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무서운 음모(陰謀) 칠월(七月). 한 여름의 폭양은 대지를 후끈한 열기로 달아오르게 했다. 산야 (山野)의 초목조차도 불타는 폭양에 기를 펴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양자강(楊子江)의 물줄기는 무더위도 아랑곳 없이 도도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장강 을 남하(南下)하는 관도(官道)도 양자강의 물줄기를 끼고 열기 속에 뻗어 있었다. 이같이 무섭게 더운 날에는 여행자조차 드문 법이다. 그런데 한 점의 움직임조차 없던 관도에 문득 한 대의 쌍두마차 (雙頭馬車)가 나타났다. 마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 다가들었다. 두두두두두......! 자욱한 황진을 구름같이 일으키며 양자강을 끼고 남하하는 쌍두마 차의 지붕 위에는 화려한 금색으로 장식된 표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 깃발에는 한 자루의 검은 도(刀)와 혈수(血手)가 그려져 있었 고 마차의 앞과 뒤로는 십여 명의 기마가 위풍당당하게 호위하고 있었다. 깃발에는 한 자루의 섬찟한 마도(魔刀)와 혈수(血手)가 수놓아져 있었다. 혈수는 보기에도 끔찍했다. 피묻은 손이 활짝 펼쳐져 있어 공포스런 느낌을 주었 다. 마도혈수(魔刀血手)라면 당금 사도무림의 최절정고수인 일제이황 삼존사마(一帝二皇三尊四魔) 중 사마(四魔)의 일인인 마도혈수 공손령의 독문표기였다. 두두두두두......! 마차와 십여 기의 인마는 곧 양자강 연안으로 다가들었다. 마차 위에는 나란히 앉은 두 인물이 보였는데 두 명 다 흑의를 입 었으며 창백하고 음산한 얼굴의 중년인들이었다. 흑풍이살(黑風二煞)로 불리우는 그들은 마도장의 절정고수이자 섬 서 일대에서 악명 높은 흑도의 고수들이었다. 양자강의 도도한 물결이 보이자 오른쪽에 앉은 대살(大煞)이 빗자루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 다. "저 강만 건너면 곧 호남성(湖南省)이다. 그곳부터는 천마성의 세 력 범위이니 안심할 수가 있다." 옆에 앉은 이살(二煞)은 만족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공자께서 천마성주의 제자가 되신다면 앞으로 우리 마도 장은 상상도 못할 만큼 강대해질 것이오." 그러자 마차 안에서 약간 흥분섞인 낭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살, 양자강에 다 왔느냐?" 그 말에 이살은 문제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공자님! 오늘 해가 지기 전에 강을 건너 편히 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한 줄기 음산무비한 웃음이 그들의 간담을 오그라들게 했다. "흐흐흐흐! 강을 건너겠다고? 꿈꾸지 마라. 너희들은 영원히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다." 지옥의 유부계(幽府界)에서 들려오는 음성인 양 흑풍이살은 절로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대살은 곧 사나운 표정으로 버럭 외쳤다. "누구냐? 어떤 놈이 감히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느냐?" 그러자 양 쪽 언덕으로부터 음산한 괴소가 울려퍼졌다. "크흐흐흐흐......." 휙--- 휙---! 이십여 명의 복면인들이 언덕으로부터 속속 신형을 날리더니 마차 와 인마의 앞을 가로막았다. 히히힝! 덜컹! 마차는 급격히 멈추어 섰고 백의복면인들이 삽시에 마차 앞을 가로 막았다. 그들 이십여 명은 한결같이 전신에서 으스스한 한기를 발산시켰 다. 또한 발에 뿌리라도 내린 듯 신형을 굳히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대낮에 유령목상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모습이었다. 더우기 복면 사 이로 쏘아져 나오는 두 눈빛마저 모두 얼음장같아 흑풍이살은 가슴이 쿵 내려 앉는 듯 했 다. '모두 고수다!' 그들은 바짝 긴장하며 대열을 멈추었다. 복면인들을 향해 대살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험, 친구들은 어느 도상의 인물들이오? 우리는 섬서 마도장의 사람들이오." 그는 마도장의 위세를 내세우려 했다. 그러나 한가운데에 서 있던 백의의 복면인이 차갑게 대꾸했다. "마도장이건 뭐건 알 바 아니다! 우리는 단지 한 가지가 필요할 뿐이다." 대살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무엇을 원하오?" 복면인은 으스스하게 잘라 말했다. "공손기란 애송이 놈의 목이다." "뭣이?" 흑풍이살은 눈을 부릅뜨며 마차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 위에 탄 십여 명의 고수들도 일제히 병기를 뽑아들었고 장내는 삽시에 험악한 공기에 휩싸였다. 대살은 억지로 화를 눌러참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우리 공자님이 누군지 아느냐? 바로 마도장의 소장주이 자 천마성주의 기명제자이시다." 그러나 복면인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크흐흐흐흐! 바로 그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손을 번쩍 쳐들었다. "얘들아, 쳐라!"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복면인들의 신형이 번쩍 사방으로 흩어졌다. "크악......!" 비명이 터지기 시작했다. 복면인들의 수법은 잔혹하고 악랄했으며 게다가 전광석화같이 빨랐다. 십여 명의 마도장 고수들은 뽑아든 병기를 미처 휘두를 틈도 없이 목이 날아가고, 허리가 동강나고,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들은 마상에서 폭포같은 피를 뿜으며 굴러 떨어졌다. 실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으으! 이, 이럴 수가......?" 