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북부의 안동을 중심으로한 예천,영주,문경,상주,의성,영양,청송지방은 1881년 전개되었던 영남만인소의 진원지(震源地)입니다.
이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疎)는 전국의 유림이 위정척사(衛正斥邪)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반외세와 국정을 바로잡기위할 목표로 연대투쟁을 전개한 시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움직임은 의병전쟁과 독립운동의 사상적 바탕이되고 일부인사들이 의병으로 진출함으로써 위정척사운동은 민족을 지키려는 의병전쟁이라는 또 다른 모습을 나타나게 됩니다.
1894년 갑오의병은 청풍의 유생 서상철이 안동으로 와 의병을 일으켰음은 안동지역의 반외세적 특성과 관련이 큽니다.
이 안동의병은 한말 최초의 항일의병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을미의병은 1895년 8월 명성황후 살해사건인 을미사변을 비롯하여 을미개혁 즉 단발령을 도화선으로 김도화, 김흥락, 류치호등 대표적인 영남유생들이 의병을 모아 안동 관찰부를 공격, 점령하므로서 불을 지폈습니다. 이러한 항일의병운동은 1945년 독립 때까지 국내·외에서 계속 전개되었습니다.
일본의 강점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거한 인물이 가장 많이 나타난 곳도 안동지방입니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목숨을 끊어 순절한 인물이 전국적으로 66인이었는데 안동에서 순절한 인물이 10인입니다.
풍산인 죽포 김순흠을 비롯 향산 이만도,동은 이중언,회은 유도발 부자
권용하, 우헌 이현섭,김택진,이명우 부부 등이 자결하였으며,
영해 앞 바다에서 절명시를 읊고 入海殉死한 벽산 김도현은 안동인은 아니지만 안동을 주무대로 활동한 인물로서 향산 이만도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계몽운동가 류인식은 일생에 걸쳐 척사유림에서 개신유림으로, 혁신유림으로의 길을 밟습니다.
그는 성균관에서 신채호를 만나 교류하면서 사상과 행동에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되는데 그는 귀향하여 경북북부지역 계몽운동의 효시인 협동학교를 설립합니다.
이런 혁신유림의 대표적 인사들이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이대기 (李大基-본관연안)등 안동의 명문거족을 대표하던 분들이 주동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대기공은 왜정 말년까지 독립자금반출책임을 맡아 상해임정과의 연락을 계속해 나갔고 외로운 투쟁에 그 고초는 해외에 나가서 활동하는 이들 모다 더욱 혹독하였다 합니다.
이들은 신서적을 읽고 혁신적인 사고를 가지며 진보적인 활동에 앞장섰습니다.
먼저 노비문서를 모두 불살라 노비를 해방하고 협동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실시하고 스스로 단발하고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에 심혈 기울여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앞장서게 되는데 이때 석오 이동녕과 영합하면서 용맹한 군인과 유수한 독립전사를 배출합니다.
협동학교는 경북북부지역 계몽운동의 효시로 3년제 중등학교로 출발하여 17개 과목으로 1908년부터 1918년까지 약 8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습니다.
이들 졸업생은 대다수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협동학교는 근대 지향적 사상이나, 외세 침략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자주적 노선에서 모두 선두에 서있었다. 그들 중 일부가 우리나라 근대 사회주의운동의 선구자가 됩니다.
안동지역 독립운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일이다.가일의 권오설, 풍산 하리의 이준태, 탁청정 후손인 김남수, 안상길 등 혁신유림이 바로 그 주인공 들입니다.
당시 다른 지역의 소작인 운동이나 노동·농민 운동은 하층 계급인들이 주도하였지만 안동에서는 양반 유림출신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지주들이 일인지주나 친일 지주에 대항하여 소작인들의 권익을 지켜 나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안동출신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안동지역에서만 활동한 것이 아니라,그 영역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
오미동 출신 김재봉은 조선공산당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였고, 권오설은 고려 공산당의 책임비서가 되어 6·10만세시위를 준비하다 피체되어 1930년에 옥사하였습니다.
또 국내외 의열 투쟁에서도 활약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동경의 일본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과 김시현, 김정섭 등 열사들입니다.
