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9일 사순
제1주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태오 4,1-1)
Jesus said to
him, “Get away, Satan! It is written: The Lord, your God, shall you worship and him alone shall you
se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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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창세기는 사람의 창조와 원조들의 죄에 대하여 알려 준다.
여자는 뱀의 유혹에 빠져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를 따 먹고 남편에게도 준다.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하느님께서 이르셨던
그 열매이다. 아담과 하와는 알몸임을 깨닫고 자기들의 몸을 가린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죄가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왔고 또한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은혜가 충만히 내리고 모두가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는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빵에 대한 유혹, 하느님을 떠보려는 유혹, 세상의 권세에
대한 유혹을 모두 물리치시자 악마는 떠나간다(복음).
☆☆☆
오늘의
묵상
소비 사회를 사는 즐거움의 하나를 말하자면 무엇보다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이겠습니다. 여행지를 선택하는 데나 상품을 사는 데 요즘처럼 선택의 여지가 많은 적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선택의
폭은 처음에는 행복감을 주지만 자칫하면 오히려 삶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이 이른바 '선택의 역설'입니다. '행복'을 다룬 최근의 여러 책을 보면, 이러한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한 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겪는 커다란 어려움과 불만족의 큰 이유를 설명하곤 합니다. 스위스 출신의 유명한 경영인이자 문학가인 롤프
도벨리는 그의 책 『스마트한 생각들』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렇게 비교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요구르트는 세 종류, 텔레비전
채널은 세 개, 교회는 두 군데, 치즈는 두 종류(신선하거나 혹은 부드럽거나), 생선은 송어 한 종류, 전화기는 스위스 우편국에서 연결해 주는
한 종류가 전부였다. 다이얼이 부착된 검은 전화 상자는 전화를 할 때 외에는 쓸 수 있는 기능이 없었으며, 그 당시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휴대 전화 가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수많은 종류의 휴대 전화 모델들과 전화 요금제라는 홍수에 빠져 익사할 지경이다."
선택의 역설 앞에서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은 이중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너무 많다 보니 선택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선택한 뒤에도 그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선택한 것에 기웃거리며 선망과 질시, 또는 우월감 같은 건강하지 못한 감정에 시달리게 됩니다.
결국 다양한 상품들 속에서 사람들은 삶의 자연스러운 기쁨보다는 신경증을 얻을 뿐입니다. 선택의 역설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삶의
본질적인 것에 뿌리내릴 때 비로소 그 외의 다양한 것들을 행복한 삶을 위하여 지혜롭게 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유혹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마음속에 늘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비 사회 속에서 신기루 같은 이루 셀 수조차 없이 많고
끊임없이 증식되는 욕망의 대상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결코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듯이, 가장 중요한
기준인 주님과 복음에 뿌리내린 삶을 먼저 선택하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유 혹
-박진우
신부-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이 되면
신학교에서 아침을 주지 않는다. 금식이기에 우유 하나가
전부 였다. 점심때까지
기다리기엔 배가 너무 고파 살짝
간식이라도 먹어 볼까, 아니면 그냥 참아? 하 면서 순간 고민을 했었다. 그래도 오늘은 안
되지…하면서 참았던 기억이 난다. 한
끼 굶는 것이 사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아침을 거른 후 점심은
특별한(?) 맛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사제로 살면서 간간이 신자들의 눈을
의식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나도 모르 게 나의
마음속에 그들의 눈이 하나둘씩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은근히 기대하는
것 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이야기 들이다.
솔직히 말하면 인정받고 싶다 는
것이다. 무엇인가 본당의 일을 하고 나서 잘했다고, 잘한다고 잘산다고… 사실 그것이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렴풋하게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싶다는 욕망이
나의 맘속에 도사리고 있다. 그리 고 또 하나 인정받으면서 동시에 칭찬받고
싶은욕망도 있는
듯하다.