흑풍이살은 공포에 질려 전신을 떨었다. 이때 우두머리 복면인이 그들에게 다가오며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흑풍이살, 네 놈들은 오늘 운이 없다고 생각해라." 우웅! 복면인은 쌍장을 괴이하게 뻗어 왔다. 그러나 흑풍이살도 섬서 일 대에서는 제법 손꼽는 고수였다. 그들은 냉소하며 대응했다. 챙! 이살이 먼저 허리춤의 괴형장검을 뽑으며 즉시 검화를 발출시켰 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시야에서 복면인의 종적이 유령과 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살에게는 놀라고 어쩌고 할 틈조차 없었다. "으악!"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복부에는 복면인의 우수(右手)가 깊숙히 박히고 있었다. 부......욱!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이살의 복부가 뜯기며 복면인이 손을 뽑 아내자 시뻘건 창자가 뽑혀 나왔다. "끄으으......." 이살은 눈알을 부릅뜨며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가 바닥으로 처박힌 순간 복면인은 우수 에 시뻘건 창자를 움켜쥔 채 대살을 향해 들어 올리며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흐흐흐! 다음은 너다!" 대살의 안색이 완전히 횟빛이 되어 버렸다. "그...... 그 신법은 유령미종보(幽靈迷縱步)! 당신은 그럼 유명부(幽冥府)에서 왔소?" 복면인의 눈에서 섬뜩한 살광이 흘러나왔다. "흐흐흐! 죽기 전에 가르쳐 주지. 노부는 유명부 제 삼 위(三位) 의 고수 유령인마(幽靈人魔)다." 대살은 대경실색했다. "유령인...... 으악!" 그의 머리가 한 순간에 잘 익은 수박처럼 으깨어졌다. 유령인마의 좌수가 그의 머리를 내리쳤던 것이다. 그 동작은 그야말로 유령과 같았다. 복면인, 즉 유령인마는 마차 위에 올라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도장의 인물들은 모두 죽었 고 복면인들은 여전히 발에 뿌리가 내린듯 바닥에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유령인마는 만족한 빛을 떠올리더니 고개를 돌려 마차의 휘장을 노려 보았다. "흐흐흐! 공손기, 쥐새끼처럼 움츠리고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와라!" 그러자 마차 안에서 떨리는 청년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유령인마.... 그대는 천마성주의 보복이 두렵지 않소?" 유령인마는 조소를 흘렸다. "크흐흐흐! 애송이 놈, 성주께서는 이 일을 영원히 모를 것이다. 목격자가 없는 한 누가 알겠느냐?" 그때였다. 꽝---! 돌연 반대쪽 마차의 벽이 박살나며 한 줄기 홍영(紅影)이 빛살처럼 양자강 쪽으로 날아갔 다. 유령인마는 흠칫했으나 곧 음소를 흘렸다. "흐흐흐! 네 놈이 내 손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스스......! 그의 신형이 다시 연기처럼 흐려졌다. 그야말로 유령과 같은 신법이었다. "헉!" 마차를 탈출한 홍영은 기겁을 하며 급히 멈추었다. 어느새 눈 앞 에 인영이 흐릿하게 어리더니 유령인마가 앞을 가로막아 선 것이었다. 홍영은 한 명의 청년이었다. 그는 전신에 붉은 장삼을 입었으며 영준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나이는 십팔 세 가량으로 아직은 앳되어 보였다. 고대의 송옥(宋玉)이나 반안(潘安)이 무색할 정도의 미남 청년이 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에는 공포로 인해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으으으......." 그는 뒤로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유령인마는 두 손을 서서히 치켜들며 잔혹하게 말했다. "흐흐...! 널 천마성의 폭풍(暴風) 속에 끼어들게 한 네 놈의 아비를 원망해라!" 쉬익......! 두 줄기 혈선(血線)이 쭉 뻗는 순간이었다. "으아악!" 홍의청년, 즉 공손기는 단지 목이 죄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그러 나 그의 목은 이미 몸체로부터 댕강 잘려져 허공으로 피보라를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크흐흐흐......!" 유령인마가 손을 거두자 날아갔던 공손기의 목이 한 가닥 흡인력 에 의해 이끌려 되돌아 왔다. 그는 공손기의 머리칼을 움켜 쥐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공손기는 목과 몸통이 분리된 채 머리만 남아 유령인마의 손에 대롱대롱 쥐어져 있었다. 실로 무참한 일이었다. 유령인마는 공손기의 수급을 흔들어 보더니 주위에 늘어선 이십여 명의 복면인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들 흔적을 지워라!" 복면인들은 즉시 움직였다. 그들은 품 속에서 옥병을 꺼내더니 바 닥에 널브러진 시체에 가루약을 뿌렸다. 푸시시식....... 시체들은 홍색 연기를 내며 잠시 후에는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유령인마는 품 속에서 똑같이 생긴 약병을 꺼내 들고 있던 공손기 의 머리에 뿌렸다. 그러자 공손기의 머리도 금세 핏물로 화해 녹아 버리고 말았다. 십여 명의 시체들과 말(馬)은 몇 방울의 혈수(血水)로 화해 버린 것이다. 그곳에는 이제 빈 마차와 시체가 남긴 옷가지만 남아 있었다. 그 러나 그것도 복면인들에 의해 양자강의 검푸른 물결 속으로 던져지고 말았다. "가자!" 유령인마는 신형을 날렸다. 이십여 명의 복면인들도 유령같은 신 법으로 그의 뒤를 따라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들이 사라진 지 불과 반각 후, 그곳에 한 중년인(中年 人)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전신에 백의를 걸친 인상이 청수한 자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입가에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는 유령인마 일행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대체 천마성주의 세 제자 중 누가 유령인마를 시켜 날 죽이라고 명령했을까?" 