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0일 아침편지
조선 정부는 일본에 남은 김옥균을 체포해서 인도해 달라고 계속해 요청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이용했던 인물을 손바닥 뒤집듯이 사지로 내몰 순 없어도 그렇다고 눈에 띄게 보호해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김옥균은 한때 태평양 위의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에 보내졌다가 다시 홋카이도 삿포로로 옮겨지기도 했다. 일본 민간에선 ‘조선의 쑨원(孫文)’이라며 김옥균을 뜨겁게 맞이했다. 이런 큰 환영을 받았어도 9년여에 걸친 망명 생활 중 조선 개혁을 위해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낙천주의자였던 김옥균도 점점 좌절감에 빠졌다. 그래서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청의 실력자 리훙장을 만나 조선에서 손을 떼라는 데서 이를 찾으려 했다. 이 담판을 위해 그는 상하이로 건너갔는데, 이 여정이 자신을 죽이기 위한 조선 정부의 음모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의 총에 맞아 44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유력한 집안의 자식들이다. 쿠데타를 도모하지 않았으면 특권층 자녀로 부족함이 없이 누리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힘든 길을 택했다가 불우하게 삶을 마쳤다. 이들은 누리면서 사는 쉬운 길을 버리고, 도전하며 개혁하는 어려운 길을 택했으니 바른길을 걸은 셈이다. 도쿄 아오야먀 레이엔(靑山靈園)의 외국인 묘지에 있는 김옥균 묘비에 이렇게 쓰여있다.
비상한 재주를 지니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으나 비상한 공을 이루지 못한 채 비상하게 죽은 김옥균 공이여
https://www.youtube.com/watch?v=Ncm07IaB_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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