본당에서 지내다 보면 나름의 한계의 벽에
부딪힐 때가 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다른 누군가 에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떠넘기고 나 자신에게 독백한다. ‘이건 어쩔 수 없어’, ‘나는
할 만큼 했어’, ‘더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이만하면
잘 한거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포 기를 해버린다. 그리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오늘 예수님은 사십일 동안 단식하시며
마귀의빵에 대한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예수님을 손으로
떠받치며 그들에게 찬미와 찬양을 받을수 있는 유혹을 받으셨다. 그리고 마귀에게
이제 그만 굴복하라는 유혹도
받으셨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셨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 앞에 무 릎 꿇고 두 손을 모으는 이유도 이
때문이겠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향해가는 사순
시기에 접어들었다. 우린 얼마나 많이
배고픔의 인간 적인 갈망에
사로잡혀 사는가. 우리는 얼마나 많이
사람들을 의식해 인정받고 칭찬도 받고 싶어 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많이 쉽게 굴복하고
포기하고 살아가는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러한 유혹들을
우리 스스로 직면하고 부딪혀야 하는
시간이다. 치열하게 부딪혀 보시길.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서공석신부-
오늘은 사순(四旬) 시기의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전 40일 동안을 교회는 사순 시기라 부르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특별히 기억합니다. 사순
시기는 교회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은 4세기부터 시작된 관행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태초에 인간이 유혹에 빠졌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고,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창세기와 복음서가
전하는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물론 아니고, 인간이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 다채롭게 꾸며진
이야기들입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이 베푸신
인간의 생명이고 또한 세상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불행이 있는 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선(善)과 악(惡)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그 사실을 말하기 위해 인간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는 유혹에
빠졌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인간은 그것이 ‘먹음직하고 탐스럽고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먹었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무엇이라도 자기에게 이로울 것 같으면, 해버리는 비극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모든 것을 그에게
허용하셨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 안에 두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자기를 중심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고 창세기는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여 행동하면서, 하느님과 동료 인간 앞에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받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유혹하는 자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은 ‘탐스럽고 자기를 영리하게 해 주는’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를 따르게 하라는 유혹입니다. 먹고 사는 데에 큰 도움을 주는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그들로부터
환영받는 인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거절하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지, 먹고 사는 데에 도움이 되자고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두
번째의 유혹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신앙인들이 쉽게 받는 유혹입니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소문을
내면, 사람들은 많이 몰려듭니다. 가톨릭교회 안에도 교회 밖에도 그런 현상들은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기적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기적을 해 보라는 유혹도 거절하십니다.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 6,16)는 구약성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거절하십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이 우리의 생활공간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 공간이 주는 제약을 넘어서 마음대로 살기 위해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지니지 못한 초능력을 얻어서 더 뽐내며 살겠다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그들과 더불어 삽니다.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하셔서 신앙인은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삽니다.
오늘 예수님이 받으신 세 번째의
유혹은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모든 사람이 누리고 싶은 부귀영화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도 한 마디로 거절하십니다.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이사야서(42,11)의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하고, 하느님을
이용하여 초능력을 발휘하며, 하느님을 이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의식주는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약속된 부귀영화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살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주변의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생각합니다. 형제자매 앞에서 인간은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그들을 압도하지 않습니다. 형제자매는 우리가 위해주고
도와주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탐스럽고 우리를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형제자매는 우리의
경쟁상대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빠지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겪으셨다는 유혹은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겪는 것들입니다. 재물을 탐하고, 남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초능력을 탐하고, 부귀영화를 꿈꾸는 우리들입니다. 성서가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유혹들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고자 하는 사람이 가지는 마음입니다. 빵만 탐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궁리만 하고, 부귀영화만 쫓아가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 안에 둔 사람이 찾는 것들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야기 다음에 즉시 유혹의 이야기를 합니다. 신앙인은 재물이나 기적이나 부귀영화에 마음을 빼앗겨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것을 얻어내기 위한 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자기의 환상을 실현하려 하지
않고,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인 형제자매를 섬깁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이라고 복음은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광야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삶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 감수할 수밖에 없는 각종 실패와 병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독 등은 우리가 겪는
광야입니다. 우리가 의지하여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사라진 상실(喪失)의 순간들입니다. 광야에서 40일을 단식하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에게도 우리가 기진하여 허덕이는 광야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때에도 빵과 기적과 부귀영화를 꿈꾸지 않고, 하느님을 택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는 그분이 선하고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물,
능력, 부귀영화도 언젠가는 결정적으로 버리고 하느님에게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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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서점 야곱의 우물
오늘의 복음묵상
http://www.pauline.or.kr/jacob01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의 가장 약한 부분을 통해 찾아오는 유혹 앞에서 당신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알리는 광야에서의 유혹 이야기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화해’ 이야기다. 순종치
않았던 아담과는 달리 배고픔도, 세속적 욕심도 모두 물리치고 하느님과 온전히 화해하고자 한 예수님의 이야기다.
