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3) 발발부터 수습까지의 전과정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학살 사건. 일본 패망이후 남북한의 이념갈등 발단이 되어 봉기한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 경찰 간의 충돌 과정, 그리고 이승만 정권 이후 미국 정부의 묵인 하에 벌어진 초토화 작전 과정에서 무고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
이미 일제에게 가혹한 수탈을 당했던 제주도는 해방 이후에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군정의 폭정과 사상 최악의 지속적 흉년에 시달렸음. 그야말로 제주도 역사상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봐도 무방했을 때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단독으로 무장대 조직, 경찰서 기습을 가해 제주 4.3 사건이라고 불림. 물론 실제로는 그 날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고 1947년 3월 1일부터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계속되었음.
여기에 이승만 망명 이후로도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치는 반공정권이 수많은 제주도민을 4.3 사건을 언급하였다는 이유로 체포하고 고문했던 것까지 합치면 실질적인 지속 기간을 더 길게 볼 수도 있음.
1947년 3월 1일에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려 2만 5천~3만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이 날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관덕정을 지나가고 기백 명 정도의 군중이 시위행렬을 구경하고 있던 도중 사건이 하나 터졌다. 오후 2시 45분 경, 기마경찰이 타던 말의 말굽에 아이가 채었는데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을 비난하며 몰려들었고 기마경찰은 황급히 도망쳤다. 군중들은 도망가는 기마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러자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은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관덕정 주변의 사람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 일로 6명이 죽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의 발포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이 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사망자는 하나도 없었고,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망자 6명 중 5명이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사망자들이 시위가 관련이 없으며 경찰의 발포가 과잉 대응이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미군 정보보고서도 이들의 발포를 비이성적이라 규정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경찰은 자신들의 이 발포를 정당화하기에 급급했다. 관덕정 앞에서의 발포가 치안을 위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3월 1일의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다는 미확인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흘렸다. 3월 1일 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이 제주도에 선포되었고, 다시 수백 명의 응원경찰이 육지로부터 파견됐다. 여기에 3월 1일의 시위와 관련하여 여러 명이 경찰에 끌려가자 제주도의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한편 발포사건으로 격앙된 민심은 남조선노동당에게는 좋은 기회로 다가왔다. 남조선노동당은 제주도 내의 좌익 세력을 이끌면서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여기에 호응했다. 거기에 3.1 발포사건의 진상을 아는 우익 세력들도 우려를 나타내며 점차 경찰을 향해 광범위한 비판적 여론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3월 10일부터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공장, 회사, 학교 등에서 공무원, 노동자, 학생들은 일제히 파업했고 이는 13일까지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 파업 참여자들은 3.1 발포사건에 대한 사과와 발포자 및 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주장했다. 심지어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도 파업에 참여하여 직장을 이탈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총파업에 참여한 직장과 사람들은 166개 기관, 41,211명이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인 미군정은 당연히 이런 요구조건을 무시해버렸다. 미군 보고서는 총파업의 원인이 3.1 발포사건에 대한 분노와 남조선노동당의 선동에 있다고 봤지만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이라며 제주도민들을 좌익으로 몰아갔다.
미군정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좌익을 탄압해 총파업을 와해시키려고만 했다. 곧 파업에 참여한 66명의 경찰이 해임되고 그 자리는 육지에서 온 서북청년회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그러면서 경찰은 파업 본부를 습격하고 파업 참여자들을 잡아가며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이와 같은 탄압으로 총파업은 3월 말부터는 가라앉았지만 탄압은 계속되었다.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한동안 이어졌다.
검거된 이들은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47년 3.1 발포사건 이후부터 1948년 4월 3일까지 2500여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들을 수용하기에 제주도의 감옥은 너무 좁았고, 수용자들의 상태는 기본적으로 최악이었다. 감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1947년 유해진이라는 사람이 도지사로 부임했는데, 그는 미군정에게도 극우파로 규정된 인물로서 도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정치적 반대파만 탄압하려고 애썼다.
그에 맞춰 도내 곳곳에서 서북청년회원들은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거나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여러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되면서 점차 제주도민과 경찰 사이의 충돌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1948년에 접어들면서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했다.
경찰에 끌려간 20대 젊은이 3명이 잇달아 사망한 것이다. 경찰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이들은 모두 고문으로 죽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자 제주도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지속적인 탄압을 받던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은 이런 상황들을 놓치지 않았다. 1948년 초부터 격렬한 찬반 논의 끝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을 하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결정은 남로당 중앙과의 협의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즈음에 제주도 각지의 오름마다 봉화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봉기를 일으키겠다는 신호였다. 곧 350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 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일제히 습격했다.
무장대는 무기를 들고 경찰, 우익 인사, 우익 청년 단체 단원, 경찰 가족 등을 공격했다. 이 일로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무장봉기는 무장대가 경찰과 우익을 기습 공격한 것이기에 군경은 일동 긴장하였다.
그러면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킨 무장대의 규모와 전력은 어떠했을까? 사실 이 날 봉기를 일으킨 무장대는 경찰과 군인에 비하면 상당히 약체였다. 처음 봉기에 참여한 대원들은 300여 명에 불과했고, 이들이 가진 무기는 일제 99식 소총, 권총, 수류탄, 칼, 죽창, 몽둥이이었다.
그것도 총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대다수가 칼, 죽창, 몽둥이만 들고 나섰을 정도였다. 물론 이후에 군경에 대한 습격과 충돌을 통해 무기를 보강하기는 했지만 인력과 무기의 부족은 여전했다. 한편 이들은 게릴라와 유격대 방식으로 운영된 일종의 '빨치산'이었다. 무장대는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군경과 우익 인사들을 괴롭혔고, 제주도민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5.10 총선거 거부와 공산주의를 선동하였다.
5.10 총선거를 1달 정도 앞두고 있던 상황이라 군경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군경은 4월 3일의 무장봉기를 '빨갱이들의 선동으로 이루어진 무장폭동'으로 규정했다. 4월 5일, 미군정은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곧이어 응원경찰들과 우익 청년 단체 단원들이 증파되었고,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오후 8시 이후의 통행을 금지됐다.
