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성 제2권 제11장 토지묘(土地廟)의 재회(再會) ① 개봉부(開封府). 천년고도인 개봉성에 봄(春)이 왔다. 개봉성은 관청과 상점, 기루, 주점들이 서둘러 새롭게 단장하는 풍물로 바쁜 모습이었다. 그 가운데 짧기만한 봄날의 햇살은 황혼 (黃昏)과 함께 가라 앉아 갔다. 개봉성 밖 토지묘(土地廟). 이곳은 과거 십오 명의 기이한 거지들이 살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 년 전 십오 명 중 여덟 명이 죽은 후 살아 남은 일곱 명의 거지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황혼이 짙게 물든 저녁. 이곳에 한 백의서생(白衣書生)이 찾아왔다. 그는 준수한 용모였으나 일신상에 걸친 백의는 어지간히도 낡아 있었다. 어떻게 보나 영락없는 낙척서생(落拓書生)이었다. 백수범(白秀凡)이었다. 그는 휘적휘적 토지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집으 로 돌아가는 듯 한가롭고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이 년(二年). 이 년 만에 그는 돌아온 것이다. 그 사이의 변화는 실로 엄청났다. 토지묘가 가까워질수록 백수범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 가 어렸다. 지금 그의 가슴은 오랫만에 귀향하는 설레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침내 그는 토지묘에 도착했다. 끼--- 익! 먼지 투성이의 토지묘 문을 열고 그는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침 침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사당 안은 여전히 옛날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조금도 변함이 없구나.' 백수범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과거의 흔적을 살피며 천 천히 거닐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흐흐! 흐흐! 흐......!" 갑자기 사방에서 무시무시한 괴소(怪笑)가 울려퍼지는 것이 아닌가? 백수범은 흠칫 놀랐 다. "애송이 놈, 죽어라!" 일갈대성과 함께 느닷없이 천장에서 한 줄기 흑영이 섬전처럼 떨 어졌다. 그 자는 양 손에 쌍필(雙筆)을 쥐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번개같이 순식간에 십팔 필(十八筆)을 공격해왔다. 슈슈슈...... 슉! 백수범은 전신 십팔 개 사혈에 구멍이 뚫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 다. 그러나 그의 손은 이미 일 장을 내치고 있었다. 파파파팍! 두 가닥 경기가 불꽃을 튕기며 작렬했다. '웃, 대단한 내공이구나!' 백수범은 손 끝이 저림을 느끼자 가슴이 섬뜩했다. "흐흐!흐! 제법이구나. 천마성의 네째 나으리, 이것도 받아 보시지?" 위--- 잉! 무서운 장력이 홍광(紅光)을 띄우며 좌측에서 번쩍 발출되었다. 백수범은 크게 놀랐다. '이건...... 홍살장(紅殺掌)!' 꽝---! "윽!" 백수범이 우장을 뻗자 상대는 나직한 비명과 함께 뒤로 주르르 밀 려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시에 광소가 터졌다. "크흐흐!흐......." 사방에서 다섯 명의 인물이 나타나 백수범을 포위했다. 그들은 한 결같이 복면을 하고 있었다. 백수범은 가운데 우뚝 선 채 그들을 침착하게 노려보았다. 그들 중 키가 크고 깡마른 복면인이 음산한 괴소를 발하며 말했다. "흐흐흐......! 과연 명불허전이다. 요즘 몇 달 사이에 천마잠룡 (天魔潛龍) 공손기의 이름이 강호를 진동한다 했더니 이제야 그 까닭을 알겠구나." 그 말에 백수범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깡마른 복면인이 오히려 놀라더니 버럭 외쳤다. "왜 웃느냐? 애송이 놈!" "핫핫핫! 말라깽이 한(韓) 나으리, 이제 그만 웃기시오." "뭣이!" 복면인들이 한꺼번에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깡마른 복면인은 이내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복면을 벗었다. "핫핫핫핫! 수범, 너의 눈은 속이지 못하겠구나." 드러난 얼굴. 그는 바로 일곱 명의 거지 중 소매치기 한상위(韓相位)였다. "푸하하하하!" 일시에 폭소가 터지는가 싶더니 복면인들은 모두 복면을 벗어제꼈 다. 그들은 바로 이 토지묘의 주인들로 왕우평, 광요, 만홍걸, 냉 전수, 형가위, 소연옥 등이었다. 백수범의 얼굴은 온통 반가운 미소로 뒤덮혔다. 일곱 명의 거지들 도 마찬가지였다. 한상위는 덥썩 그의 손을 잡으며 격동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수범, 오랫만이다. 