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스폐셜 특별회 2 : KBS 신년스페셜 고선지 2부 파미르를 넘어 세계사 속으로' (2001.01.07.)
97회 다음 특별회 2 : KBS 신년스페셜 고선지 2부 파미르를 넘어 세계사 속으로
KBS 신년스페셜 고선지
2부 파미르를 넘어 세계사 속으로
방송일: 20000107 조회수 : 2166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KBS 신년스페셜 '고선지' 2부
메인 타이틀 '고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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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산성(9") '668년 고구려 멸망'
고구려는 사라졌지만 서역에서/
고구려인들의 역사는 이것이 시작이었다.
C.G:하란6주(15") 당은 고구려인들의 항당투쟁을 막기위해 20만명에 달하는 고구려인들을 사막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바로 그 유민들 속에 '고선지'일가도 포함돼 있었다.
사막(12") 약관의 나이에 포로의 아들에서 서역을 다스리는 안서군의 유격장군으로 발탁된 고선지,
쿠차/C.G(6") 그는 마침내 천산산맥 서쪽 기슭의 달해부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도호부 2인자 자리에 올라선다.
양떼/파미르/연운보(12") ... ...
중앙아시아 파미르를 두고 토번과 벌인 전투, 당시 고선지의 대원정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불가능한 도전
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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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타이틀 '파미르를 넘어서 세계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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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쿠시항공(21") (전운이 감도는 긴장된 음악... )
'나는 새도 지나지 못한다는 파미르 고원'
고선지는 만명의 군사와 군마를 이끌고 파미르를 넘어 지금의 아프카니스탄 령인 연운보에 이른다.
쿠차을 떠난지 95일만에 일이다.
힌두쿠시pan(9") 토번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연운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고선지는,
다시 힌두쿠시 산맥으로 향했다
라이트 켠 차량(18") (현장음... ... )
고선지의 행적을 쫓아 실크로드를 지나온 취재팀은/
고선지의 원정루트 가운데 가장 험준한 다르코트 고개를 직접 답사해보기로 했다.
다리 넘고 (9") 연운보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고선지는 대군을 이끌고 파키스탄령인 야신계곡을 건넜다.
지도/두사람(10") 고선지의 목표는 소발률, 지금의 길기트 지방이다
사진설명(9") 다르코트 입구에, 취재팀은 켐프를 치고 현지인들의 협조를 얻어 정상에 오를 준비를 갖췄다
사진/책(9") 영국의 탐험가인 스탄인경이
한니발이나 나폴레옹의 원정을 능가하는 것이라고 찬탄해 마지 않았던 바로 그 원정길,
책에서 자막 그는 이 대단한 원정루트를 직접 추적해보고 싶어했고, 실제로 그의 소원대로 세 번이나 탐사를
했었다.
눈덮인 설산 (12") (음악)
취재차량(20") 지난 월, 취재팀은 파키스탄 현지 안내인과 포터를 대동하고 해발 4575미터의 다르코트 정상으로
향했다
다르코트 정상을 넘는 일은 천2백년이 흐른 지금에도 역시/
선뜻 감행하기 어려운 등반이다.
tr(5") (음악)
당시 황제의 명을 받고 고선지 군대의 원정길에 동행했던
물/외나무다리(11") 환관 변영성은 고선지가 다르코트 정상을 넘으려하자
두려워하며 더 이상 진군하려 하지 않았다.
탄구령 오른다(6") 황제가 보낸 감군조차 기피하는 원정길, 고선지는 그들을 남겨두고 행군을 계속했다.
다르코트마을(6") 해발 2500미터에 위치한 다르코트 마을,
일하는 모습 (5" ) 이곳 사람들은 고원지대에서 양을 치며 살아가는 유목민들이다.
할머니(13") ... ... ...
남자아이 워낙 척박한 오지라,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가구수는 고작 20여호에 불과하다.
등짐 여인(13") 그나마 마을에 머무는 때는 겨울뿐, 봄부터 가을까지 이들은 천막을 가지고 다니며 목초지를
찾아 이동한다.... ... ...
핼퍼와 나귀(5") ... ... ...