이번 무장봉기의 최대 피해자였던 경찰과 우익은 좌익을 격렬하게 탄압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제주도민들과 또 다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진압에 보다 소극적으로 나왔던 경비대를 의심하여 일부러 방화 사건을 조작해 경비대를 출동시키려고까지 하며 광적으로 무장대 진압에 집착했다.
무장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벌어지며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경비대 9연대도 무장대 진압 명령을 하달받았다.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은 미군정에서 파견 나온 맨스필드 중령의 요청으로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에 들어갔다. 4월 22일,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지가 뿌려졌다.
전단에서 김익렬은 "나는 동족상잔은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면서 무장대에게 협상 테이블로 나오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무장대는 연대장이 직접 올 것과 협상의 장소와 시기는 자신들이 정하겠다고 답변했다.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의 회담은 4월 28일 제주도 대정면 구억리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둘은 논의 끝에 합의를 보았다. 그것은 72시간 내로 전투를 중단하고, 점진적인 무장해제와 하산을 통한 귀순을 진행하여 귀순자들의 신병을 보장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는 이러한 협상 결과에 크게 만족했다. 정말 이렇게 진행되었더라면 더 이상의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72시간이 거의 끝나기 전에 대형사건이 터지고 만다. 5월 1일에 정체 불명의 무장세력이 제주읍 오라리의 전략촌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경찰은 "배신자들에 대한 공비들의 보복"이라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협상 및 토벌의 주도권이 경비대로 넘어간 데 대한 경찰측의 훼방놓기로 보고 있다. 실제 습격 현장에서 체포된 포로가 자신은 경찰관이며 제주경찰서장의 명령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자백하기도 했다.
물론 경찰 측에서는 이게 좌익의 이간질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밝혀진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오라리 마을은 4.3 무장봉기 이후 무장대와 경찰의 충돌로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나온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우익청년단원들이 마을로 난입하여 좌익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집 10여 채에 불을 질렀다.
불이 나자 마을 주민들은 불을 끄려고 했고, 무장대는 청년단원들을 쫓아갔으나 충돌은 없었다. 소식을 듣고 온 경찰은 이미 떠나버린 무장대를 추격하지 않고 마을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다가 경비대가 출연하자 황급히 마을을 떠났다. 사건을 조사하러 오라리에 온 김익렬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미군정에 그 사실을 보고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한다.
5월 3일에는 귀순을 하러 산을 내려오던 사람들과 그들을 인솔하던 군인들이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의 총격을 받는 일이 터졌다. 총격을 가한 자 중 하나가 붙잡혔는데, 그는 자신이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했다.
이것을 안 김익렬은 경찰들이 진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과오를 숨기려 급급한다며 분노했다. 한편 미군정의 태도도 이 사건을 전후하여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이제 평화협상은 완전히 깨졌고, 다시 전투가 재발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셈이었다.
5월 5일, 딘 군정장관이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준장 등을 이끌고 제주도에 나타났다. 이들 일행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도지사, 김익렬 연대장 등을 만나 비밀리에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다시 재발한 무장봉기와 충돌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경찰 측에서는 줄기차게 이 봉기가 계획적인 폭동이고 강경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익렬은 이 봉기는 복합적인 이유에서 발생했으며 경찰에게도 일정 부분의 책임이 있고 무력과 선무 공작을 병행해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물증까지 내놓자 딘 군정장관은 조병옥에게 설명과 다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조병옥은 이것이 다 조작된 증거이고, 김익렬은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자라는 모함을 해댔다. 분노한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며 회의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다음 날 김익렬은 연대장 자리에서 전격 해임되고 말았다. 그의 후임은 경비대총사령부 고급부관이던 박진경이었다.
평화협상이 깨지자 무장대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5.10 총선거가 코앞이었기에 무장대는 기를 쓰고 선거를 방해하고자 했다. 반면 군경은 기를 쓰고 선거를 성사시키고자 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선거사무소와 선거관리위원들에 대한 무장대의 공격은 더욱 빈번해졌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피살당했고, 선거 관련 문서들이 탈취되거나 소각되었다. 이러한 방해 공작으로 제주도의 최종 선거인 등록률은 64.9%에 불과했다.
선거위원들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군경이 자신들을 보호해주기를 바랐다. 군경은 무장대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힘들게 선거를 지원하고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그 와중에도 무장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이어져 5월 7일부터 5월 10일까지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선거 날인 5월 10일이 되자 무장대는 주민들을 산으로 보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지도에 따라 한라산이나 오름에 올라가 생활하다가 선거가 끝난 후에 하산했다.
동시에 투표소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되니 마을에는 군경, 군경 가족, 우익 인사, 우익청년단원 등을 제외하고는 투표할 사람이 별로 없었다. 투표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무장대의 습격으로 투표소가 불타거나 담당자가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대대적인 선거 보이콧으로 인해 미군정과 군경의 투표 독려에도 불구하고 제주읍 중심을 제외하고는 선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3개 투표구 중 2개 투표구의 선거가 무효화되었다. 그리하여 제주도는 5.10 총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재선거는 1년 이후에야 치뤄질 수 있었다. 선거 이후 군경과 무장대와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제주도의 선거가 시망하면서 군경은 더욱 눈에 불을 켜고 무장대에 대한 진압을 가속화했다.
5월 20일 경, 미 20연대장인 브라운 대령이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경한 진압을 천명했다. 또한 그는 제주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확신했다.
김익렬의 뒤를 이은 박진경도 그러한 강경진압에 한 몫 했다. 마침 그가 부임한 직후 경비대 병사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건이 터졌는데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 출신 병사들을 소외시키고 육지에서 온 병사들을 중심으로 진압 작전을 펼쳤다.
브라운과 박진경의 진압 작전으로 제주도 중산간 마을 전역에서 수천여 명의 주민들이 체포되었다. 이런 무차별 체포 작전으로 박진경은 두 달 만에 대령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원들도 나름대로 무장대를 진압한다며 민간인들을 매섭게 억눌렀다. 무장대와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이들은 좌익 혐의자에게 사적 제재를 가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8년 6월 18일, 강경진압을 주도하던 박진경은 끝내 부하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를 죽인 자는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등을 포함해 9명이었다. 재판에서 검찰은 이들이 김달삼의 지령을 받아 박진경을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피고인들은 "박진경 대령은 동포를 학살하고 진급했다."라고 말하며 "3천만을 위해서는 30만 제주도민을 다 희생시켜도 좋다.
