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단장화(斷腸花)의 비밀(秘密) ① 화촉동방(華燭洞房). 빙백전의 수정궁(水晶宮) 안 깊은 곳에는 화촉이 밝혀졌다. 빙백전의 인물들은 실로 오랫만에 이백 년 묵은 빙화주(氷火酒)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그것은 특별히 이 날을 위해 북천존자 백리극이 내린 것이었다. 북천존자 백리극은 하루종일 입가에서 흡족한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빙백전의 고수들 도 모두 크게 기뻐했다. 당금 중원무림을 손아귀에 넣고 있는 천마성(天魔城)의 넷째 공자와 빙백전의 공주(公主)가 성혼을 맺으니 어찌 들뜨지 않겠는가? 빙백전의 세력은 이제 중원에까지 거점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방(新房). 방 안은 온통 붉고 푸른 휘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특히 침상은 더욱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은은한 궁등 아래 백수범과 무영빙매 백리설빙이 예복을 입고 마주 앉아 있었다. 절세의 미남과 미녀인 두 남녀. 화려한 예복을 입은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인(天人)인 듯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예반 위에는 간소한 주안이 차려져 있었다. 백리설빙은 긴 속눈썹을 사르르 내리며 섬섬옥수로 술병을 들었 다. 삼백 년 묵은 빙로합환주였다. 백수범은 술잔을 받았다. 그는 맛을 음미하듯 천천히 한 잔을 들이킨 후 담담히 물었다. "소저도 한 잔 드시겠소?" 그 말에 백리설빙은 그윽한 눈빛으로 답했다. "천첩에 대한 칭호가 어색합니다." 백수범은 흠칫 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 여인은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구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그러나 그는 선선히 그녀의 말에 따라주었다. "좋소. 설빙(雪氷). 이제 되었소?" 눈같이 흰 백리설빙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네, 되었습니다." 백수범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인인 백리설빙을 바라보며 물었다. "설빙, 당신에 대해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소." 백리설빙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이 이 결혼을 승낙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오? 당신은 내가 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답소.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당신에 대해 조금도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소." 조용히 듣고 있던 백리설빙의 옥용에 일말의 달콤한 미소가 떠올 랐다. 그녀는 그윽히 백수범을 응시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백랑, 어쩌면 바로 그 점이 천첩으로 하여금 백랑에게 더욱더 이 끌리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백리설빙은 고운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미(美)란 단지 겉껍데기일 뿐입니다. 진정한 영웅이라면 한낱 여 인의 미모 따위에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으음." "저는 어려서부터 한 가지 굳은 결심을 한 바 있었어요. 그것은 반드시 천하제일의 영웅을 낭군으로 모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게 안 된다면 차라리 평생을 혼자 살겠다고 결심했어요." 백수범은 그녀를 바라 보았다. 백리설빙도 고혹적인 눈으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다 백랑같은 영웅을 발견하였는데 어찌 제가 망설일 수 있겠습니까?" 백수범은 눈썹을 움직였다. 그의 가슴이 은은한 진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무서울 정도로 냉철하구나. 그러나 반면 사랑스러운 점도 있다. 어쩌면 내게 필요한 여인은 바로 이런 여인일지도 모른다.' 백리설빙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천첩은 오늘 이 순간부터 백랑을 하늘처럼 모시며 온갖 정성을 다하겠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강요하지는 않을 테 니 심려하지 마세요. 천첩은 백랑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열려지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설빙." 백수범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섬섬옥수를 잡았다. 한없이 깊어보이는 백리설빙의 푸르른 눈, 그 눈 속에 담뿍 깃든 정감이 그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그는 나직히 읊조리듯 말했다. "그대는 훌륭한 내조자가 될 수 있을 것이오. 내 그 점은 믿어 의심치 않소. 그리고 세월이 흐르다 보면 나 또한 목석이 아닌 이상 당신에게 어찌 마음이 기울지 않겠소? 단지 지금은 우리가 서로를 잘 모르기에 어색할 뿐......." 백리설빙은 충분히 이해를 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 녀의 얼굴에는 은은한 홍조가 떠올랐다. 결국 여인이란 남자의 진심에는 약한 법이다. 백수범의 말은 하나 의 든든한 약속이 아닌가? 드디어 백수범은 그 약속의 이행을 위한 첫 단계를 밟았다. "자, 밤이 깊었소. 이제 그만 자리에 듭시다." 그는 일어서며 백리설빙의 몸을 번쩍 안아들었다. "아!" 백리설빙은 놀란 듯 입을 벌렸으나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백수범은 붉은 휘장을 걷고 푹신한 침상에 백리설빙을 눕혔다. 