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회상. 목포문태고등학교 송기호 선배님 글을 퍼옴(고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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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변화의 내용
1950년 6.25동난이 일어나고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1953년도에 나는 초등학교를 입학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때가 1958년이었다.이 초등학교 시절에는 4학년이 되면서 오후까지 수업이 연장되어 학교에서는 도시락을 싸오라고 하는데 도시락이라는 용기가 없어서 (그때는 벤또 벤또 그렇게 불렀다.)나는 도시락을 싸가지 못한 것이 무척 큰 불만이었다.신발은 운동화는 거의 없고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우리 선배들은 집신을 신었는데 이런 짚신에 비하면 검정 고무신은 양반인 셈이었다.그런데 이 검정 고무신은 새신을 사 신으면 반드시 발 뒷죽에 물집이 생겨서 한참 고생을 하다가 검정 고무신이 발에 맞춰 닳아지면 그때부터는 괜찮아지곤 했다.아버지가 장에 가면 새신을 사오신다고 내 발의 크기를 지푸라기로 재서 그것을 들고 장에 가서 새 검정 고무신을 사오시곤 했다.보리고개 시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누까라는 것을 사다가 죽을 쑤어 먹었다. 이 누까라는 것은 보리쌀을 정미하면서 벗겨낸 겨가 누까인데 이것을 사다가 죽을 쑤어 먹으면 약간 거칠은 것이 먹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이렇게 물자가 부족한 시절이 1950년대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의 경제 사정이었다.
2011년 작금의 경제사정은 어떤가.1950년대와 비교하면 많은 변화가 있어서 이것을 공간적 변화, 디지털적 변화,취사와 난방의 변화,악취 변화로 나눠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가.공간적 변화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는 우리 동네 학교 옆으로 신작로가 있고 이 신작로는 지금 보니 목포에서 신의주까지의 1번국도였다.1번 국도라는 것은 내가 성년이 된 뒤에 지리를 공부해서 체득한 것이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그저 신작로였다.이 신작로는 비포장이라서 자동차가 지나가면 하얀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났고 도로변 풀밭은 자동차가 일으킨 먼지가 하얗게 쌓여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초등학교까지는 약 2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였지만 먼거리에서 온 학생들은 8킬로미터 이상되는 학생들도 부지기수였다.따라서 하루 생활권의 범주는 8 킬로미터 내외 였다.8킬로미터를 벗어나는 거리는 2일 생활권이기 때문에 그만큼 소통의 속도가 줄어서 문화적 유대관계가 훨씬 더 떨어졌다.그리고 필요한 생필품은 5일만에 들어서는 장에 가서 사왔다.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세대의 주역으로 살던 1950년는 그랬다.그래서 그 장이 바로 무안읍내에(전남 무안군 소재지) 서는 무안장이었다.무안장에 가서 사다 주마.다음번 무안장에 가서 사 와야 한다 는 말을 무척 많이 듣고 우리는 자랐다.그런데 그 무안장까지는 12킬로미터쯤 되는 거리였다.비포장의 신장로인 1번 국도를 아침 일찍 걸어서 무안장에 도착하면 오전 11시쯤 되는데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구름처럼 일어나는 뿌연 먼지 때문에 코를 막고 걸어야 했다.장 바닥에는 각지에서 몰려든 인파들이 무척 붐볐다.여기서 멸치 성냥 비누 미역 옷가지 신발 등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 일과가 끝나는 그런 시대였다.그러니까 12킬로미터의 공간 속에서 살아는 삶이었다.
목포시까지는 약 20킬로 미터쯤 되는데 광주에서 목포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버스는 요금을 받기 때문에 돈이 없거나 돈이 아까운 사람은 걸어서 다니기도 했다.그때 버스는 운전기사가 있고 출입구에는 차장이라는 아가씨가 검정 쓰봉에다 파란색 셔츠를 입고 허리에는 돈을 받아 넣은 가방을 찬 모습이었다.차장 아가씨가 손님을 태우고 오라이(all right) 하면 버스가 출발했고 스톱(stop)하면 버스가 멈추는 그런 시대였다.일반 사람들은 이렇게 20킬로미터 이내의 공간에서 삶을 살아갔다.
