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천하도(天下圖) 1 진유걸이 길고 긴 잠에서 깬 것은 해가 중천에 뜬 사시경(巳時更)이었다. 그는 망정암의 주지스님을 끝내 찾지 못하고 이 곳 광명객잔(光明客棧)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것이다. 그가 든 방은 이층이었고, 근처에는 저자거리가 있어 소란스러웠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밖에는 햇살이 부드럽게 대지를 포용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바쁘게 지나치고 있었다. 그는 생기에 넘치는 바깥 세상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공을 잃은 몸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이것이 지금 그에게 주어진 가장 절실한 상황이었다. 진유걸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모두 꺼내 보았다.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띈 것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단검과 강호운룡 남화룡에게서 받은 맹령정패(盟令正稗)였다. 그 밖에 마령신의가 준 두 개의 약병과 천면신옹에게 받은 몇 장의 인피면구, 그리고 약간의 은자가 있었다. "남 형이 준 상로쌍검은 다락원에 빼앗기고 말았으니 정말 남형을 볼 면목이 없구나." 진유걸은 문득 남화룡의 맹주 신물을 보고는 힘을 얻었다. "그래, 다락원의 전대원주가 분명히 말하지 않던가? 공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반드시… 반드시 내 공력은 회복될 수 있을 거야." 그는 지난밤의 일을 떠올렸다. "망정암 주지스님과는 인연이 닿지 않은 모양이다. 어디로 가셨는지 찾을 수가 없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보기로 하자." 진유걸은 그 객잔에서 하루를 더 묵은 뒤, 인피면구 중에서 가장 못생긴 얼굴을 골라 냈다. 그것은 그가 주수연과 함께 중조산으로 도주할 때 사용했던 것이었다. 진유걸은 그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는 객잔을 나섰다. '우선 태성왕부로 가자. 어떻게 하든지 수연을 만나야만 해.' 그는 복건성(福建省)으로 가기 위해 마차(馬車)가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 때였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절박한 어린아이의 음성이 그의 귓속으로 파고드는 게 아닌가? 뒤이어 거칠기 짝이 없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뭐라고? 용서? 이 놈의 자식! 오늘은 네놈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말 테다." 진유걸은 호기심을 느끼며 중인들 틈에 끼여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우악스럽게 생긴 장한이 어린아이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질질 끌고 가며 욕설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이 도적 놈의 자식! 오늘은 기어코 본때를 보여 주마." 연약해 보이는 소년은 연신 잘못을 빌었다. "대인! 한 번만 봐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어요." 진유걸은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문득 자신과 독고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무공이 없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채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 장한에게 포권일례를 취했다. 일순, 그는 자신이 전혀 공력을 쓸 수 없는 몸이란 걸 인식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하지만 장한은 진유걸의 능숙한 포권에 깜박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얼굴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못생긴 놈이 무공은 높은 모양이지?' "소협께서는 무슨 일이십니까?" 장한은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얘가 어떤 잘못이 있기에 이토록 혹독하게 다룬단 말이오?" "이 놈은 항상 남의 은자를 슬쩍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오늘도 제가 가진 은자 세 냥을 훔쳐 가서……." 