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천군어사대인(天軍御使大人) ① 황궁(皇宮). 천하의 주인이자 현 명국(明國)의 천자(天子)인 공명황제(公明皇帝)가 기거하는 곳. 황궁의 규모와 방대함은 천하의 으뜸이다. 그 화려함 또한 극치를 이룬다. 천하의 주인만이 능히 이런 곳에서 살 자격이 있으리라. 어전(御殿). 이곳은 황제가 정사(政事)를 돌보는 대전이다. 공명황제는 용상에 높이 앉아 있었다. 약 육순 정도의 나이였다. 곤룡포를 입고 있었으며 매우 인자한 모습이었다. 황제다운 중후한 덕망이 엿보인다고나 할까? 그의 앞에는 화려한 황의궁장의 미녀가 무릎 꿇고 있었다. 그녀는 다름아닌 영락공주(永樂公主)였다. "아바마마." 영락공주는 공손히 아뢰고 있었다. 그녀는 금릉의 천광사(天光寺) 에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으음......." 공명황제는 침중한 신음을 흘리며 공주의 얘기를 들었다. 그의 용 상 앞 탁자에는 한 장의 서신(書信)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영 불대사(永佛大師)가 보낸 친필서신이었다. 이윽고 황제는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에도 백수범이란 아이가 그리 대단하더냐?" 영락공주의 양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예전에 없던 기이한 생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네, 아바마마. 소녀 이제껏 수많은 명문세가의 공자들을 보았건 만 그처럼 훌륭한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 "으음." "문(文)을 논(論)한다면 소동파(蘇東波)를 누르고 무(武)를 말한 다면 신(神)과도 같사옵니다." 영락공주의 눈에는 간절한 청원의 빛이 담겨 있었다. "만일 폐하께서 그 분을 등용하시기만 한다면 황궁에 깊이 뿌리내 린 액난이 모두 제거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공명황제는 눈을 내리감았다. 그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일곱 공주 중에서도 다섯 째인 영락공주가 가장 지혜롭고 침착하다는 것을. 그러한 그녀가 지금 백수범이라는 초야(草野)의 낭인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불대사도 마찬가지였 다. 그로 말하면 일찌기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불도에만 전념하 던 황가의 인물, 공명황제에게는 사촌 형님 뻘이었다. 그 또한 서신의 지면이 부족하다 싶으리만치 구구절절 한 청년무사를 칭찬해 놓고 있었다. 공명황제는 마침내 감았던 눈을 떴다. "좋다. 과인이 친히 그를 보겠다. 불러 들여라." "아! 아바마마." 영락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금세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황제의 윤허가 떨어지자 한 명의 시종이 서둘러 명을 받고 어전 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어전에 한 명의 백의문사(白衣文士)가 나타났다. 바로 백수범이었다. 말끔한 유백색 문사의로 갈아 입은 그의 모습은 군계일학(群鷄一 鶴)이었다. 그야말로 선인(仙人)을 방불케 하는 출중한 모습이었다. 더우기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탈속한 기품은 신비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백수범을 보는 순간 공명황제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 과연 공주가 반할만도 하구나. 저 청년의 풍모가 과인의 예 상보다 훨씬 뛰어나구나. 하지만 겉모습은 그렇다쳐도 과연 속은 어떨지 모르겠구나.' "천민 백수범, 폐하를 뵈옵니다." 백수범은 무릎 꿇고 절을 하여 군신(君臣)의 예를 표했다. 그러자 공명황제는 몸소 용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선뜻 걸음을 옮겨 백수범을 부축했다. "일어나라. 짐은 사소한 예의는 좋아하지 않는다." 백수범은 황제의 스스럼없는 행동에 오히려 당혹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어 백수범은 영락공주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내전(內殿)이었다. 이곳은 공명황제가 기거하는 곳으로 그의 친인(親人)이거나 환관, 또는 친위대 외에는 범접할 수 없는 곳이었다. 내전에는 공명황제와 영락공주, 그리고 백수범이 넓은 오단목 탁자에 둘러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단봉용향차(丹鳳龍香茶)를 마시며 긴 대화를 나누고 있었 다. 공명황제는 대화가 오갈수록 백수범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무엇을 물어보아도 백수범은 만사무불통지였던 것이다. 