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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님(이룻)의 자전 소설(自傳小說) '노을을 품고 흐르는 강'
제7편 1장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전쟁은 국군과 UN연합군이 두만강까지 치고 올라가
대한민국의 완전 통일을 내다보게 되었다. 그러나 잠시였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와
미 대통령 트루먼이 만주에 대한 폭격 여부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는 사이 중공군이 참전하였다.
북한의 조•중연합사령부의 전시작전권은
이때를 기해 중화인민군에게 넘어갔다.
그 여세는 연합군에 불리하게 작용하였고
전 전선에서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토의 전투로 인해 새해 벽두
서울은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러한 와중에도 아이들의 교육은 계속되었다.
설아도 우여곡절끝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지만
그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필주가 부역자의 신분으로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말이다.
한겨울 추위를 겪으면서도 옷을 가져올 생각도 못했다.
채광리 외갓집에서 불안하게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구차한 삶을 지탱하는 가운데서도
정 여인은 일만 할 뿐이였다.
찔레꽃 같기도 하면서도 참으로 무던한 여인이었다.
얕은 산으로 올라가 땔나무를 해오는가 하면,
들에나가 추수를 거둔 뒤 이삭을 줍기도 했다.
비록 친정집이었지만 한시도 편하게 지내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남편과 아들의 행방불명으로 인하여
불안해진 정서를 그렇게 일하는 것으로 풀고 있는 듯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친정에 신세지는 것을 가급적 피하기 위함이었다.
친정어머니는 면전의 그런 딸이 안타까웠지만
달리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자신은 이미 늙었고 많은 식구들의 살림은
큰며느리가 맡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설아네는 먹을 것이 늘 부족하여 나물죽을 끓이는 때가 많았으나
그나마도 밖에 나가 생사를 알 수 없는 두 식구를 생각하면
언제나 감지덕지할 뿐이었다.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새 봄이 왔다.
전쟁이 일어나고 두 해째가 되는 해였다.
설아와 엄마는 역류하는 전쟁에 던져진 채
자신도 다 모르는 사이 다람쥐처럼 한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전쟁은 중부전선에서 밀고 밀리던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을 맺었다.
전쟁을 종식시키는 종전선언인 평화협정이 아니고
전쟁을 잠시 중단하자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휴전협정인 것이다.
결국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한국전쟁은 만 3년 동안
엄청난 인명의 희생만을 남기고 남북의,
기존의 경계선은 전쟁 전의 삼팔선을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그렇다면 이 참혹한 민족 간의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우리 민족은 폐허와 다름없는 가난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뿐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이 민족상잔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익을 본 나라는 바로 전범국 일본이었다.
그들은 이차대전의 패전국으로 입은 손실은
옆 나라의 전쟁 덕으로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참화를 겪은 남과 북으로선
참으로 통분해마지 않을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 무렵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이필주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소문이 동네에 돌았다.
교도소였지만 살아 있다는 소식은 참으로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 여인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인민군 남침 시에 부역으로 엉키기 시작하여
국군 진격 시 산으로 피신했으니 인민군과 어울린 공비라는
죄목일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친가, 외가 쪽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서 손쓰려 하지 않았다.
조금만 빌미가 보이면 공산주의로 몰려 죽을지 살지 모르는
서릿발 같은 냉랭한 시기에
선뜻 이필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친척들이 더 몸을 사리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죄목이 어마하리라 예상되었기에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손을 써야 하는지를 모르는 처지였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정 여인조차 남편의 구명운동
방법을 몰라 우왕좌왕하였다.
제 7편 1장 '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끝
제 7편 2장 '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그런 정여인에게 동네사람들 중에는 아예 이필주가
사형당할 게 십중팔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웃에 사는 뻐드렁니에 떠버리 정순이 엄마는 위로해주는 척하며
은근히 엄마의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데 재미 들린 여자 같았다.
참으로 몰지각한 반응들이었다.
그런 중에도 몇몇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그것만도 천만다행이 아니냐며 정 여인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했다.
설아도 엄마에게서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다.
의논할 만한 상대가 없는 정 여인은
이제 열네 살 먹은 딸이 가장 큰 의지처가 되었다.
