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감성에 글을 적으면 생길 수 있는 리스크 중 하나는 그 감성이 사라졌을때 이불킥을 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있다. (나중에는 부끄러워서 다신 이 글을 읽지 않을 수도...) 혹은 나중에 이 글이 내가 무언가를 잘 못하고 있을때 부메랑이 되어 날 공격할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늘 살면서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짧게라도 지금의 감정을 남기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조심스레 적어본다.
잘 알려져 있는 스포츠 영화 "머니볼"에서 주인공이자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팀의 단장 빌리 빈은 그의 팀이 정규시즌 2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고도 그닥 기뻐하지 않는다. 냉소적인 태도는 그의 주변인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반응에 빌리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시즌의 마지막 경기를 지게 된다면, 결국 사람들은 우리를 유령취급 할거야."
시즌의 마지막 경기를 이기는 것, 다시 말해 우승 - 이걸 해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는 것이 스포츠의 본질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처음 몸담았던 LCK 팀의 단장으로 4년이라는 시간을 지냈는데, 그 4년의 기간 동안 나는 하루하루 빌리처럼 시즌의 마지막 경기를 이길 수 있는 팀을 만드려고 노력했다. 우리 팀의 시즌의 마지막 경기가 끝난 순간, 나는 그 뒤 남은 경기들은 보지 않으며 아파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7년간 취미로 늘 챙겨보던 월드 챔피언십을 막상 내 본업이 되자 보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는 나도 저 자리를 관전이 아니라 경험하리라는 바램을 속에 묻어두었다.
2022년 겨울, 전 회사를 나오게 되오면서 T1의 단장직이 마침 공석이였고, 어떻게 하다보니 얘기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안웅기 COO님과 조 마쉬 대표님이 나를 좋게 생각해주어 오퍼를 준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때를 돌이켜보면 참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작년 12월에 T1의 단장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2023년은 꼭 T1의 해로, T1과 Faker선수의 네번째 우승을, 제오구케의 첫번째 우승을 만드는 여정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주어진 자리에서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하려고 했던 것 같다.
T1의 선수단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훌륭한 선수들과 함께 했기에 나도 그만큼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고, 그들에게 부끄러운 단장이 되지 않게 많은 동기부여를 줬다. 그들의 재능과 노력을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본 사람으로서 우리 팀은 슬럼프가 있어도 분명히 다시 돌아올 수 있을거라는 믿음이 컸다. 그 과정속에서 있었던 많은 얘기를 담기엔 너무 장황할것 같아 생략하지만, 결국 T1은 2023년 시즌의 마지막 경기를 이기게 되었다. T1이 7년만에, 그것도 한국에서 네번째 월드 챔피언십 챔피언이 된 것이다.
월즈를 우승하던 밤 팀 회식이 있었고, 호텔에 돌아와서 정말 기뻐야 했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김정균 감독님은 우승하고 난 밤에 두 다리 뻗고 침대에 누웠을때 가장 행복했다고 하셨는데, 난 그러지 못했다. 세 명의 선수들의 계약이 약 28시간 뒤에 만료가 되는 상황이였다. 조금의 기뻐할 시간도 없이 바로 지금의 이 선수단을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의심이 계속 들었다.
T1의 올해 스토브리그의 진행 과정이나 상세 내용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꺼내는게 너무나도 조심스러워 그 어떤 언급도 하려하지 않지만... 그래도 한마디만 짧게 얘기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과정의 끝에서 내년 함께하게 하기로 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김정균 감독, 제오페구케, 그리고 임재현 코치까지 팀을 생각해주고 함께 하고 싶어한 마음이 너무나도 컸기에 기적과도 같이 다시 함께 하는 결과가 나온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는 SKT 왕조를 지도자로서 일궈낸 김정균 감독님이 다시 돌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감격스럽다. 어떻게 보면 T1의 단장으로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T1의 많은 팬분들이 기뻐해주실 거라는 생각에 보람도 느낀다.
덕업일치를 이루고 게임단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월드 챔피언십을 우승하면 정말 꼭 해보고 싶었던 것 중 사소한 것 한 가지가 있었다. 정말 웃기게 들릴 수 있는 얘기지만 이 곳 PGR21에 글 하나 적어보고 싶었다. 아시는 분들이 있을까 모르겠지만 나는 이 커뮤니티에서 20년째 눈팅하고, 한때는 글을 쓰고, 지금도 여전히 자주 오는 사이트다. 나는 홍진호 선수의 팬으로 스타리그를 즐겨 봤었는데, 가끔 내가 응원글을 쓰면 그에 대해서 좋은 반응을 주고 공감해주시는 많은 분들의 관심을 자양분 삼아 계속해서 e스포츠를 더 즐겨봤던것 같다. 내가 늘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던 e스포츠를 더 좋아하게 만들어준 이 곳에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다. 업계인이 된 이후로는 조심스러워 글 하나 남기지 못했는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겜덕후가 지금 내가 아닐까 생각한다. 혹시라도 글 속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만한 부분이 있다고 느껴지셨다면 너그럽게 봐주시면 좋겠다.
나는 내년에도 우리 T1은 시즌의 마지막 경기를 이길 수 있을거라고 믿어보려 한다. 쉬운 여정은 아니겠지만, 가치 있는 도전일거라 생각한다. 계속 T1을 응원해주고, 무엇보다도 읽고 있는 모든 분들이 e스포츠를 계속 좋아해주시면 좋겠다.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고, 그 변화 속에 e스포츠가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2023년 11월 24일에
T1 단장 정회윤 드림
첫댓글 소감문이 이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