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천마대통(天魔代統) ① 풍운(風雲)의 천마성(天魔成). 어제도 오늘도 천마성의 웅자와 위용은 변함이 없었다. 천년거목 (千年巨木)인 양, 태산준령인 양 천마성은 천하를 군림하듯 무이 산 높이 우뚝 선 채 중원을 굽어보고 있었다. 때는 겨울(多). 봄은 아직 일렀다. 천마각(天魔閣) 오층. 천마대제 탁무영은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이 날따라 그는 더욱 늙어 보였다. 그의 앞에는 백수범이 무릎꿇고 앉아 있었다. "기아야." "네, 사부님." 그를 사도지간은 매우 다정하게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훈훈한 담소라도 나누는듯 했다. "너는 드디어 모든 것을 이루었구나. 당금 천하에서 더 이상 너의 적수(敵手)는 없다." 탁무영의 음성은 왠지 가라앉아 있었다. 백수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마성주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금천성, 비무강, 남궁신풍 이 죽고 새외 사대세력 중 삼 개 세력이 멸망했다. 그러니 이제 와서 과연 천하의 그 누가 백수범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 천마성주 탁무영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밖으로 나가자.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백수범은 의아함을 느꼈으나 곧 따라 일어섰다. 탁무영은 앞장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백수범은 그의 넓은 등을 보며 따르고 있었다. 그는 문득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과거에는 그토록 거대해 보이던 천마성주의 모습이 지금은 허전해 보이는 것이었다. '천마성주도 늙은 것일까?' 백수범은 앞서가는 탁무영의 뒤를 따르며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화원(花園)은 천마각의 후면에 위치하고 있었다. 온갖 꽃들이 피어있어야 하건만 겨울철이라서인지 화원의 풍경은 쓸쓸하기만 했다. 천마성주 탁무영은 화원을 거닐었다. 백수범은 공손히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탁무영은 손을 들어 마른 매화가지 하나를 꺾어 든 채 향기를 맡았다. 잠시 후 그는 등을 돌린 채 담담히 말했다. "독황 서래음이 죽었다." 백수범은 놀라지도, 안색이 변하지도 않았다. 그는 미리 알고 있 었다는 듯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탁무영은 매화가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분지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은 속여도 나 탁무영의 눈은 속일 수 없다." "......." "그는 천면신개 악비양의 수법에 당했다." 백수범은 여전히 침묵했다. 그러나 내심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 다. 탁무영이 직접 조사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탁무영은 걸음을 멈춘 채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기아, 네 이름은 대체 몇 개냐?" 백수범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썹을 모은 채 탁무영의 등을 노려 보았다. 처음으로 그는 전신이 바짝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탁무영은 그를 돌아볼 생각조차 없는 듯 계속 등을 돌린 채 말하고 있었다. "공손기, 아니 백수범(白秀凡). 너는 바로 전날 노부를 찾아왔던 천군어사대인(天軍御史大 人)이었지. 또한 혈영마존(血影魔尊), 천형괴객(天形怪客), 자면신군(紫面神君) 강무위도 모두 너의 분신들이었다. 틀리느냐?" "......!" 순간 백수범의 주먹이 꽉 움켜 쥐어졌다. 어찌나 으스러져라 힘을 주었는지 피라도 짜질 것만 같았다. 백수범의 눈은 탁무영을 무 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내심 수십 번이나 외치고 있었다. '일격(一擊)! 단 일격이면 이 자를 죽일 수 있다.' 백수범의 얼굴에는 무수한 갈등이 교차되고 있었다. 바로 손만 뻗 으면 탁무영의 치명적인 사혈인 명문혈(命門穴)을 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백수범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지만 등 뒤에서 암수를 쓸만큼 그는 비열하지 않았다. 또한 상대는 천마성주였다. 천마성주와 일전을 결하여 설사 그의 손에 꺽이는 한이 있더라도 비겁하게 이기기는 싫었다. 그의 주먹 은 서서히 펴지고 있었다. 동시에 긴장으로 굳어졌던 안면도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탁무영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담담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천마성의 세력 중 이미 구 할을 네가 차지한 것을 알고 있다." 탁무영은 몸을 서서히 돌렸다. 그의 두 눈은 부드럽기 이를 데 없 었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 속에는 일면 강철같은 강(强)함이 숨어 있기도 했다. 탁무영은 서두르는 기색없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아, 아니... 수범." 백수범은 눈썹 끝이 절로 흔들림을 느꼈다. 