민족상잔은 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실제 행동에 있어 무고한 양민을 압박하고 학살하게 된 박 대령은 확실히 반민족적"이므로 죽였다고 밝혔다. 피고인들은 대부분 중형을 받고, 문상길과 손선호는 총살당했다. 이후 박진경의 후임으로 최경록 중령과 송요찬 소령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박진경의 뒤를 이어 강경 진압을 계속 진행했다. 그리하여 계속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왔으나 최경록의 말처럼 "실제 전투에 종사한 정예 부대는 아직 하나도 체포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1948년 7월 경 들어 무장대도 적극적인 공격을 삼가고, 제주도민들의 여론도 평화적 문제해결을 계속 요구하며 진압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한편 7월 15일 경비대 제9연대가 부활하여 송요찬이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무장대에서는 '남조선 대의원' 선거를 비공개 혹은 반공개적으로 실시했고 총책 김달삼이 1948년 8월에 열리는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고자 월북하면서 이덕구가 후임으로 부임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일 후인 24일 대한민국과 미국은 양자 간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의거하여 미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통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국군을 지휘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으로부터 '임시군사고문단'이 파견됐다. 그러는 사이 10월에는 제주도로의 파견을 반대하며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다.
또 이 때 제주도 근해에 소련 선박이나 잠수함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리하여 점차 대대적인 토벌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1948년 9월부터 소강상태는 종료되고 군인들과 경찰들이 육지로부터 제주도로 차츰 파견되었으며 그나마 제주도민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김봉호 경찰청장이 경질되었다.
10월 11일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어 사령관으로는 김상겸, 부사령관으로는 송요찬이 각각 임명됐다. 10월 17일,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결정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중산간마을 거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이 포고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거주 자체를 금지하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해안으로 내려와야 살 수 있는데도 내려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부터 해안은 전면적으로 봉쇄되었고, 군경은 중간산마을을 비롯한 산악지역을 적지(敵地)로 간주했다.
여순사건이 터진 후에는 더욱 심해져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제주도로 내려와 군인과 경찰 행세를 했다. 또 제주도민들을 대상으로 민보단을 조직해 무장대를 막으려고도 했다. 마침내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을 토대로 군경토벌대는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갔다. 토벌을 위해 군경은 해안을 통제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제주도는 외부로부터 고립되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강경 진압이 시행됐다. 중산간지대의 마을들과 주민들이 주요한 진압 작전 대상이었다.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했다. 그리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일들이 학살 도중에 벌어졌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가족끼리 말을 태우게 하거나 뺨을 때리게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마구 구타했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 총살하는 일도 있었고,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그런가하면 무장대로 변장하여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다음, 도움을 주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 사살해 버리는 '함정 토벌', 자수를 종용하며 명단이 있으니 거짓말하면 재미없다며 으름장을 놓다가 사람들이 자수를 하면 바로 처형해버리는 '자수 사건'도 있었다.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자 그 사람의 가족을 데려다가 대신 죽여버리는 '대살(代殺)'과 마을주민들을 모아놓고 학살을 벌이는 '관광총살'도 횡행했다.
어떤 곳에서는 군경토벌대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살연습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학살한 사람들은 토벌대에 의해 모두 '사살된 폭도'가 되었고 학살행위는 '공적'으로 치하되었다. 한편 학살을 피해 마을을 탈출한 사람들은 한라산 인근을 떠돌아다니면서 동굴이나 숲에 숨어야 했는데, 군경토벌대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색출해 학살했다. 이런 끔찍한 일들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이름 빼앗기지 말라'는 유행어가 나돌았다.
토벌대 중에서는 서북청년회 소속 대원들이 가장 악랄했다. 이들은 노인, 어린이, 아기 등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한다. 이들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지주나 이북 출신 조직폭력배, 극우세력 장정들이 주류로서 제주에서 화풀이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진압군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으로 악명 높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49년 1월 17일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이다. 북촌리 부근의 제2연대 3대대의 일부 병력이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놀란 마을 원로들이 시신을 싣고 직접 대대 본부로 찾아갔다. 군인들은 흥분하여 마을 원로들을 무참히 살해한 후, 북촌리에 나타났다.
북촌리에 살고 있던 1천여 명의 마을 사람들을 집결시킨 군인들은 억지 핑계를 대며 민보단 책임자를 제일 먼저 사살했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했는데, 이 때 사격으로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공포에 잠긴 주민들에게 토벌대는 군경 가족을 골라낸 다음, 나머지는 수십 명씩 끌고가 마을 주변의 옴팡밭에서 모조리 총살했다.
이 일로 300~400여 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군인들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이 사건은 제주 4.3 사건 당시에 일어난 학살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였고 이 일로 인해 북촌리의 성비는 한동안 여초 현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군경은 이런 자신들의 학살행위를 무장대의 행위라고 왜곡해 서술해놓았다.
또 다른 사례로는 다랑쉬굴에서 일어난 일이 있다.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1948년 12월 경에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다랑쉬 오름 근처의 굴로 피난을 와 있었다. 그런데 군경토벌대가 그 위치를 알고 안에 있던 사람들 보고 나오라고 했다.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지폈다. 결국 연기에 질색하여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중 3명이 여성이었고 아홉 살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랑쉬굴은 1992년에야 발굴되어 그 전모가 알려졌다.
