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친구 대 친구 1 애절령은 장강십팔채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그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항상 술에 절어 살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매우를 안고 뒹굴었다. 헌데 무슨 일인지 절대 초우만은 안지 않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초우를 안지 않은 것인지, 이유는 오직 애절령만이 알 일이었다. "뭐라고……? 지금 그가 오고 있단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방금 전 광풍무막의 인자들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는 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철마성이란 자가 다가오고 있다 하옵니다." 지금, 애절령은 매우로부터 한 가지 보고를 들었다. 보고인즉, 누군가가 장강십팔채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절령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푸하하핫……! 드디어 놈이 오는군." 매우의 보고에 의하면, 다가오는 자는 바로 소아귀라 했다. 소아귀는 한달 전에 장강십팔채를 떠나간 바 있다. 하되, 떠나갔던 그가 다시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다. 매우는 무척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자는 등에 하나의 철상자를 메고 있다 했습니다. 필시 철상자 안에는 화탄(火彈)이나 독탄(毒彈)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지금 당장 광풍무막의 수하들로 하여금 그 자를 동정호에 수장(水葬)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매우는 매우 염려스런 얼굴이었다. 그러나 애절령의 전혀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하하! 지금부터 광풍무막의 인자들에게 하룻동안 휴가를 준다. 광풍무막의 전원은 하루 동안 해도(解刀)하고 거처에서 쉬도록 해라. 아니면 술을 퍼먹든지, 그가 다가와도 절대 막아서는 아니 된다." 뜻밖의 명령에 매우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어이없는 얼굴이 되어 애절령을 바라봤다. "위기시에 해도라니요? 그 자는 위험한 자입니다. 그 자는 대종사를 해치러 오는 중입니다." 매우는 울상이 되었다. 그녀는 수하로서가 아니라 애절령의 여인으로 행세하려 했다. 하되, 애절령의 얼굴에 떠오른 단호한 빛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여간 명대로 하도록……! 그리고, 난 낚시를 할 테니 누구라도 내 근처에는 오지 못하도록 하라." 2 동정호(洞庭湖). 중원제일의 호수, 천하제일의 호수이다. 그 중에서도 장강십팔채가 있는 군산지역은 실로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한다. 수많은 군도(群島)들이 사방에 늘어서 있는 곳 중의 한 곳이다. 애절령은 하나의 무인도를 택해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벌써 한나절이나 낚싯대를 드리운 채 꼼짝하지 않았다. 해가 거의 서쪽으로 기울 저녁 무렵, 애절령은 낚시를 하고 있으되 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낚시를 하며 자주 눈길을 동정호의 수면에 주곤 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순간 애절령의 눈에서 한 가닥의 이채가 솟아올랐다. 그는 본 것이다. 저 멀리 동정호의 푸른 물결을 헤치며 애절령이 있는 쪽으로 다가들고 있는 한 척의 일엽편주(一葉片舟)를……! 삐그덕― 삐걱―. 그위에 왜소한 체구의 한 사내가 타고 있었다. 일신에 전형적인 녹림무사의 차림을 하고 있는 사내이다. 그는 바로 소아귀가 아닌가. 천하인들에게 철마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녹림도 최고의 풍운아 소아귀가 애절령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다가들던 소아귀도 애절령을 발견했다. 순간 소아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무표정하게 다가와서 기슭에 배를 댔다. 이어 애절령을 향해 걸어왔다. 걸어오는 그의 어깨 위, 거무튀튀한 하나의 철상자가 메어져 있었다. 매우가 보고하던 문제의 상자였다. 그는 상자를 애절령의 이 장여 앞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터― 엉! 이어 사나운 눈으로 애절령을 노려보았다. "절령, 이 상자 안에는 화탄이 가득 들어 있다. 