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시대의 마을리더와 지역복지
-여민동락공동체를 중심으로-
강 위 원
여민동락공동체 대표살림꾼
1. 자립의 원칙으로 설립한 여민동락공동체
농촌의 재생과 부흥을 위한 농촌공동체 ‘여민동락 공동체’(전남 영광군 묘량면 소재)가 출발한지 꼬박 7년입니다. 어쩌면 무모했는지도 모릅니다. 낯선 일 낯선 도전 앞에 生을 걸고 뛰어든 저희 여민동락 공동체 설립자 세부부의 농촌행을 두고, 믿음보다는 우려가 대세였습니다. 7년여 시간, 참 공부 많이 해야 했습니다. 제아무리 꼼꼼한 설계와 준비를 했다 해도, 새로운 삶터를 일구는 일은 여러 벗들의 우려대로 결코 녹록지 않았습니다.
나랏돈에만 의존하지 않는 자립의 원칙을 지켜
세 부부가 한 가정을 이루는 일만으로도 태산을 옮기는 일만큼 버거웠음을 고백합니다. 도시문명에 갇혀 있던 껍질을 깨고 새살을 돋우는 일은 갈등과 눈물의 연속이었습니다. 농촌살이의 고유한 문화와 규칙을 각성하는 과정도 차라리 혼란과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나랏돈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지갑부터 열어 먼저 나누자는 원칙, 스스로 농민이 되어 밭 한 평이라도 노동하고 경작하자는 소신, 복지 안에 갇힌 복지가 아니라 지역민의 일원이 되어 지역일체형 생활공동체를 만들자는 철학을 이뤄가는 일 모두, 솔직히 말하자면 고행이자 수행이었습니다.
국가보조금보다 주민의 신뢰가 더 위대한 힘
그때마다 공동체를 가르치고 키워준 은인은 지역주민이었습니다. 쌀 한가마, 마늘 한 접, 콩 한 되, 고구마, 호박, 감자, 오이, 채소·····. 끝이 없이 이어졌습니다. 빵가게, 굴비집, 식품가게, 떡집, 밥집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살림살이 걱정보다도 주민들의 참여와 나눔의 신비에 행복할 때가 많았습다. 지역의 신비는 광주와 서울을 넘어 전국으로 이어졌습니다. 고향을 아껴줘서 고맙다며 적지 않은 돈을 보내온 출향민부터, 인터넷카페를 보고 중고물품을 택배로 보낸 주부, 수십 년 공직생활 중 포상을 받아 익명으로 상금을 기부한 공무원까지·····. 실로 예상치 못한 사랑이었습니다. 여민동락 곳간을 채워주시는 전국 회원들의 감동적인 나눔의 행렬 앞에 그때마다 매순간 숙연해져야 했습니다. 사랑받은 만큼 반드시 몇 배 더 사랑하고 나누는 헌신적 실천이야말로, 받은 사랑 배신하지 않는 일이라 다짐하곤 했습니다. 저마다 “보조금 없이 어찌 운영하느냐”고 의아해 하기도 했습니다. “나랏돈 누가 써도 쓰는 건데, 왜 그렇게 순진하냐”고 타박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일리 있는 조언이지만, 아마 처음부터 보조금으로 시작한 여민동락이었다면, 이런 신비는 꿈조차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국고 보조금이나 기업후원은 원칙적으로 확대돼야 합니다. 그것이 국가의 책임이고 기업의 사명이 돼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고보조금이나 기업후원은 근본적으로 '지원'일 뿐이지 창조적 '생산'은 아닙니다. 자립은 외부지원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부경작과 생산, 개미후원과 지역주민들의 참여와 협력을 통해서 가능할 때 진정한 자립이며, 그러한 경제적 자립이 실천의 독립까지 보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민동락은 첫마음 그대로, 소박하고 우직하게 마을공동체를 일궈갈 것입니다. 여민동락을 제 한 몸에 가두지 않고 지역에 전면적으로 바치며 농촌을 살리는 맨 끝자리에서 분투하겠습니다. 농민의, 농민에 의한, 농민을 위한 삼농(三農)정신을 지키는 농촌공동체를 구현하겠습니다. 무엇보다, 협동을 통해 내 자신이 아름다워지고 살맛나는 지역이 되고 나아가 세상이 바뀔 수 있는 마을공동체의 본령에 충실하겠습니다.