그런데 2011년 지금은 어떤가?시속 80킬로미터내지 100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는 자가용 승용차가 집집마다 내지는 사람마다 1대씩 있으니 200킬로미터의 공간은 금방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오전 11시경에 승용차를 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가서 놀다가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아침과 점심을 강원도에 배불리 먹고 기분좋게 서울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먹을 만큼 생활공간이 확대된 삶을 살고 있으니 이것은 1950년대와 비교해서 얼마나 큰 변화인가.1950년대의 20킬로미터내의 생활 공간이 2011년에는 200킬로미터내의 생활 공간으로 확대되어 버린 것이다.이것을 나는 공간적 변화라고 하고 싶다.
나.디지털적 변화
내가 1960년대 초반에는 중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시절의 영어 선생님 이름이 K선생님이었다.그분은 목포에서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을 졸업하고 첫 부임지가 우리가 다닌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었는데 이분이 영어 수업시간에 유창한 영어로 말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동경의 눈빛으로 그분의 강의를 경청했던가.그런데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은 집에 전화기가 거의 없는 때였다.공공기관이나 부자집에서나 전화기를 놓고 살던 때였다.따라서 집에 전화기의 유무와 피아노 및 냉장고나 tv의 소유 여부는 바로 부의 척도로 인식되던 시대였다.이렇게 귀한 물건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자 여부가 판가름 나는 때였다.
영어 수업중에 K 영어 선생님이 영어로 my phone number is five eight two(582) 라고 자주 말하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그래서 우리들은 영어 선생님은 자기 집이 무척 부자인가 보다 하고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이렇게 귀하던 전화기가 일반화되더니 뒤를 이어 삐삐가 일반화 되는가 싶더니 삐삐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핸드폰이 일반화 되기 시작했다.이 핸드폰은 전화와 문자 메시지 송수신이 가능해 지면서 우리의 생활은 얼마나 편리해졌는가.그런데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지금은 스마트폰 시대가 되었다.
스마트폰은 손안에 들어가는 조그만 컴퓨터와 같다.문서를 작성할 수 있고 문자를 보낼 수 있고 인터넷을 검색할 수 있으며 각종 앱플리케이션 프로그램을 다운받아서 내 손안에서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문서를 어떻게 작성할 수 있는가? 메인메뉴-think free office-새로만들기-문서클리크-파일이름작성-확인-작성된 123.docx 파일명을 열고 문서를 작성했다가 나중에 스마트폰과 pc를 연결짹으로 연결하면 당해 문서를 읽을 수 있고 복사해다가 컴퓨터에 저장도 할 수 있다.
문자를 어떻게 보내는가.스마트폰의 많은 아이콘 중에서 문자메시지 아이콘을 열어 자판을 불러낸 뒤 나타난 자판에다가 글자를 입력하고 보내기를 누르면 문자가 상대방에게 날아가버리고 그 보낸 문자 메시지 내용은 자동으로 저장되어 언제라도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을 어떻게 검색하는가.이것도 역시 스마트폰 아이콘 중에서 인터넷 아이콘을 클리크하면 다음이나 네이버 및 네이트 같은 유명사이트에 접속된다.여기서 카페를 열고 내가 활동하고 있는 카페를 열어 수시로 올라와 있는 회원들의 글을 확인하고 댓글을 달 수가 있으니 그야말로 인터넷의 생활화 일상화를 가져온 획기적인 기기가 스마트폰이다.
마켓이란 아이콘에 들어가서 각종 앱플리케이션 프로그램을 다운받을 수가 있는데 지하철 노선도를 검색하면 수종의 지하철 노선도 앱이 나열되고 그중에서 필요한 것을 다운받아 내 스마트폰에 저장하고 필요할 때마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지하철 노선도를 열어서 지하철역간 이동시간을 검색할 수가 있어서 무척 편리하다.
자동차로 여주를 가려는데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와 어떤 도로를 어떻게 타고 가는가를 Tmap이란 앱플리케이션을 열어서 검색하면 모의 주행으로 구간 거리와 소요 시간 및 운행 도로를 알아 볼 수 있다.