한편 공명 황제는 탄식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백수범이 대과(大科)에 몇 번이나 응시하고도 번번히 낙방 의 고배를 마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 가닥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허어! 과인이 정사에 어두웠다는 것을 알겠구나. 이런 인재가 대 과에서 번번히 떨어졌다니....... 이 어찌 크나큰 손실이 아니겠는가?' 그는 대과의 심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짐의 눈과 귀가 어두웠음을 알겠구나. 황조의 실권이 둘 째인 공천왕에게 태반이나 넘어간 것도 결국 우연이 아니리라.' 공명황제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내 신색을 고치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대는 무공을 아는가?" 백수범은 공손히 대답했다. "약간 배운 바 있습니다." 공명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말했다. "과인은 그대가 지닌 문(文)의 능력을 충분히 인정하노라. 만일 그대의 무공이 문의 경지와 같이 높다면 짐은 그대를 중용하겠다." 백수범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설사 공명황제가 그를 중용하지 않는다 해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었다. 그러나 한 번 내뱉은 말에 는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이미 영불대사에게 대임을 맡을 것을 수락했던 것이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공명황제와 영락공주는 조용히 그를 주시했다. 백수범은 대전 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오 장 밖에 있는 사람 의 키만한 청동화로가 들어왔다. "......." 황제와 영락공주는 그를 바라 보았다. 이제 그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무예를 보여줄지 사뭇 궁금했던 것이다. 백수범은 서서히 우수를 들어 손 끝으로 청동화로를 가리켰다. 그 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푸시시식! 그의 손 끝에서 홍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청동화로는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녹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허공을 격한 삼매진 화(三昧眞火)의 절정기공이었다. "오오!" 공명황제와 영락공주는 모두 입을 벌렸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벌어진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백수범은 신형을 날려 허공 삼 장 높이까지 떠올랐다. 허공에 뜬 그는 전후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두 개, 세 개, 아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숫자로 불어났다. 삽시에 삼십육 개로 분리된 그의 환영(幻影)이 어지럽게 허공에서 춤추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삼십육 개의 분신은 모두 각기 틀린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허어어!" 공명황제는 연신 탄성을 발했다. 그는 이제껏 금궁(禁宮)의 많은 무사들을 보아왔지만 백 수범이 펼치는 것처럼 신비무쌍한 무공을 소유한 자는 본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들어본 적도 없었다. 실로 불가사의한 무학의 세계를 황 제는 생전 처음 목도한 것이었다. 영락공주 역시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녀는 천광사에서 이 미 백수범의 가공할 무공을 보았으나 그때는 워낙 창망 중이라 미 처 감탄하고 어쩌고 할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서 백수범이 펼치는 기오막측한 무공을 대하 고 보니 그녀는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만...... 그만하라." 먼저 손을 저은 것은 공명황제였다. 그러자 백수범의 분신들은 일 거에 사라지고 그는 마치 거짓말처럼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마치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한낱 허상에 불과했다는 듯이. 황제는 탄성을 금치 못했다. 그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오오! 실로 희세의 기재로다. 짐은 다시는 이런 인재를 놓치는 우(偶)를 범하지 않으리라.' 공명황제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단안을 내리기에 앞서 그는 엄숙하게 말했다. "더이상 시험할 필요 없겠다. 짐은 그대가 천군어사대인으로서의 자질이 충만함을 알겠다. 