내가 이걸 열기만 하면 동정호의 절반은 단숨에 날아가 버릴 것이다." 소아귀의 음성에는 사나운 가시가 돋쳐 있었다. 애절령은 빙그레 웃었다. 그의 웃음은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담백하고 진솔하게 느껴질 뿐이다. "소아귀, 네가 바라는 게 뭐지? 녹림을 돌려 달라는 거냐?" 소아귀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게 아냐, 내가 바라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 친구의 부인을 데리고 도망친 천하제일의 반역자를 믿어 달라고……?" 애절령은 가늘게 실눈을 떴다. 소아귀의 음성이 더욱 간곡해졌다. "날 믿으라는 이야기가 아냐. 어차피 너는 영원히 나를 믿지 못할 처지……." "그렇다면……?" "초우, 그녀를 믿어다오. 그녀는 순결하다." "……." 애절령은 말없이 소아귀를 바라보았다. 소아귀의 얼굴에는 정녕 진지한 표정이 역력하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소아귀의 면모였다. "사실 그 말을 하기 위해 왔다. 나는 네가 그녀를 다시없는 천덕꾸러기로 천대한다고 이야기 들었다. 네가 그녀를 천대하는 것은 그녀의 순결을 의심해서겠지. 하되, 거듭 말하거니와……, 그녀는 순결하다. 그녀를 믿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철상자 안에 들은 화탄을 터뜨려 너는 동귀어진 할 거다." 소아귀는 사나운 눈길로 애절령을 노려봤다. 그러나 애절령의 얼굴에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을 뿐이다. "그녀는 네 녀석과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를 믿을 수 있겠느냐?" 순간이다. 소아귀는 얼굴이 발끈해지더니 곧장 바지를 걷어 내렸다. 그는 고의까지 순식간에 벗어 내렸다. "자! 봐라. 이따위 물건으로 지니고 있는 놈이 어찌 그녀를 범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느냐?" '아니, 저것은……?' 애절령은 기겁을 할 듯이 놀랐다. 보라, 바지를 벗어 내린 소아귀. 소아귀의 하반신에 의당 달려 있어야 할 남자의 상징, 바로 생식기(生殖器)가 없지 않은가? 무엇인가에 물어뜯긴 듯 흉측한 상처만이 그곳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ㅋㅋ……, 이 상처는 내가 어렸을 적에 흑풍사를 돌아다니다 늑대에 물어뜯긴 것이지. 벌써 오래 전의 일이기에 너는 알고 있지 못하리라." 소아귀의 음성은 고통과 아픔으로 인해 아련히 젖어들었다. 생각해 보라, 생식기가 없는 젊은 사내의 고통과 아픔을……. 애절령은 소아귀를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 그래서 소아귀의 성격이 그토록 괴팍하고 삐뚤어져 있던 것인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었기에 철저하게 괴팍해진 인생을 추구하려 했던 것이겠지.' 그제야 애절령은 소아귀의 인생을 완벽히 파악할 수 있을 듯했다. 더불어, 그는 소아귀에 대한 진한 연민의 정을 느꼈다. 소아귀는 애절령을 싸늘하게 보며 말했다. "그런다고 날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지는 말아. 그렇다면 네놈을 때려 죽일 테다." 그는 짐짓 사나운 표정을 지었으며, 이어 자신이 메고 온 상자를 가리켰다. "하여간 저 상자는 지금부터 너의 것이다. 그 안에는 그 동안 내가 이룩해 놓은 녹림기업의 모든 재산들이 수록되어 있는 장부(帳簿)가 들어 있다. 나는 지금까지 관리자였을 뿐 소유자는 아니었지. 너는 녹림을 인수할 충분한 자격이 있는 강호영웅이야. 그리고 나의 친구이기도 하고……." 소아귀는 그 말과 함께 몸을 돌아섰다. 더 이상 애절령을 바라보지 못한 채 죄책감으로 몸을 돌렸다. 순간 애절령은 나직하게 소아귀를 불렀다. "아귀……!" 소아귀는 멈추어 섰다. 그러나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애절령은 품속에서 한 병의 술호로를 꺼내들었다. "멈추라고는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일배주(一拜酒)는 들고 가야 한다. 넌 내 친구니까……." 소아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친구(親舊)! 얼마나 입안을 맴돌던 단어이던가. 소아귀의 두 눈은 어느 순간 물기가 스며 나왔다. 그는 전신을 경련하며 몸을 돌아섰다. "친구……, 그래, 너는 이 세상에서 나와 하나뿐인 친구였지. 가장 진실한 친구……." 소아귀의 음성은 울음에 젖어 떨리고 있었다. 막 몸을 돌아선 소아귀. 순간 그는 보았다. 팔을 활짝 벌리고 선 애절령의 모습을……. 애절령은 환한 웃음을 머금고 소아귀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소아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 소아귀는 힘껏 소리를 내지르며 애절령을 향해 돌진했다. "절령!" "아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힘껏 서로를 껴안았다. 