취재진(8") 취재팀은 다르코트 정상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취재진(9") 다르코트 마을에서부터 정상까지는 절벽을 타고 1800미터를 더 올라가야 한다
핼퍼와 말Z-I(21") ... ... ....
이 험난한 등정길을 당시 고선지는 7천명의 군사와 군마를 이끌고 어떻게 행군할 수 있었을까.
폭포(16") ... ... ...
정상까지 가는 길에 평지는 거의 없다.
... ... ...
고선지군대는 연운보에서 타르코트 정상에 오른후 이 길을 따라 길기트로 향했다.
타반칸 교수 인터뷰 (유명한 중국장군 고선지는 그때 이 루트를 통해 내려갔다
이쪽은 매우 어려운 길이어서 이 길로 내려오지 않고 그는 위의 경사면을 통해 여기 이 길을 따라 다르코트
마을로 내려갔을 것이다)
아영지(11") ... ...
정상까지는, 길을 재촉해도 꼬박 이틀이상 걸린다.
취재팀은 하루밤을 이곳에서 아영했다
능선따라 취재진(7") 이튿날, 취재진은 다시 등정을 시작했다
다르코트 빙하(14") ... ...
해발 4천미터에 다다르자, 정상이 보이면서 거대한 얼음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교수 고산병(12") ... ...
해발 4천미터를 넘어서자 등반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현지 안내인이던 길기트 대학 교수가 고산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 ... ...
카메라맨(12") 고도가 더 높아지자 이번에는 카메라 감독이 고산증세를 보였다.
교수와 핼퍼 실랑이(20") 게다가 현지 포터들은 위험해서 말을 데리고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며
하산하려 했다.... ... ....
병사들이 두려워 진군을 거부했다는 기록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빙하오르는 취재진(14") ... ... ...
정상부근은 완전히 빙하로 둘러싸여 있었다.
카메라 정상(15") 마침내 다르코트 정상, 고선지 군대는 연운보에서 이 다르코트 정상까지 오르는데,
3일이 걸렸다고 한다.... ... ....
정상팬 (13") 정상에 오른 고선지는 바로 하산하여 소발률 즉 길기트 정복하려 했다.
연운보에서 물리친 토번군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소발률을 기습해야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말/정상(10") 그러나 당시 고선지 군사들은 절벽을 내려다 보며 하산하기를 두려워했다.
구당서 당서에는 거부하는 군사들과 고선지 계책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다.
'탄구령의 험준하고 가파른 길이 이어지자
병사들은 과감히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병사들이 말하기를 도대체 장군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는 겁니까?'
탄구령정상 '이에 고선지가 말하길 배반했던 적의 마음이 돌아왔다
토번으로 통하는 등교는 이미 잘려졌다. 선지가 거짓으로 기뻐하자 병사들은 마침내 내려갔다'
산맥 '고선지는 부하 20명을 옷을 갈아입히고 적병으로 가장 시켜 당군을 영접하는 것처럼 꾸미게 했다'
취재차량(11") 마침내 군사들은 고선지의 말만 믿고 단숨에 40리 타르코트 고개길을 내려왔다
등교(21") 정상에서 길기트강이 내려다보이는 야신계곡으로 무사히 내려오자, 병사들의 사기는 충만해졌다.
고선지군은 천명의 별동부대를 편성에 먼저 길기트강을 따라 소발률로 진격케 했다.
C.G:쿠차/소발률(14") 쿠차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고 험준한 타르코트 정상을 지나,
드디어 소발률 정복이 눈앞에 있었다.
길기트 시가지(21") 소발률 왕궁이 있던 길기트는 갑자기 급습해온 고선지 군대로 일대 혼란에 빠졌다.
별동부대로 하여금 성의 배후를 치게 하고 고선지 주력부대가 나서자, 소발률왕은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인더스 강가(7") 소발률을 함락시킨 고선지는 곧 들이닥칠 토번군을 막아야했다.
강/합류지점(17) 고선지 군대는 소발률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길기트강으로 향했다.
고선지는 길기트성 남쪽, 인더스강과 길기트강이 만나는 합류지점에 세워져있던 등교를 끊어버렸다.