또 교보문고 아이콘을 클리크하면 교보문고에서 무료나 유료로 제공하는 각종 전자책을 내 스마트폰에다 다운받아 저장했다가 내가 필요할 때마다 열어서 그 전자책을 독서도 할 수 있다.이때 가장 편리한 것은 5분이나 10분 단위로 잠간 동안씩 끊어서 하루에도 여러 번으로 나눠서 손쉽게 독서할 수 있다는 점이다.
SBS뉴스 아이콘을 열고 들어가면 SBS뉴스가 실시간으로 뜨기 때문에 뉴스에 접하는 속도도 무척 빠르다.중앙일보 트위터에 가입해서 회원이 되면 실시간으로 중앙일보사 편집국에서 띄우는 트위터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뉴스를 접할 수도 있고 내가 모니터링한 내용이나 취재 정보를 기자들에게 트위터를 이용해서 제공할 수도 있다.
뮤직플레이어 아이콘에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저장해서 필요한 때 언제라도 꺼내서 들을 수도 있고 여행이나 등산중에 디카로 사진을 찍다가 밧데리가 부족하거나 메모리 용량이 다 소진된 경우에는 또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해서 응급 대응할 수가 있어서 또 무척 좋다.
우리가 삶을 살다보면 꼭 중요한 내용은 메모를 할 필요가 있다.그때마다 메모지와 연필이나 볼펜을 찾는다고 허둥되는 경우가 있고 또 그 메모지 내용을 분실해버려서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다.그런데 이런 메모기능을 스마트폰에서 모두 흡수해서 이제는 그런 메모지가 필요 없다.스마트폰 메모장을 열고 자판을 열어서 자판에다 알파벹을 똑똑똑 두드리면 글자가 입력되고 저장시키면 메모내용이 금방 저장되고 필요할 때 얼른 열어서 메모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이 스마트폰은 소위 2.0사상이니 2.0철학을 구현하는 핵심적 도구라고 한다.여기의 2.0사상이니 2.0철학이란 개방.참여.공유라는 시대적 가치를 실현하자는사상이며 이런 가치를 실현하는 핵심적 도구 또는 기기가 스마트폰이란 것이다.사회의 모든 조직이 개방,참여,공유를 추구하면 조직의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조직내 모든 프로그램머들은 앱 즉 앱프리케이션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공유하게 되고 이런 기능을 가능케하는 것이 스파트폰이라고 하면서 이 스마트폰으로 국운 융성의 기회를 잡자는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2011년 현재는 스마트폰으로 SNS의 트위터로 쌍방통행적 의사전달은 물론이고 TV시청 전화통화 내지 영상통화까지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니 1960년대 초반 내가 중학교 시절에 영어선생님이 우리집 전화번호는 582번이라고 자랑하는 것을 듣고 감탄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이렇게 장족의 발전을 가져온 디지털적 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옛날을 회상하면 참 많은 변화와 발전을 이룩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취사와 난방의 변화
우리 세대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학교 일과가 끝난 후에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해야 하는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나무하는 일이었다. 산에는 소나무가 촘촘히 우거져 있는데 이 소나무에서 소나무 잎이 땅에 떨어지면 이것을 갈퀴로 긁어다가 망이나 지게에 담아서 집으로 가져오는 것을 나무한다고 말했다.그 시대의 농어촌 시골은 취사와 난방을 어떻게 했는가.이 소나무 잎사귀 떨어진 것을 긁어다가 부엌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펴서 밥도 짓고 동시에 온돌방에 난방도 했다.그러니 소나무 잎사귀 떨어진 것을 긁어 모아서 집으로 가져오는 일 소위 나무하는 일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또 여름철에는 산야에 우거진 풀과 도토리 나무 잎사귀를 낫으로 베어서 망에 담아 집으로 가져 오는 것도 나무하는 일이었다.이것은 한 여름철의 나무하기였다.이렇게 산에서 베어서 망에 담아온 풀과 도토리나무 잎사귀는 햇볕에 말려서 부엌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펴 취사용으로 사용했다.소위 여름철용 취사용 재료로 사용했던 것이다.
