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비무강(丕武强) ① 칠야(漆夜).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었다. 짙은 어둠이 무섭게 내리깔려 숨막히 고 살벌하기만한 암흑만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천마성은 질식 할 것 같은 음산함 속에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백수범은 천마부의 한 객원(客院)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금 그는 침상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금침을 머리 까지 뒤집어 쓴 채 내일의 결전을 위해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스스스스....... 문득 한 가닥 흑선(黑線)이 그가 자는 창문으로 뻗어오더니 찰싹 달라붙었다. 그것은 가느다란 실(絲)이었다. 그 실에 매달려 하나의 자그마한 흑영(黑影)이 달려와 미끄러지듯 창문에서 멎었다. 그러나 그 인영은 실상 전신을 푸른 옷과 복면으로 감싸고 있어 흑영이라기보다는 청영(靑影)이라고 해야 옳았다. 단지 짙은 어둠 으로 인해 흑영으로 보였을 뿐이다. 창문이 소리없이 열리고 이번에는 흑선이 천장으로 뻗었다. 그리 고 청영은 실에 이끌려 천장에 달라 붙었다. 네 활개를 쫘악 벌린 채. 대체 거미(蜘蛛)인가, 인간인가? 청영은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푸른 거미(靑蜘蛛)같았다. 인간이 라면 어찌 그런 이동법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백수범은 이같은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듯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를 뒤덮은 금침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천장에 들어붙은 청영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는 괴이한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품 속에서 하얀 옥갑을 꺼내더니 열었다. 쓰쓰쓰쓰....... 경미한 음향과 함께 옥갑 속에서는 엄지 손톱 크기의 흑색 거미 한 마리가 나왔다. 거미는 하얀 거미줄을 토하며 침상으로 일직선 으로 내려왔다. 침상의 가장자리에 떨어지자마자 흑거미는 빠른 속도로 침상을 전후좌우 가리지 않고 왔다갔다 했다. 곧 침상은 투명한 거미줄 속에 갇히고 말았다. 실로 잠깐 사이에 이루어진 광경이었다. 거미는 거미줄을 다 치자 천장으로 기어올라가더니 옥갑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청영은 옥갑을 품에 넣었다.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침상을 중심으로 거미줄이 서서 히 오그라드는 것이 아닌가? 그뿐이 아니었다. 푸시시식---! 고약한 냄새와 함께 푸른 연기를 내며 침상 전체가 타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헉! 누구냐?" 잠들어 있던 백수범은 그제서야 대경하여 눈을 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금침을 태우며 오그라들던 거미줄이 끝내는 그 의 몸을 칭칭 감아버렸다. "으아악---!" 백수범은 비명을 토해냈다. 목에 닿은 거미줄이 살 속으로 마구 파고들었던 것이다. 푸시-- 시-- 식---! "크아아아---!" 백수범은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데굴데굴 굴렀다. 때를 놓치지 않 으려는 듯 천장에 달라붙어 있던 청영이 움직였다. 그는 품 속에 서 세 자루의 단검을 꺼내들더니 여유있게 던지고 있었다. 팍! 팍! 팍! 단검은 정확히 백수범의 이마와 목, 그리고 심장에 박혔다. 백수범은 미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그는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잠시 후, 그의 몸이 점점 녹아들더니 한 구의 허연 해골만 남고 말았다. 천장에 붙어있던 청영은 비로소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복면 사이 로 삭막하고 차디찬 눈을 굴리며 나직히 중얼거렸다. "정말 실망이군. 백대인이란 자가 겨우 이 정도라니." 그의 음성은 뜻밖에도 맑고 고왔다. "하기야, 나 푸른 거미(靑蜘蛛)의 손에 걸린 이상 살아 남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지." 그때였다. 바로 등 뒤에서 한 줄기 착 가라앉은 음성이 답했다. "그런 말은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종종 하곤 하지." 