다리 건넌다(9") 이 등교는 소발률이 토번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로 다리를 끊음으로써 토번군의 지원을
봉쇄해 버린 것이다.
다리(5") 실제로 토번군은 고선지군보다 훨씬 많은 군사를 이끌고 등교를 건너려던 참이었다.
자치 통감 자치통감에는 '고선지가 급히 다리를 끊게 했고, 다리를 자르자마자 토번대군이 몰려들었으나
건널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길기트tr(12") 북부 파키스탄에 위치한 길기트, 길기트는 서역진출을 꽤하던 토번에게 꼭 필요한 요충지였다.
고선지군이 이 길기트를 정복함으로써
시내 s.k(3") 토번을 외부와 차단해 완전히 고립시켰다.
성벽 앞에서 연주 (음악)
폴로 경기(11") (현장음)
선수골인 당은 물론 고구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도 행해졌던 폴로 경기,
그 기원이 바로 이곳 길기트다.
당현종이 가장 좋아했던 운동이 폴로, 즉 격구라고 한 것으로 봐서, 고선지가 이곳을 정복할 즈음에도 격구는
대단히 성행했었을 것이다
남녀학생들(5") (음악)
단요르마을(7") 길기트 중심가에서 얼마떨어지지 않은 곳에 단요르라는 마을이 있다
취재진 (10") 이곳에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8세기경의 암각화가 있다.
교수 설명(10") 바위에는 고선지의 길기트 정복을 암시하는 글귀가 새겨져있다는 것이다
각석PAN(11") 이 길기트 지역의 왕에 관한 기록이라고 하지만 바위에 쓰여진 글자는 처음 보는 생소한 문자들
이다
탁본하는 모습(5") ... ... ....
취재진은 각석의 글자들을 조심스럽게 탁본했다
탁실라박물관(16") 각석의 문자는 어쩌면 파키스탄에서만 쓰여진 고어일지도 모른다
박물관장 인터뷰 (이것은 브라미 언어의 일반적 문자입니다 카로쉬티어의 ....브라미라고 부릅니다)
역사책 표지(9") 북부파키스탄의 역사서에는 탁본 내용의 일부가 실려있다.
글자들(15") 이 지역을 다스렸던 마지막 왕은 데바스리 찬드라였고,
왕조가 멸망한 것은 바로 소발률 정복으로 고선지가 나포해간 때문이었다/.
데바스리 찬드라는 고선지에 의해 점령당하기전까지 길기트와 훈자를 다스렸다.
훈자 팬 (10") 훈자,
... ... ...
발틱성(16") 힌두쿠시 준령에 둘러싸여 오랫동안 문명이 대포와 병사 닿지않은 오지,
훈자왕궁 이곳은 지금도 형식상 훈자왕이 살고 있다
훈자는 천년 가까이 외부와 차단된 채 그들만의 독특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춤추는 무인들(22") (현장음악)
산 정상 소발률을 정복한 고선지는 아마도 이 훈자를 거쳐 안서도호부로 돌아갔을 것이다
귀환한 고선지는 이제 파미르의 영웅이 됐다
주위주 교수 인터뷰 (현재의 군사전문가들도 이를 매우 어려운 전쟁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그곳은 파미르고원... 그래서 안서도호가 된다)
신당서 신당서에는 소발률의 정복으로 불림,대식등 이슬람 72개국이 당에 항복해왔다고 적고 있다
서안 부감(6") 고선지의 승전보는 곧바로 장안에 전해졌다
부채들고 춤춘다(11") 소발률 정복 소식이 전해지자 장안은 축제 분위기 휩싸였다.
(현장음악)
고선지가 원정에 성공하여 토번을 굴복시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파발률(6") 당시 장안에는 '발률을 쳐부수다'는 제목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유행했다는
갈고록(5") 기록이 갈고록에 전해진다
쿠차성 (20") (음악: 분위기 전환)
그러나 원정을 마치고 쿠차로 돌아온 고선지를 절도사
부몽영찰은 환영하지 않았다
그의 영을 기다리지 않고 소발률 정보의 첩서가 당현종에게 전달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부몽영찰은 고선지에게,
고서(9") '개창자를 먹을 고려 노예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당나라장수 였지만, 그는 여전히 고구려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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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성/고선지(30") 고선지의 전승은 이 안서대도호부의 주인을 바꾸게 했다.
