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아름다워라
시편 8:1-9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3주일이다. 환경선교주일이다. 지금은 천지만물이 가장 생동감 넘치는 계절, 6월이다. 여름은 그 푸르름이 왕성하고, 성장의 기운이 가장 힘차다.
이런 모습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녹색’, 혹은 ‘초록’이다. 색동교회가 녹색교회로 선정된 후 내가 여러분을 대표하여 인사말을 하였다.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속으로 고민하였다.
“우리 교회 이름은 색동입니다. 무엇이 연상되시나요? ‘무지개, 요셉의 채색 옷, 하늘나라 잔치, 주님의 평화’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 어떤 아이가 저를 놀리려고 목사님 ‘새똥 교회는 아닌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배웠습니다. 아, 우리 교회 이름 안에 하나님의 창조질서도 담겨 있구나. 어쩌다 어쩌다 색동이란 이름 안에 녹색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우리 교회 이름에 녹색교회의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녹색교회에 참여했습니다. 녹색의 친구로 불러주신 것에 대해서 고맙습니다.
우리 교회가 녹색교회와 더불어 녹색 그리스도인, 녹색 가정, 녹색 시민으로 자라나도록 애쓰겠습니다.”
녹색교회로서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환경, 생태계, 창조질서 보전을 위해 당장 무엇무엇을 실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어떻게 살아야할 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소중하다.
어쩌면 인생의 아름다움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9)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데서 부터 출발한다.
1)
시편 8편은 참 아름다운 찬송이다. 시편 가사가 유명한 성가곡으로도 만들어졌다. 성경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시편을 보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찬양이 참 풍성한 종교다. 각종 우상숭배 종교의 경우는 곡조가 아름답지 못하다. 무신론에는 찬양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시편 8편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찬양한다. 하나이 지으신 창조 세계는 기쁨 그 자체였다. 창세기 1장을 보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반응을 기쁨으로 고백한다. 창세기 1장에만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일곱 차례 나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물질세계가 아니라, 바로 기쁨이었다. 특히 인간을 창조하신 후의 반응은 최상급이다. 일곱 번째 좋음은 참 좋음, 지극한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
그러기에 우리 피조물들이 지녀야 할 마음은 이것이다.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이러한 기쁨은 하나님께서 바로 나 자신을 향하신 반응이다.
안셀름 그륀은 말한다. “기쁨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넣어 주신 섬광이며 영원히 복된 자들의 땅에서 유래한다.” 시편 8편의 시작과 마침을 보자. 역시 “참 아름다워라‘를 찬양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 9).
이젠 고전이 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목사 아버지는 어린 두 아들에게 동네 검은발 강에서 낚시를 가르쳐주면서 자연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언어를 일러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글자를 주신 이후 성서를 통해 말씀하셨지만, 우리에게 글자가 없을 때는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시냇가에 귀를 기울여보렴!”
이렇듯 하나님이 자연 만물 등 피조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시는 것을 ‘간접계시’라고 말한다. 우주 만물이 아름다운 까닭은 하나님의 영광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손가락이 이루신 세상을 찬양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3).
하나님은 저 광활하고 아름다운 우주를 창조하셨다. 얼마나 드넓은지, 우리가 아는 우주는 지극히 광대한데, 실은 우리가 헤아리는 우주는 지극히 미미하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라는 책에서 우주의 존재를 아주 가까이에서 일깨워주었다. 그는 미국 나사(NASA)에 부탁하여 태양계 탐사선 보이저 1호에서 지구를 촬영하도록 하였다. 그 유명한 사진에서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이었다. 우주 속에서 지구는 한 점 티끌에 불과하다.
시편 8편을 노래하는 시인은 한편으로, 별이 빛나는 찬란하고 드넓은 하늘에 압도된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 장엄한 세계 속에서 본 보잘 것없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높이 평가하신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은 피조물 중 하나인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지위를 허락하셔서, 창조주 가까이로 다가서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셔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신 것이다.
2)
시편 8편이 강조하려는 것은 우주 만물 가운데 인간의 소중함이다. 피조물로서 사람의 존귀함이 창조 속에 계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습을 닮게 창조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시는 분이다. 다만 사람마다 그 처지와 형편이 참 다양하다. 그러기에 저마다 감사와 고백의 내용이 천차만별일 것이다.
시편을 보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찬미는 대단히 사적이면서도, 동시에 대단히 공동체적이다. 낱낱의 사람들이 지닌 아픔, 한숨, 고통, 기쁨, 사랑 등은 어느 한 사람의 것만이 아니다. 우리 전체의 삶의 모습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편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우리 모두의 응답이고, 찬양이다.
시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개인적인 아픔일지라도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다. 우리 모두가 관심갖고 감내해야 할 하나님의 사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유난한 사랑을 품으신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5).
누구든 우주와 비견되는 소중하고 유일한 존재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 지구가 ‘창백한 푸른 점’이라면, 세계 인구로 따져본다면 나란 존재는 티끌 중의 티끌일 것이다. 현재 세계인구가 얼마인 줄 아는가? 80억이 조금 못 된다. 꼭 50년 전인 1974년 인구는 지금보다 절반이었다. 50년 동안 무려 두 배나 증가한 것이다.