그러나 그대는 천군어사령이 되기 위해 서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알아야 한다." 백수범이 침묵하자 공명황제는 다소 어두운 기색으로 말했다. "천군어사령은 본시 가문이나 출신이 대단히 높은 자, 그리고 황실(皇室)과 관계가 있는 자 만이 받을 수 있다. 왜냐면 그것은 황명(皇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명황제는 백수범과 영락공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만일 그대가 공주와 연분을 맺는다면 부마가 되니 황실과 관계를 이루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대의 출신은......." 황제는 난처한 듯 말 끝을 흐렸다. 백수범의 미간이 잔뜩 좁혀진 것은 그때였다. 그는 몇 번에 걸쳐 표정이 변하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폐하께 저의 출신을 솔직히 털어 놓겠습니다." 기이한 일이었다. 대체 백수범에게 또 다른 출신 내력이라도 있단 말인가? "소생의 출신을 입 밖에 내기는 처음입니다. 폐하께옵서는 혹시 사십 년 전 승상대부(丞相大夫)를 지낸 백환성(白幻聖) 대감을 아십니까?" 공명황제가 아연하여 되물었다. "백승상이라면 선황(先皇)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충신 백승상을 말하는 것인가?" 백수범은 담담한 안색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이 바로 소생의 조부이옵니다." "그... 그럴 수가?" 공명황제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그는 백수범의 손을 덥썩 잡았다. "짐이 우둔하여 미처 깨닫지 못했노라! 그러고 보니 백승상과 닮은 데가 있노라. 비록 과인 이 어렸을 때 보았으나 그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대는 과연 백승상과 똑같이 닮 았구나!" 공명황제는 격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심지어는 안색마저 흥분으로 약간 붉어져 있었다. 백수범은 황제에게 손을 내맡긴 채 말을 이었다. "조부께선 선황이 승하하시자 바로 은퇴하셨습니다. 연후 개봉으 로 낙향하여 조용히 은자의 생활로 들어가셨습니다." 공명황제는 문득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때 백승상에게는 짐과 같은 또래의 백현상(白賢相)이란 친자가 있었지. 그는 짐과 같은 학우(學友)로 무척 현명했거늘 어찌 되었는가?" 그 말에 백수범의 얼굴에는 한 가닥 처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버님께서는 실로 바다와 같은 학문을 지니셨지만 천운이 없었 는지 소생을 본 삼 년 후에 그만 불치의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런!" 공명황제는 진실로 안타까운 듯 부르짖었다. "그렇다면 왜 승상은 조정에 그 사실을 품하지 않았는가? 또 그대 의 가문이 그렇게까지 몰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황제는 그 사실이 무척 궁금했다. 승상대부까지 지낸 혁혁한 명문 가가 겨우 이대에 이르러 몰락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백수범은 쓴 웃음을 지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이듬 해에 모친께서 별세하셨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부께서는 그로부터 이 년 후에 타계(他界)하셨 습니다. 당시 조부께서는 가산을 정리하시며 하인배들에게 모든 재산을 분배해 주셨습니다. 소생에게는 오직 한 채의 소축과 약간 의 전답을 남겨 주셨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당시 소생은 고작 오 세에 불과했습니다." "으음, 백승상이 어찌 그런 가혹한 처사를 내렸을까......." 백수범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조부님께서는 정녕 현자이셨습니다. 그 분은 어린 저에게 가문 (家門)을 내세우지 말며, 있음도 자랑하지 말라 늘 훈도하셨습니 다. 조부님의 깊은 뜻은 소생이 자력(自力)으로 가문을 부흥시키 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오오!" 공명황제는 연신 탄성을 발했다. 그의 얼굴에는 지극한 감동의 빛이 어리고 있었다. "다만 소생이 무능한지라 조부님의 깊은 뜻에 따르지 못했을 뿐이옵니다." 그렇게 말하는 백수범의 얼굴에는 회한과 자책의 물결이 어리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개봉부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거지들과 어 울리는 일개 낙척서생이었던 백수범. 그가 과거 대명조의 승상을 지냈던 명문가의 후손이었을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오, 수범.이리 가까이 오라." 공명황제는 격동의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백수범은 황제의 어 수(御手)를 잡았다. 