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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호산 전투 상황도
1950년 11월 1일께 중공군 제38, 40군이 청천강을 따라 원리를 돌파하고 계속 하류 방향으로 진출하여 미 제8군의 퇴로가 차단될 위험에 빠졌다. 이에 미 제8군의 퇴로가 차단될 위험에 빠졌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11월 2일 청천강 북쪽으로 철수할 것을 결심하고 청천강 및 대령강의 교량과 전차 도하지점을 포함해 교두보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제2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제7사단장 신상철 준장에게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덕천 – 구장동 간의 방어진지를 점령하여 산악지대로 침투하는 적을 저지 · 격멸 하는 동시에 군과 군단의 동측방을 방호하라” 는 명령을 구두로 하달하였다. 제7사단장은 적정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11월 1일 공격을 하였으나, 중공군의 야간 기습공격을 받아 덕천-구장동 지역 점령에 실패하였다. 이에 군단장은 2일 군우리 북쪽의 비호산 일대에서 적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11월 3일 중공군은 청천강을 따라 봉천리를 거쳐 제7사단 제3연대를 포위 · 격멸한 후 개천을 점령하려 하였다. 03:00시 연대 규모의 적이 사단 좌측으로 공격해 왔다. 제3연대 경계부대인 제2대대는 축차적으로 주저항선으로 철수하여 주지항선에서 3시간의 견적으로 3회나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개천에 위치한 유엔군 포병대대의 지원에 힘입어 적을 격퇴시켰다.
11월 5일, 중공군은 주력의 공격방향을 바꾸어 덕천에서 개천 쪽으로 우회하여 제 5연대의 진지를 돌파한 후 비호산을 점령하였다.
11월 6일, 국군 제7사단과 미 제5연대전투단이 합세하여 강력한 화력지원하에 공격을 시시하여 비호산을 재탈환함으로써 청천강 교두보의 우익을 방호할 수 있었다.
국군 제7사단은 비호산 공방전에서 전투력이 미군에 비해 훨씬 약하였으나 백병전까지 벌이는 혈전 끝에 승리함으로써 유엔구이 청천강 북쪽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는 것을 방지하고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그 결과 미 제8군의 공세이전을 위한 다음 단계의 작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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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군단장 유재흥 장군과 제7시단 참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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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사단장 신상철 장군과 참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