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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규 기자의 영업왕 열전⑮/ "고객들이 저를 키웠죠" “도로에 다니는 대형트럭 종류는 다 판다고 보시면 되요.” 박은화(47) 대우자동차판매 차장은 8톤 이상 대형 트럭을 판다. 덤프트럭에서 유조차, 탑차, 레미콘차까지. 지난해에만 750대를 팔았다. 회사 내에서 단연 선두다. 33살에 처음 뛰어든 그는 지금까지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어왔다. 그 힘들던 IMF 시기에도 10대를 팔았다. 다른 남자 직원들은 1년 내내 한대도 팔지 못할 때였다. 사실 그는 한번도 트럭을 운전해본 적이 없다. 여자로서 쉽지 않을 일로 보이지만 그건 편견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트럭 영업이 너무 재미있다”고 했다. 33살에 트럭 영업 겁 없이 시작 지난 1993년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사지원서를 냈을 때 딱 3년만 열심히 해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큰 아이가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26살에 결혼해 남편과 아이들만 바라보고 살다가 그는 문득 스스로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도전해보고 싶었고, 그래서 트럭 영업을 자원했다. 회사 측에서는 승용차 영업을 권했지만, 그러면 그만두겠다고 맞섰다. 그는 “그때만 해도 젊었고, 겁이 없었다”고 했다. 기왕 할거라면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자신과의 싸움을 제대로 한번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 처음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막상 부딪혀보니 보통 힘든 게 아니었어요. 우선 체력적으로 감당이 안됐어요. 트럭 업체들이 주로 서울 외곽이나 지방에 있어 걷기도 많이 걸어야 했지요. 오후가 되면 힘이 딸려서 팔이 덜덜 떨릴 정도였어요.” 그래도 악착같이 메달렸다. 하루가 시작되면 무조건 서울 남부터미널로 갔다. 거기서 시외버스를 타고 전국 곳곳으로 갔다. 내려서는 또 군내 버스를 타야 했고, 걸어야 했다. 낯선 사람을 만나 제품 설명을 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반겨주지 않는 고객 앞에서 돌아서 나올 때는 뒤통수가 부끄러운 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하지만 여자라는 점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찾아가면 대부분 제 얼굴을 쳐다보고 진짜 트럭파느냐, 트럭을 아느냐고 물어요.” 당시만 해도 트럭 영업을 하는 ‘여자’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든 그를 기억했다. - 첫 차는 어떻게 팔았나? “석 달 만에 겨우 첫차를 팔았지요. 정말 어렵게 팔았죠. 만나서 견적 다 내고 다음 날 계약서 쓰기로 했는데, 찾아가려고 전화하니 다른 업체와 계약했다고 하더라고요. ‘어제 저하고 약속하셨잖아요.’ 그 말을 하는데 눈물이 막 흐르더군요. 그동안 고생한 생각이 스쳐가고. 전날 그 업체 직원이 술을 50만원어치 사줬던 거예요.” 그런데 찾아가 견적서를 보니 그 업체는 부가세를 빼고 견적을 냈다는 걸 발견했다. 반면 그는 부가세를 포함시켰던 것. 자초지정을 듣고난 고객은 계약을 해지하고 그에게 선뜻 차를 사주었다. “그게 제 영업의 시초였던 것 같아요. 그 분이 다른 고객을 소개했줬고, 또 그 분이 새로운 고객을 소개해줬어요. 그게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지요.” 그는 어차피 기동력에서는 남자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 기계에 대한 설명도 시원시원하지 못한 게 당연했다. 대신 그는 그를 대신해 영업을 해주는 고객을 확보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 성공 비결은? “좋은 고객들을 만났던 거예요. 그분들이 저를 이 자리에 앉혀주신 거죠. 제가 그동안 만난 고객은 다 정말 우량고객들이에요. 우량고객 주위에는 우량고객들이 모이게 마련이더군요.” 트럭은 1대 가격이 5천만원 이상하는 고가다. 그러다 보니 불량고객도 많고, 사기꾼도 있다. 하지만 그의 고객들은 한번도 할부금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IMF 때 많은 영업사원들이 부실채권 때문에 회사를 그만뒀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게 전혀 없었죠. 아마 회사 내에서 제가 유일할 거예요.” 그는 항상 고객들을 형제나 가족처럼 대한다. 새 고객이 생기면 가능하면 부인들까지 알려고 노력한다. 전화가 안 되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닌지 걱정돼 찾아가본다. “트럭 하시는 분들은 하루종일 혼자 차 안에 있게 되죠. 그냥 전화 한 통해서 내일 비올 것 같다는데, 내일 어떤 걸 싣느냐 묻는 정도지요. 가능하면 편안하게 해드리려고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요즘에는 차주 부인들이 부부간의 문제를 상담해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 가장 힘들었던 때는? “지방에 많이 다니다 보니 아이들이 아프다고 해도 가줄 수가 없어요. 그럴 때 가슴이 아프고, 일이 먼저인가, 아이들이 먼저인가 혼란이 생기죠. 한번은 지방에 있는데 아이들이 열쇠를 잃어버려 집에 못 들어간다는 전화가 왔어요. 날씨는 춥고, 집에까지 가려면 2시간은 족히 걸리고. 어디든 가 있으라고 하고 걱정을 태산같이 하면서 왔더니, 큰아이가 동생을 데리고 이마트에 가서 책을 보고 있었어요. 정말 눈물이 났지요.” 하지만 그는 ‘형제 같은’ 고객들이 있어 떠나지 못하고 있다. 회사에서도 열심히 하는 그의 능력을 인정해줬다. “관리직에는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남아 있지만, 영업은 그렇지 않아요. 실적이 모든 걸 말해주기 때문이죠.” 그는 월급 체계가 능력금 위주로 바뀐 2002년부터 억대연봉을 받고 있다. 그가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모두 어렵다고 하는 일을 해냈을 때다. “대우차는 아예 사지도 않는 운송업체가 있었어요. 제가 한번 가보겠다고 하니까 윗분들이 시간 낭비라고 말리더군요. 그래도 저는 꼭 해내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한달에 한 번 그 업체를 찾아갔다. 물론 업체 사장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3주에 한번으로 방문 횟수를 늘렸다. 여직원들 간식으로 도너스를 사들고 가기도 했다. 사장이 있을 때는 눈치보느라 직원들도 말도 걸지 못했지만, 사장이 없을 때는 그에게 정보를 주기도 했다. 그러다 2주일에 한 번, 1주일에 한 번으로 점점 방문간격을 줄여나갔다. 그렇게 1년을 하니, 업체 사장이 윗분을 모시고 오라고 했다. “자기는 정말 대우차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이 사람의 성의가 기특해 1대만 사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시작해서 10대쯤 팔아주셨지요.” 그는 방문 업체를 선택해간다. 아무 업체나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채권이 부실하거나, 할부 관리가 안 되는 곳은 스스로 발을 끊는다. 상대해서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업체 현황은 아주 좋은데, 대우차를 안 쓰는 곳은 무조건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거칠지만 순수하고 정 많은 차주들 -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은?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지요. 어떻게 이런 힘든 일을 하느냐며 항상 밥 먹고 가라고 하시는 분도 있고, 정말 자신의 사업 파트너로 인정해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분들이 저를 세워주고, 키워주셨다고 생각해요.” 그는 “큰 차 하시는 분들은 정말 순수하다”고 했다. 좋은 말도 욕으로 하는 일이 다반사지만, 마음만은 화이트칼라들보다 훨씬 순수하고 정도 많다. “간혹 오해가 생기는 일도 있지요. 그럴 때면 버럭 화를 내기도 하지만, 오해가 풀리면 먼저 미안하다고, 꼭 한번 들리라고 전화하시죠.” 그런 오해들이 오히려 고객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는 이 일을 하려는 여자 후배들이 많지 않아 안타깝다. “저 때문에 회사에서 여자를 뽑지 않으려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길을 닦아놓았는데, 하려는 후배들이 없어요. 트럭일 두려워 하는 건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지에요. 여자에게도 충분히 장점이 있는 일이죠.” 장승규 기자 skjang@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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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규 기자의 영업왕 열전 ⑭/ “영업 3년차에 모든 걸 알았어요” “먼저 상대방의 눈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일단 제 눈을 따라오기 시작하면 칼자루를 쥔 거나 마찬가지지요.” 31살의 젊은 사장은 거침 없이 자신의 영업 노하우를 풀어놓았다. 강진호 비타민하우스 S&G 사장이 처음 영업을 시작한 것은 24살 때인 1999년. 그는 군대에 자원입대한 이후 다니던 학교에 복학하지 않고 곧바로 영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복학할 형편도 아니었고, 하루라도 빨리 사회에 발을 담가 어떻게든 성공을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강 사장은 약국과 병원 매점을 대상으로 드링크 제품을 파는 식품 대기업의 광주지역 대리점에서 출발했다. 바로 현재의 비타민하우스의 전신이다. 지도 들고 전국 돌며 약국 개척 2000년 8월, 강 사장은 당시 대리점에서 함께 일하던 김상욱 현 비타민하우스 사장과 함께 ‘비타민하우스’ 브랜드를 내걸고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막 시작된 의약분업이 기회를 만들어줬다. 의약분업은 약국 시장에 큰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병원 처방전을 받기 위해 수많은 약국들이 병원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그만큼 경쟁이 치열해졌다. 비타민하우스는 식품영양학과 출신의 상담 영양사를 채용해 약국에 건강식품 코너를 설치하면 돈이 될 거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마침 서비스 차별화가 절실하던 약국들의 고민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광주 1호점을 시작으로 비타민하우스 가맹점은 빠른 속도로 불어났으면, 지금은 400억~5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탄탄한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비타민하우스는 약국과 병원에 4천개의 가맹점을 두고 있으며 전국 백화점과 할인점에도 진출해 있다. 강 사장은 지난 2005년 1월, 서울과 경기지역을 관리하는 자회사인 비타민하우스 S&G를 맡아 독립했다. - 엄청난 성장 속도다. “처음부터 이 사업이 성공할 거라고 믿은 사람은 없었지요. 일단 부딪혀 본 거죠. 다행이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광주전남지역에서 시작했는데, 약사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제대로 조직도 못 갖추고 전국 확대에 들어갔어요. 부산 경남을 거쳐, 마침내 2001년 7월경 서울에 입성했지요.” 강 사장은 “그동안 정말 미친 듯이 살았다”고 했다. 은행에 갈 시간도 부족해 제때에 공과금을 내본 적이 없다. 식사도 잠시 틈이 날 때 분식점에서 김밥을 사 차 안에서 먹는 게 고작이었다. “초기에는 영업사원이 저와 김 사장님 둘밖에 없었어요. 함께 차를 몰고 전국을 돌았지요. 저녁이면 숙소에서 지도를 펴놓고 다음 날 공략할 지역을 찾았죠. 앞으로 해야 될일 밖에 없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던 때였죠.” 약국 문을 두드리면 제품이나 운영시스템보다는 회사 설명을 먼저해야 했다. 그만큼 인지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하루 평균 30~40군데의 약국을 도는 강행군이었다. 계약목표를 채우기 위해 약국이 문을 닫는 밤 12시까지 어디든 찾아다녔다. “숙소로 돌아오면 수십 장이나 되는 명함을 정리하는 것도 큰 일이었지요. 전부다 정리하고, 기록하고, 재방문이 필요한 곳을 나눠야 했어요.” - 언제부터 영업에 자신감이 붙었나? “3년쯤 되니까 모든 게 보이더군요. 상대의 주머니에 얼마가 있는지, 오늘 계약할 사람인지, 한 달 후에 할 사람인지. 카드로 할 사람인지 현금으로 할 사람인지. 그래서 그 후로는 계약률이 거의 100%였어요. 약국에 들어가서 계약을 안 하고 나오면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지요. 한번은 3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한번도 말이 끊기지 않고 설득한 적도 있어요.” 물론 이런 자신감이 그냥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강 사장은 “병원장이든 약사든 운영상에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라며 “내가 그것에 대한 해결 노하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전혀 주눅이 들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강 사장은 상대방의 눈을 당당하게 마주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허황된 말이나 한탕주의식 접근으로는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그동안 거쳐간 수백명의 영업사원을 보아왔기 때문에 고객이 오히려 한수 위지요. 진심으로 다가가 자신을 팔 수 있어야 해요. 눈만 제대로 쳐다보면 그 약사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신의 일을 뒤로 하고 내 말에 집중하게 되지요.” - 스스로 생각하는 강점은? “전에는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영업에서 너무 적극적으로 나가면 상대가 부담을 갖게 되지요. 말에 강약이 필요한 것처럼 적절한 강약조절과 수위조절이 필수적이죠. 지금은 제 자신을 긍정하는 힘, 그런 게 강점 아닐까 싶어요.” 그는 항상 주문을 외운다고 했다. ‘나는 어떤 일을 해도 될거다’. ‘나만 열심히 하면 주위에서 분명히 도움이 올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혼자서 한 달에 1억2천만원의 매출을 올리는 기록을 세우면서 그는 이를 또 한번 실감했다. “그때는 정말 주체할 수가 없더군요. 그저 열심히 한 것뿐인데 주위에서 전화로 막 도움을 줘요. 다른 때는 매시간 매출정산을 항상 머릿속으로 하는데, 그때는 그게 불가능할 정도였지요. 비타민 1병에 2~3만원인데, 엄청난 양을 판 거죠. 그때 ‘꾸준히 노력하기만 하면 되겠구나’ 하고 다시 한번 느꼈죠.” 그는 영업만큼 보람 있는 일은 없다고 믿고 있다. 