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천마비동(天魔秘洞)으로 들어가다 회마(灰魔). 그는 팔대마신(八大魔神) 중에서 일곱 번째였다. 그는 낯빛이 회 색으로 마치 부패하기 직전의 시체인 양 징그럽고 역겨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음성 또한 귀신의 소리같이 듣기 거북하고 음산했다. 그 뿐 만 아니라 그의 전신에서는 늘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회회마시공(灰灰魔屍功)이란 고약한 사공(邪功)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체들 속에서 장장 삼십 년을 묻혀 살며 회회마시공을 대성 했으며 그로 인해 성품 또한 팔마신 중에서 가장 잔인음독한 편이었다. 백수범은 천마부에서 일야(一夜)를 보냈다. 그가 첫날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회마(灰魔)가 그를 찾아왔다. 회마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데리고 천마부를 나섰다. 천마성은 수십 개의 무이산 봉우리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도 세 개의 주봉(主峯)을 둘러싸고 있었다. 천마각이 있는 천학봉 과 비선봉, 천무봉이 그것이었다. 천무봉 정상. 그곳은 온통 난석(亂石)의 군(群)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괴석의 숲이랄까? 삭막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섬 뜩한 분위기를 풍기는 석림(石林)이었다. 백수범은 회마와 함께 천무봉 정상에 오르자 이같은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모든 학문을 한 몸에 지닌 기재였다. 그는 비 록 지난 날 과거에 네 번씩이나 낙방의 고배를 마셨으나 학문은 넓고도 깊었다. 그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제자백가(諸子白家) 뿐만 아니라 하 도낙서(河圖落書)를 위시하여 역리성복(易理星卜), 기문둔갑(奇門 遁甲)에 관한 잡학에까지도 조예가 깊었다. 낙방의 고배를 거듭 마시는 동안 늘 책을 끼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백수범은 천무봉 정상에 펼쳐진 괴이한 석림(石林)을 보자 대뜸 그것이 일종의 석진(石陣)인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석림을 자세히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석진은 실로 괴이하구나. 천문석로진(天門石路陣) 같기도 하 고 또 백석난림방진(百石亂林坊陣)에 구궁(九宮)을 가세한 것도 같고, 도저히 추측할 수가 없구나.' 이때 그의 옆에 서 있던 회마가 품 속에서 검은 색의 작은 피리를 꺼내더니 힘차게 불었다. 삐익---! 날카로운 소성이 석진 속을 울리며 퍼져나갔다. 휙--! 휙! 그에 따라 석진 속에서 인영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곧 환영처럼 다섯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안색이 창백한 중년인들로 흑의를 입고 있었으며 등 에는 묵검(墨劍)을 메고 있었다. 그런데 괴이한 것은 그들의 눈동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오직 흰자 위만이 희번득이고 있어 섬뜩한 귀기(鬼氣)를 풍겨냈다. 또한 그 들은 완전히 무표정했다. 그들 가운데 한 중년인이 억양이 전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영패(令牌)를 보이시오." 백수범은 그 말에 품 속에서 하나의 동그란 검은 영패를 꺼냈다. - 금혼령(禁魂令). 전면에 핏빛 글씨가 그같이 양각되어 있었다. 회마는 특유의 귀성 으로 답했다. "사천오검혼(死天五劍魂), 영패를 확인해 보게." 백수범은 금혼령을 중년인에게 넘겨 주었다. 중년인은 공손히 금 혼령을 받더니 손 끝으로 더듬어 보고 있었다. 백수범은 약간 놀랐다. '이제 보니 이들은 모두 장님이었구나.' 잠시 후 중년인의 억양 없는 음성이 다시 들렸다. "틀림없소이다." 그는 영패를 돌려주며 물었다. "어느 분이 천마비동에 들어갈 것이오?" "이 분이시다." 회마는 말한 뒤 뒤로 물러났다. 중년인은 백수범을 향해 흰 눈알 을 희번득였다. "따라 오십시오." 회마는 멈추어선 채 백수범에게 말했다. "공자, 노부는 더이상 들어갈 수 없소이다. 백 일 후에 뵙겠소이다." "수고했소. 회마." 백수범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마는 공손히 포권을 한 후 신형을 날려 봉우리 아래로 사라졌다. 다섯 명의 중년인, 즉 사천오검혼은 석진 안으로 들어갔다. "공자님, 한 발자국도 틀리게 밟으면 안 됩니다." 우두머리인 일검혼이 주의를 주었다. "염려말게." 그러나 백수범은 석진 안으로 들어가자 곧 풍경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우...... 르르르...... 르릉! 은은한 뇌성이 치며 사위가 갑자기 캄캄해졌다. 하늘도 없고 땅도 없었으며 끝없이 캄캄한 공간에는 귀신의 호곡 과도 같은 으시시한 음향이 울려퍼졌다. 백수범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석진의 변화가 이토록 놀랍다니......! 만일 멋도 모르고 들 어왔다가는 뼈도 못추릴 뻔 했구나.' 혈로상문만석대진(血路喪門萬石大陣). 이것이 석진의 이름이었다. 이는 오백 년 전 진법(陣法)의 대가였 던 귀기자(鬼機子)가 창안한 것으로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절진의 하나였다. 총 일만 개의 괴석으로 이루어져 구백구십구 개의 사문(死門)이 설치되어 아무리 천하절세의 고수라도 일단 진법에 갇히면 영원히 나올 수가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진법을 파괴하려 들면 처참하 게 육신이 찢겨 죽는다. 생문(生門)은 유일하게 단 한 개뿐이다. 그러나 천기의 변화와 시 각, 바람(風)에 따라 수시로 바뀌므로 정확히 짚지 않으면 통과하기가 불가능했다. 본래 천마성주는 우연히 귀기자의 진도(陣圖)를 얻어 천마비동 주 위에 설치시켰다. 