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제 군수님과 김영태 남해군 의장님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신다고 하는구나..
-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이성복 시인
위 치 : 경남 남해군 남해읍 서변리
홈페이지 : 남해군청 www.namhae.go.kr
개 관 : 경상남도 남서단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통영시, 서쪽은 전라남도의 광양시와 여수시,남쪽은 남해, 북쪽은 하동군, 사천시 등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357㎢, 1읍 9면 220리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남해읍 서변리다.
자연환경 : 소백산맥의 줄기가 남해안까지 뻗어 이어진 섬으로 1973년 남해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었다. 망운산, 금산의 높은 산이 있고, 입현천, 동산천,초음천, 무림천, 다천천, 화천천 등 15개의 하천이 흐르고 있다. 또 82개의 섬이 있는데, 그 가운데 3개는 유인도이고, 나머지 79개는 무인도이다.
역 사
[고대] - 삼한시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으며 신라때인 690년(신문왕10) 전야산 군을 두었고, 757년(경덕왕16) 남해군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 1018년(고려 현종9) 남해현으로 강등되었다.
[조선] 1413년(조선 태종13) 하동현과 합하여 하남현이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하동과 분리되면서 진주목의 금양부곡을 편입하여 해양현이 되었으나, 2년 뒤에 다시 남해현으로 환원하고 현령을두었다.
[근대] - 1895년 남해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905년 창선도를 창선면으로 승격하여 남해군에 편입되었다.
[현대] - 1968년 한려수도가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73년 남해고속도로와 남해 대교가 완공, 개통됨으로써 남해군은 완전히 육지화하여, 본래의 농.수산업 이외에 관광지로도 각광을 받게 되었다.1979년 남해면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86년에 1읍 9면으로 개편되었다.
문 화
민속 - 이 고장에서는 석사놀이가 전해오는데, 일명 '석전' 이라고도 하는 석사놀이는 주로 추석에 씨름대회와 아울러 행하여진다. 지름 10∼15㎝, 높이 2m 정도의 통나무를 세워놓고 15m의 거리에서 주먹만한 돌을 15개씩 가지고 표적에 던져 맞히는 것이다. 다섯번 던져서 적중도가 높은 사람이 이기는데, 준비와 방법이 간단해서 언제라도 할 수 있는 놀이이다.
동제 - 이 고장에서의 동제는 당산신을 모시는 당산제가 대부분이며, 창선면에는 당집이 있지만, 대개 당목을 신수(神樹)로 삼고 있다. 제일은 음력 10월 보름날이나 섣달 그믐날이다. 가천리 바닷가에서는 풍어제를 지내는데, 수미륵, 암미륵이라 하는 남녀를 상징하는 바위가 있어, 음력 10월 23일 마을의 전주민이 모여 평화와 풍어를 비는 제사를 지낸다.
특 산 물 : 남해읍장은 '우시장'과 '마늘시장'으로 이름나 있다.
금산
금산의 원래 산 이름은 보광산이었다.원효스님이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이 산에 보광사를 창건하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보광산이란 이름은 조선 건국과 함께 이성계가 바꾼다. 이성계가 조선의 개국을 앞두고 보광산에서 1백일간 기도를 올렸는데,조선이 자신의 뜻대로 개국되자 그 보답으로 산을 온통 비단으로 덮겠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던 금산은 아름다운 산이다.마치 고운 비단 치마를 입고 있는 것처럼 산이 수려하고 눈부시게 하는 비경이 곳곳에 숨어있다.금산의 제1경인 쌍홍문을 비롯,무려 38경이 해발 681m의 조그마한 산에 자리하고 있다.
금산 봉수
금산 봉수대가 있는 금산(해발681m) 정상은 맑은날 세존도와 대마도까지 보인다. 왜적이 침입을 할 경우 낮에는 이리의 배설물을 피워 올렸고 밤에는 불을 피워 당시의 위급 상황을 즉시 조정에 알렸다. 1894년 고종31년에 현대적인 전화 통신 체제로 바뀌면서 금산봉수대도 폐지되었다.
금산봉수대는 전국의 5거선중 제2거선인 동래부터 시작되는 간선봉수대의 역할을 하였다. 금산봉수대에서 연락하면 가까운 창선 대방산 봉수대로 연결이 되었고, 여기에서 삼천포 각산 봉수대나 전라도 돌산 봉수대로 연락이 되었다.
망대
금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이 곳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인 금산과 남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와 그 광활한 경치가 황홀하다. 장엄한 남해의 일출을 보러 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이곳에 오르면 일망지하(一望之下)에 금산 삼십팔경과 금산을 에워싼 만경창파를 한 눈으로 굽어 볼 수 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던 봉수대(熢燧臺)가 그대로 남아 있다. 사방조망(四方眺望)이 비길 데 없이 넓고 아름답다.
한반도지도
문장과 망대의 계단을 연결하는 넓다란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면 마치 한반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모양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바위의 허리부분이 길게 금이 그어져 있어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가슴 저리게 느껴진다.
금산이 생길 때부터 남북의 분단은 예견된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나도 슬픈 운명이다.
그러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 나라를 건국했듯이 금산의 영기를 받은 누군가가
조국의 통일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계시임에야
금산이 우리 민족의 영산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만든다.
좌선대
좌선대는 원효대사 등 고승들이 수도좌선(修道坐禪)했다는 장소. 실제로 바위 윗부분은 가부좌한 자세로 앉은 사람이 쏙 들어 갈 만큼 파여 있다. 바위꼭대기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산과 하늘과 내가 하나 되는 기분을 느낄수 있어 시도해볼 만하다.
상사바위
금산에서 가장 웅장하고 큰 평면 바위로 이 곳에 서서 바라보는 금산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동쪽으로는 금산의 기암괴석들이 산맥처럼 정상을 향해 뻗어 오르고, 남으로는 미조항, 송정, 상주 등의 해안과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또한 서쪽으로는 서포 김만중 선생의 유배지였던 노도와 남면 해안을 배경으로 마치 금강산의 만불상을 축소해 놓은 듯한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상사바위의 사랑의 전설
조선시대 숙종 임금 때 전라남도 돌산에 사는 청년이 남해로 머슴을 살러왔다. 주인은 자태가 빼어난 과수댁이었다. 돌쇠는 주인마님의 빼어난 자태에 반하여 애간장을 태우다가 그만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약도 없는 병이 상사병인지라 청년은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과수댁은 사람이 없는 금산으로 돌쇠를 불러내었다. 금산의 벼랑에서 돌쇠는 소원대로 상사를 풀게 되었고,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불렀으며, 지금도 상사풀이할 때 썼던 샘이 벼랑에 남아 있다. 이것이 ‘구정암’이다.
죽어서 혼백으로 끌어 안은 여인
곱게 자란 무남독녀를 가진 부자가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하인들 중에 문제를 일으킨 하인은 돌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감히' 주인의 딸을 사랑했다. 엄격한 신분제사회에 돌쇠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슴속에 장작불을 태우는 것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만, 병이 걸렸다. 상사병이었다. 돌쇠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시들시들 앓다가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돌쇠의 혼이 뱀이 되었다. 그리고는 사랑하는 여인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몸을 칭칭감고 풀어주지 않았다. 이승에서 못한 원을 풀려고 한 것이다. 뒤늦게 이것을 본 부모는 굿을 하는 등 별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았으나 돌쇠의 혼백은 여인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수염을 길게 한 노인이 홀연히 부잣집에 나타났다.
"금산에 있는 높은 벼랑에서 굿을 해보시오"
말하고는 역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여인의 부모는 뱀을 감고 있는 딸을 데리고 금산에서 제일 높은 벼랑 위에서 굿을 시작했다. 굿을 마치자 여인을 감고 있던 뱀은 서서히 몸을 풀고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슬픈 전설이다.
쌍홍문
상주 쪽에서 금산 상봉에 이르는 암벽에 두 개의 둥글고 큰 구멍이 문 모양으로 나란히 있는 돌문이다. 이 속에 들어가 보면 속이 비어 있고, 천장 벽에도 구멍이 뚫어져 있어 파란 하늘이 잡힐 듯이 보인다. 옛날 세존이 돌배를 만들어 타고 쌍홍문으로 나가면서 앞바다에 있는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나갔기 때문에 세존도에 해상동굴이 생겼다고 전해온다. 이 문을 들어서면 바로 바위 전시장이다. 굴 속은 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분다.