진유걸은 그와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럼 돌려 받으면 되지 않소?" "벌써 어디다 썼는지 한 푼도 없었소이다." 진유걸은 소년에게 물었다. "너는 그 은자를 어디다 두었느냐?" 그러나 소년은 눈을 껌벅거리며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유걸은 품안의 전낭에서 은자 세 냥을 꺼내 장한에게 주었다. "이것을 가지고 이 애는 놓아 주시오." 청의장한은 진유걸이 주는 은자를 어정쩡하게 받아 들며 주의를 주었다. "소협께서도 그 전낭을 잘 간수하셔야 할 겁니다. 이 놈은 굉장히 빠르니까요." "하하하… 고맙소. 형장도 이후에는 조심하시오." 청의장한은 소년을 놓아 주며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 분 소협이 아니었더라면 네놈은 오늘 다리가 부러졌을 것이다." 진유걸은 청의장한이 가는 것을 지켜보다 소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아니?" 금방까지만 해도 자기 옆에 있던 소년이 깜쪽같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닌가? 진유걸이 소년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둘러볼 때였다. 쿵-! 진유걸은 누군가와 거칠게 부딪치고 말았다. 아니, 그 사람이 일부러 부딪쳐 왔다는 게 옳았다. "이것 봐,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인데 여기서 유세를 떠는 거야? 감히 어르신들의 지역에서 날뛰다니 간덩이가 부었군." 거친 말투와 함께 덩치가 우람한 세 청년이 나섰다. 등에 검인지 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병기를 둘러멘 그들의 인상은 몹시 험상궂게 보였다. "아, 형장들에게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구려. 죄송하외다." 진유걸이 사과를 하자 세 젊은이 중 한 명이 얼굴을 찌푸렸다. "얼굴도 지지리 못생긴 놈이 길 한복판에서 어정거리고 있다니… 정말 재수없어." 그는 진유걸을 향해 냅다 발길질을 했다. 퍽-! 청년의 발길은 정확히 진유걸의 복부를 걷어찼다. "으억!" 무공을 상실한 그가 어찌 그런 공세를 피할 수 있겠는가? 진유걸은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살가죽이 온통 찢겨 나가는 듯한 아픔이 그의 전신으로 엄습했다. "으윽! 이 놈들! 감히 내게 이 따위 짓을 하다니… 결코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아라!"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고함을 내질렀다. 바로 그 순간, 다른 청년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슈욱- 팍-! "으……!" 진유걸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간신히 참으며 또다시 바닥을 굴렀다. 그 바람에 이마가 돌뿌리에 부딪쳐 피가 비 오듯 쏟아졌다. "이 놈들! 결코 네놈들을 그냥 두지 않겠다!" 그가 피를 줄줄 흘리며 다시 벌떡 일어나자, 세 청년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독한 놈! 골통을 부숴 놓고 말겠다." 청년 중 한 명이 땅을 박차고 진유걸의 두개골을 노리며 우수를 내리찍는 순간. 쉬이익- 쉭-! 번쩍-! 예리한 폭갈과 함께 한 줄기 푸른 섬광이 빛을 발했다. 그와 동시. "으악!" 진유걸의 머리를 내리치려던 청년의 손목이 절단되어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청년은 피가 뚝뚝 흐르는 손목을 감싼 채 방금 전 자신에게 손을 쓴 인물을 바라보았다. 잿빛 장삼을 걸치고 있는 냉랭한 인상의 중년인! 진유걸은 그 중년인을 보는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는 산에서 피리를 불고 있던 자가 아닌가? 나타난 중년인, 그는 보원암의 살인마를 뒤쫓기 위해 산을 내려온 광혼객이었다. 그는 수중에 피를 묻힌 죽적(竹笛)을 들고 서 있었다. 광혼객의 쾌속절륜한 손속에 압도당한 세 청년 중 한 명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귀… 귀하는 본 청청각(靑靑閣)과 어떤 원한이 있소?" 광혼객은 그들을 예리하게 노려보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쓸모 없는 녀석들! 당장 내 앞에서 꺼져라!" 세 청년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다. "대협의 은공에 감사드립니다. 혹 존성대명(尊姓大名)이 어찌 되는시는지요?" 