당 현종은 부몽영찰 대신 고선지에게 안서도호부 절도사를 맡겼다.
멸망한 고구려의 유민, 포로의 아들이었던 고선지가 중앙아시아와 파미르, 그리고 광할한 실크로드를 다스리는
지배자가 된 것이다
C.G:안서도호부 지도(9") 고선지가 절도사가 된 이때, 안서도호부의 영토는 파미르를 포괄하는 가장 넒은
서역땅을 차지하게 된다
실크로드(36") ... ... ...
실크로드 역시 고선지가 지배자가 되면서 최전성기를 맞았다.... ... ...
비단을 매개로 한 교역으로 동서가 함께 풍요로움을 누리던 황금기였던 셈이다 ... ... ...
소발률 원정 이후 그는 몇차례 더 서역으로의 대장정을 감행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의 다음 원정은 어디에서 벌어졌을까?
아스타나고분군(14") (긴장된 음악... ...)
중국 투르판에 있는 아스타나 고분군,
취재팀은 이곳에서 고선지 행적에 관한 새로운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토우들(31") 아스타나 고분군에는 과거 안서도호부 시절의 귀족 및 고급관리들의 무덤 400여개가 안치돼 있었
는데, 그 속에서 상당한 부장품이 출토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 ... ...
미이라(12") (... ... 음악)
년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미이라는
얼굴/옷(15") 얼굴이며 머리카락, 심지어 입고 있던 옷까지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
습기가 없고 워낙 건조한 사막지대라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썩지 않고 매장될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할 수
있었다
아스타나/무덤(11") 그렇게 보존이 잘된 이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바로 고선지의 부하 장무가의 무덤이 발견됐다
우루무치tr(8") 어쩌면 고선지 행적에 대한 단서를 무덤의 유물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박물관 안으로(11") 장무가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은 모두 신강성 우루무치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출토문서(10") 장무가의 묘에서 발굴된 유물 가운데 취재팀의 눈길을 끈 것은 두루마리 고문서다.
문서(5") 징무가를 장군에 명한다는 임명서,
문서 팬(13") 문서에는 장무가를 장군에 임명해줄 것을 황제에게 간하는 내용과 그 청을 받아들여 장무가를
유격장군으로 인정한다는 임명서가 함께 적혀있었다
우첸 박사 인터뷰 (장무가는 고선지 밑에서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래서 조정은 그에게 유격장군이라는 장군 직위를 주었다.
이 사람은 죽은후 종이로 된 관을 사용했다. 이 문서도 그 관에서 뜯어낸 것이다)
문서 연대(14") 장무가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연대는 천보10년 즉 751년 2월 12일로 나와 있다
그때 당시는 고선지가 안서도호부의 절도사로 있던 시기다.
전투는 바로 고선지 지휘하에 벌어진 것이다.
국충(4") 당나라 조정의 실권자인 양귀비 오빠 재상 양국충이 수결했고,
유격장군(10") 장무가는 고선지 20세에 얻은 유격장군과 같은 직책을 임명받는다
문서/사람들(15") 추측해보건데, 고선지는 장무가등 부하를 이끌고 751년 2월에 소발률에 버금가는 대원정을
감행했고 전투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원정당시 절도사였던 고선지의 이름은 어디에서 적혀있지 않았다.
봉대부(7") 그 대신 고선지 후임으로 안서도호부의 절도사가 됐던 봉상청 봉대부의 이름이 적혀있다
우첸박사 인터뷰 (봉대부는 고선지에 의해 발탁된 사람이다 나중에 고선지의 직책을 맡게된다.
나중에는 안록산의 난 때 죽음을 당한다...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봉대부(10") 문헌에는 봉상청과 고선지의 인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고서 '봉상청은 너무 왜소해 일그러져 보이고 다리를 절었다.
고선지의 시종이 되겠다고 새벽부터 밤까지 출입문에서 수십일 동안 버티자 고선지는 할 수 없이 시종무관으로
삼았다'
교수와 인터뷰 (부하에 관한 기록외에 고선지에 관한 기록은 찾지 못했나?