고객 한 명 한 명한테 나중에 연락이 올 때, 거래처라는 관계를 떠나 일상생활에서 오는 다뜻한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때를 특히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에게 고객은 형님이나 동생, 누나이면서, 아버지나 엄마 같은 존재다. 강 사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으로 회사 근처에 있는 한 약국을 꼽았다. “서울에 처음 입성해 김 사장님과 둘이 바로 이 근처에서 합숙생활을 했어요. 그냥 드링크류를 마시러 가곤 했는데, 비타민하우스를 잘 알고 계시더군요. 물론 고객 소개도 많이 해주셨지만, 항상 밝게 웃고 함께 기뻐해주시는 모습이 좋아요. 아마 이 동네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열고, 가장 늦게 문을 닫으시는 것 같아요.” 영업 현장 떠난 지금이 오히려 슬럼프 강 사장은 그동안 영업을 하면서 슬럼프를 겪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사장이 된 지금이 슬럼프라며 웃었다. 그만큼 그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들어났기 때문이다. 강 사장은 요즘 온라인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있다. “일반 병원과 약국의 환자 수가 굉장히 많이 줄어드는 상황이지요. 경쟁이 치열해져 조금만 잘된다 싶으면 거침 없이 옆으로 치고 들어와요. 작은 동네에도 약국이 5~6군데 있는 게 보통이죠. 이제는 오프라인에서 동네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한계가 왔다고 봐요.” 강 사장은 지난 2월부터 약국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쇼핑몰 개설 영업을 추진하고 있다. 약사들이 온라인상에서 직접 1대1 상담을 해주면서, 건강기능식품을 함께 판매하는 형태다. 두 달밖에 안 됐지만 이미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 강 사장은 “벌써 전체 매출의 절반은 온라인이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비타민하우스 특유의 추진력과 스피드가 또 한번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장승규 기자 skjang@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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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규 기자의 영업왕 열전 ⑬/ “당신의 평생 관리를 맡기세요” 저녁 9시, 강순이(50) 교보생명 FP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을 찾았다. 워낙 바쁜 탓에 좀처럼 인터뷰 시간을 잡기 어려웠던 탓이다. 널찍한 방 앞에는 ‘명예상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20년 가까이 줄곧 보험판매 1~2위를 다퉈온 그를 회사 측에서 배려해준 것이다. 그는 외부 약속을 마치고 막 돌아온 길이라며, 굳이 사과 하나를 꺼내 깎았다. 일정이 빡빡해 저녁을 굶었다고 한다. 인터뷰를 시작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상대방과 한참 동안 부동산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외국은행 지점장을 지낸 고객의 가족이라고 했다. 그가 보험에 가입시킨 고객은 죽었지만 10년 넘게 지금까지 가족들을 ‘보듬고 있다’고 했다. “인간관계란 그런 것 아니냐”며 웃는다. 매년 해외에 나간 고객 직접 방문 그는 1983년 대졸사원 공채로 처음 보험에 발을 들여놓았다. 직장단체 전담사원이었다. 당시 기본급은 20만원으로 짭짤했다. 은행원이던 남편 월급과 똑같았다. “영업이 뭔지, 보험이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어요.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알았으면…”. 하지만 교육을 받으면서 ‘보험정신’이 마음에 와닿았다. 보험이 이렇게 좋은 거라면 해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직장단체 전담사원이 어떤 건가? “집집마다 방문하는 일반 주부판매사원과는 차이가 났어요. 한 회사를 정해 그 회사 직원들을 상대로 영업을 했지요. 한곳에서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죠.” 그가 맡았던 곳은 동국건설과 효성물산 그리고 외국계 은행들. 나중에는 시중은행까지 영역을 넓혔다. 교육을 받을 때는 의욕에 넘쳤지만 막상 현장에 부딪혀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처음에는 잡상인 취급을 받아 들어가기조차 힘들었다. 거의 매일 찾아가다시피하며 그 회사 직원과 다름없이 되려고 노력했다. 돈을 아끼려고 4대문 안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거의 걸어다녔다. 고객을 만나 설문을 받으면, 그 정보에 맞춰 고객 라이프 사이클을 일일이 손으로 그려야 했다. 지금은 컴퓨터로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한 장 그리는 데 30~40분 걸리는 작업이었다. 100장의 고객 설문을 받고 나니 고객 한 명이 나타났다. “교육받은 대로 정말 열심히 보험이론을 고객들한테 설명했지요. 종합상사 직원들은 해외 바이어들도 자주 만나고 하다 보니 보험에 대해 빨리 이해를 했어요. 하지만 은행 사람들은 평생직장이란 생각에 굳이 보험을 들 필요를 못 느꼈어요. 자녀 등록금까지 은행에서 다 대주는데 직장만 열심히 다니면 된다는 식이었지요.” 여러 회사를 다니다 보니 자연히 산업의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인수합병이 활발하던 미국계 은행들을 보고, 우리나라 은행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거라고 예언을 했는데, 불과 10년 뒤 IMF 사태로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지요.” 보험의 필요성을 또 한 번 절감한 계기였다. 직장을 일종의 보험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더 이상 그런 시대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죠. 30대 초반 은행원이었는데, 아이가 백혈병에 걸렸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해 갓 결혼한 30대 초반의 아빠가 무슨 돈이 있겠어요. 다행히 가족까지 다 되는 암보험을 들고 있어서 보험금 타고 치료를 열성적으로 충분히 해서 완치가 되었지요.” 병으로 보험금을 타는 고객들이 하나둘 늘면서 강 FP는 고객들끼리 환자 동호회를 만들 수 있도록 주선해주고 있다. 폐암환자는 폐암환자끼리 서로 정보를 나누고 의지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것이다. - 주요 고객층은? “IMF 이후 고액 연봉자, 고액 자산가 시장으로 방향을 조금씩 바꾸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관리하는 고객 수는 다소 줄었지만, 금액은 훨씬 커졌지요.” 그는 “이쪽 시장 개척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앞으로도 20년은 더 보험 일을 할 생각이기 때문이란다. 그는 고액 자산가들을 대상으로한 영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 가족처럼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분들이 뭘 필요로 하는지 잘 파악해서 빈틈없이 해드리려고 노력해요. 대소사를 챙기는 것은 기본이고 보험일이 아니더라도 가려운 곳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긁어주는 거죠. 이를테면 고객 집안에 노처녀가 있으면 신랑감을 찾아서 열심히 연결을 해주지요. 고객 풀(Pool)이 많고, 또 양쪽 집안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강 FP는 그렇게 해서 지난해에도 2건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1년에 한 번씩 해외에 나가 있는 고객들을 찾아 ‘순방’을 떠나는 것도 강 FP의 독특한 영업 노하우. 해외 지점에 발령받아 나가는 고객 수가 많아지면서 시작했다. 지난해에도 미국과 유럽, 홍콩, 일본을 다녀왔다. “한번 찾아가면 고객들이 정말 반가워하지요. 선물을 주기도 하고, 모여서 식사도 같이 하고. 여기까지 도망왔는데 찾아와 더 이상 도망갈 데가 없다고 농담도 하세요.” - 고객 발굴은 어떻게 하나? “요즘은 조금만 노력하면 고객을 발굴할 수 있는 통로가 아주 많아요. 저는 주로 신문을 활용하지요. 신문에 실리는 사람 이야기들은 저에겐 아주 유용한 정보죠.” 정 FP가 특히 관심을 갖는 건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명인사들. “그런 분들은 일만 열심히 하기 때문에 자기관리에 소홀한 경우가 의외로 많아요.” 물론 만날 때는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선물’을 준비한다. 자주 이용하는 것은 사진. “신문에 좋은 인물 사진이 실린 걸 보면 직접 신문사에 연락해 사진을 구하지요. 그걸 멋있는 액자에 넣어주는거예요.” 그렇다고 한두 번 만남으로 보험을 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이 필수적이다. “보험을 꼭 팔아야한다는 목적의식을 앞세우지는 않아요.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경제의 흐름을 놓치지 말라 거액 자산가들의 재무 컨설팅을 하려면 경제 흐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늦게까지 일을 하는 경우가 잦은 정 FP는 그래도 자정 뉴스와 새벽 6시 뉴스만은 빼놓지 않고 본다. 그래야 고객들과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매일 챙기지 않으면 어제 주식이 30 포인트 떨어졌는지 안 떨어졌는지 알 수 없어요. 부동산도 직접 투자를 하든 안하든 흐름을 알고 있어야지요.” 그는 2005년은 “한동안 쉬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일을 안했다는 뜻은 아니다. 신규 계약을 줄이는 대신 기존 고객들과의 관계를 다져나간 것이다. 그로써는 미래를 위한 일종의 투자였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올해 또 한 번 공격적으로 뛸 참이다. 그가 처음 만났던 고객들은 어느새 60~70대가 됐다. 이제는 3대를 관리해주는 고객들이 적지 않다. 한번 인연을 맺은 고객이 2세, 3세로 이어지고 있는 것. “20대에 처음 보험을 시작하면서, 고객들한테 이런 말을 하곤 했어요. ‘앞으로 20~30년 더 직장생활을 하실 텐데 보험 관리를 20대인 저한테 맞겨라, 저는 평생 관리를 해줄 수 있다’고요. 그때 한 약속을 지키는 게 저한테는 소중해요. 그것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지요.” skjang@economy21.co.kr * 지난 274호부터 연재해오던 ‘장승규 기자의 영업왕 열전’은 이번 주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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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규 기자의 영업왕 열전 ⑫/ “펀드, 아는 만큼 팔 수 있다” “잘 아는 후배들은 강남 지점으로 옮기라고 하지요. 돈의 단위가 달라 저 정도면 훨씬 높은 실적을 충분히 낼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어요. 제가 떠나면 거래 끊겠다는 고객들이 많거든요.” 이진우(48) 우리은행 북가좌동지점 부지점장은 지난해 강남·분당 등 내로라하는 PB전문 점포를 모두 제치고 펀드 판매 1위에 올랐다. 그가 혼자서 판 것만 280억원어치. 이것은 우리은행은 물론 은행권을 전체를 통틀어서도 뛰어난 실적이다. 2004년초 펀드에 처음 ‘필(feel)이 꽂힌’ 그는 이후 ‘미친 듯’이 펀드를 팔았다. 1년 동안 설득해 펀드 가입시키기도 - 판매 비결은 뭔가? “펀드 가입은 이제 필수지요. 뛰어난 고수익에 놀라운 절세효과를 갖고 있는 펀드를 따라갈 만한 상품은 없어요. 이런 장점을 분명하게 보여드리는 게 중요하지요.” 이 부지점장은 다른 고객의 최신 사례를 적극 활용한다. “이 분은 지난해 10월18일에 10억50만원을 넣었는데, 벌써 2억3500만원의 수익을 올렸지요. 그런데 세금은 134만원밖에 안 되요. 정기예금에서 이 정도 수익이 났다면 대략 3500만원(15.4%) 세금을 내야 해요. 개인정보는 빼고 이런 아주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면, 대개 마음을 움직이게 되지요.” 처음에는 펀드에 대한 인식이 낮아 설명에 애를 먹기도 했지만 이제는 한결 쉬워졌다. 지난해에 불었던 적립식 펀드 열풍으로 많은 사람이 펀드의 매력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주식투자로 손해를 봤던 고객들은 여전히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럴 때는 소액이라도 일단 투자해 볼 것을 권한다. “우선은 10만원 정도만 넣도록 하지요. 10만원이든 10억원이든 수익률은 똑같거든요. 높은 수익률을 확인하고 나면 한 달도 안돼 추가불입을 하겠다고 찾아오지요.” 이 부지점장은 “고객을 설득하는 일은 미성년자에게 성교육을 시키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만큼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현재 관리하는 100여 명의 고객 가운데는 1년 동안 설득해 펀드에 가입시킨 경우도 있다. “5억원 정도 정기예금을 갖고 있는 분인데, 2004년 여름부터 꾸준히 설명을 했는데 계속 흘려들으셨지요. 결국 지난해 1년 만에 가입을 하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인터넷으로 정기예금을 해지해 펀드에 추가로 돈을 넣으셨더군요.” 이 부지점장이 펀드 판매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2004년부터이다. 그는 그해 1분기에만 해외 뮤추얼펀드 100억원어치를 팔아 전국 지점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한 해 전부터 꾸준히 씨앗을 뿌려둔 덕분이었단다. 해외 뮤추얼 펀드 판매가 처음 시작된 2003년 봄 본점 교육에 갈 때마다 그는 남는 교육 자료를 모조리 싸들고와 고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때 가입한 고객들이 펀드투자로 높은 수익률을 올렸고, 1년 만기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재투자로 계속 이어졌다. - 그동안 손실이 난 경우는 없나? “다행히 아직까지 그런 경우는 없어요. 하지만 저를 믿고 맡겼는데 혹시라도 잘못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항상 있지요. 금액이 커져 나름대로는 고민도 되고요.” 그는 펀드 영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고 했다.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며, 항상 고객 입장에서 상품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 이 부지점장은 지난해 연세대 경영대학원 금융공학과정에 입학했다. “그런 과정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이더군요. 바로 입학시험을 봤지요. 환율, 파생상품, 거시경제, 미시경제 등 여러 가지로 큰 힘이 되고 있어요.” 또한 도움이 될 만한 세미나가 있으면 빼놓지 않고 찾아다니고, 주요 경제지표도 그때그때 챙겨 정리한다. 