진유걸이 인피면구를 쓰고 있는지라, 광혼객은 산에서 만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진유걸이 보원암의 여승들을 몰살한 살인마인 줄 알고 뒤를 쫓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마을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그 살인마가 도대체 어디로 도망을 갔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군. 본좌의 손에 걸리기만 하면 갈가리 찢어 놓고 말 테다.' 진유걸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알 필요 없으니 가던 길이나 가 보시오." 광혼객은 그 말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갔다. "성격이 불 같은 사람이군." 진유걸은 그가 가고 난 뒤 마음에 드는 사두마차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헤헤… 공자, 어디까지 가시려는지요?" 마부인 듯한 자가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달려왔다. "복건성 청류(淸流)까지 가려는데 은자가 얼마나 들겠소?" "은자 두 냥만 주십시오." "은자 네 냥이면 작은 마차도 살 수 있는데 너무 비싼 것 같군." "마차 대금을 잘 아시는 분이시군요? 그럼 한 냥만 내십시오. 그러나 선불입니다." 진유걸은 값을 지불하기 위해 전낭을 꺼냈다. 순간. "아니, 이게 어떻게 일이지? 전낭이 없어지다니……." 진유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전낭에는 은자도 은자거니와, 남화룡이 준 맹주 신물인 맹령정패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진유걸이 자지러지게 놀라고 있을 때였다. "흐흐흐… 이 놈이 아직도 여기서 얼씬거리고 있다니… 천만 다행이군." 얼음장보다 더 서늘한 음성이 들려 왔다. 진유걸은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광혼객에게 손목이 잘린 청년이 청청각 무사 십여 명을 몰고 다시 나타난 것이다. "아까 그 방해꾼도 없으니 이제 네놈을 진짜 죽여 주마!" 오른손을 붕대로 싸맨 청년이 다짜고짜 좌장을 내뻗었다. "죽어랏!" 그의 장심에서 웅후한 기력이 물밀듯 몰아쳐 나왔다. 펑-! 진유걸은 장력을 호되게 얻어맞고 세 자 가량 뒤로 나뒹굴었다. "으음……!" 진유걸이 신음을 삼키며 다시 몸을 일으키자, 청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그가 고함을 치자 진유걸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상대를 비웃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그러자 그 청년이 좌장을 힘껏 내뻗으며 장풍(掌風)을 격출했다. "아주 죽… 여… 주마." 휘윙- 윙-! 막강한 경력(徑力)이 휘몰아치며 진유걸의 전신을 뒤덮었다. 퍼펑-! 고막을 울리는 굉음이 울리는 순간, 진유걸은 이 장 밖으로 날아가 곤두박질쳤다. 그의 입, 코, 귀 등 칠공에서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리며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청각 인물들을 더 섬뜩하게 한 것은 그의 인내심이었다. 진유걸은 그렇게 부상을 입고도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던 것이다. 진유걸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 때, 청청각 무사 중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외쳤다. "피리를 든 중년인이 다시 나타났다. 빨리 이쪽으로!" 그러자 청청각 무사들이 그 사람을 따라 우르르 몰려갔다. 장내에는 피투성이가 된 진유걸과 모든 것을 지켜본 중인들만이 남아 있었다. 모여선 중인들은 청청각의 행패가 두려워 진유걸에게 함부로 구원의 손길을 던지지 못했다. 그 때였다. 덜컹-! 중인들이 길을 막는 바람에 지나가지 못하고 멈춰 서 있던 마차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마차 안에서 나온 사람은 뜻밖에도 여인이었다. 바단옷으로 몸을 감싼 여인은 이제 이십여 세 되었을까? 마치 한 떨기 부용(芙蓉)을 연상케 하는 여인의 용모는 가히 절세적이었다. "아니, 저 여인은 항주기루(杭州妓樓)의 일등기녀(一等妓女)인 금화란(琴花蘭)이 아닌가?" "이살(二殺)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찾아다니더니… 이제는 포기한 모양이군." 사람들이 주고받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까지 들려 왔으나 금화란은 모르는 척했다. "쯧쯧, 어쩌다가 이런 변을 당하셨지?" 금화란이 진유걸을 내려다보며 안타까워할 때, 쓰러졌던 진유걸이 가늘게 눈을 떴다. "으으, 청청각… 언젠가 피로 씻겨질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진유걸은 혼절해 버렸다. 2 하북성 청원에 자리한 강태위의 장원. 