그러나 워낙 무섭고 난해한 절진이라 그 스스로 도 생문을 가려내기가 벅찼다. 그리하여 그는 일만 개 방위(方位) 중에서 단 한 개의 자리를 비 워 놓았고 그곳에 자신의 수하인 사천오검혼을 상주시켜 진을 지 키도록 했다. 유사시에는 빈 방위에 돌을 놓음으로써 혈로상문만 석대진을 완전히 발동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평소에는 진법의 위력이 반(半)밖에 되지 않는 셈이었 다. 그러나 그 정도만 가지고도 혈로상문대진은 이미 천하의 절진이라 할 수 있었다. '정말 무서운 진법이구나.' 백수범은 사천오검혼을 따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식경 후에 야 그는 마침내 석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일행은 커다란 암벽 앞에 서 있었고 암벽에는 하나의 동굴이 뚫려 있었다. "이제 다 왔습니다." 우두머리, 즉 일검혼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은 넓었다. 인공으로 다듬은 듯 넓은 석실이 여러 개 있었으며 그 석실들은 사천오검혼이 거주하는 곳인 듯 했다. 그들은 석실들을 지나 석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 들은 하나의 거대한 석문(石門) 앞에 이르렀다. <천마비동(天魔秘洞)> 굵고 힘찬 글씨로 석문에는 이같이 새겨져 있었다. 그곳에는 용사비등하는 한 마리의 묵룡(墨龍)이 조각되어 있어 전 체적으로 위압감이 물씬 풍겼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묵룡의 조각에는 눈(眼)이 없었다. 단지 구멍 만 뻥 뚫려 있을 뿐이었다. 일검혼이 설명했다. "용안 부위에 금혼령을 맞추면 문이 열립니다." 그는 다시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천무비동 안에는 한 개의 서고(書庫)와 무고(武庫), 그리고 보고(寶庫)가 있습니다. 서고에는 수천 권의 절세무공비급이 있으 며 무고에는 천하의 신병이기(神兵利器)가, 보고에는 수많은 기진이보(奇珍異寶)가 있습니 다." "아!" "하지만 천마비동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백수범은 의아하여 물어보았다. "무슨 규칙인가?" "그것은 서고의 수천 권 비급을 마음대로 읽을 수는 있지만 가지 고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주님께서 허락하신 사람에 한하여 무고에서 단 한 개의 병기를, 보고에서도 단 한 가지의 보 물만을 가지고 나올 수 있습니다. 허락이 없으면 무고와 보고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백수범은 눈을 빛냈다. "음, 그럼 나는 어떤가?" 일검혼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공자님께서도 물론 한 자루의 병기와 한 가지의 보물을 취하실 수 있습니다." 백수범은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천마비동에는 그 동안 몇 사람이나 들어갔는가?" 일검혼은 그 질문에 약간 망설이는 듯 하더니 대답했다. "천마비동이 생긴 지 오십 년 동안 도합 백삼십 명이 들어갔습니 다. 공자님은 백삼십일 명째입니다." "그렇게 많이 다녀갔다고?" "이곳 천마성의 주요 직책을 지닌 고수들은 특별히 성주님의 은혜 를 입어 서고(書庫)에서 무공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서고만 허용했을 뿐입니다." "으음." "무공과 보고가 허용되었던 인물은 총 이십 명입니다. 공자님까지 포함해서." 백수범은 내심 침중해짐을 금치 못했다. '음, 어쩐지 천마성의 실력이 엄청나다 했더니 그들은 이 천마비동에서 그같이 고강한 무 공을 얻은 것이었구나. 그런데 무고와 보고에 들어갔다는 이십 명은 누구 누구일까?' 백수범은 연이어 염두를 굴렸다. '물론 천마성주의 네 제자는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나를 빼면 십오 명이 남는다. 그들은 필시 천마성의 핵심인물들일 것이다. 아울러 엄청난 무공의 소유자들이리라.' 일검혼이 그를 재촉했다. "공자님, 어서 들어가십시오. 기한은 백 일뿐입니다. 그 동안의 성취는 공자님 스스로의 노력에 달린 것입니다." 그를 포함하여 사천오검혼은 그때까지 줄곧 무표정하기만 했다. 백수범은 그들을 보며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사천오검혼, 그대들도 이곳에 들어갔던 인물들인가?" 사천오검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수범은 그들의 입술 끝 에 보일듯 말듯 희미하게 자부심이 어리는 것을 보았다. '음, 이들 역시 실로 무서운 존재들이겠군. 이들은 분명 천마비동 에 들어갔던 자들로 결코 무시할 대상이 아닐 것이다.' 이윽고 백수범은 품 속에서 금혼령을 꺼냈다. 그리고 그는 석문에 새겨진 묵룡의 눈구멍에 금혼령을 맞추었다. 쿠르르...... 릉! 굉음과 함께 석문이 좌우로 갈라졌다. 백수범은 눈을 크게 뜨고 석문 안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하나의 넓은 광장이었다. 사천오검혼은 이미 물러가고 없 었으며 백수범만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석문은 그가 들어가자마 자 즉시 닫혔다. 백수범은 광장에 들어서자 바로 맞은 편 석벽에 지력으로 새겨진 커다란 글씨를 볼 수가 있었다. - 천마(天魔)의 후예를 위해 남기노라. 백수범은 그 글씨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천마대제는 천마교(天魔敎)의 후인이구나.' 과거 전진동부(全眞洞府)에서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광장 을 둘러보았다. 광장은 대략 방원이 이십 장 정도로 석단(石壇)과 석대(石坮), 그 리고 석탁(石卓) 등이 단조롭게 놓여 있었다. 대충 보아도 무공을 수련하기 좋은 장소였다. 그런데 한 쪽 벽에는 나란히 세 개의 석문이 있었다. <천마서고(天魔書庫)> <천마무고(天魔武庫)> <천마보고(天魔寶庫)> 백수범은 나란히 붙은 세 개의 문을 보며 심장이 거칠게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천마성에 들어와 첫 관문을 밟게 되었구나......' 