그는 “고객의 자산을 맡아 관리하는 만큼 최소한 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각종 요소에 대해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한다”고 했다. 금융통화위원회나 미국 공개시장위원회가 있거나, 선물, 옵션 만기일 등 주가 변동성이 커질 수 있는 날이면 이 부지점장은 신경을 곤두세운다. “자금을 대기시켰다가 주가가 많이 빠지면 저가 매입에 들어가고, 일정 수익률 이상이 나온 건 환매하지요.” 적립식 펀드처럼 정해진 날짜에 기계적으로 돈을 넣거나 빼는 게 아니라, 고객에게 가장 유리한 타이밍을 골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는 원금의 10% 이상 수익이 나면 일단 환매를 권유한다. “몇 년 동안 펀드를 판매하면서 얻은 일종의 노하우죠. 우리 주식시장은 조정을 받을 때 하락폭이 크기 때문에 고객들이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1년 동안 기다리는 것보다 일정 수익이 나면 환매한 다음 다시 들어가는 게 좋을 수도 있어요.” 또 가급적 언제든 환매가 가능한 펀드에 우선순위를 둔다. 최악의 경우 즉시 빠져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부지점장은 이런 식으로 항상 새로운 ‘전략’을 고민한다. 지난해에는 보통 10개 펀드에 분산 투자를 권유했지만, 올해부터는 전략을 바꾸었다. 굳이 10개로 나눌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10개 펀드 가운데서도 우열이 금방 드러나는데다, 계좌가 여러 개이다 보면 주가 급락시 빠져나오는데 기동성이 떨어지게 되지요.” 몇 주 전에는 거액의 자금도 적립식화하면 되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지난해 적립식 펀드가 큰 인기를 얻었지만, 아직까지 실제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이 부지점장이 관리하는 자금 가운데 적립식 비중은 10%가량에 머물고 있다. “적립식 투자는 이미 미국에서 1940년대에 시작돼 60년 이상 검증받은 뛰어난 투자 방법이지요. 장기간 넣기만 하면 틀림없이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어요. 큰 자금도 한꺼번에 거치식으로 투자할게 아니라 적립식 투자방법을 적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이를테면 10억원을 5천만원씩 20개월 또는 1억원씩 10개월로 나누어 넣는 것이다. 검증 안 된 상품은 팔지 않는다 - 펀드 판매의 원칙이 있나? “반드시 직접 검증한 상품만 팔고 있어요. 10만원 정도 제 돈을 넣고 실적이나 운용사의 특성을 파악해보는 거죠.” 특히 신설 자산운용사에서 만든 펀드의 경우 이러한 검증 과정은 필수다. 지난해에는 무려 10개월 동안 지켜본 다음에야 고객에게 판매한 경우도 있다. 이런 철저함 탓에 이 부지점장을 믿고 거액을 선뜻 맡기는 고객이 적지 않다. 수십억원짜리 청구서를 써놓고 알아서 처리해달라는 경우도 있다. 물론 최종 결정은 고객의 몫이다. 그가 관리하는 고객 가운데는 다른 은행의 임원도 있다. “요즘은 고객으로부터 소개받고 멀리서 찾아오시는 분들도 적지 않아요. 그럴 때마다 힘이 나지요.” 이 부지점은 행내에서도 ‘노력파’로 인정받고 있다. 상고를 졸업했지만, 국제공인 개인재무설계사(CFP)를 비롯해 변액보험, 손해보험, 인보험, 투자상담사 1·2종, 금융자산관리사(FP) 등 무려 7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IMF 이후 구조조정이나 금융산업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더군요.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격증에 매달리게 됐지요.” 2001년부터 주말이면 학원으로 직행했다. “처음에는 언제 쓸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첫 강의를 듣는 순간부터 고객들의 얼굴이 막 떠올랐어요. 세금에 대한 내용은 어떤 고객에게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또 이건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구나,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쉴새없이 달리고 있다. 그는 동료, 후배 직원들에게도 자격증 따기를 ‘강권’한다. 한번 배워두면 퇴직 후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skjang@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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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규 기자의 영업왕 열전 ⑪/ 그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청호나이스 김장(52) 처장은 회사 내에서 가장 잘나가는 영업맨이지만 차를 갖고 다니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걷는다. 대신 그러는 동안 끊임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핸드폰 안에 저장된 181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눌러보면서 그 사람과 관련된 것들을 연상해본다. 그가 관리하는 판매직원이라면 뭔가 고민은 없는지, 고객이라면 언제쯤 다시 방문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점검하고 계획을 세운다. 어느 때부턴가 갖게된 그만의 독특한 습관이다. 그는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도 좀처럼 지우지 않는다. 용량이 ?차 자동삭제될 때까지 그대로 둔다. 틈나는 대로 보면서 뭔가 해줄 말을 준비하고 잊지 않기 위해서다. 광고기획사 사장에서 정수기 영업맨 변신 김 처장은 이런 부지런함으로 2002년과 2003년에 이어 지난해 또 한번 판매 1위에 올랐다. 지난해 김 처장이 이끄는 팀이 올린 매출은 90억원. 지난 1999년 광고기획사 사장에서 정수기 영업사원으로 변신한 지 6년만에 거둔 결실이다.“사장까지 했던 사람이 영업한다고 하면 다들 놀라지요. 하지만 저는 개의치 않아요. 영업은 땀 흘리며 노력한 만큼 정직한 댓가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벽돌 한 장을 나르면 벽돌 한 장 값을 정확히 벌 수 있지요.” 김 처장은 IMF 사태 이후 겪은 아픈 경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스스로 “홍수에 떠내려가는 썩은 고목”이란 생각이 들 만큼 실의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그는 1977년 홍보영상물을 제작하는 작은 광고기획사를 창업해 한때는 직원을 40여명 정도 둘 만큼 사업이 번창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IMF 사태의 높은 파고를 넘지 못했다. 거래 기업들이 잇따라 부도를 내면서 직원들 월급도 못 줄 만큼 심각한 경영난이 찾아왔다. “적자는 계속 쌓이고 그렇다고 폐업도 못하는 처지였지요. 집에서는 무능한 가장, 회사에서는 무능한 사장, 아무리 몸부림쳐도 도무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어요.” 직원들 보기 미안해 출근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복권 당첨이라는 헛된 꿈에 메달려보기도 했다. “그러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건 없다는 거죠. 노력한 만큼 댓가를 얻을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됐죠.” 처음에는 회사를 계속 운영하며 퇴근 후 정수기 판매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 가서 볼펜 한 자루 팔아본 적이 없던” 그에게 영업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전까지 홍보영상물 만들면서 일주일씩 집에 못 들어간 적은 있지만 영업은 처음이었지요. 막막하더군요. 그때 아내가 정말 영업을 할 작정이면 자기한테 먼저 팔아보라고 했어요. 어차피 할거라면 제대로 해보라는 거였죠. 아이들까지 다 불러 놓고 교육받은 대로 ‘FM’대로 그대로 했지요.” 회사에서 배운 대로 ‘물 실험’을 해보이자 반응은 뜨거웠다. 될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김 처장은 처음 2달 만에 7천만원어치의 정수기를 팔았다. 이후 회사를 후배에게 넘겨주고 본격적으로 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정수기 영업은 주로 ‘연고 판매’ 위주로 이루어진다. 혈연, 학연, 지연 등을 최대한 활용해 가까운 곳에서부터 점차 대상을 넓혀가는 것이다. 잘 아는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것은 쉬운 점도 있지만 어려운 점도 많다. 초기의 창피함과 거절당했을 때의 아픔을 이겨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는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게 오히려 더 쉬울 수도 있다. 김 처장은 “처음에 자신감을 얻으려면 우선 가까운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며 “그러다 보면 저절로 자신감이 생기고, 나중에는 누구한테든 물건을 팔 수 있게 된다”고 했다. - 영업 비결은 뭔가? “가장 중요한 건 적극성과 자심감이지요. 그래야 고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요. 영업은 결국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봐요.” 정수기 영업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가격’이다. 대당 가격이 100만원이 훨씬 넘어 쉽게 사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이 된다.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흔히 쓰는 정수기는 필터가 1~2개뿐인 여과기에 불과하지요. 처음에는 어느 정도 정수 효과가 있지만 며칠 지나면 불순물과 바이러스, 박테리아가 짠뜩 끼어 오히려 더 해로울 수 있어요. 이런 설명을 하면 대게 구매 필요성을 느끼지만, 문제는 가격인 거죠.” 김 처장은 정수기는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제품”이라고 믿는다. 그만큼 제품에 대한 확신이 있고, 누구에게든 팔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정수기는 한번 들여 놓으면 온 식구가 1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잘 쓸수 있지요. 비싸다고 하지만 사실 약값 들이고,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그 돈은 다 나가는 거에요.” 물론 단순한 ‘설명’만으로 고객의 구매 결정을 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난관을 뚫고 제품을 팔려면 나름대로의 치밀함과 승부욕이 있어야 한다. 김 처장이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스피드. 고객이 구매 결정을 미루도록 놓아두어서는 절대 물건을 팔 수 없다는 것이다. “한번은 고객 분이 전화를 했어요. 이런 분들은 대개 실제 구입할 의사를 갖고 있기보다는 ‘세계 최초 얼음정수기’라고 하니까 그게 뭔가 알아보려고 하는 경우가 많죠. 설명 좀 해달라고 그래요. 그래서 찾아 뵙고 설명드리겠다고 하고, 바로 쫓아갔지요.” 찾아가보니 강남 아파트단지의 관리소장이었다. 요모조모 설명을 듣고 나서 구매 의사는 있는 듯 했는데,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이럴 때 그냥 돌아서면 안 되지요. 설명을 들을 때는 꼭 필요한 제품이라고 생각하고 환경의 중요성도 느끼지만 며칠 지나면 금방 잊어버리거든요. 지금까지 이 물 먹고 살았는데 굳이 살 필요 있나, 그런 생각을 하게되는 거죠. 결국 그 자리에서 물건을 팔고 나왔지요.” 또한 모든 설명을 고객에 초점을 맞추어 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고객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인 셈이다. 제품에 대한 특성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한 직원이 전화기를 잡고 씨름을 하고 있더군요. 보니까 경제여건이나 여러 가지를 봐서 가장 비싼 제품을 살 고객인데 제일 싼 제품 설명을 한참 하고 있어요.” 그는 전화를 넘겨받아 5분 만에 제일 비싼 제품을 팔았다. 두 제품의 차이점을 하나하나 짚어며 고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물러설 때는 물러설 줄도 알아야 물론 공격적인 영업이 항상 성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물러설 때는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김 처장은 “당장 물건을 사주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며 “헤어질 때 어떻게 헤어지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당장 사지 않는다고 감정을 사게 되면 영업은 그걸로 끝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금은 못 사지만, 나중에는 얼마든지 살 수도 있지요. 그 사람이 나중에 누구에게 물건을 사느냐는 그때 영업사원이 어떻게 행동했느냐로 결정되는 거죠. 좋은 인상을 심어주면 나중에 틀림없이 연락이 오게 되지요.” 김 처장은 그동안 판매를 늘리면서 팀장, 본부장, 국장, 선임국장, 처장의 단계를 착실하게 밟아나갔다. 지금은 140명에 이르는 판매원 관리가 김 처장의 주된 업무. 독립 회사처럼 움직이는 사업처의 사장격이다. 청호나이스에는 이런 사업처가 모두 19개 운영되고 있다. 김 처장은 “새해가 시작되면서 2005년에 1등 했던 일은 다 잊었다”며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고 했다. skjang@eoc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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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규 기자의 영업왕 열전 ⑩/ “봄이면 창밖으로 나무에 싹이 돋는데, 어느 날 보면 벌써 낙옆이 돼 있어요. 그렇게 정신 없이 일하는 거죠. 친구들은 그래요. 영업에 미쳤다고. 친구 모임에 거의 못 나가니까요.” 만도위니아 영업본부 장순희(42) 팀장은 억대연봉자가 된 요즘도 바쁘게 움직인다.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는 건 기본이고 주말에도 쉬지 못한다. 김치 냉장고의 성수기인 김장철에는 귀가 얼얼할 만큼 고객상담도 해야 한다. 판매가 뜸할 때는 시장 개척을 위해 전단지를 들고 발품을 판다. 장 팀장은 “97년 서른세살 때 처음 시작했는데 어느새 마흔둘이 됐다”며 웃었다. 그는 꾸준한 노력으로 지난해 판매 4위(12억원)에 올랐고, 올해 드디어 판매왕(13억6천만원)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년만 버티자" 어려움 이겨내 장 팀장이 파는 것은 김치 냉장고와 에어컨, 이온수기 등 3가지. 주력 제품은 역시 김치냉장고 ‘딤채’다. “처음 시작할 때는 김치냉장고가 많이 보급되지 않아 주로 에어컨을 팔았지요. 농협의 생활물자팀에서 10년정도 근무했는데, 회사가 기흥으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일을 찾게 되었어 요. 