여민동락공동체의 헌법
여민동락공동체는 처음부터 자립과 자치의 원칙과 취지에 맞게 설립됐고, 지금도 그 헌법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첫째, 노동과 생산을 통하지 않은 모든 외부의 기부와 후원은 반드시 그 십분의 일을 쪼개, 더 가난하고 후미진 지역과 단체와 시설에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둘째, 국가의 보조금과 인건비 지원을 받지 않되, 다만 국가의 보조금과 인건비는 재정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을 완벽하게 이룬 뒤에,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는 규모의 감당 가능한 자금만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셋째, 아이들을 도시로 유학 보내지 않습니다. 마을공동체 활동의 기본은 지역에 ‘사는’ 것이고, 동시에 지역사회의 작은 시골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주민들과 함께 더불어 함께 교육과 문화를 살려가야 온전히 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넷째, 농촌주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밥을 먹으며 농부로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마을활동가 혹은 지역운동가라 자칭하면서 주민들 속에서 ‘헌신’만 하는 게 아니라, 이웃으로 함께 살며 주민들의 살림 모양을 닮아가고 농민들에게 여쭙고 의논하고 부탁하면서 온전히 마을구성원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신뢰와 학습이 협동의 관건
이처럼 여민동락은 농촌의 경제 복지 교육 문화의 융복합적 접근과 협동조합의 원칙에 의거해 마을공동체를 살려가고 있습니다. 애당초 여민동락 설립과정에서도 세 부부가 돈 있는 사람은 돈을, 관계가 풍부한 사람은 관계를, 행정능력이 있는 사람은 행정능력을 출자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세 부부 여섯 명의 최초 출자가 이제는 15명의 대식구로 확장되었습니다. 여민동락공동체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구성원간의 절대적인 ‘신뢰’이자 끊임없는 ‘학습’입니다. 오래된 관계의 축적을 통한 신뢰의 확인없이 공동체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속가능한 신뢰의 확장은 끊임없는 학습에 기반하지 않고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여민동락공동체는 ‘월요학당’을 통해 매 주 학습하고 성찰하는 걸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는 늘 갈등과 반목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평범한 살림살이입니다만, 그것을 어떻게 조절 통제하고 신뢰로 승화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학습과 성찰의 시스템을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작고 소박하게 만들고 운영하는 협동조합
여민동락공동체는 지금 ‘동락점빵’, ‘할매손 송편’, ‘행복일자리 영농협동조합’을 운영합니다. ‘노인주간보호센터’나 ‘학교살리기’ 같은 복지와 교육활동 외에도 다양한 협동조합 유형의 사회적경제를 실천해 갑니다. 협동조합은 한마디로 동업입니다. 동업은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규모가 크고 사람이 늘어갈수록 그 실패의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집니다. 그래서입니다. 여민동락이 만드는 협동조합은 지극히 가난한 협동조합입니다. 작고 소박하게, 마을에서 사는 주민들이 그 마을에 거점을 두고 만들어 가는 구조입니다. 사람중심 마을중심이라고 해야겠습니다. 큰 돈을 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큰 위험없이 큰 행복을 추구하는 걸 목표로 합니다. 행여 수익이 생기면 마을기금 혹은 지역사회 공유자금으로 축적합니다. 뜻이 좋아야 그 과정이나 결과에 따라 분열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당장의 성과보다 오래도록 길게 궁리하고 신뢰를 축적하는 관계망을 우선시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사회적경제 혹은 협동조합이 ‘좋은 사람들과 좋은 뜻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면 무너지지 않는 기업이 됩니다. ‘사업’이 아니라 ‘살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좋은 뜻만 있고 ‘경영 능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영리기업 이상의 수고와 노동이 필요하고, 부단히 제도와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전문가들과 상의하는 부지런함을 보여야 합니다. 워크숍이든 강연회든 아니면 관련 저서와 자료, 논문들을 접하고, 선진지 견학과 선구자들과 자주 어울려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공부와 경험과 신뢰, 나아가 마을 속에서의 관계가 깊어지고 쌓이다보면, 새로운 상상력을 통해 또 다른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선순환이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협동의 힘이고 협동조합의 긍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2. 왜 다시 마을인가.
