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가 자신의 복음서 제24장과 제25장에 기록해 놓은 종말 설교는 예수님께서 우상숭배와 죄악을 저지른 유다교와 이스라엘 사회에 대해서, 그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이 곧 파괴되리라고 예언하신 데서 비롯되었다(마태 24,2). 그러자 제자들은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 또 그때 그 일이 일어날 때 과연 종말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징은 무엇인지를 예수님께 여쭈었다(마태 24,3).
먼저 종말의 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마태 24,36)고 대답하셨다. 이는 그 때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고, 얼마든지 앞당길 수도 또 늦출 수도 있어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에 의해 정해질 수 있는 그런 때라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종말에 대해서는 유다인들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다. 유다인들은 세상의 종말이 인류 멸망이라고 보았고 이는 지금도 무신론과 유물론을 신봉하는 일반의 견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이란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을 완성시키시는 때라고 보셨다. 그래서 인류 멸망의 때에 가서나 다가오리라고 기대하던 세상 완성으로서의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셨고, 이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랑의 실천으로 앞당겨진 마지막 때였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서는 종말의 때가 객관적인 때라고 보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주관적인 때라고 보고 계셨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때야말로 인류의 완성이요 또한 완성으로서의 종말인 때라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종말을 앞당기러 오신 예수님을 따라서 다가온 이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함축적으로 이렇게 표현하였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히브 1,1-2).
그러므로 이 종말이자 완성의 때를 앞당기는 변수는 진영으로 보면 악의 진영에 주도권이 주어져 있지 않고 선의 진영에 주도권이 주어져 있다. 동 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자연의 이치처럼, 세상의 악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추방된 이래로 계속해서 기승을 부려 왔다. 하지만 이 악을 몰아낼 수 있는 결정적인 선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비로소 실현되었으니, 그것이 십자가의 자기헌신 내지 자기비허로 나타나는 사랑의 실천이다(필리 2,6-11 참조).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종말을 앞당길 수 있는 징표에 대하여, 타인의 굶주림과 목마름과 떠돌이 생활, 헐벗음, 병듦과 수감 등 고통에 대해 사랑을 베푼 행위라고 단언하셨다(마태 25,34-36). 이 행위가 종말을 앞당길 수 있는 위력을 지닐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셨다(마태 25,40.45). 이것이 자비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 여타 종교의 성현들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성현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반열이 높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따라서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가 종말을 앞당길 수 있는 위력을 지닌 애덕 실천을 전개한 범주는 네 가지였다. 첫째는 일시적 도움이요, 둘째는 지속적이고 전문적인 도움이며, 셋째는 상호적인 협동 운동이고, 넷째는 개혁을 위한 정신운동과 입법운동으로서의 사회 운동이다.
인간을 빈곤에 몰아넣고 소외시켜 고통스럽게 하는 죄악은 영적으로는 사회병리현상에 속하고, 이에 대해서는 사전 예방이 근본적이지만 일단 벌어진 재앙에 있어서는 그 피해자와 희생자를 돕는 사후 치료가 우선이다. 그래서 급작스럽게 재난을 당하여 빈곤해진 이들에게는 일시적 도움만으로도 그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 이것이 긴급 구호이다.
그런데 더 많은 가난한 이들은 이러한 일시적 도움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장애를 지니고 있거나 고아나 독거노인 등 가정 없이 살아가는 단독 세대의 경우에는 지속적이고 전문적인 도움을 주어야 그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 이것이 사회복지이다.
그런데 긴급 구호나 사회복지는 시혜자가 일방적으로 수혜자에게 베푸는 도움이다. 또한 우리 사회의 더 많은 사회적 약자들은 항시적 재난 상태에 놓여 있거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장애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주거에 있어 자기 집이 없는 세입자이거나 고용에 있어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을의 처지에 놓여 있을 뿐이고 자기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공동체적인 자조 노력을 할 수 있도록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도움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문제를 의식할 수 있도록 돕는 의식화 및 사회문제화와 이 문제를 같은 이해관계를 지닌 이들이 함께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조직화를 통한 공동체 운동이 그 답이다. 이 단계에서 세입자나 비정규직 노동자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중산층 시민계층으로부터 지지와 연대를 받을 수 있으면 정상적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해 나가기가 쉽지만, 그렇지 못하면 과격해지고 고립되어서 해결이 어렵다. 흔히 기득권 계층은 이 지지와 연대의 고리를 언론이나 종교 등을 차단함으로써 끊어왔다. 사회사목적 노력은 이 고리를 잇고 사회적 약자들이 중산층의 든든한 지지와 연대 속에서 우리 사회 공동선의 취약 지점을 강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이 억강부약(抑强扶弱)의 노력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처방은 사회병리현상으로서의 빈곤과 소외를 사전에 예방하려는 노력이다. 이 점에 있어서 본당사목과 사회사목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할 바가 있으니, 사회 구성원들이 건전한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으로 사회 문제를 바라볼 수 있도록 평소에 지속적으로 양심 훈련을 시키는 일과 건전한 여론을 형성하는 일, 필요한 경우에 입법과 정책으로 제도화될 수 있도록 여론의 지지를 호소하거나 행정 당국에 건의하는 일, 각종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정강 정책에 대하여 주권자로서의 의사 표시를 행하도록 장려하는 일 등 사회운동이 그것이다.
이러고 보면, 마태 25,34-36에 기록된 바 장려된 애덕 행위는 긴급 구호나 사회복지에 해당될 뿐, 현대에 들어서서는 공동체 운동과 사회 운동 차원에서 더 보편적이고 더 전문적이며 더 체계적인 애덕 실천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현대의 상황이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이러한 애덕을 실천하기 시작한 이들은 개별 그리스도인과 교회였고, 점차 국가가 국민에 대한 의무를 자각하면서 교회의 사도직 활동으로부터 국가의 사회복지 행정 사무로 옮겨가고 있는 추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웃을 위한 도움의 네 단계 중 어느 단계에 속하는 활동을 하든지, 또 그 활동 주체가 개별 시민이든 교회이든 국가든지 간에 인격적이고 공동체적이어야만 그 도움이 효율적일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새기는 일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본당사목과 사회사목의 각성되고 유기적인 연대와 공동합의적 논의구조가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도덕적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사회적 빛이며 교회가 영적 매력을 발산하는 길이다. 진정한 선교란 이러한 각성되고 유기적인 연대와 공동합의적 논의구조에서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이것이 종말을 앞당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고 체험시킬 수 있는 복음선포 노력이다.
이 점에 있어서,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나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는 예수님을 닮기 위한 목표를 믿음으로 지니고 있는 신자들을 설득하여 자아를 실현하도록 돕는 교육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주일미사를 빠지지 않으려는 소극적 목표로 신앙생활을 하는 현실과는 달리, 예수님을 닮으려는 목표로 자아를 실현하려는 적극적인 목표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선교적이고 사회사목적인 실존이야말로 이 ‘마지막 시대’에 하느님 나라 실현을 앞당길 수 있는 영적 전사(戰士)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