만도에 주부 판매조직이 있다는 말을 남편한테 듣고, 따져보니 에어컨 10대 정도는 금방 팔겠더라고요. 그래서 114에 물어 찾아갔죠.” 그렇게 시작해 그동안 5~6천명의 고객에게 김치냉장고와 에어컨을 팔았다. - 처음 시작해서 어려움은 없었나? “연고 판매가 생각만큼 쉽지 않았어요. 부탁했는데 거절당하면 마음이 정말 아프지요. 이건 아시다 싶어서 전단지를 들고 무작정 나서서 발길 닿는 대로 3시간이고 4시간이고 다니면서 뿌렸어요. 덕분에 첫해에 에어컨을 꽤 팔았지요.” 문제는 김치 냉장고 판매였다. 에어컨은 몸으로 뛰면서 어떻게든 팔 수 있었지만 김치 냉장고는 좀처럼 실적을 내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김치 냉장고를 구입하는 가정은 드물었다. “계속 영업을 해야 하는 건지 회의가 들었어요. 하지만 한번 발을 들여놓았으니 1년만 견뎌보자, 그렇게 결심했지요.” 곧이어 IMF 사태로 만도위니아가 휘청이면서 영업 사원들이 경쟁사로 대거 빠져나갔지만, 장 팀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학습지나 보험 영업 쪽의 유혹도 물리쳤다.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준 것은 ‘시장’이었다. “김치 냉장고에 관심을 갖는 건 주로 주부들이지요. 주부들이 가장 많이 모이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하다가 시장을 떠올렸어요.” 곧바로 동대문 시장과 남대문 시장으로 달려갔다. 장 팀장이 주 대상층으로 고른 것은 바로 시장 상인들. 시장 상인은 대부분 주부이기도 했다. “그분들은 너무 바빠서 따로 쇼핑할 시간이 없어요. 제품 카탈로그에 명함을 찍어서 돌리기 시작했지요. 마진을 줄이고 가격을 최대한 저렴하게 해드렸죠.” 그러면서 ‘한 명의 고객 뒤에서는 열 명, 스무 명의 고객이 숨어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 한번 구매한 상인들은 제품을 알리고 더 많은 고객을 끌어오는 적극적인 ‘협력자’가 되었다. “요즘은 쇼핑하러 동대문이나 남대문에 가면 거의 제 고객이지요. 어디를 지나가도 차를 몇 잔은 얻어 마셔요. 정말 고맙기도 하고, 저한테는 소중한 자산이죠.” - 그런 고객이 몇 명이나 되나? “지금까지 저한테 제품을 구매한 고객이 5~6천명 정도예요. 너무 많아 그분들을 따로 관리하지는 못해요. 그 중에서 꾸준히 새로운 고객을 소개해주시는 적극적인 협력자는 200명쯤 되지요.” 장 팀장은 고객을 소개 받으면 빼놓지 않고 ‘작은’ 사은품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주로 김치 냉장고 용기를 드리고 있어요. 저희 김치 냉장고를 이미 구입해 쓰고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죠. 김치 냉장고 용기를 서비스센터에서 따로 구입하려면 꽤 비싸지만, 저희는 조금 싸게 살 수 있거든요.” 물론 식사를 대접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성의를 표시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 영업을 잘하는 비결은? “고객이 편하게 느끼도록 하는게 가장 중요하지요. 절대 부담감을 줘서는 안 돼요. 저와 상담하고 나면 다들 편하다고 해요. 사실 이름이 조금 촌스러운데, 똑같이 영업을 나가도 제 이름을 기억하고 연락을 주시거든요.” 장 팀장은 영업자가 먼저 마음을 열고 편한 마음으로 다가가야만 고객도 마음을 열 수 있다고 했다. 또 제품 설명을 할 때는 1~2분 안에 요점을 전달해야 한다. 모두 바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제품 설명을 하고나서 먼저 큰 리터(ℓ)를 원하는지 작은 걸 원하는지를 물어요. 그리고 나서 거기에 맞춰 ‘지금까지 경험상 이런 모델을 소비자들이 많이 찾더라’ 하고 딱 집어서 추천하는 거죠.” 김치 냉장고의 판매는 주로 김장철에 이루어진다. 하루 40~50통씩 주문전화가 밀려들기 때문에 배송이 제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개중에는 감정적으로 불만을 터트리는 고객들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고객들을 감정적으로 대해서는 안 되지요. 한번 신뢰를 잃은 고객들은 거기서 끊나지 않고, 그걸 주변 사람들에게 퍼트리게 되죠.” 성격 좋은 장 팀장도 감당하기 힘든 경우가 있었다. “김치 냉장고를 당장 갖고오지 않으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10분 간격으로 전화를 하시더라고요. 최선을 다해 빨리 보내드리겠다고 끝가지 참고 설득했지요. 결국 계약 취소까지 가지 않고 배송을 마쳤는데 본인의 행동이 미안했던지 ‘장 팀장의 소비자 대처방법에 칭찬을 보낸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더군요.” 김 팀장은 한번 구매 계약을 한 고객이 계약을 취소하는 것은 스스로도 용납이 안 된다고 했다. “배송이 될 때까지 김치를 실어다 임시로 대신 보관해 드리겠다고 한 적도 있어요.” 먼저 마음을 열어라 만도위니아는 김치 냉장고 시장의 강자다. 시장 점유율이 60~70%에 이른다. “김장철이 되면 주부들이 친정이나 시댁에서 김치를 얻어 오고 하는데, 저희 김치 냉장고 용기를 안 갖고 있는 분들이 없어요. 그만큼 보급이 많이 된 거죠. 그만큼 좋은 제품을 팔고 있다는 게 뿌듯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어요.” 만도위니아에서 김치 냉장고를 처음 내놓은 지 이제 10년이 됐다. 최근에는 구형 제품의 보상 판매에도 주력하고 있다. “요금 같은 비수기에는 회사에서 기존 구매 고객들의 리스트를 받아 보상 판매를 알리는 전화를 주로 해요. 이제는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금방 감이 와요.” 물론 그렇다고 바로 그 자리에서 구매 결정을 하는 고객은 많지 않다. 억지로 권유하지 않고 전화번호만 남긴다. 전화번호를 남길 때도 핸드폰뿐만 아니라 사무실 번호를 항상 함께 남긴다. 그만큼 신뢰감이 커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장 팀장은 “이제는 어떤 고객이라도 물건을 팔 자신이 있다”고 했다. “친정 어머니가 굉장히 정이 많은 분이셨어요. 동네 사람들 다 모시고 식사를 할 정도였고, 오가는 사람들도 집으로 불러 대접하면서 많이 베푸셨지요. 사람들을 참 편하게 대하셨고, 그걸 보고 자라서 그런지 저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죠. 남한테 부담을 주지 않고, 먼저 마음을 여는 거죠.” skjang@eo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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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 메리어트 판촉부 임연주(26) 씨는 같은 부서 8명의 팀원 가운데 유일한 ‘세일즈우먼’이다. 나이도 가장 어린 막내다. 대학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했고, 졸업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힐튼호텔에서 경력을 쌓았다. 객실 판매는 2003년 귀국해 소피 앰버서더 호텔에 자리를 잡으면서 처음 시작했다. 지난해 특1급 비즈니스호텔 JW 메리어트로 옮기면서 그가 맡게 된 영역은 외국계 반도체 회사와 화장품 업체. 네비게이터 달고 하루 5개 업체 발문 “처음에는 반도체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어요. 단순히 칩을 만든다는 정도였죠. 밤새도록 인터넷도 뒤지고, 틈틈이 전문가들에게 도움도 받으면서 어려운 전문용어들을 하나하나 배워 나갔지요. 요즘은 IT관련 뉴스나 잡지들을 빼놓지 않고 챙겨보고 있어요.” 그가 업계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비즈니스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설비확장 계획을 내놓으면, 관련 장비업체들간의 치열한 수주경쟁이 시작된다. 임씨는 “작은 칩 하나를 만드는 데 280개 공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입찰을 통해 최종계약이 이루어지면 그에 따라 해외에서 엔지니어들이 들어오게 된다. 많게는 수십 명의 엔지니어들이 몇 달씩 호텔에 머물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들을 유치하는 게 목표다.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모든 게 결정된 뒤 움직이면 이미 늦어요. 미리 준비해서 제안을 해야 우리 호텔로 끌어올 수 있지요.” 지난해 JW 메리어트는 2000년 출범 이후 처음으로 하얏트 호텔을 제치고 비즈니스 시장에서 1위를 차지했다. 임씨 역시 방 수로는 1600방, 무려 30억원어치를 팔았다. 물론 이것은 연간계약을 기준으로 따진 실적이다. 해외 출장수요가 많은 글로벌 기업들은 대개 호텔을 정해놓고 1년 단위로 미리 계약을 맺는다. - 영업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누가 의사 결정을 하는지 빨리 파악해 내야 해요. 그 회사의 사장이 직접 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비서가 결정하는 경우도 있지요. HR 트레이닝이라면 교육담당부서를 만나야 하고, 세일즈 미팅이라면 마케팅 부서와 접촉해야죠.” 특히 외국계 기업의 경우 한국 담당자는 정보수집만 하고 최종 결정은 본사에서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경우라면 국내 담당자에게만 아무리 ‘푸시’해도 소용이 없다. 세계 최대의 호텔 기업인 메리어트의 강력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푸시 앤 풀’ 전략이다. “세일즈맨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아주 좋아하고, 성격이 적극적이지요. 하지만 결국 판매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읽고 맞추어 줄 때만 이루어져요. 우리 호텔이 좋다는 말을 백 마디 하는 것보다, 뭘 원하는지 먼저 듣는 자세가 필요한 거죠.” 하지만 이때도 중요한 것은 핵심을 잡아내는 것이다. 고객의 요구를 100% 들어준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고객회사에서 결정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예산인지 아니면 다른 부가적인 서비스인지 판단해야죠. 예산이 문제라면 다른 서비스들은 대폭 줄이고, 서비스가 중요하다면 셔틀버스나 인터넷 무료접속 등을 넣어주는 거죠.” 임씨는 “우리나라에 진출해 있는 외국계 반도체 회사와 화장품 업체들이 모두 잠재적인 고객”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은 반도체 장비업체들이다. “반도체를 맡으면서 차에 네비게이터를 달았어요. 반도체 장비업체들이 대부분 경기도 지역에 있거든요. 하루 평균 5개 업체를 도는데 심지어는 천안까지 내려갈 때도 있어요.” 덕분에 경기도 일대의 지리는 웬만한 택시운전수보다 훤하다. 그는 “데이트할 때 길을 너무 잘 알아 남자들이 놀라곤 한다”며 웃는다. 이러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관리는 필수다. “영업을 하려면 우선은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해요. 업체를 돌고 사람 만나는 일을 매일매일 꾸준히 해야 하니까요. 피곤하고 지친다고 그냥 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는 지난해부터 시작한 요가가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영업하면서 힘들 때는? “영업은 항상 새롭고 역동적인 반면, 정해진 업무를 하는 분들보다 한계를 느낄 때도 많아요. 열심히 했다고 항상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에요. 어느 정도는 운도 같이 작용을 하는 거죠. 정말 열심히 했는데 안됐을 때는 정말 좌절감도 들지요.” 그렇다고 놓친 것을 아쉬워하거나 뒤돌아보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비즈니스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특히 반도체 분야의 경우 미묘한 문제들이 가끔 벌어진다. 바로 반도체 업계의 거인 삼성전자와 신라호텔이 공교롭게도 같은 삼성 계열사인 것이다. 심씨는 “호텔 영업은 다른 영업과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단순히 ‘객실’이라는 상품만을 파는 게 아니라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경험하는 모든 것의 종합적인 가치를 팔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미지를 파는 것이다. 따라서 호텔 영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라고 했다. 태도는 외모에서 드러날 수도 있고, 말투나 자세, 마음가짐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싱가포르에서 온 반도체 관련 프로젝트의 팀장이 우리 호텔에 묵게 된 적이 있어요. 보통 그런 팀은 작게는 5명, 많게는 몇 십명 규모인데, 혼자만 온 거죠. 거기서 기회를 포착했어요. 미리 나름대로 준비를 했지요. 처음 호텔방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자신이 ‘케어’ 받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주는 게 중요해요. 와인이나 꽃, 초콜릿 같은 작지만 정성스런 선물을 넣어 드리는 거죠.” 마음을 열어야 비즈니스도 '술술' 그러면 대부분 어느 정도는 마음이 열릴 수밖에 없다. 식사 시간 동안 간단한 미팅을 제안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동료들 이야기를 물었다. 각자 취향에 맞게 호텔을 선택해 묵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호텔에 묵으면서 어떤 점이 중요한지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그것을 나름대로 패키지로 묶어 제안했다. “사실 그분 입장에서는 팀원들이 어디에 묵건 상관없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우리 호텔에 좋은 인상을 갖고 있고,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한 혜택을 받을 수 있어 결국 팀원들이 전부 우리호텔에서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몇 달 동안 묵게 됐어요.” - 영업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영업은 사람이라는 재산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영업을 오래 하면 업체 사람을 만나면서 ‘이 사람은 50방짜리다’, ‘이 사람은 1천방짜리다’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봐요. 비즈니스를 하기 이전에 우선은 사람으로 봐야죠.” 심씨는 개인적인 관계에도 비중을 둔다. 생일이나 기념일도 잊지 않고 챙긴다.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두고 월별로 미리 체크하는 것이다. skjang@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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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영업이라고 하면 다들 좋아보이고 멋있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업체를 찾아다니면서 인사하고 제품 설명을 하는 건 국내영업과 마찬가지죠. 제품을 가지고 가면 좋다는 사람은 100명 가운데 2~3명이에요. 