복지담론이 팽배합니다. 복지예산도 해마다 증액되고 있습니다. 각종 선거에서 드러나듯 이젠 복지국가건설이 정치경제의 핵심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답답합니다. 대한민국 하루 평균 자살자가 42.6명입니다. 가히 세계 최고입니다. 이혼률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 세계 7대 수출강국에 무역대국 11위인 대한민국의 행복지수는 세계 102위, 이것이 대한민국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사회복지사는 60만 명이나 됩니다. 사회복지직 공무원도 매년 수천 명씩 채용하고 있습니다. 복지예산은 대부분의 자치구 총예산의 60%를 차지하는 현실입니다.
복지재정 확대만으로 행복이 보장되지 않아
그런데 왜 무연사와 고독사로 이웃집 사람이 죽어도 며칠 씩 방치되어 발견되곤 하는 뉴스가 해년마다 국민들을 섬뜩하게 만들고 있을까요? 왜 60대 노부부가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목을 매 동반자살을 하고, 아이 엄마가 왜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아이를 끌어안고 뛰어내려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노후, 보육과 교육, 집, 일자리, 병원비 등 이른바 5대 불안이 완전하게 해소된 복지국가가 가능할까요? 당연히 국가가 결단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충분한 복지예산을 편성해서 집중하면 가능합니다. 부자증세는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전 국민을 상대로 증세와 관련해 설득이라도 해야 합니다. 세금을 더 내더라도, 그 이후 훨씬 크게 보상될 복지국가의 혜택이 확실해지기만 한다면 국민들이 다짜고짜 반대할 일도 아닙니다. 또한 현재 재정규모에서도 충분하게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이 많습니다. 안타깝지만 4대강 사업 22조와 감세정책으로 인한 100조 손실도 모두 ‘결단’을 통해 ‘실패한 정책’이기도 합니다. 역으로 결단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현장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책과 제도를 바꾸고, 정책과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국가가 당연히 그렇게 결단해서 국민들의 안전망을 완벽하게 구축하는 게 복지국가이고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공동체는 탁월한 개인보다 언제나 지혜롭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 더 생각해 볼 거리가 있습니다. 만약에 정말로 복지예산을 늘리기만 하면 우리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복지예산만 늘려 5대 불안이 해소되고 나면 그토록 꿈꾸던 복지국가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이웃과 더불어 충분히 관계를 이루며 행복할 수 있을까요?
문제는 여기서 부터입니다. 마을리더 양성과 주민조직화의 이유가 여기에서부터 생기게 됩니다. 국가가 결단하는 복지는 결국 ‘돈’문제입니다. 그러나 ‘돈’문제 해결만으로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생계비관 자살은 줄고, 삶의 만족도는 적정 수준으로 높아지겠지만 그것이 행복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당장 전국민을 대상으로 ‘예산(돈)’ 중심 복지정책을 통해 경제사회적 안전망을 완벽하게 구축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입니다. 국가의 의무와 국가복지의 효율성은 꾸준하게 제고해 가더라도 당장 ‘돈’ 중심의 처방이 아니라 ‘관계’ 중심의 안전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곧 ‘마을’과 ‘복지’의 만남이고, 그 중심에 마을리더가 있습니다. 마을이야말로 가장 안정적인 관계망이자 가장 효과적인 복지 그물망입니다. 마을에서는 ‘관계’와 ‘소통’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마을은 최고의 힐링캠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을만들기가 우리시대 최고의 복지라고 이해되는 이유입니다. 육아공동체도 만들고, 도서관을 거점으로 소통하고, 헌책방 마을도 만들어 나누고 철학하고, 문턱없는 밥집을 만들어 밥상공동체를 이루는 등의 모든 실천이 모두 마을만들기입니다.
3. 마을리더들이 희망의 주인이다.