아니, 눈썹 만이 아니 라 전신이 가늘게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탁무영은 여전히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검(劍)을 뽑아라." 백수범은 흠칫하며 어깨를 떨었다. 탁무영은 그를 정면으로 직시하며 말했다. "어차피 자네가 군림천하 하려면 나 탁무영의 마지막 관문을 넘어야 한다." 갑자기 그의 입에서 백수범에 대한 칭호가 달라졌다. 이는 결국 무엇을 의미함인가? 백수범은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가 한참 만에야 정상으로 되돌 아왔다. 그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사부님, 마지막으로 제 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음, 좋다." 백수범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오 년 전, 개봉성(開封城)에 한 명의 불우한 서생이 있었습니다. 어찌된 셈인지 그는 과거에 계속하여 낙방만 했었습니다." 낙척서생(落拓書生) 백수범. 호목천원상(虎目天元相)이라는 후천골상을 지닌 그는 일개 낙척서 생에서 일약 다섯 가지 신분을 지닌 무림 최고의 기인(奇人)으로 상승 도약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一代記). 그것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그러나 백수범은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대략 간추려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탁무영은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중간에 한 번도 말을 끊지 않았다. 실로 무림사에 전무후무한 사건들이었다. 일개 낙척서생이 무림을 뒤흔드는 풍운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변만화를 일으키며 오늘날까 지 진행시켜온 일대비사가 아닌가? 백수범의 음성에는 감회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제자가 천마성의 후계자가 되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 다. 그것은 바로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참다운 삶의 방향을 일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문에 제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는 감정이 격해진 듯 잠시 말을 끊었다. 천마대제 탁무영은 여 전히 평온한 낯빛으로 듣고만 있었다. 백수범은 내친 김에 오늘날 까지의 모든 일들을 숨김없이 이야기 했다. "흐음......." 마침내 탁무영은 깊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시선을 먼 하늘로 던 지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백수범은 그의 눈길을 쫓아 하늘을 바라 보았다. 푸르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다만 한 마리의 비응이 짝을 찾는지, 아니면 먹이를 찾는지 빙글빙글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입니다. 사부님." 백수범은 한 마디 하고는 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천마성주는 흠칫 하더니 그를 내려다 보았다. 백수범은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것이 사부님께 드리는 제자의 마지막 절이옵니다." 도합 삼 배(三拜). 백수범은 공손히 세 번 절한 후 일어섰다. 순간 그는 두 눈에서 강렬한 신광을 발산하며 낭랑하게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소생은 마지막 관문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소생 은 여기에서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뜻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백수범은 마침내 허리에 감았던 연검(軟劍)을 풀어냈다. 그것은 바로 천궁검이었다. 반면 탁무영은 손을 뻗어 다시 매화나무 가지를 꺾어 들었다. 그는 이제껏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화나무 가지를 꺾 어 듬으로써 대답을 대신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마침내 마 지막 관문을 스스로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 백수범을 천궁검을 손에 감아쥔 채 탁무영을 바라 보았다. 탁무영은 석 자 길이의 매화가지를 비스듬히 잡고 있었다. 그의 자세는 묘했다. 일면 방심(放心)한 듯, 또는 한가한 선비가 붓 한 자루를 들고 어떤 시(詩)를 쓸가 시상을 가다듬는 듯한 그런 모습이요, 자세였다. 고수는 철검이든 나무가지든 마찬가지로 절학을 발휘할 수가 있는 법이었다. 따라서 백수범은 탁무영이 가볍게 손에 쥐고있는 매화 가지를 결코 가볍게 볼 수 있었다. 일단 그의 손에 쥐어진 이상 만고의 신병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일 장(一丈)의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천궁검은 중단을 겨누고 매화가지는 상단부에 놓여 있었다. 그러 나 두사람의 자세에는 한 올의 흐트러짐은 고사하고 미동조차 없었다. 흡사 조각된 석상처럼 그들은 굳어 있었다. 단지 눈(眼). 