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성 제3권 제22장 영락공주(永樂公主) ① 천광사(天光寺). 이 절은 매우 유서가 깊었다. 근 천 년(千年)에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어 일년 사시사철 향불 (香佛)하러 오는 참배객들이 항상 줄을 잇고 있었다. 수백 년의 도성인 금릉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천광사는 역 사도 역사려니와 규모 또한 방대했다. 상주하는 승인들의 숫자만 해도 근 오백 명에 이르고 있었다. 특히 이곳 천광사의 주지는 불력(佛力)이 깊기로도 유명했다. 영불대사(靈佛大師). 이것이 천광사 주지의 법호였다. 천광사에는 얼마 전부터 한 백의서생(白衣書生)이 머무르고 있었 다. 그가 온 지는 약 보름 정도 되었는데 허름한 백색문사의를 입 고 있어 외견상으로는 영락없는 일개 낙척서생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은연중에 탈속한 기품을 풍기고 있어 안목이 있는 사 람들은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백수범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천광사의 객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매우 단조로왔다. 그는 대개 밤 늦게까지 책(冊) 을 읽었으며 아침에는 늦잠을 잤다. 조반을 마치면 근처의 조양산(朝陽山)을 산책하며 점심쯤이면 다 시 천광사에 돌아와 이따금씩 법당에 들러 불경을 읽거나 불법(佛 法)을 듣곤 했다. 이를 테면 유유자적(悠悠自適) 소일하고 있는 셈이었다. 천광사 중들이 보기에도 그는 전형적인 일개 문사일 뿐이었다. 백수범은 천광사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조양산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뒷짐을 진 채 휘적휘적 걸어오는 그는 누가 보아도 무공의 무 자 도 모르는 백면서생이었다. 그런데 불당으로부터 한 명의 중년화상이 그를 발견하더니 급히 쫓아나왔다. "아미타불! 백시주님, 한참 찾았습니다." 백수범은 미소지으며 물었다. "스님께서는 무슨 일로 소생을 찾으셨습니까?" 중년화상은 합장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주지 스님께서 어제 저녁 못다 끝내신 바둑을 계속 두고 싶다고 하셔서......." 백수범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하! 대사께선 정말 무척이나 바둑을 좋아하시는군요."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주지 스님의 바둑 실력은 국수(國手) 급 입니다. 그런데 이 며칠 사이에 시주께 계속 패하셨으니 상당히 놀라신 모양입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백수범은 흔연하게 웃으며 대웅전을 돌아 내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쯤이면 계획대로 금의수호무사와 천랑단, 철기대 등이 천마성에 도착했겠군.' 백수범의 입가에는 한 가닥 신비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만홍걸의 재주와 천면신개의 변장술로 그들을 바꿔치기 했을 줄은.' 백수범은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일단은 한 수 이기고 들어가는 셈이다.' 그는 불전을 돌아 내원으로 들어갔다. 막 내원으로 들어서던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내원으로부터 세 명의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나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가운데 걸어오는 황의여인을 본 순간 백수범은 절로 감탄하고 말았다. '대단한 미모로구나!' 황의여인은 대략 십구 세 정도로 보였다. 그녀는 단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고귀하고 단아한 인상을 주어 은연중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녀의 고귀한 기품은 어쩌면 군왕(君王)에게서 풍기는 인상과도 흡사했다. 그러나 미모만으로 쳐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할만 했다. 이때 황의여인도 백수범을 보았다. 시비의 부축을 받고 걸어 오다 자연스럽게 그의 눈길과 마주친 것이다. 호수같은 눈망울이 반짝 빛나는가 싶더니 그녀의 얼굴은 보일 듯 말듯 미미한 변화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일행은 이내 백수범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백수범은 그때까지도 서 있었다. 여인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것이다. '정말 특이한 미녀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미녀들이 많지만 저 여인처럼 고귀한 기품을 지 닌 경우는 드문데....... 아마도 신분이 극히 존귀한 여인일 것 같구나.' 그는 은근히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한 순간 백수범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냐? 한낱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백수범은 고개를 흔들며 내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 자신 도 모르는 사이 이미 그의 뇌리에는 황의여인에 대한 영상이 뚜렷이 박히고 있었다. 검박하고 단조로운 느낌을 주는 선방(禪房). 그곳에 눈썹이 희고 안색이 어린아이처럼 붉은 한 명의 칠 순 노 승이 바둑판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노승은 천광사의 주지인 영불대사(靈佛大師)였다. 영불대사는 지 금 흰 눈썹을 쫑긋거리며 잔뜩 고민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로 일대고승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지금 그는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었다. 국면은 바야흐로 좌방변의 대마(大馬)가 흑(黑)의 협공에 몰살할 지경이었다. 때문에 영불대사는 아까부터 계속 미간을 좁힌 채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갑자기 영불대사의 노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아하! 