마을의 중심에 마을리더가 계십니다. 어쩌면 행정조직의 하부 세포처럼 인식되어 왔던 통반장님들을 넘어 이제 통반장이든 주민자치위원이든 복지위원이든 간에 마을의 리더로, 마을의 활동가로, 마을복지의 주역이자 매니저가 되어야 할 시대가 왔습니다. 주민자치센터의 행정서비스 대행업자, 혹은 행정업무의 단순 전달자나 행정 심부름센터 요원으로 낙인됐던 주민대표들이 마을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지역사회의 의미있는 ‘권위’를 찾아야 합니다. 주민리더 없는 마을이 없고, 민간의 마을리더 없이 마을이 움직일 수 없는 까닭입니다.
마을리더의 수준이 마을의 수준
독재시절에는 이른바 관변 마을대표들이 위에서 시키는 것을 전달하고 주민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면, 지방자치 시대의 마을리더들은 주민들의 의견을 행정과 의회에 전해주는 풀뿌리 민주주의 통로가 돼야 합니다. 삶터는 단순한 행정 관리구역이 아닌 자신이 살아가고 자녀들이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라는 ‘마을’입니다. 이제 노령화시대에 접어들어 한 곳에서 자신의 삶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마을 공동체가 살아있는 곳이야 말로 좋은 동네입니다. 이런 마을 곳곳에서 주민의 목소리, 특히 주변의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실정을 가장 잘 대변하고 해결하고 행정에 전해주는 전달자가 마을리더들입니다.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라는 것까지 아실 수 있는 분들이 마을리더들입니다. 그래서 마을리더들의 역할이 얼마나 강화되느냐에 따라 주민들의 의사를 얼마나 잘 반영할 수 있는지 좌우됩니다. 바야흐로 마을리더들이 마을복지의 주역이 될 것입니다.
주민을 존엄하게 대하는 마을리더가 돼야
그래서 누구나 다 마을의 리더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마을의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문가는 존경을 받지만, 기술자라고 다 존경받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핵심인재는 재능과 더불어 반드시 열정을 포함한 바람직한 태도를 보유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조직과 일, 목표에 헌신할 수 없는 사람은 스스로 자리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문가의 반대말은 비전문가가 아니라 기술자입니다. 전문성은 능력이 아니라 대부분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진정한 전문가는 열정을 가진 기술자입니다. 주민들과 사회적 배려계층은 마을리더들이 얼마나 열정이 있는지 알기 전에는, 마을리더들이 얼마나 아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주민을 ‘존엄’하게 대하는 태도가 마을사업의 핵심입니다. 주민들은 마을 리더들이 자신을 존엄하게 대하면 존엄하게 환대합니다. 이는 정치, 행정, 교육, 복지 그 어느 분야에 적용가능한 진리입니다. 그런 까닭에 마을 리더의 첫 품성은 바로 ‘주민들을 대하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마을리더 학교, 마을 학습조직이 있어야
그래서입니다. 마을의 대표들의 ‘권위’를 키우고, 전문성을 높이고, 마을리더들이 활동가로서의 품격과 만족도를 올리기 위한 일명 ‘마을리더 학교’가 필요합니다. 마을학교라는 학습조직이 마을리더들이 본래 가지고 계시는 현장의 지혜를 종합하고 나누는 평생교육의 전당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순환과 공생의 마을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자치, 자급, 협동의 자연력을 키우는 학당이 필요합니다. 선배 마을대표들의 경험을 나누고, 후배 마을대표들의 고뇌와 궁금증을 해소하는 토론과 배움의 격론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마을리더들을 배출하는 마을리더 예비학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풀뿌리 자치와 민주주의 공동체의 주역으로
남해군의 이장 출신이 군수가 되고 장관이 되고 도지사가 되고, 한 때 대통령이 되겠다고 출마를 했을 정도입니다. 이장 시절, 그는 작은 마을공동체를 변화시키기 위해 열정을 다 바친 촌락 마을의 리더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한 나라를 운영하겠다고 나설 정도입니다. 진정한 지방자치는 마을공동체로부터 출발합니다. 단순히 완장만 찬 형식적인 마을리더가 아니라, 마을과 지역을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활동을 목표로 분투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주민대표 등의 마을활동 경험을 살려 시의원에도 출마하고, 도의원에도 출마해서 풀뿌리자치의 저력을 더 크게 쓰시겠다는 포부도 가져 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단순한 자원봉사에서 출발해 더 큰 권한과 책임을 가진 지역사회의 리더로 발전해 가시길 바랍니다. 풀뿌리 마을리더가 시장이 되고 도지사가 되는 공동체야말로 진정한 풀뿌리 자치요, 민주주의 진보공동체라 믿습니다. 바라건대, 마을 대표들이 과감하게 활동의 목표와 방향을 크고 깊게 가져가시길 희망합니다. 행정의 예하부대에서 당당하게 마을리더로, 공동체의 활동가로 스스로를 격상시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4. 마을리더, 어떻게 협동의 마을을 일굴 것인가.
