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33
3월18일[사순 제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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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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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V7ySTpeKX4
(최광호 바실리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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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강렬한 빛과 은총으로 인해
성화(聖化)되고 의화(義化)됩니다!>
외적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판단할 때,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사이의 모습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를 통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잘 소개했습니다.
그는 강도짓이나 불의나 간음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일주일에 두번 단식했고 소득의 실일조를 꼬박꼬박 바쳤습니다. 세상에 이런 훌륭한 신앙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리사이의 탁월한 신앙생활은 절대로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그 정도로 철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린 결론은 꽤나 의외의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귀감이 되는 대단한 신앙인 바리사이를 칭찬하거나 격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런 특별한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복음 18장 14절)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외적으로 드러난 것보다도 마음을 중요시 여기시는 주님, 교만한 인간의 우월감과 자만심을 여지없이 깨트리시는 통쾌한 주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가 지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다 좋았지만 딱 한가지 치명적인 결함, 주님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결점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의 과도한 허영심과 교만함이었습니다.
바리사이가 지니고 있었던 과도한 선민의식, 우월의식, 자만심은 공들여 따놓은 점수를 다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주님으로부터 선택받았으며 총애를 받는 맏아들이라는 자의식이 지나쳤습니다.
신앙생활 안에서 정말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 물었을 때, 그것은 다름 아닌 겸손의 덕입니다. 그 겸손의 덕은 성전 안으로 들어갔던 또 다른 인물인 세리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얼마나 주님 앞에 비참하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비록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지만 언젠가 주님 자비에 힘입어 회개의 삶으로 나아가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안고 있었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성전으로 가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자비를 구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탈출구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강렬한 빛과 은총으로 인해 성화(聖化)되고 의화(義化)됩니다. 근본적인 속성상 우리 인간은 스스로 성화되거나 의화되기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오직 유일하게 거룩하신 분 하느님에 의해서 성화와 의화가 가능합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 말씀은 좁은 의미의 특별한 성소(聖召)를 살아가고 있는 봉헌생활자들에게는 아주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칭 하느님과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 성전 안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거듭 성찰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즉시 타성에 빠지기 쉽습니다. 거룩한 소명의식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나태한 직업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해보이나 내실이 부족한 속빈 강정같은 존재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무엇보다도 큰 어려움은 영적으로 극단적 결핍 상태 속에 살아갈 때조차도 외적으로는 거룩함을 가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외면이 아니라 내면, 형식이 아니라 내용을 중요시 여기시는 하느님 앞에 솔직한 우리의 내면 상태를 열어드려야겠습니다. 텅 비어버린 공허한 내면을 어떻게 채워나갈 수 있겠는지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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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gEIFLW8Zj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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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아첨을 구분하는 법>
1971년 12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동의 ‘대연각(大然閣) 호텔’에서 발생한 대한민국 최악의 화재 사고가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 사고들 중 하나이며 총 사망자가 200여명에 이릅니다. 사건 당일은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호텔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던 상태라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했고 사망 자 중에는 주한 대만 대사관 위셴룽(余先榮) 공사와 주한 튀르키예 대사관 무관 파질 유즈바시오글루 대령도 있었습니다.
이 화재는 카페에서 사용하던 프로판가스 통에서 누출된 가스가 폭발하면서 발생했습니다. 화재 발생 당시 호텔 내부에서는 안전규정을 위반하여 화재경보기나 스프링쿨러 등의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화재 발생 직후 호텔 내부로 연기와 불길이 빠르게 번져, 숙박 고객들은 탈출이 어렵게 되었고 옥상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어 문 앞에서만 2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일의 문제는 불 자체라기보다는 부실 공사 등으로 속이려 하는 자들의 아첨과 아부에 속아 넘어간 호텔 책임자들에게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칭찬과 접대에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아첨이었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자신과 이웃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됩니다.
