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남(南)에서 부는 바람 1 절정일도의 등장! 녹수청청궁과 철접밀가의 출현! 팔만사천마맹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 강호는 어지러워질 대로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그 무렵,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저 멀리 남쪽으로부터 일어났고, 폭풍의 핵(核)처럼 중원을 향해 치달려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영의 인자집단이라는 광풍무막(狂風武幕)의 등장이었다. 광풍무막! 살인에 관한 한 가히 지상최고의 기술을 지니고 있다는 동영 최고의 인자조직. 누가 알았으랴. 바야흐로 그 무서운 조직이 중원을 향해 첫 발을 내딛었다는 것을……! 쏴아아아! 처얼― 썩! 산더미 같은 파도가 사정없이 뱃전을 후려 갈겼다. 그것은 배였다. 한 척의 거선(巨船)이었다. 멀리 남해로부터 중원을 향해 기세 당당하게 항진해 오는 배 한 척이 있었다. 중원 범선과 달리 다분히 거무튀튀한, 정녕 괴이한 형태로 이루어진 범선이었다. 웅장하기보다는 날렵해 보이는 형태이다. 그러한 배의 종류는 중원에 없다. 오직 빨리 이동하기를 즐겨 하는 자들, 동영(東瀛)의 무리들이 즐겨 사용하는 배였다. 쐐애애애애― 액! 하여간 범선은 눈부신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달려왔다. 그들의 눈앞으로 빠르게 중원의 땅이 다가들었다. 멀리 중원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 헌데 언제부터였을까? 거선의 선두(船頭)에 우뚝 서 있는 한 명의 미청년(美靑年)이 있었으니……! 나이는 이십 세 전후일까? 타는 듯 붉고 작은 입술에 다분히 총기 어린 눈빛을 지닌 사내! 청년은 일신에 특징 있는 검은 상복(喪服)을 헐렁하게 걸쳤는 바, 어깨 위에 길다란 장도(長刀)를 걸머메고 있었다. 펄― 럭! 장도의 끝에는 흰 천자락이 바람결에 펄럭이고 있었다. 누구를 애도(哀悼)하는 표식일까? 그의 뒤쪽, 역시 하나 같이 칙칙한 상복을 걸친 팔십팔인(八十八人)의 인물들이 서 있었다. 중원인들과는 모습과 의복 자체가 아예 다르다. 그들 역시 하나 같이 일신에 미소년처럼 길다란 장도(長刀)를 품고 있었다. 흡사 나무토막처럼 메마르고 비정해 보이는 자들! 가히 고수의 내음이 물씬 풍겨난다. "……." "……." 그들의 눈에서는 무서운 광채가 검푸른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살기(殺氣)였고, 또 누군가를 향한 잔인한 증오의 독광(毒光)이었다. 천하에서 이런 모습을 간직할 수 있는 무리는 오직 한 곳뿐일 것이다. 바로 동영의 인술사(忍術士)들이다. 그렇다. 지금 범선을 탄 채 남해로부터 중원으로 다가드는 자들은 동영의 인자(忍者)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광풍무막의 가장 뛰어난 팔십 일인의 고수들이었고, 우두머리는 맨 선두에 서 있는 미청년이었다. 쐐애애액! 배가 치달려 옴에 따라, 중원이 점차 가까워져 왔다. 선두에 선 미청년의 두 눈에서 매서운 한광이 뿜어지고, 입술이 잘끈 깨물어졌다. 쥐어짜는 듯한 신음성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크크! 저곳이 바로 중원인가? 모든 무사들의 꿈이 담겨 있다는 야망의 대지가……." 동영 광풍무막 인자들과 그 수뇌라는 미청년. 그 자의 이름은 매우(梅雨)라 했다. 매우는 모습에서 보듯 남장여인(男裝女人)이었다. 당금 나이 십구 세, 원래 그녀는 오래 전 중원에 들어와서 죽은 광사혼(狂死魂)의 딸이었다. 광사혼이라면 초우와 함께 중원으로 들어왔던 광풍무막의 이인자였고, 사형에게 충성을 다하다 죽어갔던 인물이 아니던가. 매우가 인자들을 이끌고 중원으로 오는 이유는 하나! 그것은 오래 전에 중원으로 들어와 행방불명된 초우(草雨)를 찾는 것이었다. 초우는 형식상으로나마 광풍무막의 수뇌! 물론 그녀가 죽었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매우가 그 뒤를 이어 광풍무막을 지배하게 될 것이되, 그래도 초우를 찾아야 하는 것은 매우의 임무이기도 하다. 매우에게는 초우를 찾는 것 이외에도 또 할 일이 있다. 