무슨 말인가? 중년인의 말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중 년인의 눈에서는 싸늘한 냉광이 뻗쳐 나왔다. "좋다! 지금은 내가 힘이 없으니 참는다. 그러나 언제든 내 힘이 커지는 날 이 원한은 반드시 갚아준다." 그의 얼굴은 삽시에 살기로 뒤덮혔다. "유령인마, 유령부! 흐흐! 네 놈들도 마찬가지다. 훗날 제일 먼저 유령인마를 죽이고, 그 다음으로 유명부를 산산조각내겠다." "소주." 중년인의 뒤로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전신에 흑의를 입은 한 명의 꼽추노인이었다. 꼽추노인이 뒤에 시립하자 중년인은 돌아서며 그에게 말했다. "흑타(黑駝). 그대의 말을 듣길 정말 잘했소. 천마성의 세 놈들도 설마 내가 변장을 하고 천마성으로 갈 줄은 짐작도 못할 것이오." 흑타는 검푸른 얼굴에 괴이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지요. 더군다나 그 공손기마저 가짜일 줄은 더욱 더 생각지 못할 것입니다." 뜻밖의 말에 중년인은 흠칫 놀랐다. "흑타, 그게 무슨...? 으아악!" 그는 보았다. 한 자루의 은빛 비수(匕首)가 흑타의 몸에서 뻗어 나와 자신의 목으로 깊숙히 박혀드는 것을. "끄윽......! 흑타...? 왜... 그대가......?" 중년인은 허우적대며 비틀거렸다. 그의 목에는 비수가 자루째 박 혀 뒷덜미까지 뚫고 튀어 나와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자신 에게 벌어진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흑타가 허리를 쭉 편 것은 그때였다. 우두둑! 하는 뼈마디 부딪치는 음향과 함께 꼽추등이 쑥 들어가더니 흑타 는 건장한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내 오늘을 위해 네 곁에서 지난 십 년 간 모든 충성을 다 바쳤다." 중년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크윽! 너, 너는 누구냐?" 흑타는 태연히 얼굴을 쓱 문질렀다. "강호에서는 나를 일컬어 흑삼객(黑衫客)이라 부른다." 중년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흐... 흑삼객? 이럴 수가......." 그의 입과 코로 피가 터져 나왔다. "너... 너는 천마성주의 제자를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 텐데......?" 흑삼객은 냉랭하게 잘라 말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없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등 뒤에서 바람소리가 일며 두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한 명은 뚱뚱하고 만면에 웃음이 배어 있는 호인(好人)형의 금포노인이었다. 또 한 사람은 놀랍게도 얼마 전 유령인마에게 죽임을 당했던 홍의청년 공손기였다. 누가 보나 조금도 틀림없는 마도장의 소장주 공손기였다. 금포노인은 물론 우내삼괴 중의 우두머리인 소면불심 사도성유였다. "헉...! 이럴 수가!" 중년인은 홍의청년을 보고는 만면에 경악의 빛을 떠올렸다. 이때 옆에 있던 흑삼객이 달려들어 중년인의 얼굴에서 한 장의 얇은 면구(面具)를 벗겨냈다. 그러자 드러난 얼굴은 영준한 십팔 세 청년, 즉 또 하나의 공손기 가 아닌가? 중년인이야 말로 천하에 단 한 사람뿐인 진짜 공손기였던 것이다. 이때 면구가 벗겨져 진면목이 드러난 공손기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가짜 공손기를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토해내고 있었다. "으... 음모(陰謀)....... 무... 무서운 음모...... 크으윽!" 공손기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흑삼객은 그의 시체를 내려보며 나직히 중얼거렸다. "공손기. 너는 비록 훌륭한 기재였지만 시운(時運)이 없었다." 흑삼객은 품 속에서 하나의 옥병을 꺼내더니 시체에 가루약을 뿌렸다. 공손기의 시체는 순식간에 검은 물로 화해 녹아버렸다. 조금 전의 가짜 공손기와 똑같이 몇 방울의 혈수로 화해버린 것이었다. 남은 것은 그가 입고 있던 의삼뿐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사도성유가 말했다. "영부(令符)를 취해라." 흑삼객은 그 말에 공손히 읍한 후 옷가지를 걷어냈다. 그러자 바 닥에 한 개의 손바닥만한 황금영부(黃金令俯)가 나타났다. 흑삼객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 천마영부(天魔令符) 영부에는 전면에 웅장한 필체로 이렇게 음각이 되어 있었으며 배 면에는 단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독(獨) 간단한 표기만 새겨져 있었으나 그것은 도리어 패도적(覇道的)인 느낌을 주었다. 흑삼객은 천마영부를 사도성유에게 바쳤다. 사도성유는 다시 그것을 홍의청년에게 주었다. "소형제, 이것은 과거 천마대제가 공손기에게 신물(信物)로 준 것이니 잘 간직하게." 홍의청년은 담담히 영부를 받았다. 그는 바로 다름아닌 백수범이었다. 실로 무서운 계략(計略)과 음모를 통해 그는 공손기로 변신하게 된 것이었다. 백수범은 영부를 한 번 살펴 보더니 말없이 품 속에 갈무리했다. 이때 사도성유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형제, 이제 저 장강만 건너면 천마성의 구역에 들어서게 되네. 그러나 그곳서부터 강서 성 무이산(武夷山)에 있는 천마성에 당도하려면 아직도 천 리 이상은 가야 하네." 백수범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사도성유는 엄숙하게 당부했다. "천마성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공손기의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네." 