구걸하러 갔다 쫓겨난 사람처럼 진짜 마음이 아플 때도 많았어요.” 14년 동안 해외시장을 돌며 잔뼈가 굵은 김동순 SWC(40) 사장의 이야기는 끊없이 이어진다. 김 사장은 그럴 때마다 돌아서서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실망하고 자책하는 대신 스스로 웃으며 풀었다. 김 사장은 사장이 된 지금 스스로를 영업맨이라고 여긴다. 차장에서 사장으로 파격 승진 김 사장이 사장 자리에 오른 것도 그의 해외 영업에 대한 노하우 덕분이다. SWC는 지난 1998년 삼성시계가 삼성그룹에서 분리돼 나온 후 이름을 바꾼 업체. 100% 자체 브랜드로 전체의 80%를 수출하는 수출전문 기업이다. 이 때문에 91년 삼성시계에 입사했을 때부터 해외 영업통으로 일해온 김 사장은 2003년 차장에서 사장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 회사를 통틀어 김 사장만큼 수출에 대한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6권의 낡은 여권과 100만 마일의 대한항공 마일리지가 그의 이력을 잘 증명해 준다. - 해외 영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뭔가. “과장이나 가식으로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없지요. 아무리 표시를 안 낸다고 해도 상대방은 느낌으로 금방 알아요. 그러면 인간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어요.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면 어떤 나라든 다 통하게 되어 있지요. 사람은 다 마찬가지거든요” 김 사장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한번 ‘오더’를 받아 물건만 넘겨주면 끝나는 시대가 더이상 아니라는 것이다. 항상 문제점이 없는지 관리하면서 꾸준히 관계를 맺어 나가야 한다. 요즘은 이메일만 잘 활용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김 사장은 요즘도 100여명 이상의 해외 바이어들과 주기적으로 메일을 주고받는다. - 성공한 영업맨이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죠. 사람을 만나지 않고는 비즈니스가 될 수 없지요. 특히 영업하는 사람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알고 인맥을 쌓아야 해요. 바이어뿐만 아니라 KOTRA 직원이나 일반 운송회사, 심지어는 비행시 승무원도 알고 있으면 다 도움이 되지요.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죠.” 삼성그룹에서 사실상 ‘퇴출’되고 난 직후의 일이다. 같은 제품인데다 브랜드도 당분간 ‘삼성시계’를 그대로 쓰기로 해 영업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바이어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동안 삼성그룹과 거래한 거지 당신들과 한 게 아니다. 아무리 당신들이 삼성 브랜드를 갖고 있어도 그건 라이센싱 개념 아니냐’ 그러더군요. 눈앞이 캄캄했죠.” 김 사장은 거의 해외에 상주하다시피하면서 바이어들의 설득에 매달렸다. 그나마 오랫동안 쌓아온 인간관계 덕분에 겨우 숨통을 틀 수 있었다. 김 사장은 삼성시계에 있던 96년에 드디어 미국시장을 뚫는 데 성공했다. “샘플 시계 100개 정도면 무게만 20kg이 되지요. 그런 가방을 양손에 들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문전박대 당한 경험을 선배들도 수없이 했을 겁니다. 미국은 그런 시장이었죠.” 미국은 세계 시계 수요의 25~30%를 차지하는 큰 시장이었다. 경쟁자도 많고 브랜드도 넘쳐났다. 김 사장은 그런 미국시장에 스포츠 브랜드 ‘뷰렛’(BURETT)으로 한국업체로는 처음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수출가격도 140달러의 고가였다. 치밀한 준비와 오랜 노력의 결실이었다. “아무 준비 없이 그냥 제품만 들고 가서 한번에 오케이 받은 건 아니었지요. 먼저 한 달에 한 번씩 미국에 가면서 시장조사를 충분히 했어요. 한국시계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디자인도 도입했지요.” 제품 조립도 스위스 공장에서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수많은 미국 내 전문매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프레젠테이션하고, 제품 수정한 걸 또 가지고 갔다. 김 사장은 ROTC 출신이다. 그걸 숨기지 못한다. 그는 “ROTC에서 성공에 필요한 모든 걸 배웠다”고 했다. 김 사장은 올해로 만 40세다. 본부장들은 그보다 나이가 많은 50대. 삼성에 있을 때는 모두 상사들이었다. 김 사장은 “ROTC에서 스스로 일을 개척하고 추진해 가는 리더십을 익히지 못했다면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팀워크와 조직 적응력도 ROTC에서 얻은 미덕이다. “회사는 팀워크로 움직이는 공동운명체지요. 영업도 혼자 잘한다고 절대 잘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팀워크가 뒷받침되야만 하지요.” - 시계는 사양산업 아닌가. “시계는 사양산업이 아니라 패션산업이에요.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적 측면보다는 귀걸이나 목걸이 같은 패션 소품의 의미가 더 커진 것이죠. 옷색상에 맞춰 시계를 바꿔 차는 그런 개념인 셈이에요.” 91년에 그룹 공채로 삼성에 입사한 김 사장은 삼성물산이나 삼성전자로 가게 될 거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적자투성이 퇴출후보인 삼성시계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면접 때 얼떨결에 아버지가 시계를 판다고 했던 게 운명을 가른 것 같아요.” 김 사장의 아버지는 실제로는 시골에서 사진관을 하면서 시계도 팔고 도장도 파는 가게를 운영했다. 처음에는 열심히 해서 물산이나 전자로 옮기자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해외영업이 적성에 잘 맞았다. 98년 분사에 이어 2004년 4월 2번째 위기가 닥쳤다. 삼성그룹에서 삼성 브랜드를 더이상 쓰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여차하면 태평로 삼성 본관 앞에 가서 전 사원이 드러누워야 할 만큼 절박한 위기였다. 하지만 김 사장은 매출에 큰 타격 없이 SWC 브랜드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유창한 영어 부러워할 것 없다 - 영어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대학 때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영어는 사실 유창한 편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될 수 없어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멋있어 보이고 좋지만, 외국인의 눈으로 보면 어차피 마찬가지죠. 외국 사람이 한국말을 하면서 조금 더듬거려도 잘 한다고 하잖아요. 우선은 네이티브처럼 완벽한 영어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해요.” 김 사장은 “인간적인 감정의 교류만 있으면 조금 부족한 영어라도 다 통하게 된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기본마저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김 사장은 해외 영업사원뿐만 아니라 국내 영업사원과 디자이너들에게도 영어 공부를 강조한다. “국내 영업을 하는 사람도 이제는 해외에 나가봐야 해요. 세상이 얼마나 넓고, 얼마나 다양한 제품들이 해외시장에서 팔리는지 직접 봐야 안목이 넓어질 수 있어요. 계속 국내 시장에만 안주하고 있어서는 곤란하지요.” 김 사장은 “잠자는 시간도 억울하다”고 했다. 그는 새벽 1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난다. 하루에 2번은 조찬모임에 빼놓지 않고 참석한다. 저녁에는 거의 매일 사람을 만난다. 게다가 주말이면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찾아 듣는다. 그는 사람을 만나며 스트레스를 풀고, 사람을 만나며 많은 것을 얻는다. 김 사장은 사람이 하는 일은 불가능이 없다고 믿는다. 대부분은 게으름 때문에 그 길을 찾지 않고 마는 것이다. skjang@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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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의 매력에 빠진 무서운 신인 한국화이자의 영업왕으로 소개받았는데 너무나 앳된 모습이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스물네살이에요. 81년생이죠. 올 2월에 입사해 4월부터 필드에 나와 영업을 시작했어요.” 한국화이자제약 부산영업소 이주현(24) 씨의 거침없는 대답이다. 이 씨는 올해 부산지역에서 줄곧 랭킹 1위를 달렸고, 특히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COPD(만성폐쇄성폐질환) 치료제 분야에서는 전국 1위를 차지했다. 한국화이자에 들어온 것은 행운이었다. 지방대 출신과 여자라는 ‘최악’의 조건에서도 취업의 좁은 문을 뚫었다. “백수로 지내는기는 정말 싫었어요. 졸업반이 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를 했지만 쓴잔도 많이 마셨지요.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본 곳만 해도 50군데는 되는 것 같아요. 하반기 취업시즌이 끝나고 한참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한국화이자 공고가 떴어요. 다른 건 안 보고 능력만 본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더군요.” 입사 1년 만에 272% 달성 전국 1위 차지 입사 후에는 고강도 교육이 뒤따랐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의학용어가 낯설기만했다. 평생 한 것보다 더 많은 공부를 16주 동안 했다. “커트라인이 85점이었어요. 떨어지면 재시험을 쳐야 했지요. 새벽 3~4시까지 책을 읽느라 입사 후 동기들과 이야기도 잘 못 나눠봤어요. 회사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사원들을 위해 회사 근처에 호텔을 잡아줬는데, 그 근처에 구립도서관이 있었어요. 주말에 나만 있겠지 하고 가 보면 동기들이 다 거기 모여 있었지요.” 이 씨는 그때 배운 것이 ‘필드’를 뛰는데 큰 힘이 된다고 했다. 이 씨가 맡은 곳은 부산 동래구, 금정구와 경남 양산시. 이 지역에 있는 소규모 동네 클리닉들이 주된 영업 대상이다. 대형 종합병원보다는 발품을 훨씬 더 팔아야 한다. “병원으로 의사 선생님들을 방문하는 걸 저희는 ‘콜’이라고 해요. 평균적으로 하루에 12콜 정도 하지요. 물론 급할 때는 20군데도 더 나가죠. 하도 여기저기 다녀서 그런지 굳은살도 박이고 발이 참 못생겨졌어요. 구두를 한 달 전에 샀는데 벌써 굽을 2번이나 갈았거든요.” 그가 맡은 제품은 통증과 호흡기 관련 전문의약품. 신경에 원인이 있는 통증 치료에 가장 많이 쓰이는 세계적인 ‘블록버스터’ 뉴론틴과 COPD 치료제 스피리바가 주력 품목이다. 약을 얼마나 팔았나? “전문의약품 영업은 병원이나 약국에 약을 직접 파는 게 아니에요.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처방을 내릴 때 우리 제품을 더 많이 선택할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저희들의 역할이지요. 매출은 제가 맡은 구역의 의사들이 우리 제품을 더 많이 처방하고, 그래서 인근 약국에서 판매가 늘어나면 증가하게 되는 거죠.” 한마디로 ‘약 외판원’과는 거리가 있다는 설명이다. 이 씨의 직책은 ‘MR’. ‘메디컬 레프리젠터티브’(Medical Representative)의 약자로 의사들에게 의학 관련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면 매출은 어떻게 따질까. 담당 지역 약국의 약품 판매량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매월 회사에서 실제 처방(판매) 통계가 나온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판매액 자체가 아니라 달성률. 과거의 자료 등을 참조해 미리 정해 놓은 목표치를 얼마나 달성했느냐다. 전국 1위를 차지한 스피리바의 경우도, 이 씨의 실제 판매량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월 800백만~1천만원 수준. 하지만 달성률은 무려 272%에 달했다. 전문 의약품의 경우 정보가 넘치는 서울에 비해 지방은 판매 여건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 비결이 뭔가? “의사 선생님들의 성향에 맞춰 각기 다른 전략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맺고 끊는 게 분명한 분한테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한다면 당장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하러 왔느냐는 반응이 튀어나오겠죠. 그러면 의학적인 임상 데이터 설명이고 뭐고 힘든 거죠.” 주변 정보 수집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COPD 치료제 스피리바의 매출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호흡기 전문 클리닉이 있다. 처음에 간호사들을 통해 의사가 의학 관련 책을 좋아하고, 인간적인 친밀감도 중시한다는 ‘팁’을 얻었다. 회사에서 호흡기 관련 책이나 논문이 나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챙겨 주었다. “병원에서 주차하시는 분과도 굉장히 친해졌어요. 병원에서 아주 오래 일한 분이라 원장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여러 가지 정보를 많이 얻었어요.” 제약 영업에선 접대가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는 인식이 많은데. “한국화이자의 경우 그런 걸하고 싶어도 처음부터 할 수가 없어요. 회사에서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선물 규정도 까다롭고, 식사 대접도 몇만원 이상은 할 수 없어요. 만약 식사 대접을 한다고 해도 어떤 목적으로 어떤 설명을 했는지 다 보고해야 돼요. 다른 곳에 비해 영업할 수 있는 ‘툴’이 없다는 불만도 있을 수 있지만, 과학적인 데이터와 정보로 승부하는 게 저한테는 오히려 좋은 기회인 것 같아요.” 필드에 나가서도 ‘공부’는 그치지 않았다. 매주 한 차례씩 모여 새로 나온 의학논문을 읽는 세미나를 한다. 한 달에 1~2번꼴로 발제도 해야 하고, 시험에 떨어지면 재시험도 봐야 한다. “친구들과 있을 때 저도 모르게 의학용어가 튀어나올 때가 있어요. 너무 입에 배서 그런 거죠. 처음보다는 공부하는 게 훨씬 수월해졌고, 점점 가속도가 붙을 거라고 생각해요.” 힘들 때 산에 올라 혼자 풀기도 어려움은 없었나? “영업 사원이 항상 환영받는 건 아니죠. 한번은 환자도 많고, 우리 약을 처방할 경우가 많은 의사 선생님이 계셨어요. 명함을 드렸는데 보는 데서 던져 버리더군요. 만약 그때 얼굴이 굳어지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면 다시는 선생님을 못 보게 되는 거죠. 독하게 이를 깨물고, 더 당당하고, 더 씩씩하게 이야기를 했더니 놀라시더군요.” 정말 힘들 때는 금정구에 있는 금정산에 올라 소리를 질렀다. 끈기 있는 노력 끝에 이제는 친한 사이가 돼 금정산에 올랐던 이야기를 하며 서로 웃곤 한다. ‘콜’을 할 때는 시간 선택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환자가 가장 많은 월요일 오전에 방문하는 것은 절대 금물. 