참된 예배는 감사이지 아첨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께도 예배가 아닌 아첨을 드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아첨이었고 세리의 기도는 감사였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보기에는 바리사이가 훨씬 감사의 기도를 많이 드리는 듯 합니다. 세리처럼 죄를 짓지 않는 것에 감사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기도도 주님 때문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아서 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무언가 되는 존재처럼 여기며 자신을 들어 높이는 기도도 있습니다. 나를 죽여주었기 때문에 드리는 찬미가 진정한 감사요 예배입니다.
‘시간을 달리는 남자’란 TV 프로그램에 나와 정형돈 씨에게 젊은 시절 엄마를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한마디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의외로 덤덤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이거 진짜 잘 들어야 돼요. 길어! 마흔에 고혈압으로 크게 한 번 쓰러지십니다. 그리고 3년마다 고혈압으로 쓰러지시거든요? 그 중간 중간에 쓸개, 자궁, 맹장을 떼 냅니다. 이거 잘 생각을 하셔야 해요. 50대부터는 당뇨, 고혈압으로 고생하시고 60대에는 심근 경색으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하십니다. 60 중반부터는 인공 관절이라든지 관절쪽으로 수술을 많이 하시고. 70대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십니다. 이것을 다 견디실 수 있으시다면 ... 또 ... 저를 낳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 안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감사요 예배요 찬양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그분이 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신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분 아니면 구원은 물론이요, 지금 존재할 수도 없음을 아는 것이 감사입니다. 내 뱀 같은 자아를 당신 피로 죽여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이렇게 나의 압제로부터 나를 이기시고 구해주신 분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모세로 우리를 파라오로부터 당신 피 흘리심으로 구해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당신께 도움이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로 주님을 예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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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한국에 있을 때는 건강검진을 2년에 한번 받았습니다. 교구에서 사제들의 건강을 위해서 배려해 주었습니다. 혈액검사, 위 내시경, 안압검사, 치과검사, 청력검사, 체지방검사, 심전도검사, 소변검사, 장내시경검사가 있었습니다. 검사 결과는 1달 정도 있으면 나옵니다. 검사 결과를 아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병원에 내방하여서 의사 선생님과 상담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편으로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귀찮다는 핑계로 우편으로 결과를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상담하는 것도 좋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처럼 제 몸에도 그다지 좋지 않은 곳들이 있기 때문에 상담하러 가지 않곤 합니다. ‘지방간, 콜레스트롤, 요산, 혈압’은 약방의 감초처럼 위험의 경계에 있습니다. 뉴욕에 와서도 몇 번 혈액검사를 하였습니다. 다행히 크게 더 나빠지지는 않았습니다.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는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100점짜리 건강검진 성적표를 받는 것은 ‘희망사항’인 것 같습니다.
건강한 몸을 위해서 건강검진을 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건강한 정신을 위해서 건강검진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겉으로는 건강한 정신을 가졌다고 자부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정신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겉은 하려한 옷으로 단장했지만,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윤기가 나지만 그들의 마음은 교만으로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고 떠들었지만 자신들은 손끝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은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마라.” 그들은 단식을 하면서 단식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안식일의 계명을 지키면서 안식일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제물을 봉헌하면서 제물 봉헌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정신을 가졌던 사람들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굳이 찾아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갈망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그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과부의 헌금도 칭찬하셨습니다. 헌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헌금을 하는 정성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자캐오의 나눔도 칭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가진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눈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되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와 그 가족은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죄인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였습니다. 세리는 겸손 되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1년에 2번 판공성사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 대림판공성사를 마련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향, 몰약’을 가지고 예수님을 방문했던 것처럼 나눔, 희생, 자선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리기를 권면합니다. 성모님이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거룩함이 나의 삶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도록 권면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 사순판공성사를 마련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감사드립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수 있도록 결심합니다. 베로니카처럼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도록 결심합니다. 1년에 두 번 대림과 사순의 판공성사를 잘 준비하는 사람은 건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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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이다. 내가 먼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신학을 공부하여 교사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교만에 빠진 사람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말씀이다.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기도하러 간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하느님을 향하여 감사기도를 바친다고는 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찬사를 하느님 앞에 올리러 간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한다는 핑계로 허영에 빠져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면 단식이 그에게 무슨 득이 되며, 십일조를 바치면서 자랑하고 그것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남을 비난하고 단죄한다면 그 십일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바리사이는 계속 ‘나는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라고 칭찬하기에 바쁘다. 