두 쌍의 눈만이 칼날처럼 번뜩이며 서로의 헛점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이 상대의 헛점을 찾는데 실패(失敗)하고 말았다. 백수범은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 과연 천마성주답다. 이제까지 만났던 그 어떤 고수와도 천양 지차다. 아니,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차피 모순이다.' 경탄하기는 탁무영도 마찬가지였다. '컸구나. 몰라보게 컸다. 나 탁무영이 압도당할 정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의 자세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차츰 두 사람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갔다. 차가운 겨울에 땀이 라니 만일 보는 이가 있었다면 실로 기이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 두 사람의 몸은 가득 끌어올린 진기로 내부에서 포화 지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팽팽히 당겨진 활과 같은 상 태로써 놓기만 하면 그대로 터져버릴 정도로 위험한 상태였다. 그 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사부님, 용서 하십시오." 백수범의 검 끝이 마침내 움직였다. "개세천무종(蓋世天武宗)---!" 금갑신경에 기재된 천황구무종의 검법 중 최후 초식이 펼쳐진 것 이었다. 그러자 백수범의 몸은 사라지고 한 줄기 눈부신 백광만이 무시무시하게 뻗어나왔 다. 탁무영도 일갈했다. "천마홍황(天魔洪黃)---!" 그 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천지가 누렇게 변했다. 마침내 정도(正道) 최고의 검법과 사도(邪道) 최고의 검법이 동시에 전개된 것이었다.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어느 쪽이 천마성의 영원한 패자(覇者)가 될 것인가?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오직 억겁일수유의 순간이 영겁으로 이어 지는 듯한 진공상태가 공간을 지배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안돼요!"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외침이 들렸다. 동시에 화원으로 한 가닥 섬세한 인영이 뛰어 들었 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두 갈래의 검기는 서로 스치며 반 대 방향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곧 두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상 최고 고수들의 일전(一戰)이라기에는 너무도 고요한 접전이 아닐 수 없었다. 탁무영의 왼쪽 어깨에 한 줄기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반면에 백 수범은 허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까지 모 두 무사했다. "제발...... 싸우지 말아요!" 장내에 뛰어든 인영은 다름아닌 탁영영이었다. 그녀는 울음을 터 뜨리며 그들 중간에 끼어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탁무영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영영, 비켜 나거라." "아... 안돼요! 할아버지." 백수범도 부드러우나 냉정하게 말하고 있었다. "영영,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비켜라." 탁영영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두 사람의 가운데 서서 입술을 꼭 깨문 뒤 야무지게 말했다. "할아버지와 기오빠 중 어느 분이 죽어도 영영은 살 수 없어요. 차라리 절 먼저 죽인 후에 싸우세요." 아무리 닦아내도 소용이 없었다. 탁영영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 다. 비련(悲戀)의 여인. 그녀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일 지도 몰랐다. 한 쪽은 피를 이어받은 할아버지요, 또 한 쪽은 사 랑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쪽을 편들 수도, 어느 쪽을 버릴 수도 없는 것이 그녀의 입장이었다. "제발....... 차라리 절 죽여 주세요!" 울부짖는 듯한 탁영영의 외침에 두 사람은 비로소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광경에 백수범의 시선에서 꺼지듯 신광이 거두어졌다. "아아!" 그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것을 본 탁무영의 표정이 기이하게 움직였다. 그는 여전히 차디찬 음성으로 말했다. "수범, 너는 독하지가 못하구나." 백수범은 시선을 들어 탁무영을 바라 보았다. 문득 그의 입가에 한 가닥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부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탁무영은 흠칫하여 반문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느냐?" 백수범은 빙긋 웃더니 말했다. "조금 전 사부님께서 한 치만 옆으로 비켜주시지 않았다면 제자는 지금까지 목이 붙어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탁무영의 얼굴에도 잔잔한 웃음이 떠올랐다. "너도 역시 마찬가지다. 