보리암
보리암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보광사의 부속암자였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보리암은 금산의 비경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거대한 바위들이 서로 엉켜있는 사이사이에는 낙락장송과 산죽들이 청정하게 서 있고 산밑으로는 초승달 모양의 상주해수욕장에서 시작되는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보리암은 우리 나라 3대 기도도량으로 불릴만큼 효험이 높은 기도처로 소문이 나 있어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보리암에 있는 삼층석탑은 신라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이란 돌로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바다를 건너오면서 방향을 잃어 버렸는지, 신기하게도 이 탑 앞에서는 나침반이 제구실을 못한다고 한다. 보리암 삼층석탑 앞은 금산의 제1전망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암자 전체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고,한려수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힐 수 있다. 삼층석탑 옆에는 해수관세음보살상이 인자한 미소를 품고 서 있다.
관세음보살 모시는 '구원의 도량'
보리암은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주는 영험스럽고 자비스런 기도 도량으로 소문난 사찰이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이지만 구원의 종교인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불교의 수행자들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어려운 수행에 힘쓰지만 대부분의 중생은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처님이나 보살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이렇게 중생의 깨달음을 도와주는 불보살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널리 숭배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관세음보살이다.관세음보살은 자비의 화신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있다. 따라서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늘 외우고 항상 마음속에 새겨서 공경하고 예배하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되며 현세에서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한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보리암 앞에는 탑대가 있다.
금산을 오른 관광객이 반드시 들리는 이곳은 금산의 제 1 전망대로서의 명성도 가지고 있다.
멀리 미조해안의 섬들과 송정해수욕장, 상주해수욕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나침반도 방향을 잃어버리는 신기한 석탑
탑대라는 이름은 김수로왕의 황비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으로 쌓았다는 보리암전 삼층석탑이 있어 붙여졌다.
남해 바다를 굽어보며 금산 상봉에 도도히 서 있는 탑, 이 석탑은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돌아오면서 풍량을 잠재우기 위해 배에 파사석(인도에만 있는 석재)을 싣고 무사히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석탑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유명하다. 탑에 나침반을 놓으면 '자기 난리'가 일어나 북쪽을 북쪽이라 가리키지 않고 위치에 따라 나침반의 N극이 동서남북을 모두 돌아가며 가리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탑 근처에 대장봉에서 뻗어 내려온 기가 흐르기 때문에 방향을 못잡는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는 탑 안에 사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마침 문방구에서 사온 나침반을 탑의 1층과 2층 사이에 올려 보았다. N극이 동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 위치를 옮기니 이번에는 서쪽을 가리킨다.
신기함을 잠시 잊고 보리암을 향해 눈을 돌렸다. 보리암의 왼편으로 전개되는 금산 38경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대장봉과 형리암을 필두로 용과 호랑이가 구슬을 가지고 서로 희롱하며 놀고 있는 모양을 가진 용호농주암, 바위의 생김새가 화엄의 화(華)자를 닮아T다하여 이름지어진 화엄봉,
멀리서 보면 달 월(月)자요, 가까이서 보면 날 일(日)자로 보이는 일월봉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그 뒤로 제석신이 내려 놀았다는 제석봉과 멀리 금산 최고의 절경 상사바위도 한눈에 들어온다. 탑대에는 금산 38경의 절경 외엥도 최근에 건립된 해수관음보살이 남해바다를 향해 우뚝 서 있어 금산 보리암에 기도드리러 온 불자들의 절을 받고 있다.
남해분화사랑회 회원들과 함께 찾아보았던 낙산사 홍련암, 여수 향일암에도 역시 비슷한 모양의 해수관음보살이 감로수가 든 병을 들고 중생들을 구하고자 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전국 3대 기도도량
이같은 관음신앙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퍼져 나가기 시작해 서기 6세기말에는 신라 백제 등 삼국에 모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이 시기부터 관음보살상이 대거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삼국유사' 등에도 관음신앙의 기록이 많이 발견된다.
우리나라 관음신앙의 ‘3대 성지’, 즉 3대 기도도량은 남해 보리암,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강화도 보문사이다.이들 세 곳은 모두 신비한 창건설화와 많은 영험담이 전해져 내려오며 오늘날에도 불교 신도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기도도량이다.
금산일출
금산을 오르면 비단을 둘러놓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그 아름다움에다 산행을 할 수 있어 좋고, 일출의 장관을 만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남해에서 1박이라도 할 예정이면 반드시 해뜨기 전 금산에 올라가 보라. 이처럼 기막힌 절경을 어디서 또 볼 수 있단 말인가?
해는 떠오르는 동안만큼은 장난꾸러기처럼 보인다. 한시도 얌전히 있지 못하고 펄떡펄떡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금산에서 제일 높은 망대나 금산 정상 부근의 암자 보리암에서 바라보는 일출 광경은 해와 바다 그리고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금산이 빚는 최고의 조화가 아닐 수 없다.
금산 일출은 사람을 취하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사람들은 마음을 정돈하고 일출을 기다린다. 세상의 힘든 일을 다 잊어버리고 고요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그리고 떠오르는 해를 맞는다. 새날 새 희망의 염원을 실어서...
해뜨기 전 산길을 더듬어 오른 뒤 일출을 보고 나면 이내 출출해진다. 이때 보리암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자리잡은 금산산장(055-862-6060)을 찾아가면 된다. 이 자리에서 50년 동안 밥 장사를 하고 있는 김월신(76)할머니 가족이 내놓는 아침 밥상은 더 이상 꿀맛이 없을 정도다.
상주해수욕장
해수욕장이란 이름 값을 하려면 모래와 숲과 맑은 바다를 가져야 한다. 대부분의 해수욕장들이 한 두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뿐인데, 상주해수욕장은 이 세가지 조건을 완벽히 갖춘 곳이다. 더구나 전국 3대 기도도량 중의 하나인 보리암과 절경을 자랑하는 금산을 하루 코스로 다녀올 수 있다.
해마다 여름 한철만 해도 1백여만명의 손님이 찾는다는 상주해수욕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국 최고의 아름다운 해수욕장이다. 그러나 여름철 관광지는 이젠 옛말이다. 겨울에는 전지훈련을 오는 운동선수들로 백사장이 붐빈다. 잔디구장과 실내체육관만 갖춘다면 오히려 전지훈련장으로 더 각광받을 조건을 갖추고 있다. 봄, 가을에도 수련활동을 갖는 대학생들과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4계절 관광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상주면 상주마을 앞 바다는 천연적인 해수욕장. 뒤편으로 한폭의 병풍처럼 소금강산이라고 일컫는 남해금산의 절경이 둘러싸고 있다. 금산 양편으로 쭉 뻗어내린 산세는 두팔을 벌리고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식을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반월형을 그려 2㎞에 이르는 백사장의 모래는 마치 은가루를 뿌린 듯 부드러워, 주단 위를 걷는 감미로운 감촉을 느끼게 해 준다. 백사장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송림 또한 상주의 자랑이다. 잔잔한 물결과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송림이다.
바다밑은 기복이 없고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수심은 채 한길도 안될 정도로 얕기 때문에 어린이들 물놀이에도 알맞다. 가까운 곳에 강물이나 다른 바다공해에 오염될 것도 없어 바다 밑바닥 모래알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물이 맑고 깨끗하다. 백사장은 48,400평이고, 송림면적은 2천700평, 해수욕이 아니라도 송림에서 시원한 바람으로 땀을 식힐 수 있다. 바다수온은 23℃~25℃, 수심은 0.5m~4m로 적절하게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최상의 관광지이다.
해변에서 마주 보는 나무섬과 돌섬이 남해 먼 바다의 거센 파도를 달래듯 해안을 막고 서 있는데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상주에 저녁 늦게 도착했다면 이곳에서 숙박을 한 뒤, 새벽에 금산에 올라 일출의 장관을 보고, 금산 38경을 두루두루 돌아본 뒤, 시원한 상주해수욕장의 깨끗한 바닷물에서 해수욕을 즐기거나 해변을 산책하면 최상의 여행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물건-미조, 그 환상의 바닷길...
남해섬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해안도로는 단연 물미도로이다. 생태주차공원에서 나와 우회전을 하면 주유소가 이정표 역할을 대신하는 초전 삼거리. 3번 국도의 시작이자 종점인 여기서 좌회전을 하면 물미도로가 시작된 것이다.
초전마을을 지나면 바로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군부대가 보인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풍광 좋은 해안선엔 거의가 군부대가 들어섰다고 한숨 쉬지 말라.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 민족의 슬픔으로 알고 보면, 그것도 좋은 풍경. 물미도로는 해안선 군부대까지 '풍광'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주는 넉넉한 도로다.
