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 전부터 'D-데이'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다.
예보를 피해갔던 우리 산악회의 요행(?)을 믿고 목적지를 향했다.
처음엔 요행이 작용하는 듯했으나 막바지에 이르러선 요행은 요행일 뿐, 과학(예보)이 입증되는 순간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에 빠진 새앙쥐꼴로 차 뒷쪽에서 환복만 할 수밖에 없었다.
병풍지맥 못재육교에서 철마봉을 오른 뒤 지맥을 이탈 큰월선봉·월선봉을 지나 호남고속도로 건너 봉형산과 제봉산을 차례로 올랐다.
‘철마봉(鐵馬峰 282.9)’은 철마와 관련된 이름이고, ‘큰월선봉(323.3)’은 지형도에는 보이지 않으나 지역민들이 부르는 이름.
‘월선봉(月仙峰 241)’은 달이 뜬 봉우리에 신선이 노니는 듯한 아주 운치있는 이름이나 그저 잡목더미에 갇힌 봉우리였다.
장성IC2교를 지나 네이버지도에 보이는 ‘봉형산(鳳形山 314.1)’은 ‘봉황산’으로도 불리며 봉황이 날개를 핀 형세여서 부르는 이름.
‘제봉산(霽峰山 325.5)’은 예전에 ‘啼鳳山’으로도 불렸다고하니 “봉황이 울어(제 啼) 장성이 안녕하다”는 이야기로, 제봉산이 장성의 수호신인 셈.
호남고속도로를 가운데 두고 신선(仙)과 봉황(鳳)의 두 산군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봉산 아래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충렬공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 1533~1592) 장군’의 ‘신도비’와 장흥고씨제각인 ‘제봉각(霽峯閣)’이 있고, 그 바로 뒤 제봉산 자락에 그의 무덤이 있다.
‘장성 고경명 신도비’는 그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비로 ‘윤근수(1537~1616)’가 비문을 썼다.
그가 순국하자 시신은 임시로 금산 산중에 매장했다가 화순군 흑토평에 모셔진 뒤 1609년 장성읍 영천리 오동마을 뒷산으로 이장한다.
그가 사망한 이후 이곳 제봉산 자락 사방 10㎞의 땅을 하사받는다.
그의 무덤이 그가 태어난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이 아닌 이곳에 있는 이유다.
그런데 그가 태어난 남구 압촌동 뒷산의 이름도, 그가 묻힌 장성읍 영천리 뒷산의 이름도 ‘제봉산(霽峰山)’이다.
참고로 역시 임란 때 진주성에서 순절한 그의 아들 ‘준봉 고종후(隼峰 高從厚)’의 묘소는 창원 준봉산 아래 ‘발산재’에 있다.
날머리로 삼은 '영천리마을회관'에서 300여m의 거리에 '영천리방울샘'이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돤 이 샘은 물이 방울처럼 솟아올라 '방울샘' 또는 '영천(鈴泉)'이라고 부른다.
마을이름이 탄생된 배경이지만 시간의 제약상 답사하지 못했다.
산행코스: 못재육교-<병풍지맥>-철마봉(지맥이탈)-큰월선봉-월선봉-장성IC2교-봉형산-제봉산-제봉정-정수장-고경명신도비·제봉각·묘소-영천마을회관(5 h)
궤적.
약 10km에 5시간 정도.
고도표.
참고하는 안내판.
미리 준비한 표지기.
'네비 주소창에 '장성군 남면 녹진리 산11-2'를 입력하여 '못재육교' 직전에서 버스를 댔다.
진입로는 우측 콘크리트 방호벽 뒷쪽으로 난 포장임도.
뒤돌아 본 모습.
진입 50여m 지점의 전봇대가 있는 지점이 병풍지맥길.
칡넝쿨과 가시덤불이 뒤엉킨 초입. 나는 골(谷)로 들어와 우측 능(陵)으로 붙은 일행들을 짚어본다. 어느 쪽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잠시 내려다 보는 못재육교.