어른들은 농사짓는 일만으로도 무척 바쁘기 때문에 나무하는 일은 그 시대의 초등학생들 몫이었다.이러한 나무하는 일을 게을리 했다는가는 아버지에게 호된 야단을 맞기 때문에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통상 가을부터 봄까지 열심히 소나무 잎사귀 떨어진 것을 긁어다가 집안에 쌓아 두고 1년 내내 취사와 난방용으로 사용했다.특히 가을철에는 소나무 잎사귀들이 단풍 들었다가 바람이라도 불면 땅바닥에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서로 먼저 긁어 모으기 위해 시골 사람들은 혈안이 되었다.그 당시 초등학교 시절에는 이런 나무하는 일이 정말 싫었지만 아버지의 꾸지람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나무를 해야 했다.
이런 농어촌의 초등학교 시절이 끝나고(1950년대) 중학교 시절은(1960년대 초반) 목포시내에서 지냈는데 그 당시 도시인 목포시에서는 취사와 난방은 연탄과 땔감 나무를 병행해서 사용했다.목포시 연동 선창가에는 영암이나 해남 등지에서 배로 싣고온 나무 단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연탄도 여기 저기서 배달되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2011년 지금은 어떤가.난방과 취사는 모두가 도시깨스다.소위 LNG라고 하는 것이다.LNG는 LIQUID NATURAL GAS의 이니셜인데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액화천연깨스다.중동등지에서 LNG선에 실려온 이 천연깨스는 국내의 LNG 저장소에서 저장했다가 파이프 라인을 통해서 각 가정으로 배달되어 버튼만 켜면 깨끗하고 시퍼런 불이 활활 타오르는 깨스렌지로 취사를 하고 보일러로 난방을 하니 얼마나 편리한 세상이 되었는가.LNG 도시깨스가 공급되지 않는 산간벽지는 프로판 깨스통을 공급받아 LNG 도시깨스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다.이렇게 취사 및 난방연료가 도시깨스나 프로판깨스로 대체되다 보니 시골에서는 취사 및 난방용 나무를 할 일이 없어졌다.따라서 시골의 산속에는 나무꾼들이 들어갈 일이 없어져 요즘 시골의 산속은 풀과 나무가 우거져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빡빡하게 우거져 버렸다.
이렇게 편리해진 200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이 1950년대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는가.
라.악취의 변화
1950년대 초반 우리 세대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의 화장실은 수세식 화장실이 아니었다.집안 행랑채 한쪽 구석에 뒷간이라는 화장실이 있었다.이 뒷간에는 지하에 큰 벙커를 만들고 여기에다 인분을 저장했는데 이 인분 저장 벙커 상단에는 쪼그리고 앉을 수 있도록 널빤지를 11자로 만들어 걸고 이 11자 널빤지에 쪼그리고 앉아서 대변을 보았다.그런데 대변을 보기 위해서 뒷간 화장실에 들어가면 가장 참기가 어려운 것이 인분에서 풍기는 악취였다.여름철이라도 되면 화장실 인분에는 똥파리들이 모여들어 알을 까고 그 알에서 구더기가 나와 인분속에서 구더기들이 우굴거리는 모습은 무척 혐오스러웠다.그렇지만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서 그냥 그저 그런대로 살았던 시절이었다.그리고 뒷간 화장실 좌측이나 우측 벽에다는 헌책 같은 것을 담아 두고 대변이 끝나면 그 헌책 종이를 찢어서 대변후의 항문을 닦아내고 화장실을 나오곤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아파트내 화잘실은 어떤가. 모두가 수세식인데다가 부드럽고 깨끗한 두루마리 화장지로 항문을 닦아내고 비데가 있는 집은 물로 항문 세척까지 한 뒤 버튼만 누르면 인분과 화장지가 쏴하면서 쏟아지는 물이 깨끗이 씻어내 버린다.이 얼마나 가공할 변화인가.나는 매일 아침 아파트 화장실에서 수세식 변기를 사용하면서 항상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은 1950년대 시골 뒷간에서 대변 보던 일과 비교하면서 아파트 화장실의 편리함에 대한 고마움을 곱씹어보곤 한다.이것이야말로 악취 혁명이라고 할 만한 대사건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지금 2000년대를 살면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생활상을 회고해 보니 공간적 변화, 디지털적 변화, 취사와 난방의 변화, 악취 혁명 등은 너무나 큰 변화인데 과연 이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누구의 덕분인가.정치적 민주화를 유보시킨 채 경제개발을 해온 박정희 전 대통령의 덕분인가.그렇다.그러면 정치적 민주화를 유보시킨 채 경제개발을 주도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어떻게 역사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인가.바꿔 말해서 개발 독재는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답을 해야 한다.