그렇다면 마을리더는 어떤 방식으로 그 조직적 결속력과 분야별 다양성을 갖출 수 있을까요? 앞의 얘기를 다시 정리하자면 여섯 가지입니다. 시대적 대세가 되고 있는 협동조합, 그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마을공동체 형성에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첫째, 소규모 ‘동맹’이다.
우선 우정과 신뢰에 기반한 3~4명의 소규모 모임부터 시작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자체나 정부에서 먼저 무언가 해주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것들이 무엇인가 살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목표와 가치에 합의하는 ‘동맹’ 수준의 소모임을 통해 준비를 해야 실패가 적습니다. 물론 우애와 신뢰에 바탕하되 반드시 그에 필요한 기능과 유능함도 갖춰야 하기 때문에 동맹을 이룰 때는 복합적 요소를 모두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둘째, ‘실천하면서 배우는 지혜’가 필수적이다.
우주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지방 수준의 조금만 일, 아주 단순한 과업부터 천천히 착수하면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커다란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내공을 갖추는 게 옳습니다. 무엇보다 낙관적 상상력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휘해야 성공적인 조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비관주의자와 불평주의자는 함께 일하는 데 기분 좋은 사람들이 아닐뿐더러 종국에는 늘 분열과 파행으로 변질될 소지가 큽니다.
셋째, ‘학습’이다.
구성원간의 절대적인 ‘신뢰’는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지속가능해지기 마련입니다. 오래된 관계의 축적을 통한 신뢰의 확인 없이 협동경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속가능한 신뢰의 확장은 끊임없는 학습에 기반 하지 않고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매 주 학습하고 성찰하는 걸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공동체는 늘 갈등과 반목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살림살이입니다. 그래서 더욱 그것을 어떻게 조절 통제하고 신뢰로 승화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학습과 성찰의 시스템을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넷째, ‘작고 소박하게’이다.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의 협동 경제는 한마디로 사회적 의미와 역할에 기반한 ‘가치’ 동업입니다. 그레서 동업은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규모가 크고 사람이 늘어갈수록 그 실패의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집니다. 그래서입니다. 작고 소박하게, 마을에서 사는 주민들이 그 마을에 거점을 두고 만들어 가는 구조라야 좋습니다. 사람중심 마을중심이라고 해야겠습니다. 큰 돈을 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큰 위험 없이 큰 행복을 추구하는 걸 목표로 합니다. 행여 수익이 생기면 마을기금 혹은 지역사회 공유자금으로 축적합니다. 뜻이 좋아야 그 과정이나 결과에 따라 분열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당장의 성과보다 오래도록 길게 궁리하고 신뢰를 축적하는 관계망을 우선시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사회적경제 혹은 협동조합이 ‘좋은 사람들과 좋은 뜻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면 무너지지 않는 기업이 됩니다. ‘사업’이 아니라 ‘살림’이 되는 것입니다.
다섯 째, ‘유능함’이다.
좋은 뜻만 있고 ‘경영 능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영리기업 이상의 수고와 노동이 필요하고, 부단히 제도와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전문가들과 상의하는 부지런함을 보여야 합니다. 워크숍이든 강연회든 관련 저서와 자료, 논문들을 접하고, 선진지 견학과 선구자들과 자주 어울려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공부와 경험과 신뢰와 마을 속에서의 관계가 깊어지고 쌓이고 하다보면, 새로운 상상력을 통해 또 다른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선순환이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협동의 힘이고 협동경제, 사회적 기업의 긍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자립’이다.