바리사이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교만을 늘어놓고 있다.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며 찬양의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숨어있는 사악한 자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감사 찬양을 드리는 바로 그때 우리를 덮치려고 사탄이 몸을 숨기고 있다. 바리사이에게 한 것처럼 행실로 우쭐거리게 하지 않고 다른 교만으로 우리를 취하게 할 것이다. 아마 아직도 자신의 행위로 우쭐거리게 하는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세리는 감히 눈도 들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기죽은 태도가 보이는 것 같다. 하느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온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 두려웠다. 우리는 그의 몸짓에서 자신의 악행을 책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리석은 바리사이는 뻔뻔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꼿꼿이 서서 제 자랑을 했지만, 세리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긴다. 자기 죄를 고백하고 의사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며 자비를 간청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주님께서는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4절) 바리사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교만하게 자기 자랑을 했고 세리는 겸손하게 자기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바리사이의 자선보다 세리의 고백을 더 기꺼워하신 것이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돌아간 것은 그가 겸손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의 교만한 기도는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고, 세리의 겸손한 기도는 더 큰 힘을 발휘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웃과 비교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보고 또 비교하며 따라야 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내가 남들만큼 선한가?"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 앞에 선한가?"이다. 즉 우리들의 선행이나 신앙생활이나 그 기준, 척도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생과 비교할 때는 우리도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할 것이다. 이 사순절이 우리에게 큰 은총의 기간이 될 수 있도록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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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이 전하는 비유에서 비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입니다. 그 예로 바리사이가 등장합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의로움을 추구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이런 생각을 잘 드러냅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본디 유다교에서는 속죄의 날에 단식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점차 율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더 열심히 종교 생활을 실천하려는 이들이 단식하는 횟수를 차츰 늘려 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 시대에 경건하다고 스스로 여기는 이들이 일주일에 두 번, 곧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하였습니다. 바리사이는 십일조에 관한 규정을 지키는 것도 철저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원에서 얻는 것들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바칠 정도였습니다(루카 11,42 참조). 기도 내용을 보면 바리사이는 하느님의 법을 열성적으로 따르는 모습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당시에 죄인으로 취급받던 계층이었으며, 그는 하느님 앞에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따름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차이는 ‘기준’입니다. 바리사이의 기준은 자신의 행실입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규정을 지키며 자랑스러워하는 바리사이의 기도 안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남들과 비교하며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 기준이 하느님입니다. 자신의 잘잘못을 떠나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그분의 구원을 청합니다. 자신의 행실만으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느님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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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수도회 故 유광수 신부님]
“오, 하느님이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는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신앙생활의 두 모델을 본다. 대부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두 부류 중의 하나 한 부류에 속한다. 즉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은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세리와 같은 모습의 신앙생활이다.
나는 과연 어느 부류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바리사이파의 모습인가? 아니면 세리의 모습인가?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자세가 잘 되어 있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의자에 앉은 자세가 나쁘면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오래 몇 년 동안을 지나고 나면 허리에 디스크가 올 수 있듯이 신앙생활의 토대가 되는 근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올바르게 발전할 수 없고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그럼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들은 똑같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며 또 기도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바리사이파의 기도 내용을 들어보면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즉 그는 강도 짓을 하지도 않고 불의를 저지르지도 않고 간음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즉 나쁜 짓은 하나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뿐인가?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기까지 하니까 신앙생활도 얼마나 열심히 한 사람인가! 하나도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다. 그의 말만 들으면 모두가 칭찬받을 일이며 본받을 만한 사람이다. 거기에 비해 세리는 너무나 초라하다. 세리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가 한 일이란 하나도 없다.
그저 죄인이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것밖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좋은 일을 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열심히 했다는 내용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저 죄인이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만 청한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세리를 칭찬하셨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판결을 내리셨다.