그렇군. 허허허! 이제야 생각났군." 이때 선방의 문이 열리며 백수범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가 들어오 자 영불대사는 반색을 했다. "아, 마침 잘 왔소. 백시주." 그는 희색을 지으며 너털웃음쳤다. "허허허! 조금 전에야 기막힌 묘수(妙手)가 떠올랐소이다." 영불대사는 곧 흰 돌을 들어 좌방변의 한 곳에 딱 소리가 나게 두었다. "자, 어떻소? 이만하면 묘수가 아니오?" 백수범은 빙그레 웃으며 바둑판 맞은 편에 앉았다. 그는 흰 돌이 놓인 위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묘수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헛점이 있군요." 백수범은 흑돌을 들어 가볍게 좌방변의 한 곳에 놓았다. 그것을 본 영불대사의 안색이 금방 침중해졌다. "허어, 이것 참......." 영불대사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또 다시 심각한 고민에 빠진 표 정을 지었다. 백수범은 그를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불심 깊기로 유명한 대사조차도 한낱 바둑의 승부에 연연해 하다니. 재미있군.' 자르륵! 문득 바둑돌들이 한 곳으로 쓸려가 버렸다. 영불대사는 깜짝 놀랐다. "아, 아니 왜?" 백수범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만 두시라는 겁니다. 이 바둑 한 판을 다 끝내려면 해가 다 가버릴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불현듯 무엇인가를 깨달았는지 영불대사의 얼굴에는 금세 홍조가 떠올랐다. 그는 멋적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허허! 빈승이 추태를 부린 모양이오." "아닙니다. 대사." 영불대사는 바둑판을 한 쪽으로 치우며 신색을 바로 잡았다. "바둑은 이제 그만 두고 이야기나 합시다." 그의 어조는 더 할 나위 없이 진지해지고 있었다. 영불대사는 현 기어린 눈으로 백수범을 바라보며 말했다. "빈승은 백시주의 이야기를 들으면 때때로 불존의 말씀처럼 머리 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곤 하였소." 백수범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영불대사는 진지하게 덧붙였다. "아니오. 빈승은 이제까지 구십 년을 살아오기까지 수만이 넘는 사람들을 대해 보았소. 그러나 시주같은 분은 아직 한 명도 보지 못했소." 그는 노안에 기이한 광채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빈승은 백시주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백수범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그렇다면 잘못 보셨습니다. 소생은 단지 무능한 낙방문사일 뿐입니다." "허허! 과연 그럴지? 아무튼 빈승은 시주의 해박한 지식이나 인품 에 대해 놀라움이 많소이다." "대사께서는 공연히 과찬을 하십니다." "허허허......." 두 사람은 계속 담소했다. 그들의 대화는 시서예(詩書禮)를 비롯 하여 세간사(世間事)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 안 두 사람은 서로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백수범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대사님, 이제 그만 제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영불대사는 멋적게 웃었다. "허허, 그러고 보니 빈승이 주책없이 백시주를 늦게까지 붙잡아 둔 것 같구려." "아닙니다. 소생에게는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문득 영불대사는 침중한 안색을 지었다. "백시주." 백수범은 선방을 나가려다 말고 몸을 돌렸다. "내일 자시(子時)에 은밀히 빈승의 방으로 한 번 찾아주시오." 백수범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영불대사는 빙그레 웃으며 눈을 스르르 감았 다. "아미타불......." 백수범은 영문을 몰라 의아했으나 정중히 포권한 뒤 선방을 물러나왔다. ② 객방(客房). 백수범은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는 막 운공(運功)을 끝낸 상태였다. 그는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마치 고요한 물처럼 담담하고 맑아 전혀 무공을 익힌 눈빛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누가 알랴? 이미 그의 무공경지는 신광마저 깊숙히 안 으로 갈무리되는 상태인 것을. 백수범은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원정내단(元精內丹)은 이제 육 할 정도 체내로 융합되었다. 이로 써 내공은 사 갑자(四甲子)의 수위에 달한 셈이다.' 그의 입가에는 신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후! 금천성, 비무강, 남궁신풍, 그 자들은 지금쯤 내가 갑자 기 실종된 것에 무척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백수범의 안면에는 야릇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한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벌렁 침상에 누웠다. '우선 이곳에서 며칠 간 더 머무르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자.'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스스스스....... 문득 그의 영민한 청각에 극히 경미한 음향이 들렸다. 그것은 지붕 위를 스치는 소리였다. 백수범은 안색이 굳어졌다. '놀라운 경공이다. 이 정도 경공이면 가히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고수다.' 사실 그가 들은 음향은 바람이 스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상대의 공력 수위까지 파악해낸 백수범은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무림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 천광사에 대체 웬 자들이 몰려왔단 말인가?' 그는 소리없이 몸을 일으켰다. 스스스....... 그의 신형은 안개처럼 흐려지더니 창 밖으로 사라졌다. 흑영(黑影). 야음을 타고 두 줄기의 길고 짧은 검은 그림자가 불전의 지붕 위를 스치듯 날고 있었다. 