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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느리게 나뭇잎 모양이나 살피며 / 이우길 시인
낙동강과 남천강
나는 경남 창녕군 부곡면 부곡리 156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징용을 가셨고 6남매 부양을 책임진 어머니께선 하루하루 가시밭길을 걸으실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되자 우리 가족들은 비로소 함께 모여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나와 동생은 해방 이듬해부터 세 살 터울로 태어나서 우리 형제자매는 8남매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농사일에 서투른 아버지는 가산을 일으키는 데 조금도 도움을 주시지 못했고, 어머니는 힘든 하루를 열어 가면서 우리를 교육시키셨다. 그 고통 극복의 방법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늘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외우시곤 했다. 불경이나 가사 혹은 고시조를 외우고 나면 불안한 가슴이 진정되시는 것 같았다. 내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고시조는 물론이고 형님들 국어책의 고시조까지 계속 커다란 붓글씨로 써 드리면 기특하게 생각하고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어머니의 고향은 경남 함안군 칠북면이었다. 외가에 갈 때마다 낙동강을 건너갔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있지만, 그땐 나룻배를 타고 갔다. 중학교 땐 그 강가에 있는 학교에 진학해서 소풍 땐 늘 모래사장에서 씨름을 하거나 강이라는 제목의 글짓기를 하곤 했다.
우리 중학교 운동장에 토요일마다 찾아오는 헌 책 장사가 있었다. 그분은 우리가 1교시를 마칠 즈음 운동장에다 자기가 가져온 책들을 펼쳐놓았다. 그때 보았던 책 이름으로 《현대시 감상》(김춘수), 《보리피리》(한하운), 《소월시집》(김소월), 《사슴》(노천명) 등이 있었다. 찹쌀떡을 사 먹을 수 있는 용돈을 가지고 있던 나는 몇 번을 고민하다가 《현대시 감상》과 《소월시집》을 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책을 수십 번 읽으면서 글을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끔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는 밀양에 있는 세종고등학교에 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 살 위의 형님이 다닌 학교였을 뿐 아니라 형님이 두고 온 책, 책상, 자취방 등을 그대로 쓰면 경비가 적게 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형님이 얘기할 때마다 밀양은 참 아름답고 학교는 자유롭다는 점을 워낙 많이 강조해서 나는 세뇌되어 있었다.
농업중심도시 밀양은 형님의 얘기대로 풍요롭고 밀양문화제는 그 당시 지역의 드문 예술제였고 학교는 자유로웠다. 특히 윤덕만 국어 선생님은 문학에 눈을 뜨게 하고 모국어의 중요성을 자각게 해 주셨다. 백송, 영남루, 표충사, 위양못 등 근처의 문화유적이나 삼문동의 둑, 진늪의 소나무 등의 자연경관은 잘 그려진 산수화 같았고 주위 여건 때문에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내던 나에게 미래에 대한 수많은 꿈을 꿀 기회를 주었다. 밀양이 내게 문학에 대한 자극을 가장 크게 준 행사는 백일장이었다. 그 당시 밀양문화제 백일장 심사위원으로 서정주, 박목월, 박남수, 조지훈, 이영도 등 명사들이 초대되었으니 그분들의 심사평은 고등학생인 우리에겐 어떤 신의 계시같이 들렸다. 그런 영향으로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전집 혹은 한국문학상 수상전집 등을 읽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밀양에 자주 간다. 진늪숲은 태풍으로 훼손되었지만 위양못은 여전히 아기자기하고 영남루에서 바라보는 남천강은 한 폭의 그림이다. 그래서 내 서정의 바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남지, 길곡, 부곡으로 느리게 흐르던 낙동강과 초록색으로 유난히 반짝이던 남천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강뿐만 아니라 그 강이 거느리고 있는 아름다운 추억들이 나에게 글을 쓰게 했고 지금도 내 글은 그런 풍경에 대한 사랑과 대상 없이 그리워하고 꿈꾸던 청소년기의 갈망을 원천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 경북대
1967년 경북사대에 갔다. 1학년 때는 이미 육군 입영 영장이 나와 있어서 신입생으로 어영부영하다가 입대했다. 창원, 원주, 괴산, 수색, 서산 등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70년 제대를 하고 복학했다. 군대생활을 할 때나 복학한 뒤에나 나는 글을 쓰지 않으리라 수없이 다짐했다. 현실적으로 무력하고 가족들에게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막연히 고시를 준비하려고 여러 책을 구입해서 읽으며 미래를 설계해 보곤 했다. 늘 도서관에서 관련 책들을 읽으며 나날을 보냈지만 쓸쓸하고 무언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하숙집 친구인 농과대 복학생이 수필을 한 편 들고 내 방에 와서 읽어주며 삶은 무언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멋있게 즐기는 것이라고 떠들다 갔다. 그 얘기가 내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공부이기 때문이었다.