그 녀는 반듯이 침상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백수범은 그녀의 예복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자신도 모 르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차츰 옷자락이 떨어져 나갔다. 빙설같은 피부가 드러나고 봉긋 솟 은 젖무덤이 노출되자 백리설빙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윽고 백수범은 그녀의 몸에서 완전히 의복을 벗겨냈다. 북해 미인의 완벽한 나신. 솟을 곳은 풍만하게 솟아오르고, 꺼질 곳은 미묘하게 계곡을 이룬 황홀한 육체(肉體)가 그곳에 있었다. 뜨거운 바람이 불면 대지는 숲을 흔든다. 또한 욕망의 바람에는 대지조차 더운 숨을 내뿜게 마련이다. 백리설빙의 희디흰 육체는 이전까지 설지(雪地)였다. 그것도 아무도 발을 대어보지 못한 전 인미답의 설지였다. 그러나 그 설지는 백수범이라는 한 사내에 의해 이제 발자국이 찍히려 하고 있었다. "설빙......." 백수범의 음성에는 열기가 담겨 있었다. 그는 옷을 벗고 침상에 올랐다. 이윽고 침실에 열풍(熱風)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남과 여가 결합되는 첫날 밤. 북해의 한풍도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었다. 백수범의 손길이 움직 일 때마다 여인은 민감하게 반응하며 타올랐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가 되어 함께 우화등선(羽化登仙)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아침. 수정궁은 아침 햇살에 구석구석 밝게 피어났다. 신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백수범은 환한 빛이 다가드는 느낌에 두 눈을 떴다. 그는 곧 옆자리로부터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을 느꼈다. 백리설 빙이었다. 초야를 치룬 신부가 나신으로 그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상반신이 금침 밖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옥으로 조각한 듯한 젖가슴과 빙설같은 피부를 보며 백수범은 잠 시 넋이 나갈 듯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더우기 간밤의 격렬한 사 랑의 흔적인 양 백리설빙의 피부에는 은은한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몇 올의 머리칼이 그녀의 옥용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은 더욱 요염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백수범은 멍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정말 아름답구나. 천하제일의 미녀라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로 백리설빙의 이마를 부볐다. 그 러자 백리설빙의 푸른 보석과 같은 눈이 반짝 열렸다. "백랑." 그녀의 얼굴에는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름답군. 설빙은......." 백수범은 낮게 속삭이며 슬쩍 손을 들어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을 쓰다듬었다. "아이." 백리설빙은 당황한 표정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싫지는 않은 듯 그녀의 몸짓에는 오히려 애교가 넘쳐 흘렀다. 백수범은 빙긋 웃으며 한 손으로는 여전히 그녀의 젖가슴을,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매끄러운 등을 애무했다. "어젯밤 이후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소." 백리설빙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뭔데요?" 백수범은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당신의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을 보고 당신의 몸도 그처 럼 차가울 것이라고 생각했었소. 그런데......." 그의 손은 등줄기에서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둔부를 쓰다듬고 있었다. "도리어 당신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겁더군?" "어머?" 백리설빙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그의 품에 묻더니 가볍게 그의 겨드랑이를 꼬집었다. "아얏! 하하하! 농담이오, 농담." 백수범은 덥썩 그녀의 알몸을 끌어 안았다. 순간 그의 육신은 다 시금 확 불이 당겨졌다. 그것은 백리설빙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젊디 젊은 나이였다. 한없이 뜨거운 욕망이 샘솟듯 솟아나 는 나이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깊이깊이 탐닉해 들어갔다. 두 번째의 우주합일(宇宙合一)이었다. 그것은 첫 번째와는 또 달랐다. 단순한 열락만이 아닌 또다른 기 쁨의 세계가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 세계로 몰입해 가 며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이르렀다. 서로의 몸을 부둥켜 안고 있던 백수범과 백리설빙은 그제서야 서로 떨어졌다. 백리설빙이 먼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백수범은 그녀의 나신 을 보자 역시 눈 앞이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백리설빙이 다급히 말했다. "고개를 돌려요!" "하하하!" 백수범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마지못해 고개를 돌 리는 그의 얼굴에는 일편 아쉬움이 어려 있었다. 