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덕혜옹주딸 마사에(정혜)
소 다케유키는 사미시라 환상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시를 남긴다.
이 시를 보고 충분히 소 다케유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볼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결혼사진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야기. (사미시라 - 환상 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
사미시라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
젊은 날에 대한 추억은 무엇을 떠올릴 것이 있어 떠올릴까.
날밝는 것도 아까운 밤 굳게 먹은 맘이 흔들릴 것인가.
꽃이 아름답게 핀 창가에 등을 대고
썼다가 찢어버린 당신에게 보낸 편지 조각인가.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로 생각할 정도로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
두릅나무의 새순이 벌어지는 아침.
옷이 스치는 소리의 희미함과 닮아있다.
떡갈나무 잎에 들이치는 소낙비와 함께 저물었다.
사람이란 젊었거나 늙었거나
애처러운 것은 짝사랑이겠지.
지금 감히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아직 늙기 전의 탄식이라고 해두자.
이 세상에 신분이 높건 낮건
그리움에 애타는 사람의 열정은 같을 거야.
그래도 대부분은 식어버리겠지.
새벽 별이 마침내 옅어지듯이.
빛 바랠줄 모르는 검은 눈동자.
언제나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것은 환상 속의 그림자.
현실 속의 자신이 어디있는 지도 모르네.
물어도 대답없는 사람이여.
사미시라는 영혼과 비슷해서
사람의 숨결로 타고 온다한다.
한번사람 맘속에 들어가면
오래 눌러 앉아 나가지 않는다 한다.
호적이라는 종이 한 장으로
누구나 부부라고 하지만
할 일을 해내지 못하는 괘씸한 아내여.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도 있겠지.
이름도 모르는 아비의 아이를 가져
어미가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어깨를 서로 맞댈 기회조차고 없을지라도
서로 통하는 영혼도 있다고 한다.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 된지
이미 봄 가을이 손가락으로 세고도 남을 정도로 지났다.
귀엽다고도 사랑스럽다고도 보았다.
그 소녀는 이름을 사미시라라고 한다.
나의 넓지 않은 가슴 한편에
그 소녀가 들어와 자리 잡은지 이미 오래인것을,
마치 마음 놓고 쉴 틈도 없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신하게 무릎을 딱 붙이고 앉아 있다.
하룻밤도 침실로 들이지 않고
꽃잎같은 입술도 훔치지 않지만
아내라고 부를 것을, 내게 허락해다오.
나이먹지 않고 언제나 어린 아름다운 눈썹의 소녀여.
어떤 때는 당신이 가리키는 입술을
저녁 노을 구름 사이로 보이는 붉은 색의 요염함에 견주었다.
네 눈동자가 깜빡거릴 때의 아름다움은
칠월 칠석날 밤에 빛나는 별 같았다.
동그랗고 달콤한 연꽃씨를
눈물과 함께 먹는 것은 재미가 없다.
연꽃 씨의 주머니가 터지는 것 처럼
내 마음은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말았다.
근심이 있더라도 마음을 찢기는 일 없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겠지.
나의 탄식은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말았다.
내 몸도 또 언젠가는 죽어가겠지.
아아, 신이여, 그리움의 처음과 끝을
그 손으로 주무르실 터인바.
수많은 여자 가운데서
이 한사람을 안쓰럽게 여겨주실수 없는지요.
내 아내는 말하지 않는 아내.
먹지도 않고 배설도 안 하는 아내.
밥도 짓지 않고 빨래도 안 하지만.
거역할 줄 모르는 마음이 착한 아내.
이 세상에 여자가 있을 만큼 있지만
그대가 아니면 사람도 없는 것처럼.
남편도 아이도 있을텐데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찾아 헤맨다.
산은 낮은 곳에서 올려다 보고
바다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거라고 생각하여
어느 날 후지산 꼭대기에 올라
쯔루가의 여울이 빛나는 것도 내려다봤다.
또 어느 날은 파도치는 해변가에 나와
하늘을 가는 구름을 올려다 보았다.
그렇지만 마음은 달래어 지지 않고 바위를 끌어안는 것처럼
애처로운 가슴을 쥐어뜨는 것 같았다.
개미가 모여드는 계곡의 깨끗한 물을
손으로 퍼올리는 사람은 그 맛을 알고 있겠지.
높은 산 봉우리 봉우리에 피는 꽃 향기는
볼을 가까이 대야지만 비로소 맡은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너를 만나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내세를 기약할 수 있을까.
환상은 마침내 환상에 지내지 않으며
꿈은 꿈으로 깨어나지 않을 뿐이라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도 별것 아니야.
죄라고 해도 좋아. 벌도 받지 뭐.
유괴도 좋고 함께 도망을 갈 수도 있어.
함께 죽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뿐인 생명을 받았다.
이 세상을 감히 저주한다는 것일까.
나는 이미 미쳐버렸는가. 아니 아직 미치지 않았어.