백수범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소생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사도성유가 의아한 표정을 보이자 그는 다소 경직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은 결코 여러분의 뜻에 소생이 일방적으로 따르는 것만은 아닙니다." 백수범의 두 눈에서 기광이 흘러나왔다. "소생도 나름대로의 뜻이 있습니다. 앞으로 중원에서 다시 만나게 될 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여러분과 특별한 관계는 맺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성유와 흑삼객 철수정의 안색이 변했다. 백수범은 확고한 신념이 어린 음성으로 말했 다. "하지만 여러분의 뜻은 반드시 성취시키겠습니다." 백수범은 두 사람을 응시하며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더이상 소생을 구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성유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감돌았다. "물론이네." "그럼 이만 소생은 떠나겠습니다." 백수범은 몸을 돌리더니 양자강을 향해 걸어갔다. "......." 사도성유와 흑삼객은 멍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그 순간 똑같이 알지 못할 감정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정녕 기인이다. 저 소형제야말로 무림사(武林史)에 한 번도 나타 난 적이 없었던 대기인임에 틀림없다.' 두 사람의 가슴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었다. 그 들은 비록 하늘을 속이고 땅을 속이고 인간을 속이는 거대한 계략 을 꾸며냈지만 일의 성패는 이제 백수범이란 한 명의 청년에게 달려 있었다. 백도 무림의 앞날과 존패의 운명이 그에게 달려 있었다. "가자......." 사도성유는 왠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호남성(湖南省) 곡강구(曲江口). 이곳은 장강(長江) 연변에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시진이었다. 이곳은 늘 번잡했다. 그것은 호남에서 호북(湖北)으로 가기 위해 장강을 건너는 행인들 의 대부분이 이곳 곡강구에서 일단 행장을 풀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로 곡강구에서는 주루(酒樓)와 객점(客店) 등의 사업이 번창했다. 곡강구의 도선장에 한 척의 배가 닻을 내렸다. 이어 배에서 허름 한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내려왔다. 그의 나이는 대략 이십여 세 정도로 보였다. 그런데 그의 용모는 그야말로 귀신(鬼神)이 놀라 도망갈 정도로 추악하였다. 안색은 완전히 누런 똥색이었으며 눈썹은 중간에서 뚝 끊겨 있었다. 게다가 코까지 구색 을 맞추려는지 하늘을 향해 단지 두 개의 구멍만 뻐끔히 뚫려 있을 뿐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입술은 완전히 뒤집혀져 있었고, 툭 불거져 나온 이빨은 온통 누런 빛을 띄고 있었다. 다만 기이하게도 그의 두 눈만은 가을하늘처럼 맑고 신비로운 광 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추악하게 생겨 아무도 그의 눈 을 주의해 보는 자가 없었다. 이 추악한 청년은 바로 백수범이었다. 천면신개로부터 얻은 인피면구 덕분에 그는 이와 같이 추악한 청 년으로 변장할 수 있었다. 인피면구라면 강호에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변장 용구였다. 대체로 변장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인피면구와 역용약(易容藥)이 바로 그것으로 인피면구를 사용하는 것은 초보적인 변장술에 속했다. 그러나 천면신개 악비양이 만든 인피면구는 흔히 강호에 나도는 것과는 달랐다. 천면신개가 직접 제작한 인피면구는 종잇장같이 얇은 데다가 반투명하여 본래 얼굴의 혈색이나 미세한 표정의 움 직임까지 그대로 반응되었다. 그러므로 설사 변장의 대가라 할지라도 천면신개의 인피면구만은 식별하기가 지극히 힘들었다. 대강루(大江樓). 이곳은 곡강구에서 가장 큰 주루였다. 이곳에서는 술을 팔 뿐만 아니라 반점도 겸한 곳이라 항상 손님들이 들끓었다. 백수범은 시 장기를 느끼며 대강루에 올랐다. 점소이가 그를 보자 쪼르르 달려 나왔다. "어서 옵......!" 그러나 점소이는 백수범의 얼굴을 보더니 마치 못볼 것을 보았다 는 듯 급히 말을 삼키며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크으! 정말 지독하게 못생겼구나! 세상에 이렇게 추악한 놈도 있 다니.' 점소이는 이내 흰 눈으로 백수범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허름한 행색까지 한 몫을 했는지 백수범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금세 경멸의 기색이 드러났다. 점소이는 마지 못한 듯 백수범을 안내하여 이층 창가에 면한 자리 로 이끌었다. 아래층은 이미 손님으로 꽉 차 있었다. 백수범이 자리에 앉자 점소이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뭘 드시겠소?" "소면 한 그릇." 백수범은 담담히 말했다. 지금 그에게는 충분한 은자가 있었다. 그러나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온 그는 함부로 은자를 낭비하지 않 는 검박한 습관이 붙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단지 허기를 때울 수 있는 소면 한 그릇이면 족했 다. 그러나 그 점이 점소이의 박대를 더욱 심화시켰다. "좀 기다리쇼!" 점소이는 몸을 홱 돌려 가 버렸다. 