설아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해 봤지만 어린 자신에게 별달리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던 어느 날,설아는 주일학교에 다닐 때
하느님께 기도하던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설아는 틈만 있으면 기도했다.
깨끗해서 백지같이 순진한 어린아이의 뇌리에 박힌
신앙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철저한 신념이며 희망이었다.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시면 하느님이 시키는 일을 모두 할게요.
인호, 인용이를 놀리지도 않고
앞으로는 고집부리는 일 절대 하지 않을게요.
하느님, 우리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우리 아버지 성함은 이필주라고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어린것이 골방에 들어가 나오지도 않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본 정 여인은 든든한 지원군이
옆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만사가 잘 풀릴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설아는 울부짖었다.
길을 오고 갈 때는 야베스의 기도로 중무장하고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리라는 각오로 기도에 매달렸다.
“하느님 아버지, 당신을 믿고 의지합니다. 기도하면 무조건 들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 제 기도 소리 듣고 계신 거지요. 제 무릎이, 제 눈물이,
제 손 두 손바닥이 닳아 없어져도 좋습니다.
제 아버지만 살려주신다면 제 평생 주님을 믿는 일에 앞장서겠습니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오셔야 제가 학교에 갈 수도 있고
엄마와 동생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기도가 부족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고 제발 저를 돌아보아 주시어
저의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
설아의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는 일상이 되어 늘 하늘에 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 때 드디어 깜짝 놀랄만한 응답이 왔다.
어쩌면 주었다와 뺏겼다 식의 묘한 해석이
큰 역할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네사람들이 이필주의 구명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필주의 도움으로
인민군의 즉결재판에서 살아난 사람들 중 군청의 서기관이 있었다.
바로 그 사람이 나선 것이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면서 이필주가 살려낸 사람 중에
공직자로 복귀한 사람들과 연락을 취했다.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도 전개했다.
그 중에는 이필주가 이 노인의 초라한 장례를 모시고 났을 때
제 발로 찾아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던 그 사람도 끼어 있었다.
국군 실무자들을 찾아가 이필주가 어떻게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들의 목숨을 살렸는지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탄원했다.
서명에 참여한 사람 수는 면에서만도 천여 명이 넘었다.
서명은 남이 한다니까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평소의 이필주의 인품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거기에 군청이나 읍면 직원으로 일했다는 죄목으로 죽게 되었다
살아난 장본인이 나서니 오히려 감동을 받는 눈치였다.
그러한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이필주가
풀려날 가망은 요원하게만 보였다.
아버지 이 노인의 남로당 관련 전력과
산으로 도망간 아들 승우의 소재가 불분명한 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만약 승우가 살아 있다면 이필주가 필경 빨치산이나
공비가 되어 있을 아들과 내통하고 다닐지 모른다는 의문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충남 서천에는 설아의 당고모네가 살고 있었는데
당고모부가 경찰서에서 수사주임을 맡고 있었다.
이필주의 사람 됨됨이를 평소에 잘 알고 있던 당고무부는
기꺼이 대전으로 올라와 이필주의 보증을 서 주었다.
수사주임이 보증을 서자 법무당국은
그때서야 이필주의 석방할 빌미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이 이필주는 일시 집행유예로
목에 걸려 있던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집행정지가 아닌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음도
천만다행으로 여긴 이필주는 풀려나자마자 정 여인의 언니네가
살고 있는 충남 장항으로 급히 떠났다.
고향으로는 갈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동란 중에 쫓겼던 사실이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필주는 장항에서 큰동서의 도움으로
한 정미소에 일자리를 구했다.
제 7편 2장 '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끝
제 7편 3장 '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정미소의 일은 입에 풀칠할 정도의 수입뿐이었다.
이필주는 말빼기라는 동네에 우선 단칸방을 얻어
임시거처를 마련하였다.
정 여인은 설아의 작은집에 설아를 맡긴 후
동생만 데리고 장항으로 떠났다.
설아에게는 곧 데리러 오마며,작은엄마 말씀 잘 듣고 있으라고
했지만, 그 뒤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에게서 소식은 오지 않았다.
서럽고 배고프고 두려운 일상은 밤이면 설아를 숨죽여 울게 했다.