지금 내리기 시작한 것을 싸라기 눈인가.
무거운 짐차를 끄는 사람은
가끔씩 쉬면서 땀을 훔친다.
얼마간 돈이 생기면
맛있는 술로 목을 축이겠지.
역에 내려 선 사람들은
각각의 걱정거리를 가슴에 안고
빠른 걸음으로 묵묵히 여기 저기로 흩어져 간다.
집에는 불밝히며 기다리는 아내가 있으니까.
거리에서 광고하는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애처롭다.
볼에 빨갛게 연지를 칠하고 거리에 서서.
간판을 걸치고 손짓발짓으로 손님을 청한다.
되돌아 나의 처지를 생각해본다
어린 여학생의 무리는
내게 가벼운 인사를 한 후 느닷없이 명랑하게들 웃더니
무리지어 화려하게 사라져버렸다.
나는 한숨 휴식 어디로 가면 좋을까.
남모르는 죄를 진 사람이
정해진 대로 길을 가는 것처럼.
언젠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
정처없이 나는 방황하고 있다.
봄이 아직 일러 옅은 햇볕이
없어지지 않고 있는 동안만 겨우 따뜻한 때.
깊은 밤 도회지의 큰 길에 서면
서리가 찢어지듯 외친다. 아내여, 들리지 않니
덕혜옹주의 남편 -소 다케유키의 시-
1908년 대마도 번주 집안인 소가문의 37대 당주 백작
1931년 소 다케유키 - 도쿄대문학부 영문과 졸업
1931년 덕혜옹주- 여자 가쿠슈인 본과 졸업
1931년 5월 8일 소 가문의 도쿄 저택에서 일본식 혼례
1932년 장녀 마사에(正惠) 출생
1955년 딸 마사에가 결혼하여 분가하자 아내와 이혼
소 다케유키 다른 일본 여자와 재혼 장남 출생
1956년 장녀 마사에는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
마사에의 장례식은 작은 항아리에 한 알의 진주를 넣고
그것을 상자에 담아 치렀다고 한다
1985년 소 다케유키 사망
**수필집에서 1931년부터 25년 동안은 그는 단 한줄
' 그 25년은 내 인생의 공백기이다 '
**딸 마사에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고
어머니를 굉장히 싫어했답니다.
소 다케유키가 직접 그린 딸 마사에의 초상화
Edward Simoni ( 팬풀릇 연주)
1912년 5월 28일 오후 7시 30분, 아기의 울음소리가 덕수궁이 떠내려 갈 듯 울렸다.
환갑이 넘은 고종이 그토록 사랑하던 귀인양씨가 예쁜 딸을 낳은것이다.
고종황제가 환갑이 넘어서 본 딸이라, 특별히 예뻐하는 자식이 었다고 한다.
옹주의 돌 모습
어릴적 모습
▲ 유치원 시절의 덕혜옹주 (하단 오른쪽 두번째)
1912년 당시 환갑이 넘은 고종과 궁녀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종의 고명딸.
고종은 환갑의 나이에 본 아이이고, 장성한 왕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를 금이요,
옥이요 하면서 귀애했습니다
옹주 나이 다섯 살이 되던 해 옹주를 위해 궁안에 유치원을 세운 고종은
옹주와 옹주 또래의 사대부집 딸아이들이 재미나게 뛰
어 놀도록 배려해 주었어요.
기록에 의하면 후궁들은 총애도에 따라서 월급을 받았다고 하는데 후궁들
중에서는 복녕당 양씨가 가장 많은 월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옹주를 사랑했는지 하루는 유모가 젖을 먹여야 한다며 고종 품에 있는
옹주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가려 하자 고종이 유모를 막으며
"과인이 보는 앞에서 옹주의 젖을 먹이도록 하라. 옹주가 건강하게 젖을
잘 빠는지 보고싶구나."라고 하여 유모를 당 황하게 했지만
고종은 옹주가 건강하게 젖을 잘 빠는 것을 보자 몹시
흐뭇해 했다고 하네요.
아버지 고종과 오빠들(영친왕.순종. 의친왕)과 찍은 가족사진
게다가 옹주와 함께 대전에서 잠들며 자장가를 불러준다든지, 옹주가 밥을 먹으면
항상 자신의 수라 옆에 옹주의 상을 따로 받아 같이 먹는다는지 하는
행동은 궁중 사람들의 마음까지 따스하게 했다고 합니다
1919년, 고종은 한 많고, 비극적인 군주의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눈을 감으면서까지
그는 딸 덕혜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는데요.
고종의 사랑을 받는 덕혜였으나 옹주의 궁궐 안의 생활은 평탄 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이미 고종은 영친왕 이은의 아내로 일본여자 마사코를 며느리로 맞이한 전례가 있어
이번에는 그리 하지 않으리라 마음 단단히
먹고, 옹주의 배필로 민씨 총각으로 점지하고 몰래 일을 수행하려 했지만 이를
알아챈 일본이 재빨리 대마도주와 강제 혼인을 시켜버렸습니다.