《고시계》를 사오며 시조 계간지 《현대시조》를 사둔 적이 있어서 머리를 식힐 겸 그 책을 꺼내어 읽고 시조 2편을 썼다. 〈코고무신〉 〈엽서〉였다. 학보사 투고함에 넣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같은 과 후배들이 신문을 들고 와서 내 작품이 실려 있다고 야단이었다. 글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신기해 보였을 것이다. 실린 것도 내게 자극이 되었지만, 하계 방학 때 실린 “상반기 문예찬을 평한다”를 읽고 나는 정말 놀랐다. 그 글을 집필하신 김춘수 선생께서는 칭찬을 잘 하시지 않는 성품이셨다. 그런데 “이런 시인이 있다는 것은 복현문단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라고 평해 놓은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운명적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동순, 손병현 등과 《선실(船室)》이란 동인지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고 이하석, 서종택, 박정남 등과 만나서 문학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래도 글 쓰는 일이 쉽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가족들에겐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방향 같아서 자주 회의에 빠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종택이 찾아와서 시화전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너라면 기존 시조시단을 충분히 놀라게 해줄 것이다” 하고 부추기는 바람에 동성로 ‘전원다실’에서 결국 시화전을 하게 되었다. 다방은 바쁜 사람들의 만남 장소다. 일주일 동안 다시는 이 짓을 하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맹세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김춘수, 권기호 선생께서 들르시어 격려를 해주셔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시화전 이후 권 선생께서 김춘수 선생 연구실로 오라고 하셔서 작품 5편을 들고 갔다. 권 선생께서 김춘수 선생께 “이 군은 이제 시단에 나가도 좋을 듯합니다”라고 말씀해 주셨고 나는 묵묵히 서 있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그 작품 그대로 《월간문학》에 투고해서 당선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김춘수 선생께 말씀드렸더니 사실은 당신께서 시조를 추천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고 말씀하셨다.
《월간문학》 당선으로 부풀어 있던 나에게 심사위원이었던 이영도 선생의 편지가 왔다. 내용인즉 ‘《현대시학》으로 등단하라’는 요지의 사연이었다. 1972년 가을의 일이다. 그래서 《월간문학》은 취소하고 1973년 《현대시학》 2월호, 4월호, 10월호 3회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다. 학보를 통해 김춘수, 권기호 선생의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만촌동 김춘수 선생 댁을 빈손으로 빈번히 들락거렸다. 얼마나 귀찮으셨을까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진다.
3회 추천 기간 동안 이영도 선생의 시조 쓰기 훈련을 철저히 받았다. 선생께서 내게 주신 가르침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승화와 절약이었다. 시상이 푹 익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이 강하다고 시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니 생경한 시는 더 승화될 때까지 고쳐보라는 것, 그리고 정형시는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소재나 주제에 따라 의도적으로 생경한 시어를 써야 할 때도 있겠지만 정답은 승화의 차원에 도달해야 좋은 시가 된다. 그리고 같은 단어, 비슷한 발음까지 깊이 생각해서 잘 활용해야 한다. 말을 아껴야 한다. 선생의 정형시에 대한 간략한 이 가르침은 지금까지 내 가슴에 모셔져 있는 불문율이다.
