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된 그릇들
성경본문 : 에스라 1:1-11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다가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해방령 을 내려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 1절은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이렇게 시작됩니다.
바사는 페르시아를 한자로 적은 것입니다. 원래는 파사(波斯)인데 우리말로 옮겨오면서 바사가 되었습니다.
고레스는 일반 역사에서는 키루스 2세(Cyrus ⅡBC585?~BC529)라고 나옵니다.
고레스 원년은 기원전 538년입니다.
에스라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오고, 성전을 건축하고, 제사를 드리기 시작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의 주제를 두 글자로 말하면 ‘회복’입니다.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고향의 회복입니다.
성전을 다시 지었습니다. 성전의 회복입니다.
제사를 다시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사의 회복입니다.
율법을 다시 지키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회복입니다.
에스라는 율법에 밝은 사람입니다. 에스라서 7장 6절에 에스라를 소개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을 금했는데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방백들과 고관들, 지도층에서 이런 일들을 더 많이 했습니다. 에스라는 이 문제도 해결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정결의 회복, 또는 경건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이와 같이 회복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알렉산더 맥클라렌(Alexander Maclaren)이라는 성경학자는 에스라서 1장의 제목을 ‘회복의 전야’라고 붙였습니다.
고레스 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릇들을 돌려주었습니다.이 그릇들은 원래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던 것들입니다. 제사 드릴 때 쓰던 것들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는 성전을 파괴하고 성전에 있는 그릇들을 다 약탈해서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습니다.(왕하24:13 대하 36:7)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데 쓰이던 그릇들이 우상을 섬기는 신당에 있었습니다.
잘못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있어서는 안될 곳에 있었습니다.
이제 그 그릇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릇들이 있을 자리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목양교회 창립 43주년을 감사하고 또 이웃들을 초청해서 함께 예배드리는 오늘은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회복된 그릇들’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라’ 했을 때 바벨론 땅에 와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 전부가 ‘네’하고 일어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5절을 보세요.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유대 백성의 일부, 마음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일어나 돌아왔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 땅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서 ‘여기가 좋아요. 우리는 여기에서 계속해서 이렇게 살렵니다.’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곳에서 그렇게 살다가 사라졌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말라기, 그리고 신약성격은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있을 곳을 찾아와서, 회복된 그릇들이 되어서 예루살렘 재건에 힘쓴 사람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초청에 응해 여기 오신 분들은 일어나 돌아온 사람들, 회복된 그릇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새 역사, 아름다운 역사가 이어지도록 할 것입니다.
에스라서 1장의 표면적인 주역은 고레스 왕입니다.
‘표면적인 주역’이라고 하는 것은 이면적인 주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지요.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가게 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돌려보내면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사람들 주위에 있는 주민들은 그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주시오’ 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4절)
고레스의 통치 밑에 있던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은 그릇, 금, 물품, 짐승, 보물들을 내 주었습니다.(5절)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일을 ‘제2의 출애굽’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 출애굽을 할 때에도 애굽 사람들에게 많은 물품을 받아 가지고 나왔습니다. 출애굽기 12장 3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레스, 참 너그러운 왕입니다.
성경은 유대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지요.
유대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다시 말하면 성경의 비주류로서 하나님께 가장 칭찬 받는 사람은 고레스입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보고 “내 목자”라고 했습니다.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할 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서 44장 28절을 보세요. 평소에는 이럴 때 스크린을 보면 되는데 오늘은 성경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1023쪽입니다.
“고레스에 대하여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이어지는 45장 1절에서는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칭찬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앞과 뒤에서 야곱을 부르면서 야곱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44장 21절을 보세요.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45장 4절을 보세요.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나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하나님은 자기가 택한 야곱, 이스라엘 백성을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울이지요. 바울 서신 곳곳에, 특히 시작부분에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종은 불의한 고난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서 53장을 비롯해서 이사야서 여러 곳에 고난 받는 종의 노래가 나오지요.
종은 찔리고, 상하고, 징계 받고, 채찍에 맞고, 곤욕을 당하고, 심문을 당하고, 죽습니다.
종은 고요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칭호를 주셨다고 했는데 종이란 가장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칭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다가 ‘아, 김선일 형제야말로 하나님의 종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선일 형제의 억울하고 비극적인 죽음, 참 슬픈 일이지요.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중국에 이어 복음이 힘있게 전해질 곳은 이슬람권이고 김선일 형제는 그 선봉에 서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김선일 형제가 이슬람 선교에 얼마나 열망을 품고 있었는지 밝혀지고 있습니다.
외국어대 아랍어과를 졸업하고 통역대학원에 들어가려다가 언어와 문화를 함께 배우기 위해 이라크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선일 형제는 가나 무역에 지원할 때 제출한 자기 소개서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약 5개월간 꾸준히 기도를 한 끝에 선교사에 대한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주셨고 좀 더 구체적인 비전을 위해서 계속 간구를 하고 묵상을 하던 중 중동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을 하던 주에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 속에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
게 되었고 중동선교사의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물네 살 난 이라크 자매와 결혼할 계획을 가지고 유월 초에 그 부모와 만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자기 직업에 종사하면서 선교를 하는 사람들을 ‘전문인 선교사’라고 부르는데 감리교 신문인
「기독교 타임즈」는 이번 호에서 김선일 형제를 전문인 선교사라고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쓰고 있습니다.