... 나중에 발굴될 수도 있다)
문서 20" 장무가가 공을 세운 바로 그 전투, 소발률 원정이후 고선지의 다음 행적으로 기록되는 그 원정은 어디
였을까?
문헌에는 안서도호부가 석국을 평정하고 구국호와 배반한 돌기시 등 적을 격파했다고 적고 있다
C.G:750년 반란지(9") 석국을 비롯한 돌기시등 구국은 지금의 타쉬켄트 일대지역으로
750년 사라센의 영향력이 커지자 당의 지배를 벗어나려했다
후아타오 교수 인터뷰 (고선지가 서국을 정벌한 이유는 주로 당시 석국의 군주가 대식국에 붙으려 했기 때문
이다. 당은 그들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선지는 군대를 이끌고 정벌하게 된 것이다)
천산산맥 항공(18") (음악)
절도사가 되면서 평온했던 시기를 마감하고 고선지는 대군을 이끌고 천산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향했다.
아랍사료 의하면 고선지가 동원한 병력은 10만, 주 공격대상은 석국이었다
타쉬켄트 부감(7") 타쉬켄트,
시가/팻말(7") 돌의 도시라는 뜻의 타쉬켄트는 당시 석국왕이 지배하고 있었다
사원/사람들(15") 동서를 잇는 실크로드의 교차 지점에 위치한 탓에 일찍부터 이곳은 중개무역이 번성했던
곳이다.
거기에다 타쉬켄트는
노점상/여인(10") 당나라와 이슬람 제국이 맞부딪치는 최전선으로, 두 세력 모두, 빼앗길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
이기도 하다.
바블로바 거리(12") ... ... ...
현재 석국의 왕궁터는 타쉬켄트 시가지에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성벽(6")
75년도에 이 왕궁터를 발굴했던 브루야코프 박사가 취재팀을 직접 안내했다
브루야코프 박사 (우리는 지금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서있다 바로 타쉬켄트의 고대 수도에 있는 것이다
.... 성의 탑 부분 흔적이다)
궁전터(16") 당시 석국은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던 석국이 이슬람세력이 급속히 팽창되자 당을 배반하고 아랍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한 것이다.
피디와 교수 (예를 들어서 여기 성벽을 보면 이 부분에 화재 흔적이 있습니다)
교수, 피디이동(12") 고선지는 천산산맥을 넘는 원정을 단행해 751년 1월 이 석국을 정벌한다.
교수 얘기 (여기 보세요... 화재의 흔적이 보이죠... 오랜 세월에 걸쳐 훼손되었습니다)
손으로 만진다(14") 고선지는 석국을 철저히 파괴했다.
왕과 공주는 장안으로 압송했으며, 왕궁은 불태워 그 불길이 한달동안 지속됐다고 한다.
돌보여주며 교수 (이것도 성벽의 일부가 불탄 것이겠죠.... 떨어져 나갔습니다)
뷰르야코프 인터뷰 (바닥이 타 들어갔고 그 이후로 몇 번에 걸친 화재가 있었다.... 대화재의 흔적이다)
불탄재z-o (13") (음악... ...)
석국, 돌기시등 이 일대의 정벌은 바로 이슬람제국과의 대전투를 예고 하는 서막이었다
서안시내 부감(13") 한편 석국정벌의 승전보를 갖고 장안에 온 고선지는 명실상부한 서역의 지배자가 된다.
말조각 당시 두보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고선지 애마에 대한, 시를 남겼다.
'안서도호 푸른 호말, 높은 이름 갑자기 동으로 왔네
전장에서는 당할 자 없었고, 주인과 한마음으로 큰 공을 세웠네'
사마르칸트 가는길(14") 동서양이 만나는 실크로드 지점에 또다른 전략적 요충지, 바로 사마르 칸트가 있다.
시내s.k(7") 사막의 한가운데 푸른도시라 불리는 사마르칸트,
돔/기둥(6") ... ... ....
레기스탄 광장(10") 현재 사마르칸트에는 13세기 티무르제국의 흔적이 남아있다.
... ... ...