그 당시 대구는 계명대에 신동집 교수, 영남대에 박철희 교수가 계셔서 문학지망생에겐 시의 도시처럼 느껴졌다. 추천완료를 하자 서종택은 나를 칠성시장으로 데려가서 포장마차를 순례하면서 술을 사 주었다. 그때 이하석, 이동순, 손병현, 박정남, 이현우 등 데뷔를 했거나 순서를 밟고 있는 시인들이 있어서 경북대는 아마 문학의 르네상스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혼자 시조를 쓰고 있었다.
이영도 선생께서 어머니 목욕시켜드린다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대구 친정에 오셨다. 그때 만난 문우들이 권도중, 민병도였다. 권도중은 수성관광호텔에 근무했고 민병도는 영남대 학생이었다. 내가 결혼할 때 선물로 이영도 선생은 난초, 민병도 시인은 모란을 그려주었다. 지금도 보물처럼 나는 그 그림을 모시고 산다.
《현대시학》 《현대율》
1973년 등단 이후 자주 서울에 갔다. 목조계단 소리가 유난히 삐걱거리는 《현대시학》 사무실 혹은 ‘커피 하우스’에 가서 전봉건 선생을 뵙고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박시교, 유재영이나 윤금초 선배를 만나는 것이 서울 1박 2일의 일정이었다. 《현대시학》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산문도 많이 썼다.
이영도 선생께서 문하생들에게 동인지를 하나 하면 어떻겠냐고 하셔서 《현대율》이란 동인지를 내기도 했다. 이 동인지엔 박시교, 김남환, 임종찬, 전연욱, 정표년, 김영재 등이 참여했다. 박옥금 씨 사무실에서 출판기념회도 한 기억이 난다. 박시교 시인은 이영도 선생이 낸 첫 제자라 항상 맏형 노릇을 했다. 과묵하고 책임감이 강해서 특히 시골에서 온 내게 숙소를 정해주기 위해 불편함을 무릅쓰고 여러 골목, 여러 계단을 다녔다. 또 윤금초 선배는 〈주간조선〉 편집부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발표 지면도 안내해주고 주연도 베풀고 하면서 선배의 따사로움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내가 가장 가깝게 느꼈던 문우는 유재영이었다. 모던한 그의 시나 시조가 매력적이고 농담이 잘 통해서 그렇게 된 것 같고, 서벌 등 몇몇 선배들이 라이벌 의식을 갖게끔 만들어서 오히려 가까워진 게 아닌가 생각된다.
더구나 제2회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을 공동 수상하면서 우리는 무슨 같은 운명을 타고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는 대상 없이 신인상을 두 사람에게 주었으니 중앙시조대상 시상 이래 오직 한 번 있었던 일이었다. 이근배 선생이 《한국문학》을 한 뒤로는 그곳 지면도 많이 얻어서 월평도 쓰고 기획 산문도 쓰고 작품도 발표하곤 했다. 《한국문학》 편집에 한분순 시인이 있어서 더 정겹기도 했다. 한 시인은 《소설문학》 《한국문학》 《퀸》 등 여러 잡지를 전전하면서 동료나 후배 시인들에게 발표지면 확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시법(詩法)》이란 동인지가 시인이 대부분인 동인지였지만, 홍일점의 한분순 시인이 있어서 일찍부터 나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구태의연하지 않은 그의 발랄하고 자유로운 시조들이 좋아 보였다.
《네 사람의 얼굴》 《네 사람의 노래》
1983년이었다. 윤금초 선배와 박시교, 유재영 그리고 나 이렇게 시조단에서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고 시조 지평 확장에 열심이었던 멤버들이 모여서 사화집을 내자고 했다. 그렇다면 우선 우리 시집이 주목받을 만한 출판사를 골라야 하는데 ‘문학과 지성’이나 ‘창작과 비평’이 좋겠다고 했지만 불투명했다. 그래도 일단 모색해보자고 했고 그 일을 윤금초 선배가 해냈다. 제1집인 《네 사람의 얼굴》은 윤금초 16편, 박시교 12편, 이우걸 15편, 유재영 16편을 묶었고 오규원 시인이 해설을 썼다. 그 뒤 1995년에 작품을 조금씩 바꾼 재판을 냈다. 이때 해설은 조남현 교수가 맡았다. 시조의 분위기는 이 사화집 발행 후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문학과 지성’ 시인선 33번의 위력은 대단했다. 시조를 쓰고자 하는 젊은 시인 지망생에겐 제일 좋은 교과서 역할을 했다고들 한다.