문제는 화해의
자리가 영 마뜩잖다는 것이다. 광야가 그 자리인 까닭이다. 구약 전통에 광야는 악마의 활동이 왕성한 곳으로 그려진다. “사막의 짐승들이 그곳에
깃들이고 그들의 집들은 부엉이로 우글거리리라. 타조들이 그곳에서 살고 염소 귀신들이 그곳에서 춤추며 놀리라”(이사 13,21). 복음서 또한
악마를 이 광야에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광야는 또 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 척박하고 고생스런 광야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너희는 마치 사람이 자기 아들을 단련시키듯,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단련시키신다는 것을 마음 깊이 알아두어야 한다”(신명
8,5). 광야에서의 단련은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신뢰 관계를 회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그리 확실한 신뢰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모세를
거슬러, 하느님을 거슬러 물이 없다, 먹을 게 없다 하며 자유와 해방의 여정에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던 이스라엘이었다. 채찍을 들어 아비가
아들을 꾸짖듯 하느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은혜로운 길로 자꾸만 이끌고자 했었다. 그것이 광야에서의 사십 년이었다.
예수께서 이러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받으신다는 사실은 지난날 이스라엘이 겪었던 삶의 궤적과 같은 처지에 놓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달랐다. 사랑받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기꺼이 하느님을 증거하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는 모습을 광야에서 보여주신다. 유혹자가 돌들이 빵이 되게 하라며 시장하신 예수님을 다그칠
때, 예수께서는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되뇌신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빵이 필요한데 말씀으로 이끄신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신명기의 정신, 곧 온 존재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그 가르침을 떠올리며(신명
6,4-5), 예수님의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과 신뢰에 감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돌은 돌이어야
한다는 사실, 빵은 빵이고 말씀은 말씀이라는 사실을 곰곰이 곱씹어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시장기를 다른 무엇을 희생시켜 채우려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돌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 존재 자체를 건드리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나한테 부족한 것을
너에 대한 억압과 착취로 채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빵이 필요한 것은 나의 관점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관점을 훌쩍 뛰어넘으신다. 필요를 뛰어넘어
‘다른 존재’, 곧 하느님께로 향한다. 말씀을 언급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말씀은 율법이고, 율법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도구다.
나의 필요를 넘어 너와의 만남을 지향하는 것이 예수께서 유혹자에게 던져놓은 말이 된다. 유혹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예수님더러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그러면 천사들이 예수님을 받쳐주리라고 단정지으며 예수님을 몰아세운다. 천사들이 받쳐줄 것이라는 내용은 시편 91편에 나타나는데,
유혹자는 시편의 앞뒤 맥락은 다 끊어버린 채 ‘천사가 받쳐줄 것이다.’라는 부분만 인용한다. 시편 91편은 하느님과의 신뢰 관계를 주제로 삼고
있다. 전적인 신뢰 안에 머무는 이를 주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발 하나 다치지 않도록 받쳐주신다는 얘기다. 그런데 유혹자는 이러한 앞뒤 맥락을
무시한다. 오직 ‘내가 누릴 그 무엇’에만 관심이 있다. 예수 홀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달라고 유혹자는 요구하고 있다.