이미 죽었다 알려진 부친 광사혼과, 광풍무막의 대종사인 광마혼(狂魔魂)의 원수를 갚는 일이었다. 어느 순간, 매우는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빠드득……!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중원인들, 감히 합공을 하여 대종사와 내 부친을 죽이다니……. 그 복수는 철저하게 갚아 주리라!' 대저 동영의 무사들이 그러하듯, 매우는 광마혼과 광사혼의 복수를 갚고자 중원으로 왔다. 매우는 당금 동영에서 최고의 인자(忍者)로 불리는 절대인자였다. 비록 여인이되, 그녀가 터득한 인자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것이었다. 그녀는 동영 최고라 불려지는 석양류(夕陽流)와 이도류(二刀流), 그리고 오행필살류(五行必殺流) 등 삼파(三派)의 진전을 모두 이어 받은 동영의 진정한 후계자이다. 그래서 인자들은 그녀를 가리켜 동영제일도(東瀛第一刀)로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하여간 중원이 점차 가까워올수록, 매우의 두 눈에서 뿜어지는 복수의 불길은 더욱 타올랐다. 그녀는 부친을 생각하고 있었다. 매우의 기억 속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난 부친의 얼굴도 모른다. 아버지는 기녀(妓女)인 어머니의 뱃속에 날 잉태시켜 놓고는 훌쩍 중원으로 떠나 버렸지.' 매우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다. 아니, 불행을 넘어 처절함 그 자체였다. 아비 없는 창녀의 딸이 그녀의 진정한 신분내력(身分來歷)이었고, 무릇 창녀의 사생아란 환락가를 전전하다가 다시 창녀가 되기 마련이라던가. 하되 매우는 혼신의 힘을 다해 무공연마를 시작했고, 결국 뼈와 살을 깎는 고련 끝에 동영제일도로 불리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중원 땅을 바라보며 원대한 꿈에 젖어들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부터 나의 아버지는 늘 동영의 이인자(二人者)였다. 하되 나는 절대로 이인자에 머물러 있지 않으리라. 나를 키워준 광풍무막의 한(恨)을 푼 이후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중원을 정복하고 천하제일의 절정자가 되리라.' 매우는 다짐하고 다짐했다. 비록 초우를 찾고 복수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라 하되, 매우에게는 그보다 더 큰 야망이 있다. 그 야망은 여인으로서는 꿈꾸기 어려운 거대한 야망이었다. 그러나 매우는 자신이 있었다. 또한 그럴 만한 능력도 지니고 있다. 문득 매우의 얼굴 위로 득의한 빛이 떠올랐다. '후후……, 일단 하루에 천리(千里)씩 이동하리라. 최후의 목표는 황산에 기거하고 있다는 그 자를 꺾는 것…….' 그 자라니? 누군가를 생각할 때 매우의 눈에서 불길이 토해진다. 그것은 살기의 불길이며, 또한 투혼(鬪魂)의 불길이었다. "뇌정륭……! 그 자가 황산에 살고 있다 했지. 천하제일인으로 행세하며……." 그랬던가? 매우는 야무지게도 뇌정륭을 꺾을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래서 그녀의 이름을 단숨에 천하 위에 세울 작정을 하고 있던 것인가? '그를 제거하기 전에 일단 중원에서 가장 뛰어난 열개 문파(門派)의 현판을 떼어 나의 존재를 천하에 알리리라. 그 자들의 현판을 떼는 것은 광풍무막이 중원에 모독당하고, 부친과 대종사를 죽인 데 대한 일단계의 복수이다!' 매우! 그녀는 다가드는 중원을 노려보다가 매섭게 소리쳤다. "첫 번째 제물은 천태산(天太山)의 남천검문(南天劍門)이다 !" 2 남천일사(南天逸士) 관중생(官中生)! 그는 무림명가로 알려진 남천검문의 제 이십육대 문주(門主)이다. 일신에 뛰어난 문무를 겸비하고 있는 일대의 기재로서, 특히 온화하고 인후한 성품은 강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평소 그에게는 하나의 취미가 있다. 난(蘭)을 재배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에게 난은 생명이라 할만큼 소중했다. 오늘도 그는 생명처럼 소중하게 아끼는 난을 가꾸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조금 전, 난을 가꾸며 망중한을 보내는 그에게 한 명의 제자가 와서 급박한 보고를 했다. 