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돌아온 천마성(天魔城) ① 객방(客房). 두 명의 남녀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백수범과 소연영이었다. 소연영은 아름답고 화사한 홍록색 궁장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또 한 얼굴에는 가볍게 화장까지 하고 있어 뛰어난 미모가 한층 돋보였다. "호호호! 지금 생각하니 정말 우스워요. 당신이 연옥의 낭군이었다니." 백수범은 가볍게 미소지었다. "나는 이미 전부터 당신이 연옥의 언니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소." 소연영은 짐짓 콧등을 찡그리며 냉소했다. "흥! 그러고도 모르는 척 했다니 당신은 무척이나 음흉하군요." "하하하!" 백수범은 소탈하게 웃었다. 소연영이 갑자기 진지하게 물었다. "연옥은 잘 있나요?" "물론이오. 그녀는 무척 아름답고 현숙하게 성장했소." 그 말에 소연영의 눈빛이 반짝 이채를 띄었다. "저와 비교하면요?" 백수범은 뜻밖의 질문에 멍청해졌다가 곧 실소하고 말았다. 소연 영은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토라진 듯이 쏘아부쳤다. "왜 웃죠?" "하하하! 아니오. 아니야, 하하하......." "흥! 저를 비웃는 거죠? 그렇죠?" 백수범은 웃음을 뚝 그치더니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어찌 내가 낭자를, 아니 처형을 비웃을 수 있겠소? 단지......." "단지?" "귀를 이리 가까이 대주시오." 소연영은 의아하여 백수범에게 다가가 귀를 들이댔다. 백수범이 나직히 속삭였다. "솔직히 당신의 육체는 연옥보다도......." 그 뒷말은 더욱 낮아져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듣고 있던 소 연영의 얼굴은 타는 듯이 새빨개졌다. "당신, 정말?" 그녀는 두 주먹으로 마구 백수범의 가슴을 두들겼다. "어, 어?" 백수범은 그녀의 손을 피해 뒤로 몸을 제꼈다. 그리고 그는 의식 적인지 무의식적인지 소연영을 품에 와락 안아 버렸다. "어머?" 소연영은 놀라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읍...!" 그녀의 입술은 그만 사내의 두툼한 입술에 덮히고 말았다. 백수범 의 입술이 꽃잎같은 그녀의 입술을 뺏고 만 것이었다. 소연영은 처음에는 거의 본능적으로 반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어 찌 된 셈인지 의지와는 달리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녀는 두 팔을 백수범의 목에 감고 매달리고 있었다. 백수범은 그녀의 혀가 능동적으로 자신의 입 속을 헤엄쳐 오자 매우 놀랐다. '이 여인은 마치 불꽃 같구나.' 그들의 깊고 뜨거운 입맞춤은 길고 황홀하게 계속되었다. 마치 시 간을 잊은 듯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긴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소연영은 얼굴이 온통 도화빛이 된 채 백수범의 품에 기대 있었 다. 문득 그녀의 손이 백수범의 턱 끝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녀 의 눈빛, 손길 하나 하나에 모두 뜨거운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나직히 입을 열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요?" "그게 무슨 말이오?" 백수범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연옥이 저를 미워할 것 같아요." "절대 그럴 리가 없소."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백수범은 싱긋 웃더니 한 손으로 소연영의 허리를 지그시 힘주어 안았다. "내 부인인데 모를 리 있겠소?" 소연영은 얼굴을 붉히며 내쏘았다. "바람둥이......." "하하하하! 내가 바람둥이라면 당신은 풍류녀요." "뭐에욧? 풍류... 으흡!" 소연영은 또다시 입술을 점령당했다. 그녀는 전신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백수범의 품에 몸을 맡겨 버렸다. 백수범은 오랫동안 그녀의 입술에서 단 꿀을 빤 뒤 놓아주었다. 소연영은 이제 감히 더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열기에 달구어진 몸을 백수범의 품에 기댄 채 꿈꾸듯 행복 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에서 그 누가 흑루의 주인 인 일검섬예를 상상할 수 있으랴? "참, 공자, 아니 백랑." 소연영은 수줍게 그의 품에 안긴 채 그를 불렀다. "왜 그러오?" "왜 풍진삼성을 데려오지 않았나요?" 백수범은 그 말에 담담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들을 동행하게 되면 주의를 쉽게 끌게 되어 오히려 불편해 지 게 되오. 난 그들을 다른 데 쓰려 하오." "어떤 곳에요?" "후후후! 앞으로 반 년, 반 년 후 무림에는 천마성과 맞먹는 무서 운 또 하나의 세력이 등장하게 될 것이오." 