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먼저 레스토랑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며 피자를 먹었다.
이제 아르바이트는 다 끝났다. 두 번 다시 그 추운 창고 속에 들어가
책을 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해방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많은 농담을 했고,
그녀는 어느 때부다 잘 웃었다.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예정대로 디스코테크로
가서 2시간쯤 춤을 추었다.
홀은 적당한 온도였고,
땀 냄새와 누군가에게서 풍겨 나오는 향수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필리핀 밴드가 산타나를 모방하고 있는 듯한 디스코테크였다.
땀이 나면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땀이 마르면 또 춤을 추었다.
가끔씩 무대 위의 조명들이 점멸했다.
조명등 불및 아래서의 그녀는,
창고에 있을때와는 전혀 달라 보였다.
춤추기에 익숙해지자 그녀는 그것을 줄길 수도 있게 되었다.
우리는 지칠때 까지 춤을 추고 나서 그곳을 나왔다.
3월의 밤바람은
아직 쌀쌀했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봄이 느껴졌다.
몸에는 아직
더운 열기가 남아 있어서
우리는 코트를 팔에 걸친채로 정처없이 거리를
걸었다.
게임센터를 기웃거리고,
커피를 마시고, 그리고는 또 걸었다.
봄 방학은 아직도 절반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때
열 아홉살이었다.
걸으려고만 한다면 그대로 다마가와 강변까지라도 걸어
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그날 밤 공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시계가 10시 20분을 가리켰을때, 이제 가야겠다고 그녀가 말했다.
"11시 까지는 가야 하거든요"
그녀는 몹시 미안한 듯 나에게 말했다.
"아주 엄하신가봐? "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요, 오빠가 까다로워요. 보호자인 양하면서.
그렇지만 얹혀사는 형편에 뭐랄 수도 없고."
하지만 그녀가 자기 오빠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말투로 알 수 있었다.
"구두 잊지마" 하고 나는 말했다.
"구두? 아아. 신데렐라 말이군요.. 알았어요 잊지 않을게요."
우리는 신쥬쿠역 계단을 올라가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괜찬다면 전화 번호 좀 가르쳐 주지 않을래?
다음 번에 또 어디든 함께 놀러갔으면 좋겠어"
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화 번호를
일러주었다.
나는 그것을 디스코테크에서 가지고 나온 종이 성냥
뒷면에다 볼펜으로 받아 적었다.
전철이 도착하자 나는 그녀를 먼저 태워 주며
"안녕"하고 말했다.
"즐거웠어. 정말 고마워, 또 만나"
문이 닫히고 전철이 움직이자
나는 옆쪽 플랫품으로 옮겨가 이케부쿠로 방면으로 가는
전철을 기다렸다.
나는 기둥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면서
그날밤의 일을 순서대로 되새겨 보았다.
레스토랑에 들어갔던 일부터 디스코테크,
그리고 산책까지. 나쁘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여학생과 데이트를 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것이
즐거웠고, 그녀 역시 즐거워했다.
우리는 적어도 친구는 될 수 있을 테지.
그녀는 말수가 좀 적은 편이고, 신경질적인 데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본능적으로 호의를 가질 수가 있었다.
나는 구두창으로 담배를 밟아 끄고,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수많은 거리의 소음들이 하나로 뒤섞여
어슴푸레한 어둠속에 희미하게 배여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줄곧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삼켜 버리려고 해도 까끌까끌한 것이 목에 걸려 있어서
넘길 수가 없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나는 어쩐지 황당한 실수를 저지른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것이 뭔가를 알아낸 것은 15분 후였다.
그제야 나는 모든걸 알수 있었다.
그녀를 반대편인 야마테 방면 전철에 태워 보냈던 것이다.
나는 메구로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타고 갔던 전철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지극히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녀를 반대편 전철에다 태웠단 말인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을까?
혹은 , 나는 나 자신의 생각으로 머리속이 꽉 차 있었는지도 모른다.
역의 시계는 10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 집의 문을 닫을 시간까지 도착하진 못할 것이다.
그녀가 빨리 내 실수를 알아차리고,
전철을 제대로 갈아탔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타입이 아니다.
잘못 알고 태워 준 전철이라도, 줄곧 그대로 있을 타입이다.
그리고 그녀는 아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게다.
자기가 전철을 잘못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고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고마고메 역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11시 10분이
좀 지났을때였다.
계단 옆에 서 있는 나를 보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팔을 끌어 벤치에 앉히고 그옆에 앉았다.
그녀는 백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 끈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다리를 앞으로 뻗어 하얀 구두의 코끝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사과했다.
왜 그랬는지 알수 없다고, 깜빡 착각을 했었나 보다고 말했다.
틀림없이 멍청하게 있었기 때문일 거야.
"정말 몰랐어요?" 하그 그녀는 물었다.
"당연하지. 안그러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거 아냐?"