그것은 하나의 도전장이 전달되어 왔다는 것이었다. 지금 저 멀리에 일단의 괴인(怪人)들이 다가와 있고, 그들은 한시진 안에 남천검문의 현판을 떼겠노라고 시비를 걸어 왔을 것이었다. 관중생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난을 손보다 말고 나직한 탄식을 했다. "아아! 허리허욕에 물든 유랑의 무리들이 출몰하는 난세(亂世)로구나. 난세야." 탄식하던 관중생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여덟 명의 제자를 불렀다. 그는 난을 칠 때는 어떤 일에도 손을 쓰지 않는 습관이 있다. 하되 오늘만은 가장 아끼는 여덟 제자를 오만무례한 무리들에게 보내 그들을 단단히 훈계할 작정이었다. 여덟 명의 제자. 그들은 남천팔풍(南天八風)이라고 불리는 인물들로서, 일개개인의 능력이 일류고수의 반열에 올랐다는 일대고수들이었다. 관중생은 남천팔풍을 향해 근엄하게 말했다. "살수를 펼쳐야 할 이유는 없으되, 다시는 그 무리들이 본문에 찾아와 시비를 벌이지 못하게 따끔한 훈계를 내리도록……!" 관중생은 느긋하게 난을 쳤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내린 명령을 잊고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남천팔풍이 자신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크아악 !" "케엑!" 돌연 남천팔풍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문 밖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연후 한 명의 제자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큰… 큰일났습니다. 남천팔풍께서 그들 악마의 무리들을 이끄는 수뇌에서 단 일도(一刀)에 모조리 죽었습니다." 관중생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도 최소한 백초 이상은 버틸 수 없는 여덟 제자의 합공을 어찌 단 일 인이…… 말도 아니 되는 소리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관중생은 얼굴이 흙빛으로 질리고 말았다. 제자가 자신에게 농담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라고 그랬느냐? 단 일도에……, 천하에 그런 절정의 도인(道人)이 있을 수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은 벼락치듯 밖을 향해 퉁겨 나가고 있었다. 달려나가는 그의 손(手)에는 어느 틈에 그가 평소 아끼는 애병 묵린도(墨燐刀)가 들려 있었다. 막 대문 밖으로 달려나온 관중생. 그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목도했다. 여덟 구의 시체! 대문 앞에 예리하게 절단 나 있는 여덟 구의 시체가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누가 봐도 단 일초식에 잘려 나간 듯한 모습의 시신들, 그 시체들은 바로 조금 전에 관중새의 명을 받고 나왔던 남천팔풍이 아닌가? '어찌 단 일도로서…….' 관중생이 넋이 나간 모습으로 남천팔풍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홀연 한 줄기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후후! 그대가 남천검문의 두목 관중생이렸다. 과거 그대는 나의 부친 광사혼의 뒤를 집요하게 추적했던 무리들 중의 일인……." 그와 함께, 한 자루의 장도가 눈부시게 관중생을 향해 다가들었다. 파아아― 앗! 얼마나 빠른지, 아예 육안으로 구분되지도 않는다. "어… 어딜……." 관중생은 급히 도를 뽑아들고 급히 반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도가 채 반도 뽑히기도 전에 그의 목젖에는 하나의 핏구멍이 뚫렸다. 퍼― 억! 이어 전신이 마비되어 가는 고통 속에 한 미청년의 모습이 시야를 파고들었다. 일신에 칙칙한 상복을 걸친 아름다운 남장여인. 매우였다. 그녀는 장도를 들어 관중생을 찌른 다음, 다시 현판을 떼어내고 있었다. 관중생의 몸은 서서히 쓰러졌다. '이것은 저주야! 가공할 동영의 저주……!' 관중생은 죽어가며 미청년의 도법을 생각했다. 