우리가 볼 때는 분명히 바리사이파가 더 훌륭했고 세리가 못 산 사람이었다. 아마 우리는 너도 가서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교회에 교무금이나 봉헌금을 많이 내고 교회에서 지키라고 한 것이나 열심히 지키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럼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바리사이파의 기도 내용을 잘 들어보면 하느님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결국, 바리사이파 기도의 모든 내용은 자신을 드러내는 기도였지 남을 위한 기도라거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바리사이파의 기도 내용을 들어보자. 그 사람의 기도 중심에는 항상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우선 기도를 시작하는 단어가 "제가"라고 나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모두 나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다른 사람들 즉 강도질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결국, 기도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고 자기는 그들과는 달리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 칭찬을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다 들추어내면서까지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하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는 잘 살았고 다른 모든 사람은 강도질, 불의를 저지르고 간음을 하는 나쁜 사람들이고 자기 혼자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바쳤다고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늘어놓고 있다. 스스로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다.
이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 내용에는 자기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정말로 감사드린다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한다든가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른 사람들은 업신여기고 자기 자신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말하고 있다.
한편 세리는 어떻게 기도하였는가? 그는 자신의 좋은 점을 늘어놓는 기도가 아니라 잘못을 청하고 있다. 그는 다른 이들을 비판한다거나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있다. 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많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너무나 못 살았기 때문에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세리는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 것이다. 그의 관심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적 생활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한 중앙에는 하느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자기"라는 나가 있고 세리의 한 중앙에는 자기가 아니라 한없이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이 계신다.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차이는 자기 삶의 한 중앙에 "자기"가 있는가? "하느님이 계신가?"의 차이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무엇을 하든 즉 기도하든, 좋은 일을 하든 항상 그것의 한 중앙에는 "자기"가 있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우상 숭배이다. 즉 자기라는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이다. 한편 세리는 자기가 아닌 하느님이 한 중앙에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하느님 중심으로 한다.
우리가 복음을 알아야 하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잘못된 나의 신앙생활이나 생활을 올바로 교정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그냥 살아간다면 자기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있고 잘못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바리사이파 사람도 자기가 잘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 즉 세리가 잘못 생활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느님 앞에 나와서 자기가 무척 잘한 것처럼 떳떳하게 기도하고 있다. "꼿꼿이 서서"라고 복음은 바리사이파의 자세를 정확하게 적었다. 즉 남이 보라는 뜻이다.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자기의 잘못을 알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고 그래서 감히 얼굴을 들지도 못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은 정확하다. 그리고 겉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라고 올바로 판단하신 것이다.
오늘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우리의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란 복음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발견하고 교정하는 것이다. 즉 오늘 복음을 보면서 나에게 바리사이 사람과 같은 신앙 자세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런 잘못된 신앙생활을 올바로 교정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분명히 복음을 보면서 나의 잘못을 알면서도 아무런 뉘우침이나 교정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것이며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신앙생활은 발전해야 하고 발전하려면 끊임없이 교정해가야 하며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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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내비게이션에서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하며 유턴하라는 말이 계속하여 들려옵니다. 자주 다녔던 길이고, 이 시간이면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방향은 차가 막혀 더 늦을 것 같아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러나 선택한 길도 이내 주차장처럼 막힙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르지 않은 것을 괜히 후회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면 쉽게 그 선택을 바꾸지 않습니다. 지금 잘살고 있다고,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느끼지 못하면 지금의 인생 방향도 되돌리지 않습니다.