2.사람의 본성
사람은 어떤 특성을 가지는가?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 각각 독립적이고 행동하는 것이 또한 각각 독립적이며 또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란 이 명언은 사람의 집단성 즉 무리짓는 특성을 이야기한 것이다.이 무리짓는 특성은 사람이 사는 사회속에는 여러개의 무리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러한 여러 종류의 무리가 서로 교류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생각이 같은 사람들 끼리 서로 무리를 짓는데 이 생각이라는 것이 천편일률적으로 똑 같을 수 없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이렇게 생각이 같은 사람들의 무리가 집단적으로 표출하는 의사표시가 바로 정치적 활동이다.따라서 사람은 본래가 무리짓는 특성을 갖기 때문에 정치적 동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서 이런 정치적 속성을 즉 무리짓는 특성을 표출하지 말고 오직 경제활동만 자유스럽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을 버리라는 하는 것이니 이렇게 무례한 요구를 강요하는 사람은 어디서 그런 권리를 얻었다는 것인가?
사람의 삶은 밥을 먹고 살아야 하지만 노래도 감상해야 하는 구조로 돼 있다.밥을 먹는 것은 물질의 문제이고 노래를 감상하는 것은 정신의 문제이다.이렇게 사람의 삶은 물질과 정신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런 물질과 정신의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보면 경제와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물질은 경제와 연결되고 정신은 정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교도소에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정치범을 사상범으로 취급하는 것도 정신의 문제와 연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경제적 자유는 누려도 정치적 자유는 안 되고 굴종을 강요하는 것은 얼마나 황당한 요구인가.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얽혀 있는 사람의 본성 중에서 물질 즉 경제에 대한 자유는 향유하되 정신 즉 정치의 자유는 향유하지 말라고 하는 요구가 얼마나 무례한 요구인가.따라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무리들과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인데 이것을 강압적으로 억누르지 말고 타협으로 해결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순리다.
또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사람은 무한한 욕심을 가지는 동물이다.유명한 일화가 99칸짜리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단칸 짜리 집을 짓고 사는 사람한테 자기집을 100칸짜리로 확장할테니 자네가 가진 1칸짜리 집을 나에게 팔라고 했다는 것은 인간 욕심의 무한성을 꼬집는 일화이다.이러한 욕심의 무한성은 재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권력에 대한 욕심도 마찬가지로 무한한 것이다.이와같이 사람의 독립적인 생각과 행동 및 무리짓는 특성 그리고 욕심의 무한성 같은 속성을 사람의 천부인권이라고 한다.즉 하늘로부터 받은 기본적 권리라는 것이다.
사람의 이렇게 무리짓는 속성과 생각과 행동이 각각 독립적이며 무한한 욕심을 가지는 특성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는 수많은 갈등과 충돌이 생기는데 이러한 갈등과 충돌을 어떻게 잘 조정해서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정치의 문제이다.따라서 사람은 원래가 정치적 기술로 갈등의 문제를 풀어가는 동물인 것이다.정치적 기술로 해결할 수 없을 때는 폭력이나 전쟁이란 수단으로 해결해온 것이 인류역사다.따라서 생각이 다른 무리들에게 다른 생각을 갖지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사람의 정치적 특성 즉 무리짓는 특성,정신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이것은 사람의 본성을 무시하는 처사다.이것은 얼마나 황당하고 무례한 요구인가.