이에 예수님의 대답은 다시 한
번 ‘관계’의 문제로 이야기의 흐름을 되돌린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시험하며 불순종의
행태를 여러 차례 드러냈었다. 마싸에서 마실 물을 두고 주님을 시험했던 이스라엘 백성이었다(탈출 17,2; 신명 6,16). 내가 목마르니 너는
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에 대한 ‘시험’이었다. 그저 내가 필요하고 원하니 내놓으라는 것은 ‘강도의 논리’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유혹자는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유혹한다.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이 예수께 돌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유혹자는 자신에게 경배하는 것으로
제안한다. 예수께서는 단호히 거절하신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신명기 6장 13절의 내용이자, 성경 전체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은 힘의 논리를 통해 지배될지 모르나,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보는 경배와 섬김은 하나의 신앙적 숭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경배한다’는 그리스 말 ‘프로스퀴네오’는 어떤 신적인 힘에 오로지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를 갖고 있고, ‘섬긴다’는 ‘라트레우오 ’는
종교적 예식의 행위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하느님만을 신뢰하고 그분께만 전적인 신앙을 보여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보면 그 옛날
태곳적 인간의 본래 모습으로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느님 말씀으로 피조물과 조화롭게 살아갔던 인간,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으셨던 그
순간으로의 회복 말이다. 뱀이라는 유혹자가 들어와 그 조화를 깨뜨려 버린 것을 예수께서는 지금 당신 스스로 그 유혹의 시련을 겪으며 다시
회복시켜 놓고 계시는 것이다.
묵상(Meditatio)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 주간에 우리는 각자의 삶을 그리고 그 삶의 자리를 챙겨보아야 한다. 행여 내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무는 존재로서 조화를 잃은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옹기장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빚어주신 노고에 응답하는 게
우리 삶의 태도여야 한다. 예수께서 당신 목숨을 내어 바치는 순종을 통해 우리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우리 삶을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늘
유혹받고 단련받는 삶의 자리가 광야이고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나만 있는 세상이 아니라, 너도 있고, 우리도 있고,
그래서 세상이 하느님으로 인해 빚어졌음을 깨닫는 데서 가능한 일이다. 너를 생각 않은 채 나만의 생각과 의향을 강조하는 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유혹하는 자의 논리이자 행동일 뿐임을 깨닫는 사순절이길 기도한다.
기도(Oratio) 주님, 저 말고도 제 이웃이 있음을, 그 이웃들 중에는
아프고 힘겹고 그래서 울고 있는 이들이 있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제 삶이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게 하소서. 아멘.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앵무새 신앙 -박용식신부- 몸으로 실행하지는 않으면서 입으로만 외치는 사람을 앵무새에 비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고 말씀하심으로써 앵무새처럼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행동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아주 못 생긴 아가씨가 길을 걷고 있는데 한 상점에서 앵무새가 불렀습니다. "이봐, 아가씨! 진짜 못생겼다."
못 생긴 아가씨는 화가 났지만 참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다음날 다시 그 상점을 지나치는데 앵무새가 또 소리쳤습니다? "이봐, 아가씨! 진짜 못 생겼네."
못 생긴 아가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상점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항의했습니다. 상점 주인은 사과를 하며 다시는 그렇지 않도록 조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그 아가씨에게 앵무새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말 안 해도 알지?"
사실 앵무새는 말을 실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말뜻조차 모릅니다. 앵무새처럼 뜻도 모르면서, 또는 뜻은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신자들이 바로 '주님, 주님' 외치면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쌍한 '앵무새 신자'들일 것입니다.