지금의 선택에서 방향을 바꾸어 유턴하는 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세상의 가치로 삶을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어떤 기회에 자신의 삶이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고 하느님의 가치로, 예수님의 신념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 그래서 그 가치가 구원으로 이끄는 힘임을 믿는 것, 그것이 우리의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강도들이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 세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다고 자신하며 자신의 삶이 최선이라 자부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언제나 바른 판단과 행동만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오만이고 교만일 따름입니다. 하느님과 눈을 맞추고 예수님을 따르는 방향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회개의 시작은 먼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오만과 교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이제 회개를 시작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잘못을 인정합니다. 유턴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매 순간 하느님을 바라보며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회개의 출발선에 서려면 자신의 나약함과 죄스러움을 바라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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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부모님께서 친한 친구로부터 자녀에 대한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7살 때 스케이팅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1년이 지나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겨우 스케이트 날로 서 있을 뿐입니다. 결국 다른 운동을 시켰습니다. 이번에는 축구입니다. 그런데 공만 보면 피하기만 할 뿐, 신나게 달리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린이를 본다면 어떤 아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운동신경이 부족한 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성장해서 크로스컨트리 국가대표가 되었습니다. 단지 스케이트와 축구만 못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운동 종목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운동 중에서 두 종류의 운동을 잘하지 못한다고 운동신경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몇 가지의 모습만 보고서 ‘그가 틀렸다, 맞았다’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단 하나의 모습만 보고서 ‘그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서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하고, 또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단정 짓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외향적인 성격만 있지 않습니다.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 침묵 속에서 묵상하는 것을 너무나 즐깁니다. 이 모습을 보면 제게는 내향적인 성격도 분명히 있습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몇 개의 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세리를 향해 ‘죄인’이라면서 손가락질했습니다. 동족에게서 세금을 징수해서 당시에 점령국이었던 로마에 전해주던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 세리입니다. 당시 로마는 이 세리를 도급제로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일정액의 세금만 바치면 자기 멋대로 금액을 정해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도 묵인했습니다. 그래서 더 뭇 백성의 원성을 샀었지요. 그러나 그들이 모두 구원에서 제외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스스로 죄가 없다면서 이상한 감사 기도를 바치는 바리사이보다 자신을 낮추면서 죄인임을 고백하는 세리가 더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짓는 사람이 바로 겸손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모습은 자신을 낮추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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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은 그렇게>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분은 그렇게>
때론 아니 계신 듯
늘 함께 계시는
그분께서
스스로에게 취한
큰이들에게서
한걸음 물러가시고
당신만을 바라보는
작은이들에게
한걸음 다가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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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하느님을 잘 알자.>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지금까지 저는 하느님을 잘 아는 것이 대수는 아니라고 많이 말해왔습니다. 복음의 악령들도 주님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괴롭히려고 왔냐고, 그럴 것이면 제발 떠나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잘 알지만, 거부하고, 하느님 뜻을 잘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그런 앎은 오히려 아는 것이, 독이 될 수도 있기에 그 아는 것이 대수는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호세아서는 하느님을 알자고, 알려고 힘쓰자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은, 하느님을 잘 알려고 힘쓰자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면 하느님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잘못 알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잘못 알면 잘못 믿게 되고 시작부터 믿음이 잘못되겠지요.
복음을 보면 잘못 아는 것에 대한 예를 주님께서 몸소 들어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의 잘못된 하느님 이해입니다. 하느님을 모질고 심지도 않고 거두시는 분으로 그는 이해하잖습니까?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믿을 수 없고 두려워 피하기만 할 것입니다. 은총을 받기는커녕 벌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주님께서 또 드시는 예가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바리사이는 자기를 자랑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만, 더 큰 잘못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는 잘못입니다.
나쁜 짓은 하지 않고 교회 의무를 다하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더 큰 잘못은 하느님께서 그걸 좋아하실 거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정말로 바라시는 것은 겸손과 사랑입니다.
단식과 십일조가 아닙니다. 단식과 십일조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자기만족이나 자랑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자기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겸손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렇잖습니까? 자랑할 데가 없어서 하느님 앞에서 자랑합니까?
누가 자기 자랑이나 하러 제게 오면 저는 당장 쫓아낼 겁니다. 꼴불견이어서 쫓아내기도 하겠지만, 저를 사랑하거나 만나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저에게 자랑하고 인정받기 위해 온 것이기에 쫓아낼 것입니다.