왜 마지막까지 찌르지 못했느냐?" "그 이유는 사부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천마대제 탁무영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일 세의 대효웅의 눈 속에는 차츰 인자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힐끗 탁영영을 바라 보았다. 탁영영은 백수범을 넋빠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탁무영은 내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영 저 아이는 정말로 수범 없이는 살 수가 없겠군.' 문득 탁무영의 이마에 깊은 주름살이 잡혔다.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에는 어느 새 구름이 몰려들어 금 새라도 비가 뿌릴 듯 침침하기만 했다. 마치 현재 그의 심정과도 같은 기후를 보이고 있었 다. '나도 늙었는가? 이젠 편안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 탁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문득 그의 뇌리 한 구석에서 커다란 깨달음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천마성은 과거의 천마성이 아니다.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천마 교(天魔敎)만의 것도 아니었다. 누구든지 강한 자라면 천마성의 주인이 될 수 있노라고 천마성주인 내가 공언하지 않았던가? 그렇 다면 이제 와서 굳이 망설일 이유가 있겠는가?' 탁무영의 얼굴에는 서서히 한 가닥 결심이 어리고 있었다. 한편, 백수범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전심전력을 기울여 노력해 왔던 일을 이렇게 끝내야 한단 말인가? 완성을 목전에 두고......?' 백수범은 회의지심이 가슴을 회오리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하긴 수 년 전만 해도 나는 일개 낙척서생이었다. 천마성의 성주 가 되려 했던 것도 실은 자의라기보다는 타의였지 않은가?' 백수범의 뇌리에 불현듯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일련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회억(回憶)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그것은 백수범이라는 한 인간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었던 순수한 감정, 즉 인간애(人間愛)였다. 문득 그는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애처롭게 눈물을 흘 리며 서있는 탁영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영영.......' 그의 가슴을 치는 것이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질끈 감은 채 생각했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야망이란 또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인간 이 영원불멸의 존재가 아닐진데 결국은 한 줌의 부토로 화해 사라질 것이 아닌가?'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천마대제 탁무영의 모습이 가득히 들어왔다. 탁무영은 여전히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잿빛 하늘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시는 걸까? 저분은 나의 사부, 부인할 수 없는 사 부다. 내가 그에게 겨누는 검은 그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백수범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 순간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 다. '그렇다. 윤회(輪廻)의 강은 흐르고 흘러 바다로 가고... 다시 증 발하여 하늘로 오른다. 연후 비가 되어 쏟아져 강을 이루고 다시 바다로........ 언젠가는 또 나의 제자가 내 가슴에 검을 겨눌 것이 아닌가?' 백수범은 다시 시선을 돌려 탁영영을 바라 보았다. 탁영영은 신비 하도록 맑은 눈에 정을 담뿍 담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오빠......." 탁영영은 눈물 한 방울을 떨구며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순 간적으로 백수범은 마음이 한없이 넓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세상 일이란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순리(順理), 오직 순리만이 정도(正道)다.' 이때였다. 천마성주 탁무영이 빙글 돌아서더니 백수범을 바라 보았다. "수범." 백수범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사부님." "허허! 넌 아직도 날 사부라 부르느냐?" 백수범은 미소 지었다. "천지간에 저의 사부는 오직 한 분 뿐입니다." 탁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생각해 보니 이 탁무영의 제자는 천지간에 오직 한 명, 수범 너 뿐이로구나." "사부님......." 왠지 백수범의 목이 메었다. 탁무영은 다시 몸을 빙글 돌리더니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외쳤 다. "사령(死靈), 환령(幻靈), 무령(武靈)!" 그러자 세 괴인이 화원 속에서 불쑥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모두 복면을 쓰고 있었다. 