문양 금색과 푸른색으로 그려넣은 화려한 이슬람 문양은 보는 이의 넋을 빼앗는다
궁전건물풀샷
돔z-o ... ... ...
아프랍시압 부감(2") 사마르 칸트에서 ㅡ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프라시압 언덕,
언덕을 오른 세사람(4") ... ... ...
유적지/취재진(13") 아프라시압 언덕은 이 지역이 이슬람세력권으로 편입되기전까지,
사마르 칸트의 왕궁이 있던 자리다
유적지 훑는다(5") ... ... ....
벽화 레일샷(22") 왕궁터 안에는 아직도 당시의 벽화가 남아있다.
이 벽화에는 이곳을 다녀간 세계각국 사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사신의 모습도, 희미하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벽화t.s ... ... ... ...
부르야코프 인터뷰 (여기보면 허리띠가 보이고... 이것으로 고구려인으로 추측하는 겁니다)
말탄 고구려인(11") 벽화의 제작연대를 고려해볼 때 고선지가 이 지역을 관할하기 백년전,
이미 고구려인들은 사마르칸트를 다녀갔다
궁전터/태양(19") 기록에 따르면,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총공세를 펼 때, 다급해진 고구려가 동맹군을
찾아 멀고먼 이곳까지 다녀갔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고 그 포로의 아들 고선지는 이곳의 지배자로 우뚝 선 것이다
C.G:이슬람 팽창 8세기 중엽, 세계는 중국의 당나라와 이슬람 제국의 두 강국이 축을 이루고 있었다.
유럽을 장악하고 동진하는 이슬람과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넓혀가던 당은 어차피 세계 패권을 놓고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C.G: 사마르칸트 점령 두 제국간에 긴장이 고조되는 바로 그때,
751년, 이슬람제국은 당 지배하에 있던 이 사마르 칸트를 점령한다
모래먼지 TR(18") 사마르 칸트를 점령한 이슬람 제국은 이곳을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그들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아프라시압(15") 당에 조공을 바치던 강국은 이슬람에 의해 무너지고 왕궁터에는 아랍군대가 주둔했다
발굴(31") ... ... ... ...
이곳 아프라시압 왕궁터는 프랑스의 고고학 조사단에 의해 10년째 발굴작업 진행되고 있다.... ... ...
카레브 유지 (이곳은 고고학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8세게 중반 유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랍의 아부 무슬림군이 1년 6개월동안 머물렀다는 것이다)
유적지(20") 이 아프라시압에 주둔한 아랍군은 호라산 총독 아부 무슬림의 군대였다.
아부 무슬림의 아랍 군대는 이곳에 1년반을 주둔하면서 고선지의 안서도호부를 공격을 준비를 갖추었다.
카레브유지 박사 (당시 이곳 살마르 칸트는 이슬람의 전초기지였던 셈이다
아랍은 이곳을 점령한 후 .... 그들은 중국 원정을 계획했다)
해지는 궁궐터 (12") (음악)
궁전부감/하늘(20") 동진을 계획하고 있던 아부 무슬림 군대에 때마침 멸망한 석국의 왕자, 나구차비시가
도움을 청하러 왔다.
아부 무슬림은 이것를 계기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인근 소국들과 연합군을 형성한다
천산산맥 항공(7") 한편, 고선지는 7만의 군사를 이끌고 사마르 칸트를 정벌하기 위해 다시 천산산맥을 넘었다
차 tr(8") 이슬람 총독 아부 무슬림은 이븐 살리히장군에게 30만의 대군을 주어 고선지 군대를 맞게 했다
C.G:탈라스(9") 그 두제국의 군대가 서로 맞부딪친 격전지는 타쉬켄트의 서북쪽 바로 탈라스다.
탈라스(13") 탈라스 평원,
751년 7월 세계 최초로 동서양 대전은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다
국경가는길(10") 탈라스는 현재 카자흐스탄과 키르키즈스탄 두개의 국가에 걸쳐 대평원을 이루고 있다
아틀라성(12") 고선지 군대와 이슬람 군대가 전투를 벌인 곳은 탈라스 평원 가운데서도 바로 이 아틀라시다.