점심 식사 전인 12시에서 1시 사이에는 환자가 비교적 적어 만나기 어려운 의사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요즘은 저녁 늦게까지 진료를 하는 클리닉이 많아져 때로는 늦은 시간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까지 생겼다. “책 때문에 친해진 선생님도 있어요. 이야기는 잘 들어주시는데, 제 말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게 느껴지는 분이었지요. 진료 틈틈이 인문서적 보는 걸 즐기신다는 말을 듣고, 마침 읽고 있던 <파이만씨는 농담도 잘하셔> 이야기를 꺼냈죠. 금새 의자를 당겨 앉으며 제 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군요.” 재택근무가 힘들지 않나? “1주일에 한 번 사무실에 나가 영업 상황을 브리핑하고, 세미나를 하지요. 그밖에는 모든 걸 스스로 알아서 하면 되요. 제가 맡은 지역은 전적으로 저 혼자 책임져야 하는 거니까, 겁이 나기도 하죠. 여기서 실적이 떨어지거나 우리 약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라면, 다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선생님마다 각기 다른 전략을 짜야 하고. 여기서는 제가 사장이고 모든 걸 관리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해이해진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지요. 바로 이 점이 영업의 매력이기도 한 것 같아요.” skjang@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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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행 남동2단지 기업금융지점 박상일(51) 지점장은 손때 묻은 두툼한 노트 10여권을 내놓았다. 바로 ‘영업 노트’. 인천 남동공단 수백 개 중소기업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 박 지점장은 이 노트 하나로 2004년 1월 부임 이래 75개에 불과하던 지점 거래업체를 168개로 2배 가까이 늘렸다. 금액으로 따지면 1500억원이다. 덕분에 공단 내 다른 은행들에선 비상이 걸렸다. 그가 관리하는 기업을 ㄱ, ㄴ 순으로 정리해 놓은 노트에는 상상을 초월한 정도의 방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에쿠스를 탄다. 철인3종경기 출전. 검도 3단. 출신학교와 자녀는.’ 업체 사장에 대한 이런 정보는 기본이고, 이전의 거래 금액과 조건, 방문 날짜별 진행상황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박 지점장은 어딜 가든 이 노트를 항상 지니고 간다. 상대를 꿰뚫고 있는 만큼 영업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발로 쓴 영업 노트로 1500억원 실적 올려 - 영업 노트가 어떤 도움이 되나? “우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지요. 반포에 산다는 걸 적어놓았다면, 아직도 반포에 사느나, 반포 어디쯤 사느냐, 질문을 던질 수 있어요. 사람을 처음 만나서 하는 말이 집이 어디냐, 고향이 어디냐, 이런 거 아닌가요. 그런데 이걸 만날 때마다 묻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고객의 신뢰는 고사하고 영업은 물 건너 간 거죠. 업체를 다니며 그때그때 메모를 하면 그런 정보를 꾸준히 축적할 수 있지요.” - 단지 그것뿐인가? “무턱대고 업체를 방문하면 대화가 추상적인 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냥 우리 은행 좀 도와 달라는 것밖에 할말이 없는 거죠. 하지만 저는 구체적으로 점을 딱 찍어서 이야기를 하지요. 우리 은행과 이러이러한 거래를 하고 계신데, 퇴직신탁이 없다, 이런저런 점에서 이게 필요하니, 가입하시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거죠. 업체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모든 정보가 노트에 들어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자리에서 모든 걸 상담하고, 해결해 줄 수 있지요.” 영업 노트는 대출 리스크의 관리에도 큰 도움이 된다. 직접 발로 뛰어 수집한 밀착 정보의 보고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정확한 신용평가 자료는 없다. 박 지점장은 도와줄 곳은 화끈하게 도와주지만, 아닌 곳에는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덕분에 며칠 전까지도 문제가 생긴 대출기업이 단 한 곳도 없었다. “며칠 전에 문제가 생긴 업체는 신용보증기금에서 소개를 받은 경우였지요. 업체 쪽에서 추가 대출을 원했지만 해주지 않았어요. 사장이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는데 하는 행동이 좀 미심쩍었어요. 그래서 보증서 만큼만 해주고 말았지요. 문제가 생겼지만 우리 은행은 아무 피해도 입지 않게 된 거죠.” 박 지점장은 업체 방문을 할 때마다 항상 고감도 안테나를 켜 둔다. 모든 것이 관찰과 기록의 대상이다. 어쩌면 영업 노트에 적어야 하기 때문에 더 날카롭게 보는 것도 있다. “기록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정확하게 보려고 노력하지요. 사람을 볼 때 평범한 것은 적지 않아요. 아주 친절하다, 아주 능력 있다, 아주 건방지다, 아주 거만하다, 이런 걸 꼭 앞에 적지요. 간혹 쓸데없이 대통령이나 남의 탓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 ‘노 대통령 엄청 싫어함’ 이렇게 적지요. 괜힌 그 사람 앞에서 노 대통령 칭찬할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신용도에서는 마이너스죠.” 물론 이뿐만이 아니다. 영업 노트 자체도 고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 저 정도라면 우리 업체를 맡겨도 되겠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 언제부터 영업 노트를 썼나? “중학교 때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메모하는 습관이 생긴 것 같아요. 오랫동안 몸에 밴 메모 습관이 영업 노트로 꽃을 피운게 아닌가 싶어요. 92년에 차장이 되어 지점으로 나가면서부터 가는 곳마다 영업 노트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대리 때는 자기가 맡은 파트만 명함을 받으면 됐는데, 차장(요즘으로 보면 부지점장)이 되니까 지점 전체의 거래 고객을 만나니까 하루에도 20~30장씩 명함이 쌓였어요. 이걸 노트로 만들어 찾기 쉽게 정리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러면서 실적도 눈에 띄게 좋아졌지요.” 그 전까지만 해도 박 지점장은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않는 평범한 은행원에 불과했다. 일을 잘한다는 소리도 들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영업 노트를 쓰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천성적으로 싹싹하고 열정적인 그의 성격도 빛을 보기 시작했다. - 노트를 정리하는 데 얼마나 걸리나? “지점을 옮기면 거래 기업 명단을 다 뽑아서 정리하지요. 그리고 나면 사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요. 매일 업데이트만 조금씩 해주면 되지요. 하루에 한 번씩 영업을 다녀와서 새로 얻은 정보를 업데이트해요. 20분 정도 걸리죠. 주로 샤프 연필을 쓰는데 심이 가늘어 감정이 조금만 흔들려도 끊어져요. 차분한 마음으로 앉아 정리하는 거죠. 그러니까 기억도 아주 잘 되더라구요. 컴퓨터를 쓰라고 하는 분들이 있지만,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어디서든 펴볼 수 있는 건 그래도 노트뿐인 것 같아요.” 웃으면서 보내기 위해 필드를 누빈다 박 지점장은 주말이면 영업 노트를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본다. 그러면서 다음 주에 방문할 업체들을 뽑는다. 이렇게 만든 한 주 간의 영업계획에 따라 하루 10~15개 업체를 방문한다. 영업을 시작한 92년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은 일과다. “며칠 전에 한 업체 사장님이 저에게 고맙다고 점심을 샀어요. 사업이 어느 정도 되고 나서는, 밖에 나가는 일은 직원들을 대신 시켰는데, 4군데 업체를 들러서 간다는 제 전화를 받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거예요. 그날로 영업에 다시 나서게 됐다더군요.” 박 지점장은 끊임없이 ‘필드’를 돈다. 그의 영업 노트가 힘을 발휘하는 진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갈 듯이 계속 갈고 다닌다. 컵에 든 물은 어떻게든 새기 마련이라는 것이 박 지점장의 생각이다. 바닥의 틈으로 새든, 증발해 날아가든. 그래서 계속 새로운 물을 끊임없이 부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렇게 필드를 누비야 하는 이유가 뭔가? “저는 여름 양복이 한 벌밖에 없어요. 지점장 회의 때 입고 가는 것이지요. 긴 양복을 입고는 여름에 더워서 도저히 영업을 다닐 수 없으니까요. 보통은 긴 양복을 입고는 이렇게 더운데 어딜 나가냐고 하지요. 하지만 저는 양복을 벗고 반팔 와이셔츠만 입고 나가요. 다소 예의에 어긋나도 일단 나가는 것이 훨씬 좋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 이유는 단순해요. 고객이 떠난다고 할 때 웃으면서 보내 주기 위해서죠.” 연애든 고객과의 거래든, 한쪽이 돌아설 때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다. 매달리거나 보내주거나. “일단 떠나려는 고객을 잡게 되면, 이율을 낮추든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조건을 들어줘야 하지요. 물론 마음도 상하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지요. 하지만 웃으면서 보내주고 당당하게 영업을 하겠다는 거죠. 그러려면 영업력이 뒷받침되어야 해요. 웃으면서 보내주고 대신 새 고객을 발굴하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정말 중요한 고객은 잡아야겠지만요.” skjang@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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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부터 대우자동차에서 쌍용차를 함께 팔게 되었지요. 적성에 딱 맞더라고요. SUV(스포츠유틸리티차) 중심이라 매출 볼륨도 크고, 고객의 질도 좋고. 무엇보다 이런 차량을 좋아하는 분들과 죽이 잘 맞았어요. 자연스럽게 소개도 많이 받고, 팔 때도 훨씬 수월했지요. 차를 판다는 게 아무리 애를 써도 사실 손님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렵거든요.” 쌍용자동차 용산영업소 이종은(42) 소장은 맨 먼저 쌍용차와의 ‘궁합’을 강조했다. 그와 ‘통한’ 고객들은 그를 대신해 차를 팔아주는 영업맨이다. 일단 소개로 찾아가면 승률은 50% 이상으로 올라간다. 고객을 사로잡는 ‘매직’은 없다 이 소장이 들려준 이야기 하나. “손님과 친구나 형처럼 지내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 중에 한 분이었는데, 제주도라면서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10만원 정도인가 돈이 필요한데, 갑자기 내 생각이 나더라는거예요. 황당할 수도 있는 일인데,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요. 받을 생각 않고 빌려줬지요. 그게 고마웠는지, 그 분이 소개를 많이 해줬어요. 비싼 차로만 몇 십대 팔았던 거 같아요.” 짧게 깍은 머리와 시원시원한 성격, 약간은 터프한 이미지. 실제로 이 소장의 첫 인상은 SUV 매장을 찾는 고객들과 잘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이 소장은 2001년에 아예 대우에서 쌍용차로 옮겼다. 신분은 직영점 영업사원이 아니라 딜러. 팔지 못하면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직영점과 딜러는 근본적으로 달라요. 아마추어와 프로 정도의 차이죠. 직영점에 있으면 굳이 많이 팔 필요가 없지요. 한 달에 5대 정도만 팔면 그만이에요. 하지만 딜러는 기본급도 없고 판만큼 가져가는 거예요. 저로서도 모험이었지요.” 다행히 이 소장의 ‘모험’은 성공했다. 그는 2001년부터 4년 연속 판매왕을 차지했다. 2002년에는 무려 한 해 동안 340대를 팔았다. 휴일을 포함해서 하루 1대꼴로 팔아치운 셈이다. 회사는 그런 그에게 ‘판매 명장’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 4년 연속 1등의 비결은? “기복을 가능한 한 줄이는 게 핵심이지요. 꾸준히 파는 거예요. 영업은 한 달이 지나면 다 털고,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일반 직장 생활과는 많이 다르죠. 그리고 쉽게 만족하면 안 되요. 몇 대 팔았으면, 이 정도면 됐다 하고 만족하는 게 아니라 팔 수 있는 한 계속 파는 거죠. 요즘은 여러 가지 지원체계가 잘 되어 있어서 손님만 있으면 얼마든지 팔 수 있어요. 바빠서, 감당이 안 되서 못 판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프로로 뛰어든 2001년 초. 추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정말 열심히 뛰었다. 아침 7시면 가장 먼저 출근했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퇴근했다. 전단지도 뿌리고, 광고도 내고, DM(다이렉트 메일)도 보내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마음 자세가 달라지자 실적도 같이 뛰었다. 이 소장은 “그때 자리를 많이 잡았다”고 했다. - 영업 노하우를 어디서 배웠나? “잘 파는 선배들을 보면서 따라하려고 노력했지요. 영업자들은 다 개성이 있어요. 발로 뛰는 스타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요. 매스컴을 타지 않아서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런 사람들 이상으로 정말 차를 잘 파는 분들이 있어요. 같이 근무하면서 그런 분들한테 많이 배웠지요.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 하고. 하지만 따라하는 게 쉽지 않아요. 꾸준히 하기가 어려운 거죠.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고, 이제는 제가 더 잘 한다고 생각해요. 차를 더 많이 팔 자신이 있거든요.” 이 소장이 배운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일을 하는 자세, 손님을 대하는 태도, 관리 방법 등. 따지고 보면 특별한 것은 없다. “영업에는 정석이 있어요. 특별한 마술로 고객을 현혹시켜서 차를 팔 수 있는 건 아니지요. 그런 정석을 한결같이 실천하는 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죠.” 어떻게 하면 차를 많이 팔 수 있나? “새로운 고객에게만 팔아서는 많이 팔 수 없어요. 판매 대수를 늘리는데는 소개 영업이 아주 중요해요. 다단계 판매가 무서운 것과 똑같아요. 그래서 많이 팔려면 손님들이 도와줘야 한다는 거죠. 고객이 저를 믿고 한 마디 가볍게 던져 주면, 그 다음은 다 알아서 해요. 