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해설
스토리 텔링 혹은 우의적(寓意的) 낯설음
--김봉철 시집 『그림자 찾기』
김 송 배
(시인. 한국현대시론연구회장)
김봉철 시인이 첫 시집 『어느 샐러리맨의 시계』에 이어서 두 번째 시집『그림자 찾기』를 상재한다. 역시 낯선 시법으로 우리들을 당황의 골짜기로 몰아넣고 있다. 첫 시집에서도 필자는 무의미시와 해체시 또는 디지털 시와 하이퍼시까지 거론하면서 그의 작품을 접근해본 경험이 있다.
그는 다시 형이상시의 개념으로 사물과 관념의 중심에서 다양한 시적 구도와 전개를 위해서 철저한 스토리 텔링의 시법을 창출하고 있지만 역시 우리들에게는 낯이 설게 다양한 구도가 설정되고 있다.
그것은 상상력에 의해서 시적 공간을 확장하는 하이퍼시의 기법과 유사한 3차원의 입체적인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세계에서 무한대로 펼쳐지는 사유(思惟)의 정점을 향해서 김봉철 시인은 예리하게 응시(凝視)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시법(詩法)이 우리 현대시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는 서정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구도를 실험하고 있는데 이는 시법에서 과학적이거나 인식론저인 면에서 복합작인 표현의 형태를 구사함으로써 그가 천착(穿鑿)하거나 지향하려는 의미적인 요소가 너무 낯설기만 하다.
김봉철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지팡이를 휘두르면 바람소리가 난다. 세게 휘두르면 날카로운 큰소리가 난다. 부드럽게 휘두르면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 소리는 휘두르는 동작 후에 들린다. // 휘두르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잠언(箴言)같은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이 세상의 만유(萬有)의 형상들에게 절규하는 진실을 인지할 수 있다.
그는 ‘지팡이의 소유자는 영원해 지기를 위하여 자기 이름을 지팡이에 새겨 넣는다. 그러나 지팡이에는 소유자들의 이름이 너무 많아 더 이상 글자를 새겨 넣을 빈자리가 없다.’거나 ‘지팡이는 오랫동안 함께 한 자 일지라도 함께 무덤에 묻히는 일은 없고 다음의 살아있는 자의 것이 되어 빛나는 명예를 유지한다. 소유했던 자들이 어둠 속에 사라져도 지팡이만 남아 계속 존경을 받는다.’는 다소 우의적(寓意的)으로 그의 내면에 잠재한 철학적 명제(命題)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는 우선 「우파니사드」라는 소재로 연작시 세 편을 심도(深度)있는 메시지로 우리들을 매혹(魅惑)시키고 있는데 이 ‘우파니사드(upanishad)’는 인도의 바라문교의 성전에 속하는 하나의 고대 인도의 철학서이다. 이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을 중심으로 인간들의 업(業)과 윤리, 해탈 등을 주장하는 인도의 철학으로 종교의 원천을 이루고 있다는 사전적인 의미로 유추해 볼 때 김봉철 시인의 심저(心底)에는 심오(深奧)한 철학적인 요소가 깊게 잠재(潛在)해 있음을 간과(看過)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떠나기는커녕, 더 가까이 나에게 달라붙어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나의 모든 재산뿐만 아니라 사적인 비밀까지 다 알게 되었고, 사사로운 습관이나 행동까지 똑 같이 따라 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내가 어떤 음모를 꾸밀 것인지, 내가 마음속으로 누구를 좋아하고 미워할 지, 그림자의 감각은 점점 예리해져 내가 생각한 것 보다 더 빨리 선견지명을 가지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나보다 빨리 행동하는 법은 없었다.
언제부터 인가 나는, 오히려 그림자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의 치명적인 비밀을 아내에게 밀고 할지도 모르겠고, 비밀 금고의 열쇠 번호를 알아 두었다가 몰래 도둑질 하지는 않을지, 그림자를 떼어 버리기 위해 암암리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음모를 눈치 채지는 않은 것인지 몰라, 나는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음주운전을 조사하는 경찰처럼 양심이 이식된 그림자 는 나의 돌발적인 욕구를 가끔은 억제시켜 주는 역할도 하긴 했다.