백리설빙은 조각품같은 육체를 가리기 위해 옷을 입었다. 그러나 당혹감 때문인지 그녀의 손길은 매우 급박했다. "이제 됐어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백수범도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 는 그의 단단한 근육을 보고 백리설빙이 얼굴을 붉혔다. 이때 백수범은 침상 바닥에 한 점의 붉은 홍화 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백리설빙의 순결의 표시였다. 그것을 본 백 수범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백리설빙은 그의 그런 표정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어머!" 그녀는 금세 귓볼까지 붉어졌다. "못써요!" 그녀는 백수범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하하하......!" 백수범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놔, 놔요." 백리설빙은 그의 품에서 앙탈을 부렸으나 이내 잠잠해지고 말았 다. 백수범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입맞춤은 뜨겁고도 길었다. 단 하룻밤 사이에 타인에서 부부로 변신한 두 남녀. 그들 사이에는 어느덧 뜨거운 정이 생성되고 있었다. ② 수정탁을 가운데 두고 두 명이 마주 앉아 있었다. 북천존자 백리극과 백수범이었다. 백리극은 무척 만족한 얼굴이었 다. 그러나 곧 표정을 바꾸며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백수범은 담담히 대답했다. "천마성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백리극은 신뢰감이 깃든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음, 아무튼 최선을 다하게. 노부도 빙백전의 모든 힘을 기울여 자네를 도우겠네." "감사합니다. 빙장 어른." "허허허!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이 필요한가?" 백리극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곧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 지 다시 어조를 고쳐 말했다. "내 한가지 충고를 하겠네." "말씀하십시오." "현재 새외 사대세력의 힘은 실로 대단하네. 혈붕도의 혈붕왕(血 鵬王), 구천마궁(九天魔宮)의 구천마군, 유명부의 유명천겁마(幽 冥天劫魔) 등 모두가 대단한 고수들이네." 백리극은 짐짓 조심스럽게 뒤를 이었다. "혈붕도의 고수가 단지 자네를 치기 위해 이곳 북해까지 접근한 것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네. 아마도 그들의 활동은 조만간 더욱 적극적이 될 것이네. 필히 조심해야 한다는 말일세." "명심하겠습니다." 이어 백수범은 검미를 곧추세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참, 빙장 어른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백수범은 품 속에서 한 송이의 금빛 꽃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바로 단장화였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나 백리극은 대답대신 의아한 시선으로 단장화를 바라보았다. 백수범은 천마비동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그때에 단장화가 꽂혀 있던 화병이 깨지면서 그 속에서 싯구가 나왔습니다." 백리극은 약간 놀라며 물었다. "무슨 시(詩)인가?" 백수범은 눈을 내리 감으며 낮게 읊조렸다. "열사(熱沙)의 사막에서 백 년 동안을 기다리다 해 뜰 때 피어나 황혼(黃昏)이 붉게 질 때 시들어 떨어지니, 오호라! 찢어지는 단장화(斷腸花)의 슬픔이여." 백리극의 안색이 대변한 것은 그때였다. 그는 홀연히 부르짖었다. "단장! 그것은 천장노인(天匠老人)을 이르는 것이네." 백수범은 급히 물었다. "천장노인이 누구입니까?" 백리극은 놀란 눈으로 단장화를 응시하며 침중하게 대답했다. "오백 년 전 당대 제일의 장인(匠人)일세." "장인?" "그에게는 아주 슬픈 사연이 있었네." 백리극은 의자의 등에 몸을 기대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천장노인, 즉 당시에는 젊었던 천장인에게는 생의 모두를 걸고 사랑했던 한 명의 여인이 있었네. 그런데 그 여인은 영원히 고칠 수 없는 절증(絶症)을 앓고 있었다네." "......." "천장인은 그녀를 살리기 위해 온갖 방도를 다 동원해 보았으나 번번이 실패했네. 실의에 빠진 그는 마침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 만이라도 간직해보겠노라며 천축(天竺)의 기이한 대법을 써 그녀 를 하나의 수정관(水晶棺)에 넣었네." 백수범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전대비화에 흥미를 느끼며 조용 히 귀를 기울였다. "그 이후로도 천장인은 근 백 년 동안이나 그녀를 치료할 방도에 골몰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수 명까지 다 되어감을 느끼자 어쩔 수없이 사랑하는 여인을 깨웠네." 백리극조차 자신의 얘기에 도취된 듯 표정이 기이해졌다. "그러나 수정관의 여인은 일단 깨어나면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밖에 살 수가 없는 형편이었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못 다한 사랑을 나눈 후 나란히 수정관에 누워 최후를 마치고 말았네." 백수범은 탄식했다. "정말 슬픈 사연이군요." 백리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천장노인은 여인을 생각하며 그녀의 슬픈 운명을 닮은 단장화를 만들었다고 하네." "그렇군요." "자네가 갖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단장화임에 틀림없네." 백수범은 수중의 금빛 찬란한 단장화를 내려다보며 가벼운 한숨을 발했다. 