빠르고 격렬한 도법! 노리는 부위에만 힘을 집중하고 다른 곳에는 단 일푼도 힘을 분산하지 않는……. "호호! 그래, 그것이야말로 바로 우리 광풍무막의 처절한 저주이지……." 장도로 남천검문의 현판을 잘라낸 매우. 그녀는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두 번째 가야 할 곳은 백화성궁(百花聖宮)이다!" 3 파파파팟! 파팟―! 어둠이 깃들은 중원의 밤을 질주하는 팔십팔 개의 그림자들. 매우와 광풍무막의 인술사들이었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질풍처럼 이동해 갔다. 광풍무막의 인자들은 하룻밤에 거의 천리를 이동했으며, 강호에서 그러한 움직임을 동시에 보일 수 있는 집단은 아무도 없다. 하여간 그들은 길게 무리를 이어 이동해 갔고, 그 무리 중의 하나이다. "어이, 오줌이 마렵군." 치달리는 일행 사이에서 슬쩍 빠져나오는 자가 있다. 그는 일행에서 떨어진 다음 바지의 아래춤을 풀고 방뇨를 시작했다. 쉬이이익―. 오줌을 싸는 자, 그는 아무도 자신을 바라보지 없음을 확인한 후 손을 허공으로 쳐들었다. 순간 허공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리며, 한 마리의 매가 그 자의 어깨위로 날아 내렸다. 인자는 그 새의 다리에 달린 죽통(竹筒)에 하나의 서찰을 집어넣었다. 매는 전서구(傳書鳩)였다. 서찰을 전하는……! 푸드드― 득―. 매는 곧장 어둠 속의 허공으로 떠올라 까마득히 사라져 갔다. 이윽고 오줌싸기를 마친 인자, 그는 앞서간 동료들을 따라잡기 위해 다시 혼신의 힘으로 달려갔다. 과연, 이것이 어찌된 일인지……? 4 < 그 자들은 지금 백화성궁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광풍무막의 수뇌 매우는 일신에 뛰어난 동영인자술을 지닌 일대고수인 바, 단 일초 만에 남천일사 관중생의 수급을 끊었습니다. 그녀는 피로서 충성을 맹세한 초우(草雨)라는 여종사를 찾아왔는바, 초우는 최근 강호에 나타난 녹수청청궁의 궁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초우라는 여종사의 초상화(肖像畵)를 동봉하는 바, 초우는 녹림의 숨은 실력자로 알려진 철마성(鐵魔星)이라는 자가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있다 합니다. 매우의 궁극적인 목표는 뇌정륭을 꺾고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 머지않아 그는 청허죽림으로 이동할 것으로 보입니다. 청허죽림을 치고 난 다음 바로 황산으로 갈 것이고……. ― 후략(後略) ― 추후 보고 올리겠습니다. 묵도혼(墨刀魂) 배상(拜上). > 손(手). 하나의 손이 매의 발에 달린 죽통(竹筒)에서 서찰을 꺼내 읽고 있었다. 그 손의 임자는 눈빛에 희미한 상흔이 매력적으로 나 있는 일대의 미남자. 바로 옥자강이었다. 방금 전, 옥자강은 자신이 몰래 심어 놓은 밀정에게 비밀서찰을 받아 들은 바 있다. 보고의 내용인즉 근래 강호를 휩쓰는 광풍무막에 관한 것이었다. 광풍무막이라면 파죽지세로 강호명가들을 쓰러뜨리고 북상(北上)하고 있다는 동영 인술사들의 집단! 그들의 최후목표는 중원정복이라던가. 중원정복은 동영 무리들에게는 수천 년을 이어 내려온 영원불멸의 꿈이며 소망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인가? 밀지를 읽는 옥자강의 얼굴에는 흡족한 희열의 빛이 가득하다니……! "후훗! 그래……, 그렇게 마음껏 날뛰어 다오. 너희들이 중원을 어지럽힐수록 내 중원정복은 더욱 앞당겨진다." 그는 동영 광풍무막의 출현에 누구보다 기뻐했다. 그것은 광풍무막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준다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푸하하핫……! 어리석은 섬개구리들, 너희들은 아무리 뛰어보아야 청개구리에 불과하다. 너희들은 머지 않아 내 손에 쓰러져야 할 오합지졸이되, 지금은 적지 않은 쓸모가 있다. 그건…… 너희들이 내가 할 일을 대신해 주고 있기 때문이지." 옥자강의 두 눈에 득의의 빛이 번뜩거렸다. 그것은 다분히 희열의 빛이며, 음모의 빛이기도 하다. "크크! 당금 강호에서……, 특히 백도의 무리들 치고 그 자들이 준동을 막을 세력은 거의 없으리라. 자고로 백도놈들이란 하나 같이 안빈낙도하는 무리들이기에……! 프하핫! 