친구! 그 말뿐이었다. 더 이상은 아무런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친구 사이에 무슨 변명이 필요하고, 무슨 칭찬이 필요한가. 그저 서로의 체온을 느낀다면 그것으로서 족한 것이다. 용서도 칭찬도 필요 없다. 친구 사이에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소아귀는 눈물로 범벅이된 얼굴로 애절령을 올려다봤다. 애절령의 눈에도 물기가 어리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순간 번뜩 스쳐 가는 생각이 소아귀의 머리를 채웠다. '이, 이 녀석! 이제 보니 나를 이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초우에게 냉담하게 대했구나. 그 소식을 듣고 내가 달려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푸하하핫!" 애절령은 대답 대신 흔쾌하게 웃을 뿐이다. 소아귀의 얼굴에 짐짓 분노의 표정이 떠올랐다. "고약한 녀석, 친구를 놀리는 것은 좋지만, 세상에서 가장 착한 초우를 가슴 아프게 하다니……. 이 녀석! 너는 오늘 저녁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안아 주어야 한다." 소아귀는 때리려는 듯 애절령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애절령은 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프하하핫……! 그녀를 안는 것보다 시급한 건 너와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셔야 한다는 거야." "하… 하긴……." 3 황산의 비래관(飛來關). 세인들에 의해 천하제일지(天下第一地)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는 천하에서 가장 내노라 하는 온갖 무사들이 모여 살아간다. 그러나 이곳이 천하제일지로 불리게 된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가장 뛰어난 한 명의 절대무인(絶代武人)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의 성역(聖域). 그런데 이 성역에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혈겁(血劫)이 불어닥치고 있었으니……. 밤(夜)이다. 사위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삼경. 휘류류류― 륭! 쐐쐐쐐애애― 액! 매서운 돌풍을 동반한 채 황산 비래봉으로 접어드는 죽음 같은 검은 그림자들이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공할 경공술을 발휘하며 비래관으로 접어드는 자들, 수효는 일백팔 인. 그들은 하나 같이 전신에서 가공할 마기(魔氣)를 뿜어내는 자들로서, 누구를 막론하고 혼(魂)이 없는 강시를 대하는 듯 섬뜩하고 공포스런 모습들이었다. 아아! 누구라서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바로 무림사상 최대의 혈풍을 몰고 올 만겁백팔혼이라는 사실을……. 만겁백팔혼이라면 전륜철왕부의 지하 속에 잠들어 있던 전대의 일세마왕들. 그들은 얼마 전 새로운 주인 옥자강에 충성을 맹세한 바가 있고, 그의 명에 따라 오늘 이곳 황산 비래봉에 출현한 것이다. 츠으으! 쓰으으― 쓰스! 그들의 전신에서는 마기가 뿜어지는 기이한 음향이 발출되고 있었다. 또 전신에서 쏟아지는 살기는 어떤 단단한 물체라도 찢어버릴 만큼 예리하고 잔혹했다. 마안(魔眼)들. 어둠 속에서 일백 개의 혼(魂)없는 죽은 눈들이 번들거린다. 피(血)의 눈이다. 그들은 어둠 속에 휘감긴 비래관을 내려다봤다. 그들의 손에는 하나 같이 음산무비한 병장기(兵仗器)가 들려 있었다. 어느 틈일까? 적막에 잠든 비래관을 뒤흔드는,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살기 가득한 외침이 있다. "쳐라! 씨알 한 놈도 남기지 마라." 한 마디의 살인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마겁백팔혼은 가공할 기세로 비래관으로 짓쳐 들었다. 아아, 전무후무한 대혈겁은 이제 시작되는 것인가? 잠시 후, 조용하던 어둠 속에서 처절하기 그지없는 비명이 울려 나와 비래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크아악!" "아악!" "케에엑, 대… 대체 누구냐? 저 가공할 악마들은……?" 4 강호는 대폭풍에 휘말렸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무너지다! 천하가 온통 술렁거렸다. 그것은 당금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던 군왕정천 뇌정륭이 무너졌다는 것!