하고 나는 말했다.
"일부러 그런줄 알았어요"
"일부러?"
"화가 난줄 알았다구요"
"화가 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어째서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지? "
"몰라요. 나하고 함께 있는게 따분해서 그랬을 테죠 뭐"
하고 그녀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따분하긴? 함께 있는게 정말 재미있었는걸. 거짓말이 아니야"
"거짓말, 나하고 함께 있는게 뭐가 재미있어요? 그럴리가 없어요.
그건 내가 더 잘알고 있는걸요. 정말 실수로 착각을 했다 하더라도.
그건 사실 마음속으로 그러헥 바라고 있었기 때문일거예요."
나느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쓰지 말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런일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틀림없이 마지막도 아닐텐데, 뭐"
그녀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려
무릎위의 코트에 굴러 떨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잠자코 앉아 있었다.
전철이 몇대나 달려와서 승객들을 토해 놓고 지나갔다.
그들의 모습이 계단위로 사라지자 다시 조용했다
"부탁이예요. 나를 그만 내버려 두세요.
처음에는 나도 뭔가 착각했겠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대로 전철을 타고 있었죠.
그런데 전차가 도쿄 역을 지날 때쯤부터 맥이 풀려버리는 것이었어요.
그때부터 모든게 싫어지고,
다시는 이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는 눈물에 젖은 앞머리칼을 옆으로 쓸어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무슨말이건 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밤바람에 흐트러진 석간 신문이 펄럭이며
플랫폼 끝 쪽으로 날아갔다.
그녀는 다시 눈물에 젖은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넘기며 힘없이 웃었다.
"됐어요. 처음부터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어요.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가 아니야."
그녀가 말하는 장소란, 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암흑의 우주를 돌고 도는 이 지구라는 땅덩어리를
가리키는 것인지 나는 알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나의 무릎위에 올려놓고, 그위에다
내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손바닥은 촉촉했다. 나는 큰 맘먹고 입을 열었다.
"사실 난, 나라는 인간을 누구한테 그럴듯하게
설명하지 못해.
나 자신도 가끔 나라는 인간을 잘 모를때가
있으니까. 내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며, 무엇을 찾고 있는지도,
잘 알 수 없을때가 있어.
그래서 내자신이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 능력을 어떤식으로 사용해야 할지 그것도 모르겠단 말야.
그런 걸 일일이 세심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때때로 정말 두려워지곤 해.
그러다 보면 자기 자신밖에 생각지 못하게 되거든.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아주 고집스러워지는거야.
그러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거든.
그래서 나는 내가 괜찮은 인간이라고 말할 용기가 조금도 없어"
나는 더이상 말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거기서 말을 그치고 말았다.
그녀는 내 말이 계속되기를 기다리듯이 꼼짝 않고 있었다.
여전히
자기의 자기의 구두 코끝만을 응시하며.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역무원이 우리를 무시한채 빗자루로
플랫폼의 먼지를 쓸어 모으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오가는 전철의 횟수도 아주 뜸해졌다.
"난 함께 있는게 정말 즐거웠어.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그리고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너라는 사람이 나한테는 어쩐지 아주 진지하게 생각된단 말이야.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왜 그럴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줄곧, 너와 함께 있고 싶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어.
그래서 나는 늘 그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지.
그 진지하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 하고."
그녀는 얼굴을 들고 한참이나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전철을 일부러 잘못 태워 준건 아니야.
아마 무슨 생각에 골몰해 있었나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전화할께. 어디가서 우리 이야기좀 많이 하자"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눈물 자국을 지우고
나서 두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 고마워요. 정말 미안해요."
"네가 미안할 건 뭐야. 잘못은 내게 있는데."
그리고 그날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혼자 벤치에 남아,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이고,
빈 담배갑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시간은 벌써 12시가 다 되었다.
내가 그날밤에 저지른 두번재 실수를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9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그건 너무나도 바보스럽고, 너무나도 치명적인 잘못이었다.
빈 담배갑과 함께
그녀의 전화 번호가 적힌 종이 성냥까지 함께 버렸던 것이다.
나는 모든 방법을 다해 알아 보고 다녔지만,
아르바이트 하던 곳의 명부에도, 전화 번호부에도,
그녀의 전화 번호는 없었다.
대학 학생과에 문의해 보았지만 알 길이 없었다.
그 이후 그녀하고는
두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녀가 내가 만난 두 번째의 중국인이었다.
=========================================
정말.. 바보스럽고 치명적인 잘못이군..
두번째 실수 읽을때는 한참을 웃었네..
분위기 좋다가.. 저러면..
얼마전.. 무라카미의 ..
그유명한 "상실의 시대" 를 읽고서 .. (이제서야,....-_-:;;)
오호라.. 다른 책도 읽어봐야 겠네 하고서 어제 서점에서
몇권을 집어내었다.
한동안 행복할것 같다..
^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