이필주가 석방되었다고는 하지만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혀 형사가 늘 주변을 감시하였다.
그 지방에서 어떤 사건이 터지면 이필주는
으레 대전경찰서까지 불려가 조사를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설아의 피란살이는 점점 더 이상하게 될 뿐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또래의 아이들은 나름 행복해 보이는데 설아는
고등 빨갱이의 자식이 되어 남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를 면할 길이 없었다.
설아는 그만큼 외롭고 서러웠다.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도 기를 펼 수 없는 눈치꾸러기 삶의 연속이었다.
작은아버지도 이필주와 함께 입산한 후 아직 돌아오지를 못했다.
작은어머니 혼자 딸 셋과 유복자 아들을 데리고 과수원을 하고 있었지만 살림은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큰집 조카딸인 설아에겐 왠지 언제나 냉랭하게 대했다.
“아니 네 어머니는 왜 한번 가더니 함흥차사라냐.”
설아를 향하여 그런 말을 곧잘 하였다.
사실 그 과수원은 이필주가 금융조합 재직시절에 사놓은 것으로
작은집에서 대리 경작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었다.
가을이 되니 떨어진 단감도 주워 먹고,
길가에 좌판을 만들어 팔기도 했지만
실제로 과수원 주인의 딸인 설아는
제대로 된 배 하나 먹어 볼 수가 없었다.
배를 따다가 소쿠리에 가득 담아 놓고서도
그것 하나 먹어보라는 소리 한번 안하는 작은엄마였다.
그땐 그 배가 왜 그리도 먹고 싶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그러나 설아는 그러한 서러움이나 배고픔보다는 어떻게 하면
엄마,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으며,
학교에 갈 수 있는지에만 골똘할 뿐이었다.
주변의 아이들은 대부분이 학교에 가고 있었다.
설아는 그럴수록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문구의 말이 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남의 집 애보는 식모밖에
더 되겠느냐는 데 생각이 미치면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설아는 논산 사는 고모네를 떠올렸다.
부창에서 양복점을 하면서 논산으로 이사를 가
자리 잡은 바로 그 고모였다.
생각을 굳히자 설아는 망설임 없이 논산을 향해 떠났다.
고모네 집에 도착하니 고모가 깜짝 놀라 반겨 주었다.
일준이도 몰라보게 잘 자라고 있었다.
고모와 오랜만에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고모가 보는 설아는
너무나 꼬챙이처럼 말라 있어서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저녁을 먹고 나자 설아는 고모부 내외가 있는 자리에서
무조건 논산에 있는 중학교에 가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 말을 들은 고모부는 설아를 논산에 있는 K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아이를 중학교에 넣으려니 여러 가지 걸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고모부가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 다음이 또 문제였다.
설아는 일주일가량을 교복도 없고
교과서도 준비하지 못한 채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 교복을 입고 오라고 채근하면 교복은 맞추었는데
아직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책은 외할머니가 곧 사주실 거라고 했다.
설아는 그런 후 일주일이 지나자 더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학교를 포기하고 말았다.
6·25 전쟁 후의 열악한 환경에서 여건이 구비된 아이들만
다니는 학교를 도저히 다닐 수가 없었다.
막내고모네 집에 얹혀사는 일도 어려웠기에 싫었지만
결국 작은 어머니 댁으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남은 것은 달랑 학생증 하나였다.
설아는 학생증이 행운을 가져다 줄 부적이기나 되는 것처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작은어머니는 그 뒤로도 변함없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사사건건 구박은 더해갔다.
한 번 담가도 될 김치를 너 때문에 두 번 담근다느니,
네가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쌀이 정신을 못차리게 줄어든다느니,
중학교는 아무나 다니느냐고 하면서
눈을 바로 뜨는 법이 없었다.
제 7편 3장 '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끝
제 7편 4장 '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학교는 고사하고 설아는 살아가는 일이 날로 치욕스럽고 기가 막혔다.
그놈의 전쟁이 뭐기에 이토록 우리 집을 망가뜨려 놓았단 말인가.
인민군은 뭐고 국군은 다 뭐 말라 비틀어진 거란 말이냐.