이것을 하느님은 다 잘 아십니다. 하느님은 나를 샅샅이 다 아시고 내 속마음까지 아신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아심을 잘 알고 자기의 참모습도 아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겸손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것이 당신에게 바치는 십일조가 아니라 이웃 사랑이고
그러므로 이웃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십일조는 하느님 사랑의 십분의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십분의 일을 되돌리는 사랑이지요. 이는 부모에게 받은 사랑의 십분의 일만 되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로 하느님께서 미역국 끓여 드시겠습니까? 하느님께는 십일조가 필요치도 않고 그러니 그 십일조를 이웃에게 돌려주는 것을 더 원하실 겁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선물하는 것보다 형제간에 우애 있는 것, 다시 말해서 형제간에 경쟁하며 싸우지 않고 사랑하는 것, 이것을 모든 부모가 더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드리는 것, 그 사랑을 알기에 이제 형제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하느님을 알라고 호소하는 호세아서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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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몰라도 너무 모르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큰아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는 집안의 장남이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자식은 초등학교밖에 가르치지 못했음에도 큰아들은 대학까지 나올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바란 대로 큰아들은 높은 지위까지 올라갔고, 그래서 그런 자식이 부모는 아주 자랑스러웠습니다. 큰아들도 자기가 그렇게 된 것이 자랑스러웠고 부모 때문임을 알기에 부모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문제는 큰아들과 동생들과의 관계였습니다. 부모가 장남이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동생들을 끌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큰아들은 자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 동생들에게 미안해하기는커녕 같이 모이는 자리에서 동생들을 무식하다고 무시하거나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너무 으스대는 것이었습니다.
동생들은 그런 형이 꼴 보기가 싫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들과 비슷한 처지의 자기 자식들이 도시에서 형처럼 크는 형의 자식들과 비교되는 게 싫어서 명절이 되어도 부모님 뵈러 고향에 가지 않고 나중에 따로 갔습니다.
그러자 형은 자기 잘못은 생각지 않고 명절 때 고향에 오지 않는 동생들을 못된 놈들이라고 부모 앞에서 욕하고 자기만 효자인 양 자만하였습니다. 이런 큰아들이 부모님 보시기에 너무도 언짢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렇게 되라고 모든 것을 다 큰 아들에게 준 것이 아닌데.
오늘 주님께서 비유로 든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제가 이렇게 각색을 해봤습니다. 정말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는 자식이라면 부모 앞에서 다른 자식을 깔아뭉개고, 다른 자식보다 자기가 잘난 양 으스댈 수는 없습니다.
자기만 사랑치 않고 다른 자식도 사랑하는 부모에게 동생들에 대한 형의 비난은 너무 가슴 아프게 하는 짓이며 무엇보다도 자식에 대한 모든 것이 원죄인 부모에게는 왜 그렇게 낳고 그렇게 키웠냐는 비난이 되기에 해서는 안 될 짓입니다.
그렇습니다. 큰아들은 부모의 마음, 부모의 사랑을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만 사랑치 않고 모든 자식을 다 사랑하고, 자기만 잘되기를 바라지 않고 다른 자식도 잘되기를 바라며, 다른 자식이 잘되도록 장남이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교만한 사람이 보통 하는 짓이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모르고, 특히 하느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는 이렇게 우리를 설득합니다.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리고 비유의 바리사이처럼 스스로 자기만 의롭다고 하는 우리에게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하느님을 아는 예지이고, <자처하는 의로움>이 아니라 <신의>입니다. <자처하는 의로움>은 말로 치면 독백이며 심리학적으로는 심각한 자기애 증상입니다.
하느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며, 이웃은 안중에도 없는심각한 자기도취와 착각을 나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몰라도 너무 모르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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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기도와 회개의 은총>
- 겸손, 신의, 예지 -
역사는 반복되는 듯 합니다. 나라안팎의 현실을 대하노라면 블랙홀과도 같고 카오스와도 같이 아주 어지롭고 혼란스럽습니다. 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정반대의 견해니 참 분별하기 힘듭니다. 마치 무지의 블랙홀, 무지의 카오스같습니다. 오늘만의 현실이 아니라 예전에도 동서방 어느 나라나 늘 그랬습니다. 늘 위기였고 그때마다 통과해 왔습니다. 너무 비관적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해마다 특별 영적 훈련기간이자 회개와 정화의 시기인 교회의 사순시기가 참 고맙습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고 온전히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단 하나 참된 회개뿐입니다. 참된 기도에서 참된 회개요 참된 겸손입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바리사이는 무지한 사람의 전형입니다. 참으로 무지한 사람으로 참된 회개와 겸손이 절실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바리사이들입니다. 의로움은 자기의 행동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하느님만이 부여하시는 은혜입니다.