나는 그림자가 없으면 좋겠다. 그림자는 그늘진 삶이며 음모와 쾌락과 뱀과 좌절과 같은 끝없는 고뇌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자동사출용 금형일 수 있다. 그림자 없는 나를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는 조금 창피할지 모르겠지만, 그림자 없는 나 같은 사람들만 모여서 산다면, 그리고 아내도 그림자를 버리게 된다면, 고통스러운 숙제를 풀어야 하는 내일이 아니라, 인생이란 살아 볼만한 신비한 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봉철 시인은 작품 「우파니사드 Ⅰ」에서 ‘그림자’라는 시적 대상물과 자신의 존재를 병치(竝置)하고 바라문교에서 설파(說破)하는 범아일여(우주의 근본인 브라만(梵)과 개인의 중심인 아트만(我)과 궁극적으로 동일하다는 인도 우피나사드 철학의 중심 사상)의 철학과 유사(類似)한 비유법으로 작품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클로즈업되는 것은 ‘그림자’이다. 이 그림자는 바로 자신에 대한 의인화이거나 분신(分身)으로서 모든 언행(言行)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어서 그가 지향하는 진실의 향방(向方)을 제시하는 대변자인지도 모른다.
그가 이러한 전제로 ‘나는 내 그림자를 어디에서 잃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텔레비전 속과 인터넷 속과 근대사를 찾아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종이 일간지는 조사해 보지 않았다. 오늘이 3.1절이어서 그날 만세를 부르다 일본 순사 총에 맞아 실종되었는가 착각도 했는데 거기에는 아무래도 내 연대가 맞지 않다. 아우렐리아노 대령도 아니고, 신드바드도 아니며, 이순신장군도 그의 부하도 아니며, 요덕 이야기에 나온 뮤지컬 배우들의 한 사람이거나 거기서 수용된 정치범일 수도 없으며 오다 노부나가도 아니다.’라는 어조는 그가 동행하고 있는 ‘그림자’가 실종(혹은 분실)되었음을 인식한 뒤에 이루어진 일이어서 그가 고뇌에 허덕이며 추적하는 시적 정황(situation)을 이해하게 한다.
그림자를 버리게 되면, 이웃 친구인 예수나 도갑사寺에서 도道를 열심히 닦고 있는 석가 형님처럼 되지는 못되더라도 최소한 신神이 줄그어 놓은 도덕적 경계에서 삐죽거리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은 꿈을 가진 적은 있다. 나는 어두운 병동病棟에서 비밀리 그림자에게 나의 양심을 이식移植시켜 주었으나, 양심은 노래방의 리듬 전등처럼 곡조에 따라 수시로 변하여 나는 오히려 그 후 그림자의 비위를 마출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잠깐 썩은 세상과 쓸데없는 논쟁으로 핏대를 세워 방심하는 동안,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으나 교회는 비어 있었고 신안 섬으로 낚시하러 간 친구 예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작품의 도입부분에서 감지(感知)할 수 있듯이 상실시대와 불신시대의 현실 사회의 불안정의 상황들에서 그가 시적으로 승화하려는 궁극적인 진실의 지향점을 간파(看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작품 「우파니사드 Ⅲ」에서도 ‘내 그림자를 택배로 보내옴으로써 애인은 나에게 이별을 간단하게 통보했다. 서울로 올라 간 후 그녀의 새로운 네트워크가 완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거나 ‘아내가 바티칸 제국으로 떠 난 후, 20년만 수명을 더 연장해 달라고 나는 하느님에게 매일 편지를 쓰고 간곡하게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답장에는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임무들과 종사해서는 안 되는 직업들이 적혀 있었다.’라고 화자 ‘내(혹은 나)’를 통해서 일상에서 도출된 상상력을 결집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적 화자로 등장시킨 ‘내’와 ‘아내’ 그리고 ‘애인’의 관계 정립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시적 상황을 접근해보면 의문이 풀릴지도 모르겠다. 먼저 ‘아내’에 대한 언술이다.
