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지 개요 및 등산지도
팔공산은 장수읍 서남향 20리에 위치한 곳이다.
높이 1천 1백 51m의 고산으로 소백산맥에서 호남정맥이 시작되는 산이다.
장수는 거의 전지역이 소백과 노령의 분지적 협곡지대로 장수(長水)라는 글자 그래로 물이 길다는 곳이다.
장수에 위치한 팔공산은 대구에 있는 팔공산과 이름이 같지만
장수쪽의 팔공산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아 일반 산악인들은 팔공산 하면 대구 팔공산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주변에 역사와 성인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어 성적산이라고 불리었으며
원효와 의상이 이 산에 들어와 8명의 승려를 가르치며 함께 머문 까닭에 팔공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산에는 합미성이라는 고성이 있는데
이 성은 최근 고고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백제때 축조한 성이라고 한다.
북쪽에 성수산과 마이산, 동쪽에 장안산이 솟아있고 동쪽 계곡에 팔성사, 남쪽에 함미성 등의 명승고적이 있다.
팔공산의 이름은 산의 동쪽 기슭에 있는 팔성사에서 비롯된다.
전설을 따라가 보면 원효 스님이 토굴(土窟)에서 정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삼매(三昧)에 들어보니 중국의 요동(遼東) 땅 담운사(曇雲寺) 스님 1천 명이 절이 무너져서 치어 죽을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 까닭을 살펴보니 스님들 모두가
파계(破戒)를 한 과보 때문이었데 진심으로 참회하면 구제될 수 있었다.
이를 가엾게 여긴 원효 스님은 절이 무너지기 직전,널판자를 담운사를 향해서 던졌다.
허공에서 빙빙 돌고 있는 널판자를 보기 위해 담운사 스님들이
모두 절 밖으로 나온 사이 절이 무너졌고 스님들은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널판자 위에는‘해동 원효 척판구중(海東 元曉 擲板救衆, 해동에 있는 원효가 소반을 던져서 스님을 구한다)
이라고 쓰여 있었다고.이에 해동 신라를 찾아온 1,000명 스님들은
원효 스님의 화엄경 강설을 듣고 다같이 아라한(阿羅漢)이 될 수 있었다.
그후 천명의 스님들은 모두 중국으로 돌아가고 8명의 스님만이 원효를 따라
수도를 하게 되었는데 원효와 의상 스님이 이곳 팔공산에 들어오자 그들 역시 함께 거주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8명의 귀한 손님들이 산다하여 팔공산이라 불렀고 모두가
성스러운 스님이라 하여 팔성사라 이름하였으며 이들 성인들의 자취가 있는 곳이라 하여 성적산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성수산은 높이 876m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고려와 조선 조의 건국설화가 얽혀 있는 명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여 사방으로 전망이 빼어난 곳이다.
지난 1996년 성수산휴양림이 개장되면서 여행객들과 더욱 친숙해졌다.
고려 때의 풍수지리에 통달한 도선국사는 이 산을 본 후 천자를 맞이할 성지로 손색이 없다고 탄복하고,
그 후 송도로 올라가 초야에 묻혀있는 왕건에 백일기도를 권하자 왕건은 이곳에 내려와 목욕재계하고 기도 드렸다.
드디어 관음의 계시가 나타나 고려 건국의 대업을 성취할 수 있는 계시를 받고
그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여 '환희담'이라 친필로 바위에 새기고 암자를 지어 도선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조를 건국한 이성계도
당시의 무학대사의 권에 따라 성수산에서 기도를 드렸더니
용이 나타나 세번이나 몸을 씻어 주었다는 '발용의 대몽'을 꾸고돌기둥에 '三淸洞'이라 친필로 새긴 비석을 세웠고
등극한 후에 이 암자의 이름을 상이암으로 고치고, 이곳에 어필각을 세워 그 안에 '삼청동'이라 쓴 입석비를 안치토록 하였다.
성수산은 또한 구한말에는 이석용 의병장이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운 전적지로.. 6.25 때에는 격전지로 수난을 겪은 산이기도 하다.
<산행개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