그는 몇 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맨 우측에 있는 천 마서고로 향했다. 천마서고의 문은 손을 대자마자 즉시 열렸고 그 는 한 가닥 의혹을 느꼈다. '서고의 문이 이렇게 쉽게 열리다니.... 그럼 나머지 무고와 보고 도 저절로 열린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천마성주가 이렇게 허술 하게 이곳을 꾸며놓았을 리가 없다. 여기에는 필시 무서운 기관장 치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백수범은 천마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선 그는 경악하고 말았다. 서고 안의 넓이는 약 십 장 정도였다. 서고 전체는 열 개의 서가 (書架)가 늘어서 있었으며 서가마다에는 책이 꽉 차 있었다. 그것 은 줄잡아도 일만 권은 되고도 남았다. 백수범은 그 방대한 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사방 석벽에 가득히 벽화(壁畵)가 그려져 있는 것을 발 견했는데 그 벽화는 바로 갖가지 무학(武學)의 요결과 자세를 새 긴 것이었다. 백수범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로 엄청나구나!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 많은 책들이 모 두 무공비급이란 말인가?' 그는 서가로 접근하여 꽂힌 책자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이제 보니 무공비급은 약 삼천 권(三千券) 정도이고 나머지는 일반 서책(書冊)들이구나.' 백수범은 서가의 주위를 돌며 내심 계속 중얼거렸다. '아무튼 대단하다. 대체 이 많은 비급들을 어떻게 구했단 말인가? 천하무학의 총본산이라고 불리는 소림사의 장경각에도 이 정도의 비급은 없을 것이다.' 그는 수많은 책자를 바라보며 고소를 금치 못했다. '이곳의 비급을 모두 보자면 백 일로는 어림도 없다. 아무리 빨리 익힌다해도 이들 중 백분지 일도 못배울 것이다. 그렇다면 천마성 주의 의도는 대체 무엇일까? 그는 결코 백 일 동안 이 많은 비급 을 모두 연마하라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 백수범은 한 공간에 놓여 있는 서탁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문득 그의 눈에 이채가 번쩍였다. '결국 이것도 한 가지 시험일 것이다. 분명 이곳에는 천마성주의 실학(實學)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수범은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뇌리에는 하루 전 만났던 셋째 제자 남궁신풍의 모습이 떠오 르고 있었다. '남궁신풍은 나에게 될 수 있는 대로 이곳의 무학을 많이 읽으라 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 또한 이곳을 거쳐갔으며 적수(敵手)인 나 에게 절대 호의를 베풀 리가 없다.' 백수범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벌써 그 한 마디 말로 내게 암수(暗手)를 뻗은 셈이다. 그 의 말에 따라 닥치는 대로 이 안의 비급을 읽으려 들었다간 나는 백 일 동안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는 두 주먹을 가볍게 움켜 쥐고 있었다. '후후! 남궁신풍, 나 백수범은 너에게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이 백 일의 시간을 절대 헛되이 보내지 않을 것이 다.' 백수범은 다시금 즐비한 서가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들어온 자는 지금까지 모두 백 삼십 명이라고 했다. 만일 그들 일인이 열 권의 비급만 익혔다해도 최소한 천 권은 이미 남 들이 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익혀봐야 소용없는 무학이 될 것이다. 나는 남이 한 번도 보지 않은 책자를 찾아 익혀야겠다.' 그는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가에 꽂 힌 삼천여 권의 비급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삼천 권이나 되는 분량의 책자를 놓고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을 알아내는 일이란 여간 면밀한 주의를 요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천마비동에서의 하루가 지나갔다. 백수범, 그는 시간을 잊은 것일까? 책자를 분류하는 일에 몰두하며 그는 거의 무아지경인 듯 했다. 수면조차 제대로 취하지 않고 그가 가려낸 것은 약 팔백여 권의 비급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한 사람이라도 타인의 손길이 닿은 것으로써 그를 매우 낙심하게 했다. 정작 그 자신이 익혀야할 전인미답의 비급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초조해 하거나 성급하게 구는 대신 그 특유의 초절한 인내로 서가 와 마주하고 있었다. 이윽고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마지막 서가(書架)를 정리하다가 갑자기 한 권의 책자에 관 심을 느꼈다. 그것은 두께가 무려 한 자나 되는 엄청나게 두터운 책자였다. <혈세록(血世錄)> 겉장에는 핏빛 글씨로 이같이 선명하게 씌여 있었다. '이건?' 백수범은 눈을 크게 떴다. 곧 그는 혈세록이라는 그 책자가 적어 도 백 명 이상이 살펴본 흔적이 있음을 발견했다. 전반부의 각 장마다 손때가 까맣게 묻어 있었다. '기이하군. 책자가 이렇게 되도록 많은 사람이 모두 보았다니.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백수범은 단순히 의문과 함께 호기심이 일었다. 대충 훑어보니 혈세록은 근 천 장이 넘는 분량이었으며 각 장마다 깨알같은 글씨가 가득 적혀 있었다. 백수범은 피식 웃었다. '이것을 모두 읽자면 적어도 십 일은 넘게 소비하겠구나.' 