따뜻한 남쪽나라'로 온 귀순자 김만철씨가 절벽에 지어놓은 '평화의 집'을 지나면 고개 위에 쉴 수 있는 공터가 있다. 아름다운 미조항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쪽빛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작은 섬과 고깃배들, 숲이 우거진 나선형의 해안선들, 정감있는 풍경에 넋을 잃었다고 운전에 한눈 팔지 말고 이곳에서 쉬어가자. 넋을 잃을 정도라면 차를 세우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차량 통행이 적으니 잠시 길가에 세워도 되지만 위험하다. 물미도로 구간에는 전망 좋은 곳에 작은 꽃밭과 벤치가 놓인 쉼터가 여럿 있으니 이 쉼터를 이용하자.
항도마을 목섬과 딴목섬이 가장 예쁘게 보이는 항도 쉼터는 팔각정과 주차공간을 갖추었다. 탁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다리품을 푸는 전망 좋은 곳이다. 항도마을이 맘에 들어 오든 길을 되돌아 가는 사람도 있다. 주로 목섬에 들어가 트렁크를 열고 낚시도구를 챙기는 사람들이다. 목섬은 제법 입질을 하는 고기들이 많은 곳이다.
일출이 일품이라는 일출가든을 지나면 대지포 쪽샘. 한 군데도 안 쉬고 자동차하고 원수진 사람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도 대지포 못미쳐 내리막길에 있는 이 ‘쪽샘’에서는 차를 잠시 세우기 바란다. 돈 주고 먹는 청량음료 보다 훨씬 맛있다. 바위틈에서 솟는 약수물이 갈증을 말끔히 씻어줄 것이다.
물건 방조 어부림 복받는 숲…복주는 숲, "물건리가 물건은 물건"
* 마을숲
자연으로 이루어진 산림이나 목재생산을 위해 조림된 숲과는 다르다. 특별한 목적아래 보호되거나 혹은 일정한 용도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한 인공숲으로서, 그 마을의 역사나 문화. 신앙등 사람들의 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동네 어귀의 숲, 솟대나 돌탑이나 당집을 감싸안은 숲, 풍수나 비보를 위한 숲, 아름다운 풍광을 조망하기 위한 숲..이 모두가 마을숲이다.
마을 숲은 전국에 걸쳐 고루 분포하고 있는데 특히 강원, 경북의 영동해안과 경북 북부지역, 전남남해안지역, 지리산 주변, 충청도서부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경남지역은 해안과 가까운 남해섬과 부산 그리고 창원에 분포한다. 특히 남해섬은 해안 전체에 마을숲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마을숲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물건리가 물건은 물건이라고 마을 주민들은 자랑한다. 물건리는 우선 규모가 만만치 않다. 현재 220가구에 55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인근 마을도 행정명이 물건1-2리라 '물건' 자가 붙은 마을을 다 합치면 상당한 세력이 된다.경제력도 좋다.
이 마을 해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물건 방조어부림은 요리상을 받는 숲이다. 400년이 되었다는 마을 숲은 앞바다에 고기떼가 득실거리게 했다. 이 숲에 요리상이 올려지는 것은 매년 음력 10월 열닷새날.이팝나무, 모감주나무, 팽나무, 푸조나무, 참느릅나무 등 나무로 구성된 이 숲엔 상만 바쳐지지 않는다.두고 두고 자시라는 뜻인지 밥을 창호지에 싸 묻는 '밥 무덤'도 바쳐진다.
물건리 숲에 사람이 가장 많이 꾀는 것은 여름 휴가철이다.그러나 나무들이 나체를 드러내는 가을, 겨울도 찾을만 하다.잎을 모두 떨군 나무를 흔히 앙상하다고 표현하지만 물건리 숲엔 맞지 않는 표현이다.3백살 이상 먹은 나무들의 근육이 너무 우람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넘어서니 '물건'이다. 아래로 수풀이 한눈에 들어온다. 물건에서 내가 볼 것은 바로 저 수풀이다. 저 수풀은 1959년에 천연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된 '물건 방조림'이다. 1만여 그루의 나무가 해안선을 따라 1.5km에 걸쳐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 장관이었다. 다산기슭에 마을이 있고, 마을 앞에 논이 있고, 논 앞에 수풀이 있고, 수풀 앞에 둥근 해안선을 따라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수풀이 논과 마을을 바다로부터 막아준다고 하여 그 이름이 '방조림'이다.
나는 브레이크를 삑삑 잡아가면서 내리막을 슬슬 내려갔다. 가까이 가니 엄청나게 오래 되고 큰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찼다. 대개 활엽수다. 활엽수도 방조림이 되는 줄을 여기 와서 알게 되었다. 안내판을 보니 이런 나무도 있나 싶다. 누리장나무, 가마귀베개나무, 길마가지나무, 가마귀밥여름나무, 윤노리나무, 나무도 아름답고 이름도 아름답다.
이 마을에, ' 이 숲을 해치면 마을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에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썼다. 그 해 난리가 났다. 폭풍으로 논과 집들이 결딴 났던 것이다. 비로소 이 숲이 저절로 생긴 숲이 아닌 줄을 알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한 그루라도 베어내면 백미 다섯 말 씩 벌로 마을에 바쳐야 한다."그렇게 지켜온 수풀이다. 물건은 중학교가 있는 큰 마을이다. 물건이 유달리 큰 것은 아마 저 수풀 때문이리라.방조림 앞은 몽돌 해수욕장이다. 그러나 돌이 거칠어 해수욕장으로 쓰기가 어려울 듯하다.그래서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다. 이 수풀을 위하여 다행스런 일이다.
이 마을 이름 '물건'을 한자로 쓰면 '勿巾'이다. 뜻을 풀면 '두건이 없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그런 뜻으로 만들어진 지명은 아니다. '勿'은 마을 뒷산 모양이'勿'자처럼 닮았다고 하여 딴 글자이고, '巾'은 병풍처럼 볼록한 뒷산에서 한 가운데로 시내가 하나 흐르고 있다고 하여 딴 글자다. 한자를 공부한 사람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만든 지명이다. 그러나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 뜻은 한자에서 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소리는 우리소리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놓친 것이다. 마치 사람 이름을 짓는데, 다스릴 '치(治)'자와 나라 '국(國)'자를 따서 김 씨 성에 갖다 붙이는 격이다. 붙인 사람은 김치국(김치국), '김 씨가 나라를 다스린다.'라고 멋있게 이름 지었지만, 듣는 사람은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국 마시고 있네'의 그 김치국을 생각할 터이니, 그 사람의 운수가 좋을 턱이 없다. 물건중학교를 지나서 물건을 빠져 나왔다
원시와 현대의 절묘한 앙상블 (원시어업죽방렴)
죽방렴과 어우러져 물속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 빨갛고 예쁜 창선교를 보고는 이내 감탄사를 아끼지 않는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지족해협에 건설된 창선교는 창선면 지족마을과 삼동면 지족마을을 잇는 길이 440m의 다리로 95년 12월20일 개통되었다.
원시성이 그대로 간직된 살아있는 죽방렴은 길이 10m 정도의 참나무로 된 말목을 개펄에 박아 주렴처럼 엮어 만든다. 조류가 흘러오는 방향을 향해 V자형으로 벌려 원시적으로 고기를 잡는 방법으로, 지족 해협에 24통이 남아 전국에서 가장 많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다. 이곳에서 잡힌 생선은 최고의 횟감이다. 물살 빠른 바다에 사는 고기는 탄력성이 높아 맛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냉동 생선이나 참치통조림, 주어지는 먹이로 배를 채워 유영을 잃어버린 가두리 횟감 따위에 익숙한 사람들은 죽방렴 멸치회를 맛보는 것만으로도 남해 답사에 만족할 것이다.
죽방렴은 지족마을에서 하차하여 창선교 위에서 보면 양쪽에 모두 설치되어 구경하기가 좋고, 해안을 따라가면서 볼 수도 있다. 지족해협의 양쪽 해안은 낚시가 잘되고 고기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창선교와 죽방렴이 엮어내는 현대와 원시의 절묘한 조화는 최고의 볼거리가 된다. 가능하면 일몰시간에 맞추어 보자. 죽방렴 사이로 떨어지는 일몰은 탄성을 자아내게 할 것이다.
창선교의 일몰, 최적의 촬영장소임......