그들은 움직임 자체가 흡사 유령과도 같았다. 때문에 그들을 따라 잡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마치 그들의 그림자인 양 또 다른 하나의 그림자가 그들을 바짝 쫓고 있었다. 백수범이었다. 그의 모습은 그들보다 더 흐릿하여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전진의 기환술을 이용해 그들을 따르고 있었다. 크고 작은 두 흑영을 쫓으며 백수범은 내심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굉장하구나. 더구나 저들의 경공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일반적인 경공술과는 격이 틀리다. 어떻게 보면 전진의 기환술 중 은신추종 술과도 흡사한 것 같다.' 스스스....... 두 흑영은 한 채의 전각 지붕 위에 소리도 없이 멈추었다. 그들은 처마 끝에 거꾸로 매달리는가 싶더니 빨려들 듯 전각 속으로 사라졌다. 처마에 박쥐처럼 매달린 것은 오히려 백수범이었다. 그는 창문을 통해 전각 속의 풍경이 한 눈에 다 들어오자 흠칫했 다. 그곳은 뜻밖에도 여인의 규방이었다. '사찰에 여인의 규방이라니?' 그는 규방 안에 내려선 두 명의 흑의인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검은 자루같은 것을 둘러쓰고 있었 는데 한 명은 비쩍 마르고 키가 컸으며 한 명은 난쟁이같이 작고 뚱뚱했다. '저들은......?' 백수범은 그들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규방 안에는 화려한 침상이 있고 그 침상 위에 한 명의 미녀(美女)가 잠들어 있었다. 백수범은 재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바로 낮에 보았던 황의미녀였다. 침상 옆에는 그녀가 대동했던 두 명의 시비들이 기대 앉은 채 잠 들어 있었다. 그녀들은 방 안에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한참 단잠에 빠져든 듯 했다. 두 흑의인은 방 안의 정경을 둘러본 뒤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순간적으로 음침한 빛이 번쩍였다. 그들은 서로 눈짓 을 하더니 먼저 두 시녀에게 다가갔다. 백수범은 재빨리 전음으로 세 여인에게 헛기침 신호를 보냈다. '......!' 침상 위의 황의미녀와 두 명의 시비들은 몸을 가볍게 떨면서 잠에 서 깨어났다. 세 쌍의 아름다운 눈들이 일시에 반짝 뜨였다. 그녀 들은 곧 방 안에 침입한 두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의여인이 크게 놀란 듯 경악성을 발했다. "누...... 누구냐?" 두 흑의인은 멈칫했다. 키 큰 흑의인이 눈을 희번뜩이더니 괴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공주(公主), 무례를 용서하시오." 그의 말투는 웬지 어색했다. 이때 백수범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공주라고?' 이때 두 시녀가 발딱 일어나며 외쳤다. "네 놈들은 누구냐? 감히 영락공주(永樂公主)님의 침소에 침입하 다니, 그것이 무슨 죄인지 아느냐?" 백수범은 내심 더욱 놀랐다. '저 여인이 바로 영락공주란 말인가?' 영락공주. 그녀는 당금 황실의 일곱 공주 중 다섯 번째 공주였다. 그녀는 미(美)와 지(智)가 뛰어나 황제로부터 유독 총애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두 흑의인들은 시녀들의 위협(?)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흐흐흐! 네 년들은 입 다물고 있어라." 이번에는 뚱보가 말했으나 그의 말 역시 몹시 듣기가 거북했다. "닥쳐라! 이 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악!" 두 시비는 고함치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은광이 번쩍 일었다 싶 은 순간 그녀들이 입고 있던 침의의 앞가슴 부분이 산산조각으로 베어져 날린 것이었다. 키 큰 흑의인이 손을 쓴 것이었다. 그 바람에 베어진 침의 사이로 탐스럽기 그지없는 두 쌍의 투실투실한 젖가슴이 완전히 노출되고 말았다. "아앗! 이.... 치한들!" 두 시녀는 기겁을 하며 급히 가슴을 감쌌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 답고 풍만한 젖가슴이었다. 시녀들은 비록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 지만 손바닥 밖으로 비어져 나오는 살결을 다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러나 두 흑의인은 정작 색(色)에는 무심한 모양이었다. 그녀들 을 노려보는 그들의 눈에는 단지 날카로운 살기만이 흐르고 있었다. 황의미녀, 즉 영락공주(永樂公主)는 사태가 범상치 않음을 느꼈는 지 고귀한 얼굴에 일말의 두려운 빛을 띄었다. "그대들은 누구길래 감히 함부로 손을 쓰는 것이냐?" 키 큰 흑의인이 그녀의 말을 자르듯 차갑게 내뱉았다. "알 것 없소. 공주께서는 단지 우리의 물음에 답하기만 하면 되 오. 순순히 답해 준다면 공주의 솜털 하나 건드리지 않겠소." "으음......." 영락공주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곧 그녀는 두려움을 지우며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영락공주에게서는 형용할 수 없는 기품과 만인을 압도하는 위엄이 흘러 나왔다. 영락공주는 고운 음성으로 차분히 물었다. "그래, 그대들이 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오?" "옥새(玉璽)는 어디 있소?" 영락공주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옥새? 이제 보니 그대들은 숙부가 보낸 자들이구나!" 그 말에 두 흑의인은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곧 뚱보가 두 눈을 희번뜩이며 나섰다. "흐흐흐......! 눈치가 너무 빠르시군. 모르는 게 차라리 나았을텐데?" 영락공주는 서릿발같은 아미를 상큼 치켜올리며 노기에 차 부르짖었다. "숙부가 감히 역모(逆謀)를 꾸미다니! 감히......." 그녀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침상 옆에는 한 개의 줄이 늘어 져 있었다. 영락공주는 급히 그 줄을 잡아 당겼다. 그러나 키 큰 흑의인이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 공주, 그래 봤자 소용이 없소. 열두 명의 금궁시위(禁宮侍 衛) 무사들은 벌써 제거됐소." 그 말에 영락공주의 안색은 금세 창백하게 질렸다. 흑의인이 그녀 에게 다가가더니 음산하게 추궁했다. "솔직히 이야기하시오. 옥새는 분명 황제가 갖고 있지 않소. 