초토화작전은 1949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토벌대의 학살은 수많은 마을을 파괴시키고 제주도의 인구 수를 급감시켰다. 미군 보고서는 "지난 한 해 동안 1만 4,000명~1만 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면서 그 참혹한 실상을 보고했다. 제주 4.3 사건 동안 발생한 대부분의 인명,재산 피해는 이 초토화작전 때문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소수였지만 학살을 막기 위해 애쓴 사람들도 있었다. 모슬포경찰서장이었던 문형순은 군경의 강압으로 인해 100여 명이 자수하여 학살될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어 이들이 살아날 수 있도록 했다. 또 성산포경찰서 서장으로 일하면서 6.25 전쟁 당시의 4.3 관련 예비검속자 학살을 부당하다며 거부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서귀포시 남원면 신흥리의 구장인 김성홍은 군경의 물음에도 자신은 "모른다"고 일관하여 혹시 모를 마을 주민들의 학살 피해를 막아주어 '몰라구장'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위미리 출신 순경이었던 강계봉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주민들의 희생을 막고자 애썼고 서북청년회 단원이었던 고희준도 성산포 지역에서 무고한 주민들을 도와주었다.
또 경찰이었던 장성순은 귀순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고 풀어주었으며 이북 출신이었던 방 씨(본명은 미확인)는 상관의 학살 명령에 총기가 미작동한다며 명령 이행을 거부했다. 세화리 민보단은 제주도에서 가장 강했다. 그 날 제주도 남로당 놈들이 전부 습격에 가담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들은 밤 9시 30분경 세 발의 총성을 신호로 일제히 공격했는데 길가로 내려오면서부터 불을 질렀다.
그리고 "너 남로당원이냐, 민보단원이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눈에 보이는대로 죽였다. 그리고 식량과 옷을 도둑질해갔다. 당시 지서엔 응원대도 있었고 지서원들도 있었는데 갑자기 기습받은 것이라 경찰들은 정문 밖으로 나와 보질 못했다. (무장대의 구좌면 세화리 마을 습격 사례) 표선면 성읍리는 중산간마을이면서도 불에 타지 않은 마을이다. 토벌대가 성읍지서 소재지인 성읍리는 제외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성읍리는 소개령도 내려지지 않았고 오히려 토벌대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1949년 1월 13일, 군경토벌대가 수색을 위해 나간 사이에 여러 일들이 벌어졌다. 먼저 마을에 남아 있던 경찰이 입산자의 처자식을 살해하는 일이 터졌다. 이후 오후 5시 경 무장대가 마을을 공격했다.
무장대는 보초를 서는 주민을 살해하고 2시간 동안 음식을 약탈하고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협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무장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됐다. 이 날의 충돌로 38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무장대의 표선면 성읍리 습격 사례)
물론 이 끔찍한 학살 행위가 비단 군경토벌대에 의해 자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무장대도 보복이나 반동분자를 처단한다며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다.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 등에서는 무장대에 의해서 군경 토벌대나 우익과 관련된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러니까, 벌건 대낮에는 서북청년단의 토벌대 및 군, 경찰이 '빨갱이 색출'을 하고 빨치산들이 나올 시간인 저녁에는 하산을 해버린다. 그리고 저녁에 빨치산들이 내려와서는 살기 위해 군경에 협조한 양민들을 학살한 것이다.
광기 어린 토벌대의 강경 진압은 1949년 3월, 유재흥, 함병선이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유재흥은 무력 진압으로만 흐르던 진압 방식을 무력과 선무공작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구호대책이 마련되었고, 산에 있던 피난민들에게 "하산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하산을 권유했다.
그리하여 4월부터 귀순자들이 속속 나타났다. 5월까지 수천여 명이 귀순했고, 여자, 어린이, 노약자 등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검색되어 따로 수용되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이 직접 돌을 쌓아 격리 구역을 만든 뒤 그 안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유재흥은 재선거가 있던 5월 초까지 부임했고, 5월 15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제2연대에게 임무를 위임하고 폐지되었다. 서북청년회 일색이었던 제2연대 제3대대와 서청 출신 경찰들도 같이 철수했다. 하지만 하산자 중 1600여 명은 전국의 교도소에 분산되어 수용되고 말았다.
이후 육군 수색학교의 후신인 독립대대와 대한민국 해병대가 순서대로 제주도에 들어와 치안을 담당했다. 제주 주민들은 2연대의 공적을 높이 찬양했고 기리기 위해 서귀포에 ‘함병선 대령의 공덕비’를 건립하고, 1949년 7월 7일에는 도민 전체의 이름으로 한라산에 ‘평정비’를 건립했다.
이런 군경토벌대의 초토화작전과 선무공작 등 일련의 정책들은 무장대를 거의 끝장냈다. 무장대 대원들도 귀순 행렬에 따라 하산하거나 초토화작전 도중 사살당했으며 간부들도 이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6월 7일 무장대의 상징적 존재였던 이덕구가 군경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의 시신은 나무 십자가에 묶여져 제주경찰서 정문 앞에 하루 동안 전시되고 태워졌다. 그의 죽음은 무장대의 실질적인 몰락을 의미했다. 이후 무장대의 활동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여기에 군인들의 지속적인 진압작전이 이뤄지며 이들은 거의 소멸되었다.
무장대는 6.25 전쟁이 터지자 북한의 지원이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 게릴라 전술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끝내 군경의 무력 진압과 선무공작으로 인해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무장대원이 검거되면서 무장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질 당시는 4.3 사건의 여파가 간신히 가라앉던 즈음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전국에서는 좌익 정치범이나 좌익 혐의자,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예비검속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전국에 있던 교도소에서 학살이 벌어졌고, 이 때 그곳의 4.3 구속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7월 말부터 8월 하순까지 4.3 구속자나 귀순자 등을 대상으로 예비검속이 이뤄졌고, 비밀리에 학살이 이루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무장대가 대부분 토벌된 1950년대 중반에서야 제주도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1954년 9월 21일 마침내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되며 이 미친 학살은 막을 내렸다. 학살이 끝난 뒤, 사람의 시신을 거름과 양식으로 삼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몇 년 동안 연속으로 흉작에 시달리던 제주의 그해 보리 농사는 대풍이었으며 또 고등어 수확도 상당했다고 한다. 항구에 쌓인 고등어가 썩어 들어갈 만큼.