창선삼천포대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길을 보려 사천 각산산성에 올랐습니다. 얼마 전 건설교통부에서 뽑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으뜸으로 꼽힌 '창선.삼천포대교'입니다.
해질녘 산성에 오르니 발 아래 한려수도가 손에 잡힐 듯 펼쳐집니다. 쪽빛 일렁이는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한 폭의 산수화만 같습니다. 창선.삼천포대교가 그 한려수도를 가로지릅니다. 사천에서 모개섬, 초양섬, 늑도를 건너 창선으로 이어진 제각각의 다리들이 서로 뽐내듯 오색 빛을 토해 내놓습니다. 넘실대는 검푸른 바다마저 물감 푼 듯 아롱거립니다. 마치 길이 아니라 오색빛 바다를 가로질러 내달리는 것만 같습니다.
길이 아름답다는 것은 그 길만 아름답다는 뜻은 아닐 겝니다. 아무리 뛰어난 설계와 건축 공법으로 만든 구조물이라도 그것을 둘러싼 풍광과 어우러져야 비로소 아름답다 할 수 있습니다.
정이라곤 없을 것 같은 시멘트와 쇠로 만든 건축물이 섬과 바다와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되었으니, 우리 땅의 아름다운 길 중 으뜸으로 꼽힌 게 어찌 보면 당연한 듯합니다.
십여 년 전 남해로 가는 길을 잘못 들어 삼천포로 빠진 적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철선에 차를 싣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흔히들 일이 엉뚱하게 될 때 '삼천포로 빠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젠 '가장 아름다운 길로 간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듯합니다.
휴가철입니다. 우리나라 여행지마다 아름다운 길이 즐비합니다. 오가는 여행길에 만나는 아름다운 길을 카메라에 담아보세요. 사진 속의 그 길이 잊지 못할 추억의 길로 가슴에 남게 됩니다.
5백 살 먹은 왕 후박나무
* 왕후박 나무의 전설
조선초 이 마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고기잡이를 하며 외로이 살았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큰 고기를 한 마리 잡아왔는데, 뱃속에서 씨앗이 나왔다. 이상하게 여겨 마당에 심었는데, 나무가 크게 자라 사람들이 모여와 살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신령스런 나무에 해마다 섣달 그믐에 동제를 지내고 풍어와 풍년을 빌어 왔다.
왕후박나무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 때 병사들이 이 나무 그늘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쉬어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때 이 마을은 온통 대나무들로 뒤덮여 있었는데, 노량해전이 벌어지기 바로 전 이순신 장군은 이곳 대나무를 잘라 떼 배에 싣고 갔다. 노량해전이 벌어지자 떼 배의 대나무를 짚불에 태웠다. '빵! 빵!' 대나무 마디 터지는 소리에 왜병들이 넋을 잃고 도망을 쳤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거룩한 향기가 이곳 왕후박나무에도 베어 있구나. 집안이 어려우면 어진 며느리가 생각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충신이 생각난다고 하였던가. 어지러운 세상, 우리는 지금 충신이 그립다.
세상이 혼탁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였다. 옛날에는 오랑캐들이 총칼로 성스런 이 땅을 짓밟았지만, 지금은 자본과 기술로 이 땅을 짓밟는다. 옛날에는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오랑캐만 막으면 되었지만, 지금은 눈이 푸른 오랑캐까지 감당해야만 되는 세상이다.
성세에는 성군인 나오고 난세에는 영웅이 나온다. 성세에 나온 성군으로는 세종대왕이 있고, 난세에 나온 영웅으로는 이순신 장군이 있다. 조선말엽에는 성군도 영웅도 나오지 아니 하였다. 그리하여 나라를 왜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조선말엽, 인물은 숨어 버리고 뱀과 올빼미의 무리들이 설치고 다녔다. 나라가 위태로운 지금, 성군과 영웅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이순신 장군의 거룩한 향기가 이곳 왕후박나무에도 베어 있구나
남해최고의 절집 용문사
남해에는 유명한 '보리암'이 있다. 사찰보다 훨씬 큰 암자이고, 기도발이 좋다고 해서 전국의 불자들이 몰려든다. 그리하여 조용한 분위기를 기대하기는 무리다.
남해에는 그보다야 화려하지 않지만 그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을 지닌 절집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용문사다. 화려한 바위의 향연을 내품는 보리암이 부자집 미인이라면 용문사는 순수하고 질박한 시골 여인네다. 그 만큼 편안하고 부담이 없다. 세속을 잊고 몸만 내맡기면 그만이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해가는 가람 배치는 감동 그 자체다. 경내로 들어갈수록 선의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분위기 때문이다.
용문사에 오르려면 미륵이 탄생하여 맨 처음 몸을 씻을 용의 연못이 있다는 용소마을을 가로질러 호구산을 올라가야한다. 이 곳이 남해에서 가장 습한 곳이라고 한다. 그 소리를 듣기 전까지 시원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젠 음산함으로 바뀐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다.
섬 답지 않게 나무가 우거지고 수량 또한 풍부하다. 동네 아이들은 벌써 훌러덩 웃옷을 벗고 더위를 씻어내고 있다. 싱긋 미소를 던저주고 길을 재촉한다. 자연이 만들어낸 물의 화음을 맞춰 뚜벅 뚜벅 걸었다. 뱀처럼 휘감아 돌아가는 오솔길이 환상적이다.
가장 먼저 맞이 해주는 것이 장승이다. 비바람에 머리털이 삐쭉 올라 섰지만 생긋 웃는 모습에서 남해인의 천진난만함을 읽을 수 있다.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장승이란다. 그 옆엔 우렁차게 생긴 남근석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불교에 관한 것이 아니라 토속 신앙의 산물들이다. 권위보다 민초와 함께 하는 모습이 정겨워보인다
듬직한 자연석 바위 위에 비가 서 있다. 바위에는 이름으로 가득차 있다. 이장 면장 군수이름까지 있으니....요새 말하면 낙서라고 할 수도있는데..그나마 돌이끼가 그걸 가려 주어 한시름 놓는다..
바로 옆에 내따뜻한 감동을 심어준 부도밭이 나온다. 10여기의 부도가 올망졸망 모여서 시원한 눈맛을 즐기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 손 끝에 닿는 돌 촉감이 부드럽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멋진 부도를 발견했다. 하단부에 사람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월정사부도비 거북머리가 사람얼굴과 닮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부도에 이렇게 사람 얼굴이 여럿 나온 것은 처음 본다. 그 표정 하나하가 제각각이다.
생전에 중생을 교화하지 못한 미련 때문일까 아니면 스님의 덕을 받은 민초들의 얼굴일까?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가며 나름대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본다.
용문사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부분이 바로 절묘한 가람배치다. 대개 사찰의 축선이 일직선인데 반해 이곳은 용이름을 반영했는지 길 자체가 용이 휘감아 도는 모습이다. 일주문을 거치면 계곡이 가로 막는다. 둥근 아치형 다리를 건너 천왕각을만나고 다시 계곡을 건너 봉서루가 닿는다. 누각 밑에서 계단을 오르면서 대웅전의 자태가 서서히 드러난다.
이런 축선이야말로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신선함을 수혈받는다. 물소리 때문에 귀가 즐겁다. 둥근 다리를 건너면서 세속을 털어낸다. 산문에 빨려들어 가면서 어느새 깨끗하게 정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계곡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한여름에도 발이 시릴 정도다.
천왕각건물..위에서 내리 눌린 모습을 하고 있다..기둥이 안쏠림을 하여 더 그렇게 보인다..가운데 기둥은 벽속에 스며들었다.
사천왕의 발 밑에는 악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양반과 탐관오리가 누어있다. 백성을 잘 다스리라는 민초들의 염원이 적극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보다 탐관오리가 잘 생겨서 그렇게 나쁜 짓을 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봉서루 밑에는 '구시통'이 길게 잘리 잡고 있다. 100여명의 식기를 한꺼번에 씻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다. 그 규모만 봐도 얼마나 사세가 컸는지 알 수 있다. 아마 왜구가 쳐들어 왔을 때는 승병들이 밥을 먹고 식기를 이곳에 씻었을거다.