규모의 논리로 따지면 나는 미미하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흔히 몸을 소우주라고 한다. 내 몸은 33조 개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세포로 조직되어 있다. 이것이 조화를 이루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기억과 생각은 머리 속 대뇌 표면의 140억 개의 신경 세포가 조화롭게 기능하여 가능한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런 존귀한 존재이다.
만약 내가 찬양을 잃어버린 채,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외면한다면 우상숭배자나 무신론자와 다름없다. 신앙인과 불신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이해하고, 믿느냐, 아니면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느냐의 차이이다.
믿음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자기가 하나님에게 알려져 있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즉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알아주신다.
이러한 사실은 내가 진정 찬양할 이유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원초적인 그리움과 거룩함의 영역이 있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내가 되돌아갈 자연에 대해 신비해하듯이, 인간은 모두 존재의 근원에 맞닿은 거룩함이 존재한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부른다. 영혼이 머무는 곳, 하나님의 영광이 깃든 곳, 그곳은 초라한 내 삶에 존재하는 가장 신성한 공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 주권자로 고백할 때 내 존재가 초라해지는 것이 아니다. 초라해지기는커녕 내 존재는 더욱 소중해진다.
뭔가 좀 있다고 자만하지 말라. 망원경으로 본 나는 티끌 중의 티끌도 못 된다. 뭔가 좀 없다고 기죽을 이유 없다. 현미경으로 본 나는 엄청난 은하계 중의 은하계이다.
3)
시편 8편은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연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부름받았다고 고백한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6-9).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사람에게 위탁함으로써 관리자, 청지기, 봉사자로 삼으셨다.
바벨론 신화에도 창조 이야기가 있다. 바벨론 사람들의 생각으로 태초에 사람은 신의 농토에 물 대는 일을 하는 작은 신들을 대신하는 노예로 만들어졌다고 기록한다. 성경의 창조신앙과 정반대이다. 창세기는 창조의 목적이 기쁨이고 찬양인데 비해, 바벨론 신화는 힘겨운 고역과 고통이 인간의 창조에 운명론적으로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
자연에 대한 청지기라는 생각도 다르다. 그러니 먼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시장이나 군수든 선거 때마다 사람들은 개발과 발전을 공약한다. 결국 그 목적지는 시멘트로 뒤덮일 세상이고, 자연이 파괴되고 환경이 오염된 살기 쉽고 편리한 위험이 가득한 세상이다.
성경의 생각에 따르면 누가 개발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가? 누가 발전이란 미명으로 지구 온난화를 부추기고, 삶의 터전을 위기로 몰아가는가? 아니다. 그것은 바벨론 신화를 따르는 일이다.
우스개 말로 요즘 우리 사회의 행복 기준은 ‘평등’(坪等)이다. 삐딱하게 들어보라. 평등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느 사람인 줄 아는가? 바로 우리 한국인이라고 하더라. 아파트 ‘평’수와 아이들 성적 ‘등’수, 그런 평등을 너무나 절대시한다.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은 그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주는 시사가 크다.
“우리의 국민총생산은 각종 오염시설, 고속도로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치우는 구급차를 성장으로 측정합니다. 네이팜탄과 핵무기, 시위 진압용 장갑차도 성장에 기여하는 것으로 계산합니다. 하지만 국민총생산에는 아이들의 건강과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시의 아름다움도, 가족의 건강함도, 토론의 지적 수준도, 공직자들의 청렴함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은 이것들이 우리가 나라를 자랑스러워하는 이유입니다.”
나는 덧붙이고 싶다. 자연의 아름다움, 환경의 정연함, 고마워하는 마음, 친절한 이웃, 이웃 간의 인정, 너털 웃음, 내적 기쁨, 공동체다움 그리고 소박한 삶.. 우리는 녹색기준에 맞는 국민총생산을 만들어가야 한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내건 ‘녹색교회 다짐’ 열 가지 선언을 살펴보자.
“만물을 창조하고 보전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 안에서 사람과 자연이 한 몸임을 고백한다/ 창조보전에 대하여 교육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친환경적으로 키운다/ 환경을 살리는 교회 조직을 운영한다/ 교회가 절제하는 생활에 앞장선다/ 생명 밥상을 차린다/ 교회를 푸르게 한다/ 초록가게를 운영한다/ 창조보전을 위해 지역사회와 연대한다.”
환경선교와 녹색 마인드는 특별한 기념주일에만 다짐하는 것이 아니다. 일 년 365일 지혜로운 소비자와 생산자로서 나를 향한 고백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 양보하고, 희생해야 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 먼저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녹색교회를 넘어 녹색 가정, 녹색 시민의 삶을 살아야 한다.
창조질서 회복이란 담론은 거창하지 않다. 욕망을 줄이고, 속도를 늦추라는 것이다. 본래 창조 세계는 결코 바삐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시간은 느릿느릿하며, 창조의 공간은 한가로웠다.
이제 눈을 감고 믿음의 눈으로 하늘의 사인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녹색 신앙은 ‘참 아름다워라’라는 찬양과 함께, 자연과 만물을 관리하고 돌보는 청지기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돌보시듯, 한 인간을 사랑하시고 베푸시는 은혜가 바로 나와 색동가족 위에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