스테파노씨는 성당에서 모범신자로 인정받아 각종 봉사직을 두루 거쳐 지금은 연령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수산나와 자녀들은 오래 전부터 냉담해 성당에 나오지 않습니다. 남편이 성당이나 동네에서는 훌륭한 사람일지 몰라도 가정에서는 낙제 점수, 아니 빵점이라는 겁니다. 아내에게 표독하고, 부모에게 불효하며, 자식들하고도 원수처럼 지내는 남편에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났다"며 신앙을 버린 겁니다. '주님, 주님' 외치기만 했지, 가정에서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잘못된 신앙생활 때문입니다. 스테파노씨야말로 앵무새 신앙인으로서 무늬만 신자일 뿐 진짜 신자가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 부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나쁜 사람,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는 하지만 남을 해치지는 않는 보통 사람,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이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 보통 사람을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걸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아직은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참 신앙인은 못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세상의 이런 기준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을 부르면서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단순히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도움으로써 하느님 뜻을 실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법을 잘 지키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기도도 잘 하고, 봉사도 잘 하고, 주일에 성당에 잘 나오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기본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을 돕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몸과 시간, 재물 등 가진 것 모두를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사용할 때 비로소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것이겠지요. 비포장 시골길에서 승객을 태우고 가던 버스가 고장이 나서 멈췄는데 아무리 시동을 다시 걸어봐도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승객 30여 명이 내려서 버스를 밀어보지만 10명만 힘껏 밀고, 10명은 미는 척 손만 갖다 대고 있고, 나머지 10명은 뒷짐을 지고 서서 '영차, 영차'하고 입으로 소리만 질렀습니다. 버스는 다시 시동이 걸려 운행을 했지만, 버스가 다시 시동 걸려 움직이도록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은 10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 20명은 말로만 또는 미는 시늉만 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본당이나 사회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10명에 속합니까? 힘껏 밀어 시동이 걸리게 한 10명에 속합니까? 아니면 뒤에 서서 입으로만 '영차, 영차'하고 외치는 사람에 속합니까? 말로만, 입으로만 '주님, 주님'하는 앵무새 신자가 되지 맙시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 -최인각 신부- 하느님 나라 가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 나라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단지 입으로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바라시는 당신의 뜻을 실천해야 함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 날에 많은 이들이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하더라도,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라고 선언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어 세상에 파견하시며 '가서, 만민을 제자로 삼아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아픈 이들을 고쳐주는 기적을 행하라.'라고 하셨는데,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많은 일을 한 이들에게 왜 '불법을 일삼는 자들'이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파견 받은 이들(제자들)이 파견한 이(예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파견한 이를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主客顚倒]. 이처럼 본래의 뜻이나 정신을 잊어버리고 주객이 전도되는 일들이 우리의 일상에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특별히 무지와 권력이 야합하여 일이 진행될 때,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불법을 일삼는 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협조자이지, 하느님이 나의 협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아버지를 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나 자신을 그분의 도구로 내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분과 분수를 지킬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많은 일을 행하려고 애쓰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쉬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고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지만, 정작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식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식별력이 부족할 때,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관철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식별을 위한 최고의 방법은 말씀을 읽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어리석은 사람이 행하는 것이 되어 모두 무너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든든한 반석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삶은 아무리 거센 풍랑이 밀려와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의 슬기로운 자의 집인지, 아니면 완전히 무너질 어리석은 자의 집인지를 잘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 하느님의 뜻이나 모두의 이익보다는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들과 이에 동조하여 작은 이득이라도 얻어 보려고 애쓰는 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중동과 그 이외 지역의 독재자들과 그 집단이 저지르는 부정과 비리와 불의, 비민주적인 장기집권, 부정축재와 이에 대항하는 국민에 대한 무차별 공격은 정말로 '불법을 일삼는 자들의 행동'입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픔과 어둠을 넘어 한 생애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온 인류에 큰 희망과 사랑을 전해주었던 이들이 있어 한편으로 위로가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마더 데레사, 김수환 추기경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는 작은 성인들이 있어 한편으로 마음이 흐뭇합니다. 