그것을 어디에 보관했소?" "모른다! 이 반역자들." 공주는 비로소 공포를 느끼며 자꾸만 뒤로 물러났다. 두 흑의인은 두 눈에서 흉광을 뿜으며 더욱 바짝 다가갔다. "크큿! 그럼 할 수 없군. 무례를 범할 수밖에." 그들은 마침내 손을 뻗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나는 대명의 공주다. 감히......." "흐흐흐....... 죄송하지만 공주를 잠깐 모셔가야겠소." 그들의 기세는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문득 창밖 에서 한 가닥 낭랑한 웃음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후후후......! 그렇게는 안 될 걸?" "웬 놈이냐!" 두 흑의인은 놀라 부지중에 살기 띈 음성으로 외쳤다. 그러자 창 밖에서 추상같은 꾸짖음이 떨어졌다. "이런 천하의 역적놈들! 감히 존귀하신 공주님을 위협하다니, 너 희들은 구족(九族)이 능지처참(陵遲處斬)되는 반역죄가 두렵지 않단 말이냐?" "......!" 두 흑의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비록 그들은 관(官)을 두려워 하지 않는 무림인들이었으나 능지처참이란 말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심금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누......누구냐?" 두 흑의인은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는 양 사나운 기세 로 창밖을 향해 외쳤다. 바로 그때였다. "어딜 보느냐? 본인은 너희들의 뒤에 와 있다." "헉!" 흑의인들은 황급히 돌아섰다. 그들의 눈이 한껏 부릅떠지고 있었 다. 언제 나타났단 말인가? 그들의 등뒤에는 한 명의 백의서생이 뒷짐을 진 채 한가로운 자세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서생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백수범이었다. '아! 당신은.......' 영락공주는 백수범을 보자 한 가닥 희색을 띄었다. 그녀는 낮에 잠깐 스친 적이 있었던 백수범을 기억하고 있었다. 영락공주는 반가운 표정을 짓는 한편 고운 안면에 한 가닥 불안한 기운을 떠올리고 있었 다. 그녀는 관심이 깃든 영롱한 눈으로 백수범을 바라보며 걱정하고 있었다. '학문이나 하시는 분이 이런 무례배를 감당하실 수 있을까......?' 이때 키 큰 흑의인이 백수범을 노려보며 차갑게 물었다. "너는 모두 보았느냐?" 백수범은 지나가는 말처럼 대꾸했다. "물론이다." "그럼 살려둘 수 없다!" 슈욱! 하는 섬광이 그 자의 허리춤에서 작렬했다.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었다. 그러나 백수범은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미끄러지듯 뒤로 스르르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조각조각 잘린 옷자락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백수범의 앞가슴 옷이 잘려나간 것이다. 실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쾌도(快刀)였다. 백수범은 그만 안색이 급변해 외쳤다. "무영도류(無影刀流)! 네 놈들은 왜국(矮國) 놈들이었구나." 그 말에 두 흑의인이 오히려 더 놀랐다. 특히 키 큰 흑의인은 자 신의 도(刀)를 내려다 보며 내심 경악성을 발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나의 도술을 이렇게 쉽게 피하다니?' 그러나 이때 백수범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감히 왜인들이 중원에서 설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구나." 한편 그는 내심 경이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빠른 도법이다. 천마삼검 중 천마섬(天魔閃) 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다. 왜국의 도법이 극쾌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명불허전이로구 나.' ③ 키 큰 흑의인이 괴상한 음성으로 물었다. "네 놈은 누구냐?" 백수범은 자못 한가롭게 대답했다. "일개 낙척서생이니 말해줘도 모를 것이다." 두 흑의인은 서로 눈짓을 하더니 음흉한 괴소를 지었다. "좋다! 애송이, 어차피 죽을 놈인데 아무려면 어떠냐?" 스스스스....... 그들은 기척도 없이 양 쪽으로 갈라섰다. 동시에 키 큰 흑의인은 허리춤에서 폭이 좁은 긴 장도(長刀)를, 뚱보는 어깨에서 하나의 철그물을 꺼냈다. 백수범의 눈이 섬뜩한 광망을 발했다. '이 자들이 누구인지 이제야 알겠다.' 그들의 특이한 무기를 보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왜구이괴(矮拘二怪), 그렇다면 비무강 쪽의 주구로군!' 왜구이괴(矮拘二怪). 그들은 왜국(矮國)의 무사들로 과거 백수범이 천마성으로 입성할 때 도상(道上)에서 잠깐 스쳐 지났던 자들이었다. 가등섭리(伽藤攝里)와 가등물교(伽藤物交). 이것이 그들의 이름이었다. 천마성의 둘째 제자인 비무강은 그들 을 포함하여 모두 세 명의 고수를 왜국으로부터 초청한 바 있다. 고도의 인자술(忍者術)을 지닌 그들은 경공술과 은신술, 지객술의 대가로 첩자로써의 가치로 치자면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백수범의 안색은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이 자들이 영락공주를 노리다니....... 이것은 역모에 해당되는 행위다. 그렇다면 비무강이 역모에까지 개입하고 있단 말인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가등섭리가 장도를 가슴 앞으로 곧추 세웠다. "애송이놈! 네 놈이 잔재간을 제법 익히기는 한 모양이다만 오늘은 임자를 잘못 만났다." 백수범은 그들을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 "너희들은 비무강과 어떤 관계냐?" 그 말에 왜구이괴의 두 눈이 금세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한결같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무서운 살기를 드러냈다. "죽어라!" 가공할 도광(刀光)이 화살처럼 백수범의 백회혈로 떨어졌다. 그야 말로 빛살처럼 빠른 쾌도식이었다. 가등섭리, 실상 그는 왜국에서 무영도류의 제일고수였다. 그의 도 법은 아주 간단했다. 단 일 초, 발도술(撥刀術)이 전부였다. 발도 술이 곧 공격인 것이다. 그의 무영도류는 너무나 빨라 뽑았다 싶은순간 이미 상대의 몸을 두 동강내고 마는 것이었 다. "앗! 