- 아내에게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그림자는 항상 나와 있어야 한다. 아내는 내가 20년 더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지만, 아내가 죽기 전 까지는 아내의 사회적 체면을 위하 여 나는 그림자를 아내가 항상 안심하고 보이게 하면서 데리고 다녀야 할 것이다.
- 아내가 로마에서 돌아오면 나는 애인에게 받은 비밀의 사랑의 묘약을 아내를 위해 사용 할 것을 결심했다. 사랑의 묘약이 아내를 취하게 하고 있을 동안, 그림자를 떼 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아내의 체면 유지보다는 나의 본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반듯이 나는 아내 를 설득할 것이다.
이처럼 ‘아내’의 존재는 현실 상황보다 더 적나라(赤裸裸)하게 전개되고 있다. 결국 동행하는 ‘그림자’와의 상관성을 규명하는 것이 그들의 시적 관계를 명징(明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나는 그림자를 아내가 항상 안심하고 보이게 하면서 데리고 다녀야 할 것이다.’ 또는 ‘아내의 체면 유지보다는 나의 본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반듯이 나는 아내를 설득할 것이다.’라는 그의 심저에는 어떤 사회성 짙은 강렬한 의미가 포괄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 나는 일을 열심히 했으나, 애인이 나를 따로 불러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 나의 그림자는 애인을 무서워 한 것 같았다.
- 애인이 내 그림자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나는 결코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애인과 반목할 의사는 하나도 없었다.
- 나는 감히 애인으로부터 온 문자를 잠시 무시해 보기로 했다.
그렇다. 나와 애인은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아내와 삼각관계를 이루면서 상당한 고뇌가 수반(隨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화자들이 사이좋게 공존하면서 공동으로 정화(淨化)하거나 척결하려는 사회적 비리와도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 작품들에서 확연하게 적시되고 있어서 현재의 실상을 재현하는 모더니즘적 언어를 읽게 하고 있다.
민주적인 가족은 다수결 원칙에 의거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는데 편파적으로 합의하였다. 그 동안 나도 정부의 고위 관료로 성장해서, 아내와 비리와 내 그림자와 나의 자식들도 나와 동등한 고위 관료 수준으로 사회적 대접을 받았는데, 우선 실행 계획에 따라 아들을 병신으로 만들었고 장해등급을 받고, 관련 네트워크를 위에서 아래까지 매수하여, 아들이 공부만 계속하게 하는데 저렴한 비용으로 성공했다.
--「우파니사드Ⅱ」중에서
남북한이 통일되었다거나 쿠데타를 일으켜 혁명에 성공하였다든가 금메달을 땃다던가 톱스타가 되어 텔레비전에 자주 나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푸짐한 권력을 잡았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림자는 삼청교육대에서나 요덕 수용소 같은 데에서 인간들을 사육하다가도 당장 내 옆에 와 나에게 아첨할지도 모른다.
--「그림자 찾기Ⅱ」중에서
그것이 현재의 사회적 내밀한 형상이다. 역사적인 사실이거나 현실적인 감각에서 진행중인 사회적 비리나 타협들이 시인의 오감(五感)에서 다시 빚어진 폭로와 같은 언어들이 우리들을 흡인(吸引)하고 있다.
그는 ‘청문회가 봄 날씨처럼 열리는 날, 정부로부터 거액 용역비를 받은 까치들은 나의 비리非理를 심문했다.’거나 ‘정부의 개발 기밀을 빼내 아파트에서 땅으로 투자하고 빨리 선수先手를 쳐서 항상 이기는 게임을 하며’라는 등의 어조는 그가 직시(直視)한 세상살이의 비리에 대한 원망(遠望)이며 생존현장의 비극을 적시하는 언어이지만, 그 진정한 내면에는 이러한 외적(外的) 현상들이 형상화하는 내적 진실을 우의적으로 표면화하는 시법임을 알 수 있다.