네 사람의 우의도 돈독해져 갔고 그런 우의가 바탕이 되어 ‘오늘의시조시인회의’라는 반란 아닌 반란의 배가 출항하게 된 것이다. 시조에 대한 나름의 소신과 굳건한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제 시조시인 수가 문제가 아니라 범시단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엘리트 시인을 50명 이내로, 연령으로는 윤금초 선배 나이 이하로 정했다. 그 시조 정풍운동은 지금에 와서 모습이 많이 달라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아무튼 《네 사람의 얼굴》 이후 29년 만에 다시 ‘문학과 지성’에서 우리 네 사람의 작품 각 25편 도합 100편을 묶어 《네 사람의 노래》란 사화집을 펴내게 되었다. 이 책도 매스컴의 각별한 주목을 받았다. 〈중앙일보〉 〈경향신문〉 〈부산일보〉 〈경남신문〉 〈국제신문〉 등의 전향적인 지면 할애도 그랬고 각지의 독자들로부터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나는 현대성을 가진 개성 있는 시조와 독자와의 만남의 장을 만들기 위해 1980년에 이미 ‘청하’라는 비교적 전위적인 출판사에서 이일향 시인의 도움을 얻어 《현대시조 28인선》을 낸 바 있었다. 그 후에는 동학사 편으로 윤금초 선배와 같이 《다섯 빛깔의 언어풍경》이란 사화집을 묶어서 유능한 후배들의 작품을 정리해 낸 적도 있다. 결국 시조가 오늘날의 시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문학 외적 영향력이 아닌 엘리트 시인이 필요하고 그들의 작품을 시인과 독자들에 객관적으로 읽히게 하고 싶었다. 그런 노력이 후배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
마산문학, 《마포》경남시조
내가 마산에 온 것은 1982년이었다. 1975년 경남으로 왔고 1976년부터 5년간 남해에 살았다. 첫 시집 《지금은 누군가 와서》를 남해에서 내고 출판기념회를 했다. 박재두, 김상훈, 임종찬, 서종택 시인 등이 원지에서 축하의 마음으로 자리를 빛내주셨다. 남해에 있을 때 전기수, 문신수 선생과 진주의 박재두 선배를 가끔 만났다. 박재두 선배의 시조는 서정성이 바탕을 이루면서 시대를 잘 반영한 것이어서 작품이 발표되면 따로 오려서 외우기도 했다. 그래서 진주에 살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서 마산에 오게 된 것이었다. 막연하게 진주는 전통을 중시하는 문향이고 마산은 소란한 산업도시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막상 마산에 와서 느낀 것은 만만치 않은 문학적 전통을 가진 멋진 예술의 도시라는 것이다. 김춘수, 김상옥, 김수돈, 이원섭, 김남조, 문덕수 등 한국 문단의 별과 같은 위치를 가진 시인들이 마산에서 활동했고, 특히 시조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노산 이은상 선생의 고향이 바로 마산이었다.
나는 이광석, 신상철, 정목일, 서인숙, 오하룡 사백 등과 만나 마산문학, 마산문단을 익히고 ‘시와 독자의 만남’ 행사를 함께 추진하고 뒤에 마산문협회장도 했지만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마산시조문학회를 만들고 동인지 《마포(馬浦)》를 발간한 것이다. 1981년 3월 직장을 따라 마산에 와서 제일 먼저 살펴본 것이 시조시인들의 활동이었다. 앞서 얘기한대로 마산은 우리 시조의 큰 산맥인 노산 이은상 선생의 고향인 만큼 치열한 시인들의 시조창작 운동이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기대와는 다르게 아무런 활동도 조직도 없었다. 그래서 마산교육청에 계시는 김교한 선생을 찾아뵙고 마산시조문학회 조직과 동인지 발간에 대해 의논을 드렸다.