조심하세요!" 영락공주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다급히 외쳤다. 그녀가 보기에 낙척서생이 가등섭리의 도에 반쪽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백수범의 모습이 안개처럼 흐릿해지고 있었다. 전진의 기환술인 환무보(幻霧步)를 펼친 것이다. 그는 충분히 가등섭리의 일격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러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찌--- 익! 놀랍게도 그의 앞가슴 옷이 길게 찢겨져 나가고 말았다. "흐흐흐......!" 가등섭리는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괴도는 허리춤으 로 돌아가 있었다. 발도와 동시에 다시 거두어진 것이다. 너무나 빠른 나머지 언제 뽑고, 언제 거두었는지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가등물교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더니 또 다시 도광을 폭사시켰다. 쐐--- 애--- 액! 이번에는 공기를 찢어 발기는 듯한 날카로운 소성이 일어났다. 백 수범은 아연 긴장하며 재차 환무보를 밟았다. 그는 뿌연 안개로 화하더니 아까와는 달리 무영도류의 공격을 간 발의 차이로 피해 냈다. 사실 그의 환무보는 이미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두 번째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가등물교도 합세했다. 우--- 웅---! 그의 공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그가 손바닥을 펼치자 괴이한 추가 뻗었다. 그들의 합공은 빠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절묘한 배합을 이루고 있었다. '무서운 합격술이다!' 도와 추의 공격이 숨쉴 틈도 없이 전개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섬 뜩했다. 미처 반격할 틈이 없었다. 더구나 무서운 압박감이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이때였다. 문득 가등물교가 기합과 함께 수중의 철그물을 내던졌다. 촤아--- 악! 백수범은 크게 놀랐다. 뜻밖에도 철그물의 넓이는 방을 온통 뒤덮 을 정도가 아닌가? 좁은 방 안에서는 피할래야 피할 곳이 없었 다. 마침내 그는 창황중에 그만 그물에 갇히고 말았다. "크핫핫핫......!" 가등섭리는 만족한 듯 광소를 터뜨렸다. 그는 곧바로 그물에 갇힌 백수범을 향해 장도를 찍어갔다. 영락공주와 두 시녀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백수범이 도 에 관통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혈사탄기(血死彈氣)!" 그물에 갇힌 백수범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혈광이 폭사되었다. 한 가닥 무서운 반탄지기와 함께 철그물이 위로 튕겨 오르더니 산 산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으헉!" 왜구이괴는 아연실색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백수범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는 천장 에서 머리를 아래로 하면서 손바닥을 칼날처럼 세워 가볍게 내리긋고 있었다. "천인도(天刃刀)!" 번--- 쩍! 놀라운 일이었다. 수중에는 분명 검도 도도 없었으나 그의 손끝으 로부터 섬광같은 검기가 뻗어 나왔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지며 피보라가 일어났다. 놀랍게도 가등섭리의 몸뚱이가 머리로부터 가랑이까지 두 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실로 가공할 무공이었다. 그것은 바로 천형삼식(天形三式)의 제 일식이었다. "흐으윽! 이럴 수가?" 혼자 남은 가등물교는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그는 악에 받친 듯 이 괴성을 지르며 추를 날렸다. "으와아악! 죽어랏!" "너희들이 왜국에서 떠나온 것이 죄다. 가거라." 백수범의 입에서 낭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의 손이 가 볍게 가슴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다음 순간 찬란한 일곱 줄기 보광이 눈부시게 작렬했다. 그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크아아아악!" 단장화(斷腸花)였다. 바로 단장화의 열여덟 개 꽃잎이 가등물교의 전신 십팔 개 사혈을 정확히 관통한 것이다. 단장화는 가등물교를 황천으로 보낸 후 선회하며 백수범의 수중으로 다시 돌아갔다. 전신에서 핏줄기를 뻗으며 가등물교는 바닥에 털썩 나뒹굴었다. 그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 신음처럼 읊조렸다. "네, 네가 누군지...... 알았다. 넌...... 공, 공손, 기...... 크윽!" 그는 울컥 피를 쏟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저승의 강을 건너가 버린 것이다. "너무 늦게 알았다. 그 사실을." 백수범은 바닥에 내려서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 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무서운 자들이다. 이들이 날 얕봤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 라면 최소한 백여 초는 넘겨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수범은 피바다를 이루며 쓰러져 있는 두 구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선 흔적을 없애야겠구나.' 그는 품 속에서 화혈산을 꺼내 시체에 뿌렸다. 시체는 곧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아아......." 한 가닥 낮은 탄식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영락공주였다. 지고무상한 신분의 그녀로서는 지 금까지 일어났던 일련의 일들이 난생 처음 겪는 끔찍한 사태였던 것이다. 두 시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공포에 질린 채 발발 떨고 있었다. 백수범은 영락공주에게 다가가 정중히 포권한 다음 정중하게 말했다. "이젠 심려 놓으십시오. 위험은 지나갔습니다." 