남해안의 많은 사찰에서 스님들이 칼과 창을 들었다. 여수 흥국사가 그렇고 고성 옥천사가 그렇다. 그리하여 절집 배치가 대단히 폐쇄적이다. 언제든지 적과 싸울 태세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용문사 역시 그렇다. 사방으로 바위 벼랑이 높고 험하여 성채처럼 이루어져 있어 유의양이란 사람은 '산사람이 문을 막았으면 일만 사람이 열지 못할 땅' 이라고 할 정도다.남해는 알다시피 군사적 요충지다. 동해에서 남해를 통해 서해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해로이기 때문이다. 고려 때 관음포 싸움이 있었으며 임진왜란때는 충무공이 순국할 정도로 놓칠 수 없는 군사적 요충지다.
숙종때는 守國寺로 지정되어왕실로부터 보호를 받는 사찰이며 금패와 번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대나무밭 사이에 놓여진 돌계단이 참 아늑하다. 딱딱한 돌이 모여 생동감있는 구조물로 바꾸어 놓았다.밟을수록 돌이 부드럽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대웅전이 환하게 빛을 내고 있다. 신라 원효대사가 금산을 찾아와 보광사를 짓고 그 산을 보광산이라 명하고, 금산에 있던 보광사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절집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호구산의 능선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다. 돌계단을 올라 화려한 포작을 감상한다. 용이 들어가는 산문답게용조각이 하늘을 수 놓는다.
단청이 바래 그 속살이 드러났지만 그 윤곽만으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법당 앞 쪽 공포에 용머리를 조각했고, 뒤쪽 공포에 용꼬리를 달았다. 그리하여 이 법당은 용이 이끌고 가는 반양용선임을 보여준다.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말한다.반야용선이 앵강만을 거쳐 남해바다를 유영하다가 세존도에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내부역시 용으로 가득차 있다. 화려한 닫집밑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오른쪽의 명부전에 꼭 들려야한다. 용문사는 우리나라 3대 지장도량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고풍스런 유물은 찾을 수 없지만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
용문사의 돌계단과 돌담은 참 아늑하다. 질박한 남해사람의 심성을 보여주고 있다. 작은 돌담안에는 공양에 쓸 된장 항아리가 넉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현실을 떠나 산사에 몸을 맡기고픈 충동을 느낀 적이 있을것이다. 바로 용문사란 절이 그런 곳이다. 마음속의 남아있는 휴식처라고 할까? 입구 계곡부터 시작해서 꼭대기 텃밭까지 욕심이 없다. 겸양만을 배울 뿐이다. 그저 걷기만 해도 가슴속에 시원한 생명수가 쏟아진다.
용문사..다시 가고픈 절집이다. 그 오솔길에 몸을 의탁해 보라.
남면해안도로
사람 발길 뜸한 덜 때묻은 곳을 찾아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재미까지 곁들이며 달릴 수 있는 곳, 초보운전자까지 환영하는 도로가 남면 해안도로이다. <남면 해안도로는 월포해수욕장에서 시작해서 서상매립지에서 끝난다.
곧추 세운 밭언덕 돌담과 황토가 주는 정감, 섬과 어우러진 오목조목한 해안선이 이어지다가는 아득한 지평선이 열린다. 차를 타고 꼬불꼬불한 나선형 산자락을 따라 해안선을 달리는 드라이브 또한 백미다.
그리고 저녁시간이 되면 아무 갯마을이던 선창가 횟집에 들러 해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회를 먹어보라. 일몰이 정신없이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 남면 해안도로이다.
앵강고개 삼거리에서 남면쪽으로 들어가면 멀리 언덕 위의 통나무집, 가족휴양촌에서 내려다 보는 곳이 월포해수욕장이다. 언덕위 통나무집 방향으로 차를 돌리면 여기서부터 남면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월포해수욕장을 끼고 도는데 통나무집에 자꾸 눈길이 간다. 애라, 내친김에 올라가보자 아스팔트 포장이 된 길을 올라가니 최고의 절경에 통나무집 10동이 자리잡고 있다.
색시처럼 조용한 선구, 항촌 바다에 하릴없이 밀려온 파도,비탈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집들과 다랑이논의 풍광이 빼어난 가천마을, 바닷가에 내려가 사람을 압도하는 거대한 미륵불을 만나보지 않을 수 있으랴.
색시처럼 조용한 선구 항촌 바다에 하릴없이 밀려온 파도가 자갈 굴리는 소리는 어떤 음악회에서도 맛 볼 수 없는 감동을 준다. 그리고 일몰이 다가온다면 홍현 근처에서 기다려라. 낙조가 아름다운 해안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도로 위에 멋진 차들이 서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없다. 모두 해안에 내려가 있는 것이다. 저마다 잘 아는 입질코스를 찾아 내려간 것이다. 남면 해안도로는 다름 아닌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아무데나 차를 세우고 내려가도 입질을 한다. 단, 쓰레기를 버리지는 말아 주세용...
여느해수욕장 뺨치는 선구 몽돌해변을 지나면 가족 단위로 많이 찾는다는 아담한 사촌해수욕장이 보이고, 구불구불 산길을 타고 올라가다 다시 바다가 보이는 곳이 평산마을. 아직까지도 남해의 회맛을 못본 사람은 이곳에서 쉬었다 가도록. 시간을 오후 3시쯤에 맞추었다면 평산까지 달려라. 운이 좋으면 해녀들이 갓 잡아온 멍게, 해삼, 전복을 살 수 있다..
평산마을 지나 양지마을에서 좌회전을 한 뒤 고개를 넘어 상가마을에서 다시 죄회전을 하면 덕월갯벌을 지나 구미숲이 보인다. 고개를 하나 넘으면 장항마을. 어린이와 동반한 가족 여행은 해수풀장이 있는 서면 장항해수욕장이 좋다. 장항마을에서 또 작은 고개를 넘으면 서상매립지의 광활한 잔디밭이 이어진다. 어느새 환상적인 남면해안도로 여행이 끝난 것이다. 서상항에는 횟집과 여관이 있다. 이곳에서 하루 쉬면서 여정을 음미해 보자.
서포 김만중과 노도
서포는 잘 알려진대로 유복자였고 ‘구운몽’, ꡐ사씨남정기ꡑ등의 소설을 남긴 문학가였다. 주류 양반사회에서 천대받던 소설을 부여잡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문학관도 놀랍지만 그는 그마저도 한글로 작품을 썼다. 그 시절 주류사회 출신으로서 우리말 우리글 숭상론을 주창한 서포의 문학관은 다분히 민중적이다.
사씨남정기는 숙종이 희빈장씨에게 빠져 인현황후를 폐위시켜 내친 일을 풍자한 내용이고, 구운몽은 홀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소설로 여덟명의 선녀와 함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그것은 결국은 덧없는 꿈임을 깨닫고 수도하여 마침내 극락으로 가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가 한국 옛 문학사의 전기를 마련한 이 작품을 썼다고 알려진 곳이 바로 이 섬 속의 섬, 노도다.
김만중은 숙종 연간에 저 유명한 장희빈사건을 둘러싸고 현실정치에 깊숙히 개입한 서인 출신의 정치가였다. 이미 몇 차례 유배를 경험한 그는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했던 숙종의 뜻에 격렬히 반대하다가 남해에 가극안치(加棘安置) 당하는 형벌을 받는다. 이는 가시울타리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이라는 뜻으로 유배지의 가옥 안에만 머물라는 말이다. 섬 속의 섬으로, 다시 그 섬 속의 초옥 속에 가둔 잔인한 벌이었다.
나중에 이 형벌은 완화되었다.
노도 사람들은 서포를 묵고노자할배ꡑ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스스로 생업 꾸리기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바닷가에 나와 하염없이 앉았거나 집필하는데만 열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아냥처럼 느껴지긴 해도 꽤 친숙하게 들리는 별칭이다.
“아득한 섬들은 구름이 내려앉은 바다 건너에 있고, 방장 봉래봉은 가까이 있도다.
육친인 형제 숙질과는 떨어져 홀로 외롭게 살건만 남들은 나를 신선으로 알겠구나. ”
-김만중-
지난 1997년 남해문화원이 나서 서포가 손수 우물을 파고 살았다는 초옥터와 그가 잠시 묻혔던 무덤을 정비했고 서포 김만중유허비도 세워졌다
벽련마을에서 통통배를 타면 10여채의 가옥이 몰려있는 포구에 닿는다. 사형보다 더 무서운 가극안치(加棘安置, 가시울타리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와 죽음보다 더한 절망의 절해고도에 막 당도한 김만중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선착장 정면에 선 '김만중의 유허'라는 비석을 바라보지만 아무런 말이 없다. 이 비석은 남해청년회의소에서 김만중의 문학정신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김만중은 병사한 뒤, 유언에 따라 노도의 산등성이에 묻혔다가 후에 후손들이 이장해 갔다고 한다. 묘가 있던 자리를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노지나 묏등'이라 부른다. 묘소터는 유허비에서 불과 150m 떨어진 해안 언덕배기에 있다. 이곳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다시 150m를 더 들어가 해안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포가 살던 집터가 있다고 했다. 집터 근처에는 서포가 마음을 달래던 옹달샘이 하나 있다. 서포는 여기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온종일 바다만 응시하며 한숨을 쉬던 노인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노자먹고 할배'라 불렀다.