정말 몰라보게 컸구나." 왕우평도 다가와 백수범의 어깨를 쳤다. "신수가 훤해졌어? 허허허허! 그 정도면 이 왕(王)어르신과 합작 해도 무슨 일이든 해내겠구나." 그러자 냉전수가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돼지 놈, 그저 만나자마자 또 사기치는 얘기구나." 왕우평은 핏대를 올렸다. "이 돌팔이 의원놈아, 왜 또 시비냐? 시비가!" 광요가 큰 눈을 굴리며 기묘한 웃음을 흘렸다. "헤헤헤! 그만 떠들어라. 수범이 욕할라. 다 큰 놈들이 어린애 같 이 철이 안 났다고 말이다." 왕우평은 험상궂게 눈을 부라렸다. "닥쳐! 올빼미 눈깔같은 놈아. 나이도 별로 먹지 않고 너처럼 팍 삭 늙어버린 놈보다는 그래도 우리가 백 배나 낫다." 그들의 다툼은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백수범은 빙그레 웃으며 나섰다. "자, 여러분. 다들 그만 하시오." 모두들 비로소 입을 다물었다. 백수범은 느긋한 여유를 보이며 말했다. "아무튼 당신들은 이 년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려." 그 말에 이제 완연한 여인(女人)으로 성숙한 소연옥이 달콤한 음성으로 끼어 들었다. "오빠, 정말 오랫만이에요." 소연옥은 전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입고 있는 황의는 예전과 다름 없이 허름했으나 오히려 그녀의 완숙한 용모를 대조적으로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백수범은 눈부신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옥, 정말 많이 컸구나." 그는 밝게 웃으며 덧붙였다. "하하하! 이제 완전히 처녀티가 나는구나." "아이, 오빠도......." 소연옥은 허리를 묘하게 비틀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를 바라보던 한상위가 낄낄거렸다. "수범, 연옥 저 계집애는 그저 자나깨나 자네 생각만 했다. 그 동 안 얼마나 울고 보챘는지 우리가 혼줄이 났다. 혼줄...... 앗!" 갑자기 그가 비명을 질렀다. 소연옥이 그를 꼬집은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한대가, 그 무슨 터무니없는 말을!" "핫핫핫핫!" 모두들 그 광경에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은 웃음 을 뚝 그쳤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백수범의 주위로 모 여 그의 손과 어깨 등을 잡았다. 그들 사이에는 소리없는 뜨거운 정(情)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모두 뽀얗게 안개마저 어렸다. 뚱뚱이 왕우평이 코를 훌쩍였다. "빌어먹을.... 수범, 정말 반갑다." 평소 성격이 차갑기만 하던 돌팔이 의원 냉전수도 격정이 배인 음성으로 말했다. "전혀 몰라볼 정도야. 수범, 정말 네가 그 때 그 약골이냐?" 광요가 갑자기 들뜬 음성으로 외쳤다. "야! 형(形)가야, 뭐하느냐? 어서 음식 장만을 해야지? 네 놈의 솜씨는 다 썩었느냐?" 왕우평이 입맛을 다시며 맞장구쳤다. "맞다. 형가 놈아, 오늘같은 날 멋지게 마시고 놀아야지 언제 또 즐기겠느냐?" 형가위. 타락한 요리사는 눈을 부릅떴다. "돼지같은 왕가 놈아, 떠들지 마라! 그러지 않아도 시작하려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두 팔을 둥둥 걷어부치고 있었다. "수범, 조금만 기다려라. 이 형가 어른이 곧 기가 막힌 음식을 준비하겠다." 그 말에 백수범은 감회 깊은 음성으로 답했다. "당신의 그 훌륭한 요리를 먹어본 지도 너무나 오래 되었소. 그 동안 잊어버렸지만 어디 기대해 보겠소." 형가위는 대소를 터뜨리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모두들 들떠 있었다. 그들은 젯상을 끌어다놓고 치운다, 자리를 만든다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② 황량했던 토지묘는 오랫만에 훈훈한 인정(人情)으로 넘쳐 흘렀다. 백수범과 일곱 명의 거지 들은 술과 음식을 들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들은 술이 거나하게 돌자 취흥이 도도해졌다. 백수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실로 이 년만에 이같이 훈훈하고 부담없는 분위기를 접한 셈 이었다. 그는 그 동안 자신이 겪은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일곱 명 의 거지들에게 얘기했다. 천하인들에게 다 숨길 망정 이들에게만 은 조금도 숨기고 싶지 않은 게 그의 진심이었다. 모두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때에는 바 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고 또 어떤 때에는 무릎을 치며 대소를 터 뜨리는 등 좋아하기도 했다. 