바이보쉬노프 (여기는 망루죠 이 망루에서 주변을 지킨 것이다
...751년 이곳 아틀라에서 아랍과 중국이 마주쳤다)
탈라스 평원(13") 7만을 이끌었던 고선지와 30만명의 연합군을 대동한 살리히,
이 동서양 두장군의 대격돌은 폭염이 내리쬐는 탈라스 평원에서 5일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아틀라/하늘(12") 사태는 고선지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됐다.
고선지군에 연합했던 카를룩이 당을 배신하고 이슬람군에 가담해 고선지 군을 협공한 것이다
자치통감 (18") 자치통감에는 탈라스 전투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갈라록부족이 반란을 일으켜 이슬람군과 함께 협공했다 고선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했다'
갈대 (11") 고선지군의 대패에 원인이 됐던 카를룩족은 처음부터 이슬람군대 협공을 계획하고 당군에 합세
했다고 전한다
라흐마노프 ` (카를루크 에게는 토지가 필요했다... 이들은 이 전투에 흥미가 없었다 그들은 연맹으로 남기를
원했고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여기에 고선지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아랍책 표지(3") (음악)
1230년도에 만들어진 아랍사서에는 이븐 살리히(12") 탈라스 전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대군을 크게 격파한 아랍장군은 지하드 이븐 살리히다.
전적(11") 751년 7월 동방총독 아부 무슬림이 지하드 이븐 살리히 장군을 파견해 탈라스에서 중국군 5만을
죽이고 2만을 포로로 삼았다.
탈라스 강(25") ... ... ... ...
당시 이 탈라스 강은 고선지 군사들의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 ...
전몰하고 살아남은 고선지 병사는 고작 수천명 뿐, 고선지는 평생 처음, 패전의 쓰라림을 맛보야했다
후아타오교수 (매우 중요한 전쟁이다. 학자들은 이 전쟁이 이슬람 문화가 동쪽으로 전파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현재... 탈라스 전쟁이후 아랍세력 그리고 무슬림이 동쪽으로 진출해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새한마리(3") (음악)
공동묘지(9") 탈라스 평원 아틀라, 이곳은 고선지군이 대패하고 물러나면서 이슬람 지배하에 들어간다
인터뷰 (이게 언제때 겁니까?.... 아랍무늬)
토기/일행(19") ... ... ....
이 아틀라에서는 지금도 8-9세기의 유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문양이나 무늬 모습으로 봐서 대부분 이슬람 문화의 흔적들이다.
초원 말떼(16") (음악)
중앙아시아의 운명이 결정지워진 탈라스 전투, 그 패배로 이 지역에서의 당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된다
그 대신 아랍군이 주둔하면서 실크로드는 상당부분 이슬람제국의 지배를 받게된다
사막의 노을(19") 그러나 탈라스 전투의 영향은 전혀 다른 곳에서 나타나 세계의 문명사에 큰 변화를 몰고 온다.
차tr(8") 바로 중국의 제지술이 서방으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제지공장 찾아감(16") 제지술이 처음 전파된 사마르 칸트, 이곳이 사마르 칸트에서 가장 오래된 제지공장이다
중국의 제지술은 실로 우연하게 전파된다
물방아(9") 탈라스에서 포로가 된 수많은 고선지 병사중, 제지기술자가 포함돼 있었고, 이들이 사마르칸트로
끌려와 종이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울루그베크일리야 (이곳은 종이원료를 찧기 위한 곳이다... 갖가지 종이 재료를 모아 반복해서 찧는다...
중국 포로들이 우리에게 종이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이것이 19세기까지 계속된다)
물레방아 (3") (음악)
집안(4") 불과 얼마전까지도 이 공장에서는 나무껍질을 빻아 종이를 만들었다.
물방아(8") ... ... ...
종이발(10") 사마르 칸트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종이를 생산하는 공장이 있다.
종이떼어내 창에(11") 오랫동안 물에 불린 나무껍질을 기계로 압축시켜 햇볕에 두고 말리면 '사마르 칸디'라는
서역 한지가 만들어진다.
