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1-7
엘리야의 하나님 /
사람에게 있어 마음 속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서 삶의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예를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3절에 보면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죽이려는 이세벨 왕후의 군사를 피하여 도망치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현실이 비참하고 곤고하고 괴롭기 때문에 그런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소극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엘리야의 생애에 있어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행동은 그 동안 그가 행했던 위대한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성경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기적을 많이 베푼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행한 위대한 일들을 몇가지만 보더라도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했고, 또한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450:1로 싸워 승리하기도 했고, 또 그가 기도할 때 삼년 육개월 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쏟아지기도 했던 엄청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한 인물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 아주 초라한 모습의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450:1의 싸움에서도 승리한 엘리야가 한 여인의 칼이 두려워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특징은 도피주의입니다. 사람이 자기 능력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 택하는 마지막 수단이 도피입니다. 그런데 많은 현대인들은 조금만 어렵고 힘든 문제를 만나면 자꾸만 피해 가려고만 합니다.
약간은 오래된 이야기지만 ‘룰라’라고 하는 그룹이 표절 시비가 있었을 때 그 중의 하나가 자살을 시도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도 ‘룰라’라고 하는 그룹을 참 좋아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메스콤을 통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참 안타까웠습니다. 물론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끊으려는 행동은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의 엘리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겨우 도망쳐서 하나님 앞에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며 “차라리 내 목숨을 거둬가 달라”고 하는 모습은 그의 위대한 행동들을 지켜보았던 많은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너무나 실망스러운 모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를 평소에 존경하던 사람들이 볼 때 그런 행동은 너무나 그답지 않은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모든 것을 잘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그만 좌절하고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것을 우리 주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런 예는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이 그래서 믿음이 참 좋아 보이던 사람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도피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들 중에도 지금의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사람들이 왜 이러한 도피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가?”의 원인을 성경을 근거해서 살펴보고 그러한 도피적인 생각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도 아울러 찾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왜 현실 도피적인 생활을 하려고 하는가?”를 알아보겠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 세가지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 이유 중 첫째는 불안감입니다.
우리가 읽은 왕상 19:3을 보면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영어 성경을 보면 이 구절 속에 ‘두려워하여’라는 말을 넣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저가 이 형편을 보고 두려워하여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두려워한다’라는 말은 ‘불안’을 의미합니다. 롤러 메이라는 사람은 “불안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절박한 문제이며 가장 만연한 심리적 현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불안’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도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군가 “인간은 흔들리는 갈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가? 사람이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사실은 누구나 흔들리는 갈대처럼 약한 모습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 속의 ‘불안’이 증폭될 때 그것이 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도피하게 된
두번째 이유는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왕상 19:4에 보면 엘리야의 탄식 중에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 엘리야가 심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모습을 볼 때 엘리야는 분명히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엘리야는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실 외면적으로 볼 때 강한 사람도,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도, 모든 일을 잘 해 나가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아직 열등의식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약 5:17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이 성정이란 말은 헬라어로 ‘호모이오파데스’(ομοιοπαθη)라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은 신의 성품이 아닌 인간의 성품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죽은 사람도 살리고, 안오던 비도 내리게 하고, 450:1로 싸워서 이긴 대단한 인물이지만 그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은혜를 받았을 때는 큰 일을 했지만 연약해졌을 때는 감당할 수 없는 열등의식이 마음 속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열등의식을 느끼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무능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신앙을 없애려 하는 악한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에 맞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신앙을 다시 세우겠다는 꿈과 야망이 있었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자신의 무능력을 느끼게 되고 그만 열등의식이 생기기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한 데서 열등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현실의 문제가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때 자신의 무능력을 느끼게 되고 열등의식에 빠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학생들도 그런 문제로 열등감에 빠지는 예가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부모들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큰 것을 원하는데 자신은 사실 그럴 능력이 없을 때 결국 열등감을 갖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자꾸 다른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다 보니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 아닙니까?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사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나는 나입니다. 사람은 다 저마다의 매력이 있고 각기가 다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도피하게 된
세번째 이유는 고독감 때문이었습니다.
왕상 19:14을 보면 엘리야의 말에 “오직 나만 남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칼 로저스는 현대인의 고독은 두 가지 때문에 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다른 이로부터 소외당한 것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 사랑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했습니다. 자신의 힘든 사역에 대해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외롭고 고독했던 것입니다.
왕상 18:21에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말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을 보면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엘리야의 말에 한 사람도 호응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엘리야는 실망하게 되고 외로워진 것입니다.
사람이 고독하면 병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하나만 있으면 그래도 큰 힘이 되고 위안이 됩니다. 그런데 그럴 친구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고독만큼 무서운 병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불안감과 열등감과 고독감은 엘리야로 하여금 아무도 없는 광야로 도피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왕상 19:5에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라는 말씀은 엘리야가 완전히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모습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저 될대로 되라. 불안감과 열등감과 고독감은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도피주의와 자포자기의 삶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
이 불안감과 열등감과 고독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이 세가지를 동시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조용히 무릎꿇고 진지하게 기도해 보셨습니까?
어려운 현실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입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것 아닙니까? 믿음이 없는 한 인생은 언제나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방에 누워 잘 때도 천정이 무너져 내릴까봐 불안해서 잠을 제대로 못잔다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늘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 모든 것
하나님은 우리 학생들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받고 사는 존재입니다. 무엇이 열등합니까?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도피주의적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9세기의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젼 목사는 “아! 그리스도를 명상할 때 모든 슬픔이 소멸되는도다”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불안감과 열등감과 고독감을 해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축북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