이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추정치는 3만명에서 최대 8만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친척 몇 다리만 건너면 4.3사건 희생자라는 뜻인데 실제로 오늘날도 제주도에 가 보면 촌락별로 제사가 거의 비슷한 날 치러지는 걸 보면 당시에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학살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브루스 커밍스는 제주 평화포럼에서 1949년 제주도민 사망자가 6만명 발생한 것으로 당시 임관호 제주도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했다는 전문가의 주장을 제기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 제주도민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뭍으로 건너온 피난민들의 대부분은 영도 쪽에 정착해서 살았다. 제주은행 부산지점이 부산의 중심가가 아닌 영도구 남항동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며 영도에는 여전히 많은 제주 출신 해녀가 활동하고 있다. 덤으로 제주도민회관도 영도구에 있다. 공교롭게도 영도도 부산 안의 섬이다.
무장대 ? 김달삼, 이덕구 학살 주도 ? 송요찬, 유해진, 조병옥, 탁성록 학살을 저지하려 했거나 저지한 ? 함병선 대령, 김익렬, 유재흥, 문형순 16. 사건 이후 4.3과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은 4.19혁명을 기점으로 많이 축출당하거나 사망했다. 면밀히 들여다보면, 좌익측에서 사건의 주동자 김달삼은 협상이 결렬되자 북한으로 도망갔다가 6.25 전쟁 때 정선군에서 처형당해 죽었다. 우익 측 인물 중 강경 진압을 지시한 조병옥은 4.19 혁명 전 병으로 사망, 송요찬은 정군운동으로 강제 예편당했고, 탁성록은 언제 죽었는지 모르나 학살을 저지른 데다가 마약쟁이라 오래 못 살았을 것이고, 김창룡은 이승만 정권 밑에서 충실하게 개 역할을 하다가 1958년에 프래깅당하고, 김종원 역시 4.19 혁명이후 병으로 사망한다.
예외적으로 최덕신은 박정희 정부 때까지 잘 있다가 중간에 내쳐지고 월북하였다. 이렇게 4.3 관련자들은 최덕신을 제외하곤 이승만 정권 중 사망하거나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쫒겨났지만, 그 중 아무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은 처벌할 수 없었고, 박정희 정권의 '반공논리'에 의해 4.3 사건이 부정되면서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마저도 놓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학살을 방조하고 묵인한 미군정 역시 사죄나 반성이 없이 본국으로 복귀했다.
4.3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의 회고를 들어보면 이념과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 얼마나 미쳤냐면 총살은 기본으로, 비협조적인 사람이나 경찰과 군인의 가족들은 본보기로 참수형에 처했고 연좌제를 적용한다며 친인척이나 면식이 있는 사람들을 공개처형했으며,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군경이 직접 죽이지 않고 제주 사람들으로 구성된 민보단을 이용해 사람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사냥'하였고 이들 중 항복해 귀순자라고 불린 사람들을 격리 수 용하다가 한국전쟁의 발발로 다시 가두어 학살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을 모아두고 돌팔매질을 하게 린치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비학동산이라는 곳에서는 임산부를 나체로 팽나무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들의 잔인함에 대한 증언 중에는 당시 폐허가 된 마을에서는 땅을 조금만 파도 시체가 마치 멸치 젓갈 담근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는 증언, 제주 폭포 상당수는 '민간인'을 과녁으로 쓰는 서청이나 군대의 '사격장'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심지어 일본군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영아 살해' 마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수습하고 진압하려 한 14연대는 자신들이 개입하기 전까지 살아남은 제주도의 거주자 대부분이 직간접적인 가해자라는 상황 속에 수습할 타이밍을 놓쳐 보복성의 성격을 가진 여순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이 모든 학살은 1940년대, 1950년대의 섬에서 벌어졌다. 지금에서야 항해, 비행 기술이 발달해 더 이상 섬도 단절된 기분이 들지 않고 마치 한반도와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만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배가 몇 척 없을 정도로 제주도는 거의 단절된 섬 수준이었다. 그 시대에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몇 사람만 거치면 4촌 아래 혈족일 수준으로 외부 사람의 유입이 적을 텐데, 그곳에서 연좌제를 적용하여 잔인한 학살을 한 것이다.
4.3사건과 여순사건으로 인해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주장과 함께 죽는 게 거의 기정사실이었던 해병대에 자원입대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전쟁동안 거제도 탈환작전, 인천상륙작전 등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한국 현대사의 안타까운 장면이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이 가장 용감하게 싸운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린 쪽발이가 아니라 미국인이다!" 같은 이유로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코사크와 유태인들이 스탈린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에 입대하여 용맹히 싸웠고 현대 러시아의 체첸인들도 보스토크 대대 등에 입대하여 싸우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4.3 사건기간의 후반기 때 당시 제주지역 계엄군을 맡고 있던 해병대도 양민학살에 가담했었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제주도지사를 필두로 한 서북청년단이나 초반에 있었던 계엄군들에 의한 학살들이 후반기 공비색출을 위한 학살보다 더욱더 잔혹했고 그 수도 비교가 안될 만큼 많았기에 이후 해병대가 저지른 학살사건이 많이 잊혀지는 감이 있다. 다만, 해병대도 학살에 참여했다는 점은 사실이자 엄연한 전쟁범죄이다.
4.3 사건 후기에서 정부는 계엄령을 폐지하고 산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게 귀순을 권유하였는데, 6.25 전쟁 중 예비 검속으로 이때 귀순한 사람들 다수가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게다가 귀순한 사람들 말고도 무고한 사람들 다수가 모함이나 잘못된 정보에 의해 희생되었다. 마을 유지들한테 밉보였던 이들, 아니면 그 사람들의 일가친척 등이 학살당한 경우가 있다.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지대하여,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과 대화하다 그쪽 화제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시며 심하면 아예 대화를 끊으실 정도이다. 바로 눈앞에서 가족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걸 본 입장에서는 절대로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을 무덤덤하게 꺼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민의 보통 제주 밖을 일컫는 육지(한반도 측) 사람들에 대한 인식마저 극도로 악화되어 1990년대까지 육지에서 제주로 시집오거나 장가온 사람들은 괜히 그런 이미지를 덧씌워받아 고생한 일이 많다. 이 슬픈 역사의 자화상 때문에 제주도에는 레드 컴플렉스가 극심하였다.