이후 칡넝쿨지대에서 벗어나자...
△182.9m 삼각점봉에 올라서...
'준·희' 님의 표지기를 확인한다.
이후 개활지.
우측으로 조망이 트인다.
나아갈 봉형산과 제봉산 너머로 불태산(?)이가?
철마봉에 올라서...
표지기를 건 뒤 지맥을 벗어난다.
나는 무슨 버섯인 줄 알았더니, 또아리를 틀고 도망도 가지 않는 이놈은 독사다.
키작은 잡목으로 뒤엉켜 있는 이곳은...
큰월선봉.
이 지점의 등산로 안내판.
표지기를 건 뒤...
산길을 이어가다...
벤치가 있는 이곳에서 요기를 하였다. 이 지점이 갈림길이다.
길이 좋은 직진으로 곧장 내려가면 '신기마을'이고, 우리의 진로는 우측으로 꺾어야만 월선봉으로 가게 되는 것.
길찾기 난해한 곳은 주의를 기울여야만 할 것.
멧돼지 공중목욕탕을 지나...
무명 봉우리 하나를 넘으니 송전탑 뒤로 살짝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월선봉이다.
잡목더미에 둘러싸인 월선봉.
묘지를 지나...
우측으로 길을 찾으니 승용차가 보인다.
내려서는 곳은 밭. 농부가 밭일을 하고 있어 "죄송합니다"하였더니 아주 친절히 길안내까지 해준다.
농로를 내려서...
고속도로 아래를 지난다.
호남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하면...
다시 1번국도 '하서대로'. 대형트럭 뒤로 가려진 시멘트농로를 따른다.
시멘트농로를 오르다...
돌아본 건너온 횡단보도. 화살표 방향 주유소 옆으로 왔다.
농로 끄트머리의 판넬 농막 좌측으로 들어가 우측 능선으로 올라 붙었다. 계곡은 묵밭으로 잡초와 칡넝쿨이 엉켜있기 때문.
무슨 경계석인 듯.
올라선 능선에는 비석만 지키고선 묵묘가 널려있다.
300m대의 산이 이렇게 힘든가? 약 1시간 만에 헬기장인 듯 커다란 평지에 운동기구가 설치된 봉형산에 올랐다.
표지기를 건 뒤...
잘 닦여진 산길을 걸어...
제봉산으로 향하는데, 그 새 멈춰있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제봉산은 우측 오름길로 다녀와야해서...
이미 다녀갔다던 '청한수호'님은 패스해 내려가고, 나는 60여m의 고도를 높히며 왕복 400m를 다녀와야만 한다.
바위로 이루어진 제봉산엔...
거북이 닮은 바위가 있고...
시설물이 있으며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두 장의 사진을 얻은 뒤...
표지기를 걸었다. '제봉(霽峰)'은 고경명 장군의 호.
낙남정맥 발산재에 있는 그의 아들 ‘준봉 고종후(隼峰 高從厚)’의 묘가 있는 산은 그의 호를 따라 준봉산(隼峰山)이다.
'제봉정' 정자 직전에 커다란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정수장 1.1km'.
정자 가까이 가보자고 하였다.
제봉정 목판.
데크로 내려서는 길은 중앙초교 방향.
이정표가 가리키는 정수장으로 가는 길은 반듯하다.
중간지점의 이정표.
함초롬히 빗물 머금은 꽃무릇, 아니 백양화(白羊花).
안내판을 보며 두 꽃을 식별해 본다.
두 꽃을 공히 상사화(相思花)라고 부르지만 이 꽃은 '백양화(白羊花)'란다.
불갑사에 군락을 이룬 꽃이 '꽃무릇'으로 '석산(石蒜)'. 곧 잊을 테지만 공부다.
널따란 길.
이정표를 따라...
쭉쭉빵빵 산림욕장을 지나니...