또 해 보니까 소개를 통한 재영업이 가장 효과가 있더라구요.” 이 소장이 고객을 진짜 ‘왕’으로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때로 ‘왕’은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도 다가온다. “한 번은 복장이 아주 허름한 사람이 왔어요. 전혀 차를 살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죠. 그래도 인사도 싹싹하게 하고, 판촉물도 드리고 성심성의껐 대했지요. 나가면서 저처럼 친절한 영업사원은 처음 봤다고, 영업을 아주 잘한다고 그러더라구요. 이 분도 차를 참 많이 팔아 줬어요. 의외였죠. 누가 고객이 될지는 정말 모르거예요.” 그래서 이 소장은 차를 살 것 같든 아니든, 나이가 들었든 아니든, 남자든 여자든 고객을 한결같이 대하려고 노력한다. 철저한 애프터서비스(A/S)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판매한 차량에 문제가 생길 경우 무상수리가 되지만, 예약하고, 기다려야 하고 번거로운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이 소장은 모조건 첫 번째 A/S는 책임지고 다 처리해 준다. 그는 “차를 팔고 나서가 더 중요하다”며 “고객들은 아주 세세한 것에 감동한다”고 했다. 이 소장이 근무하는 용산영업소는 아예 영업소 차원에서 A/S 기사를 따로 두고 있다. - 이제 어느 정도 괘도에 올라선 것 아닌가? “그래도 그냥 있으면 판매 대수가 줄어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동안 쌓아 놓은 걸 빼먹기만 하는 것이니까요. 고객과 관계를 맺는 것은 결과가 금방 나오지 않아요. 좀더 신경을 써 주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당연히 더 호감을 갖게 되고, 그러다 소홀히 하면 또 줄어들고. 신기하게도 확실히 그런 경향이 나타나요. 하지만 오늘 열심히 했다고 해서, 거기서 금방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에요. 예전에 공들였던 곳에서 오늘 결과가 나오고, 오늘 투자한 것은 나중에 성과가 나오는 거죠. 중요한 건 계속 씨앗을 뿌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진정한 프로로 남고 싶어 물론 고객을 만나다 보면 때로는 오해가 빚어지기도 한다. 가장 흔한 것이 납기 약속에 관한 것이다. “3~4달 있어야 차가 나온다고 하면 대부분 안 산다고 해요. 납기가 자동차 영업사원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죠. 그러니 때로는 솔직할 수만도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약속을 지키기가 거의 불가능해요. 그럴때는 솔직하게 정면으로 부딪히는 게 최선이에요.” 솔찍히 털어 놓으면 당장은 욕을 먹을 수도 있지만 뒤탈은 없다. 그러면 고객들이 인간적으로 이해해 주기도 한다. 그렇지 않고 일시적으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회피하면, 거짓말이 다시 거짓말을 부르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현재 이 소장이 관리하는 고객은 모두 5천여 명이 넘는다. DM도 보내고, 문자도 보내고, 가끔 전화하거나 방문하기도 한다. 역시 특별한 것은 없다. ‘정석’ 그대로다. 또한 이 소장은 어디를 가든 항상 고객 노트 한 권을 들고 다닌다. 심지어는 화장실에 갈 때도 갖고 들어간다. 고객이 전화하면 언제든 바로 답변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동차 쪽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외국에서는 딜러들이 직접 차를 매입해 마진을 붙여서 파는 형태예요. 기회가 되면 그런 걸 해보고 싶어요. 진짜 딜러가 되는 거죠.” 진행ㆍ정리 장승규 기자 skjang@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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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남들과 좀 틀려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나 자신이 상품인데 어떤 식으로든 차별화되지 않으면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1996년 7월 현대차에 들어가 수습기간이 끝나자마자 ‘최진실’로 이름을 바꾸었지요.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거든요.” ‘최진실’이라는 튀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4년 연속 현대차 판매왕 최진성(28) 과장은 ‘차별화’란 단어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대학 때부터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잡초’처럼 살아 온 최 과장은 “처음부터 1등”이 목표였다. 1등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결론은 차별화. 남들과는 뭔가 달라야 한다는 것. 물론 열심히 뛰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영업 대통령 최진실' 로 불려 이름을 바꾸고 나서 의상도 파격적으로 바꾸었다. 정장 대신 나비넥타이를 매고, 연미복과 교복을 입었다. 처음에는 핸들카???에 전단지 수천 장을 싣고 다니며 뿌렸다. 그러다가 한동안 자전거를 탔고, 곧이어 오토바이를 구입했다. 나이트클럽 웨이터를 연상시키는 복장으로 오토바이를 타는 자동차 세일즈맨. 당연히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입사 후 3개월 만에 겨우 1대를 팔았다. 일이 서툴러 뒤처리에만도 열흘 이상이 걸렸다. 매월 10대 이상 팔아치우는 선배들이 존경스러웠다. 그러다 6개월째부터 실적은 6~8대로 늘었다. 1년이 되자 10대, 다시 1년이 지나자 15~20대로 실적이 뛰었다. “요즘은 휴일 빼고 하루에 평균 1대 꼴로 팔아요. 처음에는 10대, 15대를 팔 때도 쩔쩔맸는데, 20대로 올라서니까 이젠 그 정도는 쉽게 느껴지지요. 모든 게 그런 것 같아요. 밑에 있을 때는 아등바등 하지만 한 단계 올라서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보이거든요.” 영업 비법? 최 과장은 차 판매에 ‘올인’했다. 한 번은 오토바이를 산 지 2개월 만에 교통사고를 당해 6시간 만에 깨어났다. 그때도 그는 병원에서 의사들한테 차를 팔았다. 그 집념에 동료들조차 혀를 내둘렀다. 그는 늘 새로운 걸 꺼내들었다. 핸들카???에서 자전거로 다시 오토바이로 바꾸는 식이었다. 복장도 처음에는 퀵 서비스 복장에서 연미복, 교복으로 계속 업그레이드해 나갔다. “일 자체를 즐기자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어요. ‘고객 만족, 고객 감동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일단 내가 즐기고 만족하자. 남의 눈치 볼 필요도 없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아파트에 전단지를 뿌릴 때도 운동한다는 마음으로 했다. 고객을 만날 때도 고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일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꼭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은? “오토바이를 타고 6개월 동안은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어요. 제 모습이 창피해서였지요. 하지만 정말 창피하고 두려운 건 이런 모습이 아니라 내가 내 밥값을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선글라스를 벗었지요. 벗고 나니 또 다른 세상이 보이더군요. 사람들은 다 자신에게 맞는 자리가 있다고 봐요. 홍명보 선수가 훌륭한 선수인 건 공격수가 아니라 수비수였기 때문이지요. 정장을 입고 점잖게 영업하는 사람은 그게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이고, 저는 이게 제 스타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 자동차 판매에 그런 방법이 효과가 있나? “물론이죠. 제 실적이 잘 증명해 주지요. 저를 따라하는 제2, 제3의 최진실이 나오고 있지만, 일시적으로 해서는 안 되죠.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해야만 성과를 낼 수 있지요. 누구나 출발을 할 수 있고, 모두 첫발은 내딪지만, 두 발, 세 발, 백 발 이렇게 자꾸 가다보면 처지게 되죠. 지속적으로 계속하면 분명히 효과가 있어요.” ‘고가의 자동차를 파는 전문가’ 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데? “이상한 복장을 입고 다니는 것만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죠. 동대문이나 남대문, 중앙시장에 갈 때는 연미복을 입고, 양배추 머리를 뒤집어쓰고 가지요. 시장 사람들과 재미있게 어울리는 데는 훨씬 효과적이에요. 하지만 변호사나 의사, 일반 직장인 등 다른 층의 고객을 만날 때는 그런 복장을 하지 않아요. 처음에는 나비넥타이만 매고 가고, 다음에 만날 때 좀더 변화를 주면 재미있어 하지요. 요즘은 타던 차를 새 차로 바꾸거나 차를 한 대 더 사는 고객들이 많기 때문에 대부분 차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어느 정도 갖고 있어요. 차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하고, 고객을 이끌어야 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지요.” 최 과장은 언론에도 제 발로 찾아갔다. 먼저 현대자동차 사보팀에 문을 두드렸다. “사보에 내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그래요. 현대자동차가 작은 회사도 아니고, 기사를 내줄 거리가 없다는 거죠. 판매왕 한 번 해보고, 그러고 오라고 하더군요.” 드디어 월간 판매왕에 뽑히자 곧바로 다시 찾아갔다. 최 과장은 그 뒤로도 신문사고, 방송국이고 적극적으로 접촉을 시도했다. “고생하며 자랄 때는 모든 게 정해져 있는 줄 알어요. 하지만 꿈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니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게 현실이 되더군요. 다른 사람들은 생각만 하고 마는 걸 저는 끝까지 실천했어요. 대부분은 99까지만 하고 말죠. 물이 끓으려면 100도가 돼야 하는데. 전부를 거는 데 필요한 건 10이나 100이 아니라 바로 그 1이지요.” 최 과장도 튀는 복장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만의 또 다른 무언가를 고객들에게 주고 싶어 한다. “포장지가 아무리 예뻐도 내용물이 좋아야 해요. 포장지 때문에 한 번은 살 수 있지만 두 번 사지는 않거든요.” 그는 “재미있는 복장 속에 감추어진 인간적인 따뜻한 면모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최 과장은 얼마 전 DM(다이렉트 메일) 발송을 중단했다. 대신 수시로 전화하고 직접 편지를 쓴다. 조직적인 고객 관리도 하지 않는다. 대신 항상 ‘레이더’를 켜고 고객이 원하는 것을 파악한다. 교통사고 등 어려움에 처한 고객이 있으면 언제든 달려가 해결사 노릇을 해준다. 시장 상인들의 멸치나 귀금속도 직접 다니며 팔아준다. 칠순잔치나 돌잔치도 빼놓지 않는다. 고객들의 중매를 선 적도 있다. 지금까지 네 쌍을 중매했고, 그 중 두 쌍은 결혼까지 했다. 그는 차 한 대를 팔기 위해 제주도까지 날아가기도 한다. 항공료와 교통비를 합하면 별로 남는 게 없지만, 멀리서도 잊지 않고 자신을 찾아준 것이 너무나 고맙다는 것. “방송이나 신문에 나가면 고객들이 더 좋아하세요. 간혹 격려 전화도 해주시지요. 그럴 때마다 더 열심히 하고, 더 잘 돼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고객 한 분 한 분이 저를 먹고 살게 해준 은인인데, 무엇보다 제가 열심히 하는 걸 원하시더군요.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팔아주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최 과장의 명함에는 ‘영업 대통령 최진실’이라고 적혀 있다. 왜 그가 영업 대통령일까.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월급이 1억5천만원 정도가 된다고 하더군요. 제가 그것보다 조금 더 받거든요. 그러니 제가 영업 대통령이지요.” 처음에는 그 역시 명함 뒷면에 멋진 경력을 적어 넣고 싶었지만, 쓸 게 없었다. 그래서 방송국을 찾아 다녔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의 화려한 방송 출연 경력이 뒷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탤런트 최진실을 실제로 만나봤나? “아직 뵙지는 못했어요. 96년만 해도 최진실이 최고였지요. 정말 그분처럼 되고 싶었어요. 요즘 재기해서 다시 인기를 모으고 있으니 저로서는 고맙죠.” 장승규 기자 skjang@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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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가을, 이경(49) 미래에셋생명 팀장은 30대 후반의 나이로 보험영업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3개월 동안 모든 걸 쏟아 ‘혼이 담긴’ 영업을 해보고, 안 되면 미련 없이 떠나겠다는 생각이었다. 각오가 비장했던 만큼 실천도 남달랐다. 첫 3개월 모두 1500장의 명함을 사용했다. 하루 평균 10명꼴로 새로운 고객을 찾아간 것이다. 나름대로 자신감도 있었다. 그는 경력 15년의 중견기업 경리부장 출신으로, 종업원 퇴직보험을 팔러온 설계사들을 오래 접해본 경험이 있다. 그들의 소극적인 영업자세에 늘 아쉬움을 느껴왔다. 이 팀장은 개인영업 대신 법인영업에 초점을 맞추었다. 둘째 달부터 계약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듬해 신인상도 활동기간이 6개월에 불과한 이 팀장에게 돌아갔다. 그의 판매실적은 연도대상(판매왕) 수상자보다도 2배 이상 많았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 팀장은 올해 또 한번 판매왕에 올라 8년 연속 수상이라는 대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국내 보험업계에서 가장 많은 고객을 갖고 있는 FC(파이낸셜 컨설턴트)로 꼽히기도 한다. 거절을 가장 많이 당해본 남자 더 놀라운 것은 지난 10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슬럼프를 겪지 않았다는 점이다. 늘 꾸준하게 그의 실적은 상승곡선을 그려왔다. 비결은 그의 놀라운 ‘활동량’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순수하게 개척영업에만 매달렸다. 누구의 소개를 받거나, 연고를 찾아가 보험을 파는 건 애초부터 코드가 맞지 않았다. 이 팀장 차의 한 해 평균 주행거리는 7만Km. 하루 평균 200km가 넘는 강행군을 해댄 것이다. 그러니 차가 버텨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 팀장은 평균 2년마다 차를 바꾸어야만 했다. 가죽시트와 양복 이야기까지 나오면 더 기가 질린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탔다 내렸다를 반복하다 보니, 가죽 시트와 양복은 1년이면 닳아서 더 이상 쓸 수가 없을 지경이 되곤 했다. 보험왕의 왕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보험업계에서 저같이 활동 많이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당연히 저보다 더 거절을 많이 당해본 사람도 없겠지요. 