그는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혈세록의 첫 장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역시 곧 실망을 금치 못했다. 혈세록은 무공(武功)을 기록한 비급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원에 무림(武林)이 생긴 이래 수많은 마두(魔頭)와 패웅 (覇雄)들의 강호기(江湖記)를 적어놓은 것으로 그들의 출신(出 身), 무공내용, 그리고 그들의 무용담을 수록한 것이었다. 이름도 듣지 못한 전대 패웅들의 기록들을 보며 백수범은 일면 감탄해마지 않았다. '이것은 강호의 생생한 역사구나. 과연 어떤 인물이 일일이 이것 을 다 조사하여 기록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무공이지 무용담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내 혈세록을 덮었다. 탁! 하는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으로 책장을 덮어 누르던 백수범의 눈에서 언뜻 기광이 솟아나왔다.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무공비급보다 더 가치가 있을 지도 모른 다. 나에게 강호(江湖)란 사실 생소한 세계다. 더우기 앞으로 숱 한 난관을 넘자면 이들의 경험이야말로 꼭 필요한 것일 지도 모른다.' 백수범은 생각이 바뀌자 혈세록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는 오직 혈세록을 읽는 데에만 골몰했다. 하루, 이틀, 사흘....... 그것은 어쩌면 매우 우둔한 짓인 지도 몰랐다. 백 일이란 기한은 실상 무척 짧은 것이다. 그런데 백수범은 무공 을 익힐 생각은 않고 엉뚱하게도 패웅들의 전기(傳記)를 읽느라 귀중한 시간들을 소비하고 있었다. 만일 천마성주나 그의 세 제자가 알았다면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사 일, 오 일, 육 일.......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백수범은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후후! 그렇군. 다른 사람들도 모두 처음에는 나와 같은 이유로 이 혈세록을 읽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그들은 이 방 대한 양에 질려 버렸다. 이 중간부터는 전혀 사람의 손 때가 묻은 흔적이 없지 않은가?' 사실 그러했다. 혈세록의 앞부분은 매우 지저분했으나 반쯤 넘어 가면서부터는 차츰 손 때가 적어지더니 삼 분의 이가 넘어가자 아 무런 흔적도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백수범은 지그시 여유있는 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나 백수범은 다르다. 끝까지 읽겠단 말이다.' 칠 일, 팔 일....... 그리고 구 일째 되는 날이었다. 백수범의 안색이 갑자기 크게 변했다. 그의 눈은 크게 떠진 채 혈 세록의 거의 끝 부분, 즉 십분지 구에 해당하는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 역시 글씨체가 앞부분과 동일하여 자칫 스쳐 지나칠 수도 있 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끈기가 마침내 무용담과는 내용이 전 혀 틀린 놀라운 내용의 글을 발견해낸 것이었다. 백수범은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끼며 글을 읽어내려 갔다. <구천(九泉)의 지옥(地獄)에서나마 노부의 무학이 선행에 쓰여 혈 행(血行)의 죄업(罪業)이 씻겨지기를 바라노라. 혈영천마(血影天魔).> 백수범은 경악과 아울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제 보니 이 혈세록은 단지 혈영천마라는 기인이 자신의 무학을 남기는 구실로 사용한 것이었구나. 실로 대단히 깊은 혜안이다. 이 분은 먼저 읽는 자의 끈기와 인내심을 시험하고자 했던 것이다.' <......노부는 출생이 비참하였다. 드넓은 세상에 단 둘뿐인 노부 의 형제는 천애고아(天涯孤兒)였고 숱한 멸시와 냉대를 받으며 자 라났다. 그러다가 아우와 헤어지게 되는 불운까지 겪게 되자 노부 는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노부는 차츰 세상을 증오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한 가지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것 은 한 방울의 물을 주는 자에게는 대해(大海)로 갚고 한 방울의 피(血)를 흘리게 한 자는 그 구족(九族)을 멸하겠다는 맹세였다. 그 후 노부는 당시 사도제일의 고수였던 광혈오제(狂血五帝)의 문 하(門下)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들로부터 무공을 익힌 노부는 이 후로 강호를 유랑하며 닥치는 대로 혈겁을 자행했다. 이런 노부를 무림에서 그대로 방관할 리 없었다. 마침내 노부는 무림의 공적으 로 몰렸고 정사 합공으로 인해 귀혼산(鬼魂山) 단혼애(斷魂涯)의 절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라고나 할까? 노부는 죽지 않았다.......> 백수범은 점점 더 글의 내용에 흥미를 느끼며 이끌려 들어갔다. '혈영천마.... 비록 명호는 사도의 냄새가 나지만 결코 악인(惡 人)은 아니다. 단지 비참했던 과거로 인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비뚤어졌을 뿐이다.' 글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구사일생(九死一生)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신비 한 연못인 혈지(血池)에 떨어지게 되었다. 노부는 그곳에서 삼십 년 동안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개세의 신공 인 혈영마공(血影魔功)을 창안하게 되었다. 그 후 다시 강호에 나 간 노부는 여전히 살업(殺業)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노부가 가는 곳은 오직 혈로로 이어졌다. 