김교한 선생은 1966년 《시조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일 뿐 아니라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전국적 명성을 얻었던 동인지 《율(律)》의 멤버였고 노산 선생 생전에 사제의 연이 있는 유일한 분이기도 했다. 내 얘기를 듣고 선생께선 김교한, 김복근, 김외규, 박평주, 배옥회, 서일옥, 양계향, 이금갑, 정시운, 홍진기, 정영희, 추성희 등의 이름을 써 주셨다. 김교한, 박평주, 정시운, 이금갑, 홍진기 시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른 분들은 모르겠다고 했더니 교원 예능경진대회 수상자로 재능이 증명되었다고 하셨다. 그 당시 김복근 시인은 《시조문학》 추천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렵게 마산의 옛 이름인 마포(馬浦)를 동인지 이름으로 하여 창간호를 도서출판 나라에서 냈다. 창립회원은 나를 포함해서 13명이었다.
1987년 경남권 전역의 시조시인들이 문호개방을 요구해 와서 마산시조문학회를 경남시조문학회로 바꾸고 내가 회장을 맡았다. 이후 9년 동안 경남시조문학회를 이끌면서 문학회는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노력을 하며 문학적 내실을 기하였다. 서일옥, 하순희 등이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강호인은 남명문학상 신인상을 받았고, 경남시조세미나, 강연회, 백일장을 열어 시조창작 열기를 불어넣었다.
나는 《빈배에 앉아》 《저녁이미지》 등의 시조집을 냈고 《현대시조의 쟁점》 《우수의 지평》이라는 시조비평집을 내었으며 《현대시조 28인선》이라는 명시조선집을 펴내기도 했다. 또 중앙시조대상 신인상과 마산시문화상을 받았다. 《현대시학》 《현대문학》 《현대시조》 《시문학》 등 여러 지면의 시조 월평을 쓰기도 했다. 밤늦게까지 릴케, 엘뤼아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와 일본 하이쿠 시집, 당송시집을 읽으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빚기 위해 몸부림쳤고 김춘수, 김종길, 조지훈, 김윤식, 박철희, 김현 등의 시론집을 읽으며 나의 시적 안목을 키우고 시조가 가야 할 방향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어떻게 보면 질풍노도의 시기였고 또 그것이 문학적 성숙의 한 과정이기도 했다. 전봉건 선생의 권유로 시작한 시조 월평 집필은 내게 시로서의 시조를 창작하고 발견하게 하는 한 분기점 같아서 늘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수없는 회의 속에서도 시조 오로지 이 한길로 올 수 있었던 것은 늘 이근배, 김제현, 이상범, 서벌, 윤금초 등 선배님들의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박시교, 유재영 시인의 우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유재영은 많은 지면을 열어주고 많은 정보를 주었다.
경남문인협회와 경남문학관
2003년은 내 생애에 중요한 여러 일이 있었다. 경남문인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고등학교 교장으로 승진했으며 제40회 한국문학상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이 되었고 문예지 《서정과 현실》을 창간했다. 경남문인협회 회장은 재선이 되어 4년간 재임했다. 내가 회장이 된 후 특별히 한 것은 시예술제를 만든 것,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시집과 낭송 테이프를 만든 것, 그리고 찾아가는 문학기행 행사를 개최한 것이다.