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대혈겁은 뜻밖에도 황산 비래봉으로부터 시작되었는 바, 일백팔 인의 악마들이 하룻밤 사이에 그곳을 휩쓸어 버렸다는 것이다. 도저히 쓰러지지 않을 거목. 그 누구도 쓰러뜨릴 수 없다는 절대자. 그 뇌정륭이 일백팔인의 절대마왕들의 합공을 받고 쓰러졌다는 것이다. 일백팔 인을 일컬어 세인들은 만겁백팔혼이라 했다. 뇌정륭을 무너뜨린 만겁백팔혼! 그들은 무서운 기세로 천하를 향해 몰려가고 있었다. 두두두두― 두두―. 만겁백팔혼은 단숨에 천하를 휩쓸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뇌정륭이 쓰러진 이후 천축 철접세가의 주축세력이 단숨에 괴멸되었다. 철접세가의 가주로 알려진 화정영은 그들에 의해 납치되어 갔다던가? 그리고 구대문파 중의 청성(靑城)과 무당(武當)이 이틀 동안에 걸쳐 파멸되었으며, 머지않아 만겁백팔혼은 소림과 청허죽림을 휩쓸 기세라고 했던가? 대혈겁이 불기 시작한 무림. 더 놀라운 사실은 만겁백팔혼에 동조하는 세력이 나타나 함께 무림천하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팔만사천마맹! 당금 마도제일세라는 팔만사천마맹이 만겁백팔혼을 선두에 세우고 천하를 피로 장악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팔만사천마맹과 만겁백팔혼을 동시에 장악한 자가 있다 하였으니……. 그 자를 일컬어 사람들은 옥면마호 옥자강이라 불렀고, 그 이름은 만악(萬惡)의 괴수로 불려졌다. 5 황산의 비래관. 대혈겁이 휘몰고 갔다는 비래관은 적요하기만 하다. 사방에 늘어선 채 결실을 기다리는 곡식들. 어떤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는 완만하고 부드러운 대지……. 그 비래관으로 접어드는 자가 한 명의 사내가 있다. 허리춤에 한 자루 도를 차고, 옆에 금빛 늑대를 동행한 자! 그는 애절령이었다. 애절령은 오직 낭왕만을 대동하고 비래관으로 접어들었다. '삼년만인가? 이곳에 다시 오는 것이……?' 애절령의 눈길은 감회 깊게 비래관을 굽어봤다. 비래관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적요했다. 인적 하나, 살아 있는 생명체 하나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리고, 애절령이 지나는 주위엔 적지 않은 지형의 변화가 있어 보인다. 흡사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움푹움푹 패인 흔적들……. 아마도 얼마 전에 있었던 대격전의 흔적이리라. '만겁백팔혼……! 그들이 어떤 괴물들이길래 그토록 강하다는 말인가? 절대로 쓰러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를 쓰러뜨렸다니…….' 애절령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장강십팔채에 머무르고 있었던 바, 소아귀의 수하로부터 비래관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곧장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뇌정륭이 쓰러지다니…….' 애절령은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보았던 군왕정천 뇌정륭은 가히 태산의 압력에도 무너지지 않을 절대거인이었다. 애절령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 정도에 쓰러질 무사가 아니야. 그리고 나는 그를 쓰러뜨려야 할 일생일대의 목표가 있다. 그는 쓰러지지 않아…….' 그와 함께, 애절령은 빠르게 한곳으로 달려갔다. 그가 달려가는 곳은 한정낭낭이 있는 금검화원이었다. 휘이익! 애절령은 빠르게 금검화원 안으로 날아들었다. 을씨년스럽기는 금검화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곳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호수 속의 정자 안에서 은은한 비파음(琵琶音)이 들려오고 있었다. 띠이― 잉! 띠― 잉! 듣는 이의 눈물이 흐르게 할 듯 구슬픈 비파음……. 정자 가까이 다가든 애절령은 난간에 기대어 비파를 타는 한 중년여인을 보았다. 순간 애절령의 눈 속으로 진한 정(情)이 솟아났다. '낭낭……!' 난간에 기대어 있는 여인은 한정낭낭이었다. 그녀는 넋을 잃은 듯 기계적으로 비파를 퉁기고 있었다. 정녕 서럽고 애절한 비파음이되, 한정낭낭의 지금 심정을 나타내는 것인지 비파음은 무척이나 불규칙했다. 그리고 한정낭낭의 얼굴 위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던 것일까? 한정낭낭의 얼굴은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져 광대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울다가 돌연 웃곤 했다. "흑흑흑……, 까르르르……." 애절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낭낭의 지금 이성을 잃고 있는 상태로구나. 어쩌면 백치가 되었는지도…….' 