푸른 거미는 질겁을 했다. "누, 누구, 헉!" 그는 숨막히는 신음을 발했다. 몸을 돌리기도 전에 뒷목에 섬뜩하 고 차가운 칼날이 닿았던 것이다. "후후후!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이면 너의 목에는 바람 구멍이 생길 것이다." 푸른거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럴 수가? 너는...? 그럼 침상 위의 저 자는?" 등 뒤에서 다시 냉막한 음성이 들렸다. "후후후! 자네보다 한 발 앞서 들어왔던 암살자(暗殺者)다. 워낙 힘겹게 이곳에 온 지라 푹 쉬도록 본인이 침상을 빌려 주었지." "아!" 등 뒤의 인물. 그는 물론 천군어사대인 백수범이었다. 백수범은 담담히 물었다. "푸른 거미, 공천왕의 명을 받고 왔는가?" 푸른 거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백수범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대체 푸른 거미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군." 그는 손을 뻗어 푸른 거미의 복면을 벗겼다. 사르르륵---. 놀랍게도 탐스럽게 윤기 흐르는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푸른 거 미의 어깨, 아니 허리까지 뒤덮었다. "허! 여인?" 백수범은 놀란 음성을 발했다. 다음 순간 그의 입가에는 기이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약간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푸른 거미, 천천히 몸을 돌려라. 그대의 용모가 보고 싶구나." 그 말에 푸른 거미는 순순히 돌아섰다. 그러자 백수범은 눈 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요염함의 극치를 이룬 한 미녀(美女)가 그 곳에 서 있었다. 긴 머리채가 살짝 희디 흰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머 리카락 사이로 오똑한 코와 육감적인 붉은 입술이 시선을 강하게 잡아 당기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십팔 세 가량, 비록 천하절색이랄 수는 없었으나 마 력적인 유혹을 발산하는 두 눈과 날씬한 교구는 전체적으로 선정 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대저 이런 여인은 대개 사내의 피를 펄펄 끓게 한다고 한다. 백수 범은 그녀에게 매료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휘유! 푸른 거미가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인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는 걸?" 그러자 푸른 거미는 도발적으로 웃었다. "호호호! 저 역시 백대인이 이렇게 준수할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슬쩍 섬섬옥수를 들어 귀밑머리를 쓸어 올렸다. 소매가 흘 러내리며 드러나는 그녀의 하얀 팔뚝은 더욱 육감적이었다. "정말 제가 오히려 반할 정도이군요." 푸른 거미는 입술 끝을 말아올렸다. "어떤가요, 백대인, 소녀가 탐나지 않나요?" 백수범은 흠칫했으나 담담히 마주 웃어 보였다. "푸른 거미, 그대는 목숨을 구걸하려는가?" "호호! 그래요. 한 번 실패한 자객은 생명을 포기하죠. 그것은 자 객의 철칙이에요. 그러나 저는 살고 싶어요." 푸른 거미는 만면에 야릇하면서도 처절한 표정을 담았다. 이성적 충동과 동정심을 동시에 유발시키는 묘한 자태였다. "푸른 거미, 그대는 지금이라도 본인을 죽이고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 백수범의 말에 푸른 거미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저는 자신의 역량을 잘 알아요. 백대인을 결코 이길 수가 없지 요. 그러므로 방법은 하나뿐......." 그녀는 눈을 스르르 내리감았다. "절 취하세요." 나직히 중얼거린 푸른 거미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백수범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겨 들었다. "훗! 대담하군." 백수범은 수중의 소도를 내리며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나긋한 목 을 껴안았다. 뭉클한 촉감과 함께 녹아날 듯한 부드러운 여체의 느낌이 그의 피를 빠르게 돌게 했다. 푸른 거미는 그의 품에 밀착된 채 달콤하게 속삭였다. "당신같은 분의 품 속이라면 죽어도 좋아요." 그녀는 동그란 턱을 치켜들며 더운 숨을 토했다. 그녀의 붉은 입 술이 꽃잎처럼 살짝 벌어지며 백수범의 턱을 간지럽혔다. '정말 대단한 계집이군.' 백수범은 입술을 내려 그녀의 뜨거운 입술을 덮었다. "으음." 푸른 거미는 신음을 발하며 전신을 비틀어 백수범과 더욱 밀착시 켰다. 