시예술제는 장소도 바꿔가며 했을 뿐 아니라 그 해에 따로 시의 주제를 정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판하여 “고구려를 노래하자”고 외치며 고구려에 관한 시를 모아 시집을 만들었다. 그 시를 가지고 시화전을 했는데 이듬해 우리나라 전 매스컴이 동북공정 문제로 들끓었다. 이듬해엔 “독도를 지키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독도에 관한 시를 모아 시집을 만들었다. 전문 학자를 강사로 초빙해서 강의를 들었고 역시 시화전을 했다. 독도 문제도 우리가 행사를 한 이듬해 터졌다. 전 매스컴이 일본의 만행에 분노했다. 뒤늦게 우리가 낸 《독도》 시집이 〈경남신문〉 1면에 실리고 우리의 시 몇 편이 독도 현지에서 어느 문학단체에서 연 시화전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다음 해엔 김해에서 “가야를 노래하자”라는 구호로 경남의 옛 역사 회고와 낙동강 정서를 시로 더듬었다.
점자시집 간행은 어두운 곳에 있는 약자를 돕고 싶은 생각에 실천한 것이었다. 문협 단체의 재정이 대체로 국가나 지방정부 혹은 지역 기업의 협조로 이루어지는데 행사는 천편일률적이었다. 그래서 점자시집을 생각해낸 것이다. 마침 부산 점자도서관장님의 적극적인 협조로 추진이 잘 되었다.
찾아가는 문학기행 행사는 문학축제 자체를 합천, 함양, 거제, 고성 등 비교적 문화의 햇살을 덜 받는 곳에서 해보자는 취지였고 그러한 취지에 공감한 지자체와 지역 문협의 협조로 흥미진진하게 이루어졌다. 1박을 하는 행사라서 진정으로 문인들 간에 깊은 우정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는 2009년 밀양교육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라는 시조집을 냈다. 그런데 이 시조집의 출판기념회는 사실상 내 공직의 퇴임식이었는데 이윤택 시인의 후의로 밀양 연극촌에서 열었다. 랩으로 하는 낭송, 연극배우들의 낭송, 이근배 시인, 장경렬 교수 등의 축사와 강의, 사회자 이달균 시인의 재치 있는 여닫음이 커튼이 내려온 뒤에도 앵콜 소리가 끊이지 않는 재미있는 출판기념회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2010년에 나는 경남문학관 관장으로 부임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도서 정리와 시인에게 부여된 각 도서함의 시건장치 확보였다. 그다음 우수 강사를 초빙해서 예산 범위 안에서 좋은 강연회를 열고 싶었다. 이승훈, 이건청 교수, 정미경 소설가, 송찬호 시인 등의 문학 얘기를 들었다. 2010년 나는 처음으로 《질문의 품위》란 산문집을 냈는데, 특히 〈부산일보〉의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2011년 김상옥문학상을 받았고 별 개혁도 하지 못한 채 예산 부족에 허덕이는 경남문학 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서정과 현실》
2003년 가을 나는 반연간지 《서정과 현실》을 펴냈다.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으려다 공무원 신분임을 감안해서 아내에게 발행인을 맡기고 나는 편집인이 됐다. 자유시인 중에서 주간을 맡기는 게 좋을 듯해서 늘 나를 따르던 향토의 중견시인이기도 한 성선경을 앉히고 편집간사로는 제자 손영희가 수고했다. 겉으로는 업무가 분리된 듯하지만 자금 확보부터 필진 확정까지 내가 해야 이 잡지가 장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평론가의 도움 없이는 좋은 잡지를 만들 수 없다는 생각도 처음부터 했다. 그래서 장경렬, 구모룡, 유성호 교수 등의 자문을 받으며 출발했다.
내가 잡지를 시작한 이유는 좋은 시조작품이 좋은 자유시와 함께 실리는 인정받는 문예지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능력 있는 신인도 뽑고 싶었고 그래서 한 10년쯤 하면 누군가가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자 그룹 중 가장 오래 나를 도와온 ‘석필’이나 경향 각지의 지원자들 때문에 이 잡지는 지명도가 있는 문예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향토의 기업이나 능력 있는 자본가가 선뜻 기쁜 소식을 전해주지는 않고 있다. 그래도 원고청탁에 응해주는 좋은 시인, 좋은 비평가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긍지로 여기고 있다.