근 삼천 명의 인명이 노부의 손에서 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부의 나이 백 세가 되었을 때였다. 한 명의 노승(老僧)이 노부를 찾아왔다.> 혈영천마를 찾아온 노승은 그에게 충고했다. 그는 악(惡)을 버리고 피에 젖은 두 손을 씻어 부처님께 귀의하라 는 것이었다. 물론 혈영천마의 귀에 그런 충고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도리어 혈영천마는 냉소를 날리며 혈영마공으로 노승을 죽이려 했 다. 그러나 노승의 무공도 보통이 아니었다. 노승은 천축(天竺)의 기이한 불공(佛供)을 익히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천여 초가 넘도록 백중지세를 이루며 전개되었 다. 황산(黃山) 망아봉(忘我峯)에서 하루 밤낮 동안 무려 일천 초를 넘게 싸운 것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노승은 계속 방어만 할 뿐 싸우는 동안 끊임 없이 설법(說法)을 그치지 않았다. 결국 혈영천마는 천 백 초 만에야 노승을 죽이고 그 지긋지긋한 설법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나중에 알고보니 그 노승은 바로 과거에 헤어졌던 그의 친 아우였 던 것이다. 노승의 품에서 나온 반쪽의 옥패가 그 사실을 말해주 고 있었다. 그는 동생과 옥패를 반으로 쪼개어 가졌던 것이다. 혈영천마는 그 사실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처절한 광소를 터뜨리며 실성한 듯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이후 무림에서는 더이상 혈영천마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혈영천마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혈과(血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강호에서 은퇴한 후 그때부터 참회의 뜻으로 혈세록 (血洗錄)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의도는 역대 패웅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창안한 혈영마공과 그밖의 무공들을 일부러 혈 세록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끼워 넣었다. 그것은 혈세록을 완전히 독파한 사람, 즉 혈세록을 끝까지 읽어 야망의 부질없음을 깨우친 자에게만 자신의 무공을 전수하기 위한 깊은 뜻이 담긴 안배였다. ....... 여기까지 읽은 백수범은 한숨을 쉬었다. 혈영천마의 고뇌를 충분 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노부는 혈세록에 혈영마공을 속성(速成)으로 연마하는 방 법을 수록해 놓았다. 인연이 있는 자여, 그대의 자질이 뛰어나다 면 혈영마공을 백 일 안에 능히 터득할 수 있으리라. 그렇지 못하 다면 일찌감치 연마를 포기하기 바란다. 만일 자질이 모자라 백 일을 초과하면 그대는 마성(魔性)에 젖어들고 말 것이다. 한 가지 당부할 것은 혈영마공을 익힌 후 반드시 선행(善行)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는 노부의 뼈에 사무친 인과응보에 따른 회한 때문이니 라. ......구천(九泉)에서나마 그대의 앞날을 축원하노라. 혈영천마 절필(絶筆).> 백수범은 불현듯 경외지심에 휩싸였다. '실로 놀랍구나.... 이 분은 당시 천하무적을 구가했다. 그런데 동생의 죽음으로 죄업을 깨우치다니, 그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백수범, 그는 실로 행운을 잡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이 날부터 혈영천마가 남긴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번씩 사천오검혼이 음식과 물을 넣어주어 달리 불편한 점은 없었다. 혈영마공(血影魔功). 이것은 혈영천마가 독문으로 창안한 신공으로 무림사상 전례가 없는 패도지학이었다. 그것은 일반 무학의 상례를 벗어나 전신의 혈맥을 역류(逆流)시켜 운공(運功)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또한 혈영마공을 익히면 전신의 팔만사천모공(八萬四千毛孔)에서 혈무(血霧)가 뿜어지며 일거수 일투족마다 혈영강기(血影 氣)가 뻗어나가 상대의 호신진기를 뚫고 그를 격살시킨다. 반면에 혈영마공을 십이 성 연성했을 시에는 전신 석 자 둘레에 혈무가 생성되며 그 혈무는 천하의 어떤 신병이기도 뚫지 못한다. 그야말로 금강불괴지신과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혈영오장(血影五掌). 이는 혈영마공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가공할 장법이었다. 혈영파천(血影破天). 혈영멸지(血影滅地). 혈영독패(血影獨覇). 혈영만겁(血影萬劫). 혈영붕소(血影崩宵). 이 다섯 가지 초식으로 이어지는 혈영오장은 한결같이 가공할 살 수였다. 당년에 혈영천마에게 혈영오장 중 삼 초 이상을 받은 자는 없었다. 단지 그의 동생이었던 천수겁존불(千手劫尊佛)만이 제 사 초까지 받았냈을 뿐이다. 그러나 결국 그도 마지막 초식인 혈영붕소(血影 崩宵)에 죽임을 당했다. 혈영어기비(血影御氣飛). 이는 전설상의 어풍비행술(御風飛行術)과 흡사한 절정의 경신법이 었다. 이 혈영어기비를 펼칠 경우 전신은 혈무에 휩싸이며 단 한 숨의 진기만으로 십 리를 날아갈 수 있었다. 백수범은 무학의 구결을 읽으며 거듭 찬탄을 금치 못했다. '실로 엄청난 무공이구나. 세상에 이런 무학이 있다니....... 직 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혈세록의 마지막 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 요결을 익힌 후 삼매진화로 태워 버려라. 백수범은 그 말에 따라 무공구결이 적힌 장을 뜯어냈다. 그가 두 손바닥으로 비비자 책장은 즉시 재가 되어 버렸다. 이윽고 그는 전심전력으로 혈영천마의 무공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그가 먼저 주력한 것은 혈영마공이었다. 