한편 제주도 방언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사건 당시 제주도 방언을 쓰는 사람들은 피해를 당하지 않게 제주인인 척을 안 하려고 억지로 제주도 방언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겼고 사건 이후에도 제주도에서 제주도 방언은 훈육의 대상이었다. 수업중 제주어를 사용한 교사는 장학관에게 지적을 받았고, 제주어를 사용하는 학생은 수업중에는 반드시 표준어만 사용하도록 강요받는 사례도 있었다.
게다가 6.25 전쟁 이후 육지 학생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사투리는 촌스럽다'라는 인식까지 퍼져 현재 언어 사용인구가 약 5,000~10,000 명까지 줄어들었으며 이는 현 제주도 인구의 1/60수준이다. 그래서 현재 유네스코에 의해 소멸 위기의 언어 가운데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에 등록될 정도로 소멸 위기 상태이다.
다행히도 현재 제주어는 보존되고 지켜야할 소중한 유산이자 언어로 자리잡았으며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에선 거주민들에게, 특히 학생들에게 제주어를 배우고 사용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일례로 제주의 초등학교들에서는 '제주어 사투리 연극 대회'가 열린다. 실제 제주어 대본을 가지고 연극을 한다.
또한 이 사건은 제주도에서 기독교 전체에 대한 인기가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미 신축민란을 계기로 천주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이 4.3 사건 당시 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회는 보수 개신교와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고, 이는 당연히 개신교에 대한 반감으로도 이어졌다.
이 때문에 21세기 현대에도 제주도의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틀어 크리스트교 신자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그리고 4.3 사건은 제주 지역의 정치 성향이 '육지'에 있는 당과 상관없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제주도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한 학살을 저지른 이승만 정권은 4.19 혁명으로 인해 축출되고 5.16 군사정변으로 해치워져 어느 당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게 되었기에 제주도의 선거 양상은 당보다는 지연에 기반한 인물을 중시하고, (일명 제주도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당, '궨당'.) 제주도 출신 중 중앙 정계에 영향력 있는 인물을 배출하고 싶어하게 되었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4.3 사건의 진상규명을 도와준 적이 많은 민주당계 정당의 성적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 계열 성향의 무소속 후보(우근민)가 당선되었고 2008년 18대 총선과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모든 선거구를 싹쓸이해갔으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3개 선거구에서 모두 당선되었다.
그렇다고 보수정당의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새누리당 후보였던 박근혜와 원희룡이 각각 승리하였다. 새누리당 후보들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4.3 사건, 지연 등이었는데 박 후보는 4.3 해결과 국가추도일 지정을 공약했으며, 원 후보의 경우는 본인이 고향인 제주도에서 먼치킨 급의 좋은 이미지(학력고사 및 사법시험 수석, 보수 정당 내 소장파 등)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주 출신을 중앙 정계에 고위 정치인으로 진출시키고 싶은 것이 보수정당의 당선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현오봉 전 의원의 경우 공화당의장을 역임했고 19대 총선 당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현경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도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에서 6선을 거두었으며, 민정당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친박계 측근으로 비서실장에 유력시되었다.
물론 박정희, 전두환 역시 4.3 사건을 부정하며 이를 언급하기만 해도 탄압하였기에 제주도민들이 보수정당에 대한 (호남보단 덜 하긴 하지만) 껄끄러움이 어느 정도 남아있다.
민주화 이후에도 4.3 사건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다. 노태우 정부까지만 해도 경찰에서 학살 피해자들의 유족들을 주기적으로 감시하고 방문조사하였으며 이런 식의 탄압은 참여정부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문민정부와 역사바로세우기가 끝난 김대중 정부까지도 주민들은 진상규명과 경찰의 감시/연행/연좌제 중단, 피해보상 등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대통령에게 보냈다.
다큐멘터리와 관련자들이 탄압받은 적이 있으며 어처구니없게도원세훈 국정원장 시절인 2009년에 최고의 간첩전문가도 탄압을 받은 일이 있다. 윤모 단장은 지난 2009년 5월 때 감찰실 직원과 점심을 먹다가 "제주 4.3 진압은 정부쪽에서 심하게 한 측면이 있다"는 말을 했다.
감찰실은 윤 단장의 발언을 '좌파적 발언'이라고 몰았고, 윤 단장은 대기발령당했다. 미군 G-2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한 제주도민들 중 80%이상은 토벌대에게 죽었다. 윤모 단장이 한말은 좌우파를 떠나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기발령을 받은 것이다.
2014년에 새로 바뀌는 역사 교과서에서는 실리지 않는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사 교과서에 기재되었다. 마침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인 이영조가 2010년 11월 5일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벌어진 국제학술회의에서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 폭동(communist-led rebellion)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빚게 되었다. 사실 관계만 논하자면 4.3사건은 일단 남로당에 의한 폭동이 맞긴 맞지만 문제는 이를 진압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의 희생을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논란이 된 것.
2014년에 박근혜정부의 공약에 따라 4.3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자칭 우파 단체가 반발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까지 언급했다. 또한 제주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박원순 서울시장이 만든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좌익폭도들을 감싸고 이승만 대통령을 학살자로 만드는 등 왜곡되었다며 박원순 시장의 사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요즘 "대한민국 예비역 영관장교 연합회" 라는 어버이연합과 비슷한 시기에 반짝 하고 나타난 극우단체가 제주 4.3사건때 일어났던 군의 학살을 극구 부정하고 군이 오히려 정당한 대처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2017년 시점에도 5.18 민주화운동, 부마항쟁, 4.19혁명, 6월항쟁 등과 비교해 보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인지도가 적고, 공교육 과정에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7차 교육과정이 되고 난 후 단순한 반공논리적 서술이 약간 개선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네 가지 대표적 민중항쟁과 달리 4.3을 민중항쟁으로 선뜻 떠올리는 국민은 연령과 지역을 막론하고 드물다.