잠시 후 점소이는 소면 한 그 릇을 한 손으로 들고 오더니 탁자에 소리나게 탁! 내려 놓고는 가 버렸다. 실로 무례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백수범은 그만 고소를 지었다. '과연 이것이 인간의 세태인가? 가진 사람에게는 굽신거리고 없는 사람은 이렇게 업신여기다니.......' 백수범은 감정이 꿈틀하는 것을 느꼈으나 억눌러 참았다. '그만 두자. 하찮은 인간과 상대해 보았자 나 역시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다.' 그는 묵묵히 소면을 들기 시작했다. 이때 주루의 한 쪽에서 갑자기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바람 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하하하! 소형(蘇兄)! 내 평생 저런 추남(醜男)을 본 적이 없소이 다." 그러자 비웃음이 가득찬 음성이 뒤를 이었다. "후후후! 내 이 년 전 하상교(河床橋) 아래에 사는 한 문둥이 환 자를 본 적은 있소이다. 그러나 그 자도 저 녀석과 비교하면 절세 미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으하하하하!" "푸하하하하......!" 폭소가 잇따라 터졌다. 백수범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하다가 뒤늦게서야 그들이 화제 삼는 것이 바로 자신의 용모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폭소가 들리는 쪽을 바라 보았다. 그의 오른쪽 두 탁자 건너 편에 네 명의 청년이 앉아 미주가효를 떡 벌어지게 차려놓고 그같 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화려한 귀공자 차림이었고 용모나 체격도 준수하 고 훤칠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똑같이 자만이 가득차 있었 다. 그들 중 금의를 입은 청년이 다시 말했다. "흐흐흐! 소형, 저 자식이 이쪽을 흘끔거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상한 모양이오." 그의 맞은 편에 앉은 소씨 청년이 맞장구를 쳤다. "핫핫핫! 그러고 보니 얼굴이 완전히 똥빛이 되고 있군. 저 얼굴 에는 정말로 똥을 한 바가지 끼얹어도 표가 잘 안 나겠는걸? 으핫 핫핫!" 백수범은 고개를 돌려 버리고는 말없이 다시 소면을 먹기 시작했 다. 그는 아무런 분노도 일지 않았다. 애당초 상대할 가치가 없다 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때 가벼운 발자국 소리와 함께 이층의 주루로 두 명의 손님이 올라왔다. 그들은 두 명의 절세 미소녀(美少女)들이었다. 그중 황의소녀(黃 衣少女)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유감스럽 게도 만면에 오만방자함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날씬하면서도 육감적인 몸매에 긴 머리칼을 뒤로 묶고 있 었다. 반듯한 이마에는 황색의 띠를 두르고 있었으며 왼쪽 어깨에 옷 색깔과 같은 황색 수실이 달린, 보기에도 훌륭해 보이는 보검 (寶劍)을 메고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대략 십칠팔 세 정도로 오른손에 말아쥐고 있는 은 빛의 말채찍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또 다른 한 명은 백의소녀(白衣少女)였다. 그녀의 인상은 황의소녀와는 몹시 대조적이었다. 열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백의소녀는 안색이 창백할 정도로 희었다. 그 때문인 지 그녀는 청초하면서도 가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백의소녀의 미모는 오히려 황의소녀를 능가할 정도였다. 특히 촉촉하게 젖은 듯한 두 눈은 짙은 우수마저 느끼게 했다. 두 명의 미소녀가 오르자 갑자기 주루 전체가 환해지는 듯 했다. 황의소녀는 큰 눈을 치켜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백수범의 추한 얼굴을 발견하고 눈살을 잔뜩 찌푸리더니 노골적으 로 경멸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매(梅)소저! 이쪽으로 오십시오." 네 명의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일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얼굴에 비굴한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두 소녀가 다가가자 금의청년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며칠 못본 사이에 매낭자는 더욱 아름다와지셨습니다. 과연 호남제일미(湖南第一美)란 명칭이 명불허전이오이다." 소씨 청년도 아부의 말을 했다. "천하의 모든 꽃을 갖다 놓아도 낭자 앞에서는 빛을 잃고 말 것이오!" 나머지 청년들도 다투어 찬사를 늘어놓았다. 이에 황의소녀는 안면 가득 자부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장내가 웅 성거리는 바람에 주루 안의 손님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들에게 집 중되고 있었다. 다만 백수범은 홀로 묵묵히 소면을 들고 있었다. "흥!" 황의소녀는 백수범을 힐끗 보고는 비위가 상한다는 듯 차갑게 냉 소했다. 이때 점소이가 다급히 달려오더니 그녀 앞에서 연방 허리를 굽신 거리며 말했다. "헤헤헤! 아가씨, 어서 앉으시죠." "이봐!" 황의소녀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점소이를 불렀다. 점소이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네?" 황의소녀는 점소이를 내려다 보며 오만하고 쌀쌀하게 물었다. "너는 내가 항상 앉는 자리를 잊었단 말이냐?" 점소이는 퍼뜩 생각난 듯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 그는 금세 아첨 의 웃음을 흘렸다. "아차! 헤헤! 