그녀의 혀가 백수범의 입 속으로 맹렬하게 파고 들었다. 혀와 혀가 엉켰다. 뜨거운 타액을 교환하며 혀와 혀는 서로를 감고 춤을 추었다. "으음, 흐응...." 마침내 고조되어가는 신음성과 함께 푸른 거미는 전신이 뜨거워지 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의 두 눈빛은 무심할 정도로 차갑고 싸늘했다. 또한 그녀의 섬세한 옥수는 서서히 백수범의 등을 타고 오르고 있 었다. 서서히 그의 명문혈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백수범은 입을 맞춘 상태에서 전음으로 말하고 있었다. (푸른 거미, 서툰 짓 하지마라. 너의 손보다는 나의 칼날이 더 빠르니까.) 푸른 거미의 손이 힘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백수범의 혀는 그녀의 혀를 더욱더 세차게 휘감아 빨아들였다. 동시에 그는 푸른 거미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고도의 인자술(忍者術)이다. 위험 속에서도 암수를 노릴 수 있다 는 것은 항상 얼음처럼 차가운 의지를 지녔다는 뜻이다. 이런 경 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숱한 고련(苦憐)을 거쳐야만 했을 것이다.' 생각하는 와중에서도 백수범의 혀는 푸른 거미의 혀를 농락하고 있었다. 푸른 거미가 비로소 반항을 시도했다. 그녀는 백수범에게서 벗어 나려 몸을 뒤틀었다. 이제 그녀의 몸은 열기가 싸늘히 식어 있었다. (푸른 거미, 너는 왜국(矮國)에서 온 삼 인의 고수 중 마지막 일 인일 것이다. 맞느냐?) 백수범의 전음에 푸른 거미의 교구가 바르르 경련했다. 그는 비로 소 입술을 떼며 차갑게 말했다. "가서 공천왕에게 전(傳)해라. 나를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푸른 거미는 휘청거렸다. 그녀는 전신의 힘이란 힘은 모조리 소실된 듯 나약해져 있었다. "왜 날 보내주는 거죠?" 그 말에 백수범은 슬쩍 자신의 입술을 쓰다듬으며 딴청을 부렸다. "그대의 마음은 독하고 살벌하나 입술만은 일품이더군." 그 말에 푸른 거미의 풀어진 얼굴에 한 가닥 홍조가 어렸다. 그녀 는 갑자기 가슴이 뛰는 걸 의식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런 현상은 일찌기 없었던 것이다. '내가 왜 이럴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야무지게 부르짖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을 죽이겠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왼손을 뻗었다. 스슥----! 가느다란 흑선이 그녀의 손 끝으로부터 창 밖을 향해 뻗었다. 그 녀는 흑선에 끌리듯 순식간에 창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실로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괴이한 경신술이었다. 그러나 백수범 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는 창 밖의 어둠을 응 시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공천왕, 당신은 이번 실패로 용기도 의욕도 모두 꺾였을 것이다. 이제 당신이 선택할 길은 오직 하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잠적하는 것이오.' 백수범은 눈을 가늘게 했다. 가는 눈 사이로 흐르는 그의 눈빛은 아주 냉정했다. '그러나 아무리 은밀히 숨는다 해도 결국 당신은 노출될 거요. 천 하가 아무리 넓다해도 당신이 갈 곳은 없소. 천하를 차지하려다 실패한 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것이오.' 문득 그는 한 여인을 떠올렸다. 그녀는 바로 북해의 공주인 백리설빙이었다. '설빙(雪氷)이 북해를 떠나와 무이산 근처에 와 있다. 천하에서 무영빙매(無影氷魅)의 추적술은 으뜸이지. 푸른 거미는 아마도 그 녀에게 공천왕의 비밀 거처를 친절히 안내해 줄 것이다. 후후후후.......' 밤. 칠야의 공간을 뚫고 한 마리의 야조(夜鳥)가 날고 있었다. 그 런데 야조의 발목에는 한 장의 서신이 묶여 있었다. ② 날이 밝았다. 백수범은 천마각의 오층에서 천마대제 탁무영에게 엄숙하게 묻고 있었다. "성주, 약속대로 해가 떴소이다. 역도 비무강은 어디 있소?" 탁무영은 담담히 대답했다. "백대인, 무강은 지금 천무봉(天舞峯) 정상에 있는 천마동에 있소." 백수범은 흠칫 놀랐다. '천마동에 있다고?' 그는 짐짓 의아한 듯이 반문했다. "그 천마동은 어느 곳에 있소?" "노부가 직접 천무봉으로 안내하겠소. 따라 오시오." 천무봉(天舞峯) 정상. 천학봉, 비선봉과 함께 천마성 내의 삼대 주봉(主峯) 중의 하나인 천무봉 정상은 온통 기암괴석으로 덮혀 있었다. 백수범은 탁무영과 단 둘이서 천무봉에 올랐다. "저 속에 무강이 있소." 