원래 오만하고 위선적인 백도무리들을 내가 제거해야 하되, 광풍무막이 날 대신하고 있으니 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으랴? 프하하하핫!" 옥자강은 통쾌하게 웃었다. 웃는 도중, 그는 인자들이 초우라는 소녀에게 충성을 피로 맹세했다는 부분을 다시 살폈다. 묵도혼이라는 밀정은 초우라는 소녀에 대해 꽤나 자세하게 보고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녹수청청궁에 머물러 있으며, 또한 녹림제일의 풍운아라 알려진 철마성(鐵魔星)이 그녀를 보필하고 있다는 따위의 보고들……. "녹림(綠林)……! 하찮게 여기되 기실 적지 않은 힘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지. 특히나 그들이 지닌 조직망(組織網)과 황금(黃金)은 천하에서 가장 방대하다 엄청나다 할 수 있다. 언제인가는 꺾어서 나의 수중에 접수해야할 자들……." 옥자강의 눈길은 서찰과 함께 동봉된 두 장의 초상화에 멎었다. 하나의 초상에는 여인(女人)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바, 그것은 초우의 얼굴이다. 또 하나의 그림은 추악하기 그지없는 꼽추청년의 얼굴. 그것은 바로 녹림 제일의 풍운아라 알려진 철마성의 얼굴이었다. 철마성(鐵魔星)! 신분이 누구인지는 모르되 녹림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일대풍운아라 알려진 인물이다. 초우의 초상화를 흘낏 바라보던 옥자강, 그의 눈이 이채를 떠올렸다. "젠장……, 더럽게도 예쁜 계집이로군. 저 정도 계집이라면 평생 데리고 살며 살을 섞어도 전혀 싫증나지 않겠는데 말이야……." 그는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다시 철마성의 초상화 위로 시선을 주었다. 순간 옥자강의 얼굴에서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얼굴이 심히 일그러지는 바, 그것은 기분 나쁜 얼굴이 아니라 아예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잠시 후, 옥자강의 입에서 대소가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핫……! 누군가 했더니 바로 소아귀 녀석, 이 녀석이 출세했군. 녹림제일의 풍운아라니……." 옥자강이 들고 있는 녹림풍운아의 그림. 그 그림에는 옥자강이 너무도 잘 아는 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소아귀의 얼굴이었다. "하핫, 소아귀 놈쯤이야 간단히 접수하지 못한대서야……." 옥자강은 소아귀의 초상화를 보며 거듭 파안대소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옥자강은 한순간 또다른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그 놈……!' 옥자강의 눈 속으로 떠오르는 또 한 쌍의 눈.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해맑고 고독한 눈이었다. 지금껏 옥자강의 가슴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한 소년의 눈빛. 그 눈빛의 소년을 생각하며 옥자강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세상의 누구라도 꺾을 자신이 있다. 그러나 영원히 꺾지 못할 녀석이 하나 있다면 그 놈뿐인지도…… ! 피곤하기 짝이 없는 고집불통 녀석, 절령!" 5 광풍무막! 그들은 가히 질풍 같은 기세로 중원을 휘저으며 북상(北上)했다. 남천검문이 무너져 간데 이어 백화성궁이 무너졌다. 이어 십만대산의 복마도관(伏魔道官)의 현판 역시 저항도 못해 보고 떨어져 나갔다. 맹문산의 백인검파(百忍劍派), 백향산의 철마장성(鐵魔長城)도 마찬가지……. 그들은 거역할 수 없는 기세로 중원을 휩쓸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들의 발길은 중원 최고의 신비지(神秘地)로 알려진 청허죽림 쪽으로 향했다. 청허죽림! 중원에서 가장 강하다 알려진 다섯 집단 중의 하나. 하되, 그들은 수십 년이나 봉문(封門)하다시피 한 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잠자고 있는 거인의 집단. 