모두가 잠든 듯 적막한 장원에는 가끔씩 불어 오는 바람만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갔다. 휙-! 그 때, 문득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파공성과 함께 빛살 같은 속도로 누군가가 장원 담장을 날아드는 게 아닌가? 전신을 흑의로 감싼 복면인. 그는 전신에 살기를 내뿜었으며, 복면 사이로 보이는 눈빛은 굶주린 야수의 눈처럼 으시시해 보였다. 또한 움직일 때마다 왼쪽 팔소매가 흔들거리는 것으로 보아 한쪽 팔이 없는 자임에 틀림없었다. "으음, 저 곳이 바로 강태위의 정실이 분명하렷다." 그는 음랭한 소리를 나직하게 뱉어 내며 한 채의 전각으로 다가갔다. 문 앞에는 모두 다섯 명의 호위무사들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복면인은 흉광을 번득이며 전각의 좌측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그의 발끝은 지면을 슬쩍 굴렀다. 찰나. 휘익-! 그는 한 마리의 야조(夜鳥)처럼 전각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재빨리 사방을 살펴본 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 바닥에 엎드려 천천히 기와를 벗겨 냈다. 약 차 한 잔 마실 시각이 흘렀을까? 복면인은 뜯어 낸 지붕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곳은 정확히 강태위가 잠들어 있는 침실(寢室)이었다. 그는 이불을 목 부분까지 끌어 덮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강태위를 확인한 순간, 복면인의 눈 가장자리에 소름끼치는 살기가 번뜩였다. 그는 천장을 통해 침실로 뛰어내린 뒤 지풍을 격사했다. 핑-! 그것은 정확히 강태위의 아혈(啞穴)로 날아갔다. 팍-! 파공성이 울리는 순간, 그의 손에 날이 시퍼런 비수(匕首)가 들려졌다. "잘 가시오, 강 대인!" 그는 자못 비장한 어조로 말하며 강태위의 심장에 사정없이 비수를 내리꽂았다. 퍼억-! 바로 그 때였다. "허허허… 당신은 꽤나 무료했던 모양이구려. 이런 장난을 즐기게." 부드러운 가운데 살심이 깃든 음성이 울려 나왔다. 복면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쫘악-! 휘장이 걷히며 나타나는 인물. 바로 이 장원의 주인인 강태위와 포달랍궁 출신으로 알려진 세 명의 라마승… 화각존인(和覺尊人), 화평존인(和平尊人), 그리고 화천존인(和天尊人)이었다. 화천존인은 복면인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네놈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다, 살수 귀응신군(鬼應神君) 합구범(合丘凡)!" 찰나, 복면인은 일신을 부르르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귀응신군(鬼應神君) 합구범(合丘凡). 그는 중조산에서 진유걸과 주수연을 가로막다 왼팔을 잃은 녹림자객이 아닌가? 그렇다. 화천존인의 말대로 그는 바로 살수로 흉맹을 날리고 있는 귀응신군이었다. 그는 노련한 마두답게 재빨리 정세를 파악하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설마 당신들이 내 일을 방해할 줄이야……." 그렇다면 귀응신군은 이 세 화상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세 명의 화상은 그가 자기들의 정체를 알고 있자 몹시 놀란 얼굴을 하였다. "당신은 의외로 많은 것을 알고 있구려. 하지만 이제 그만 죽어 줘야겠소." 화평존인은 으시시하게 내뱉으며 귀웅신군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잠깐, 경거망동은 삼가하시오!" 순간, 귀응신군이 화천존인에게 재빨리 전음을 보내 왔다. "오늘 내가 이 곳에 온 것은 강태위의 수중에 있는 천하도를 차지하기 위해서였소." 순간, 화천존인이 흠칫 놀랐다. '아니, 이 자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우리는 얼마 전 미녀도가 천하도라는 사실을 알고는 부랴부랴 달려왔건만…….' 염두를 굴리는 그의 귀로 다시 귀응신군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천하도는 당신들에게 양보하겠소. 어차피 우리는 같이 행동해야 할 테니……." 그 말에 화천존인이 깜짝 놀라며 역시 전음을 보내 왔다. "같이 행동하다니?" "나는 혈궁(血宮) 사람이오." 혈궁! 신비에 잠겨 있는 삼대궁 중 하나가 아닌가? 녹림고수이며 자객으로 알려진 귀웅신군이 혈궁 인물이라니? 두 사람이 전음으로 말을 주고받자, 장내에 있던 인물들은 영문을 모른 채 의혹의 눈길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화천존인은 그가 혈궁 사람임을 알자 부르르 몸을 떨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우리에게는 반쪽의 옥경이 있소. 