그는 천고에 드문 기재였다. 대강 오십여 일이 흐르자 혈영마공의 성취는 확연히 드러났다. 그는 혈영마공을 운공할 때마다 전신의 피부가 혈색으로 변하며 모공(毛孔)으로부터 은은한 홍무가 발산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것은 혈영마공의 오 성(五成) 단계에 속했다. 본래 혈영천마가 남긴 것은 속성법의 무공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백 일의 수련을 거쳐야만 그 수위에 이를 수 있었다. 또한 이는 혈영오장, 혈영어기비를 펼칠 수 있는 기본 수위에 해당되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수범은 오십여 일만에 오 성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단지 그의 내공의 화후가 부족하여 완전히 혈영마공을 펼칠 수 없 을 뿐, 그의 무공은 이전과 천양지차를 이루고 있었다. 다시 삼십 일이 흘렀다. 마침내 백수범은 혈영마공을 십 성(十成)까지 끌어 올리는데 성공 했다. 이제 운공하면 그의 몸 주위에는 한 자 두께의 혈무가 뒤덮였다. 그는 혈영오장도 수련했다. 다만 혈영어기비는 장소가 협소한 관 계로 일단 요결만 이해하기로 했다. 천마서고의 사방 벽에는 각종 무학의 도해가 새겨진 벽화가 있었다. 백수범은 차츰 그 벽화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벽화에는 전 중원 각문각파(各門各派)의 무학이 총망라되어 그려져 있었다. 소림(少林)의 달마대신공(澾磨大神功), 무당(武當)의 태극반선혜 검(太極盤旋慧劍), 아미(峨嵋)의 항마복호장(降魔伏虎杖), 곤륜 (崑崙)의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 화산(華山)의 난파풍검법(蘭破 風劍法), 청성(靑城)의 태허신공(太虛神功).......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사방의 벽화는 당금의 구파일방(九波一 )을 비롯하여 흑백양도 (黑白兩道)의 각 파가 비전으로 전해오고 있는 독문 무공이 상세 히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에 백수범은 아연해지고 말았다. '대체 각 파의 비전지학이 어떻게 이곳에 전부 모여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벽화를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벽화는 지극히 치밀했으며 석벽에 모두 정확히 한 치의 깊이로 새 겨져 있었다. 백수범을 손을 뻗어 석벽을 만져 보았다. 싸늘한 촉감이 그를 흠칫 놀라게 했다. '이것은 단단하기가 금강석과 같다는 청강옥석(靑剛玉石)이 아닌가?' 그의 안색은 크게 변했다. '청강옥석은 웬만한 보검으로도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 그런데 이 많은 그림을 남겼다니....... 대체 이것을 그린 자의 무공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백수범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문득 오른손 끝에 공력을 운집했다. 파파팍......! 그의 손 끝이 석벽을 쳤다. 그러나 그는 강한 반탄력과 함께 손끝 이 튕겨나감을 느꼈다. 석벽에는 단지 실날같은 흔적이 새겨졌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 깊 이는 겨우 한 푼 정도에 불과했다. 백수범은 그것을 보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 벽화를 남긴 사람의 내공은 나에 비한다면 열 배가 넘는다. 과연 그 자는 누구일까?' 잠시 생각하던 그는 문득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이 천마비동은 오십 년 전에 천마대제 탁무영이 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벽화를 새긴 것도 천마대제 탁무영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천마대제의 오십 년 전 무공이 이 정도 라면 지금은 대체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천마성주(天魔城主). 일대의 대마인(大魔人)! 백수범은 천마대제 탁무영을 생각하자 마치 막막한 벽을 대한 듯 한 가닥 서늘한 두려움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역시 불굴의 인간이었다. '아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무공을 익힌 지 채 반 년도 되지 않은 반면 천마대제는 백 년도 넘지 않았던가? 그와 비 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아직 시간은 많다. 자신(自信)을 잃지마라, 수범!' 백수범의 두 눈에는 금세 의지와 집념의 불꽃이 타올랐다.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석벽을 노려 보았다. '천마대제가 이 벽화를 그린 의도는 무엇일까?' 그러자 혼란했던 그의 머리는 곧 명경지수처럼 맑아졌다. 또한 한 줄기 영감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어쩌면 그는 이 벽화를 그림으로써 자신의 자부심과 나아가서는 웅심을 드러낸 것일 지도 모른다. 즉 스스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 上天下唯我獨尊)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백수범은 뒤이어 자세히 벽화의 그림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벽화에 새겨진 무공은 하나같이 절학 중의 절학이었다. 실상 각 파의 비전신공은 수백 년, 아니 천 년 이상의 전통과 긍 지를 심게 한 무학들이었다. 어찌 한 가지라도 소홀할 수가 있으랴? 그러나 백수범은 달랐다. 그는 벽화를 살펴본 뒤 고개를 흔들었다. '이 벽화 속의 무공은 비록 대단한 것이기는 하나 혈영천마가 남 긴 것보다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익힐 가치가 없다는 것 은 아니다. 