반면에 백리극은 두 눈에 이채를 띄며 덧붙였다. "강호의 전설에 의하면 단장화는 천장노인이 모든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으로 그 속에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다고 하네. 그 이유 는 당시 천장노인의 암기술(暗器術)이 천하무적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네." 백리극의 표정이 더욱 기이하게 변했다. "자네가 이것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 자네는 정말 복이 많은 인물일세. 아마 단장화의 비밀도 풀어낼 수 있으리라 믿네." 백수범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그간 이 단장화의 비밀을 풀기 위해 수 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허사였습니다." 백리극은 여유있게 웃었다. "허허허! 언젠가는 그 비밀을 풀 수 있겠지." 백수범은 단장화를 한동안 바라보다 품에 넣었다. 빙백전의 생활도 어느새 보름이나 흘러갔다. 백수범과 백리설빙 사이에서는 점차 애정이 무르익고 있었다. 백 수범은 이제 그녀에 한해서라면 모르는 부분이 없었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까지 그의 입김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백리설빙은 선천적으로 냉정하고 차가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백수범에 한해서만은 거의 헌신적인 애정을 바치고 있었 다. 사소한 일에조차 그녀의 온 신경은 백수범을 위해 배풀어졌다. 석양(夕陽)을 받아 더욱 신비로운 광채를 반사시키는 수정궁. 백수범은 한 수정루각의 창가에 기대어 멍하니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북해의 석양은 중원과는 또 다른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북해의 빙천설지에 쏟아 부어지는 붉은 광채는 그야말로 일대 장관이었다. 백수범은 품 속에서 단장화를 꺼냈다. '단장화, 아침에 피었다 황혼이 질 때 시드는 비운의 꽃.......' 백수범은 웬지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단장화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창가에 놓인 화병에 꽂았다. 이 어 그는 품 속에서 하나의 양피지를 꺼냈다. 그것은 단장화가 꽂 혀 있던 화병이 깨지면서 나온 것이었다. 양피지의 전면에는 단장화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후면에는 싯구가 적혀 있었다. 백수범은 무심히 양피지를 내려다 보았다. 그런데 한순간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오오! 이럴 수가!" 백수범은 탄성을 발하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사실 그는 단순히 단 장화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 사이 창가에 꽂아둔 실물의 단장화가 석양을 받자 찬란한 칠채 보광(七彩寶光)을 뿌렸다. 이는 열여덟 개의 금엽들로 감싸여진 일곱 개의 보석 꽃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바로 그 보광이 양피지의 그림에 비쳐지자 그 림 속에서 깨알만한 글씨가 나타난 것이다. 백수범은 이 신비스런 현상에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그 글씨를 읽기 시작했다. <......나 천장노인(天匠老人)은 이 단장화(斷腸花)를 얻는 자에 게 고하노라. 내가 평생을 다 바쳐 연구한 성광표류요결(星光飄流 要訣)을 그대에게 전(傳)하노라. 오직 한 여인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꽃이건만 인간의 야망이란 어쩌지 못하는 것인가? 나 자신도 모르게 모든 정열을 이 한 송이 꽃 속에 담고야 말았다. 나 천장 (天匠)은 자만심에 취한 인간은 아니다. 그러나 성광표류요결에 의해 전개되는 단장화의 절기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인연이 있는 자여, 부디 단장화를 거두어 천장의 기예(技藝)를 잇기 바라 노라. 아울러 한 가지 부탁을 남긴다. 언제든 그대는 대막(大漠) 불망궁(不忘宮)의 폐허 속에 묻힌 수정관(水晶棺)을 찾아 그 속에 나란히 죽어 있을 유체를 거두어 달라. 그대가 이 부탁을 행해 준 다면 나 천장은 지하에서나마 그대의 은혜에 감사 할 것이다.> 백수범의 안색이 몹시 흔들렸다. '천장노인..... 섬광표류요결, 과연 단장화의 내력은 간단치가 않은 것이었구나.' 백수범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단장화를 바라본 뒤 계속 양피지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섬광표류요결의 정화(精華)는 칠성(七星)의 허(虛)와 십팔 금편(十八金片)의 실(實)에 근거를 둔다. 칠성의 광채는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맞받아 볼 수 없으니, 상대는 반드시 십팔금편에 의해 죽으리라.> 백수범은 홀린 듯이 글의 내용에 빠져 들어갔다. 연이어 나타나는 글귀야말로 단장화를 전개하는 개세적인 신학(神 學), 즉 성광표류요결이었다. 또한 그것은 실로 천지간에 가장 괴 이무쌍하다고 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백수범은 온 정신을 집중하여 양피지의 구결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시간의 흐름조차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성광표류요결에 심취 해 갔다. 밤(夜). 빙백전에 밤이 왔다. 백수범은 어둠 속에서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손에 단장화를 움켜쥔 채 깊은 명상에 빠져 있었다. 갑자기 그의 입에서 부르짖음이 터졌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드디어 깨달았다." 쉭---! 백수범은 손에 든 단장화를 전면을 향해 일직선으로 던졌다. 그러자 어둠에 싸였던 방 안은 삽시에 환해졌다. 휘황찬란한 일곱 가지의 광채가 방 안을 가득 메운 것이다. 백수범조차 눈이 부셔 멈칫할 정도였다. 