황제는 백수범의 손을 굳게 잡고 있었다. "짐은 정녕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대는 정녕 훌륭한 조부를 가졌구나." "황공하옵니다. 폐하." 영락공주는 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담뿍 연모지정(戀慕之情)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허허허헛......" 공명황제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는 약간 들뜬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인 것 같구나. 더이상 짐이 무엇을 망설 이겠는가? 공주는 이리 가까이 오너라." 영락공주는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다가왔다. 공명황제는 그녀와 백수범의 손을 각각 잡으며 말했다. "한 달 후 너희들의 혼사를 이루겠다. 그날 만천하에 부마의 탄생을 알리겠노라." 영락공주의 얼굴은 온통 부끄러움으로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또한 부마에게는 천군어사대인의 령을 내리겠노라. 그대는 앞으 로 황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대업을 이루어야 하느니라!" "황공하옵니다." 백수범은 급히 일어선 후 무릎을 꿇었다. 마침내 그의 운명(運命)은 또 다른 전환을 맞이했다.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이 재도약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실로 놀라운 변신이었다. 그는 이제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천군어사 대인(天軍御使大人)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② 대명황실이 온통 술렁거렸다. 아니, 황도 북경이 벌컥 뒤집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 은 북경성의 모든 명문가와 고관대작의 자제들이 한결같이 선망하 며 마음을 빼앗기다시피 했던 영락공주(永樂公主)가 드디어 혼인 을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더구나 부마가 될 사람은 사십 년 전 승상대부를 지냈던 백환성의 손자라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북경 은 물론 대명천지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간은 흘러 마침내 혼인식 날이 도래했다. 신방(新房).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신방은 황궁의 깊숙한 내전에 꾸며져 있었 다. 신방에는 화려하게 성장한 백수범과 영락공주가 다반을 마주 놓고 앉아 있었다. 문무백관의 참석과 축하 속에 성대하기 그지없는 혼인식이 끝난 것이다. 비로소 호젓한 둘 만의 첫 날밤이었다. 그동안 두 사람은 눈코 뜰 사이도 없이 바빴다. 수많은 왕족(王 族)과 고관대작들의 축하에 일일이 답례를 하고 온갖 복잡한 절차 들을 치루어 내야만 했다. 그 사이 백수범과 영락공주 간에는 차츰 애정이 두터워지고 있었 다. 비록 어떤 목적을 위해 결합되는 것이기도 했으나 그들은 서 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에게 야릇한 감정을 느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를 수록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백수범은 자신의 과거는 물론 모든 여인들과의 관계를 서슴없이 영락공주에게 밝혔다. 그러나 영락공주는 화를 내기는 커녕 황녀(皇女)답게 넓은 도량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백수범의 입장을 모두 이해했던 것이다. 영락공주는 특히 소연옥, 소연영 자매와 탁영영, 더더욱 백리설빙 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굴리 며 그녀들에 관해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그녀는 조금도 질투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그런 태도는 백수 범으로 하여금 감동을 느끼게 하였다. ....... 두 사람은 합환주를 나누고 있었다. 영락공주는 이제 한 지아비의 평범한 아내일 뿐이었다. 술을 따르 는 그녀의 모습은 현숙하고 아름답기만 했다. 백수범은 잔을 내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공주, 밤이 깊었구려." "네...." 그녀의 음성은 미지의 두려움과 가벼운 흥분으로 인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백수범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영락공주는 부끄러움에 그의 품으로 몸을 깊숙히 묻었다. 이윽고 원앙금침 위에 그녀는 반듯이 눕혀졌다. "정말 아름답구려. 공주." 