다만 나에게는 시간이 없을 뿐이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문득 그의 눈이 한 곳에 이르러 못박힌 듯 굳어졌다. 석벽의 한쪽. 그곳에는 기이하게도 한 줄기 번갯불의 형상(形象)이 뚜렷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 뇌전(雷電). 바로 그 위에 이러한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번갯불의 형상 은 세 치의 깊이로 검게 타들어가 있었다. 백수범은 홀린 듯이 번갯불 형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 정지된 채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의 신형은 미동도 없었다. 하루, 이틀, 사흘....... 그 상태로 육 일이 흘렀다. 백수범은 이번에는 아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오직 번갯불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뇌(雷)--- 전(電)!" 갑자기 한 소리 호통과 함께 그의 오른손이 번뜩였다. 그 순간 그 의 중지(中指) 끝에서 한 가닥의 섬광이 쭉 뻗었다. 번쩍! 꽈앙---! 맞은 편 석벽에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놀라운 일이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청강옥석의 석벽에 벽화와 똑같은 형상의 번갯 불이 새겨진 것이 아닌가? 깊이도 똑같이 세 푼이었다. 백수범은 비로소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제 알았다. 저것은 하나의 지법(指法)이다. 이른바 뇌전지(雷電指)! 천하제일의 지법 뇌전지다. 으하하하하......!" 시일은 살같이 흘러갔다. 어느덧 구십구 일이 지났다. 그 동안 백수범의 무공은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을 보았다. 혈영마공과 뇌전지는 모두 천고의 패도지학(覇道之學)이었다. 일단 배우기만 하면 그 연성 속도가 무척 빨랐다. 더구나 그 위력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백수범은 그 무공들을 거의 완숙단계로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하루 남았구나.' 천마서고의 서탁에 앉아 있는 그의 눈은 한층 빛나고 있었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 다음은 무고(武庫)와 보고(寶庫)를 취할 차례다.' 백수범은 일어섰다. 그리고 구십구 일 간 정들었던 서고를 한 차 례 둘러본 뒤 미련없이 나갔다. 천마무고의 문도 손을 대자마자 소리없이 열렸다. 백수범은 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고는 사방 오 장 정도의 석실 로 그 안에는 한 개의 커다란 병기가(兵器架)가 설치되어 있었다. 병기가에는 각종 신병이기가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백수범은 맞은 편 석벽에 쓰여진 글귀를 발견했다. - 천마무고 안의 백 가지 병기는 하나같이 천하제일의 병기다. 이 곳에 들어오도록 허락된 자는 그중 오직 한 가지만 취하라. 백수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병기가를 훑어보았다. 그는 먼저 병기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모두 팔십 일 개.... 이미 열 아홉 개는 밖으로 나갔구나.' 그는 병기의 종류를 살펴 보았다. 검(劍), 도(刀), 창(槍), 필(筆), 권(圈), 추(錘), 편(鞭), 장(杖), 부(符), 철조(鐵爪)....... 천 하의 각종 병기가 망라되어 있었다. 또한 그것들은 하나같이 절세의 신병기들이었다. 그러나 백수범은 어느 것에도 호기심이 동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렇게나 잡히는 대로 한 자루의 검을 들어 보았다. 그것은 백색의 검이었다. 스르릉---! 검이 검집으로부터 뽑혀 나오자 굉음과 함께 석실 안은 휘황한 백광(白光)에 휩싸였다. 그는 백검을 휘둘러 청강옥석벽을 그어 보았다. 그 순간 스윽! 하 는 음향과 함께 석벽에 실낱같은 폭의 검혼이 깊숙히 새겨졌다. 백수범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놀라운 보검이구나.' 검신을 보니 그곳에 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 백룡검(白龍劍). 그러나 역시 그는 백룡검에도 별로 끌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병 기가를 훑어 보았다. 그의 눈길은 결국 제일 마지막에 놓여 있는 하나의 낡은 봉(棒)에 머물렀다. 백수범은 그 봉을 들었다. 먼지가 가득 묻어 있는 데다가 길이는 한 자밖에 되지 않아 아무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재질은 무엇으로 되었는지 담담한 은색을 띄고 있었고, 양 끝은 둥글었다. 백수범의 마음은 기이하게도 이 보잘 것 없는 봉에 쏠리고 있었다. 그는 봉의 손잡이 부분을 살펴보았다. 그곳에 천축(天竺)의 범문 (梵文)이 새겨져 있었다. 마침 백수범은 지난 날 범문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는 범문을 읽어 보았다. '여의천봉(如意天棒)? 봉의 이름인가 본데.......' 백수범은 드디어 호기심이 크게 당겨 자세히 살펴 보았다. 손잡이에도 깨알같은 범문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범문 중에도 읽 기가 아주 힘든 고문(古文)이었다. 그는 머리를 짜내며 그 고문을 해석해 보았다. <뇌정(雷霆)이 여의천봉으로 지옥 삼십삼 천의 마황(魔皇)을 누르 다. 인세(人世)에 나와 구백구십구 명의 마승(魔僧)의 피로 여의 천봉이 젖도다. 천봉의 살광이 너무도 거세어 백 년 동안 불력(佛 力)으로 다스리도다. 훗날 일인의 마승혈(魔僧血)만 더 갖는다면 여의(如意)의 뜻이 풀릴 것이다.> 실로 괴이무쌍한 말이었다. 백수범은 도무지 그 뜻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여의천봉을 움켜쥐며 내심 중얼거렸다. '나로서는 해석이 불가능한 문구로군.' 