파파--- 팍! 팍! 귀가 따가울 정도로 예리한 음향이 맞은 편 수정벽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일곱 가지 광채는 거짓말처럼 스러졌다. 단장화는 그 사이 이미 백수범의 손으로 돌아와 있었다. 백수범은 신형을 날려 수정벽 앞에 떨어졌다. 그는 수정벽에 꽃잎 형태로 뚫린 열여덟 개의 작은 구멍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아아! 실로 놀라운 수다, 단장화, 이것이야말로 죽음(死)의 꽃이 다. 천하의 그 누가 엄청난 빛을 발산하며 단장화가 발출해내는 열여덟 개의 꽃잎을 알아볼 수나 있겠는가?" 귀신같은 기예를 두고 백수범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허공을 날며 일곱 개의 꽃술로부터 엄청난 빛이 발산되는 단장화, 그 빛에 시야가 가리워진 순간 십팔금편이 분리되며 상대를 꿰뚫는다. 정녕 무서운 공격이었다. 그 직후 십팔금편은 허공에서 다시 한 송이 단장화로 합쳐진 다음 전개자의 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백수범은 어둠 속에서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지금 이 순간부터 단장화는 이 천마잠룡의 독문표기 다. 아무도 감히 이 한 송이의 단장화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③ 하남성(河南省) 복우산(伏牛山). 겨울에 접어든 날씨는 매서웠다. 복우산의 한 산봉(山峯) 위에 한 홍의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휘--- 이---- 잉! 세찬 서북풍이 홍삼을 찢어낼 듯 몰아쳤으나 홍의청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풍에는 드문드문 백설이 뒤섞여 있어 더욱 가까이 다가선 겨울을 느낄 수 있었다. 홍의청년은 바로 천마잠룡 공손기, 즉 백수범이었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금빛의 단장화(斷腸花)가 꽂혀 있었다. 그의 영준한 얼굴은 조각인 듯 굳어져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 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시각은 오시(午時)를 지나 미시(未時)에 이르고 있었다. 스스스스....... 문득 백수범의 등 뒤에서 괴이한 음향과 함께 한 명의 흑의복면인 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는 키가 작고 왜소했으나 섬뜩한 살기를 전신으로부터 풍기는 자였다. 일검섬예(一劍閃猊)라고 불리우는 인물. 그를 향해 백수범이 입을 열었다. "오랫만이오. 흑루주(黑樓主)." 백수범은 서서히 돌아섰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냉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흑루주를 노려보며 물었다. "약속시간에 이틀이나 늦은 이유는 무엇이오?" 복면 사이로 빛나는 흑루주의 맑고 찬 눈에 고소가 어렸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무려 다섯 차례나 공격을 받았소이다. 그 때문에 늦을 수밖에는......." 백수범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다시 물었다. "일의 진척은 어떻소?" 흑루주는 그 말에 심호흡을 하며 대답했다. "양호하오이다. 잔결신마(殘缺神魔)는 공자가 준 무공비급으로 잔 결방의 이백 명 고수들을 훈련시켜 예전보다 최소한 십 배는 강해졌소이다." 백수범은 계속하여 담담히 물었다. "삼월회(三月會)는?" "역시 마찬가지요. 금월과 은월, 그리고 반월 삼 형제는 각고의 노력 끝에 많은 고수들을 포섭했으며 그 숫자가 벌써 삼백이 넘소 이다. 그들 중 절정고수급만도 이십 명 이상이오." "수고했소. 그러나 과연 외부에서 전혀 모를까?" 백수범의 의구심에 흑루주는 코웃음을 쳤다. "흥! 물론이오. 모든 일은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소. 여 기에 만일 단 일 푼의 실수라도 있다면 내 당장 공자께 받은 댓가를 배상하겠소." 백수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좋소."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또 물었다. "금천성과 비무강, 남궁신풍 등의 세력은 파악이 되었소?" 흑루주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완전치는 못하나 어느 정도는 파악했소이다."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공자의 추측이 맞았소. 그들 세 명의 진정한 세력은 천마성 안에 있는 게 아니었소." "으음." "천마성 내에서 금천성의 세력은 단지 금의수호무사 백 명과 수십 명의 여타 고수들에 불과하오. 그러나 그는 이미 새외사대세력 중 의 하나인 혈붕도(血鵬島)를 제외하고도 중원의 세 곳에서 무서운 고수들을 양성하고 있었소이다." 백수범은 놀라 반문했다. "세 군데에서?" "그 중 하나는 귀주성(貴州省)의 불애산(佛涯山) 천화곡(天火谷) 에서요. 백 년 전 실종된 태양신마(太陽神魔) 곽륭(郭隆)이 금천 성의 명에 따라 오백 명의 고수들을 키우고 있소이다." 흑루주는 무겁게 말을 이었다. "또 한 군데는 강동성(廣東省)의 비산성(秘山城)에 있는 비산서원(秘山書院)이오." "비산서원?" 백수범은 다시 되묻자 흑루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비산서원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문사(文士)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서원에 불과 하오. 그러나 실제 그곳에 있는 삼백여 명의 문사들은 모두가 일류급 고수들이오. 비산서원 의 원주(阮主)는 육십 년 전 신비의 고수로 불리워지던 무극서생(無極書生) 반형도(潘玄陶) 로 그 자의 무공은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깊소이다." 백수범은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역시 금천성은 무서운 자다. 그토록 치밀하게 세력을 확장해 놓았다니.' 그는 침중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마지막 한 곳은 어디요?" 