2014년 하반기호를 지금 펼쳐보니 ‘권두시론’에 김인환 교수, ‘시와 시론’에 김명인, 조창환, 민병도, 이윤택, 박기섭, 이상호, 최문자, 김연동, 서일옥, 서숙희, 박서영, 김영탁, 조은길, 하재연, 이교상 시인이 참여하고 있고 ‘중요시인 자세히 읽기’란에는 강은교 시인, ‘평론’에 신상조 비평가 ‘소시집’엔 박권숙, 유승영 시인의 작품을 싣고 있다. 그리고 ‘1980년대산(産) 시인들의 상상 좌표’라는 제하의 엄경희 교수의 평론과 ‘한국시조문학 통사’라는 제하의 장성진 교수의 평론이 연재를 시작했다. 젊은 시인들의 시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쓴 엄 교수의 평론이 의식 있는 시인들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본다. 그리고 고시조로부터 현대시조까지 한 전문학자의 시각으로 엮이게 될 통사의 완성은 그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서정과 현실》은 한국 서정시 운동의 한 핵으로 시조의 중요성을 자각게 하고 영남 지역 시단의 공기로서 임무도 가지면서 변함없는 진군을 계속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의시조시인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2006년 겨울 나는 ‘오늘의시조시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원들과 몇 가지 의논을 했다. 첫째 회의 이름이 ‘학회’로 되어 있어서 이상하니 다른 이름으로 고치자는 것, 둘째는 문학단체가 회지를 안 내는 것은 이상하니 회지를 내자는 것, 셋째는 우리 회원들이 가장 시조를 잘 쓰는 사람들이지만 젊은 시인들에게는 자극을 줄만한 상이 거의 없으니 우리 회에서 하나 만들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미나는 지역별로 바꿔가면서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의 명칭은 ‘오늘의시조시인회의’가 되었고 그 명칭에 따라 《오늘의 시조》라는 회지를 만들었고, 젊은 시조시인 즉 데뷔 10년 이하의 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오늘의 시조시인상’이란 작품 중심의 문학상을 만들었다. 세미나도 부곡온천, 우포늪, 광주 히딩크 호텔 등으로 옮겨가며 비로소 전국 단체다운 행사를 할 수 있었다. 2008년 재선으로 4년간 4권의 회지와 4번의 세미나, 문학상 시상 등 의장으로서 임무를 마쳤다. 창간호 발간을 무료로 해준 이지엽 시인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을 맡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1년 전 어느 집행부 인사가 이사장을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의사를 타진해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간단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우선 나 스스로 그 단체에 헌신하지 못했고 구성원 자체도 일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임원 개선일이 가까워 오자 권고는 독촉으로 바뀌고 나도 조금씩 생각이 달라져 갔다. 먼저 지역의 어른이신 김교한 선생님께 문의드렸더니 적기이고 해야 한다고 하셨고 유재영, 민병도, 이지엽 등 가까운 문인들과 의논해 보아도 하는 것이 맞다고 자꾸 권고를 해서 결정을 했다.
선거 기간 내내 많은 회원들과 전화로 소통하고 러닝메이트였던 전일희, 노창수, 이주남, 이정환, 권갑하 시인들도 자신의 지역에서 고군분투했다. 2012년 2월 19일 선거가 있는 총회날이었다. 조계사 불교역사박물관 강당에는 회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상대 후보인 원용우(문) 시인 진영도 사생결단이었다. 총 투표권자 726명 중에서 544명이 참가하여 필자 294표, 원용우 241표로 53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치열한 만큼 후유증이 있을 만했지만 임기 내내 비교적 화합된 분위기였다. 회지를 연 2회의 정기간행물로 등록하였고 회지명은 《시조미학》으로 했다. 그리고 시조평론의 활성화를 위해 ‘인산시조평론상’을 만들었다. 김윤숭 시인의 협찬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서강대 박철희 교수, 서울대 장경렬 교수, 숭실대 엄경희 교수 등 유능한 평론가들을 수상자로 모실 수 있었다. 그리고 세미나는 시조의 날 외에도 신춘연찬회를 만들어서 1년에 2차례 했다.