13살의 나이로 영친왕 이은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고,
그 곳에서 옹주는 조국을 잃어버린 왕녀라는 비아냥을 받으며 학습을 했죠.
그리고 그녀는 1931년 5월 8일 대마도주인 종무지와 강제 혼인을 하여 비극
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1923년 덕혜옹주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서거하시고, 아버지 고종황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붕어를 맞이 했다.
얼마전 사료에서 발견 되었지만, 고종황제는 친일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문건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발표에서, 친일파 및 일본사람들은 '뇌진탕'으로 급사했다고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가장 가까이에서 고종황제의 독살을
지켜본 사람이 덕혜옹주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종황제가 뇌진탕이 아닌 일본사람 및 친일파들에게
독살당했다고 죽을 때까지 믿고 있었다고 한다.
▲ 일본 학습원 유학시절의 덕혜옹주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후
덕혜옹주는 하루 하루를 외롭게 지낸다.
그러던 중, 덕혜옹주는 일본관리들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있는 학교에 유학을 가게된다.
'이제 내 곁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쓸쓸해... 무서워...
어마마마... 아바마마... 보고싶어요...'
결국 덕혜옹주는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덕혜옹주의 파란만장한 삶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른다.
▲ 일본으로 유학가서 입학하고있는 덕혜옹주. (높은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일본에서의 덕혜옹주의 학교생활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일본 아이들은 덕혜옹주를 '조센징의 공주' 라며 심한 따돌림을 당했고,
심지어 어느 한 일본 학생이 자리로 돌아가는 덕혜옹주의 발을 걸어 넘어 뜨리며,
'어머! 조선의 공주는 내게 절도 하네~' 라고 놀리며
치욕을 주곤했다고 전해진다.
▲ 수업중인 덕혜옹주
나는 조선의 공주인데, 왜 일본 공주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소 다케유키家 모두는 일본황실이 보이는 쪽에서 엎드려 절을 했으나,
한 여자, 덕혜옹주만은 꿋꿋히 조선의 자존심을 지켜내고
일본황실에 향해 절 하지 않았다.
▲영친왕, 순종,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가족사진)
3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덕혜옹주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환국당시 덕혜옹주의 유모였던 '변상궁'이 공항에 마중나가
눈물을 흘리며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너무도 쓸쓸한 환국길이었다.
'아이고... 옹주님, 저를 알아보시겠사옵니까? 어쩌다 이 지경이 되신 것 입니까...
아이고... 가엾은 옹주님...'이라며 눈물을 흘렸으나, 덕혜옹주는
자신의 유모였던 변상궁을 끝내 알아보지 못했다.
▲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덕혜옹주
▲ 입국하는 덕혜옹주
낙선재로 향하는 덕혜옹주
너무도 심각하게 정신질환(우울증)을 겪고 있은 탓에 투신 자살 소동이나 손목을 긋고
생을 마감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등 힘든 나날을 보내던중
1962년 1월, 옹주는 결국 그렇게도 오고싶어 했던
고국으로 돌아올수 있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1961년 11일,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에 들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방자 여사와 만난 자리에서 덕혜 옹주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치며 “그런 분이 있었냐”고 말했고
그 뒤, 박정희 정권에서 제창한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으로
구황족에 포함된 그녀는 1962년 1월26일 오후 12시35분 김포공항을
통해 고국에 돌아 오게 됐던 비화가 있었지요.
덕혜옹주의 회갑. 안경 쓰신 분이 이방자 여사
▲ 덕혜옹주의 회갑연. (왼쪽 두번째)(첫번째는 변상궁 유모)
1983년 어느 정신이 맑았던날,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라는 낙서를 남기고,
이후 덕혜옹주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6년후, 파란만장하고 슬픈 삶을 뒤로한체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77세를 일기로 타계한다.
덕혜옹주를 간병했던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는 병상의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너무나도 일생이 슬퍼요."
노년의 덕혜옹주는 정신이 맑게 돌아온 어느날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낙서를 남기기도 했다
"나는 이구 씨가 보고 싶다" -훙서 (왕이나 귀족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말)
한 회은황태손 이구, 이은 황태자의 아들
"나는 비전하가 보고 싶어요"
-여기서 비전하는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를 가리킵니다-
"나는 낙선재 살고 싶어요"
덕수궁의 꽃으로 불리던 황녀가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홍유릉 뒷편에 모셔진다.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또 그녀 스스로도 정말 사랑했던,
아버지 고종황제와 오빠 부부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
의민황태자, 의친왕의 곁으로...
▲ 덕혜옹주의 묘
유해는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혔습니다.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과 귀인 양씨의 황녀이다. 덕혜라는 호를 하사받기 전까지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고, 1962년에 ‘이덕혜’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