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내리는 고모령(1948)/ 현인
1.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_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 날밤이 그리웁고나
2.
맨드라미
피고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아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_아
어이해서 못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나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3.
눈물어린
인생고개 몇 고개이더냐
장명등이 깜박이던- 주막집에_서
손바닥에 쓰린 하소 오늘밤도
불러본다 망향의 노래
호동아 작사 / 박시춘 작곡
[현인]
1919년에 부산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38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에는
현 도쿄예술대학의 전신인 우에노 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현인이 사관학교에 가기를 원했지만,
현인 본인은 음대에 진학하여 교수가 되기를 희망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는 그의 대학 학비를 끊어버렸다고 한다.
일제의 강제징용이 시작되자 중국 상하이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악단
'신태양'을 조직해서 활동한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악단을 다시 조직하여
극장 무대에서 연주하며 다닌다. 그후 당시의 유명한 작곡가인 박시춘이
찾아와서 자신의 곡을 불러달라고 한다.
현인은 "성악도가 유행가 따위를 부를 수는 없다"며 거절했지만,
박시춘이 거듭 권유하자 며칠 생각해본다고 하고,
집에서 며칠 동안 고민 한 뒤, 결국 대중가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박시춘은 현인에게 곡을 주었고, 이 곡이 바로 신라의 달밤이다.
이 곡은 발표 당시에 정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현인을 가요계의 정상에
등극하게 했다. 이후 현인은 <비 나리는[5] 고모령>, <고향만리> 등을
연달아 히트시킨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슬픈 정서를 잘 보여주는
<굳세어라 금순아>(흥남 철수가 배경이다.)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들으며
울기도 했다. 시대를 대변하는 듯한 가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후 대한가수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74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로 이민가서 '가스라이트'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했지만, 한국에서의 무대가 그리워서 1981년에 귀국한다.
1991년에는 <노래하는 나그네>, <길> 등의 신곡을 발표한다.
1998년까지는
KBS 가요무대와 악극 등에 출연하여 왕성한 활동을 했었지만,
지병인 당뇨병의 악화로 2002년 4월 13일 82세로 사망하였다.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비
비내리는 고모령의 유래
비 내리는 고모령〉은 현인씨가 부른 대표곡이다.
현인과 함께 히트작을 많이 낸 유호와 박시춘 콤비의 작품이다.
유호의 필명인 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의
비나리는 고모령이라는 제목으로 1948년에 발표되었다.
노래의 배경은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고개인 고모령(顧母嶺)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 고개가 징용으로 멀리 떠나는 자식과 어머니가
이별하던 장소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별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만들었다는 설을 비롯해 유래에 대해 여러 일화가 전한다.
발표 당시에는 이 지역이 경상북도 경산군이었으며,
인근에는 경부선 철도역인 고모역이 있었다.
가사는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라는 슬픈 내용으로 시작하여,
고모령에서 어머니와 헤어진 화자가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심정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노래 속의 고모령은 한 맺힌 이별의 장소로 그려지며
"눈물 어린 인생고개"로 은유되기도 한다.
1948년 가수 현인선생이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끈 "비내리는 고모령"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때에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오...
의 실존 장소가 과연 어디일까?
노래비는 대구 망우공원에 위치해 있어
관심있는 사람들은 찾아볼 수가 있지만
노래가사에 있는 고모령은 찾아보고 싶어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이유는 고모령의 실제 위치가 2군사령부 영내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