하루에 30개 업체를 다닌다면 겨우 3개 업체 정도 건질 수 있어요. 나머지 27곳에서는 거절을 당하는 거죠. 하지만 그 거절은 하루에 유망 고객 3~5개를 건져내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하루에 3개 업체를 발굴하면 한 달이면 90개가 되지요. 이 가운데 3곳에서만 계약을 따내도 기본적인 한 달 활동량은 마감할 수 있지요.” 물론 이 팀장의 활동이 거기에서 멈출 리는 없다. 그는 어딜 가든 표지가 해져 검은 테이프로 여러 번 덧댄 두툼한 파일 뭉치를 항상 끼고 다닌다. 그의 영업장은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골에 내려가도 도로변에서 공장을 발견하면 서슴없이 들어간다. 첫 번째 관건은 기업주와 테이블에 마주 앉는 데까지 갈 수 있느냐다. 보험사에서 왔다고 하면 여직원한테 커트당하기 십상이다. 일단 여기를 통과하면 성공확률은 크게 올라간다. 이 팀장은 “특별한 상술도 없고, 말주변도 없는 촌놈이지만, 일단 마주 앉아 대화를 시작하면 쉽게 신뢰와 믿음을 쌓을 수 있다”고 했다. 15년 가까이 경리부장으로 기업주를 모셨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된다. 자금 문제를 다뤄봤기 때문에, 회사 상태를 금방 짐작할 수 있고, 업주들이 궁금해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읽어낼 수 있다. 이 팀장이 하루에 나누는 대화의 양도 엄청나다. 항상 차에 물통을 2~3개씩 싣고 다니며 물을 마셔도 대화에 몰입하다 보면 금방 입이 마르고 만다. 이 팀장의 독특한 영업방식은 또 있다. 절대 전화로 상담 약속을 잡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찾아가는 것이다. 대개 지역을 정해 어떤 업체의 사장을 만날지를 생각해 두고 출발해,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식사를 대접한다. 예고 없이 들러야 반가움이 더 커진다는 게 이 팀장의 생각이다. 현재 그가 관리하는 고객은 700개 기업에 5500명. 이 많은 고객을 관리하는 것만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듯싶다. 하지만 이 팀장은 “아직은 충분히 혼자 관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오랜 경리부장 경험으로 단련된 자신의 관리능력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요즘은 후배들의 도움도 조금씩 받고 있다. 물론 아직은 “성이 안 차” 모든 걸 다시 자기 손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 팀장은 매주 월, 화, 수요일은 시화공단과 남동공단에서 아침조회를 주재하고 공단 현장을 함께 뛴다. 보험업계에서 후배 양성에 이처럼 열성적으로 나서는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내 코가 석 자’인 탓이다. “경북 문경 출신 ‘촌놈’이 8년 연속 판매왕이 된 것은 제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고객과 회사가 만들어준 거라고 봐요. 이 정도 위치에 왔으면 이제는 제가 갖고 있는 자산과 모든 철학을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물려주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실패를 모르던 이 팀장이었지만 그에게도 애를 태우게 했던 ‘강적’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화성에 있는 베어링업체의 사장님. 교직을 은퇴 한 후 사업을 시작한 이 사장님은 인품이 굉장히 훌륭한 분이셨다. 이 팀장이 찾아갈 때 마다 한번도 거르지 않고 꼭 차를 대접했다. 하지만 보험 이야기만 나오면 답변이 없었다. 차라리 분명하게 거부의사를 밝히면 포기라도 할 텐데, 갈 때마다 따뜻하게 맞아주면서도 결정적인 답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대개의 경우 3~4번 만나고 계약까지 가는 게 이 팀장의 일반적인 수순. 기간으로 따지면 3개월 안에는 분명하게 결판이 난다. 하지만 이 사장님의 경우는 한 달에 한 번꼴로 꼬박꼬박 찾아뵙길 무려 5년 동안 계속했다. 이 사장님은 이 팀장의 첫 보험사인 한덕생명이 SK생명으로 합병된 후에야 그를 불렀다. 이 팀장의 열성은 높이 평가했지만, 자신의 자산을 부실보험사에 맡길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직원 명단을 뽑도록 해 단체보험에 가입했다. 더구나 이 사장님의 아들 3형제와 손주들까지 모든 가족의 종신보험도 이 팀장에게 일괄적으로 맡겼다. 은행에 다니던 자신의 아들이 있었지만, 회사와 가족의 자산 관리를 이 팀장에게 일임한 것이었다. 이 팀장에게는 아직도 가장 중요하고, 기억에 남는 고객으로 남아 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꾸준함을 중시하는 이 팀장의 성격은 보험사에 들어온 이후 온갖 스카우트 제의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직장을 옮기지 않았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물론 표면적으로 그의 직장은 한덕생명에서 SK생명, 다시 최근에는 미래에셋생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한곳에 머물렀고, 그게 그에게 더 큰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부실 보험사인 한덕생명이 SK생명에 통합되면서 당당히 4대 그룹사에 편입되었고, 이번에 미래에셋에 인수되면서는 자산시장에서 돌풍을 몰고 온 ‘박현주 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이 팀장은 항상 최고의 대우를 받아왔다. SK생명에 있을 때는 SK그룹을 통틀어 최고 연봉을 받았다. 미래에셋생명에서도 그는 회사의 얼굴이다. ‘박현주 사단’ 편입은 이 팀장에게도 새로운 자극제가 되고 있다. 기존 보험 상품이 ‘보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면, 이제는 투자 개념이 가미된 변액보험의 인기가 더욱 커지고 있다. “영업의 기본은 변함이 없지만, 미래에셋이 추구하는 펀드 개념이 가미된 보험 상품들에 대해 시간을 내 공부하고 있어요. 홈페이지도 개설해 매일 빼놓지 않고 관리도 하고요.” 이 팀장은 고향인 문경에 모든 사람들이 무료로 쉬어갈 수 있는 전통 민속마을 만드는 걸 꿈꾸고 있다. 이 팀장 자신이 전통 양반인 퇴계 가문의 사람이다. 서예의 대가였던 아버지를 닮아 서예 실력도 수준급이다. “문경은 강원도보다 더 오염이 안 된 청정 지역이지요. 그동안 도움 받은 분들을 비롯해 누구나 부담 없이 내려와 쉬고 갈 수 있는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앞으로 6년 정도면 실현이 가능할 거라고 봐요.” 장승규 기자 skjang@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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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은 냉정한 승부의 세계다. 아무리 고객을 ‘신’처럼 떠받든다고 해도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말짱 헛일이다. 당장이든, 아니면 얼마간 시차를 두든 모든 영업맨의 꿈은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멋진 ‘골’을 한방 넣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름대로 전략과 전술을 세우고, 가혹할 만큼 자기 관리도 한다. 하지만 영업은 단판 승부가 아니다. 한번의 승부가 끝나면 또 다른 고객과 새로 마주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영업은 스포츠 경기와 닮아 있다. 올해 1분기와 3분기 메르세데스-벤츠 판매왕에 오른 한성자동차 신동일(35) 과장은 영업을 ‘스키’에 비유했다. 계약을 성사시키고 차량 출고를 마칠 때면 멋진 활공으로 금메달을 따낸 것 같은 성취감과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벤츠 한 대를 계약하고 출고하는 것은 내가 해준 설명과, 내가 한 행동이 고객한테 인정받았다는 걸 뜻한다”며 “그 쾌감이 만만치 않다”고 했다. 벤츠 모는 신참 영업맨 신 과장은 실제로 전국체전을 휩쓸었던 왕년의 스키 다관왕 출신이다. 진부령 정상에서도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하는 강원도 산골 ‘하늘 아래 첫 동네’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나무를 깎아 스키를 만들어 탔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정식 선수로도 활약했다. “노력하면 이런 성취감을 느낄 수 있구나, 그때 처음 알게 되었어요. 중학교 이후 선수생활은 접었지만, 대학 때 꿈나무 대표팀 코치를 맡아 해외 전지훈련을 나갈 기회가 많았어요. 선수들 인솔하고 다니며 많이 배웠지요.” 그의 표현대로 하면, 그는 스키에 빚진 것이 많다. 운동이든 영업이든 승부의 세계에서 관건은 이길 확률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다. 2004년 1월 늦깎이로 벤츠 영업에 뛰어든 신 과장은 먼저 배수진을 쳤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그는 한국중공업에 입사해 그런대로 잘나가는 사원으로 꼽히고 있었다. 하지만 집값, 전셋값이 폭등하던 2003년 심각한 회의가 엄습했다. “평생 직장생활해서는 집 한 칸 장만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니,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평소 영업을 하면 누구 못지않게 잘할 자신도 있었고, 또 기왕이면 시장 전망이 밝은 수입차를 해보고 싶었지요. 그래서 벤츠를 선택한 거죠.” 물론 취직이 쉽지는 않았다. 벤츠 영업은 수입차 중에서도 베테랑들만 모이는 ‘진짜’ 프로의 세계였다. 다른 곳은 어느 정도 기본급이 있었지만, 벤츠는 그렇지 않았다. 한 대도 못 팔면 거의 한 푼도 가져갈 수 없는 구조였다. 4번의 면접 끝에 겨우 입사한 신 과장은 개포동 전셋집을 정리하고 용인으로 집까지 옮겼다. 그리고는 퇴직금을 털어 벤츠 한 대를 덜컥 사버렸다. 벤츠를 팔려면 벤츠를 잘 알아야 한다는 호기였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만큼 그의 목표는 더욱 뚜렷해졌다. 하지만 대당 가격이 4천만~2억6천만원인 벤츠를 파는 게 생각처럼 쉬울 리가 없었다. 첫 달은 아는 분의 호의로 한 대를 겨우 팔았지만, 다음 달은 판매실적이 ‘제로’였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벤츠를 팔기는커녕 벤츠를 살 만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 했으니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참 많이 했지요.” 신 과장은 자신의 약점이 거꾸로 강점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평범한 직장을 다닌 그는 영업에서 잔뼈가 굵은 동료들에 견준다면 왕초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전 직장에서 갈고닦은 업무 노하우가 있었다. 외부인의 시각으로 보니 기존 영업방식의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맥이나 인간관계에 의존하는 구시대의 패러다임이 여전히 지배적이더군요. 그러다 보니 영업의 효율성도 낮고. 성공확률을 높일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느꼈지요.” 다른 영업자들이 수첩을 이용해 아날로그 방식으로 일정관리를 하고 있는 때는 그는 일정관리 프로그램과 PDA를 도입했다. 전 직장에서 쌓은 실력을 활용해 정교한 고객 데이터베이스도 직접 구축했다. 매일 새벽까지 사무실에 혼자 남아 벤츠 공부에도 몰두했다. 다른 차에 비해 훨씬 고가라는 점이 벤츠 판매에 걸림돌인 건 사실이지만, 왜 그런지만 제대로 설명이 된다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 과장은 DM(다이렉트 메일) 문안 하나를 만드는 데도 공을 들였다. 선배들의 것을 다 모아놓고, 어떻게 하면 고객에게 더 어필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기계쟁이’ 출신인 그로서는 글 한 줄 한 줄 짜내는 게 그야말로 고욕이었지만, 이제는 각 사례별로 데이터베이스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신출내기’ 신 과장의 패러다임 전환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수입차시장에서 처음으로 자기 돈을 내 개인 비서를 고용했다. 고객들에게 쓴 편지를 부치고, 카달로그 요청이 오면 가능한 단시간에 받아볼 수 있는 방법으로 우송해 주는 것이 그의 비서가 하는 일이다. “굳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모두 넘겨주고 있어요. 그만큼 다른 데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을 더 확보하는 거죠. 고객들에게 보다 깔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일의 효율을 높이는 데 아주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동료들에게 도대체 비서에게 무슨 일을 시키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사실 일의 체계가 잡혀 있지 않으면 비서를 써도 시킬 일이 없다. 하지만 신 과장의 비서는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인다. 1분기 첫 판매왕…늦깎이 선택에 뿌듯 초기에 공들여 구축한 영업 시스템은 금방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해약 고객’에게도 직접 편지를 쓰는 걸 빼놓지 않는다. 벤츠를 사거나, 사려고 했던 사람이라면 최고 부유층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차를 한번 구입하면 10년 이상 타는 게 보통이지만, 이들은 3년 정도면 다른 차를 구입한다. 한번이라도 그가 만났다면, 설령 실패했더라도 계속 ‘가망 고객’인 셈이다. 얼마 전에는 벤츠를 사려다 BMW를 선택했던 고객이 자신의 누나를 소개해 줬다. 신 과장의 편지를 기억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다. 스키 동호회를 통해 알고 지내던 회원이 업무상 만난 고객이 벤츠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 신 과장을 소개해 줬다. 이 고객에게 벤츠를 판 건 물론이고, 또 7명을 소개받아 놓치지 않고 7대를 다 팔았다. 신 과장은 누구든 자신을 만나면 벤츠를 사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했다. 올해 1분기 처음으로 220명의 벤츠 영업자 가운데 판매 1위에 올랐다. 1인당 평균 판매 실적은 4~5대. 신 과장은 이보다 훨씬 많은 24대를 팔아치웠다. “1등이라는 전화를 받고 나서 차에 한참을 앉아있었어요. 내가 뒤늦게 선택한 길이, 내가 생각했던 영업방식이 실패한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감동적이더군요.” 신 과장은 지난 3분기에도 또 한번 판매왕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다. 신 과장은 그가 만나는 고객들처럼 최고의 자리에 올라 성공한 삶을 누리는 날을 꿈꾸고 있다. 장승규 기자 skjang@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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