‘이런 김선일 형제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왜 데려가셨을까? 그것도 이와 같이 특별한 방법으로 데려 가셨을까?’ 참 궁금하지요.
교회 홈페이지 청년부 메뉴를 열어보면 어느 청년이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었는데, 비전을 품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데려가셨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전 기독교인들의 간절한 기도를 안 들으셨나봅니다. 이런 식으로 응답하시니 말입니다.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부족한 저희들이 다 이해할 수 없지요.
이 청년은 김선일 형제가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하나님의 종은 고난을 받아야한다는 사실도 알아야합니다.
영국의 토마스 목사가 우리 나라에 전도하려고 오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통역의 신분으로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 호를 타고 들어오다가 선원들과 평양 주민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대동강변에서 순교했습니다. 1866년 9월 3의 일이지요.
어느 교회 역사가는 토마스 목사님의 일을 적으면서 ‘토마스 목사님의 피가 흐른 대동강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평양을 비롯해서 대동강 유역에 기독교가 유난히 왕성했던 일을 토마스 목사의 순교와 연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일제 시대에 시베리아 지역에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교역자 두 분과 평신도 두 분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하겠다고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배가 풍랑을 만나 파선을 하는 바람에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1918년의 10월 26일의 일이었고 이 네 분의 이름은 박노기(朴魯琦) 목사, 김희서(金希西) 교사, 전영태(全永泰) 총찰, 최응선(崔應善) 감로였습니다.
이들은 침례교인들인데 초기 침례교는 직분 이름이 다른 교파들과 달랐습니다. 교사는 전도사입니다.
시베리아 지역의 동포들이 이 소식을 듣고 ‘이 분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다가 희생을 당했다고 하는데 우리가 가만있을 수 없다. 우리 예수 열심히 믿자!’ 자발적인 전도운동이 일어나서 시베리아의 교회들이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침례교회사」는 이 일에 대해 ‘네 분 선교사가 시베리아에 왔었어도 이만큼 교회를 부흥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김선일 형제의 죽음을 통해 벌써 이슬람권 선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이슬람권에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져야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우리 정부의 자세도 다르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선일 형제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억울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겪었습니다.
저는 김선일 형제의 희생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그의 뜻을 이루며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 많은 분이니까…’ 하는 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고레스 왕에 대해 확인하려고 이사야서 44장을 열었다가 거기에서 종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한 걸음 더 나가는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혹시 ‘김선일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불행한 일을 당했느냐?’ 묻는 사람들이 있으면 잘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고레스 왕 이야기, 김선일 형제의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오늘은 새 홈페이지 봉헌, 포토 콘테스트 시상 순서가 있어서 설교가 좀 짧아야 합니다.
다시 그릇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다가 바벨론 왕에 의해 바벨론으로 옮겨져 왔던 그릇들은 이제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를 그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나의 그릇”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을 보세요.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그릇입니다. 로마서 9장 21절에서 24절까지를 보세요.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 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
우리는 그릇인데 보배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을 보세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밖에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릇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여러 종류의 그릇이 나옵니다. 금 접시, 은 접시, 칼, -이 칼은 향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금 대접, 은 대접, 그 밖의 그릇, 우리는 그 가운데 하나의 그릇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라는 말씀이 있지요.
하나님의 그릇들은 성전에 있어야합니다.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그릇들입니다.
성전에 있는 그릇들은 디모데후서 2장 21절의 말씀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그릇들이 되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섬기는 신들의 신당에 있는 그릇들입니다.
있지 말아야할 곳에 있는 그릇들입니다.
그런 그릇들은 하나님이 즐겨 쓰지 않습니다.
호세아서 8장 8절을 보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이미 삼켜졌은즉 이제 여러 나라 가운데에 있는 것이 즐겨 쓰지 아니하는 그릇 같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그릇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회복된 그릇들처럼 있을 자리를 회복하도록 도와야합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서 교회가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산정권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성전의 재산과 물품들을 모두 압수했습니다.
이 때 러시아정교회 티콘 총대주교는 다른 것들은 내놓으면서도 성전의 그릇들은 내놓지 않았습니다.
성전의 그릇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티콘 총대주교는 투옥되었고 그를 지지하던 성직자 수십 명이 처형당했습니다.
성전에 있는 그릇들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창립 43주년을 맞이한 목양교회는 그릇들을 많이 품고 있는 성전이 되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11절을 보니까 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고 했습니다.
적어도 그 정도의 그릇을 품고 있는 성전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그릇인 우리를 있을 자리에 있게 하신, 우리를 회복시켜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더 많은 그릇들이 회복되도록 힘씁시다.
목양교회는 그릇들을 많이 품고 있는 성전이 되도록 힘씁시다.
이와 같은 일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