서포 김만중은 숙종 15년(1689년)에 이곳으로 귀양 왔다가 숙종 18년에 이곳에서 죽었다. 3년을 여기에서 살았으며 그 기간 동안 <구운몽>과 <서포만필>을 지었다. 조선시대의 위대한 소설가 김만중이 이곳 노도에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쓰러져 갔는가? 나는 그것을 보기 위해서 이 노도를 찾았다.
우물가 앉았다.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겨우살이 보라색 꽃을 피우며 한껏 때깔을 부려본다. 노인이 옛부터 전해지는 우물이라고 하였다. 어릴 때 소를 먹으러 오면 토끼처럼 우물가에서 놀았다고 한다. 지금도 샘은 변함없이 솟는다. 하지만 이제 물을 먹는 사람은 없고, 개구리들 만이 드나들 뿐이다.
가천마을
가천마을은 항촌마을이나 홍현마을에서 태평양에 닿은 망망대해와 깎아지른 절벽이 장관을 이룬 해안도로 구빗길을 돌다보면, 여기도 사람이 살고 있나 싶을 정도로 급격한 경사를 이룬 소울산(망산) 응봉산 골짜기에 옴쏙하니 들어 앉아 있다.
가천마을을 답사한 우리문화유산연구소 이형권 소장을 비롯한 문화전문가들은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예술로 승화된 계단식 다랭이 논, 억겁의 세월 바닷물에 말끔히 씻겨 눈처럼 새하얘진 바위와 쪽빛 바다가 이룬 풍광이 정말 멋스럽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마을 안에 있는 암수바위 또한 보존해야 할 훌륭한 문화자산이라 남해에서는 관광휴양지로 개발해야 할 가치가 놓은 곳"이라고 적극 추천했다.
가천마을의 문화자산 가운데 첫번째로 꼽히는 것은 자연과 잘 조화를 이룬 최고의 예술품인 계단식 다랭이 논. 주민들은 바다로 내리 지르는 소울산 응봉산 비탈을 깎아 논을 만들었다. 삿갓을 씌우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논이라 하여 삿갓배미라 부르는 달갱이로부터 봇물이 실한 세마지기 가웃 논까지 100층이 넘는 논배미들이 층계를 이룬 모습은 참말로 장관이다.
천수답이 아니더라도 위에서부터 물을 대야 고루 물을 댈 수 있다는 슬기로 척박한 비탈에 석축을 쌓아 논을 만들고, 그 석축은 한뼘이라도 더 땅을 넓히려는 주민들의 집념으로 안으로 기운 것 없이 바짝 곧추 섰으며 그 석축을 따라 농군의 심성을 닮은 듯 유연한 곡선을 그린 논두렁이 이룬 장관은 한 폭의 그림이다.
가천암수바위
영조 27년(1751) 현령이었던 조광징의 꿈에 백발을 휘날리며 한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에 묻혀 있는데 우마의 통행이 잦아 일신이 불편해 견디기가 어려우니 나를 일으켜 주면 필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현령이 관원을 모아 가천으로 가 꿈에 본 것과 똑 같은 지세가 있어 땅을 파자 남자의 성기를 닮은 형상인 높이 5.8m, 둘레1.5m인 거대한 수바위와 아기를 밴 배부른 여인의 형상인 높이 3.9m, 둘레2.5m인 암바위가 나왔다. 현령은 암바위는 누운 그대로 두고 수바위는 일으켜 세워 미륵불로 봉안하고 제사를 올렸다.
선돌의 형상으로 숫바위는 남성의 성기형상이며, 암바위는 아기를 밴 여인의 형상이다. 또한 가천 미륵불이 있는 가천마을 앞에 탁트인 망망대해와 옹기종기한 계단식 논밭이 선조들의 고된 삶과 숙연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미륵불이 발견된 음력10월23일 자정이면 생선이나 육고기 없이 과일만 차려 불교식 제사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을 빌고 있다.
암수바위는 주민들뿐만 아니라 어선들이 고기잡이를 나갈 때 예를 올리는 용왕신이며 불임여성, 병자가족, 입시생을 둔 학부모들이 기도하기 위해 찾는 민간신앙처라고 전한다, 조선시대 남아선호사상이 나은 성기숭배의 대상물에서 바다와 마을의 수호신, 탄압 받던 민초들이 해방된 세상을 기원하던 미륵불인 가천 암수바위는 남해의 귀중한 문화자산이다.
아직도 참게가 살고 있는 맑은 개울이 마을을 가로질러 작은 폭포를 이루는 곳에 태고부터 파도에 씻겨 하얘진 화강암 바위들이 눈부신 가천해안의 절경 또한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운 장관이다.
노량해전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남해대교에서 약4km정도 19번 국도를 따라 남해읍을 향하여 들어오면 고현면 차면이라는 마을이 나타나고 국도 우측 편으로 숙연한 모습의 "성웅 이충무공전몰유허"라는 입석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나라를 구하고 순국한 곳이다.
1598년 8월18일 7년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병으로 죽으면서 "조선을 침략한 병사는 모두 철군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에 따라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소서행장과 남해의 종의지, 사천의 시마즈는 11월10일에 창선도에 집결하여 철군하기로 약속한다.
11월10일. 종의지와 시마즈는 약속을 지켰으나 소서행장은 조명연합함대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시마즈군과 종의지군은 함대를 재편성하여 소서행장을 구하기 위해 11월 18일 왜군 함대 500여척을 이끌고 소서행장의 퇴로를 열기 위해 노량해협을 향하여 출발한다. 이것이 노량해전의 시작이었다.
당시 조명연합 함대의 명나라함대는 관음포 반대편, 이순신 함대는 관음포에 주둔, 양 해협을 지키고 있었다. 11월18일 밤12시경. 이순신은 원수기 밑에서 청수로 손을 씻고 백단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린다.
"나라를 위해 적을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나이다"
11월19일 새벽2시부터 전투가 시작됐다. 이순신 함대의 뛰어난 전술로 왜선 200여척이 격파됐다. 왜선 50여척은 도망을 가고 나머지 함선은 관음포에서 퇴로가 차단되어 최후의 발악을 하던 중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퇴각하던 왜군이 쏜 총에 맞아 서거했다.
관음포 이충모공 전몰유허지
"지금은 전투가 한창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말라. 한 놈의 왜적도 살려 보내선 안된다." 선조 31년(1598) 11월19일 새벽, 노량 앞바다에 집결하여 도망치려고 최후의 발악을 하던 왜적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눈 앞에 둔 이순신 장군은 54세의 일기로 장렬히 전사한다. 이곳 남해 관음포에서...
이락사의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거치른 물결을 건너 충렬사에 이르니 고결한 충혼이 머무는 곳 바다는 깊구나. 나라를 위해 대의에 죽었으니 어찌 한이 남으리오. 타고났던 천성인 것을 공께서 가신 뒤 아직도 바다 속 어룡들은 노기에 차 있고, 산야의 온갖 금수들은 슬픔 못잊어 울고 있도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234년이 지난 1832년, 이순신의 8대손인 통제사 이항권(李恒權)이 충무공의 진충보국(盡忠報國)의 뜻을 기리는 유허비를 세웠다. 1973년 6월 사적 제232호로 지정되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라고 부르게 되었다. 약 800m 길이의 반도형 야산의 남방을 관음포라 하는데, 이순신 장군께서 적의 유탄에 맞아 돌아가신 이후로 이 곳을 이락포라 불러왔으며 이 곳 비각을 이락사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진다.1991년에 첨망대 누각을 세웠으며, 1998년 12월 16일에 이충무공께서 유언한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내용의 한문 유언비를 이락사 앞뜰에 세웠다.
관음포가 한눈에 들어오는 첨망대에 앉아 잠시 쉬는 것이 좋다. 이런 풍광 좋은 곳에 누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급히 사당만 보지 말고 한 번 걸어가 보자. 첨망대 아래로 내려가면 임진란 최대의 격전이었던 노량해전을 기록한 노량해전도를 보며 충무공의 충절을 되새겨 보자.