그 말에 비로소 창백했던 영락공주의 얼굴에는 안심의 빛이 떠올 랐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치며 아미를 숙였다. "공자께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음성과 태도는 여전히 우아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는 극단 의 상황 속에서조차 기품을 잃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더욱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백수범은 영락공주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어쩔 수 없이 이끌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영락공주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자,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녀는 힘들게 말을 잇고 있었다. "소녀는 비밀리에 이곳에 나온데다 금궁의 시위무사들까지 잃고 보니 돌아갈 일이 막막하옵니다. 무리한 청일지는 모르나 공자께 서 황궁(皇宮)까지 저희들의 호송을 맡아주시겠습니까?" 백수범은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마십시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생 비록 야인이라 하나 본시 대명의 백성으로 국가 안녕의 음덕을 입은 몸, 어찌 공주님의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고마와요. 공자." 영락공주의 두 눈에는 안도감이 어렸다. 백수범은 곧장 몸을 돌렸다. "그럼, 날이 밝을 때까지 이곳에 계시기 바랍니다. 소생이 이 전 각 밖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손을 써 두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창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영락공주는 교족을 옮겨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 보았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 백수범이 전각 주위에 돌을 던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을 하시는 걸까? 저 돌이 무슨 효용이라도 있단 말인가?' 영락공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낱 돌멩이 따위가 전각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백수범이 돌을 던지는 방위를 지켜보았으나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백수범은 아무렇게나 무질서하게 돌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락공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웬지 낙척서생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자리잡았던 것이다. 백수범은 할 일을 마치자 빛살처럼 어두운 공간을 가르며 날아올 랐다. 그의 신형은 밤하늘을 향해 근 백여 장이나 솟구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영락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아! 저것이 정녕 인간의 힘인가? 하늘을 마음대로 날기까지 하 다니, 대체 저 분이 인간이란 말인가?' 영락공주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평생 황궁에서 맨땅 한 번 밟지 않고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고귀하게만 살아온 그녀였다. 무림계의 신비한 무공 따위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에 백수 범의 경신술을 보는 순간 그녀는 넋을 잃고 말았다. 이 짧은 경험은 영락공주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고야 말 았다. 그야말로 인간만사는 풍운무변이라더니, 그 말이 실증되는 순간이었다. ④ 백수범은 자신의 객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방 안의 침상에 누군가 걸터앉아 있었던 것이 다. 놀랍게도 그 인물은 천광사의 주지인 영불대사였다. "대사께서 야심한 시각에 웬일이십니까?" 영불대사는 미소지었다. "허허허! 내 진작 백시주께서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으 나 그토록 뛰어난 무공을 지녔을 줄은 몰랐소." 백수범의 검미가 꿈틀했다. '오늘 밤 일을 모두 본 모양이구나.' 영불대사는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경계할 필요는 없소이다. 노납이 결코 다른 목적이 있 어 시주를 따른 것은 아니었소." 백수범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소생이 멋모르고 공연히 끼어들었나 봅니다. 대사께서 공 주님을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영불대사는 고개를 서서히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들 두 왜인들의 무공은 노납으로서는 도저히 감당치 못하는 수준이었소." 그는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노납이 시주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소." "부탁이라면?" 백수범은 의아했다. "우선 자리에 앉으시오." 백수범은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영불대사는 그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노안에 진지한 표정을 담은 채 물었다. "노납에게 백시주의 출신내력을 밝혀줄 수 있겠소?" 백수범의 얼굴에 한 가닥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영불대사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미타불....... 시주. 이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오." 그의 두 눈은 맑고도 깨끗하여 조금의 사심도 없어 보였다. 