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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31. 묵상글 (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 겨자씨를 뿌리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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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겨자씨를 뿌리자!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오늘도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첫째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로서
겨자씨는 하늘나라인데 어떤 사람이 그 씨를 자기 밭에 뿌린다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세 요소는 ‘어떤 사람’과 ‘겨자씨’와 ‘자기 밭’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이라고 하심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겨자씨 곧 하늘나라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주어지고 너에게도 주어지는 것으로서
누가 심든 주어지는 대로 겨자씨를 심기만 하면
그 씨는 크게 자라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씨가 중요합니다.
사실 씨란 겨자씨뿐 아니라 모든 씨가 작고,
작지만 크게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겨자씨 곧 하늘나라라는 씨를 뿌려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 씨를 뿌린다거나 악마의 씨를 뿌린다거나
욕망이라는 씨를 뿌릴 경우, 그때가 문제이고, 그 사람이 문제입니다.
자기 씨를 뿌리면 자기가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이고,
악마의 씨를 뿌리면 악이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이며,
욕망이라는 씨를 뿌리면 욕망이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밭’이 자기 마음일 수도 있지만
자기 교회나 자기 사업이나 자기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교회에 자기 씨를 심으면 자기 교회는 하늘나라로 성장하지 않고,
자기 소유의 나라가 되고 말 것이고 자기 교회가 대형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개신교 많은 대형 교회가 이런 식으로 커진 교회이고,
가톨릭의 경우엔 성당이 사제 개인의 소유는 아니지만
본당이 하느님 중심의 하느님 나라가 자라게 하는 사목이 아니라
자기가 왕인 양 자기중심의 사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겨자씨 곧 하늘나라의 씨앗을 뿌리는 사목이 아닌 겁니다.
자기 사업이나 계획도 하느님 사업이나 계획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식당에 가면 네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하다는 성경 구절을
달아놓곤 하는데 이처럼 자기 사업이 번창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는 협동조합과 식당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게 이 사업이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 방송을 타면 좋겠다고도 하십니다.
저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고 그래서 그것이 유혹으로 다가올 때도 있는데
저는 그것을 항상 경계하고 그럴 때마다 단호하게 끊어버립니다.
프란치스코가 세운 작은형제회의 작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작은형제회가 자기 수도회가 될까 봐 조심하였고,
작은형제회가 큰 수도회가 될까 봐 더 조심하고
그래서 형제들의 수가 갑작스럽게 늘어나는 것도 걱정했습니다.
사실 수도회가 큰 것이 중요하지 않고 복음적인 것이 중요하고,
형제들의 숫자가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한 명이라도 프란치스칸다운 프란치스칸이 있는 것이 좋겠지요.
제가 가끔 얘기하듯 저와 같은 사람 수만보다
프란치스코 성인 한 분이 세상을 진정 복음화하잖습니까?
그러므로 우선 내 안에,
다음으로 우리 공동체에 복음의 겨자씨를 뿌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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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 31)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에 이어,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 31)
‘겨자씨’는 유다 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밭’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가 모든 인류를 품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아니, 오히려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신께서도 아주 작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는 말에서, “깃들다”(κατασκηνω)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혹은 ‘올리베따노회 수도 가정’이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으로 반죽되는 것이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일 뿐입니다. 그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31)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작은 자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늘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으로 형제들 앞에 늘 작은 자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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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순리가 지배하는 나라
‘용두사미’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 대가리와 뱀 꼬리라는 말로, 시작은 요란하고 그럴듯하지만, 끝에 가서는 일이 흐지부지 흐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과감한 사람은 시작은 잘하지만, 끝을 맺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거나 소심한 사람은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나온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는 일은 거창하게 시작하여 흐지부지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눈에 보이지 않게 시작하여 점점 거창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고, 누룩이 밀가루 속에서 부풀어 오릅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의 법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내면에서 시작하여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말씀의 씨앗이 내 마음 안에서 자라나 기쁨으로 말씀을 행하게 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순리를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작고 큰 것이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큰일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면 인간의 일일 뿐이고, 순명으로 하면 주님의 일이 됩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주님의 일을 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인위적인 법이 지배합니다. 그래서 잘난 척하면 헐뜯는 사람이 생기고, 아는 척하면 무시하려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리고 힘센척하면 해치려는 사람이 생기고, 있는 척하면 뺏으려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물이 흐르면 물이 흐르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모두를 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은 힘이 들지만 머지않아 큰 나무가 되고,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큰일을 위한 준비가 되느니만큼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겨자씨 안에는 큰 나무를 감추고 있고, 조그마한 누룩 덩어리는 위대한 능력을 이미 지녔습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누룩은 안에서 밖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그러나 분명 그 열매를 얻기까지는 햇빛과 비, 그리고 거름도 필요합니다. 주변의 잡풀을 뽑아주어야 하고 땀과 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수고와 땀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다르게 다가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똑같은 열매를 주고 싶어 하지만 관리하지 않는 사람은 튼실한 열매를 수확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누룩처럼 부풀어 오를 수 있는 하느님의 에너지가 있고 겨자나무가 될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열매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주간 하느님께서 주신 각자의 탈란트를 찾고 가꾸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혹 나에게 주어진 몫이 미약하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때가 되면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연일 폭염경보가 내려지고 있습니다.