바다 건너 화동화력 굴뚝은 뭉게구름 같은 연기를 내뿜고, 맨살을 드러낸 갯벌에는 김 양식장 뒤로 바지락을 잡는 아낙들이 엎드려 있는 모습도 종종 볼수 있다.
관음포만
관음포는 고려시대 이전의 명칭이다. 남해인들은 이 곳을 감히 호국성지(護國聖地)라고 부른다. 역사적인 사실이 있다.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이 남해 고현지역에서 판각되었다. 불력으로 외적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전체 민중의 힘을 모았던 대 역사가 남해에서 이뤄진 것이다.
팔만대장경 중 종경록 권27에 ꡒ정미세 고려국 분사 남해대장도감ꡓ이라는 간기가 있다. 또한 정안(鄭晏. ?~1251)은 사재를 털어 남해에 정림사(定林社)를 짓고 팔만대장경판 간행에 참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판 판각에 필요한 수많은 목재를 운송하는데는 해상경로를 이용하기에 관음포가 가장 적합한 곳이었던 것이다.
멀리 하동이 보이고 육지 사이로 쩍 갈라진 곳이 하동 포구다. 저기서 섬진강 물이 흘러나와 밀물을 타면 관음포로 밀려든다. 대장경판의 목재가 그렇게 섬진강물을 따라 관음포로 들어왔을 것이고, 왜적들이 그렇게 흘러들어 왔을 것이다.
관음포라고 하는 고기잡는 통발, 이 통발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고려말 해도원수 정지 장군이었다. 정지가 병선 마흔일곱 척을 거느리고 나주, 목포에 머무르고 있을 때, 왜구의 큰배 일백 이십척이 경상도에 나타났다. 바닷가 마을이 겁에 떨었고 합포(마산)원수 류만수가 도움을 청했다.
정지는 밤낮으로 달려가면서 스스로 노를 저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더욱 힘을 내어 배를 저었다. 섬진강 나루에 이르러 합포의 병사들을 끌어 모을 때, 왜구는 이미 남해 관음포에 이르렀다.
또한 고려말 우왕9년(1383)에 해도원수 정지(鄭地. 1347~1391)장군의 남해 관음포대첩이 있었던 곳이다. 왜선 120척이 남해로 쳐들어오자 정지장군이 이곳 관음포에서 화포를 쏘아 적선 17척을 불살랐다. 혼이 난 왜구들은 한동안 감히 쳐들어올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이때 사용한 화포는 최무선(崔茂宣. 1326~1395)이 발명한 것으로 관음포에서 두 번째, 이동하는 해상전투로는 첫 번째로 사용했다.
1592년부터 1598년 사이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관음포에서 임진왜란을 끝내는 노량해전을 1598년 11월19일에 치르고 장렬히 전사했다. 그는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지극히 무인 다운 유언을 이곳에 남겼다.“
이 바다가 예사로운 바다인가! 팔만대장경 판의 목재가 여물어졌던 바다, 국난을 구한 두 차례의 해전이 치루어졌던 바다, 그런 바다가 메꾸어져 뭍으로 변하였으니, '옛것을 통해 새것을 안다'고 하는 말은 이제 헛말이 되었도다.
저기 이내기 끝에 이락사가 있고 탑동에 정지석탑이 있다고 하고, 누가 이곳에서 그렇게 처참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을 기억할까? 밀물이 들어오는 철벅철벅 물이 방파제에 부딪친다. 그 소리가 정녕 장군의 노호소리 같기도 하고, 이 자리에서 죽어간 병사들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다.
이 바다에서 두 차례 대해전이 벌어졌다. 모두 우리 수군이 대승을 거둔 해전이고, 왜구가 낭패를 본 싸움이다. 우리 수군이 대승을 거둔 데에는 이 바다가 한 몫을 했다. 관음포가 한몫을 할 수 있는 데는 다른 바다가 가질 수 없는 모양과 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진욱의 [역사 속의 유배지 답사기] 중에서
충렬사 -"이 충무공을 3개월간 모셨던 사당"
충렬사는 노량해전의 치열했던 전투가 떠오르고, 노량 앞바다의 푸른 물결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노량마을 해안 언덕빼기 울창한 숲 속에 자리잡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이 충무공은 관음포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 아산으로 운구가 옮기기 전에 3개월간 이곳에 안치했다.
충무공의 순국을 슬프게 느끼던 남해사람 김여빈과 고승후가 이 충무공이 순국한지 35년이 지난 1633년에 초가집 한 칸을 사당으로 건립하고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되자 남해현령 이정건이 사당 앞에 충민공비를 세웠다. 이순신장군이 순국한지 45년 후인 1643년에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58년. 어사 민정중이 통제사 정익에게 사당을 신축하도록 해서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사당 앞에 있는 "유명조선국삼도통제사 증시충무이공 묘비"는 1660년에 숭록대부 의정부 우찬성 송시열이 글을 짓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쓴 것이다. 현종 때에는 임금이 직접 쓴 충렬사 현판이 하사되었다. 이렇게 조정에서는 이곳 남해 충렬사를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인정하였고 세월은 흘러 순국 195년이 지난 후인 1793년에 이곳에 충무공비를 세우고 충민공비를 땅속에 묻었다. 충무공은 이 해에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남해 충렬사는 그 뒤에도 계속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었으나 고종8년인 1871년에 향사,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사당은 허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922년에 윤기섭과 고준홍이 자기집 재산으로 사우3칸을 새로 지어 제사를 지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학의 대가이자 사림 정치의 영수인 송시열, 송준길이 한 수군 장수를 위하여 나란히 글을 짓고 쓴 것이 놀랍다. 두 송씨는 효종, 현종, 숙종 때 서인의 우두머리였다. 임진왜란 때 서인들이 죽이고자 했던 한 무인을 두고 서인의 우두머리들이 추모의 빗글을 지었으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순신 장군은 동인의 우두머리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가 된 사람이다. 당색으로 말하자면 동인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런 탓으로 임진왜란 때 서인들에게 걸려 목이 달아날 뻔했다. 전쟁 중에 서인의 우두머리 유두수, 이산해 등이 이순신 장군을 불충죄로 걸어 목을 자르자고 하였던 것이다. 정탁의 상소로 겨우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이순신 장군으로서는 통탄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스스로 죽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도망갈 곳을 틔워주고 적을 쫓아라'는 것이 병법이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그런 병법을 무시하고 사생결단으로 왜적을 잡아 족쳤다. 아예 관음포에 몰아 넣고 몰죽음을 시키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다. 그 날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전투에 나서는 장수가 갑옷을 입지 않다니, 죽기로 마음을 먹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이순신 장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적은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정에도 있다는 것을. 전쟁이 끝나면 영웅이 아니라 역적이 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전쟁 중에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전쟁이 끝난 뒤에 무엇을 바라고 살려주겠는가. 장군은 차라리 죽어서 영웅이 되리라 마음먹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그리 터무니 없는 이야기는 아닐 듯 싶다.
거북선
남해의 관문인 남해대교를 건너다보면 대교좌측 아래쪽 노량해안가에 목재로 건조된 길이 34.2m, 폭10.3m의 대형거북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거북선은 1999년 12월 해군본부로부터 무상으로 인수하여 이곳에 배치되었고 현재 남해군에서 관리운영하며 관광객에게 공개하고 있다.
주변의 관광명소로는 거북선 바로 앞쪽에 사적지인 충렬사가 위치해있고 고현 방면으로 5분거리에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일명 이락사)가 있어 이들을 연계하여 관광한다면 역사교육장으로 손색이 없다. 또한, 인근 노량해안도로를 돌면서 빼어난 해안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빠질 수 없는 관광포인트이다.
거북선 운영을 살펴보면 2000년 초, 사업비 330백만원으로 잔교․부잔교 및 결속시설 설치, 거북선의 내부시설을 보완, 실물형태의 장수, 군졸 등을 제작 비치하고 임진왜란때 사용했던 신호연, 이순신장군의 일대기를 사진과 액자로 비치해 관광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밖에 현자총통, 지자총통 등 임진왜란시 사용했던 무기 30여종 139점을 한눈에 관람할 수 있다. 거북선 밖으로 나오면 부대시설로 부잔교 위에 역사체험코너가 설치되어있어 관광객들이 장군복, 군졸복 등을 입고 거북선과 남해대교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다. 그리고 매년 4월에는 노량일대에서 "충무공노량해전승첩제"가 열려 이충무공의 업적을 기리는 한편 관광객과 어우러지는 축제가 연출된다.