그분들은 정말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반석 위에 빛나는 집을 지어 바친 위대한 거인들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누군가로부터 흐뭇한 사람, 슬기로운 사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다시금 다짐하며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용기와 희망을 달라고!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유혹은 내 집착의 그림자 -권철호신부- 무릇 삶이란 살아 있을 때 향기를 간직하고 삶이 다한 자리에 울림으로 자리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봄기운 한가득 아지랑이 피어나는 그 길가에서 삶의 향기를 간직하기 위해 오늘도 숱한 떨림 속에 자리하는 삶이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그 떨림만큼 울림을 간직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언젠가 선배 신부님께서 기도란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 대해 많은 말들을 들었지만 유독 마음속에 와 닿았던 것은 내 집착의 드러남이 유혹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집착하지도 않는 것에 유혹당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유혹이란 내 집착하는 것의 드러남이고 기도는 그래서 나에게 다가올 유혹의 실체를 확인하게하는 작업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광야를 향해 나아갑니다. 황량한 모래 언덕만이 자리한 그곳은 간혹 보이는 산조차 산이라 말하기 어색한 흙과 돌로 이루어진 언덕 같은 곳이었을 뿐입니다. 우리네 산이 철따라 옷을 갈아입어 사람의 눈길을 끌어당긴다면 이스라엘 광야는 맨몸, 맨살을 속절없이 내보이는 통에 보는 이가 오히려 난처해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자연의 풍요로움에 마음의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라, 입고 있던 옷조차 벗어 덮어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광야는 빛의 색감이 그 어디보다 묘한 여운을 남기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시시각각 태양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음영이 드러나는 것이 마치 하느님 의 햇살에 의지해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광야를 찾으신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였을 겁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삶, 인간이 자신을 가리고자 입은 온갖 옷들을 벗어 던진 채 오직 하느님의 손길로만 자신을 치장하고자 하는 열정이 살아 숨 쉬는 곳이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이란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이 입고 있는 위선과 거짓, 탐욕의 실체를 유혹의 그림자를 통해 확인해 보는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단한 것 같지만 한 끼만 굶어도 속절없이 무너지는 나약함을 마주해야 하는 곳, 채워질 수 없는 탐욕의 창고와 결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욕망의 깊이를 위해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 사순절입니다. 하느님의 따사로운 햇살 한 조각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삶이었는데, 어찌하다 이렇게 덧씌워진 욕망들의 두터운 옷들에 의지하며 살아야 했는지 되돌이켜 보는 시간이 사순절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순절이 은총의 시간일 수 있음은 하느님으로만 지탱되어지고자 하는 우리의 간절함이 자리하기 때문이고, 단지 고통과 고난으로 초대된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천사를 시켜 손수 시중들기 위해 초대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에게 광야가 그러했듯이….__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반명순 수녀-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결단으로 나갈 굳센 믿음을 더해 주소서 !
세밀한 독서 (Lectio) 절제와 희생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수난과 죽음은 고통과 절망을 불러오며, 그것 자체로 어두움이고 메마른 광야와 사막이 되어 우리 내면에 펼쳐집니다. 그러나 광야는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을 불러옵니다. (묵시 21, 1 참조)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로 광야” (마태 4, 1) 에 나가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당신의 신원과 직무에 공적인 확신을 불러왔습니다. 성령은 ‘광야’ 라는 거칠고 황량하며 고독한 장소로 예수님을 인도하며 ‘하느님 아들’ 로서 직무를 어떻게 수행해 갈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간의 광야생활에서 유혹을 받았듯이 예수님께서도 “사십 일간 밤낮으로 단식” (2절) 을 하신 다음 악마의 유혹을 받습니다. 악마는 하느님 뜻을 거슬러 세상을 따르도록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는 “유혹자” (3ㄱ절) 입니다. 유혹자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계시된 말씀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3, 17; 4, 3. 6), 돌들에게 빵이 되게 하라고,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져보라고 합니다. 빵은 생명 보존을 위한 생활필수품입니다. 악마는 예수님께 현세의 목적을 위해 메시아의 영적 능력을 이용하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 유혹은 예수님만 받았던 것이 아닙니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끊임없이 받는 유혹입니다. 거룩한 것까지 육신을 위해 쓰도록 충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모든 의로움’ 을 이루기 위해 (3, 15)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것처럼, 현세의 메시아가 되라는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빵이 아닌 하느님의 모든 말씀” (4, 4ㄷ) 으로 살아가며 그분만을 섬기겠다고 하십니다. (10절) “몸을 던져보라.” (6ㄱ절)는 것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정하고 떠보라는 유혹입니다. 