소연영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백수범의 얼굴에는 장엄한 기색이 어리고 있었다. "본래 나는 일개 평범한 낙척서생으로 아무런 욕망도 야심도 없는 사람이었소.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주어진 임무로 인해 인 생의 목적이 크게 바뀌게 되었소." 백수범은 몸을 일으키더니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살아왔던 지난 세월은 언제나 관조적이었으며 매사에 피동 적이기만 했소. 그러나 지금은 다르오." 소연영은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백수범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반드시 저 가공할 천마성의 주인이 되겠다는 것, 아울러 무림사 상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무림일통(武林一統)에 대한 결심이 섰소." 백수범의 두 눈에서는 마치 태양과도 같은 신광이 발산되었다. 소 연영은 그 모습에 해연히 놀랐다. '아아, 정말 사람이 전혀 달라 보이는구나! 공손기로 알고 대할 때와는 정말이지 천양지차야.' 백수범은 곧 표정을 부드럽게 풀더니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연영, 내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뭐든지 물어 보세요." "그대는 어떻게 해서 흑루의 주인이 되었오?" 소연영의 얼굴에는 짙은 감회가 어렸다. "본래 저는 소운장이 참화를 당한 날 중상을 입은 채 장원 뒤 쪽 을 흐르는 구룡하(九龍河)에 빠졌어요. 그리고 의식을 잃고선 멀리멀리 떠내려 갔어요." "......." "그러다 마침 전대 흑루의 주인인 낭심인(狼心人) 사부님께 구함 을 받았어요. 그 분은 당시 천수를 다하여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 았던 상황이라 저를 제자로 거두시고는 모든 공력과 무공을 전수 해 주셨어요. 그때부터 저는 흑루의 주인이 된 것이에요." "그랬었군." 백수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다가 고 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영. 난 곧바로 천마성으로 돌아갈 것이오." 그 말에 소연영의 안색이 흔들렸다. "지금...... 말인가요?" "그렇소. 그동안 당신은 흑루주의 신분으로 계속 활동을 전개하시오." 소연영은 웬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어요.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생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백랑." "말해 보시오." "몸조심 하세요." 백수범은 빙긋 웃었다. "그뿐이오? 할 말이?" "네. 부디 건강하셔야 해요. 그래야 저와 연옥을 책임지실 게 아니예요?" 백수범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염려 마시오. 나 백수범은 절대 패하지 않을 것이오. 천하의 그 누구에게든 말이오." 소연영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문득 그녀는 연약한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살수집단 흑루주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가냘픈 모습이었다. "하지만 전 걱정이 돼요." "하하! 나를, 이 백수범을 믿으시오." "백랑!" 소연영은 와락 그의 품으로 달려 들었다. 백수범은 그녀의 향기롭 고도 나긋한 몸을 안았다. 두 사람은 다시 자연스럽게 입술을 포 개었다. 뜨거운 그 무엇이 두 사람의 입술을 넘나들었다. ② 천마각(天魔閣). 천마성 천마부의 한가운데, 천학봉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구 층의 거대한 천마각은 변함없이 무이산, 아니 전 중원을 굽어보고 있었다. 천마대제(天魔大帝) 탁무영. 그는 오층의 정전에서 예나 다름없이 태사의에 깊숙히 몸을 묻고 있었다. 그의 무릎에는 소설(小雪)이, 왼쪽 어깨에는 비웅이 앉아 있는 것도 여전했다. 그는 소설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 동안 네 소식은 많이 들었다." 백수범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돌아온 것이다. 천마성으로. "기아야." 천마성주 탁무영의 음성은 담백하기만 했다. "네, 사부님." 백수범은 공손히 대답했다. "그 동안 얻은 것이 무엇이냐?" 백수범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떼었다. "저의 행로에 대한 확실한 판단을 얻었습니다." 천마성주는 눈을 기이하게 굴렸다. "흠, 그밖에는?" "힘을 얻었습니다." 갑자기 천마성주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좋다! 좋아." 그는 웃음을 뚝 그치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네가 내린 판단을 너의 세 사 형들은 이미 너보다 훨씬 빨리 내렸다." "......." "그리고 네가 얻은 그 힘 역시 그들도 갖고 있다." 