건강관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 돼지가 열받으면? 바베큐가 된답니다.
가장 뜨거운 과일은? 천도복숭아랍니다.
여름을 가장 시원하게 보내는 사람은? 바람난 사람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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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크루즈 여행 중에 ‘직원 장기자랑’을 보았습니다. 직원들 중에 장기와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공연 하였습니다. 노래, 악기연주, 춤, 봉체조, 코미디를 선보였습니다. 전문가들이 보여 주었던 화려한 조명과 의상은 아니었지만 직원들의 ‘끼와 재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 팬데믹 때 저도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위해 ‘피아노’ 연습을 한 적이 있습니다. 2020년 겨울 동북부 엠이 송년모임에서 ‘모두가 사랑이예요.’를 녹화해서 들려드렸습니다. 부족한 연주와 노래였지만 제게도 그런 재능이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23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성탄 전야 미사 전에 본당 장기자랑이 있었습니다. 저는 수녀님들과 ‘하얀 성탄’을 준비했습니다. 하얀 성탄을 불러서인지 2000년 성탄 밤 미사가 끝나니 눈이 무릎까지 왔습니다. 성당버스도 운행할 수 없었고 우리는 모두 성당에 남아 전에 막걸리를 마시며 예수님의 성탄을 밤을 새워 축하했습니다.
신부님들 중에는 전문가 수준의 ‘끼와 재능’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인명구조 요원’ 자격증이 있는 신부님도 보았습니다. 신부님은 크로아티아 드브로닉으로 여행 갔을 때 ‘사람 살려!’라는 소리를 들었고, 즉시 바다로 뛰어들어 한국 여성을 구조했다고 합니다. 인명구조 요원이 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벽돌을 손에 들고 바다 위에서 한 시간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근력과 힘이 있어야 사람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경침과 수지침’을 전문가 이상으로 배운 신부님도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맥시코로 가서 원주민들을 도와주기도 했고, 매년 미국에 와서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80이 훌쩍 넘으셨는데도 건강한 몸으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끼와 재능은 아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공존의 그늘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동창도 있습니다. 10년을 교정사목을 위해서 일하였고, 출소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출소자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펀드를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고시촌에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그의 기도와 영성으로 교회에 큰 선물을 남겨 주었습니다. ‘영신수련’이라는 기도방법입니다. 영신수련의 내용은 잘 모를지라도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는 알 수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은 영신수련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절대반지’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두개의 탑’은 그리스도의 깃발과 사탄의 깃발의 대결입니다. ‘왕의 귀환’은 종말이 이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영신수련은 성경 말씀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길잡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복음 선포,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여정을 영신수련의 안내에 따라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영신수련은 ‘두개의 깃발, 세 가지 유형의 사람, 겸손의 3단계’를 통해서 예수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영신수련은 지난날의 잘못을 돌아보며 죄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잘못을 했음에도 잊지 않고 나를 기억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2000년부터 영신수련을 통한 30일 피정을 함께 했으니 어느덧 23년이 되었습니다. 매주 금요일이면 왕복 200킬로를 달려서 기도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화려한 꽃이 피기 위해서는 땅 속 어두운 곳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가 있어야 하듯이 영신수련은 제 삶의 뿌리와 같았습니다. 오늘 이냐시오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영신수련 23항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취할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무익하면 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본인의 장기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7월 31일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여러분의 ‘장기’가 있다면 무엇이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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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이냐시오 성인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작년 저는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 코스 안에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를 방문하는 코스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가 안에 있는 작은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이냐시오 성인이 방문했던 몬세랏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이냐시오 성인은 블랙 마돈나(검은 성모님) 앞에 자신이 차고 있던 기사의 칼을 봉헌합니다. 그리고 그는 넝마를 입고 그 넝마를 그리스도의 갑옷이라 불렀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 수련’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주님의 품으로 이끌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작디작은 것으로 시작하여 아주 커다란 것이 되는 것을 비유로 들려주십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오늘 기념하는 이냐시오 성인의 일대기와 참으로 비슷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수도자들과 ‘예수회’를 창설합니다. 그리고 수련에 수련을 더해 나아갑니다.