청허죽림의 수뇌는 무림 사상 가장 위대한 도법의 명인(名人)이라는 검학쌍절(劍鶴雙絶) 악중군(岳中君)이었다. 그는 소림의 산해성승과 더불어 천하의 이대쌍기(二大雙技)로 불리우고 있는 인물이다. 검학쌍절 악중군! 그는 어찌된 일인지 수십 년 이래 강호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세인들은 그가 어쩌면 이미 타계(他界)했을 것이라고 수군댔다. 광풍무막의 수뇌 매우. 그녀는 청허죽림으로 가서 검학쌍절 악중군의 수급을 벨 생각이었다. 그리고 소림사로 찾아가 산해성승마저 죽이고, 현판을 뗄 작정을 하고 있었다. 6 구십팔 전 구십팔 승! 애절령이 절정일도로 알려진 이후 거둔 승리의 전적이다. 단 삼개월 동안에 거둔 신화. 그것은 지금까지 누구도 이루지 못한 불멸의 업적이었다. 강호에는 이제 절정일도라는 이름이 하늘 높이 뜬 채 찬란히 빛났다. 사람들은 절정일도가 누구인지 모른다. 단지, 그가 머지않아 뇌정륭에게 도전하여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천하인들의 간사한 마음은 일인의 독주(獨走)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채화성녀 양자빈. 그녀는 오늘 한 인물의 정중한 도전(挑戰)을 받았다. 절정일도라는 인물이 그녀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항상 그랬듯이 서호변에서 꽃(花)을 따고 있었는 바, 지금 절정일도라고 밝힌 인물은 채화성녀의 앞에서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채화성녀는 눈앞의 백포사내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기도(氣度)……. 저 정도 기도라면 가히 뇌정륭을 능가할 정도……!' 채화성녀의 앞에 선 자는 애절령이었다. 그의 곁에는 낭왕이 느긋하게 서 있고, 애절령은 다만 묵묵한 눈길로 채화성녀를 바라볼 뿐이다. 그의 눈은 끝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맑고 해맑았다. 순간 채화성녀는 내심 외쳤다. '아……, 좋은 눈! 세상을 모두 빨아들일 만큼 깊고 좋은 눈이다.' 채화성녀는 일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독신녀. 당금 나이 삼십사세. 문득 그녀는 애절령의 눈빛을 보며 가슴이 콩당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얼굴이 일시에 붉어졌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달관했다고 자부했다. 하되 지금, 한 백포사내의 눈빛을 보며 어린 소녀처럼 가슴이 뛰고 마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럴까? 어린아이도 아닌데…….' 그녀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때, 애절령은 채화성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공손하게 포권했다. "선배님은 이 후배가 만나본 인물들 중 네 번째로 강한 인물……, 후배에게 가르침을 준 데 대해 감사 드립니다." '네 번째……? 그렇다면 나머지 세 사람은……?' 채화성녀는 은근한 질투심을 느끼며 애절령을 바라봤다. 스으―. 이때, 애절령이 손에 들고 있던 절정도를 천천히 치켜세웠다. 이어 절정도를 감았던 헝겊을 풀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껏 강호에 나온 이래 한 번도 절정도의 헝겊을 풀어 사용한 적이 없는바, 지금 채화성녀의 앞에서 드디어 절정도를 풀고 있었다. 녹이 슬 대로 슬어 있는 절정도 ! 애절령이 도를 치켜세우는 순간이다. 순간 절정도에서 선명한 한 줄기 도명(刀鳴)이 서릿발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 우웅! 흡사 혼을 잡아끌듯한 도명이 채화성녀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채화성녀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어렸다. "그… 그것은 절정도……! 산해성승과 더불어 강호의 이기(二技)로 불리시는 그 분께서 사용하시던 절정의 도를 어찌 그대가……?" 