시설물이 있는 아래에 커다란 도로가 지난다.
장성군은 옐로우 시티.
정수장을 지나...
제봉산 등산로 안내판.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중에 길옆으로 '고경명 신도비(전라남도 기념물 제241호)'를 접한다.
가까이 접근해...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글체의 흔적만 어렴풋이 짐작될 뿐 깜깜이다.
고경명 신도비는 충렬공 고경명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건립연대는 1800년대 초반이지만 비문 자체는 훨씬 이전에 윤근수(1537~1616)가 지었다. 신도비의 높이는 238cm.
거북받침돌 위에 비 몸을 새기고 높직한 머릿돌을 올린 모습.
고경명(1533~1592)은 서울이 함락되고 선조 임금이 평안도 의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전라도 지역에서 6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한 후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북상을 개시했으나 일본군이 호남지역을 점령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북상계획을 변경했다.
그는 충청의병장으로 있던 조헌에게 서신을 보내어 함께 금산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고경명은 1592년 7월 금산 도착 후 방어사 곽영의 병사들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눈벌에서 일본군에 포위되고 반격을 받아 조선군은 힘없이 무너지고 장졸들은 앞을 다투어 도주했다.
이에 뒤에 있던 의병부대의 사기도 저하되어 전선은 곧 붕괴되었다. 그때 고경명은 고인후, 유팽로 등과 함께 순절했다.<자료>
우중의 제봉각 솟을삼문 안으로 들어가...
4칸 팔작지붕의 제붕각을 올려다 보다...
현판을 카메라에 담는다.
제봉각 툇마루를 비켜보다...
뒷편 언덕에 자리한 장군의 묘소를 찾아간다.
고경명 장군의 묘소는 제봉산 자락에 있어 제봉산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것.
장군은 관군과 합세하여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기로 하고 800여 명의 정예부대로 선제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다투어 도망갔다.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었으나 그는 물밀 듯이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 유팽로, 안영 등과 순절했다.
그가 순국하자 시신은 임시로 금산 산중에 매장했다가 화순군 흑토평에 모셔진 뒤 1609년 장성읍 영천리 오동마을 뒷산으로 이장하였다.
묘역은 가족 묘역으로 우측 맨 위쪽에 고경명과 부인 울산김씨 부부 묘.
그 아래쪽에는 여섯째 아들 고용후(高用厚 1577~1652)와 부인 행주기씨 부부묘.
그 왼쪽에는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장남 고종후(高從厚 1544~1593)의 부인 철성이씨묘가 함께 있다.
고종후의 묘는 발산재에 있어 '준봉산,만수산,보잠산,작당산'을 산행하면서 답사하였다. <☞ 효열공 고종후 묘소>
묘표문.
고경명 장군의 묘소는 제일 상단부에 있으며, 묘지 양 옆에는 문인석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고경명은 문인 의병장이었다.
비석의 앞면.
비석의 옆면에 '고경명'과 '정경부인 울산김씨'가 새겨져 있다.
제봉각에 들어서며 두손 모아 공손히 합장한 '고재용' 님. 아무래도 감회가 남다른 듯.
"영천리 방울샘은 어디에 있어요?"
답사하고픈 한덤님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총무님 전화를 받은 뒤여서 눈 질끈 감고 귀환을 서둘렀다.
가까운 거리(300여m)에 있고, 마감시간(16:30)도 남은 상태이나 비를 맞고 일찍 귀환한 일행들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
커다란 팔각정자엔 동네 할머니들이 여러분 모여있고, 우리 일행들은 정자 한 귀퉁이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자, 출발이다."
뒷풀이는 버스 안에서 할 수밖에 없다.
음식은 치킨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간편하다.
첫댓글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노고에 감사합니다.
행복한 불금되세요^^
갑자기퍼붓기시작한비때문에제봉각이랑고경명장군묘등은패스했으므로 올리신사진과글로답사잘했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