빨치산은 뭐고, 빨갱이는 또 뭔가,
낯짝에 빨간 칠이라도 한 도깨비를 빨갱이라고 하는가.
속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도 화가 나서 하느님을 불러보려고 해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분노를 품어서인지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용기가
어딘가에서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 장항으로 가자. 엄마에게 가는 거야.
거기 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는 다시 안 돌아온다.’
결심을 하자 이내 옷 몇 가지만을 보자기에 싸들고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설아는 길을 나섰다.
‘방법이 없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야.
만화책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어.’ 그런 말로 자신을 격려했다.
그런데 장항을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장항이란 어디에 붙어 있는 곳일까.
일단 큰 길가에 다다르자 마침 달려오는 트럭을 향하여
무조건 손을 들었다.
달려오던 트럭이 설아 앞에 와서 멈추고는 까닭을 물었다.
설아는 무조건 장항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운전사 아저씨는 장항에 가는 차가 아니고
부여까지 가는 길이니 거기까지는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설아는 아저씨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서둘러
운전석 옆자리에 올라탔다.
부여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장항 가까이는 되는 모양이라고 속으로 어림짐작하였다.
설아는 운전사에게 자신이 왜 꼭 장항에 가야 하는지를 말했다.
“엄마와 아버지가 일 때문에 장항에 사시는데요.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가는 길이에요.”
그러면서 애지중지하는 학생증을 운전기사에게 보여주었다.
운전사는
부모가 보고 싶어 찾아간다는 설아가 안 되었다 싶은 모양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서야 부여에 도착한 운전사 아저씨는
차비는 있느냐고 물었다.
설아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이를 낯선 길거리에 그냥 버려두고 갈 만큼
모질지 못했던 아저씨는 장항까지 데려다 주마고 했다.
설아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캄캄한 밤,
논길인지 밤길인지도 모를 길 같지도 않은 험한 길을 달려
트럭은 밤이 늦어서야 장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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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아는 아버지가 일한다는 정미소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운전사는 차를 몰면서 비슷한 정미소를 찾아
여러 곳을 수소문 했지만 찾지 못하고
한 정미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돌아 갔다.
하루밤을 쉬게 해준 정미소 주인은 이곳저곳을 다시 수소문한 끝에
드디어 아버지가 일하는 곳을 찾아 설아를 데려다 주었다.
설아는 두 아저씨를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고 머릿속에 새겼다.
뜻밖에 설아를 본 아버지와 엄마는 깜짝 놀랐다.
설아지는 자초지종을 말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무척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설아는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를 보니 우선 눈물이 났다.
설아는 아버지 팔에 안겨 엉엉 울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돌아왔는데 아직 행방불명 된
오빠를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났다.
아버지는 다소 초췌하고 핼쑥해져 있었다.
엄마와 동생과도 반가움에 얼싸안았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정미소에서 받는 품삯이래야 한 달에 고작 쌀 한 자루인데
한 달 끼니를 이어가기에도 턱없이 모자랐다.
어느 날 설아는 엄마가 동생에게 탄식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장에 나가서 쌀을 보리쌀로 바꿔다 먹는데도
네 언니가 오고 나니까 양식이 더 쪼이는구나.”
설아는 그 후 동생을 데리고 들에 나가 나물을 캐 왔고,
나물죽을 끓여서 어떡해서든 양식을 아껴 먹으려고 애썼다.
틈이 나면 산에 올라 땔감으로 쓰는 솔방울도 주워왔다.
그래도 작은어머니 댁에서 눈칫밥 먹을 때와는 다르게
살도 오르고 명랑해진 설아는 동생 보희를 살뜰히도 아꼈다.
아버지는 낮에는 일에 몰두하느라 잘 모르고 넘어가지만
밤이 되면 안타까울 정도로 끙끙 앓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지의 피난 생활과 생사를 모르는 자식 승우에 대한
그리움으로 토해내지 못하는 처절한 울분은 병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수시로 고문당한 자리가 쑤신다고 했다.
아버지는 속으로 참다가도 통증을 호소할 때가 많았다.
약국도 있고 병원도 있을 테지만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못 되었다.