백수범은 탁무영이 가리키는 난석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탁무영은 담담히 말했다. "무강은 노부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소. 천마동에 머물게 해달라고 말이오. 노부는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소." 백수범은 괴석이 난립한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곳에는 진법(陣法)이 설치되어 있소?" "그렇소." 백수범은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성주께서는 물론 저 진법의 파해법을 본인에게 알려주지 않겠지요?" 탁무영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백대인 스스로의 힘으로 뚫어 보시오. 그만한 능력은 있으리라 믿소." 백수범은 냉소했다. "저 진법의 이름은 무엇이오?" 탁무영의 얼굴에 음산한 표정이 덮혔다. "혈로상문만석대진(血路喪門萬石大陣)이라 하오." "혈로상문만석대진?" 백수범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물론 탁무영에게 진법을 모른다는 표정을 보인 것이었다. 탁무영은 입가에 조소를 띄우고 있었다. "좋소이다. 직접 들어가 체포하겠소." "노부는 백대인의 무사함을 빌겠소." 탁무영은 기묘하게 웃었다. "후후....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오. 자칫하면 천군어사대인이 라는 고귀한 직위를 더이상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르니." 그러나 이미 백수범은 괴석 사이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우르르-- 쿠-- 르르릉---! 괴석 안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갑자기 풍경이 변하며 은은한 뇌성(雷聲)이 쳤다. 뿐만 아니라 사방이 칠흑같이 캄캄해지는 것 이 아닌가? 바야흐로 혈로상문만석대진이 발동된 것이다. 하늘(天)도 땅(地)도 없었다. 끝없이 캄캄한 공간에는 오직 귀신의 호곡과 같은 으시시한 괴음이 울려 퍼졌다. 크크크-- 아아---! 우르르--- 쿠르르릉----! 폭풍이 불며 사위는 온통 소용돌이의 기류에 휩쓸렸다. 백수범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지막 한 개의 돌을 놓은 게로군. 드디어 진법이 완전히 발동되 었다. 구백구십구 개의 사문(死門)이 열리고 단 한 개의 생문(生 門)은 수시로 변하고 있다.' 백수범은 전진파의 기환술을 익히며 각종 진법에 대해서도 충분히 터득한 바 있었다. 특히 세인(世人)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작금의 상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오백 년 전의 비화였다. 진법의 대가로 알려졌던 귀기자(鬼機子)에게는 한 명의 사제(師第)가 있었다. 그 사제는 훗날 전진파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귀기자가 남긴 혈로상문만석대진도 기환술에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따라서 백수범은 진을 파괴할 수 있음은 물론 사문(死門)에 빠질 염려 따위가 없었다. '기환편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정녕 큰일날 뻔 했다. 그 누가 이 가공할 진 속에서 살아나갈 수 있으랴?' 백수범은 진 속에서 서서히 방위를 밟고 움직이며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그는 천마성주를 떠올렸다. '그는 이 진법을 이용하여 나를 제거하려 하고 있다. 진법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어느 정도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당하지 않는다.' 백수범의 입가에는 조소가 어렸다. 쿠르르--- 우-- 응---! 갑자기 진세에 격동이 일기 시작했다. 폭풍과 함께 무수한 돌이 날리는 것이었다. '진이 변동했다!' 백수범은 안색이 급변했다. '누군가 나를 죽이려 한다. 대체 누가?' 문득 그는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사천오검혼(死天五劍魂)이다!' 백수범은 일단 방위를 바꿨다. 그러자 비로소 안정을 느낄 수 있 었다. 그는 즉시 전진의 기환술을 일으켜 청력을 집중했다. '하나, 둘... 다섯, 틀림 없구나. 사천오검혼.' 백수범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사천오검혼은 평생을 검(劍)만 연구했으며 맹인이므로 오히려 한 방면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검귀(劍鬼)들이다. 오대 일로 싸운다면 천하의 그 누구라도 불리하다. 그렇다면......?' 그는 마침내 결정했다. '전진의 기환술이 최고다.' 스스스스....... 