다음 바리사이의 기도를 통해 그의 삶과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기도했다니 이것은 대화의 기도가 아니라 독백입니다. 실감나는 바리사이 기도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기도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를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교만한 삶입니다. 순전히 자화자찬 자기자랑의 유치한 기도입니다. 말그대로 하나마나한 기도입니다. 기도하며 비교하며 판단하며 무시하니 판단의 죄, 무시의 죄를 짓습니다. 자기를 전혀 모르는 무지하고 교만한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참된 회개와 겸손의 정신이 전무합니다. 하느님을 향해 열린 기도가 아니라 완전히 자기 안에 닫힌 기도입니다. 과연 나의 기도는 바리사이를 닮지는 않았는지요. 다음 호세아서의 말씀이 그대로 바리사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에프라임라,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같다,”
아침 구름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같은 신의라 하니 전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는 완벽해 보여도 겸손과 회개의 정신이 전무한 바리사이의 기도와 삶입니다.
반면 바리사이와 너무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완전히 자기를 비운 세리의 가난하고 겸손한 기도입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합니다. 짧으니 진정성 가득한, 세리의 주님 자비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바로 우리가 바치는 자비송은 여기 근거합니다. 진정 가난하고 겸손한 영혼들이 마지막으로 바칠 수 있는 기도는 이 자비송 하나뿐일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가 여기 근거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로 호세아서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 바로 세리입니다. 우리 모두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가난하고 겸손한 세리가 되어 주님의 회개의 부르심에 지체없이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호세아서의 주님께 돌아가자는 회개의 촉구가 참 다정하고 위로가 됩니다. 얼마나 좋으시고 아름다운 주님이신지 회개를 통해 닮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역시 아름다운 전문을 인용합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사흘째 되는 날에 일으켜 살려 주신다니 회개한 이들에게 파스카의 삶을 선사하신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된 회개와 더불어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주님을 닮아가고 알게 됩니다. 회개할 때 봄비처럼 오시어 우리의 무딘 마음을 적시어 부드럽게 하시는 주님 사랑의 은총입니다. 그대로 회개의 기도를 바친 겸손한 세리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간 것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이니, 세리만이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말씀과 제1독서 호세아서 말씀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참된 회개를 통한 은총이 겸손임을 깨닫게 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교만으로 낮아지고 겸손으로 높아진다는 역설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참된 회개의 은총의 열매가 이런 겸손입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바로 호세아의 메시지를 집약하는 말입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겸손해질수록 하느님께서 바라시는바 신의요 당신을 아는 예지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의 사람은 바로 주님을 닮아 겸손한 사람이요, 신의와 예지의 사람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겸손의 사람, 신의의 사람, 예지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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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18,14)
<모든 덕의 으뜸인 겸손!>
오늘 복음(루카18,9-14)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서로가 서로를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서로가 앞 다투어서 낮아지려고 하고 겸손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천국)의 반대인 지옥은 이와 반대의 모습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겼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잘 지키고 있었다고 자부했던 그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바리사이가 바리사이답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18,11-12)
하지만 바리사이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8,13)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8,14)
좀 안다고, 좀 사랑을 실천했다고,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우쭐해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하느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우리는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모든 덕의 으뜸은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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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9wv3teub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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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 14)
머리로 판단하는
지식의 습득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기도는
정녕
아닙니다.
가르침의 실천이
동반한 기도가
참된 기도입니다.
사람의 행위는
그야말로
말보다 정직합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기도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바른 양심과
복음적 양식인
겸손과 사랑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바르게 바라보는
안목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오, 하느님!을
수 없이
부르는 것보다
나자신부터
공동체를 위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교도 신앙도
그것을 믿는
사람이
사악해지면
그 어떤 악취보다
고약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교만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입(口)을 열면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는
기도의
공동체이길
기도드립니다.
지난 시간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입과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의롭게 되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우리이길
기도드립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 14)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드리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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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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