제7편 4장 ' 1953년 휴전협정 , 학생증을 손에 쥐고' 끝
제7편 5장 '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그렇게 끙끙 앓다가도 대전에서 연락이 오면
얼굴이 노랗게 질리며 형사를 따라 조사받으러 가야 했다.
인내심이 바닥나면 그 다음은 죽지 못해 사는 법이었다.
이필주는 그렇게 죽지 못해 살고 있었다.
설아는 왜 엄마가 자기를 데리러 오지 못했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그간 엄마에 대한 섭섭한 마음은 저절로 사라지고 말았다.
장항에 온 지도 어언 달포가 흘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물을 캐고 솔방울을
모으면서도 머릿속은 어느새 다시 학교로만 달려가고 있었다.
이유 불문하고 학교에는 가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뭔가를 할 수 있다.
그 뭔가가 무엇인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절대 이대로
학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절박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설아는 급기야 또 한 번의 변화를 시도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래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학교에 가자!’
마음을 굳힌 순간 퇴근해 온 아버지 앞에
다짜고짜 꿇어앉아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저 중학교에 가면 안 될까요?”
이필주는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을 못 했는지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뜻하지 않은 전쟁을 겪으면서 생사의 기로를 헤매느라
자식의 교육은 챙기지 못했었다.
코앞의 문제에만 급급했지 미처 자식의 장래는
신경 써줄 겨를이 없었다.
이필주는 설아의 갑작스러운 부탁 앞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들은 마땅히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이필주였다.
하물며 제 자식임에랴!
한참 만에 이필주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중학교를 어떻게 간다는 말이냐?”
이 말에 설아의 머릿속에 서광이 떠올랐다.
그 말 속에는 ‘중학교에 갈 여건이 되면’이라는
단서가 들어 있는 말과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설아는 재빠르게 논산에서
K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받은 학생증을 꺼내 보였다.
중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설명했다.
이필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었구나. 아버지가 너에게 참으로 미안하다.
헌데 설아야, 아버지는 지금 자유로운 몸이 아니어서
학교에 찾아갈 입장이 못 된다.
그러니 정히 그러하다면 방법을 알려 줄 테니
네가 직접 학교에 찾아가서 알아보렴.
등록금은 어떡하든 아버지가 마련해보겠다.”
설아는 기뻤다.
다른 사람에 비해 신학문과 교육열이 남달랄던 아버지가
학교에 가겠다는 설아의 요청을 나 몰라 라 할 분이 아니었다.
절호의 기회를 얻은 설아는 절대로 흔들릴 수 없었다.
새로운 용기가 밀물져왔다.
다음날로 장항에 있는 중학교를 물어물어 잦아갔다.
교무실에 들어서니 아버지 나이대의 교감선생님이 면담을 해주었다.
설아는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교감선생님에게 지금까지의
피란생활과 현재의 가정 사정을 소상히 말하였다.
그리고 꼭 학교에 다녀야겠다고 애원하다시피
매달리면서 가지고 있던 학생증을 꺼내놓았다.
교감선생님은 이해심이 많고
학생을 깊이 사랑하는 진실한 교육자 같았다.
설아의 얘기를 들어보고 형편이 딱해 보였던지
아니면 향학열에 감동을 한 것인지 즉석에서
2학년에 편입학을 허락해주었다. 그것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설아의 친구들이 모두 3학년에 올라간 점을 감안하여
2학년으로 월반 편입을 허락한 것이었다.
교감 선생님의 배려에 용기백배한 설아는
이참에 동생 보희의 문제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날 보희를 데리고 집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로 갔다.
자신만 중학교에 다니면서
동생을 그대로 주저앉혀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초등학교에서도 교감선생님을 찾았다.
중학교 문제를 교감선생님과 풀었던 앞서의 경험이
곧바로 교감선생님을 찾아가면 된다로 이어졌다.
교감 선생님은 어린아이가 동생을 데리고 와
전학시켜달라는 청이 신통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교감 선생님은 전학 서류 한 가지도 구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동생의 편입학을 허락했다.
그렇게 하여 설아와 보희는 꿈에도
그리던 학교엘 다시 다니게 되었다.