3.궤변의 논리
그런데 경제건설이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활동을 막았다.그 명분이 바로 경제건설이었다.경제를 어느수준까지 끌어올릴 때까지는 정치적 민주화를 유보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권력에 맛들여진 사람은 결코 권력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박 전 대통령이 권력에 맛들여져서 그렇게 권력에 집착했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경제건설의 사명감 때문에 권력에 집착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오직 박 전 대통령 자신만이 알 뿐이었다.그러나 대외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경제건설을 이룰 때까지는 정치적 민주화를 유보시킨다는 것이었다.이러한 명분은 상당한 설득력으로 그 추종세력들에게 어필되었으며 작금에는 그들은 산업화 세력이란 이름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직이나 개인의 일에는 순서가 있다.국가가 정치적으로 안정되면 그 다음 수순은 경제개발 내지 문화창조이다.정치적 질서가 확립되면 경제개발이나 문화창조를 내몰라라 할 수가 없는 것이 사람이다.경제나 문화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해도 사람이기 때문에 경제나 문화에 무관심할 수가 없는 존재다.필연적으로 사람이기 때문에 생명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 경제개발과 문화창조에 온갖 정열을 쏟게 돼 있다.사람은 하루 8시간 보편적으로 일을 한다.8시간 일을 말라고 해도 사람에게는 큰 고통이다.사람의 이런 특성 즉 하루 8시간 일을 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경제개발과 문화창조에 온갖 정열을 쏟는 것이 사람이다.단 8시간 동안 한 일의 양과 질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단위 시간 당 일의 양이 많고 질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우수한 사람이다.관리자는 이런 우수한 사람을 발탁해서 상을 주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이러한 특성을 이용해서 조직을 관리하고 기업을 관리하고 사회를 관리하고 국가를 관리해야 해야 조직.기업.사회.국가가 잘 돌아간다.정치적 안정을 이루면 사람은 필연적으로 경제개발에 혈안이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패턴이다.
그런데 경제개발을 빨리 이루기 위해서 정치적 민주화를 유보하겠는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했기 때문에 독재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조금더 심하게 표현하면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로 표현된 유신독재는 박정희 전 대통령 자신의 영구집권 체제였다.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혼자서 독식하겠다는 뜻이니 이 얼마나 황당한 논리인가.더욱 가관인 것은 이런 유신헌법을 법적으로 뒷받침해준 헌법학자들이 당대에도 버젓이 존재했다는 점이다.이렇게 시대를 불문하고 어느 때나 곡학아세의 선봉에 선 황당한 인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을 등용해서 쓰는 문제 즉 인사문제는 너무너무 중요한 기본 틀인 것이다.그렇지만 사람을 등용해서 쓰는 인사문제의 오류는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박 전 대통령의 유신 독재 체제에 반대하면서 희생된 반독재투쟁의 대열에 선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이들에게 누가 보상을 해 줄 것인가.참 가슴 아픈 희생들이었다.긴급조치 1,2,3호등을 발동해 놓고 여기에 위반한 자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했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는가.그러나 가슴 아프게도 이렇게 희생된 젊은이들은 역사의 전면에 전혀 기록되지 않는다.한 두 줄 정도로 언급되고 지나가버린다는 것이다.1636년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하고 주전론자와 왕자 및 부녀자 50만명을 끌고 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이때 끌려간 부녀자 50만명의 억울함과 비통함에 대해서는 역사서 어디에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역사의 뒷면에 숨겨진 슬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4.맺는 말
지금의 산업화 업적이 박 전 대통령의 공이었다면 그러면 박 전 대통려의 과는 무엇인가.가장 큰 첫 번째 실책이 정치적 발전의 길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3선개헌.유신독재를 고집하다가 박 전 대통령은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다.이렇게 정치발전이 와해된 유산이 지금은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비판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불행하게도 박 전 대통령은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서 독재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의 교훈을 전혀 배우지 못하고 똑 같은 전철을 밟았다는 점에서 무척 우매한 대통령이 아니었는가 싶다.어디 그것뿐인가.세계사적으로 독재는 반드시 비참한 종말로 이어진다는 교훈도 전혀 알지 못한 우둔한 사람이 아니었는가 싶기도 하다.영국에서는 1649년에 청교도 혁명(우리나라는 조선 효종 때) 1688년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입헌군주제 전통을 세웠고 프랑스는 1789년에 루리 16세왕 부부를 단두대에서 처형하고 공화국이 되었으며 중국은 1912년의 신해혁명으로 러시아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독일은 1918년 민중의 힘으로 공화정 국가의 전통을 수립한 것이 세계사의 흐름이었다.과연 유신독재로 영구집권을 획책한 구상이 얼마나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 반하는 조치였던가를 왜 그리도 몰랐단 말인가.이런 역사의 흐름속에서 본다면 북한 문제도 우리가 너무 애타게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북한의 체제 붕괴는 시간문제다.우리가 걱정하고 대비해야 할 것은 경제적으로 중국에 너무 예속이 되면 그것은 통일국가 수립에 장애가 될 것이고 정치적으로도 예속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마치 티베트처럼 자치제 속국으로 만들겠다고 나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대비해야 할 것이다.따라서 중국과의 문제는 대립이 아니라 유대강화로 가는 것이 더 국익에 도움이 되어 온 것이 우리 역사의 교훈이기도 했다.북한 경제가 중국에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는 차원에서 우리는 북한 경제에 파고 드는 정책이 장기적으로 한반도 통일에 도움이 된다는 전략적 안목이 일반화되기를 비는 마음도 간절하다.