그렇게 작인 겨자씨 같던 이냐시오 성인의 예수회는 교회 역사 안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 역할을 하였고,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하느님을 사랑하겠다는 다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의 왕을 주군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겠다는 이냐시오 성인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냐시오 성인의 이 마음을 다시 한번 묵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주인은 세상도 아니요, 세상이 주는 권력이나 돈도 아니요.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8월로….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의 반 이상이 지나갔네요.
‘데이비드 보위’는
나이가 드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상적인 인간이 되어가는
놀라운 과정이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상적인 인간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다음 달에는 조금 더 이상적인 인간에
다가가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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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99년 가족 여행으로 태국에 다녀왔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어 해외에 나간 것이지요. 더군다나 부모님을 비롯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자리여서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결정적으로 음식까지도 전혀 다른 나라였습니다. 그때 정말로 저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음식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쌀국수입니다. 워낙 국수를 좋아하는 저였기에 아주 맛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국물에서 심한 화장품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 쌀국수를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바로 ‘고수’라는 풀 때문이었습니다. 음식에 화장품 냄새 나는 풀을 넣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마치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거의 25년 전의 일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신부들과 종종 베트남 식당에 가서 쌀국수를 먹습니다. 그런데 “고수 빼고요~~~”라고 말하지 않고, “고수 많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고수와 쌀국수가 입에 함께 들어왔을 때의 맛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고수가 있기에 쌀국수의 맛이 배가 된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1999년의 저는 고수를 즐겨 먹는 지금의 저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맛의 취향이 이렇게 바뀝니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단정 지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반드시 정답일 리 없습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참’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열린 마음이 있어야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너머에 있는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당시에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볼 수 있는 것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관해 설명해주시지요. 즉, 하늘 나라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지금 삶에서 하늘 나라를 매번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습니다. 너무 작아서 ‘무슨 씨앗이 이렇게 작아?’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자라면 그 작은 씨가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나무로 변합니다. 누룩 역시 마찬가지로 ‘이렇게 적은 양으로 무슨 변화가 있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밀가루 서 말 속에 아주 적은 양만을 넣어도 온통 부풀어 오릅니다.
겨자씨만 가지고 큰 나무를 상상하기 힘듭니다. 누룩만을 가지고도 부풀어 오르는 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도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만으로 결론 내는 것이 아닌,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지혜만이 하느님 나라 안에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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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존 드라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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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3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의 삶
-사랑의 관상, 사랑의 활동-
오늘 하늘 나라의 비유가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우선적으로 회복해야할 관상적 삶입니다. 너무 시끄럽고 분주한 세상입니다. 자기를 잃고, 잊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하늘 나라의 비유가 하늘 나라의 관상적 삶의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평생 관심사는 하늘 나라였고 활동가 이전에 사랑의 관상가였음이 드러납니다. 사랑의 관상가에 이어지는 사랑의 활동가 이것이 답입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예수님의 관상적 시각을 엿볼수 있습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고요중에 놀랍게 새롭게 펼쳐지는 삶의 기적은 얼마나 많은지요. 매사 침묵중에 깨어 잘 살펴보며 기다려야함을, 하느님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고 잘 도와 드려야 함을 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요히 바라보며 잘 협조해드리는 일뿐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보다시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없는 인내의 기다림이 필요할 뿐입니다. 때에 맞춰 가꾸고 돌보는 일만하면 됩니다. 아무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막을 수 없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잘 협조하면 됩니다.