암흑 속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한편 사천오검혼은 칠백사방문(七百四方門)의 위치에 선 채 모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우두머리 일검혼(一劍魂)이 전음으로 말했다. (혈로상문만석대진을 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곳에서도 움직 임이 없다. 정말 괴이하구나.) 이검혼이 물었다. (그렇다면 놈은 어디 갔소?) 삼검혼이 고개를 흔들었다. (믿을 수 없소. 놈이 이 진법을 알기 전에는 결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텐데.) 사검혼도 잠자코 있지 않고 한 마디 했다. (그럴 리가? 이 진법은 희대의 절진이오. 성주님 외에는 그 누구도 모르오.) 오검혼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놈은 어딘가에서 겁에 질린 채 숨어 있단 말이오?) 이윽고 일검혼은 결정을 내렸다. (모두 흩어져서 찾아보자. 그러나 조심해라. 놈을 발견하면 신호 를 보낸 뒤 합공(合功)해야 한다. 절대 일대 일로 싸우지 마라. 놈은 무서운 고수다.) (알겠소이다.) 사검혼이 일제히 대답했다. 스스스스....... 그들은 각자 소리없이 다른 방위로 갈라졌다. 오검혼(五劍魂). 사천오검혼 중 다섯 번째 인물인 그는 동자가 없는 흰 눈알을 두 리번거리며 팔백육십사방문(八百六十四方門)의 위치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곳에도 없군.'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불현듯 그의 발 끝에 하나의 바위가 걸렸다. 오검혼의 안색은 홱 변했다. '이곳에는 절대 바위가 있을 리 없다. 그, 그렇다면?' 쉭---! 그의 허리 춤에서 검광이 번뜩였다. 검은 그대로 바위를 꿰뚫었 다. 그러나 그것은 허탕이었다. 그순간 오검혼은 가슴이 화끈함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욱!' 그는 일성의 비명도 내지르지 못했다. 심장이 갈라지는 것을 필두 로 복부까지 그대로 검에 의해 쪼개지며 오검혼은 황천으로 직행하고 말았다. 그가 죽자 한 줄기 인영이 다른 곳으로 유령같이 날아갔다. 그는 바로 백수범이었다. 일검혼(一劍魂)은 웬지 심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에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에게 있어 사천오검혼은 친형제는 아니었으나 어쩌면 형제나 골 육보다 더 밀접했다. 일검혼이 순간 순간 가슴이 섬뜩섬뜩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그러한 느낌의 명백한 이유를 알았다면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었을 것인가? 그의 형제나 다름없는 사검혼이 차례로 소리없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검혼은 자신의 애검을 쓰다듬었다. 그것은 사망혼(死亡魂)이란 이름이 붙은 묵검이었다. 잠시 검을 쓰다듬는 사이에 그의 마음은 차츰 안정되어 갔다. 이윽고 일검혼은 걸음을 옮겼다. 그는 혈로상문만석대진에 대해 손바닥 속처럼 환히 알고 있었다. 그는 사백사십사방문(四百四十 四方門)에 이르렀다. 그곳은 진법 중에서 가장 위험한 사문(死門)이었다. 이때 일검혼의 등 뒤로 유령같이 한 인영이 다가들고 있었다. 바로 백수범이었다. 일검혼은 갑자기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의 허연 눈은 경악에 질려 있었다. "너, 너는 혈로상문만석대진을 알고 있었구나?" 그러나 백수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위치를 이동했다. 그 움직 임에 따라 일검혼의 귀도 움직였다. 그는 여전히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이 혈로상문만석대진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서 오직 열 명뿐이다. 너, 너는 도대체 누구냐?" 백수범의 입가에 차가운 살기가 떠올랐다. 그는 좌(左)로 삼 보 움직였다. 전혀 소리도 없이....... 그의 입이 비로소 떨어졌다. "네 형제들은 모두 죽었다. 네가 마지막이다." 그 순간이었다. 번--- 쩍! 일검혼의 애검 사망혼이 번개를 그렸다. 싸악, 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사망혼에 의해 베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금룡포 자락일 뿐이었다. '실패다!' 일검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놈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일검혼은 사망혼을 안고 당황해마지 않았다. 드디어 그는 상대의 위치를 알아냈다. '허공(虛空)이다! 