나랏돈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지갑부터 열어 먼저 나누자는 원칙과 줏대를 세워야 합니다. 국고보조금은 근본적으로 '지원'일 뿐이지 창조적 '생산'은 아닙니다. 자립은 외부지원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부출자와 생산, 지역주민들의 참여와 협력을 통해서 가능할 때 진정한 자립이며, 그러한 경제적 자립이 실천의 독립까지 보장할 수 있습니다.
5. 행정의 과속과 실적주의 경계해야
현 단계에서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일은 행정의 과욕과 과속입니다. 협동조합과 커뮤니티 비즈니스 혹은 마을만들기는 보다 긴 호흡으로 바라봐야 하는 까닭입니다. 주민들 스스로가 마을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공동체를 형성해나가는데 1년 단위의 공무원식 성과지표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지적을 새겨들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민관 협동이라지만, 주민들은 수동적 참여에 길들여지고 행정은 교육과 계몽의 주체가 돼 버리면 마을공동체의 방향과 성과가 흔들릴 개연성이 다분해지기 때문입니다. 협동조합 등의 사회적경제와 마을공동체 만들기는 단순 이익조합이나 영리기업 차원의 속도전이나 마을경관조성사업 등의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닌 만큼 주민의 소통과 관계의 강화로부터 자연스럽게, 더디 가더라도 함께 가는 과정의 민주주의가 중요합니다.
행정의 과속이 마을 면역력을 훼손한다
우선,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협동조합 학교 등의 ‘마을학교’를 지속적으로 열 필요가 있습니다. 마을학교가 마을의 자생력을 키우는 중간지원센터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장이 서면 사람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처음부터 준비된 활동가를 조직하려다가 ‘사람이 없다’면서 물러서는 일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애당초 준비된 사람이란 없습니다. 서너 명부터 천천히 생각을 키워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립의 원칙을 확고히 세워 규모가 작고 소박한 일부터 주민들의 십시일반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가령, 고사 직전의 마을기업을 인수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고 지역아동센터 급식조합으로 변화시키는 일도 가능합니다. 북카페도 밤마다 월요영화관, 화요독서회, 수요연주회, 목요토론회, 금요막걸리파티를 열어 관계를 이루고, 그 관계망 안에서 주민 스스로 운영비를 마련할 방도를 찾아봐야 합니다. 뜻 있는 일에는 반드시 고마운 협력자가 등장하는 법입니다.
낙관의 상상력이 결정적 관건
언제나 그랬듯이, 길을 내는 사람이 늘 선구자입니다. 선구자의 길은 낙관의 상상력이 결정적입니다. 주민의 선의를 믿고, 협동과 공생의 대의를 잃지 않으면, 반드시 그 상상력은 현실이 되는 법입니다. 결코 무늬만 그리다가 혹은 흉내만 내다가 그만두고 마는 여느 지자체와는 달라야 합니다. 조급하지 않게, 멀리 보며 오래가야 합니다. 그 시작과 끝은 오로지 목표가 하나입니다. 주민들의 평화와 행복, 본래부터 존재하던 마을의 공동체성과 자연력을 복구해가는 관계의 완성입니다.
6. 나오며
글을 쓰다 보니, 지나치게 번잡해졌습니다. 특별히 당장 크게 도움될 법한 얘기도 아닌데 말입니다. 요약하건대,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 늘려가는 삶의 목표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소망을 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마을공동체니 협동의 경제니 하는 것도 내가 진정으로 행복하고 싶고, 그 행복의 사회적 확장을 이루고 싶다는 것 외에 별 게 아닙니다. 협동을 통해 내 자신이 아름다워지고 살맛나는 지역이 되고 나아가 세상이 바뀔 수 있는 마을공동체의 본령을 논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길은 여전히 초보입니다. 앞으로 그 성숙과 완성은, 오롯이 동행하는 마을리더들의 힘으로만 가능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함께 하는 마을리더들의 창조적 도전이 반드시 의미있는 결실로 이어지길 소망합니다.
첫댓글 인천에서 있었던 지역복지 워크샵을 마치고 바로 비행기로 오셔서 강의해주신 강위원 선생님,
광주전남귀농학교 오시면 늘 즐겁다시며 같이 기뻐해주시는 강위원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