겨자씨의 비유에 이어 누룩의 비유도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밀가루를 부풀리는 누룩의 효소처럼 하늘 나라도 그렇게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참으로 침묵중에 깨어 기다리며 섬세히 살펴 봐야 하는 그대로 관상적 활동의 삶입니다.
말씀도 개인도 공동체도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그대로 하늘 나라의 실현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겨자씨처럼 고요한 변화중에 놀랍게 성장하는 말씀의 겨자씨, 개인의 겨자씨, 공동체의 겨자씨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누룩처럼 주변을 사랑으로 기쁨으로 희망으로 평화로 부풀리는 말씀의 누룩, 개인의 누룩, 공동체의 누룩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적절한 예가 여기 요셉수도공동체입니다. 이제 잘자라 많은 이들이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가 되었고 세상을 부풀리는 희망과 기쁨, 사랑의 누룩이 되었습니다.
정말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때를 기다리며 순리대로 살 때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겸손한 인내의 기다림이, 고요히 깨어 살펴보며 하느님 하시는 일에 경탄하며 겸손히 협력해 드리는 관상적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래서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온힘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가 절대적입니다.
이렇게 살면서 하느님의 일에 잘 협력해 드릴 때 비로소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예표와도 같은 탈출기의 모세입니다. 관상과 활동이 통합된 하늘 나라를 사셨던 두분입니다. 눈만 열리면 하늘 나라의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이요, 이런 세상에 대한 놀라움, 새로움의 관상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을 공부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결국은 기도와 말씀 공부로 이어집니다. 오늘 탈출기의 모세의 삶은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반복되는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잘 자란 사랑의 겨자나무와 같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화를 위한 사랑의 누룩같은 모세의 존재입니다.
다시 상황이 어려워지자 하느님의 은혜를 잊고 현실의 우상을 택하는 구제불능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하시는 하느님 앞을 가로막고 나서는 기도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 모세입니다. 하느님과 대담히 담판하는 듯한 모세의 모습에서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더불어 백성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배웁니다. 다음 모세의 기도가 정말 감동적입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주십시오.”
진정성 가득한 배수진을 친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의 분노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분명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모세만 아니라 모든 성인들이 끊임없이 내적으로 성장하는 사랑의 겨자나무와 같고 사랑의 누룩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 성인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이었던 성 이냐시오 로욜라는 그대로 하늘 나라를 사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에도 참 잘 어울리는 성인입니다.
성인의 작은 겨자씨는 지금도 거대한 나무로 자라고 있는 나무가 되었고, 성인의 복음의 누룩, 사랑의 누룩 역시 지금도 예수회는 물론 교회를,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 생생한 증거가 예수회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깃들이는 큰 복음의 겨자나무가 되었고, 교회를, 세상을 부풀리는 복음의 누룩이 되어 살고 계신지요!
늦은 나이 46세에 사제품을 받은 성 이냐시오의 삶도 감동적입니다. 성인의 생활은 극히 검소하고 엄격했으며 수면 시간은 3시 간에 불과했고, 많이 기도하고 고신극기했으며 소박한 음식에 만족했다 합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며 온순했고 매우 사랑에 가득 찬 태도로 대했습니다. 성인의 개인 생활 원칙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는 예수회의 모토가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성인처럼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살 때 관상과 활동의 통합된 삶과 더불어 계속 성장하는 복음의 겨자나무로, 계속 공동체를, 세상을 부풀리는 복음의 누룩이 되어 살 수 있겠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장하는 희망과 기쁨, 사랑의 겨자 나무가, 성숙시키는 누룩이 되어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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