김봉철 시인에게서 다시 우리들을 미로(迷路)에 헤매게 하는 것은 연작시 「그림자 찾기」에서 주목된다. 이 시집 전체의 작품에서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 바로 이 ‘그림자’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자의 실체는 무엇인가. 다음과 같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투명인간은 그림자가 없다.
- 주인을 잃은 그림자들은 고민을 한다.
- 그림자들만 모여 청와대 지하 벙커 같은 창고에서 날마다 긴급회의를 한다.
- 그림자는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 없이 옆에 존재하는 것이다.
- 내가 투명인간으로 돌아와 내 그림자를 찾으려 해도, 거리에서 잃어버린 유아처럼 그림자 는 스스로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림자는 유괴 되거나 살해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달라붙어 있을 수도 있고,
- 나는 그림자를 사랑한 적이 없다.
- 그림자는 확실히 공적 자금과 권력을 지배했다.
- 그림자가 없는 나는 갑자기 투명인간으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그림자는 잘 놀지 못해서 재미없는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며, 나
또한 그림자 찾기를 포기할 것이다.
이러한 어조들은 작품「그림자 찾기Ⅰ」에서 적시한 그가 의인화한 시적 화자인데 그 화자가 종횡무진으로 누비는 시적 과정과 전개는 어쩌면 시사성 짙은 정책적인 칼럼에 비길 만큼 진지하게 질타하여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형상을 엿보게 한다.
그는 작품 「그림자 찾기Ⅱ」중에서 ‘그러나 그림자가 왜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체면 때문에 설명에서 뺏다. 고승처럼 고고하게 살기를 포기한 이유도 차마 설명할 수는 없었다.’거나 ‘그림자가 없는 나는 조립 완성된 것처럼 보이나, 밤이 깊어 갈수록 나는 철저히 분해되어 버린다.’ 그리고 결론으로 ‘그림자의 의견은 무엇일까? ’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면 이 그림자도 미지의 상관물이거나 아니면 미완성의 자아(自我)에 해당하는 우의적인 화자일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이러한 유추는 그가 작품 「우울」중에서 ‘나는 그림자들을 고용하여 그 조직에 배치하’기도 하고 ‘신은 신도덕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수 천 개의 그림자를 골라 갑옷을 갈아 입힐 수 있는 권력을 부여 받’기도 하지만 이내 사라지고 마는 현실적인 생활방식은 시인의 가슴과 저 멀리에서 난무(亂舞)하는 허망(虛妄)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는 ‘버려진 그림자가 혼자 남아 울고 있다. 울음소리 아주 구슬프다. 구슬픈 울음소리 계절을 바꾼다. 복종아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너와 지낸 행복 그 세월 가슴 깊이 묻어 둔 그 비밀 지금 너무 슬프다 슬퍼서 가슴을 저민다. 비가 내린다.’는 어조로 배척과 배신의 절망감이 엄습하고 있어서 화자의 사회적 적응능력이 희박해지는 형상으로 정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살충제를 독하게 뿌린다 해도, 그림자들을 죽일 수 없다.’ 또는 ‘그림자가 높은 자리에 앉지 않았더라면, 나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도, 떨어져 다칠 위험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자성(自省)의 어조로 전이(轉移)하는 형상을 엿보게 하고 있다.
대체로 이 시집에 수록한 작품들의 지향점이나 경향이 저돌적인 사회적인 문제에 천착하면서도 시사적인 문제를 심도있게 분석하는 기사도의 정신이 바로 이 시편들이 구현하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법은 시적 상관물에 대해서 본의(本義)와 반대로 말하거나 부정적 혹은 소극적인 표현으로 도리어 긍정적, 적극적으로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법으로 아이러니(irony)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수사법(rhetor)에서는 강조하는 방법으로 비꼬거나 풍자가 있어서 다소 반어적(反語的) 표현이어서 외적인 어조로 그 이면에 내포된 의미와는 반대로 나타나는 것이 그 특징으로 되어 있다.