그는 새삼 여의천봉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백수범은 문득 마음이 움직여 백룡검으로 여의천봉을 그어 보았다. 카캉! 검날이 부딪치자 섬뜩한 음향이 일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여의 천봉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보기보다 단단하기 그지 없구나!' 백수범의 얼굴에는 희색이 떠올랐다. 그는 이어 여의천봉으로 석벽을 쳐보았다. 꽝---! '윽!' 그는 오른팔이 시큰하게 저려와 하마터면 봉을 놓칠 뻔 했다. 더 구나 석벽이 멀쩡한 것을 보자 그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쯧, 이 여의천봉은 쓸모가 없구나. 보검에는 베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다른 것은 부수지도 못하니 병기로써의 가치가 없는 셈 아닌가?' 백수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안색을 굳히며 여의천봉을 응시했다. '분명 이 안에 들어온 인물들도 이것을 한 번쯤은 시험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별 무소용이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이 범문을 해석했을 지도 미지수고.' 백수범의 눈 속에서는 지혜로운 빛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 여의천봉이 별 것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천하의 신병이 기들과 나란히 있을 리가 없지 않을까?' 그는 여의천봉을 굳게 잡았다. '왠지 이것이 마음에 든다. 좋다! 이걸로 선택하자.' 여의천봉(如意天棒). 이렇게 하여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한 자 남짓의 기이한 단봉 은 백수범에게로 돌아갔다. 엄청난 비밀(秘密)을 숨긴 채....... - 천하의 기진이보(奇珍異寶)가 이곳에 있으나 그대는 오직 한 가지만을 취할 수 있다. 천마보고에는 그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다. 백수범은 천마보고 안 으로 들어가 사방 오 장여의 석실을 둘러보았다. 석실에는 온통 보광(寶光)이 휘황했다. 세상천지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보석들과 기진이보가 가득 쌓여 있었다. 피독주(避毒珠), 피화주(避火珠), 천광주(天光珠), 칠홍야명주(七 紅夜明珠), 욱룡천보석(勖龍天寶石), 백옥잠형우(白玉潛形羽)....... 어디 그 뿐인가? 흑진주(黑珍珠), 산공뇌화수(散空雷火樹), 천령 강로(天靈剛露)....... 실로 희세의 보물들이 쌓여 있었다. 백수범은 서책을 통해 겨우 그 모양이나 이름들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들은 단 한 가지만으로도 최소한 일 개 성(城)을 살 수 있을 만큼 값진 것이구나.' 백수범은 예나 지금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은 고사하고 치부에 전혀 뜻이 없었다. 더구나 전진동부 안의 보화들만 해도 고스란히 그가 취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때문에 백수범은 수많은 보화를 스쳐보기만 할 뿐 일체 관심을 두 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무르며 이채를 띄었다. 한 송이의 꽃(花). 그것은 화병에 꽂혀 있는 한 송이의 꽃이었다. 물론 살아 있는 꽃 이 아니라 보석으로 만든 꽃이었다. 백수범은 어쩐지 그 꽃에 마음이 강하게 이끌리는 것을 느끼며 화병으로 다가갔다. '향기가 없는 꽃이지만 모양만은 일품이구나.......'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보화(寶花)였다. 꽃잎은 모두 열 여덟 개 로 전부 종잇장같이 얇으며 순 황금으로 되어 있었다. 또한 꽃술 은 일곱 개였는데 그것들은 각기 적주황녹청남자(赤朱黃綠靑藍紫) 일곱 가지 색깔의 보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백수범은 정교한 꽃의 생김새에 찬탄하며 화병에서 꽃을 빼들었 다. 가지는 적색(赤色)이었다. 그러나 꽃송이를 빼는 순간 그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쨍강! 화병이 그의 팔꿈치에 걸려 바닥에 떨어지자 그만 박살이 난 것이 었다. 백수범은 낙심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내가 경솔했구나!" 그런데 이때였다. 깨어진 화병 조각 사이에서 그는 한 장의 양피지를 발견했다. '음?' 그는 급히 양피지를 풀어 살펴보았다. 전면에는 황금꽃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무척 정교하여 실물과 똑같았다. 그리고 양피지의 뒷면에는 몇 줄의 시(詩)가 적혀 있었다. 侍而熱沙中百年 日出開花黃昏落 嗚呼悲感斷腸花 열사(熱沙)의 사막에서 백 년 동안을 기다리다 해가 뜰 때 피어나 황혼이 붉게 질 때 시들어 떨어지니 오호라! 찢어지는 단장화(斷腸花)의 슬픔이여. 백수범은 시를 읽자 갑자기 처량한 느낌이 들었다. '단장화(斷腸花), 백 년 동안 사막에서 피기를 기다리다가 단 하 루 해가 뜰 때 활짝 피었다 해가 질때 시들어 버리는 비운(悲運)의 꽃.......' 백수범은 옛 책 속에서 전설의 꽃인 단장화에 대한 글을 읽은 적 이 있었다. 그것은 대막(大漠)에서만 볼 수 있다는 희귀한 꽃이었다. '그렇다면 이 인공꽃이 단장화란 말인가?' 백수범은 손에 든 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는 결심했다. '이걸 선택하자. 이 단장화보다 훨씬 값나가는 보물이 많을 지 모 르나 왠지 이것이 마음을 끈다.' 백수범은 시가 적힌 양피지를 접어 품 속에 간직했다. 단장화는 왼쪽 가슴 옷섶에 꽂았다. 그는 추호도 알지 못했다. 우연히 선택한 단장화가 활짝 피어 하 늘에 뿌려지는 날, 전 무림이 경악과 전율에 휩싸이게 될 것을.......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