다리 비둘기들이 모여서 운다
봉제공들이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를
부리로 쪼면서도 구구르르 눈물 흘리며 운다
공업용 날카로운 나일론실에
진분홍 다리 한 쪽 야전 병사처럼 싹뚝 잘려나간
아픔과 공포로 운다
그 모양을 창너머로 물끄러미 건너다 보는
눈이 시원해서 더욱 슬픈 아즈텍과 마야의 아가씨들
미싱 노동으로 무거워진 다리 절뚝이며
주인 몰래 비둘기 울음보다 더 나즉이 흐느낀다
독수리 나래들 단 비행기 한 대
비둘기 떼 위에 떠서
멕시코만 쪽으로 궤적을 긋고 있다
--- 「자바시장의 비둘기」전문
이 시는 외다리 비둘기의 울음에서 시작한다. 공업용 나이론 실에 한쪽 다리가 잘려나간 비둘기들이 자바시장의 음식찌꺼기를 주어먹으며 ‘운다’. 2행, 4행, 7행의 마지막에 “운다”가 반복되고 난 후 그 다음 네 행이 미싱노동자들의 서러움을 묘사한다. 7행까지 외다리 비둘기의 묘사가 미싱노동자들의 등장을 예비한 셈인데, 비둘기와 노동자들은 울음과 절뚝거림을 공유한다. 비둘기가 쪼아 먹는 찌꺼기가 노동자들이 먹다 남긴 음식쓰레기라는 사실이 새와 노동자간의 어떤 운명공동체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 자바시장 위로 비행기한대가 날아오르면서 멕시코만 쪽을 향한다. 마지막 세 행의 비행기 묘사는 새의 울음과 노동자의 흐느낌에 병치되는, 직접 언급은 되지 않았지만 암묵적인 비행기의 굉음과, 지면에 가까이 있는 새와 노동자의 위치와 대조적으로 그들의 위로 위압적인 비행을 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 병치와 대조가 “독수리 나래”와 “멕시코만”, 이 두 구절과 연결되어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역사적 착취와 불법이민을 양산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진짜’ 얼굴을 빚어낸다.
남미통신 연작이후 배정웅의 아메리카 시가 그려내는 로스앤젤레스 한복판에서의 이와같은 시적 미장센은 어쩌면 디아스포라의 예상 가능한 종착지가 자본의 심부일지 모른다고 암시하는 듯하다. 디아스포라가 꾸는 꿈이 ‘아메리칸 드림’의 성공신화였다면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 둘 것은 화자의 현실적 궤적을 따라가는 일 보다는 이 시에서 나타난 흥미로운 변화이다. 우선 화자의 위치와 시선이 달라졌다. 앞서 살펴본 일련의 시와 달리 화자는 외다리 비둘기와 미싱노동자가 있는 자바시장의 한 장면을 관찰하지만 프레임 안에는 없다. 앞서 인용된 시들에서 그랬듯 ‘나의’라는 표현으로 지인의 이야기를 전하는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이 미장센에 철저히 관찰자적 시선을 던질 뿐이다. 장면의 프레임 밖에서 그는 아마 비둘기들이 내려앉아있는 거리에 그들처럼 외다리로 서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창너머로 물끄러미” 비둘기를 내다보는 미싱노동자들이 있는 공장건물을 올려다보다가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비행기로 눈을 돌렸으리라. 멕시코만을 향하는 비행기는 화자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시의 화자는 이 자본주의 중심에서 소외된 인물군상을 그리는 미장센에서 빠져있는 대신 그 장면을 그려내는 시선의 주체가 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중심이며 다원적 가치가 충돌하는 자바시장의 시끄럽고 지저분한 거리에 서있는 이 관찰적 주체에게 돌아갈 곳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디아스포라의 “쓸쓸한 빈 방”일 뿐이다. 빈 방에 홀로 남은 시인은 이제 「징후에 대하여」나「고물에 대하여」같은 노화에 관한 시에서 “시간이라는 이 보이지 않는 괴물에게”(「苦行」) 뜯어 먹히는 것이 인생이라는 비관적 깨달음을 토로하거나 일군의 ‘가족시’를 쓰면서 애틋한 가족애와 함께 회한에 잠긴다. 저 자본의 저자거리와 인생 말년의 고독한 방, 이렇게 사뭇 대조적이면서도 대도시의 생활양식에 매우 긴밀하게 연결된 두 공간은 역설적으로 디아스포라 시인이 더욱 시에 절실한 마음을 갖게 하는지도 모른다. 해서 시인은 시에 대해, 시 쓰기에 대해 더 많이 쓴다. 방랑의 역동적 움직임과 간문화적 교류로 가득한 생활에 구체적으로 기반한 디테일의 자리에 시란 무엇이고, 왜 쓰는가에 매달리는 메타적 언어가 들어선다. 시인의 시야에 들어오는 거대한 자본주의 체계 언저리의 그림자 같은 소외된 존재들이 또 다른 수많은 빈센트와 뻬드로가 되겠지만, 그들을 위해 울어줄 어미와 아비는 여기, 이 도시엔 없다.
하지만 시인의 내면은 홀로 에우칼립또 나무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흔들 방랑의 춤을 추고 있을지 모른다. 시 쓰는 일이 미미하게 느껴지거나 시인 자신 노쇠해가고 쓸쓸하다고 해도 시인의 뿌리는 ‘거의 고정된’ 상태라 언제든지 미완의 꿈을 쫒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꿈을 꿀 때면 시인이 스스로를 “시나 쓰는 바보”라 여기고서 타자와의 소통을 위해 시-편지를 태평양 너머로 보낼 것이다. 그럴 때면 시인은 그의 시집 속 “자궁을 열어/ 대담하게 언어의 처녀막을 건드”려서, “낭자한 피 같은 밑줄의 흔적”(「시인에게」)을 그어줄 독자를 소리 없이 기다릴지 모른다. 배정웅의 시를 읽으면 우리는 알게 된다. 디아스포라의 시-편지는 언제나 써지고 있다는 것을. 시인은 부재할 때도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니 그 편지들을 수취인불명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려면 우리가 이제 펜을 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