죄송, 죄송합니다요.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곧 치워 드릴 테니......." 점소이는 곧장 백수범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여전히 젓가락을 놀 리고 있는 그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비켜 주시오. 이 자리에는 따로 앉으실 귀빈이 계시오." 백수범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점소이, 이 자리는 처음부터 내가 앉은 자리일세. 더구나 자리는 이곳 말고도 많이 있지 않은가? 다른 곳에 손님을 앉히면 안될 일 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의 말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건......." 점소이는 그만 할 말을 잃고는 황의소녀의 눈치를 살피며 어쩔 줄 을 몰라했다. 그러자 금의청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못생긴 녀석이 입만 살았군." 그는 대뜸 백수범에게로 걸어와 호통을 쳤다. "이 봐, 이 못생긴 작자야! 네 음식값은 우리가 낼 테니 냉큼 자리를 옮겨라." 그러나 백수범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음식을 다 들면 그러지 않아도 일어설 것이오. 게다가 내게도 음 식값은 있소이다." 그 말에 금의청년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했다. 그의 두 눈은 금세 살기를 띄었다. "흐흐흐! 간덩이가 부었군. 네 놈은 우리가 누군지나 알고 하는 소리냐?" "모르오. 단지 내 눈에는 남의 식사나 방해하는 건달로 보일 뿐이오." "뭐, 뭣이!" 금의청년은 물론 나머지 세 청년도 모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때 황의소녀는 눈꼬리를 살짝 위로 치켜 올렸다. 그녀의 얼굴에 는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다만 그녀와 함께 온 백의소녀는 우수어린 두 눈에 한 가닥 걱정 스런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금의청년은 노호성을 터뜨렸다. "건방진 놈! 감히 우리 강남사공자(江南四公子)를 뭘로 보고 헛소리를 하는 거냐?" 그는 대뜸 우수를 번쩍 들더니 탁자의 한 부분을 휙 내리쳤다. 싸악! 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탁자 모서리가 마치 칼로 벤 듯이 잘려 나갔다. 백수범은 내심 흠칫했다. '대단한 내공이구나.' "이 놈, 이래도 일어서지 않겠느냐? 다음엔 네 목이 이렇게 될 것이다!" 금의청년은 엄포를 놓으며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이때 백의소녀가 보다못해 황의소녀의 옷소매를 잡아 끌었다. "매언니, 우리 그냥 저 쪽 빈 자리로 가 식사해요." 그러나 황의소녀는 차갑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하(河) 동생은 그냥 구경만 해. 분수도 모르고 까부는 놈은 혼좀 나야 하니까." 백의소녀는 초조하게 말했다. "하지만 잘못은 우리에게......." 그 말을 듣고 금의청년은 더욱 득의하여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하낭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곧 자리가 비게 될 것이오." 그는 아직도 자리에 앉아 있는 백수범에게 명령했다. "자, 친구. 이제 일어서 주실까?" 백수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히려 놓았던 젓가 락으로 다시 소면을 먹기 시작했다. "이 놈이?" 금의청년의 눈썹이 거꾸로 치솟았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백 수범의 가슴을 향해 무섭게 내질렀다. 그것은 실로 바위라도 부술 만큼 위맹하고 독랄한 일격이었다. 백 수범은 강한 권력(拳力)이 뻗어오자 마침내 마음이 꿈틀거렸다. '정말 지독한 작자다. 이 정도에 살수(殺手)를 뻗다니?' 그는 앉은 채로 우수를 들어 금의청년의 주먹을 막았다. 두 사람 의 손이 비스듬히 엇부딪쳤다. "으응?" 금의청년은 공격이 저지되자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 나 곧 그는 입가에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흐흐! 이제 보니 알량한 한 수를 믿고 까불었군." 백수범은 젓가락을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둡시다. 내가 일어서겠소이다." 그러고 보니 소면 그릇은 이미 깨끗이 비어 있었다. 백수범은 금 의청년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소생이 사과하겠소이다. 없었던 일로 합시다." "뭐라고?" 금의청년은 갑작스런 그의 태도에 어리둥절해졌다. 백수범은 탁자 에 동전 두 닢을 놓고는 몸을 돌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 담담하기만 한 그의 모습에서는 감히 범접 키 어려운 위풍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중인들이 모두 멍청히 바라보는 가운데 계단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황의소녀의 아미가 상큼 치켜 올라가더니 그를 불렀다. "잠깐! 이봐요!" 그녀의 날카로운 음성에 백수범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황의소녀는 느닷없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홋! 본 소저는 너에게 가도 좋단 말을 하지 않았다." 백수범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담담히 말했다. "나는 낭자의 하인이 아니니 낭자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니오?" 