이를 테면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감 정의 동화(同和)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길고 긴 백수범의 얘기가 모두 끝났다. 먼저 한상위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정말 등골이 오싹해지는 얘기로군. 나같은 놈은 그런 곳에 서 한 달만 있어도 심장이 터져 죽을 거야." 그 말에 왕우평이 클클 괴상하게 웃었다. "너같은 놈은 한 달도 되기 전에 목이 댕강 잘려 하늘에서 춤을 추게 될 것이다." 한상위는 침을 뱉으며 응수했다. "흥! 네 머리통 같으면 제삿상에나 필요할 지 모르나 내 머리가 무슨 볼품이 있다고 잘라 가겠느냐?" "뭐, 뭐라고? 제삿상에?" 왕우평은 화가 잔뜩 나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상위의 말 은 결코 틀린 게 아니었다. 화가 나서 부어오른 그의 피둥피둥한 얼굴은 정말로 제삿상에 어울릴 것 같았다. 이때 냉전수가 고함을 질렀다. "또 싸우냐? 이 빌어먹을 속물들아." 왕우평과 막 일어섰던 한상위는 찔끔하여 도로 주저 앉았다. 냉전수는 술을 한 사발 들이킨 후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수범,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아느냐?" "모르오." 백수범이 고개를 흔들자 냉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역시 우여곡절이 많았다." 왕우평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 천면신개라는 늙은 뼉다귀로부터 칠절신보(七絶神譜)와 일곱 개의 취옥환(翠玉丸)을 받기는 받았지. 그러나 막상 우리에게는 어디든 갈 곳이 없었다." 한상위가 뒷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두세 달 간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우연히 섬서성(陝西省) 태백산(太白山)에서 하나의 동굴을 발견했다." 형가위는 기름 묻은 손을 마주치며 박장대소했다. "핫핫핫!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수범, 그 동부가 무엇인지 아느냐?" 한상위도 히죽 웃었다. "놀랍게도 그건 오백 년 전 칠절신보를 작성한 장본인인 칠절신군 (七絶神君)의 칠절동부(七絶洞府)였단 말이다." 백수범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게 정말이오?" 한상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우리가 거짓말을 하겠느냐?" 그러자 이제껏 가만히 있던 광요가 설명했다. "칠절동부에는 칠절신보의 상편과 중편이 있었다. 우리가 가진 것 은 하편에 불과했는데 그것을 얻으므로 해서 완벽해졌다." 냉전수가 다시 나섰다. "그 칠절동부 안에서 우리는 근 일 년 반을 보냈다. 하늘의 뜻이 었는지 그곳 석벽에는 수많은 천년석균(千年石菌)이 자라고 있었 다. 그것을 식사 대용으로 먹으면서 공력(功力)이 급증했지." 백수범은 크게 놀랐다. '천년석균? 그 절세의 영약을? 그래서 이들의 내공이 그토록 강했구나.' 왕우평이 술을 들이키며 투덜댔다. "젠장, 그러나 네가 알다시피 우리가 언제 무공이란 것을 배운 적 이 있었느냐? 정말 고생고생해서야 겨우 터득했다. 그것도 모두 연옥, 이 계집애 덕분이었다. 이 계집애가 아니었다면 우린 글씨 도 해독하지 못했을 거다." 백수범은 소연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겨운 눈빛으로 그를 줄곧 보고 있었다. 또한 눈길이 마 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미소지었다. 냉전수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정말 기이한 일이 있더란 말이다." "뭐가 기이하단 말이오?" 백수범의 물음에 이번에는 소연옥이 대답했다. "오빠, 알다시피 우리는 일곱 명이잖아요. 그런데 칠절신보의 상 중하 세 권에도 우연의 일치인 지 꼭 일곱 가지의 무학들이 수록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각기 한 가지씩 모두 틀린 절기를 터득할 수 있었죠." "으음?" "예를 들어서 한대가 같은 경우에는 상편에서 미가영별수공(彌迦 永別手功)과 중편의 무흔환영종(無痕幻影宗)이라는 경공을, 그리 고 하편에서는 칠절동부 안에 있는 일곱 가지 무기 중 탈천신편 (奪天神鞭)을 얻어 탈천삼십육편법(奪天三十六鞭法)을 익혔어요." 소연옥은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미가영별수공은 그 공력이 경(經)과 쾌(快)로 이루어져 있어요. 빠르기가 전광석화같아 도저히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죠. 