백수범은 담담히 대꾸했다. "알고 있습니다." "무슨 대책이 있느냐?" "있습니다." 천마성주의 눈에 기광이 번쩍였다. "어떤 것이냐?" 백수범은 미소를 지었다. "단지 마음 속에 접어둘 뿐입니다." "음." 천마성주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스쳤다. 그것은 일종의 만족 감의 표현인 듯 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말했다. "너는 밖에 나가 있는 동안에 몇 가지 의문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입가에는 아까와는 또 다른 종류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먼저 천마경의 무공으로 상당한 난관에 봉착한 경험을 느꼈을 것이다." 백수범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렇습니다." 천마성주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것은 당연하다. 네가 익힌 천마경은 천마성의 진정한 비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수범의 안색이 변했으나 천마성주는 말을 계속했다. "그렇다고 노부가 어떤 구결을 제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백 년 전 본문의 조사이신 천마괴로께서 남긴 것이기 때문이다." "......." "그 무공으로는 영원히 천마사후공을 십이 성까지 터득할 수가 없다." 백수범은 내심 중얼거렸다. '어쩐지 성취도에 진전이 없다고 했더니.......' 천마성주는 그를 내려보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노부가 네게 그 사실을 말해 주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 시련 을 거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천마성주는 품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내더니 던졌다. 탁! 백수범의 무릎 앞에 책자가 떨어졌다. "거기에 천마사후공을 완성하는 구결과 노부가 창안한 두 가지 절학(絶學)이 들어 있다." 백수범은 책자를 보았다. <천마경혼급(天魔驚魂及)> 책자의 표지에는 용사비등한 필체로 그렇게 씌여져 있었다. 천마 성주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달았다. "그 두 가지 무공은 너의 세 사형들 역시 모른다. 물론 너의 사형 들도 네가 모르는 절학을 각기 전수받았다." "......!" "그것으로 노부가 너에게 무공을 전하는 것은 끝이다. 이제부터 모든 성취도는 모두 네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 천마성주는 엄숙하게 덧붙였다. "남이 그냥 전해주는 것을 받기는 쉽다. 그러나 스스로 연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진정한 천마성주가 될 자격이 있는 자라면 반드시 그것을 성취할 것이다." 백수범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천마성주는 태사의에 다시 몸을 묻으며 담담히 말을 맺었다. "이만 나가보아라." "네, 사부님." 호심각(豪心閣). 천마성의 넷째 공자 천마잠룡 공손기의 거처였다. 백수범은 자신 의 처소에 들어 있었다. 그는 태사의에 앉은 채 고요한 신색으로 천마경혼급(天魔驚魂及)을 보고 있었다. 천마경혼급에는 세 가지의 무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앞 부분에 는 천마사후공을 십이 성까지 이룰 수 있는 새로운 구결(口訣)이 적혀 있었다. 그 구결을 읽으며 백수범은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 구결을 보니 비로소 안개가 활짝 개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구 나. 과연 이 구결대로 행하면 십 성에서 정체되었던 천마사후공은 그 위력이 십 배 강해지는 경지에 오를 수 있겠구나.'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탁무영, 그는 적이지만 실로 존경할만한 인물이다. 대체 그의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백수범은 천마사후공의 구결을 모두 읽은 다음 책장을 다시 넘겼다. - 혈사탄기(血死彈氣). 일명 생사탄공(生死彈功)이라고 부기되어 있는 무공이 적혀 있었 다. 그것은 실로 기이한 무공이었다. 상대의 공격을 받으면 즉시 거기에 자신의 내공까지 포함하여 도 로 적에게 튕겨보낸다. 그러므로 설사 자신보다 무공이 높은 자일 지라도 센 공격을 받을 수록 반탄강기도 따라서 강해진다. 이를 테면 상대의 장력을 받는 순간 혈광과 함께 반탄강기가 날아 가 단숨에 상대의 심맥과 심장을 파열시키는 가공할 절기였다. 이 신묘하기 짝이 없는 혈사탄기는 탁무영이 스스로 창안한 절학이었다. 백수범은 혈사탄기의 위력에 진정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비급의 마지막 부분을 넘겼다. 