채화성녀는 강호의 기녀답게 애절령이 손에 든 도의 내력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놀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애절령의 도가 허공을 베어 왔다. 쩌어어― 억! 허공을 쪼개듯 채화성녀에게 다가드는 절정도. 채화성녀는 놀랄 사이도 없이 급히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렸다. 파파파― 팟―! 이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꽃바구니가 매섭게 허공으로 떨쳐졌다. 순간 수많은 꽃송이들이 애절령을 향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만천화우(滿天花雨)!" 허공은 찰나간 무수한 꽃비로 뒤덮였다. 애절령은 꽃비에 가려져 모습조차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어지러움 속에서도, 애절령의 눈길은 흐트러짐 없이 채화성녀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애절령의 눈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밝은 눈. 그의 눈은 백색극화를 제압한 눈이다. 우수수수― 수! 많은 꽃송이들이 애절령의 몸에 달라붙기 직전, "아……." 나직한 신음을 발하며 채화성녀가 몸을 뻣뻣하게 세웠다. 어느 틈이었을까? 그녀의 목덜미에 차갑게 대어져 있는 한 자루의 칼. 애절령의 절정도였다. 주르르! 미세한 도흔(刀痕)이 그어지며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의 몸 가까이 달라붙던 꽃송이들이 힘없이 애절령의 발아래 떨어져 내렸다. 정녕 기이한 것은, 흘러내린 피가 절정도에 묻는 순간 모래 속에 흡수되듯 스며들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내가 일초(一招)도 견디지 못하고 패하다니……?' 채화성녀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애절령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리 세상사를 초탈한 여인이라 하나 패배는 엄연한 현실. 애절령은 천천히 손을 거뒀다. 그의 얼굴은 담담했다. 승자의 오만이나 득의함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선배의 가르침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어 그는 몸을 돌렸고, 채화성녀는 멍하니 선 채 사라져 가는 애절령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애절령은 낭왕과 함께 느릿하게 채화성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멀어지는 일인일수, 그 모습을 보며 채화성녀는 내심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아……, 금방 그 도법은 절정일도가 시전한 도법은 소림의 도(刀)! 가장 위대한 소림의 무상일도(無上一刀)가 어찌 저 낯선 사내에게서 시전되었단 말인가?' 7 애절령은 낭왕. 일인일수(一人一獸)는 나란히 산야를 걸어가고 있었다. 승리(勝利)! 하되, 마음은 기쁘지가 않다. 그는 승리를 한다해도 담담한 초월의 경지로 접어드는 것일까? 어느 순간, 길을 걷던 애절령의 눈썹이 찡긋했다. "저것은……?" 애절령이 허공을 올려다 볼 때였다. 푸드득! 한 마리의 새가 그의 팔목 위로 내려앉았다. 그것은 전서구(傳書鳩)였는바, 전서구의 발목에는 죽통(竹筒)이 매어 달려 있었다. 애절령은 의혹의 표정과 함께 죽통을 열었다. 순간 그 안에서 둘둘 말려진 작은 종이조각이 흘러나왔다. < 청허죽림(靑虛竹林)으로 가도록! > 밑도 끝도 없는 간단한 글귀. "후훗, 그 분이……." 순간 애절령의 입가에는 담담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알고 있었다. 당금 강호에서 자신에게 이러한 서찰을 보낼 만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그는 서찰에서 은은히 피어나는 불향(佛香)을 냄새 맡을 수 있었다. 미루어 이런 서찰을 보낼 만한 곳이 딱 한 군데뿐이라는 것을 잘 안다. 바로 천하제일의 사찰(寺刹)이라는……. |
첫댓글 잼 납니다
재미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