두 번째로 큰 실책이며 더 큰 역사적 악순환을 잉태한 것이 5.18이란 역사적 아픔이었다. 5.18의 신군부 세력을 잉태시킨 것은 박 전 대통령 본인이었다.정치적 민주화를 유보시키고 장기집권을 획책하다 보니 군부내 강력한 지지세력을 구축하면서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잉태되었다고 볼 수 있다.당시 하나회의 수장인 전두환씨가 국군보안사령관 이었다.박 전 대통령은 국군보안사령관을 통해서 군부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장악했다.국군보안사령관이란 직위는 아무나 임명하는 자리가 아니다.심복 중의 심복을 임명시켜야 군부를 장악살 수가 있는 자리다.또 동향 친구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통해서 군부를 포함한 국정 전반의 정보를 장악했는데 문제는 동향 친구인 김재규씨가 총부리를 겨누는 배신을 할 줄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큰 실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배신으로 인해탄탄대로 같았던 유신 독재체제는 그 틀을 벗아날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또 신군부세력은 박 전 대통령의 5.16쿠데타 모형을 그대로 답습했으니 쿠데타 요령을 가르쳐준 교과서 역할도 했다는 점이다.박 전 대통령은 군복을 벗고 민간정부로 전환하면서 유명한 말을 했는데 그것은 다시는 이 땅에 나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희망을 피력했지만 역사는 또다시 박 전 대통령을 그대로 답습한 군부세력이 등장했다.그 과정에서 민족의 불행인 5.18이 다시 대한민국 역사에 얼룩을 남겼다.
박 전 대통령이 정치적 민주화를 발전시켰더라면 5.18의 신군부세력의 등장은 나타날 수가 없었다.정치적 민주화을 유보시키기 위해서는 군부내 지지세력을 확고히 하고 싶었고 그 군부세력은 다시 정치적 민주화를 억제하는 작용을 했다.이러한 군부세력이 정치무대에서 종언을 고할 수 있었던 것은 6.10항쟁이었으니 이 6.10항쟁은 우리 역사에 꺼지지 않은 촛불처럼 그 의의가 무척 크고 한국사의 흐름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따라서 박 전 대통령의 유신 독재 즉 경제개발을 빨리 이루기 위해 정치적 민주화를 유보시킨 조치는 비록 지금의 산업화로 공간적 변화, 디지털적 변화, 취사와 난방의 변화, 악취 혁명을 이루었을 지라도 결코 정당한 조치는 아니었다.정치적 민주화를 이루면서 경제개발을 추구했더라면 장기적으로 훨씬 더 안정된 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을 것이고 지금 같은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평가는 등장하지 안 했을 것이다. 5.18의 아픔도 등장하지 안 했을 것이다.사람의 본성을 무시하는 한 권위주의자의 아집이 역사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교훈을 우리는 얻어야 할 것이다.그리고 민주주의는 능율이나 효율면에서 떨어지고 시끄럽지만 착실하게 조직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점도 많은 사람들의 의식속에 일반화 되기를 비는 마음이 간절하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