그리고 나머지 반쪽은 유아독녀궁이 가졌소. 그리고 당신들은 이제 천하도(天下圖)를 가지게 될 테니……." 반쪽 옥경과 천하도! 유아독녀궁! 이 얼마나 강호무림을 들쑤셔 놓았던 명칭들인가? 포달랍궁과 혈궁, 그리고 유아독녀궁을 가리켜 세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 신비의 삼대궁은 언제나 천 년 잠을 깰 것인가? 또한 반쪽 옥경은 십대기인 중 일 인인 강남태을자가 살해되면서 파란(波瀾)을 일으킨 물건이 아닌가? 그리고 또 천하도는 어떤가? 백여 년 전, 무림을 독패하던 사천방의 사대천왕이 분열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들릴 만큼 대단한 보물이지 않는가? 귀응신군의 입을 통해 나온 말들은 정녕 대단한 것이었다. 화천존인은 한동안 심사숙고(深思熟考)하는 얼굴을 하였다. 얼마 후, 생각에 잠겨 있던 화천존인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그렇다면 세 궁이 합작하여 일을 추진하자는 뜻이오?" 귀응신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전음으로 대답했다. "그렇소. 여기에 관한 것은 다시 수뇌(首惱)끼리 상면하여 교섭을 벌이도록 합시다." "기한은 언제쯤으로 할 것이오? 노납도 이 일을 활불(活佛)에게 보고해야 하오." 귀응신군은 눈가에 기묘한 웃음을 띄웠다. "천여 년을 기다려 왔는데 어찌 한두 달을 못 참겠소? 차후 통첩해 드리리다." 그는 전음을 끝맺고 중앙에 서 있는 강태위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강태위는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흐흐흐… 행운을 비오, 강대인!" 귀응신군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자신이 내려온 지붕을 통해 다시 나가 버린 것이다. 강태위는 그가 떠나가자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스님 덕분에 생명을 건졌습니다. 이 은혜 무엇으로 보답을 해야 할지……." 화천존인은 빙그레 웃어 보이며 물었다. "강 대인! 풍운서생에게 그토록 많은 황금을 준 까닭이 무엇이오?" 강태위는 그의 물음을 얼버무렸다. "거기에는 복잡한 사연이 있소이다. 차후 기회가 있으면 말씀드리지요." 그는 말을 끝맺으며 서가(書架)를 옆으로 밀었다. 우르릉-! 서가가 이동하며 강태위가 귀중품을 모아 두는 비밀 장소가 드러났다. 강태위는 그 곳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끄집어 내 화천존인에게 건네 주었다. "이것을 보여 달라고 하셨는데, 저의 성의라 생각하시고 그냥 받아 두십시오." 일순, 화천존인의 얼굴에 착잡한 기운이 어렸다. "강 대인은 과연 호인이십니다. 이렇듯 귀중한 장소를 스스럼없이 보여 주시는가 하며, 또 이런 보물도 선뜻 내주시니……." 강태위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강모는 그런 찬사를 들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못됩니다." 그가 서가를 닫기 위해 등을 돌리는 순간, 화천존인의 눈가에 무서운 살기가 피어 올랐다. 동시에 그의 주먹이 강태위의 뒤통수를 향해 쾌속하게 뻗어 나갔다. 펑-! 소름이 오싹 끼치고 모발이 온통 곤두서는 듯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뒤이어 강태위의 신형이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강태위는 뒷골이 시뻘겋게 짓뭉개져 나뒹굴었다. 하북성의 대부호이며 호인으로 알려진 강태위! 그는 믿고 있던 포달랍궁의 고승에 의해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 것이다. 화평존인과 화각존인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채 화천존인을 바라보았다. "아니, 사형! 천하도가 우리 손에 들어온 이상, 굳이 죽일 필요까지야 있습니까?" 두 사람은 자신의 사형이 강태위를 죽였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자를 죽여야만 나중에 우리 정체가 발각되지 않는다. 나머지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해 주겠다." 그는 사제들을 둘러보며 두루마리를 쫘악 펼쳤다. 미녀도(美女圖). 그것은 파양쌍귀상인이 강태위에게 팔았던 미녀의 반신상(半身象)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미녀도가 바로 사대천왕을 분열시켰던 문제의 천하도(天下圖)란 말인가? 그것은 화천존인의 말로써 확실시되었다. "이것이 바로 천하도였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쨌든 오늘 커다란 수확을 거두었다." 밤은 점점 더 깊어 삼경(三更)으로 치닫고 있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