또 무흔 환영종도 경공으로 천하절기예요. 일단 전개하면 그림자밖에 보이 지 않아요. 그리고 탈천신편은 매우 특이한 무기로써 상대의 어떤 병기도 탈취하는 효용이 있거든요. 역시 변화무쌍한 편법이에요. 호호! 한대가는 이미 이 세 가지 무공을 거의 완전히 익혀 실력이 대단해요." 그 말에 한상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흐흐흐! 보통이지. 그 정도는." 왕우평이 아니꼽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흥! 한가 놈의 소매치기 도둑질만 더 도와준 셈이 되었지." "뭐라고? 이 뚱보 놈이?" 그들은 또다시 목줄기에 핏대를 세웠다. 소연옥이 그들 사이에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아이, 두 분 다 좀 참으세요." "음." "으흠!" 두 사람은 마지 못한 듯이 물러났다. 그런데 한상위가 무엇을 생 각했는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백수범에게 말했다. "수범,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한상위의 표정이 엄숙하게 변했다. "너는 정말 천하(天下)를 얻고 싶으냐?" 백수범은 흠칫 놀라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한상위의 눈빛은 여 태까지와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백수범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는 목적 에서만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오." 한상위는 씩 웃었다. "좋다! 그럼 결정하자." 백수범이 의아해 하는 가운데 그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자, 너희들 어떠냐? 수범이 천하를 얻고 싶어한다." 나머지 거지들의 안색이 기묘하게 변했다. 한상위는 괴상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좋다! 너희들도 찬성하는 걸로 알겠다." 그는 이어 백수범을 향해 짐짓 숙연하게 입을 열었다. "수범, 나의 특기는 소매치기다. 그러나 지금까지 취한 것은 모두 가 작은 것에 불과했다. 네가 계획을 세워라. 내 너를 위해 천하(天下)를 훔쳐주겠다." 백수범은 눈썹을 꿈틀했다. 그러나 왕우평이 즉시 맞장구쳤다. "좋다! 한가야, 이제까지 한 말 중 제일 멋진 말을 했다. 너의 특기가 훔치는 것이라면 나 는 사기꾼이다. 나는 평생을 걸고 수범을 위해 천하를 상대로 사기를 쳐 보겠다." 그 말에 만홍걸이 히죽 웃더니 두리번거렸다. "수범, 뭐 필요한 것 없느냐? 뭐든지 만들어 주겠다. 그 어떤 것 도 똑같이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렇지만 히히......! 여자의 그것 만은 안 된다. 아직 총각이므로 그 물건은 본 적이 없으니까." "어머?" 소연옥의 얼굴이 완전히 홍당무가 되었다. "와하하하!" 장내는 완전히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웃음이 그치자 광요가 큰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나의 이 큰 눈도 어쩌면 쓸모가 있을 것이다. 수범, 목숨을 걸고 너를 도와주마." 냉전수도 빠지지 않았다. "모두들 열심히 뛰어라. 그러다가 팔다리 부러지거나 다치는 놈은 나에게 와라. 숨만 붙어 있으면 내 염라사자도 헛걸음치게 할 수 있다." 형가위도 호탕하게 웃으며 다시금 소매를 걷어 부쳤다. "하하하! 천하가 수범의 손에 들어가는 날, 나는 수범과 너희들을 위해 내 평생의 음식 솜씨를 총동원하겠다." 그는 소연옥을 돌아 보면서 물었다. "연옥, 너는 수범을 위해 무엇을 하겠느냐?" 소연옥은 다정한 눈으로 넌즈시 백수범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녀는 막상 그와 또다시 눈길이 부딪치자 이번에는 얼굴을 붉힐 뿐 아니라 고개까지 떨구었다. 그녀의 입은 달라붙은 듯 떼어지지 않았다. 왕우평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형가야, 너는 왜 그렇게 눈치가 없느냐? 솔직히 살만 나누지 않 았다 뿐이지 너는 연옥과 수범이 한 몸이라는 걸 잊었느냐?" 그 말에 소연옥은 아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왕대가!" 그녀는 더이상 부끄러움을 못참겠는지 그만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 다. 그 모습에 한상위가 툴툴거렸다. "쯧, 주책맞은 뚱보 놈 같으니." "우하하핫핫핫!" 장내에는 또다시 폭소가 번졌다. 그들은 연신 술을 마시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정녕 허심탄회한 정(情)이 흘러넘치는 풍경이었다. ③ 월광(月光)이 쏟아져 내렸다. 