이번에는 흑루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모르오. 백방으로 조사했으나 워낙 극비사항이라 아직 알아내지 못했소." "음......." 백수범은 낮게 신음을 발했다. "비무강과 남궁신풍의 세력은 어떻소?" "비무강은 새외의 사대세력 중 구천마궁(九天魔宮)을 업고 있으며 또한 그 자신이 무공광(武功狂)인지라 중원 각처는 물론 변방, 새 외, 심지어는 외국(外國)에서까지 절정고수들을 초빙하여 무공을 익히고 있소이다. 그들 이무사(異武士)들도 모두 그의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실정이오." "그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는 본거지는 알아봤소?" "그게 일정치가 않소이다. 비무강은 우둔한 듯 하나 극히 음험하 여 그의 수하들조차도 동료 간에 서로 정확한 숫자나 내력, 위치 등을 까맣게 모르도록 조치해 놓고 있소이다." 백수범은 눈썹을 모았다. '그렇다면 그 자야말로 진정한 난세의 효웅(梟雄)일지 모른다.' 흑루주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남궁신풍은 외부에 가장 많은 추종세력을 지닌 자요. 그 자는 새 외 사대세력 중 유명부(幽冥府)를 포섭하고 있으며, 현 정파무림 의 기둥 격인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소가주(少家主)로서 중원 정 파무림의 지지를 받고 있소이다. 정파무림은 그가 천마성을 이어 받기를 바라는 한편 그에게 모든 기대를 모으고 있소." 백수범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 보았다. 잿빛 하늘에서 찬 바 람과 함께 눈발이 점차 잦아지고 있었다. '어리석은 자들....... 호랑이 새끼를 키우다니. 남궁신풍의 야망 은 천마성뿐만 아니라 중원무림의 정복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흑루주는 말을 마친 후 말뚝처럼 서 있었다. 백수범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소. 이만 가보시오." "그럼......." 흑루주는 발을 한 번 구르는가 싶더니 금세 한 줄기 흑선으로 화 하여 봉우리 아래로 사라져갔다. 백수범은 그가 사라진 방향에 시 선을 둔 채 내심 중얼거렸다. '흑루주, 저 자는 분명 여인이다. 가냘픈 체격이나 일부러 변성한 음성을 보면 능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였다. "크흐흐흐......." 갑자기 으스스하게 사방을 울리는 괴소성에 그의 생각은 중단되었 다. 백수범의 안색은 즉시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음! 지척에 접근하도록 눈치챌 수 없었다니.......' "누구냐?" 그는 무거운 음성으로 외쳤다. 휙! 휙! 휙---! 사방으로부터 아홉 줄기의 인영이 솟구쳤다. 그들은 각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괴이하게도 모두 안색이 시커멓게 탄 흑면(黑面)이라는 점이었다. 백수범은 그들을 둘러보며 차갑게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아홉 명의 흑면인 중 가운데 키가 유난히 큰 괴인이 말했다. "공손기, 너는 흑면구살(黑面九煞)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흑면구살!" 백수범은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면구살이라면 벌써 사십 년 전에 사라졌던 흑도의 거마들이 아닌가?' 백수범은 침중하게 되물었다. "흑면구살,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왔느냐?" "흐흐...! 네 목이 필요해서 왔다." 백수범은 짐짓 웃음기를 흘려 보였다. "목? 나와 원한이라도 있느냐?" 키 큰 괴인, 즉 대살(大煞)은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너와는 하등의 원한도 없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 런 원한 관계가 없더라도 목숨을 노리고 싸워야할 때가 있는 법이 다. 그것이 무림의 생리임을 모른단 말이냐?" 대살은 검은 얼굴에 무서운 살기를 드러냈다. "너는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흑루주 역시 복우산을 살아 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 백수범의 안색이 무서울 정도로 홱 변했다. "크흐흐흐....... 지금쯤 사신곡(死神谷)의 고수들이 흑루주를 친 절하게 대접하고 있을 것이다." 백수범의 안색이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 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대살은 재미있다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공손기, 이제 곱게 목을 늘어뜨려라." 백수범의 얼굴에는 마침내 은은한 살기가 나타났다. "너희들의 실력으로 감히 나 천마잠룡을 죽이겠다고?" 대살은 음침하게 외쳤다. "흐흐흐! 아무래도 곱게 죽지는 않겠군. 형제들, 쳐라!" 휘휘휘--- 휙! 흑면구살은 회오리처럼 백수범을 포위하며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④ 흑루주 일검섬예(一劍閃猊). 그는 신형을 쾌속하게 날리고 있었다. 왜소하면서도 날렵한 그의 체구는 마치 쏘아진 화살과도 같았다. 그는 몇 개의 산봉을 넘자 한 곳에 이르러 신형을 멈추었다. 그리 고 그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얼굴에 뒤집어쓴 복면을 벗었다. 드러난 얼굴. 그것은 놀랍게도 십구 세 쯤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눈 빛이 총명하고 지혜무쌍해 보이는 이 절세의 미녀가 바로 비정의 집단 흑루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탐스러운 머리결을 풀어내린 흑루주는 눈송이가 떨어지는 잿빛 하늘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휴우......." 