이밖에도 안동지역의 독립운동은 일제 말기에 들어 전시수탈체제하에서는 신사 참배에 결사적으로 반대한 도산출신 이원영 목사나, 창씨 개명에 항거하여 단식 36일만에 목숨을 끊은 예안 교동출신 이현구 같은 이의 등장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교임념과는 다른 기독교적 조직력의 힘을 빌려 일제의 강력한 압제에 대항하는 본보기로 작용하였으니 특히 안동기독교장로교회를 중심으로한 조직력은 안동인의 혁신운동을 복돋우는 역활에 기름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육사 같은 분은 문단의 대표적 인물들이 대다수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날뛰던 1943년에 오히려 독립운동의 길을 찾아나서 중국에서 새로운 투쟁을 계획하다가 가족의 소상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후 서울에서 피체 되어 1944년 순국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안동에서는 끊임없이 항일 투쟁이 전개되었고, 또 다양한 사상을 대표할 혁신인사를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순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뿐 아니라 김재봉, 권오설 오직 형제, 이준태, 김남수, 안상길, 이회원, 유연술 등 공산주의운동가, 혹은 아나키스트(유림)로서 항일 활동을 벌이던 이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떤 토양이 이토록 많고 다양한 혁신세력들을 길러낸 모태가 되었을까요? 거기에는 안동의 역사와 전통, 문화가 깊은 영향을 미쳐 왔기 때문입니다.
안동지방이 독립운동에서 가장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다양한 사상을 꽃 피운 배경은 조선시대 후반기에 남인의 정치 행로가 막힌 뒤 학문생활에 몰입하면서 안동지방 유림들이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고, 학문적으로 퇴계 학통이란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조선중기 훈구세력의 집정으로 암울하던 시기의 퇴계는 신선한 사림의 사상적 보급을 위해 유교교육을 바탕으로한 새로운 혁신적구상을 이룩한 보람으로 마침내 성리체계를 집대성하는 데 성공하고 안동을 중심으로한 영남지방을 민족사상의 터전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며 거슬러 올라가 고려 왕건의 신진사상을 지지하여 민족재건을 이룩한 안동인의 선택을 다시 재확인한 필연의 과정이였으리라 유추합니다.
정통 성리학의 적장자인 퇴계의 학문은 가장 '민본적'이고 '민주적' 이념이었습니다. 맹자이래 정통 유학은 가장 진보적 학문이고 사상입니다.
그런 까닭에 퇴계의 학풍이 온전하게 계승되던 경북북부지방 학자들이 변화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안동은 전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보수로 대표되는 곳으로 인식되곤 하는데 그것은 일제식민사관의 잔재일 뿐이라는 점을 경고합니다.
실제로 안동은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며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곳이고 뛰어난 지도자를 배출한 곳으로서 가장 늦게까지 독립운동을 한 곳 일뿐 아니라 합방직후 가장 많은 순절자를 배출한 곳입니다.
일제에 의하여 가장 잔혹하게 파홰되 버린 흔적, 그것은 독립운동에 앞장선 석주 이상룡선생의 생가터 중심을 철로가 그 한가운데로 지나가는 모습을 볼때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1960년 7월 총선 때까지 가장 진보적 성향의 투표결과를 보이던 가장 진보적인 곳이었다. 이 땅에 바로 혁신유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혁신유림"은 가장 보수적인 유림이었지만 스스로가 보수를 뚫고 혁신으로 나아가며, 그 방법과 과정에 일부 차이는 있었지만 개화와 계몽운동에 앞장서고 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위대한 사상가이며 독립운동가들이었던 것입니다.
조국의 위기상황에 분연히 일어났고 시대의 흐름을 앞서가며 스스로를 개혁하여 조국 독립을 위하여 온 몸을 불살랐던 혁신유림. 이들을 지배하고 있던 사상은 유학이었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지 70년을 바라보는 지금도 이들 혁신유림과 그들이 견지했던 유교적 이념과 민족의식에 대한 평가는 올바로 내려지지 않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물론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북부지역에서 아직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민족의 자주.자립,독립사상의 뜨거운 불은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타고 있으며, 그 왕성하던 독립정신의 거대한 숨결마저 잠시라도 쉬지 않고 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민족반역과 권력에 아부하던 무리들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잣대로 안동지역을 보수주의의 소굴로 매도하려는 행동을 한다면 서슴치 않고 분연히 일어나 응어리진 분노를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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