그는 한정낭낭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한정낭낭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비파음을 퉁겨내며, 무슨 말인가를 뇌까리고 있었다. "까르르르……, 그가 죽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했던 그 사람이, 그리고 가장 증오했던 그 사람이 아이의 행방도 알려주지 않은 채 죽은 것이다. 흐흐흐……." 한정낭낭은 정서적으로 지극히 불안정한 듯했다. 텅빈 공허한 눈, 백치의 눈이 지금 그녀가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애절령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낭낭……." 나직했으나 진기가 실려 있는 음성인지라 한정낭낭의 몸이 움찔했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애절령에게 돌려졌다. 한정낭낭은 애절령을 보았다. 그래도 한정낭낭의 두 눈은 텅 빈 백치의 눈이었다. "누구지? 너는……?" 그녀는 무관심하게 물었다. "낭낭, 접니다. 애절령입니다." "그래, 절령이로구나. 그러나 늦었어." "늦다니요?" "네가 너무 늦게 왔단 말이야. 네가 상대로 하는 그는 이미 죽었으니까……." 뇌정륭을 말하는 것이리라. 순간 한정낭낭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까르르르……, 너는 알고 있느냐? 내가 가장 그를 증오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왜 입니까?" "흐흐흑! 그것은 그와 나 사이에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 애절령은 숨을 죽였다. 군왕정천 뇌정륭과 한정낭낭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니……. 그렇다면 그녀와 뇌정륭은 사랑하는 사이였단 말인가? 한정낭낭의 웃음소리가 갈수록 높아졌다. "까르르르……! 한때나마 나는 그의 강함에 눈이 멀어 그와 정사(情事)를 한 적이 있지. 그 한번의 정사로 인해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애절령은 숨을 죽이면서 물었다. "까르르! 몰라. 그 자가 수하인 회혼(灰魂)을 시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을 훔쳐 갔으니까……! 내가 여기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언제인가 뇌정륭이 자신의 아들을 만날 그 순간에 아들을 되찾기 위함이었는데……, 으흑! 이제는 틀려 버렸어. 뇌정륭은 죽어 버렸단 말이야. 이제는 나의 아들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어." 꽝! 하나의 충격이 애절령의 머리를 강타했다. '회혼을 시켜서 아이를 훔쳐가게 했다고……, 회혼에게……?' 순간적으로 애절령은 전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까르르르! 그 아이는 이제 찾을 수가 없어. 뇌정륭이 죽었는데, 그 아이를 어떻게 만난단 말이냐? 흐흐흑……!" 마구 웃고 울고……, 한정낭낭은 거의 실성하여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애절령은 천천히 손을 퉁겼다. 순간, 마구 실성하여 소리치던 한정낭낭의 몸이 서서히 쓰러졌다. 한정낭낭은 애절령에게 마혈이 집혀 정신을 잃었다. 그녀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애절령은 한정낭낭의 몸을 받아들어 침상 위에 눕혔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뇌호혈에 충격을 가했으며, 한동안 정성을 다해 추궁과혈해 주었다. '우선 안정을 취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상이 되었다. 하되…… 강인한 분이니 금방 정신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애절령은 쓰러진 한정낭낭을 내려다보며 울컥 하는 정을 느껴야 했다. 왜 한정낭낭에게 그런 정을 느끼는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할 일이었다. 어느 순간, 애절령의 두 눈에서 무서운 빛이 뿜어 나왔다. 그의 두 손은 있는 힘껏 움켜쥐어졌다. 우드득! 그의 관절을 꺾으면서 이를 갈 듯이 말했다. "낭낭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혹여 그들과 관계된 아이인지도……." 파파팟! 어느 순간, 애절령의 몸이 빠르게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의 입술이 피가 나도록 악물려져 있었다. '더이상 생각하지 말자. 일단은 회혼을 만나보면 모든 사실을 알 수가 있을 것…….' 애절령의 몸은 금방 금검화원에서 사라져 갔다. |
첫댓글 즐독 ㄳ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