토지묘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한 야산이었다. 한 그루 향목(香木) 아래에 두 명의 남녀가 서로 기대 앉아 있었다. 달빛이 나뭇가지 를 뚫고 얼기설기 그물 무늬를 이루었다. 소연옥은 백수범의 가슴에 살며시 어깨를 기댄 채 그윽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달콤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술을 살짝 열었다. "오빠." 얼룩무늬진 달빛에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신비로왔다. 백수범은 고혹적인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 봄으로써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소연옥은 기어 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겨우 말을 꺼냈다. "그동안 정말 그리웠어요." 백수범의 가슴에 뜨거운 물결이 번졌다. "연옥,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 "정말?" "그럼." 소연옥의 얼굴에는 기쁨의 빛이 피어 올랐다. 완전히 성장한 그녀의 용모는 그야말로 들판의 야생마처럼 신선한 매력이 넘치고 있었다. 그녀는 흠뻑 취한 표정으로 백옥같은 손을 내밀어 백수범의 가슴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녀는 중얼거리듯 나직히 말했다. "오빠에게 그동안 저의 신세를 말한 적이 없었죠?" 소연옥의 아름다운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설움 이 솟는 듯 백수범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원래 저의 부친은 산서성(山西省)의 소운장(素雲莊)이란 곳의 장 주이신 운진천검(雲震天劍) 소붕우(蘇朋雨)라고 해요. 그런데 어 느 날 우연히 절세기보를 얻음으로써 불행이 닥쳤어요." "절세기보?" "그것은 자웅쌍봉주(雌雄雙鳳珠)라는 것이었어요. 결국 그로 인해 소운장은 참화를 당해야 했어요. 흑흑......! 일단의 복면인들이 침입하여 닥치는 대로 가솔들을 죽였고... 소운장은 잿더미가 되고 말았어요......." "으음......." 백수범은 신음을 흘렸다. 소연옥의 신세를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는 가볍게 오열하는 소연옥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소연옥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당시 부모님께서는 처참하게 돌아가셨어요. 하나뿐인 언니 연영 (娟英)도 실종되고 말았어요......." 백수범은 그녀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연옥, 그런데 흉수는 알고 있느냐?" 그녀는 섬섬옥수로 눈물을 훔쳤다. "복면을 하고 있어서 정체를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한 가 지는 기억나요. 그들의 우두머리가 왼손 손가락이 네 개밖에 없었 어요. 새끼 손가락이 없었어요. 그것만이 유일한 단서예요." 웬일인지 백수범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소연옥은 흐느낌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소운장이 불타고 저는 간신히 도망쳐 나오긴 했지만......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그러나 이곳 토지묘에서 여러분들을 만나고 특히......." 소연옥은 촉촉히 젖은 얼굴에 담뿍 미소를 담았다. 마치 비에 젖 은 해당화가 햇살을 받은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오빠를 만난 이후로 저의 슬픔은 조금씩 사라졌죠." 백수범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자 소연옥은 그의 품에 완전히 기대게 되었 다. 그녀는 나긋한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더니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오빠는 언제나 손에 잡히지 않는 새같기만 했어요. 너무나 멀리 있는......." 백수범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나무랐다. "바보같은 소리." 그러나 소연옥은 불현듯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이 년 전, 토지묘에 네 명의 무서운 마두들이 쳐들어 왔을 때 그 자들은 저를 마구 희롱했죠......." 백수범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때 일은......." 