그녀는 내심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너무도 강렬해서 나의 속까지 다 꿰뚫어 보는 듯 했어.' 흑루주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애정 따위에 빠져서는 안 돼! 아버님의 원한을 갚고 헤어 진 동생을 찾을 때까지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니.......' 그녀는 야무진 표정을 지었다. '돌아가신 사부님의 유언대로 흑루 또한 지켜야 해. 나 소연영(蘇 娟英)이 비록 여인이기는 하나 흑루주의 자리는 반드시 이어나가고 말거야.' 소연영. 이것이 바로 신비에 싸인 흑루주의 진실한 정체였다. "후후후후후훗! 정말 뜻밖이군. 천하의 흑루주가 한낱 계집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 걸?" 난데 없는 괴이한 음성이었다. 흑루주 소연영은 당황하여 돌아섰다. "누, 누구냐!" 휘휙! 휙---! 사방에서 흑영들이 어지럽게 나타났다. 수십 명이 바위 틈에서, 나무 위에서, 심지어는 땅 속에서까지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흑의를 입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어깨 에 혈창(血槍)을 메고 있었는데 그들 중 맨 앞에는 세 명의 금색 면구(金色面具)를 쓴 적발의 괴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소연영은 그들을 보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금면삼사신(金面三死神)! 너희들은 사신곡(死神谷)......." 그렇다. 지금 그녀 앞에 나타난 자들은 흑루와 더불어 이대 살수 집단으로 불리워지는 사신곡의 인물들이었다. 특히 금면삼사신은 사신곡의 세 곡주(谷主)로 무공이 절정에 이른 대살신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직접 사신대를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흑루주 일검섬예 소연영은 떨림이 진정되자 날카롭게 외쳤다. "본 흑루주와 사신곡은 서로 불가침이다. 금면삼사신! 설마 그것 을 잊지는 않았겠지?" 그 말에 가운데 금면인, 즉 대신(大神)은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물론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약조는 전대의 흑루주 낭 심인(狼心人)과의 약조였지, 너와의 약조는 아니었다. 더구나 제 삼의 인물, 흐흐! 우리 사신곡의 주요 고객이 네 목에 황금 만 냥 을 걸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소연영은 대뜸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비, 비열한 놈들." "흐흐흐....... 계집년, 흑루주의 천지인 삼십육살수대가 있다면 몰라도 너는 지금 혼자 몸이다. 살아 돌아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라." "흥! 과연 그럴까?" 소연영의 얼굴이 다욱 냉랭하게 변했다. 이때 대신의 우수가 하늘을 가리켰다. "쳐라---!" 그것은 곧 혈풍(血風)의 시작이었다. "와--- 아!" 대략 칠십 명쯤 되어 보이는 사신대가 일제히 신형을 날려 소연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콰--- 쾅---! 백수범과 흑면구살의 결투는 근 삼백여 초를 헤아렸다. 도저히 단 시간 내에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백수범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뜻밖이다! 이들의 무공이 이토록 높다니. 천마구장도 통하지 않을 줄이야. 그렇다면.......' 백수범은 천마충소로 불쑥 신형을 허공 십 장까지 솟구쳤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흑루주가 위험하다. 단 한 번으로 끝내야 한 다. 비록 처음 사용하는 무공이지만.......' 그는 왼쪽 가슴에서 단장화를 떼어내고 있었다. 이때 흑면구살도 그림자처럼 그를 쫓아 솟구쳐왔다. 순간 백수범 의 몸이 허공에서 빙글 회전했다. "단장화(斷腸花)!" 그의 입에서 차디찬 외침이 터졌다. 그순간 단장화가 날았다. 팍-- 파--- 팍---! 눈부신 칠채보광과 함께 열여덟 개의 금편(金片)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어---억!" 너무도 강한 빛에 흑면구살은 마치 눈이 머는 듯한 착각에 빠졌 다. 동시에 그들은 목구멍과 심장이 화끈함을 느껴야 했다. "끄-- 아---악!" 선홍빛 피화살이 허공으로 줄기줄기 뻗쳤다. 그러나 백수범은 벌 써 십 장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단장화는 어느새 얌전하게 그의 왼손에 들려져 있었다. 그 단장의 비기(秘技)가 마침내 무림에 첫선을 보인 것이다. 흑면구살은 목과 심장에 구멍이 뚫린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을 덮는 눈송이가 삽시간에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한편 허공을 날아가는 백수범의 마음은 다급하기 그지 없었다. '과연 흑루주가 아직도 무사할까?' 일검섬예(一劍閃猊), 과연 그 명호는 부끄럽지 않았다. 흑루를 이끌고 있는 흑루주가 소연영이라는 일개 미소녀라고는 하 나 그녀의 별호인 일검섬예는 명불허전이었다. 번--- 쩍! 쉬-- 쉬--- 잇! 연검(軟劍). 허리에 띠처럼 두를 수 있는 긴 연검이 번갯불처럼 공간을 갈랐다. "으--- 악!" 무수히 피가 튀었다. 몸에서 분리된 수급이, 또는 팔다리가, 동강 난 허리가 눈보라 속에 산지사방으로 분분이 혈무와 함께 뿌려졌 다. 일검섬예 소연영의 검법은 오직 쾌(快), 그것이었다. 금면삼사신은 경악에 경악을 더하고 있었다. '저 계집의 무공은 과거 낭심인(狼心人)에 비해 별 차이가 없구나! 실로 놀라운 일이다.' 사신대의 사신들은 잠깐 사이에 삼십 명이 줄어들었다. 마침내 대 신은 음침하게 입을 열었다. "삼제, 더이상 시간을 끌면 희생이 크겠다. 합공하자!" "넷!" 쉬--- 익! 금면삼사신의 신형은 빛살처럼 소연영을 에워쌌다. "계집, 죽어라!" 파-- 팟--- 위--- 웅! 금면삼사신의 무공은 가히 패도적이었다. 그들의 검(劍)과 선인장 (仙人掌), 귀두봉필(鬼頭棒筆)이 한꺼번에 몰아치자 그 위력은 실 로 하늘을 뒤덮을 지경이었다. 