유명한 광주민주화운동조차도 유명세에 비하면 놀랍도록 전문가에 의한 학술적 연구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인데, 4.3에 대해서는 제주지역 언론, 시민단체, 향토사학자들이 아니고서는 거의 관심을 가져 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4.3에 대해서 남아있는 자료의 수는 결코 적지 않지만 대다수의 논자들이 이를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는 것도 문제다. 십수 년 전 제민일보사에서 출간한 '4.3은 말한다' 같은 연구서만 해도 두꺼운 책이 6권이나 현재 절판되어 도서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다.
민주화 이후, 특히 2000년대 이후 4.3 사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2000년에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1998년 11월 당시 ‘한라일보’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말했다.
사과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정부는 참여정부였다. 2003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사건 55년 만에 최초로 국가원수의 첫 사과를 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4.3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2006년 4월 3일 4.3사건 58주기 위령제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과거사 정리 약속을 포함한 추도사를 하여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사과하였다. 위령제 당시 김태환 제주지사와 4.3 사건 유족 대표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반면 참여정부 이후 보수정권 측은 사과 및 진상규명에 미온적이었고 그나마 2014년에 박근혜정부에서 '4.3희생자 추념일'을 처음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였으나 9년 동안 대통령(이명박, 박근혜)의 참석이나 특별한 언급이 있지는 않았다.
4.3사건 70주년을 앞둔 2017년 4월 8일에 '제주 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공식블로그'가 출범하였고, 10월 17일에는 제주 4.3 관련 유관단체들은 서울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학살 당시부터 침묵해 온 미국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고자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UN의 책임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서명 운동'을 개시하였다.
2018년 4월 2일에 제주도 교육청과 대만의 가오슝시교육청은 4.3사건과 2.28 사건에 대한 교류협약을 체결했다. 같은 날, 교황 프란치스코가 제주 4.3 사건 70주년 추념식을 앞두고 교황청 국무원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 명의로 보낸 메시지를 통해 이 행사가 치유와 화해를 증진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교황이 4·3 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해 위로 메시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8년 4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이 70주년 4·3희생자추념식에 참석하였다. 문 대통령은 12년 만에 4.3 추모행사에 참석하는 대통령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다시 한 번 사과하고,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4.3 사건은 오랫동안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작가 현기영의 경우, <순이 삼춘>을 출판했다가 금서 조치를 받고 정부에 끌려가 구타를 동원한 고문을 당했다. 현기영 작가는 제주 토박이로 4.3 사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4.3이 주제가 아닌 다른 책을 썼다가 역사를 회피한다는 자책감에 시달려 4.3 전문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작가로, 어린 시절 4.3 사건에 휘말려 가족이 죽고 집이 불타는 참변을 직접 겪은 사람이다. 현기영 작가가 쓴 책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순이 삼춘>: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참고로 삼촌이 아니라 삼춘이 맞다. 제주 사투리의 경우 집계 사회의 흔적이 남아 성별 구별 없이 연하자를 '조캐(조카의 변형)', 연상자를 '삼춘(삼촌의 변형)'으로 부른다. 당시 젊은 여인이었던 작중의 순이 삼촌이 4.3 사건을 겪은 일과 그 후를 액자 형식으로 이야기해나가는 단편 소설이다.
또한 생존자들의 후유증을 실감나게 다루기도 했는데, 순이 삼촌이 옴팡밭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지만, 그 이후 PTSD에 시달리다가 자기가 살아남았던 옴팡밭에서 음독 자살한다는 씁쓸한 결말로 맺는다.
이를 보고 화자는 한 달 전에 죽음이 아닌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라고 순이삼촌의 일생을 평한다. <마지막 테우리>: 이 소설에서 학살과 관련된 사건이 충격적인데, 마을 사람들과 함께 굴에 숨어 있다가 잠깐 나온 주인공이 군경토벌대에 잡혔을 때 다른 사람들이 있는 굴을 가리키라고 해서 아무 굴이나 가리켰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굴 안에 노부부와 아이가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 등장.
<쇠와 살>: 초토화작전 당시에 발생한 학살 사례 23건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은 기록소설이다. 소설 속에는 온갖 기구한 학살 사례가 나온다. 예를 들면 학살당한 사람들이 폭도로 오인될까 두려워 시신 수습을 요구하는 노인을 군인들이 '빨갱이를 편든다'라며 죽이거나, 학살 도중에 겨우 살아났으나 하필이면 정신이 나가는 바람에 "나 살아졌수다(나 살아났어요)!"라고 말하여 결국 목숨을 잃거나, 학살에서 살아남고자 가족이 장교에게 뇌물을 찔려주어서 살아날 수 있었으나 일병 하나가 살아난 것을 목격하는 바람에 결국 총탄을 맞거나 군경토벌대에게 잡힌 청년을 살리고자 한 노인이 '우리가 잘 교육시켜서 올바른 대한민국 국민으로 만들 테니 살려달라'고 요구했으나 자신도 목숨을 잃게 되자 "백성들을 다 죽이고 어떻게 나라를 만든다는 거냐!"며 울부짖는 등. <도령마루의 까마귀>: 제주 4.3 사건을 여성들의 시각에서 다룬 작품.
<지상에 숟가락 하나>: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10대 시절까지 이야기를 폭넓게 다루고 있는 일종의 성장 소설인데, 작가 본인이 어린 시절 4.3을 겪은지라 유년 시절 관련해서 4.3이 자주 등장한다. 이 외에도 5.16 이전에 나온 오영수의 단편 '후일담'은 아주 리얼하게 4.3 사건 당시 민초들이 당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부끄러워 말도 못할 고문이라든가 경찰에 의한 총살 등. 결국 여주인공은 국군 장교인 남자 주인공의 보증으로 살아남지만 6.25 발발 후 남자 주인공이 제주도에 왔을 때 여주인공은 "돌 매달고 배타고 나가서 빈 배만 돌아왔다는''' 결말. 시사 만화가 박건웅이 이 사건을 다룬 <홍이 이야기>라는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재일교포 작가인 김석범이 일본 문예춘추사의 <문학계>에 일본어로 연재한 대하소설 <화산도>도 4.3을 다룬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책은 총 12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데, 1948년 2월부터 1949년 6월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중립적인 시각을 가진 이방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2015년 소설이 쓰여진 지 약 반세기 만에 한국어 완역본이 출판되었다. 한편 김석범은 1957년 <까마귀의 죽음>이라는 소설집을 쓰기도 했는데 이 책은 <화산도>의 모태 격으로 여겨진다.
