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승천 대축일
<요한 묵시록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1코린토 15,20-27ㄱ 루카 1,39-56>
오늘 복음은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엘리사벳의 집으로 갔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세상일 가운데 우리가 가장 서둘러야 하는 일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태 안에 모시고
그분과 함께 가십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은
그분들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구세주의 오심을 희망으로
기다려 온 이스라엘의 모든 의인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엘리사벳의 눈을 열어 주시어 성모 마리아께서 참된 계약의 궤,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알아보게 하십니다(43절 참조).
성령께서는 엘리사벳의 태 안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마음도 열어 주십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즐거워 뛰놀다’로 옮긴 말은 구약 성경에서 되찾은
계약의 궤를 보고 환호하며 다윗 임금이
뛰며 춤추는 것을 표현하고자 쓰인 말입니다(2사무 6,16 참조).
세례자 요한은 참된 계약의 궤 앞에서 다윗 임금처럼 뛰며
그분을 뵙는 기쁨을 표현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자신 안에 가두지 않으시고
그 넘치는 은총을 모든 이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전부터 교회는 성모님을 가리켜
“즐거움의 샘”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구세주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오르신 성모 마리아를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벅찬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한
미래를 열어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그분께 나아가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십자가가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한결같이 당신의 아드님을 따르는 모범을 보여 주시며,
분명히 우리가 참된 집,
영원한 우리의 본향으로 나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2023년 8월 15일
******************************************************************************************************
이명호 베드로 신부
성모 승천 대축일
<요한 묵시록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1코린토 15,20-27ㄱ 루카 1,39-56>
같은 믿음으로 서로 기뻐하는 하늘나라
오롯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의탁하시면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적극 협력하신 구세주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승천 축일을 기뻐합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을 예전에는
‘성모 몽소승천 대축일’ 이라 하였습니다.
그 뜻은 ‘입을 몽(蒙), 부르심 소(召)’ 라 하여
‘하늘의 부르심을 입고 올라갔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천상 영광으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 고 표현했습니다.
나자렛의 소박한 한 여인이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겪으셔야만 했던 온갖 어려움과 ‘비천함’ (루카 1,48)을 극복하고,
마침내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믿음의 결실로
몽소승천의 은총을 입으신 것입니다.
오늘 루카복음 1장에서
성모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예고를 받은 후
유다 산골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이때 마리아를 맞이하는 엘리사벳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라고 찬양합니다.
아직 마리아가 혼인을 하지 않았음에도
임신한 사실에 대하여 다른 어떤 의심이나 절망스러운 말을 하지 않고
‘성령으로 가득 차서’ 축복의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축복하고 믿어 주는 말은 사람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라는 이 말은
마리아의 믿음을 찬양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남을 끝까지 믿어 주는 엘리사벳의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믿는 사람만이 믿음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인사말에 감격한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
기쁨의 노래는 남이 인정하고 믿어 줄 때
더한 기쁨으로 표출되는가 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그것은 믿음과 믿음의 만남,
기쁨과 기쁨의 만남이었습니다.
서로 성령으로 가득 찼기에 가능한 만남이었습니다.
어쩌면 하늘로 올라가신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을 만나서
이런 믿음과 기쁨 중에 있을 것입니다.
흔히 그동안 이런 만남을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의
마음이었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동신상희(同信相喜, 같은 믿음을 갖은 사람과
서로 기뻐하다)의 천상의 만남이었습니다.
이다음에 하늘나라에 가서 그런 만남을 갖겠다고 꿈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에서 같은 믿음으로 서로 기뻐하는 천상(하늘나라)과 같은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을 성모 몽소승천 대축일에 기도해 봅니다.
춘천교구 이명호 베드로 신부
**********************************************************************************************
정동수 안드레아 신부
성모 승천 대축일
<요한 묵시록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1코린토 15,20-27ㄱ 루카 1,39-56>
‘불순종’의 기술
저는 원래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당번이었습니다.
부담스러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에 김대건 신부님 축일 강론이라니!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이영춘 신부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이야말로 그날에 딱 어울리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님께 바꿔 달라고 청하자 흔쾌히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의 당번은 성모승천 대축일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순명의 아이콘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강론 당번조차 마음대로 바꾼 마당에 성모님을
언급하려니 찔렸습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만큼 볼품없는 게 또 없습니다.
돌아보면, 사제서품을 받고 처음에는 군말 없이 순명했습니다.
연차가 쌓이면서 군말이 입에 맴돌기도 했고,
버텨보기도 하고, 반항도 해보고,
이도 저도 안될 땐 친구를 팔아보기도 했습니다.
점점 순명에서 멀어지고,
불순종의 기술만 연마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 더 나이 들면, 먼저 인사 청탁을 하는 경지(?)에 오를까,
그래서 하느님께서 삶을 맡겨드리지 않고,
내가 하느님을 질질 끌고 다닐까 겁납니다.
‘성모승천’은 성모님이 스스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늘로 올려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몸을 맡겨드렸다는 뜻일 겁니다.
이는 사는 동안 매사 하느님께 자신을 맡겨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처럼 거부하고 불순종의 기술만 연마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들어 올려주셔도 맡겨드리지 못해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란 그가 내린 선택의 총합이다.’
그렇다면 신앙은 내가 해왔던 순명과 불순종의 총합일 것입니다.
저의 신앙은 아직 이 모양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가요?
함께 회개하시게요
전주교구 정동수 안드레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