헉!' 그러나 일검혼의 추리는 한 발 늦었다. 그는 정수리가 화끈해졌다. '당했다.......' 한 자루의 검이 그를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양단하고 있었다. 엄청난 피가 사방으로 퍼졌다. 일검혼은 전신이 두 쪽이 난 채 쓰 러졌다. 그의 네 형제를 따라 그의 혼은 구천을 날고 있었다. 슷! 하는 미세한 소리와 함께 그의 시체 앞에 금빛 인영이 떨어졌다. ③ 백수범은 천궁검을 허리에 두르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옷자락이 베어지고 그곳에 한 줄기 가는 혈흔(血痕)이 번지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고소를 피웠다. '정말 무서운 자들이었다. 그들 다섯 명이 모두 덤볐다면 도저히 승부를 가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백수범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는 수십 번 방향을 바꾸 며 진중을 돌파했다. 잠시 후 경물이 바뀌어 하나의 동굴이 나타났다. 바로 천마동이었다. 천마동 안에서 한 인영이 걸어나와 그의 앞에 서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만면에 음침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인 물, 그는 바로 비무강이었다. "흐흐흐....... 결국 여기까지 왔군." 백수범은 그를 주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너는 영원히 본인의 손을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다." 비무강은 커다란 몸집을 약간 흔들었다. "흐흐! 백대인, 나 비무강을 얕봤다간 크게 당한다. 나를 사천오 검혼 정도로 비교하면 곤란하다." 백수범은 그를 응시하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비무강, 어쨌든 그대는 본인의 손에 일 초(一招)를 넘기지 못한다." 그 말에 비무강은 조소를 날렸다. "흐흐흐! 헛소리하지 마라." 그는 오른손에 감긴 흰 띠를 풀어냈다. 그러자 그의 손에는 한 자 루의 작은 혈도(血刀)가 들려 있었다. 백수범의 검미가 꿈틀했다. 혈도가 혈기를 발출해 내더니 곧 석 자의 길이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비무강은 풀어낸 흰 띠로 백수범을 가리켰다. 핑---! 흰 띠는 파공성과 함께 빳빳이 뻗었다. "흐흐흐! 백대인, 그대는 이곳에서 뼈를 묻을 것이다." 그러나 백수범은 여전히 여유만만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비무강, 아무리 네가 발악을 해도 너는 본인의 손에서 일 초를 넘기지 못한다." 비무강은 아예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흥! 너무도 자신만만하군. 나 비무강은 그동안 두 손을 묶고 목을 바칠 줄 아느냐?" 백수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비무강, 내 얼굴을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비무강은 그 말에 이끌려 정말로 백수범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 자 백수범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너는?" 비무강은 대경실색했다. 그리고 실로 바늘 끝 만큼도 안 되는 짧 은 찰나, 바로 그 찰나지간이 문제였다. 이른바 고수(高手)의 대결에 있어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순간이 아닌가? 그것을 비무강은 경악으로 인해 놓치고 말았다. 그는 일 생일대의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번--- 쩍! 백수범의 허리 춤에서 천궁검이 섬광을 뻗었다. 놀라운 파공음과 함께 천지는 검의 경기에 온통 천라지망처럼 갇 히고 말았다. 천황구무종(天皇九武宗)의 검법 중 제 팔 초인 파천 멸혼무(破天滅魂無)가 펼쳐진 것이다. "헉!" 비무강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는 본능적으로 혈도를 휘둘렀다. "크--- 악!" 그러나 천라지망같은 검기가 싹 걷히며 한 줄기 번갯불이 그의 가 슴을 관통한 것은 그때였다. "끄, 끄르륵!" 가슴에 구멍이 뚫린 비무강은 목에서 가래끓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놈! 네, 네가, 나를 죽일 수 있다니." 백수범은 이미 천궁검을 거두고 있었다. "비무강, 너는 무(武)의 가장 큰 금기를 범했다. 어리석게도 중요 한 순간에 심력을 흐뜨려 뜨리다니." "크으, 네 놈이 설마 공손기일 줄은......." 백수범은 기소를 발했다. "후후후! 결국 나 공손기는 세 명의 적수 중 한 명은 제거한 셈이지." 