백수범은 화촉을 받아 신비롭게 빛나는 공주의 미모에 취한 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 영락공주는 살며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백랑, 소녀의 이름이 주약금(朱葯金)임을 아시면서 어찌 공주라 부르십니까?" 백수범은 일순 주춤했다. 영락공주, 즉 주약금은 방긋 웃었다. "소녀는 공주라는 신분보다는 백랑의 사랑을 받는 평범한 아낙이기를 원하옵니다." 백수범은 잔잔한 감동이 가슴에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약금(葯金)." 그는 주약금을 끌어 안았다. "백랑...." 그녀의 입술은 곧 두툼한 백수범의 입술에 포로가 되어 버렸다. 백수범은 부드럽고 능숙한 손길로 그녀의 혼례복을 벗겨 나갔다. 서서히 드러나는 주약금의 눈부신 나신. 이 순간의 그녀는 공주가 아니라 천하절색의 미인으로 불리워야 옳았다. 빙기옥골의 나신은 흡사 옥으로 깎은 듯이 정교하기 그지 없었다. 알맞은 높이로 풍만하고 부드럽게 솟은 두 유방과 반반하며 매끄 러운 아랫배, 그리고 곧게 뻗은 팔다리의 아름다운 선(線)....... 배꼽 아래로 내려가 둔덕진 곳에 이르자 은밀한 방초(芳草)가 형 성되어 있었다. 무성한 숲은 바로 경사가 급격한 절벽에 이르러 더욱 우거져 있었다. 그 아래 신비의 계곡은 여인의 열망을 간직 한 채 비밀의 향기를 은은히 발산하고 있었다. "아아." 주약금의 야릇한 신음은 백수범의 손길에 따라 점점 더 높아졌다. 백수범은 급히 옷을 벗어 던지고 침상에 올랐다. 육중한 그의 육 신은 가냘픈 여인의 육체를 소중히 애무하며 천지합일의 자세로 들어갔다. 뜨겁고 격정적인 신음성이 신방을 흔들었다. 침상은 태초의 음양 조화에 의해 열기를 발산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백수범은 힘찬 노가 되어 풍랑의 바다를 헤쳐갔다. 영락공주 주약금은 사공의 노 에 따라 흔들리는 배요, 파도였다. ....... 아침 공기는 상쾌하고 맑았다. 백수범은 기분좋은 피로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는 원앙금침 위에 누워 있었다. 주약금은 벌써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동경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변함없이 아름다왔다. 아니 지난 밤 뜨거운 운우(雲雨)를 나눈 뒤라서인지 한결 성숙하고 요염해 보였다. 그녀의 낯빛도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어 더욱 고혹적으로 보였 다. 이때 동경 속으로 막 몸을 일으키고 있는 백수범을 발견한 그 녀가 살포시 미소지었다. "백랑,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백수범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약금, 왜 그리 빨리 일어났소?" "어머, 지금 시간이 사시(巳時)가 넘었어요. 제가 어디 당신 같은 잠꾸러기인 줄 아세요?" "하하하......" 백수범은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그의 몸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어멋?" 동경을 통해 우람한 사내의 알몸을 본 주약금은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가슴이 온통 두근거리고 귀밑까지 화끈화 끈해져서 그녀는 감히 손을 내릴 생각도 못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는 전신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이어 푹신한 침상에 던져지고 있었다. "백랑, 장난은 그만......." 그녀는 말을 다하지 못했다. 백수범이 그녀의 입술을 눌렀기 때문이다. 그녀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사내의 뜨거운 입술에 이어 혀 가 그녀의 혀를 희롱하듯 감아 들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온 몸은 짜릿짜릿하여 그만 바르르 사지를 경련하고 말았다. 감미로운 흥분의 물결이 그녀의 혈관을 달렸다. 어젯밤의 사랑은 난생 처음으로 여인의 문을 연 초험(初驗)이었기에 쾌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녀는 백수범이 하는 대 로 온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어느덧 그녀의 몸에서 옷자락이 하 나씩 떨어져 나가고 다시 태초의 알몸이 되었다. 주약금은 자신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는 사내를 끌어 안았다. 사내 의 혀가 젖가슴의 유실을 감아 들이고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온 몸을 가늘게 떨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온 몸이 툭툭 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아니 놀라운 경험이었다. 