종이(10") '사마르 칸디'지, 이 종이가 바로 세계 문명사를 바꾸게 된 것이다
정수일 (사마르 카트에서 그러니까... 거기로 넘어갑니다)
C.G:제지술 전파 탈라스 전투로 알려지기 시작한 제지술은 실크로드를 따라 사마르칸트와 바그다드를 거쳐
다마스커스로 전파된다.
그리고 12세기초에는 유럽에까지 전해져 서양의 학문을 일으키는 밑거름이 된다
서가의 고서(15") 고선지의 실패한 원정이 도리어 동서 문화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것이다.
장안/탑(21") (음악: 분위기 전환 비장한 음악)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 고선지는 안서도호부의 절도사를 부하 봉상청에게 내주고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온다.
패장이지만 당현종은 그 간의 공을 인정해 그에게 우우림대장군이라는 관직과 함께 저택을 하사했다
하늘 이때의 고선지 심정을, 두보는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 만리라 한혈마를 이제 보았네,
번개보다 더 빠른 걸 세상이 아는데
청사로 갈기 딴채 늙고 있으니
언제나 서역길을 다시 달릴까'
화청지부감/지붕(7") (몰락을 상징하는 음악)
연화탕(17") 고선지가 장안에 돌아와 은거하고 있을 무렵, 당 현종은 양귀비와 사랑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조정은 내분에 휩싸여 어지러웠다.
황토 물살 (17") 고선지가 장안에 머문지 4년째 되던해, 동북절도사인 안록산은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동관으로TR(20") 고선지는 부원수가 되어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책임자로 다시 임용된다.... ...
현종의 배웅을 받으며, 10만명의 천무군을 이끌고 고선지는 전장으로 향했다.
동관부감 (22") 천연의 요새로 알려진 동관, 고선지는 이미 선발군으로 나가 패전하고 돌아온 봉상청에게
상황을 보고받고, 이 동관을 결전지로 정한다
그는 적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동관에서 진을 치고 안록산을 기다렸다.
성벽(12") 그러나 당 조정에는 고선지가 작전상 동관으로 후퇴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관/성벽(6")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퇴수한 것으로 여겨 그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마치교수 (봉상청의 상황을 보아 고선지는 동관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판단이 옳은 것이다)
훈련터 (21") 또한 고선지는 동관으로 진영을 옮기면서, 적의 수중에 황실창고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위해
창고문을 열고 병사들에게 돈과 비단을 나누어 줬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됐다.
고선지는 황제창고를 탐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형을 맞게된 것이다
구당서 (52") 죽음을 맞는 고선지의 모습은 사서에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군사들은 누명입니다 라고 외쳤다.
그 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고선지는 함께 참형을 당한 봉상청의 시신을 보면서 말했다
공은 내가 선발했고, 나와 절도사를 교대했다
지금 함께 죽으니 이도 모두 운명이로다'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훈련터 스틸(6") 그때가 755년 12월의 일이다
중국인명사전(4") 중국인명대사전에는
무함살해(12") 그의 죽음에 대해 '모함살해' 라고 적고 있다.
누명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었음을 중국 역사가 인정한 것이다
대명궁 분향탑(18") (음악)
고선지의 죽음과 함께 동관은 함락되고, 당나라도 서서히 그 몰락의 길을 걷는다
비단무늬 (음악)
황토물살 (5") 고선지가 지배하던 서역땅을 중국이 다시 차지한 것은
차tr(12") 천년이 지나 18세기가 되어서 였다
그나마 그가 대원정을 감행해 굴복시켰던
산 정상(9") 파미르 고원일대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였다
돔사원(4") (음악)
벽화(4") 실크로드는 고선지가 지배했을때
대평원(3") 가장 번성했고, 그가 떠나면서 쇠퇴를 거듭했다
아랍책(5") 고선지의 원정결과로 서방으로 전해진 종이는 그후
고서가(7") 유럽 르네상스의 기폭제가 되고,
사마르 칸트지(7") 서양문물은 빠르게 발달해 갔다
어둠속의 낙타(6") 세계 문명사에 가장 커다란 흔적을 남긴 고선지,
분향탑(3") 그는 고구려인이었다.
고선지c.g(4") 이제 우리 역사가 그를 다시 기억해야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