역시 탁무영이 창안한 또 하나의 절학이 기재되어 있었다. - 천강풍(天 風). 기이한 이름의 무공이었다. 백수범은 정신을 집중하여 천강풍의 구결도해를 읽어보았다. 그것은 단 일 초(一招)의 장법(掌法)이었다. 그러나 백수범의 얼굴은 차츰 경련을 일으켰다. 비급을 들고 있는 그의 손 끝도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혈사탄기와 마찬가지로 천강풍의 구결을 읽는 동안 그는 마음이 천근처럼 무거워진 것이다. 천강풍은 단 일 초에 자신의 전 내공(內功)을 집중하여 펼치는 것 으로 가히 그 위력이 하늘을 무너뜨리고 땅을 가를 수 있었다. 천강풍을 펼치면 방원 백 장 이내의 생명체는 모두 가루가 되고 만다. 물론 십이 성에 달했을 경우였다. 실로 하늘 아래 으뜸의 패도지공(覇道之功)이랄 수 있었다. 그러나 천강풍에도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일 단 천강풍을 펼치면 내공이 모두 소모되어 열두 시진 동안에는 무 공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백수범은 천마경혼급을 덮었다. 그의 안색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탁무영....... 그는 진정 인간인가?' 그의 마음에 일말의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천마경혼급의 무공은 지난 날 천마경의 무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때 문에 그는 점점 천마대제 탁무영에 대한 인식이 새로와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백수범은 의자에 몸을 묻은 채 명상에 잠겼다. 한참 후, 그는 천마경혼급을 두 손바닥 사이에 넣어 가루로 만들 어 버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밖에서 차분히 가라앉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공자님." "누구냐?" "천비 소군(素君)이옵니다." 백수범은 흠칫했다. 그는 의자에 도로 앉으며 담담히 말했다. "들어 오너라." '채홍과 아영, 그들 두 명은 벌써 내게 마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유독 소군만은 아직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제 시작할 속셈인가?' 백수범은 내심 이렇게 생각하며 막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백의시비를 응시했다. 소군은 차가운 느낌이 드는 미인이었다. 그녀는 항시 차분했으며 평소에도 말수가 유난히 적었다. "무슨 일이냐? 소군." 소군은 공손히 대답했다. "공자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백수범은 맞은 편 의자를 가리켰다. "그럼 자리에 앉아라." "감사하옵니다. 공자님." 백수범은 그녀가 앉기를 기다려 물었다. "대체 어떤 말이냐?" 웬지 소군은 매우 비장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 을 지그시 깨물며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 두 가지 부탁이 있어 왔습니다." "두 가지?" 백수범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소군은 여전히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부탁의 댓가로 소녀 역시 공자님께 두 가지 사실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백수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군은 눈을 내리깔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저의 원래 주인은 남궁공자이십니다." 백수범은 그 말에도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남궁공자의 명을 받들고 겉으로는 공자님을 모시지만 실 제는 공자님의 행동을 감시하여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백수범의 입가에 한 가닥 기이한 미소가 어렸다. "소군." "네." "지금 너는 고육계(苦肉計)를 쓰는 것이냐?" 소군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며 백수범은 나직히 기소를 터뜨렸다. "후후후! 네게는 미안한 일이다만 처음부터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소군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 그럼에도 소녀를 내몰지 않으신 이유는......?" 백수범은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신경을 쓸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거늘 어찌 너에게까지 마음을 뺏길 수 있겠느냐?" "......!" 