그러 나 백수범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천마성에서 가공할 음모의 투쟁을 겪은 그는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기환술 중에서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독심투령술을 펼쳐보았다. 짧은 순간에 백수범은 확인할 수 있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노승 의 내면과 그 안에 가득 찬 진지함을. 그는 영불대사가 그에게 악 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마침내 백수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는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미타불......." 백수범의 파란만장한 과거사를 모두 들은 영불대사는 긴 한숨을 내쉬며 불호를 외웠다. 그의 얼굴에는 은은히 감탄과 존경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미타불....... 백시주의 출현은 정녕 천하창생의 크나큰 복(福)이외다." 백수범은 고개를 저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영불대사는 문득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백시주, 노납이 누군지 아시오?" 백수범은 침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영불대사에게 심 상치 않은 내력이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나 그의 정 확한 신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허허....... 노납은 당금 황제의 사촌형인 공성왕(公聖王)이오." "넷?" 백수범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허허허! 노납은 본래 어려서부터 공명심이나 부귀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이곳에서 오직 불도(佛道)에만 전념해 왔소. 영락공주가 이곳에 온 것도 실은 노납을 만나기 위해서였소." "아!" 백수범은 불현듯 벌떡 일어나더니 깊이 읍했다. "감히 일개 야인이 공성왕 폐하께 무례를 행한 것을 용서하소서." 영불대사, 즉 공성왕은 고개를 저으며 합장했다. "아미타불....... 출가인에게 있어 과거사란 부질없는 짓. 시주는 이전처럼 노납을 단지 영불로만 알아주시기 바라오." "......." "노납이 정체를 밝힌 것은 지금이 처음이오. 이곳의 불자들도 까맣게 모르고 있소." 백수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는 공성왕이 자신에게 정체 를 밝히는 데는 필히 큰 이유가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노납이 이 사실을 밝힌 것은 이유가 있어서요. 그것은 시주께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을 하기 위해서요." 백수범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대사님." "허허허, 우선 앉으시구려." 백수범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공성왕, 즉 영불대사의 얘기가 시작되었다. 황가(皇家). 황가란 곧 천하(天下)의 주인과 그 일족들을 말한다. 그러나 역대 의 황실(皇室)에는 항상 용상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당금의 대명(大明) 주씨황실(朱氏皇室)에는 모두 아홉 명의 군왕 (君王)이 있었다. 그 첫째가 당금의 황제인 공명왕(公明王)이었다. 그런데 현 황궁에는 하나의 거대한 음모가 무서운 역모의 뿌리로 자라고 있었으니, 그것은 둘째인 공천왕(公天王)이 역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애초부터 황제의 보위를 노리고 오랫동안 찬탈을 획책해왔 다. 그리하여 그 일환으로 강호의 한 비밀집단과 손을 잡은 그는 마침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기에 이르렀다. 공천왕의 첫 목표는 바로 황제의 칙령을 내릴 수 있는 옥새를 뺏는 일이었다. ....... 백수범은 경악하는 한편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역모의 주역이 황가의 인물이었다니.......' 그는 비로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아까 공주가 숙부를 운운하였구나.' 영불대사는 음울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왜인 두 명도 옥새를 노리고 공주를 납치하려고 했던 것이오." 그 말에 백수범은 가슴을 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안색이 변해 내심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역시 비무강이 공명왕의 배후인물이었단 말인가?' 이때에 영불대사는 어투를 바꾸어 말했다. "백시주의 천품은 실로 대단하오. 노납이 보기에도 천 년에 하나 날까말까한 영웅의 기상이오." "과찬의 말씀입니다. 어찌 소인이 그 정도에 이르겠습니까?" 영불대사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 없었다. "백시주의 능력이면 필시 공천왕의 음모를 분쇄할 수 있을 것이오. 도와주시오. 시주." 백수범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소생은 일개 야인에 불과합니다. 어찌 감히 황궁의 일에 개입할 수가 있겠습니까? 능력 부족입니다." 그러나 영불대사는 완강했다. "아니오. 백시주가 아니면 아무도 그 일을 해낼 자가 없소. 이미 황궁의 무사들 중 반 이상이 공천왕의 심복이 되었소. 더구나 이 일은 천하중생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일이니 시주께서 도와주셔야만 하오." 백수범은 난색을 지었다. 그 일은 너무도 엄청난 대사였다. 그는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아니 애당초 황궁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그는 그런 일에 말려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소생은 자신이 없습니다. 게다가 일개 평민으로 그럴 자격도 되지 않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그 말에 영불대사는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희색을 띄었다. "자격은 만들면 되는 것이오." "......?" 