황의소녀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날씬한 허리를 꼿꼿이 펴며 차갑게 내뱉았다. "감히 날 모욕하고도 그냥 갈 수 있단 말이냐?" 백수범은 차분하게 말했다. "내 언제 낭자를 모욕했소? 그런 기억이 없소이다." "내 이름을 듣고도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모욕이 아니란 말이냐?" 실로 어이없는 억지였다. 그러나 황의소녀는 몹시 흥분한 듯 얼굴 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백수범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갑작스런 대소에 황의소녀는 물론 청년들과 그들의 시비를 구경하던 손님들까지도 모두 어 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백수범은 웃음을 뚝 그치며 황의소녀에게 물었다. "낭자, 소생이 세상에서 가장 경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황의소녀와 백의소녀, 그리고 네 청년은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쥐꼬리만한 세력을 믿고 남을 깔보며, 그다지 잘 나지도 못한 용모를 갖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우습게 보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외다." "뭐, 뭐라고?" 황의소녀와 네 청년은 일시에 안색이 홱 변했다. 특히 황의소녀는 충격을 받은 듯 이를 뽀드득 갈더니 앙칼지게 외쳤다. "내 오늘 네 놈을 죽이지 않으면 미면나찰(美面羅刹)이란 별호를 떼어 버리겠다!" 쌔액......! 그녀가 오른손을 떨치자 한 가닥 은빛 채찍이 독사처럼 무서운 살 기를 뿜으며 백수범에게 날아갔다. 백수범은 대응하려고 발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뇌리에 공명처럼 울리는 생각이 있었다. '이곳은 천마성의 영역이다. 내가 이곳에서 무공을 사용한다면 주 의를 끌게 될 것이 아닌가? 만에 하나라도 이 일로 인해 대사(大 事)를 그르칠 수도 있지 않은가?' 백수범은 쓰디 쓴 고소를 머금었다. '설마 몇 대 맞고 죽기야 하겠는가?' 그는 결정을 내리고 날아오는 은빛 채찍을 바라 보았다.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은 채. 철썩---! 은편이 오른쪽 어깨를 감으며 그의 옷자락과 살갗을 우악스럽게 뜯어냈다. "으윽!" 상상 이상의 무서운 고통이 한 순간 백수범을 엄습했고 채찍 끝을 따라 시뻘건 핏방울이 허공에 호선을 그리며 튕겨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호호홋! 이제 보니 별 볼 일도 없는 작자였군?" 황의소녀의 득의에 찬 교소가 주루 안을 짜랑짜랑 울렸다. 동시에 그녀의 은편이 어지럽게 난무하기 시작했다. 쉬쉭! 쌔애액! "으윽!" 백수범은 마구 휘둘러지는 은편 세례를 받고 그만 바닥에 나뒹굴 고 말았다. 황의소녀는 잔인하기 그지 없었다. 그가 무방비 상태 로 얻어맞음에도 불구하고 채찍을 날리는 손속에 조금도 인정을 베풀지 않고 있었다. 삽시지간 백수범의 옷자락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그 사이로 선혈이 붉게 솟구쳐 전신을 적셨다. 그야말로 혈인(血人)이 되다시피한 그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 없 었다. 과연 미면나찰(美面羅刹)이라는 그녀의 별호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만해요, 언니! 너무 잔인해요!" 백의소녀가 부르짖으며 중간에 끼어 들었다. 그 바람에 황의소녀 는 잠시 채찍을 멈추었다. "하동생, 비켜!" 황의소녀는 분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씨근거렸다. 백의소녀가 양 손을 벌리며 그녀를 가로막았다. "안 돼요! 차라리 저를 때리세요." 황의소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하니 바라보더니 조소를 날렸다. "하동생, 저 못생긴 놈에게 반하기라도 했느냐?" 아무리 홧김이라지만 너무도 모욕적인 말이었다. 백의소녀의 안색 은 그만 창백하게 변하고 말았다. "언니! 무슨 말을 그렇게......?" "흥!" 황의소녀는 냉소하며 마지못해 채찍을 거두었다. 이어 그녀는 강 남사공자가 있던 자리로 홱 돌아서 가버렸다. 사공자도 이제는 더이상 백수범에게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 듯 모두 자리에 앉아 버렸다. 백의소녀는 쓰러진 백수범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만면에 동정 의 기색을 가득 담은 채 물었다. "여보세요, 괜찮으세요?" 기실 백수범은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이런 지독한 매를 맞았다. 게다가 보통 매질이 아니었다. 미면나찰의 공력이 담긴 채찍이었다. 채찍은 그의 옷을 찢어냈을 뿐 아니라 살갗을 쩍쩍 갈라지게 했다. 그는 전신이 피로 물든 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느라 이빨을 악물어야 했다. 그러나 백의소녀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 소." 백의소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 언니께서 너무 심했어요. 제가 대신 사과드려요." 그녀는 하얀 수건 한 장을 꺼내더니 자신이 직접 백수범의 피묻은 얼굴과 입 주변을 닦아주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는 조금의 가식도 없었을 뿐더러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백수범은 문득 가슴이 찡 하는 것을 느꼈다. '정말 세상은 묘하구나. 악귀나찰같은 여자가 있는가 하면 이 소 녀같이 착하고 아름다운 소녀도 있으니....' 그는 백의소녀를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소저의 방명은......?" 