김봉철 시인의 이러한 시법은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new objectivity)라는 표현법과 유사하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1922년 무렵, 표현주의의 반동으로 일어난 예술 사조와 유사한 형상이다. 표현주의인 순수 주관주의를 배척하고 대상의 실재적인 파악과 박진적인 묘사 혹은 세밀(細密) 묘사의 철저한 추구 등의 객관적 경향을 중시하면서 현실의 준엄한 추구라는 문예사조의 한 흐름을 상기하게 되는 특수성을 읽게 한다.
한편 그에게서 주목하게 되는 작품은「그림자놀이」10편에서는 더욱 깊은 사유를 요하는 시적 정황으로 현현되고 있다. 소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겠지만 1. 세상에 복귀하다. 2.피리 소리 3.신성을 위하여 4. 역사의 그림자 5. 종교와 그림자 6. 국가와 그림자 7. 인간과 그림자 8. 변종 9. 천국의 가을 10. 회복이라는 시적 소재가 의미심장함을 인지하게 된다.
그는 ‘그림자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첨단 장비에 이미 침투해 있다.’ 그리고 ‘내가 그림자들을 음해하는 글을 써 간다면 그림자들은 나를 체포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인간과 그림자’에 대한 진솔한 예언(豫言)은 공감의 영역을 확산시키고 있다.
또한 그는 ‘그림자놀이’의 결론으로 ‘과거에서 돌아온 그림자들은 각자 주인을 찾아 다른 방향을 정해 떠났다.’, ‘그런 주인을 찾아 그림자들은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천국을 두루 여행하고 보고 돌아 온 자들은 다시는 천국, 그런 곳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은 사실 세상에 없다. 죽으면 솔직하게 썩어서 흙으로 돌아 가는 편이 낫다. 그리고 흙이 되면서 그림자와 함께 존재가 모두 사라지는 것이 깨끗하다. // 그 인간들에게 그림자는 돌아갈 결심을 하였다.’는 근엄(謹嚴)한 가치관을 정립하고 있다.
김봉철 시인의 깊은 정서의 늪에는 시사성(時事性)이 응축된 절규가 넘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병폐(病弊)나 이미 실망의 골짜기를 넘어간 정치 시회 문화 경제 등등의 범주(範疇)까지도 그의 사유 영역 안에 남는다.
시인이 죽은 사회에서, 협회에 등록된 시인들의 명단이 점점 불어 난 것을 보면 의아하다. 무엇인가 모르지만 모두들 자기가 지은 노래를 자기가 불러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인가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이 아니어서 다른 노래를 지어 다시 불러 본다. 내가 지은 노래를, 모르는 다른 사람이 부르는 것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감격한다.
--「시인이 죽은 사회」중에서
소년에게 용돈은 항상 부족했다. 가끔은 어머니 몰래 아버지가 용돈을 호주머니에 찔러 준 적이 있었는데 소년은 그 돈으로 비밀 통로를 경유하여 꾸준히 전쟁물자를 구입해 왔다.
--「21세기 전쟁 소년의 변증법적 함수에 대한 분석」중에서
한파는 풍선에 1달러를 매달아 공중에 날려 북한 쪽에 보내 약을 올리는 방식을 채택했고 다른 한파는 돈도 식량도 모아 주면서 그보다는 가당치 않은 애정을 주려고 애썼다.
--「남북통일에 대한 정부의 제안」중에서
그렇다. 우리의 현대시에는 사회성을 강조하는 작품을 많이 대하게 된다. 우리 인간은 고립된 상태에서 생활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서로 교류하고 집단을 이루면서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현대시도 그 사회생활에서 떠날 수가 없다. 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적 현실에 직면하여 거기로부터 끊임없이 주제를 탐색해야 한다.