집안사정은 여전히 말이 아니어서
아버지의 양복을 뜯어서 지은 교복을 입었고,
운동화는 헤진 곳을 기워서 분필가루를 칠하여 신고 다녔다.
제 7편 5장 '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끝
제7편 6장 '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구태여 지난날의 잘살던 일을 생각하며 슬퍼할 필요는 없었다.
형편 때문에 월반한 것이어서 밀린 공부 따라가는 일에
걱정이 없는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당당한 학생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니 한없이 기쁘고 가슴 뿌듯한 일이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학교생활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걱정 또한 많았다.
어쨌든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고 보니 오빠 승우에 대한
미안한 감정과 그리움은 설아의 가슴을 더욱더 아리게 만들었다.
왜 오빠에게 좀 더 잘하지 못했을까.
왜 오빠를 경쟁상대로만 보았단 말인가.
아니, 경쟁상대로 보기보다는 모든 어린양을 다 받아주었기에 오빠에게
기대어 못살게 차근댔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질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승우가 살 길을 찾아간다는 것이
오히려 더 깊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 일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냥 운명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날 이후 엄마는 이른 새벽이면 맑은 샘가 장독대 위에
정화수 퍼놓고 빌고 있었다.
어떤날은 그믐밤인데도 동네 야산 가시덤불을 헤치며
뭔가를 찾기도 하고..
그러다 땀에 흠뻑 젖어 새벽에 돌아오기도 했다.
설아는 그런 엄마가 조금은 낯설고 무서웠지만 그 그늘은 늘 따스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다 말고 먼 산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를
목격할 때라든가,
물레를 돌려 실을 만들 때 함께 울려나오는 한숨소리는
도란물 콸콸 내려가듯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승우가 사촌들과 산으로 피하게 된 까닭은
단순한 공포심에서였을 수 있다.
공포심은 사람의 온전한 사유와 분별력을 흐리게 만들다 보니
무모함으로 이어진다.
동네 어른들이라고는 모두 여자들뿐이었고,
배움이 없는 아낙네들은 군중심리에 휘말리기 십상이다.
자초지종을 따져보지도 않고 한 사람이 ‘공비가 무섭다더라.’ 하면
그 ‘무섭다.’가 다른 사람의 입으로 건너갈 때는
‘무차별 사람을 죽인 다더라.’로 둔갑을 한다.
그 다음 단계 심리의 저변에는 피하지 않고 변을 당하게 될
불운에 대한 막연하고도줄기찬 두려움이 다가와
마침내는 의식을 마비시키기에 이른다.
그렇게 공포에 휩쓸린 아이들과 승우는
사리 분별할 여지도 없이 입산을 감행했을 것이다.
더구나 할아버지가 당한 처참한 죽음과
아버지의 피신은 승우에게도 더더욱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입산만으로 소년공비라는 이름이 붙게 되고
일거에 상황의 희생자가 되어버렸다.
적어도 겨우 열네 살 먹은 아이들을 사상적으로 조금 문제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총살할 수 있을까 하는 점만 염두에 두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
세상의 이상스런 이치였다.
산이라는 곳은 밤이 일찍 오고, 평지와 달리 늘 추운 곳이다.
그래서 산에 익숙한 사람들도 밤과 추위를 두려워하여
해가 뉘엿뉘엿해지면 하던 일도 멈추고 서둘러 하산을 한다.
그러나 국군을 피해 산으로 간 사람들은 하산할 곳이 없다.
공산당이라는 체제는 조직 내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불순분자는 고발하게 마련인데
비조직원인 승우 일행을 감시하지 않을 리가 없다.
공비로 몰리면서도 공비가 아닌 사람으로
그 안에서마저 무엇 하나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아이라고 해도 먹을 것, 입을 것 이 부족한 속에서
뒤로 밀릴 일은 뻔한 노릇이었다.
오빠 승우는 그렇게 죽어갔을 것이다.
설아는 학교에 간다는 기쁨 중에도 그런 오빠로 인해
마음 한구석은 언제나 찢어지는 아픔 속에 있었다.
설아네 J중학교는 금강 하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학교였다.
밤이 되면 강가에 무리 지어 날고 있는 개똥벌레의 불빛이
찬란하게 꽃 무리를 이뤘고 강 건너 군산항에 켜놓은
불빛의 야경은 별빛처럼 영롱했다.