백의소녀가 흠칫 놀라자 백수범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오. 그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오." 백수범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백의소녀 는 잠시 생각하더니 얼굴을 약간 붉히며 말했다. "소녀는 하설연(河雪娟)이라고 해요." 백수범은 저쪽 탁자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저 분 황의낭자와는 어떤 사이요?" 하설연은 더듬거렸다. "친자매는 아니에요. 저희는 다만......." "알겠소." 백수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하설연은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순간 그녀는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면을 발견할 수 있었 다.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얼굴에서도 두 눈만은 유난히 한 성(寒星)처럼 기품있게 빛난다는 것을. 그녀는 내심 탄성을 발했다. '아! 이 분은 비록 얼굴은 추악하지만 눈빛만은 신비하기 그지 없구나.' 그녀는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변화였다. 백수범은 몸을 대강 추스린 후 강남사공자와 황의소녀가 있는 곳 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하설연이 깜짝 놀라 외쳤다. "여보세요!" 그러나 백수범은 이미 그들의 탁자까지 가서 포권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미안하오. 못생긴 소생이 잘난 여러분의 기분을 상하게 한 듯 하 오. 이 점 크게 사과드리오." 그의 이런 행동에 강남사공자는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금의청년 이 그를 노려보며 같잖다는 듯이 내뱉았다. "추악한 놈! 술맛 잡치지 말고 어서 꺼져라." 백수범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가기 전에 네 분의 명호와 이 분 소저의 신분을 알고 싶소이다." 금의청년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호! 굳이 그럴 이유라도 있느냐?" 백수범은 기이한 웃음을 발했다. "하하! 비록 이렇게 터지긴 했으나 이름있는 분들께 당했다면 그 래도 위안이나마 되지 않겠소?" 금의청년은 그 말에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이제야 제대로 눈이 떠지는 모양이구나. 좋다, 내 소개해 주지." 그는 먼저 자신의 코를 가리켰다. "우리는 강남사공자라고 부른다. 본 공자는 금의공자(金衣公子) 남악비(南岳飛)다. 그리고 이 분은 철수공자(鐵手公子) 소천상(蘇 天常)이란 위명을 지니고 계시다." 자칭 금의공자 남악비가 가리키는 것은 소씨 청년이었다. 그는 남 삼을 입었는데 유난히 두 팔이 길고 체격이 우람했다. 남악비는 이번에는 자신의 옆에 앉은 자의청년을 가리켰다. "이 분은 자전신검(紫電神劍) 정유(丁儒) 공자이시다." 자의청년은 등에 자색 수실이 달린 보검을 메고 있었다. 그는 눈 빛이 날카롭게 빛나는 청년이었다. 남악비는 계속하여 백의를 입고 수중의 흰 색 섭선(攝扇)을 거만 하게 부치고 있는 제법 준수한 청년을 가리켰다. "옥면선풍(玉面扇風) 채량(蔡亮) 공자님이시다." 백수범은 그들의 명호를 가슴에 깊이 새겨 두었다. 강남사공자(江南四公子). 그들은 수 년내 무림에 급격히 부상된 신진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준수한 용모와 고강한 무공으로 무림에 나타나자마자 주목 을 끌었으며 각기 화려한 배경을 업고 있어 강호의 선배들조차 그 들에게는 한 수 양보하는 터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실력과 배경을 믿고 한결같이 오만에 차 있었다. 금의공자 남악비는 마지막으로 황의소녀를 소개했다. "이 분 소저는 바로 호남성에서 쟁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독룡 보(毒龍堡)의 보주이신 독룡신군(毒龍神君) 매철한(梅鐵寒) 노선 배님의 무남독녀로 호남제일미인 미면나찰(美面羅刹) 매국령(梅菊令) 소저이시다." "독룡보." 백수범은 나직이 되뇌었다. 남악비는 경멸의 표정으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놀라서 오줌싸지 마라, 이 놈아. 독룡보는 바로 천마성 의 호남분당(湖南分黨)이다. 또한 매소저께서는 앞으로 천마성주 님의 셋째 제자님과 혼약을 맺을 귀하신 분이다." 그 말에 백수범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 잘 새겨 두었느냐?" 백수범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추악한 얼굴로 인해 그것 은 인상을 찡그리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알아 들었소이다." 그는 몸을 돌려 백의소녀 하설연에게도 정중히 포권했다. "낭자, 정말 고맙소이다." 하설연은 얼굴을 붉혔다. "저는......." 백수범은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머지 않아 곧 만나게 될 것이오." "......?" 하설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막 뭐라 물어보려는데 백 수범은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그는 미련없이 계단 아 래로 사라져 버렸다. 하설연은 그가 사라지자 가슴이 허전해짐을 금치 못했다. 그런 감 정에 그녀는 스스로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저 분은 잘 생기지도 못한데다 단 한 번 만났을 뿐인데....'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백수범이 사라진 곳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