백수범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영불대사는 의미있는 눈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공주의 부마가 되면 간단하오. 그렇게 되면 황제로부터 천군어사 령(天軍御使令)이 내려질 것이오. 그 정도 신분이면 천하만인의 생살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으니 역모를 평정할 자격이 갖추어지는 것이오." "넷?" 백수범은 대경실색했다. 황제의 부마라니! 그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아연하여 멍하니 영불대사를 바라 보았다.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엄청난 말을 쉽게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 무슨 뜻입니까? 부마라니......." 그러나 영불대사는 어디까지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힘주어 말했다. "그동안 노납은 백방으로 이 중대한 일을 맡을 인재를 찾았소. 그 일에는 무공은 물론 인 품(人品)과 자질, 그밖에도 학문이나 무예들을 두루 갖추어야 함은 물론 천부적인 위엄까지 갖춘 자라야만 했기 때문이오. 그 결과 노납은 시주야말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소." "그, 그건......." 백수범은 당황하여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그러자 영불대사는 합장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시주, 노납이 이렇게 부탁하오."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출가해 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황가의 군 왕(君王)인 공성왕이 아닌가? 그런 그가 한낱 약관의 강호무인 앞에 고개를 꺾고 있었다. "대, 대사님!" 백수범은 당황하여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영불대사는 완곡하기 짝이 없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노납은 언제까지고 이 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겠소이다." 백수범은 마침내 크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좋습니다. 대사님, 능력이 닿는 데까지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소. 백시주." 영불대사의 노안에는 무한한 감격과 안도가 동시에 어리고 있었 다. 그러나 백수범은 한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공주님과의 혼인만은 재고해 주십시오. 소생이 비록 미천 한 신분이기는 하나 부마라는 신분을 수단으로 하고 싶지는 않습 니다. 또한 존귀하신 공주님께서 저같은 야인을 마음에 들어 하실리도......." 영불대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허!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공주는 분명 시주를 부군으로 맞이하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오." 백수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영불대사는 생각이 있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품 속에서 하나의 금갑(金匣)을 꺼냈다. "백시주, 노납이 내일 밤 자시에 시주를 만나자고 한 이유는 바로 이것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소." "이게 무엇입니까?" "금갑천경(金甲天經)이라는 무공비급이오. 이것은 황궁의 서고(書 庫)에서 오랫동안 비전되어 온 것으로써 천오백 년 전의 전설적인 신학(神學)이오. 이것을 익히면 능히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무인이 될 수 있을 것이오." 백수범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금갑을 바라보았다. "백시주가 천군어사대인으로 활동을 하려면 지금까지 익힌 무공을 사용해선 안 되오. 왜냐하면 황가에서 무림에 개입했다는 소리를 들어선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이오. 따라서 신분노출을 막 기 위해 이것을 익혀야 할 것이오." 백수범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천군어사대인이 천 마성의 무공을 쓰거나 전진무학, 또는 혈영신공을 쓰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단지 상권(上卷)일 뿐이오, 나머지 하권은 황궁에 있소." 영불대사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만약을 위해 반만 보관한 것이오. 그러나 노납의 친필과 이 금갑 천경을 지니고 황제를 뵈오면 하권마저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백수범은 심금이 떨리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는 본래 문(文)에 뜻을 두고 관(官)으로 진출하여 치국평세를 이루려 하지 않았는가? 그 런데 문을 버리고 무(武)를 택한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가 꿈꾸던 자리가 다가온 셈이었다. 그야말로 인간사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만일 지난 날 이 런 기회가 왔다면 그는 크게 기뻐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도리어 마음이 무겁고 침중해지는 느낌이었다. 관에 진출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향후 그의 한 몸에 황궁(皇宮)의 운명이 걸려있는 것이다. 자칫하면 대명종사에 누를 끼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세상 일이란 본래 이렇듯 풍운만변한 것이었던가?'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는 백수범의 입가에는 절로 쓰디쓴 고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그는 금갑을 내려다 보며 지그시 눈을 내려감고 있었다. 과연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앞으로 어떤 부침을 거듭해 나갈 것 인가? 그것은 오직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