이처럼 김봉철 시인도 ‘시인’과 ‘21세기 전쟁 소년’과 ‘남북통일’ 등 현실문제에 집착하면서 사회적인 모순과 갈등에 대해서 상응하는 비유와 상징을 동원해서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의 사회는 삶에 대한 방식이나 인식이 더욱 복잡해지고 다양화함으로써 불합리한 양상이 도처에서 발발하기 때문에 우리 시인들은 비록 자기 내부에 침잠(沈潛)할 때에라도 외부로부터 갈등을 그 복잡한 사고(思考)와 표현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지난 날 시의 사회성이라고 하면 그 시인이 널리 일반적인 사회인으로서의 공통성 위에 서고 그 작품의 주제가 사회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면서 능동성(能動性)을 나타내는 경우에만 언급되었다.
이러한 시적 구조는 아주 소박한 생활시로부터 정치적인 사회체제의 변혁을 위한 작품 그리고 평화를 위한 작품 등 광범위하게 포괄하지만, 단적으로 그 경향을 드러내는 등의 특성을 알 수 있었다.
그런면에서 김봉철 시인의 서사구조의 시법은 대체로 사회적인 이슈가 주종(主從)을 이루고 있어서 그가 의도하고 구현하려는 시적 진실이 바로 현실의 갈등들을 화해시키는 한 방법으로 승화하고 있는 것이다.
김봉철 시인은 이러한 시사성의 작품 이외에도 그의 서정성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도 많이 읽을 수 있다.
무엇인가 그리워 질 때면 밤이 깊어 갑니다.
겨울밤은 오래도록 나를 혼자 내버려 둡니다.
검은 스타킹을 끼고 다리를 길게 꼬고 벤치에 않아 있는 저 영산강 아래로 가로등이 흘러가는 누군가 버린 꿈을 비춥니다. 나도 가지고 싶지 않은 것들은 몰래 모두 모아 강물에 흘러 떠나게 하고 아주 잊히어지도록 시간을 재고 있지만 다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 참으로 잊히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고즈넉한 밤 강 뚝
내가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철새들은 둥우리를 박차고 날아오릅니다. 품었던 갈대밭을 떠나 달빛들이 그림자를 모읍니다.
강물에 혼자 달이 떠서 흘러갑니다.
여기 작품 「행복한 시간」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잔잔한 서정이 넘치는 정감(情感)을 느낄 수 있다. 겨울밤의 고독과 그리움 등이 혼합의 이미지를 통해서 사유를 정리하는 진지한 모습의 시정(詩情)을 알 수 있다.
그는 작품 「고백」중에서도 ‘아내여, 나는 그대의 큰 바다가 아니라 해변에 지금 막 부서지고 있는 작은 물거품을 임을 용서하라. 나도 죽어서 해변에는 많은 파도의 무덤이 보인다. 저 멀리 바다 어디에선가 만나 그래도 파도는 함께 부서지기 위하여 겁 없이 사랑하며 엉키면서 해변으로 밀려간다.’는 성찰의 고백은 그가 지향하는 인생관의 재정립을 위한 하나의 잠언으로 들린다.
이러한 작품은「겨울」「선물」「하당에서」「눈내리는 밤」「목포항」「봄이 오네」등에서 그의 서정시적인 상황과 그 전개 혹은 이미지의 함축 그리고 주제의 투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김봉철 시인은 이 시집의 제목과 같이 그림자 찾기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작품 「ABA THAR를 그리워 하며」전문에서 ‘생활이 나를 속일지라도 그림자가 하자는 데로 시키는 대로 나는 한다. 물 위에서 긴 팔로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는 숙명은 나에겐 평온이다. 그 겨울 매서운 북풍이 몰려 와 목포 부두 주인 없는 모든 그림자들을 모두 휩쓸어 가는 비극적시간은 나의 안식이다. 고상한 가로수 나무 사이로 겨울 해가 걸려 있는 동안 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다시 꿈을 꿀 것이다. 긴 팔뚝에 걸린 짐을 내려놓으며 바람이 멈추고 내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그러면서 나는 다시 아비타를 그리워한다.’는 어조와 같이 그의 그림자는 그의 영육(靈肉)을 지배하면서 ‘평온’과 ‘안식’과 ‘꿈’과 ‘그리움’이 융합(融合)하는 조화의 시세계를 구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자 찾기는 오래도록 지속되는 그의 인생론적 철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