자암 김구
자암 김구(1488-1534)는 조선 중종 때 문신이다. 조선 4대 서예가의 한사람으로 대흥현감 계문의 아들이다. 김구는 성종19년(1488)에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대유이다. 연산군 9년(1503)에 한성시에 급제했고 중종 8년(1513)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 홍문관 부제학(정3품)에 올랐으나 기묘사화(중종14년 1519)로 개혁파 조광조와 연루되어 고초를 겪게 된다.
자암은 처음에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후, 죄목이 추가되어 남해로 유배지를 옮겼다. 그는 남해 노량에서 13년이란 긴 세월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남해찬가'라 할 수 있는 경기체가 '화전별곡'을 지었다. 그는 삼남일대의 유림과 남해지역의 유림들과도 가까운 교우관계를 지냈다.
화전별곡
화전별곡은 남해찬가 속에 귀양지에서 느끼는 울분과 한탄이 베어나온다. 그것은 개혁의 꿈이 좌절한데서 오는 분노와 자신을 버린 임금에 대한 원통함일 것이다.
제1장에서 남해를 망운산이 있고 호걸준걸이 모인 섬이라고 찬양했다.
"하늘 끝, 땅 끝, 한 점 신선의 섬,
왼쪽은 망운산, 오른쪽은 금산, 봉냇물 고냇물 흐르고,
산천이 기묘하게 빼어나 호걸준걸 모여나니, 인물 번성하네
위, 하늘 남쪽 아름다운 경치, 그것이 어떠합니까?
풍류주색 즐기는 한 시절 인걸, 풍류주색 즐기는 한 시절 인걸.
위, 나까지 몇 분입니까? "
그리고 2장부터 제4장까지는 선비들이 먹고 노는 모습을 질펀하게 그리고 있다.
"박교수 술에 취해 이리저리 손 휘젓는 버릇"
"몸맵시 잘 빠진 학비, 못생긴 옥지"
"소반도 두드리며 간혹 잔대도 치고"
"녹파주, 소국주, 황금빛 닭고기, 흰 문어..."
그러나 마지막 6장에 이르면 탄식으로 넘어 간다. 경치에 취해 질펀하게 먹고 마셔 보지만, 본심은 숨길 수 없는 것이었던가? 아,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단 말인가.
"서울의 번화함이야, 너는 부러우냐?
지체 높은 벼슬아치의 붉은 대문, 술과 고기가 너는 좋으냐?
돌밭에 초가집, 사시사철 풍년이라.
향촌의 모임, 나는 좋아하노라!
서울은 멀고, 몸은 외로운 섬 남해에 웅크리고 앉아 향리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 향촌의 모임, 나는 좋구나, 나는 만족한다. 그러나 어찌 한탄이 없으리, 김구에겐 초라한 귀양살이만 남아 있다.
대원군 척화비
마을 한가운데 내려오면 척화비가 서있다. 조선 후기 쇄국정책 따라 전국 곳곳에 세워졌던 척화비 가운데 하나로 추정되는데,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는 크기와 규모가 달라 지방관청이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ꡒ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ꡓ라는 주문(主文)을 큰 글자로 새기고, ꡒ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ꡓ라고 작은 글자로 새겼다.
다른 척화비와의 차이점은 가첨석(지붕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점이다. 대원군의 권세가 이 남쪽 끝까지 뻗쳤다니 그저 대단할 따름이다.
고춧가루 서말 먹고도 현해탄 건너는 "똥배기질"
동편하늘이 여명으로 물들면 사람들은 거룻배에 몸을 싣고 파도를 가르며 여수로 갔다. 여수에서 그들은 "똥장군"을 지고 집집마다 다니며 뒷간을 말끔히 치웠다. 그렇게 얻은 똥으로 만선이 되면 섬으로 돌아왔다. 더러는 풍랑을 만나 심연 속으로 애써 모은 똥과 함께 기약없는 저승길을 떠나기도 했다. 섬사람들은 여수에서 얻어 온 똥으로 이듬해 보리농사의 거름으로 썼다. 사람들은 똥을 얻으러 다니던 거룻배를 "남해똥배"라 불렸다.
남해 똥배는 사라졌지만 험준한 산비탈을 일구며 살던 남해사람들의 "똥배기질"은 지금도 여전하다. 겨울에는 마늘과 보리농사로, 그 논에서 여름이면 벼가 자라고, 손이 한가하다 싶으면 바다로 나간다. "육지 산사람 셋이 남해 송장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는, "고추가루 서말을 먹고 현해탄을 건넌다"는 그 억세고 근면한 기질이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처절한 저항에서 잉태한 것이 아닐까?
고된 삶을 강요한 것이 어디 자연 뿐이랴.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사대부들의 유배행렬의 종착지는 노량나루를 건너 남해도였다. 유배의 설움을 글로 달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는, 누더기 옷을 입어도 명색이 양반인 그들의 뒤치닥꺼리에 섬 사람들의 삭신은 녹아났다. 이를 사려 물어도 살 수 없는 섬이었고, 바다는 삶터가 아니라 고립과 배고픔으로 칭칭 동여맨 동아줄이었다.
남해는 눈물과 한숨으로 지켜낸 섬이다. 모진 목숨 어쩌지 못하고 손이 갈퀴가 되도록 바다를, 밭을 일구며 살아온 이들의 탄식으로 남해도가 있다. 하여 황금노을에 불든 죽방렴을 감탄하기 전에, 어여쁜 바다가 무시로 안겨드는 해안을 따라 흥에 겨워 쏘다니기 전에, 마늘밭에서 무심한 눈길을 던지는 "똥배기질"의 진한 삶의 역사를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의 서러운 눈물을 닦아주고, 닫힌 가슴을 다독거려 줄 의무가 우리에겐 있다.
* 남해군사랑 홈페이지
http://cafe.daum.net/namhai *답사문의: 모놀과 정수 주인장
이종원(016-219-6001)
다음카페 모놀과 정수(
http://cafe.daum.net/monol4) 남해 답사 자료집
다음카페 모놀과 정수(
http://cafe.daum.net/monol4) 제 50차 정기답사 자료집
첫댓글 시랑해님.사모님과즐거운여행되길..멋진모습담아오길기대할께...;^^
gggggggㅎㅎㅎ~`신혼여행 되나 했더니만~~손목도 못잡아 봤데이~~
고럼고럼사모님께 안쫓겨 날려면 그렇게 해야지..아름다운 추억 많이 만드셔여
ㅋㅋㅋㅋㅋ~`고럼~`컴컴한 구석해서 기시기 했지롱~~~
뭬야?거시기가 거시기 하믄 거시기 되는뎅~~ㅋㅋㅋ
즐거운 여행과 조은 추억 많이 담아와....
남해 보리암에서 로또하나 직어달라고 기도하고 왔으니 기달려 봐~~^^&
지금쯤 한참 맛난 점심먹겠구나 어부인 세심하게 보살펴 드리고 .....남해........ 곧 그 모습 볼수 있겠지 오솔길과의 뜨거운 차한잔도.....잘 댜녀와
솔길이가 나한테 붙들려서 오밤중에 집으로 갔데이
어머님만뵙고가마 잘다녀이게....
~`울 모친이 말씀하더구나~`내가 없는데도 모친께 인사하러 와주어 고맙워~~^^*
어머님과 함께 사는줄 몰랐네
모놀이 뭐냐? 놀이동상에 레일이 모놀이냐? 아무튼 만나보면 알겠지. 전국에 귀하신 몸들이 남해를 방문한다니 군수님들이 환영인사차 하는 행사인가? 다 좋다. 나는 친구가 온다니 좋다. 저녁에 만나자. 낯에는 손님과 선약이 있어서 못가고 저녁에 가지. 제수씨 옷 사입혀 왔어? 어짜피 해수욕장에서는 옷을 벗어야 하는데 어쩐다. 아무튼 몸매를 보던 옷을 보던 이따가 보자.
좋은 추억 많이 만들어오세요.....
땡큐우~~~-^
아름다운 추억많이 만들어오시길.....
~~고마워^^*
옆지기 잘모시고 그동안 외박만 한것 만회하는 즐거운 여행이 되길...
~~이번에 200점 따 놓았어~~
잘갔다 와서 남해 멋진 풍경 마니 올려라
많이 담아왔지~~보리암에서 남해 상주해수욕장이 한누에 내려다 보이는 바다풍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