탁무영은 그들에게 명령했다. "천마대전(天魔大典)을 준비하라! 새로운 천마성주(天魔城主)의 탄생을 온 천하에 알리겠 다." "아!" 백수범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탁영영은 감격한 나머지 펄쩍 뛰고 있었다. "할아버지!" 그녀는 새처럼 날아 탁무영의 품에 안겼다. "흑흑흑......! 할아버지!" 그녀는 벅찬 심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만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얼마나 귀엽고 순진무구한 여인인가? 세상의 악도, 계산 도, 음모도 때묻지 않은 그녀 앞에서는 부끄러워 돌아서고 말 것 같았다. 탁무영은 자애스런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시넌 을 들어 백수범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범, 이리 가까이 오너라." 백수범은 멈칫 하다가 곧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탁무영은 깊은 눈으로 백수범을 바라보더니 온화한 음성으로 물었다. "영영을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느냐?" 백수범의 영준한 얼굴에 한 줄기 흔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입니다. 사부님." 탁무영은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이어 탁무영은 탁 영영의 손과 백수범의 손을 마주 잡게 했다. "노부는 이 시각부터 무림에서 은퇴하겠다.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천마성의 주인, 아니 천하무림(天下武林)의 진정한 주인이다. 부디 백년해로하기 바란다." 탁무영의 말투는 자애롭기 이를 데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일대의 대마웅(大魔雄)이던 그가 이토록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백수범과 그는 일검(一劍)의 결전을 치루었다. 물론 승패는 미정 (未定)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싸움, 바로 정(情)과 인의(人義) 의 싸움에서는 백수범은 완전히 승리한 것이었다. 석양(夕陽).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석양은 백수범과 탁영영의 장래를 축복이라도 해주려는 듯 온 누 리를 붉게 감싸며 따뜻한 기운을 뿌려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잿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던 하늘이 이제는 노을로 화해 아름 답게 천지를 물들이고 있었다. "허허허! 이 늙은이에게는 그저 천마각 한 채만 다오. 그곳에서 증손자와 증손녀의 재롱이나 보며 여생을 즐기겠노라." 천마대제 탁무영의 넉넉한 웃음이 저녁 하늘에 널리 퍼져나갔다. ....... 천마성(天魔城)의 대풍운(大風雲)은 이렇게 하여 그 장구하고 파란만장한 막을 내리고 있었 다. ② 천마대전(天魔大典). 그것은 천마성에서 중대한 일이 결정될 때 벌어지는 행사였다. 천 마성이 탄생한지 팔십여 년을 통해 천마대전이 열린 것은 오직 한 번이었다. 그것은 천마성이 건립된 해였다. 천마대제 탁무영이 천마성주가 되어 전 무림의 마도고수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대전을 벌였던 것이었다. 당시에는 백도무림인들은 한 명도 초청되지 않았다. 마도천하(魔 道天下)가 선포되는 자리였기에 천마대전은 무림의 암흑시대를 선포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두 번째 천마대전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번 천마대전은 전 무림에 낭보(朗報)로 전해졌다. 이 천 마대전에는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고 수 천, 아니 수 만의 무림인들이 초대되었다. 무림인들은 삼삼오오 천마성으로 몰려 들었다. 소식에 의하며 천 마대전에 새로운 천마성주가 탄생된다고 했다. 그것을 축복하기 위해 정사양도의 무림인들은 앞을 다투어 몰려 들었다. 천마대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기대했던 엄숙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팔십 년 마도천하이 지 군림천하했던 천마성의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축등(祝燈) 이 수도 없이 내걸렸다. 천마대전은 새로운 천마성주의 탄생은 물론 성대한 결혼식까지 겸하게 된 것이었다. 새 천 마성주는 무려 일곱 명이나 되는 천하절색의 미녀(美女)들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실로 무림사 이래 전무후무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과연 새로운 천마성주는 누구인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백수범(白秀凡), 바로 그였다. 대기인(大奇人)이자 일대의 풍운아인 백수범, 그는 마침내 원하는 모든 것을 얻고야 말았 다. - 천마성주란 천하제일인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천하제일의 거부(巨富)를 의미하며, 천마성주가 된다는 것은 곧 천하를 얻는 것이다. - 끝 - |
첫댓글 잼 난글 올려주셔서 감사 합니다
그동안 잘 보았습니다. 감사.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즐독 ㄳ
수고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