소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말인즉 소군 따위는 자신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아무리 계략을 쓴다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오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소군은 심금이 떨리고 있었다. '이...... 이 분은 충분히 그러실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야. 나 따 위는 감히 비교도 못할 깊은 지략이 계시니.......' 백수범은 웃음을 그치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듣고 싶다. 대체 네 부탁이란 무엇이냐? 또 내게 가르쳐 주겠다는 사실은 무엇이더냐?" 소군의 얼굴에는 잠시 갈등이 어렸다. 그녀는 결심한 듯 힘겹게 말을 꺼냈다. "공자님께서는 반드시 비밀을......." 백수범은 의자에 깊숙히 몸을 묻었다. "말하기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된다." "아, 아니옵니다." 사람의 심리란 묘한 법이다. 상대방이 별 관심이 없는 듯 하면 도 리어 이쪽에서 몸이 달게 되어 있다. 소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행여나 기회를 잃을까봐 얼른 말했다. "제가 공자님께 알려드릴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남궁공자 의 출신인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인명부(人名簿)와 남궁세가의 모 든 것이 기록되어 있는 지형도(地形圖)입니다." 백수범은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소군은 그의 표정 변화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둘째는 남궁공자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세력에 대한 비밀입니다." 백수범은 담담히 물었다. "네가 어찌 그 비밀을 알 수 있단 말이냐?" 소군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난 사 년 동안 한 사람의 목숨을 뺏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 원하여 이 비밀을 캤습니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라도 있느냐?" 소군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백수범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다. 그럼 나에 대한 두 가지 부탁이란 뭐냐?" 소군은 이제까지 보여왔던 냉정하고 침착한 분위기와는 달리 갑자 기 두 눈에 무서운 증오와 광기를 드러냈다. "첫째는 한 사람을 죽여달라는 것입니다." "으음?" "그 자는 금천성(金天成)입니다." "뭣이?" 백수범은 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너무도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왜 죽여달란 말이냐?" 그가 즉시 물었으나 소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유는 묻지 말아 주세요." 백수범은 소군의 두 눈을 주시했다. 그의 강렬한 눈빛에 소군은 마침내 고개를 떨구고야 말았다. 백수범은 침착하게 물었다. "그와 원한이 있느냐?" 소군은 전신을 경련하며 격동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에게 불구대천지한이 있읍니다. 제가 사 년 동안이나 남궁공자 밑에서 모든 굴욕을 참아온 것은 오직 그 때문입니다." 백수범은 빙그레 웃었다. "재미있군. 좋다. 그럼 두 번째 부탁은 무엇이냐?" 그러자 소군의 표정이 불현듯 처절하게 변했다. "공자께서는 아직도 저의 말씀을 믿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제 말을 믿게 하기 위해 한 가지 방법으로 증명을 하려 합니다." 소군은 갑자기 신형을 비틀거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칠 공에서 검은 선혈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아니?" 백수범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소군은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의자를 붙잡았다. "두, 두 번째 부탁은, 저의 시체를 안장해 달라는 것, 저의 죽음 으로 공자님을 믿게, 하려는 것......." "소군!" 백수범은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소군의 얼굴에는 이미 검은 사신이 덮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겨우겨우 최후의 말을 토해냈다. "두, 두 가지 비밀에 대한 것은... 저의... 품 속에... 그, 그럼... 부디 제 부탁을......." 쿵! 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소군은 채 말을 마치지도 못한 채 고개를 탁자에 박았다. 