백수범의 혀가 가슴에서 배로, 그리고 그녀의 늘씬한 다리와 허리, 심지어는 동그란 둔부 까지 남김없이 애무함에 따라 그녀는 침상 위에 퉁기듯이 떠오르 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침내 그녀는 사나이의 뜨겁고 힘찬 진입을 느끼며 온 몸이 무서 운 쾌락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녀는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며 사내의 등을 마구 잡아 당기고 있었다. "그, 그만... 그만......." 열띤 신음을 내는 주약금은 종내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마구 헛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꿈같은 시간이 흘렀다. "정말 꿈만 같소.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다니." 백수범은 주약금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주약금 은 그의 곁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아니예요. 도리어 제가....... 음, 이제 그마안." 주약금은 그가 손가락으로 젖가슴의 유실을 희롱하자 달콤한 신음 을 흘렸다. 백수범은 장난스럽게 그녀의 유실을 손가락으로 살짝 튕겼다. "아이, 흐응. 그만요." 주약금은 얼른 그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백수범은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둔부까지 길게 손을 움직였다. 손에 묻어날 듯이 고운 느낌을 주는 피부였다. 언제까지나 그는 이런 상태로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주약 금은 살며시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며 몸을 일으켰다. "그만 일어나요. 백랑께 보여드릴 것이 있어요." "뭘 말이오?" 주약금은 손을 뻗어 침상 위의 선반에서 옥갑과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취했다. "백랑이 직접 열어보세요." 백수범은 의아했으나 일어나 앉은 후 옥갑을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낡아빠진 한 권의 양피 책자가 들어 있었다. "이건 금갑천경(金甲天經)이 아니오" 과연 옥갑 속의 책자는 금갑천경의 하권(下卷)이었다. 금갑천경은 천오백 년 전의 일대기인이던 천황자(天皇子)라는 도 인(道人)이 남긴 것이었다. 그는 세상을 다스리는데 문(文)보다 무(武)가 더 실효하다고 판단 하여 어릴 적부터 천하를 주유하며 무학의 황도(皇道)를 찾았다. 그러나 전 중원을 다 뒤져도 그의 마음에 차는 무학은 얻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발길은 먼 서역(西域)에서부터 남만, 동해 (東海), 심지어 북해 (氷地)까지 닿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돈황(敦煌) 지방의 한 석굴에서 도교(道敎) 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영선인(靈仙人)의 선단공(仙丹功)에 관한 책을 얻었다. 그것은 선도(仙道)를 다루는 비전이었다. 천황자는 그 선단공을 읽은 후 비로소 생각을 정하였다. 그는 자 신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무학을 창조하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마침내 그는 서역 일만 리 천축의 불공(佛功)과 선단공, 그리고 천하를 주유하면서 익힌 각종 무학의 장점을 집대성하는데 성공했다. 금갑천원단공(金甲天元丹功)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금갑천원단공은 금강불괴지신으로 이르는 개세신공이었다. 완 전히 연성하면 전신에 금갑을 두른 것처럼 금빛 광망에 싸여 그 어떤 공격도 막을 수 있었다. 천황자는 금갑천원단공의 창안에 이어 자신이 깨달은 각종 무학을 보충하여 금갑천경(金甲天經)을 남겼다. ....... 주약금은 금갑천경의 유래를 설명한 후 당부했다. "백랑께서 천군어사대인으로 행동하실 때에는 반드시 이 금갑천경 의 무공을 쓰셔야 해요. 그러니 이것을 익힌 다음 활동하셔야 합니다." "알겠소." 백수범은 금갑천경을 받았다. 주약금은 생긋 웃으며 이번에는 보자기를 가리켰다. "그것도 풀어 보세요." 백수범은 보자기를 풀었다. 그러자 금빛 찬란한 순금의 천군어사 령(天軍御史令)과 한 자루의 기형검(奇形劍)이 나왔다. "그 검은 천궁검(天弓劍)으로 황실에 내려오는 사대신병(四大神兵) 중 하나예요." 백수범은 천궁검을 살펴보았다. 길이는 석 자 여덟 치에 교룡가죽으로 검집이 되어 있었다. 허리 에 두를 수 있는 연검(軟劍)이었으며 활(弓) 모양으로 휘어져 있었다. 백수범은 한눈에 천궁검이 보통 검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천고의 기병임이 틀림없었다. "고맙소. 약금." "호호호....... 이 모든 것은 폐하께서 내리신 것이에요. 백랑은 이제 황실의 운명을 한 몸에 짊어지게 되었어요." "최선을 다 하겠소." 백수범은 주약금의 눈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것은 진하디 진한 애정이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