비무강은 휘청이며 안면근육을 씰룩였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기괴한 웃음을 흘려냈다. "크크크......! 나는 분명 죽는다. 그러나 너는 영원히... 비무강을 못죽여......." 백수범은 그 말에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크크크! 왜냐면... 나는... 비무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백수범은 마치 둔기로 머리를 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비무강은 가슴을 부여잡고 연신 비틀거렸다. "나는..., 비무강의 분신(分身)일... 뿐이다." 백수범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마라! 너는 변장을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흐흐흐! 어제의 나도, 비... 무강이 아니야. 비무강은... 그 누구도 못... 죽인다." "대체 무슨 정신나간 소리냐?" "크크... 비... 무강은... 아주 어려서부터... 그와 똑같은 형제 (兄第)가 그를 도왔지....... 나는 비무강의 쌍동이 동생으로... 비(丕), 무(武), 현(玄)......." "그럴 수가......?" 백수범의 안색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비무강, 아니 비무현은 서서히 주저 앉았다. "이... 이... 비밀은, 천마성주도 모른다. 크크... 비무강... 무 강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죽지 않...... 큭!" 비무현은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의 가슴에 붙은 손이 떨어지며 검은 핏줄기가 푹 솟아 나왔다. "......!" 백수범은 멍하니 비무현의 시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의 혹과 불신이 충만해 있었다. '이 자는 틀림없는 비무강이다. 내가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지난 수 년을 그와 같이 지냈는데 구별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의 안색이 삽시에 창백하게 굳어졌다. '혹시 지난 수 년 간 내가 만난 비무강도 가짜라면?' 백수범은 일순 세차게 몸을 떨었다. '천마성주의 세 제자 중 비무강을 가장 약하게 봤거늘, 완전한 나의 실수다. 어쩌면 비무강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자일지도 모른다.' 백수범은 새삼 비무현의 시체를 쏘아보았다. 그는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좋다. 어쨌든 비무강은 죽은 것으로 하자. 천마성주조차 모르고 넘어가던 일을 공연히 나서서 발설할 필요는 없다. 천마성주는 이 렇게 되면 하나의 헛점을 지니게 되는 셈이니.' 백수범은 몸을 돌렸다. 그는 처음 들어온 것과 정반대의 방법으로 혈로상문만석대진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갔다. 천무봉 정상. 백수범은 탁무영의 면전에 담담한 신색으로 서 있었다. 천마성주 탁무영의 안색은 여러 차례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는 일대의 영웅다웠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백수범을 치하하기에 이르렀다. "허허! 노부가 백대인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보구려." 백수범은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당치 않은 말씀이시오. 덕분에 본인은 아주 좋은 체험을 했소이다." "무강은 어찌 되었소?" 백수범은 빙긋 웃었다. "죽었소. 본인의 단 일 초(一招)에." "일 초에?" 탁무영의 안색이 또 변했다. 백수범은 그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그동안 성주의 협조에 감사드리오. 황명으로 반역자를 처치했으 니 이만 궁으로 돌아가겠소이다." "잘 가시오. 배웅치 못함을 용서하시오. 백대인." 탁무영은 답례했다. 백수범은 호탕한 대소를 터뜨리며 돌아갔다. "하하하하하......!" 그의 웃음의 여운이 천무봉을 묘하게 메아리치게 했다. 탁무영은 백수범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깊숙한 눈 속에서는 서서히 두 가지 괴이한 광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오백여 기마병(騎馬兵)이 천군(天軍)의 깃발을 휘날리며 천마성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영군의 회군(回軍)이었다. 어영군은 위용당당하게 천군어사대인의 지휘 아래 황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