그로 인해 탁자는 금세 검은 피로 젖었다. "소군!" 백수범은 다급히 부르며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자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 "공자, 그 계집을 건드리지 마시오." 어디선가 들려온 한 가닥 음침한 음성이 그의 동작을 멈추게 했다. ③ 스스스....... 미세한 기척과 함께 방 안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오척 단구에 곰방대를 문 인물로 독황(毒皇) 서래음(西來音) 이었다. 아울러 천마성의 쌍궁(雙宮) 중 만독궁의 궁주이기도 했다. "서궁주!" 백수범이 놀라자 독황 서래음은 가볍게 포권한 뒤 소군에게 다가갔다. 그는 탁자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찍은 다음 혀에 대보았다. 그의 안색이 싹 변했다. "심마고(心魔蠱)!" 서래음은 경악성을 발하더니 곰방대를 휘둘러 급히 소군의 혈도를 십여 곳이나 짚었다. 신속하기가 마치 번개같은 타혈법이었다. 이어 그는 품 속에서 한 개의 푸른 색 단약을 꺼내 죽은 듯이 엎어져 있는 소군에게 먹였다. 그 후에야 그는 백수범을 향해 돌아섰다. "공자께서 돌아오셨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노부 서래음, 황급히 달려 왔소이다." 백수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잘 왔소이다. 그런데 소군은 어떻소? 아직 죽지 않았소?" "죽지는 않았으나 대단히 위험하오이다. 이 계집은 심마고(心魔蠱)에 걸려 있었소이다." "심마고?" 서래음은 곰방대를 몇 번 빤 후 말을 이어갔다. "심마고는 묘강(苗疆)의 고왕(蠱王) 흑천수(黑泉搜)의 독문 고술 이오. 이것에 걸리면 시술자의 명령에 따라야 하고 만약 배신의 뜻을 품으면 즉시 심마고가 발작하여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죽게 되오." "으음." 백수범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그러자 서래음은 다시 몇 모금 곰방대를 빨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흠, 노부는 얼마 전 남궁신풍이 고왕을 초청해 왔다는 소문을 들 었소. 그러나 반신반의했는데 이제는 확증을 잡았소이다." 백수범은 기이하게 눈빛을 번뜩이며 물었다. "소군을 살릴 수 있겠소?" 서래음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소군이 죽으면 안 되오. 흐흐흐! 이 계집을 잘만 이용하면 역으 로 남궁신풍의 뒷통수를 칠 수 있게 될 것이오." 그는 소군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소군의 품에서는 한 권의 얇은 비단책자와 두루마리 한 개가 나왔다.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간직하십시오. 이 계집이 거짓을 말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백수범은 묵묵히 책자와 두루마리를 받았다. 서래음은 소군을 옆 구리에 끼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발했다. "공자, 내일 아침 이 계집은 완쾌될 것이오. 그리고 아무 일도 없 었다는 듯이 공자를 뵙게 될 것이오. 흐흐! 그럼 노부는 이만 가 보겠소이다." 스스스....... 독황 서래음은 담배연기를 남기며 창 밖으로 사라졌다. 백수범은 다시 의자에 앉으며 그의 말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안색을 가라앉혔다. "황의통령(黃衣統嶺)." 백수범의 나직한 부름에 창 밖으로부터 한 명의 인물이 날아 들어 왔다. 그는 체격이 우람한 한 명의 대머리 화상이었다. 그러나 중답지 않게 그의 두 눈에서는 온통 괴이하고 무시무시한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홍광(紅光)을 띄고 있었다. 마불(魔佛) 공화승(孔和昇). 이것이 그의 명호로 그는 황의수호무사의 통령직에 있었다. 백수 범은 그가 나타나자 담담히 물었다. "모두 보았소?" "보았습니다." 공화승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대의 의견은 어떻소?" 공화승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남궁신풍에 대한 비밀사항은 아마 거의 사실일 것입니다." "내 생각도 그렇소." "그러나 서래음과 소군, 그 두 사람은 믿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요?" "고육계(苦肉計) 안에 또 하나의 고육계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 입니다. 어쩌면 소군, 그 계집이야말로 오히려 서래음의 심복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공화승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방문이 열리며 한 명의 백의노인이 들 어왔다. 그는 백의수호무사의 통령인 백령비마 육견불이었다. 그 의 안색은 침중했으나 또한 진지했다. "공자님, 공형의 말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오?" 