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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1405년 (태종 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다. 1 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궁궐 중 처음으로 다시 지어졌으며, 이후 역대 왕들이 1867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약 270여년 동안 창덕궁을 더 많이 사용하여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특히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은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며, 낙선재 권역은 광복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순정황후(순종 두 번째 황후),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고종의 딸))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또한 비원으로 잘 알려진 창덕궁 후원은 다양한 정자, 연못, 수목, 괴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https://royal.khs.go.kr/ROYAL/contents/menuInfo-gbg.do?grpCode=cdg
종로구 율곡로 99 문화재청 창덕궁 02-3668-2300
매주 월요일 휴궁 일반요금 : 대인(내/외) 3,000원
무료관람대상자
만 24세 이하 및 만 65세 이상 내국인(신분증 지참)
만 18세 이하 및 만 65세 이상 외국인
장애인 독립유공자 및 배우자, 애국지사, 국가유공자 및 배우자, 독립유공자 애국지사 특수임무유공자 특수임무부상자, 특수임무공로자, 5·18민주유공자 5·18민주화운동부상자, 5·18민주화운동희생자
접근성
장애인전용 주차구역은 서울시설공단 공영 주차장 창덕궁 왼편에 위치하며 평지로 이동하여 정문으로 출입이 가능하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
버 스
현대빌딩 앞 109, 151, 162, 171, 172, 272, 7025
화장실
창덕궁내 모든 화장실에는 장애인전용 화장실이설치되어 있다. 최근에 설치되었거나, 개보수가 이루어진 화장실이 좀 더 편리하게 구성이 되어있다.
편의시설
창덕궁내 카페와 기념품점은 경사로가 설치되어 접근 및 이용이 가능하다
창덕궁내에는 의무실, 안내데스크, 점자 책, 휠체어, 유모차 대여가능 등 비치되어 필요시 이용이가능하다.
돈화문(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돈화’는 ‘교화를 돈독하게 한다’라는 뜻이다.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처음 지어졌는데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지었는데, 규모는 2층 누각형 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돈화문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하였고, 신하들은 보통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돈화문을 지나면 양옆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회회나무가 총 8그루가 있는데, 나무의 높이는 15~16m, 가슴 높이 줄기 둘레는 90~178㎝에 이르는 오래된 나무이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왕을 모시는 신하들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궐내각사(궁궐 안에 두는 왕의 직속 기관들)가 위치한 궁궐 입구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창덕궁 회화나무군은 200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금천교(錦川橋)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 즉 금천(禁川) 위에 세운 돌다리이다.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돈화문 동쪽 궐 밖으로 빠져나간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1411년(태종 11)에 조성되어 현재까지 잘 남아있는 돌다리로, 현존하는 궁궐의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되었다.
규모는 길이 12.9m, 너비 12.5m로, 전체적인 구조는 홍예(虹蜺, 무지개 모양) 2개를 받치고 그 위에는 장대석 모양의 멍에돌(駕石)을 얹었다. 다리 옆면 홍예 사이의 벽에는 귀면(鬼面)을 새겼고, 그 아래쪽 두 홍예 가운데에는 남쪽에는 해태로 추정되는 석상, 북쪽에는 거북이를 닮은 석상을 배치하였다. 금천교는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궐내각사(闕內各司)는 궁궐 내의 관청을 의미하는데,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을 말한다. 인정전 서쪽 금천교 뒤로 동편에 약방(내의원),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奉謨堂), 검서청(檢書廳) 등이 있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2000~2004년에 복원하였다.
궐내각사 내각(규장각) 북쪽에는 수령이 750여 년 된 향나무가 있다. 향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피우는 향의 재료로도 쓰이며 정원이나 공원에 많이 심는다. 창덕궁의 향나무는 동서남북으로 1개씩 가지가 뻗어나갔는데 남쪽 가지는 잘렸고, 북쪽 가지는 죽었으며, 동쪽 가지는 꼬불꼬불한 기형으로 자라서 지금의 수형(樹形)을 이루고 있다. 이 향나무는 1968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궁중 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인정’은 ‘어진 정치’라는 뜻이다. 인정전은 창덕궁이 창건될 때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에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다음 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인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지어졌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이 없어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내부 바닥은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마루는 전등, 커튼, 유리창문 등과 함께 1908년(융희 2)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전 앞마당, 즉 조정(朝廷)은 다른 궁궐의 정전과 같이 박석이 깔려 있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조정에는 품계석을 놓았다. 인정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외행각 일부는 1991년 이후에 복원하였다.
인정문(仁政門)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의 정문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인정문은 왕의 장례(국장)가 있을 때 다음 왕의 즉위식을 치렀던 곳으로 이곳에서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인정문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희정당(熙政堂)의 ‘희정’은 ‘화락한 정치’라는 뜻으로, 원래는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침전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편전으로 기능이 바뀐 건물이다. 창건 당시 이름은 숭문당(崇文堂)이었으나 1496년(연산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원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혼전으로 사용되면서,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희정당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에는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그러나 1917년 대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다 복원하였는데, 이때 내부를 쪽매널 마루(여러 가지 색깔이나 무늿결이 있는 널조각을 붙여 깐 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몄다. 희정당 앞쪽은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의 형태로 되어있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는 구조로 바뀌었다. 희정당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조전(大造殿)의 ‘대조’는 ‘큰 공업을 이룬다’라는 뜻으로, 창덕궁의 정식 침전이자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전각 중 유일하게 용마루가 없는 건물로, 창덕궁 창건 당시부터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었다. 현재의 대조전은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희정당처럼 내부를 마루와 유리창 등 서양식으로 꾸몄다.
대조전에서 추존 문조(효명세자)가 태어났고, 성종, 인조, 효종, 효현황후 김씨(헌종 첫 번째 왕비), 철종, 순종이 세상을 떠났다. 특히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대조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낙선재 일원은 조선 24대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하면서, 1847년(헌종 13)에 창경궁 낙선당 터에 낙선재를 지었고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석복’ : 복을 내려줌)과 수강재(壽康齋, ‘수강’ : 오래 살고 건강함)를 지었다. 낙선재의 ‘낙선’은 ‘선을 즐긴다’라는 뜻으로,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로 사용하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원황후 김씨(순조의 왕비)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낙선재 일원은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고, 낙선재 뒤로는 후원을 만들었다. 건물과 후원 사이에는 작은 석축들을 계단식으로 쌓아 화초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세련된 굴뚝과 괴석들을 배열했다.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간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정원이다.
특히 이곳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황후 윤씨와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가족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낙선재는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창덕궁 후원은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일원으로 나뉜다.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할 당시 조성한 후원은 세조 대에 확장하였고, 성종 대에 건립된 창경궁까지 그 영역이 확장되었다. 후원 권역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소실되었고, 1610년(광해군 2)에 다시 조성되었다. 이후 인조, 숙종, 정조, 순조 등 여러 왕들이 개수하고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부용지(芙蓉池) 일원은 창덕궁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이다. 300평(약 1000㎡)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다.
부용정(芙蓉亭)은 부용지 남쪽에 있는 정자로, ‘부용’은 ‘연꽃’을 의미한다. 원래는 1707년(숙종 33) 택수재(澤水齋)라는 이름의 건물을 지었는데, 1793년(정조 17)에 건물을 고쳐 짓고 이름을 부용정으로 바꾸었다. 부용정은 지붕 위에서 봤을 때 열 십(十)자의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부용정은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옥류천(玉流川)은 ‘옥같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라는 뜻으로,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른다. 1636년(인조 14)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逍遙巖)을 깎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다. 『궁궐지(宮闕志)』에 의하면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시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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