차---창! 펑! "으음." 소연영은 공격에 마주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런 신음을 흘 렸다. 너무도 힘겨웠던 것이다. 문득 그녀의 신형이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대신의 악랄무비한 일검에 그녀는 왼쪽 가슴이 서늘함을 느낌과 동시에 피가 허공 중에 확 뿌려지고 있었다. "흐흐! 계집년, 이것도 받아라." 우--- 웅! 이신(二神)의 선인장이 우악스럽게 소연영의 등줄기를 갈랐다. "악!" 한 바퀴 신형을 회전하여 선인장을 맞받아치는 순간, 소연영은 하 마터면 연검을 놓칠 뻔 했다. 손아귀가 찢어졌는지 금세 연검에 피가 배었다. "크크ㅋ! 이것도 받아라." 삼신(三神)의 귀두봉필이 곧장 소연영의 열린 문호를 더 크게 깨 뜨리며 유방 어림을 찔렀다. 찌이익! 소연영은 연달아 뒤로 네 걸음이나 밀려났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 게 탈색되어 있었다. 앞가슴 옷이 갈기갈기 찢겨져 눈결같이 탐스 런 젖가슴이 태반이나 비어져 나와 있었다. 게다가 젖가슴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야말로 악랄할 뿐더러 강 호상의 일반적인 예의를 완전히 무시한 잔랄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소연영은 쓰러지지 않았다. 다시 금면삼사신이 덮치자 그 녀의 입에서는 도리어 추상같은 호통이 터졌다. "추살(追殺)---!" 츠츠츳! 눈부신 검망이 그물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흑루의 구명살초(求命殺招)다. 조심...... 엇!" 한꺼번에 네 인영이 어우러졌다 갈라졌다. 소연영은 삼 장이나 날 아가 눈 위를 뒹굴었다. 그러나 금면삼사신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대신은 왼 쪽 어깨에 검상을, 이신은 다리에, 삼신의 상처가 유독 컸다. 그는 허리춤이 피로 낭자했다. "크으......! 지독한 계집년!" 대신은 피가 뿜어나오는 자신의 어깨를 누르며 이를 갈았다. 한편 소연영은 눈 위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은 두 눈에서 무서운 독기를 발산하며 검을 치켜들고 그녀에 게 다가갔다. 그는 무자비하게 검을 내려 찍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땅---!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검날이 부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한 줄기 유령과도 같은 홍영(紅影)이 일검섬예 소연영을 나꿔채더니 어두워지는 공간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미처 막을 사이도 없을 정도로 찰라적인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신은 잠시 멍청하게 서 있다가 고래고래 고함쳤다. "쪼...... 쫓아라!" 휙! 휙! 휘휙---! 삽시에 수십 줄기 인영이 날았다. 그러나 눈보라치는 어둠 속 그 어디에서 소연영을 나꿔채 간 홍영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한참 후 그들은 허탕을 친 채 빈 손으로 제 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대신은 땅을 구르며 원통해 했다. "빌어먹을!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더니!." 이때였다. 어디선가 음침한 음성이 그의 말을 받은 것은. "맞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다." "엇? 누, 누구... 헉!" 금면삼사신은 모두 대경실색했다. 그들의 앞에 한 명의 복면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황의를 입은 자로 가슴에는 금빛 글씨로 황 (皇)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복면인의 눈은 어둠 속에서 마치 두 개의 등잔인 양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영주(令主)님!" 금면삼사신은 동시에 황급히 부복했다. 그러나 복면인은 냉혹하게 잘라 말했다. "바보같은 놈들! 그깟 계집 하나를 제대로 처치하지 못하고 놓쳐 버리다니." "여, 영주님......." 금면삼사신은 모두 벌벌 떨었다. "너희들은 조금 전 그 계집을 탈취해 간 자가 누군지 아느냐?" "모, 모르옵니다." 복면인은 무섭도록 이를 부드득 갈았다. "천마잠룡 공손기다." "그...... 그럴 리가? 그 자는 흑면구살이 제거......." "닥쳐라! 애초부터 흑면구살과 사신곡을 믿은 내가 불찰이었다. 흑면구살은 벌써 오래 전에 황천에 갔다." "으으...... 그럴 수가?" 삼사신은 식은 땀을 흘렸다. 복면인은 의혹에 차서 중얼거렸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군. 놈의 무공이 반 년 조금 넘는 사이에 그토록 중진되다니." "영주님, 저희들은......?" 복면인은 으스스하게 내뱉았다. "너희들은 더이상 나설 것 없다. 놈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해도 백 리 밖을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괴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흐흐흐....... 유령삼마가 놈을 기다리고 있다." "유령삼마!" 금면삼사신은 그 이름을 되뇌이며 한 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공히 절정고수인 그들의 얼굴에조차 공포의 기색이 완연했다. 그 도 그럴 것이 유령삼마라면 그 이름만으로도 가히 공포의 존재였던 것이다. 새외사대 세력 중 남쪽의 유명부(幽冥府) 절대고수들이자 유명부 주(幽冥府主) 유명천겁마(幽冥天劫魔)의 세 사제(師弟)들이 바로 그들이 아니던가. 유령천마(幽靈天魔), 유령지마(幽靈地魔), 유령인마(幽靈人魔)로 불리우는 유령삼마는 모두 나이가 백삼십이 넘은 공포의 대마왕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다니.......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