그리고 설아의 가슴에서도 드디어 꽃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사춘기를 맞은 것이다.
그런데 설아가 맞은 그 사춘기란 것이
몸은 사춘기였으나 정신세계는 겨울이 계속되고 있었다.
희망에 차서 다시 시작한 학교생활이긴 했다.
하지만 결석을 밥 먹듯 하다가 2학년으로 편입한 것이니
학업은 말 그대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영어 문장 아래 한글 발음을 써놓았다.
영어 선생이 설아를 지적하여 읽으라 하면
영어 대신 밑에 써놓은 한글을 읽어야 했다.
전쟁이 나기 전에는 모두의 귀염둥이로,
학교에서는 일등을 맡아 놓고 하던 설아가
지금은 수업 시간엔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전에는 선생님의 보호와 사랑 속에 여유가 있었으나
이젠 선생님들이 두려운 존재였다.
제발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말고,
수업시간에 발표를 시키지 말고 비켜가기만 빌게 되었다.
차츰 기가 꺾이더니 결국 완전히 꺾여버렸다.
제7편 6장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끝
제7편 7장 '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설아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성격도 외향적이던 것이 내성적으로 변해가면서 속상하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털어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자연 설아의 일기는 날마다 길어졌다.
일기지만 글쓰기가 되어 언제인가부터는 유일한 기쁨이 되었다.
공부하는 일도 어려운데 설상가상으로 상급생들이 드세서
학교 오가는 길에서 깍듯이 인사해야 한다는 사실이
설아에겐 지독한 곤욕이었다.
그런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고 있었던지
설아는 상급생들의 표적이 되어버렸다.
가사 선생님 딸인 상급생은 인사 안 한다고 머리채를 낚아채기도 해서
사생결단으로 싸움을 한 적이 있었고
걸핏하면 하굣길에 상급생 언니들은 길에 금을 긋고 넘어오면
때린다고 하여 집에 오지도 못하고 한 시간 남짓 바닥에 앉아
울고 있을 때도 다반사였다.
설아는 자연 학교보다 교회에서 위안거리를 찾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부흥회가 자주 열렸다.
부흥회가 있는 날은 낮에는 학교에 가고,
밤에는 교회에 나가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부흥사 중에는 말도 잘하고 졸리지 않게 설교하는 분들이 많았다.
설아는 처음 보는 부흥사들에게 호기심이 일면서 흥미를 느꼈다.
열심히 설교를 듣고 찬송가도 목이 터져라 불렀다.
그간 속으로 쌓여있던 서러운 일상들이
찬송가로 봇물처럼 터져 나왔던 것이다.
남들이 하듯이 박수도 팔이 아프게 쳐댔다.
그것이 무슨 대단한 신앙심에서였다기보다는
학교에서 받은 심리적인 울분을 해소하는 수단으로는 제격이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학교생활의 시간이 흘렀다.
설아는 영어, 수학만 제외하고 그런대로
다른 아이들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러자 설아는 조금씩 공부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고,
본래의 자신감도 되찾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지도하는 반사가 되었다.
설아의 학교생활과 교회생활은 차차 안정 되어갔다.
정서와 생활이 안정되어간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설아는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모처럼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니 저절로 아침에 일어나면 기분이 상쾌하고,
자기를 버리고 떠났던 것들이 돌아와
포근히 감싸주는듯한 희열에 젖게 되는 것이다.
겨울이 다 가고 새 봄이 오고 있는 중이었다.
설아의 몸에서도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여자의 몸이 봄을 맞는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이며 축복이었다.
비록 일 년은 늦었지만 설아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생각의 줄기를 따라
몸 속 어디에선가 무지개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연초록 새싹들이 스스럼없이 돋아 오르고
한 떨기 홍매화가 붉은 꽃잎을 흩날리기도 했다.
모든 사물이 아름답게 보임은 물론 공연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제 7편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끝
곧 이어 제8편 ' 움트는 봄기운'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진:이정님(이룻)님 작가
2018년2월3일(주일)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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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8월27일(금)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카페지기
베드로 문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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