운동권 출신 시인이자 <양철북>으로 유명한 이산하 씨도 1987년에 해당 사건을 소재로 <한라산>을 냈다. 그러나 해당 시집은 그해 11월에 작가가 치안본부 대공수사대에 의해 연행되고 1988년에 유죄 판결을 받아 '이적표현물'로 판정되어 더 이상 나오지 못하다가 2003년에야 복간되었다. 그 외에 (현재 여러모로 논란이 되고 있는) 시인 고은도 해당 사건을 소재로 한 시 <오라리>를 썼고, 시인 김명식 선생도 <유채꽃 한 아름 안아들고(1989)>, <한락산(1992)> 등의 4.3 연작시를 썼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이 사건을 비교적 중립적인 시각으로 (말하자면 아주 건조하게) 다루면서 인지도가 많이 올라갔다. 하지만 본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레드헌트는 국가보안법에 의거 '이적 표현물'로 판단되었고, 1997년에 이 작품을 상영한 인권영화제의 주최자인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서준식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3년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중립적으로 조병옥의 강경책 등에 조명했다. 또한, 극중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이 일을 재조사하고, 공식사죄를 검토하고 있다고 해설에서 추가 소개하기도 했다. 작 중에선 이 일에 이정재가 깊게 관여하기도 했다. 최동열의 말이나 나레이션을 통해 '아마 죽은 사람들 대부분은 좌.우익이 뭔지도, 자기가 왜 죽어야 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라며 씁쓸하게 묘사한다.
다만 서북청년단의 이화룡이 경찰인 이정재에게 항의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다. 서북청년단이 학살에 부정적이었던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다큐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첫 방송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첫 공식 사과로부터 10년이 지난, 제주인 감독 오멸이 만든 2013년 ‘지슬’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월드드라마) 수상. 제주에서 선행 개봉하고 전국 순차 개봉인데 독립 영화치고 흥행 성적이 좋다. 이 외 제주도 출신 노시인인 문충성이 자신의 시집 '허물어버린 집'에서 직접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참고로 문충성 시인은 10대 시절 대부분을 제주도에서 4.3 사건으로 보냈다.
판타지 만화인 아일랜드의 소설판에서는 원미호가 4월 3일에 제사를 지내고 지각한 학생들에게 화를 내는 장면도 있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 4월 3일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게 아니다. 작가가 잘 몰랐거나, 아니면 상징적인 의미로 삽입한 듯.
미술로는 강요배 화백의 그림이 유명하다. 그는 민족미술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인물인데 제주도에서 주로 활동하며 제주 4.3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은 <동백꽃 지다>라는 책으로 2008년 출판되었다. 참고로 강요배 화백의 이름 자체도 이 4.3 사건과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4.3 사건 당시 동명이인이면 이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몽땅 학살하는 모습을 본 화백의 부모가 이름이 특이하면 이런 꼴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녀들의 이름을 일부러 특이하게 지었다고 한다. 강요배 화백의 형의 이름도 '강거배'라고. 단편선과 선원들의 싱글중 하나인 <국가>는 이 사건을 풍자했다는 해석이 있다.
늘푸른 프로덕션의 한국전쟁 마지막 권을 보면 제주 4.3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김영삼, 노무현 정부는 바보같이 간첩들한테 보상금이나 줘서 잘못됐다." "4.3사건 때 일어난 군의 학살은 정당했다"는 논조로 이야기한다. 애초에 이 만화는 극우적 성향이 아주 심한 만화이다.
2006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역사다시보기'라는 시리즈에서 <제주 4.3>을 펴냈다. 후에 이 책을 집필했던 허영선은 그 내용을 보강하여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를 2014년 출간했다. 제주도 출신인 영화배우 김부선의 어머니는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로 알려져 있다. 첫 남편과 아들들을 사건으로 인해 모두 잃고, 새 남편과 재혼하여 김부선 남매를 낳았다고 한다.
학살을 피하기 위해, 혹은 빨치산에 있다가 검거를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 많다.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도 일본으로 도망간 친척 등을 통해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재일교포 1세대 중에 제주 출신이 유난히 많은 이유가 바로 이 사건 때문.[72] 이러한 이유로 과거에는 한국보다 일본 쪽에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김석범의 장편소설 <화산도>가 본 사건에 대한 재일교포 문단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는 이 사건의 원인을 미국의 남한 점령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 주장하였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피와 뼈' 등으로 잘 알려진 최양일도 4.3 사건을 다룬 영화를 준비 중이라는 얘기가 있었으나 현재까지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제작이 무산된 듯하다.
또한 조류 때문에 학살된 제주도민의 시신들이 일본까지 떠내려가는 것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일본에는 이때 거두어진 시신들을 화장한 곳에 위령비를 세운 곳이 있다고. 90년대 말에 은퇴한 한국통 일본 외교관이 쓴 회고록이 국내에 출판된 적이 있는데 이 외교관은 젊은 시절 제주도에서 근무했다.
그는 당시 일본인 외교관으로 보기 드물게 한국어를 전공했기에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일반 제주도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는데 그가 현지에서 사귄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 사람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사귄 이웃 친구에게 형을 고발당하고 그 형이 처형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는 참사를 겪었다.
이후, 아버지의 그 이웃 친구는 일본으로 달아났다. 수십 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기 아버지에게 "죽기 전에 용서받고 싶다."면서 노구의 몸으로 대문 앞에 무릎 꿇고 빌었으나 아버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대문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 아들은 저런 노인이 저렇게까지 비는데 용서해도 되지 않을까, 했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고. 이런 내용을 생각하면 피해자와 가해자를 불문하고 가까운 일본으로 달아난 경우가 적지 않은 듯.
1954년 9월 21일 제주도경찰국장 신상묵은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을 해제, 전면 개방을 선언했다. 지역주민들이 담당했던 마을성곽 보초 임무도 없어졌다. 소개되었던 중산간 마을에 대한 복구 및 이주·정착사업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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