오래 기억할 만한 행사로 서운암 연찬회와 제주 세미나, 청도 연찬회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양산 통도사 서운암 행사의 경우 성파 스님의 배려로 숙식은 물론이고 세미나 경비까지 지원받아서 했다. 성파 큰스님은 성파시조문학상을 만들어서 부산, 울산, 경남 시인들에게 주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 한시인요, 옻칠 전문가요, 화가이다. 다른 특별한 행사로는 시집 한 권을 뽑아 ‘올해의 작품집상’을 시상한 것과 이태극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 초정 타계 10주년 세미나를 한 것이 떠오른다. 그리고 한국시조시인협회 50주년을 맞아 여러 고문님의 권고도 있고 해서 《한국시조시인협회 50년사》를 발간했다. 이 일은 이승현 시인의 노고에 의해 유종의 미를 거둔 내 임기 최대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자료는 사라져 가고, 증언해 줄 전 회장님들도 연만하여 역사 없는 단체로 남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나마 좋은 자료와 사진도 담은 우리 회의 역사책을 마지막으로 발간해서 회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나는 퇴임했다.
나의 저서들
경력 위주로 이 글을 쓰다 보니 내 문학적 고뇌는 다 놓친 격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저서에도 욕심이 많고 좋은 글 쓰려고도 많이 몸부림쳤다. 1977년 《지금은 누군가 와서》 1981년 《빈 배에 앉아》 1988년 《저녁 이미지》 1996년 《사전을 뒤적이며》 2003년 《맹인》 2009년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 2013년 《주민등록증》 2015년 《아직도 거기 있다》 등 8권의 시조집을 냈다.
여기에 시산문집 《나는 아직도 안녕이라 말할 수 없다》 시선집 《지상의 밤》 《그대 보내려고 강가에 나온 날은》 《어쩌면 이것들은》 《이우걸 시조전집》 사화집 《네 사람의 얼굴》 《네 사람의 노래》를 합치면 15권이 된다. 산문집도 있다. 《현대시학》에 1970년대 시조론을 연재한 뒤 비평집 《우수의 지평》을 냈고 그 전에 월평을 모아 《현대시조의 쟁점》과, 《시문학》에 1980년대 시조론을 연재한 뒤 《젊은 시조문학 개성 읽기》라는 비평집을 냈다. 그리고 각종 칼럼, 산문을 모아 《질문의 품위》라는 산문집을 냈다. 그것뿐인가? 곳곳의 세미나에 끼어들고 온갖 심사에 관여하고 참 피곤하게 살았다 싶다.
이제 정말 지금 하고 있는 문예지나 잘 다듬으며 호수도 보고 산도 보고 해도 보고 별도 보는 정적인 시간을 갖고 싶다. 보잘 것 아닌 일로 등진 사람과 화해하고 과월호 문예지나 뒤지면서 약간 느리게, 약간 눈치 없이 살고 싶다. 이런 나의 욕망이 내 내면의 바람과 같은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 쉬고 싶다. 쉬다가 그것도 지치면 다시 거리로 나갈지라도 지금은 쉬고 싶다. 중학교 때 가지고 놀던 볼록렌즈를 꺼내어 나뭇잎 모양이나 살피고 잠 오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 그런 단순한 삶을 이제 받아들여야 할 때다. 내 인생도 내 문학도 이제 이쯤에 와 있다.
● 1946년 창녕 출생.
●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 《지금은 누군가 와서》 《빈 배에 앉아》 《저녁 이미지》 《사전을 뒤적이며》 《맹인》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 《주민등록증》 《아직도 거기 있다》 등 8권의 시조집 외 시산문집 《나는 아직도 안녕이라 말할 수 없다》 시선집 《지상의 밤》 등과 사화집 《네 사람의 얼굴》 《네 사람의 노래》 비평집 《우수의 지평》 등 산문집 다수.
● 중앙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김상옥시조문학상, 한국문학상 등 수상.
●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의장,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 등 역임.
● 현재 《서정과 현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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