백수범의 어조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육견불은 신중하게 얘기를 꺼냈다. "지난 반 년 간 노부는 세 계집의 뒤를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그 리하여 채홍과 아영은 숨겨진 내력을 속속들이 알아냈으나 유독 소군만은 출신조차 불분명했습니다. 또한 그 계집은 수 년 전 천 마성에 들어 오기 전에 이미 서래음과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랬었군." 백수범의 안면이 다소 흐려졌다. "어쩌면 그 계집이 남궁신풍의 시녀로 들어가 그의 비밀을 알아낸 것도 서래음의 명령 때문일지 모릅니다." 육견불의 말은 더 할 나위없이 침착했다. "이번에 공자께 접근하여 그 비밀들을 쏟아낸 것 또한 서래음의 계획일 가능성이 짙습니 다." 백수범은 다시 물었다. "그들이 그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뻔한 일입니다. 소군은 공자의 신임을 얻을 수 있을 것 아닙니 까? 게다가 공자께서 남궁신풍의 약점을 알게 되면 그의 세력이 약화될테니 서래음은 가만히 앉아서 일거양득, 일석이조를 취하려 한 것입니다." "으음. 일리가 있는 말이오." "더구나 소군을 통해 서래음은 공자의 약점까지도 쥐게 됩니다. 그는 일석삼조마저 노렸다 할 수 있습니다." 백수범은 그 말에 한 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에 서인지 그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그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입을 떼었다. "과연 서래음은 음흉한 자요. 그러나 그의 음모는 당분간 깰 필요가 없는 것 같소." "맞습니다." 육견불은 맞장구쳤다. "서래음은 천마성 내에서 무서운 실력자입니다. 진심이든 아니든 그의 힘은 공자께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르실 때까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백수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신중하게 덧붙였다. "육노인, 이제 호심각 주위에 다시 연환구구쇄혼진(連還九九碎魂陣)을 펼치시오." 육견불은 미소를 지었다. "염려마십시오. 이미 빈틈없이 전개해 놓았습니다. 공자께서 허용 하지 않는 한 이번처럼 서래음이 멋대로 들어오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백수범의 입가에 만족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수고했소." 그는 마불 공화승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노인, 수하들의 무공수련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되었소?" 마불 공화승은 황송한 듯 대답했다. "공자께서 주신 비급으로 황의수호무사 중 정예 이백 명은 과거에 비해 몇 배나 무공이 증진되었습니다. 모두가 공자님의 덕분입니다." "수고하셨소. 곧 그들이 크게 활약할 시기가 올 것이오." 육견불, 공화승 두 사람은 감격해마지 않았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네째 공자 공손기에게 마음이 이끌림을 느꼈 다. 그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실상 그를 만난지는 불과 얼마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치밀한 성품과 능력, 그리고 전신에서 풍기는 기질에 그들은 은연중 심신 을 압도당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도 처음에는 달랐다. 용담호혈과 도 같은 천마성 내에서 그에게 호감을 얻어 이득을 꾀하려는 것이 그들의 주된 목적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전혀 틀렸다. 그들은 그에게 매료된 나머지 충심(忠心)으로 그의 심복이 되어가고 있었다. 백수범은 창 밖을 바라보며 홀연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며칠 후부터 천마성의 인물들은 나 천마잠룡의 무서움을 뼈 저리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모든 반대자들 의 숨통을 죄어 버릴 테니까. 후후후후후......!" 잔잔하던 그의 웃음이 방 안을 온통 뒤흔드는 웃음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육견불과 공화승은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지금 새 로운 시대의 한 효웅(梟雄)의 탄생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 다. 아니, 어쩌면 차기 천마성주의 탄생을 미리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
첫댓글 잼 납니다
즐독 ㄳ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