백수범은 말끝을 흐렸다. 그것은 새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슴아픈 기억이었다. "그때 전 무척 당황했어요. 더러운 마두들에게 순결을 짓밟히면 어쩌나 해서....... 그때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소연옥은 얼굴에 홍조를 띄웠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오빠 생각이었어요. 부끄럽지만 차라리 그 전에 오빠에게 모든 것을 바쳤더라면 하는....... 전 당시 혀를 물고 자결하려고 했어요." 백수범은 쓴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만해라. 연옥." 그러나 소연옥은 고개를 들어 그의 손을 떨쳤다. 이어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오빠, 사랑해요......." 백수범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문득 망연해지고 있었다. 소연옥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불안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오빠....... 혹 기분이...... 상하셨나요?" 백수범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옥." "네, 오빠......." 백수범은 그녀의 두 손으로 얼굴을 받쳐 들었다. 그의 눈이 소연 옥의 눈을 깊이 바라보고 있었다. 소연옥은 눈물어린 눈으로 마주 보았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마치 작은 새가 가슴을 할딱거리듯 백수범의 말을 기다리며 그녀는 떨고 있었다. 마침내 백수범의 입술이 떨어졌다. "내...... 너와 평생을 함께 하겠다." "아!" 소연옥은 탄성을 발했다. 그녀의 뺨으로 기쁨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백수범은 그녀의 눈물젖은 눈에 살며시 입술을 댔다. 그는 혀끝으로 천천히 눈물을 핥아갔 다. "아아......." 소연옥은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믿을 수 없는 행운이 찾아온 듯, 평생 불행하게 살아온 그녀의 작은 가슴에 갑자기 찾아온 벅찬 감 동이 그녀로 하여금 걷잡을 수 없이 떨게 했는지도 몰랐다. 백수범의 입술이 그녀의 젖은 뺨으로 내려오더니 그녀의 작고 예 쁜 입술을 찾아 포갰다. 두 사람의 입술이 하나로 합쳐졌다. 우주의 흐름이 정지되었다. 두 사람은 깊고 뜨거운 입맞춤에 모든 마음을 합일시켰다. 처음으로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백수범은 소연옥의 입술과 치아를 열고 그녀의 혀를 빨아들였다. 그는 혀를 통해 그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뜨거운 입맞춤에 소연옥의 영혼은 마침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몸은 한덩어리가 된 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쓰러졌다. 휘황한 봄밤의 월광이 언덕을 비추는 가운데 두 남녀의 몸이 하나가 되어 뒹굴었다. 백수 범의 손길은 소연옥을 감싸고 있던 옷자락을 한 겹 두 겹 벗겨 나갔다. 소연옥은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녀는 눈을 살풋이 감고 있었다. '이제 모든 걸 주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월광의 그물 아래 그녀의 나신이 드러났다. 오랫동안 한 사람만을 위해 지키고 가꾸어온 육체였다. 백수범은 그녀의 육체를 조심스럽게 더듬어 내려갔다. 그의 입술은 소연옥의 목덜미로, 가 슴으로, 그리고 둥그런 아랫배로 뜨거운 입김을 불어내며 쓸어 내려갔다. "아아!" 소연옥은 전율하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몸을 꺾었다. 그러자 그녀의 나신은 활처럼 둥글게 휘어졌다. 봉긋 솟아오른 그녀의 두 육봉은 소리없이 경련했다. 백수범의 손길이 육봉을 쓸 자 소연옥은 피가 끓으며 전신 구석 구석에서 작은 불꽃들이 터져 오르는 것을 느꼈다. "흐흑." 흐느낌인가, 아니면 희열의 신음인가? 소연옥의 입에서는 야릇한 음향이 흘러나왔다. 사내의 뜨거운 손 길을 받은 그녀의 얼굴에는 환희를 상징하는 홍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추하지 않았다. 아니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마침내 백수범도 의복을 벗어던졌다. 그의 탄탄한 근육이 여체(女體)를 휘감자 삼라만상이 숨을 죽였다. 두 사람의 젊은 육체는 정점으로 비등하다가 한 순간에 폭발했다. 월광(月光)과 함께 타오르는 밤(夜)이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