시편 91, 11 – 12을 글자 그대로 인용하는 악마한테 예수님은 성경의 근본 의미를 들어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7절) 하고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그분을 시험했지만 (1코린 10, 9 참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하느님을 시험하기보다 끝까지 신뢰하고 순종하겠다는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표명하십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주며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4, 9) 하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악마의 약속은 이미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이신 메시아한테 하셨던 말씀을 이용한 것입니다. 세상은 악마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한테서 예수님께 위임된 것입니다. (시편 2, 8; 72, 8; 마태 28, 18) 또한 ‘경배하다’ 라는 동사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완전한 복종을 뜻합니다. (마태 2, 2; 2, 11; 8, 2; 9, 18; 창세 37, 7 – 10 참조)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빠졌던 최초의 유혹 (창세 3, 1 – 7) 으로 제1계명을 거슬러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10ㄴ절) 하시고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10ㄷ절) 하며 물리치는 동시에, 예수님의 승리와 하느님 아들로서 권위를 확고히 하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고 하느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충실한 새 이스라엘이 되십니다. 유혹을 물리칠 때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11절) 이렇듯 유혹을 물리친 광야는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하고 그분을 만나는 장소가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세례 사건과 이어진 유혹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미를 새롭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시련과 유혹 속에서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자기희생의 삶을 살아야 하며, 하느님의 자녀는 어떤 유혹에서도 승리할 것을 보여줍니다.
묵상 (Meditatio)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 (마태 4, 3) 이 얼마나 크고 위험한 유혹입니까 ?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서, 그럴 수 없다고 단언하는 나의 관념 앞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못할 것이 무엇이며 왜 당장 행동하지 않으시는가 하며 수없이 되뇌던 저한테 다가온 유혹이기도 합니다. 저의 믿음을 땅에 묶어놓은 채 예수께서 현세적 욕구를 채워주는 메시아로 오시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왕좌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영원한 것을 바라보라 하십니다. 구원은 ‘돌이 빵이 되는 것’ 에 있지 않으며, 참된 믿음은 몸을 던져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졌을 때 나를 받쳐주는 기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악마한테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더 큰 권력을 얻기도 하지만, 그 대가로 자유와 사랑을 잃게 됩니다.
기도(Oratio)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시편 95, 8)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로마 5, 17 –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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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동북부의 8.8의 대형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피해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사망, 실종자가 1,700명 이상이며, 경제 손실 규모도 수백억 달러에 이른다고 하니 그 피해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방사능 유출 확대도 우려된다고 하던데, 이제 더 이상 피해가 없도록 그리고 지금 현재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피해자들이 빨리 아픔을 극복하기를 우리 모두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일본은 전에부터 지진의 피해가 많았던 곳이지요. 그래서 오랫동안 지진에 대한 대비를 해왔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번과 같은 어마어마한 상처를 안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자연의 힘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자연을 극복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많은 공사를 통한 자연 파괴가 과연 자연을 극복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그러한 자연 파괴가 오히려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결국 그 피해를 온전히 우리 인간이 겪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이처럼 무엇이 중요한 지를 깨닫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얼마 전 어떤 책을 보다가 이런 실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알래스카와 캐나다 국경지대 사이에 위치한 클론다이크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이곳은 금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산악인들이 이 클론다이크에 있는 어느 산중턱에서 우연히 오두막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서는 깜짝 놀랄만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글쎄 그 안에는 금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으며, 그 옆에는 두 개의 해골이 있더랍니다. 너무 이상해서 오두막 안의 물건들을 살피다가 책상 위에 다음과 같이 쓰여진 메모 하나를 발견합니다.
‘금이 너무 많아 기쁜 나머지 계절이 바뀌는 지, 식량이 떨어지는 줄도 몰랐다. 또한 금 모으는데 여념이 없어 눈보라가 몰아치는 줄도 몰랐다.’
그들은 엄청난 양의 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단 한 푼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을 하며 기도를 하는 중에 악마가 유혹을 합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서 배고픔을 면하라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는, 악마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함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유혹을 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직면하는 유혹들입니다.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유혹, 명예에 대한 유혹, 남들보다 인정받고자 하는 유혹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이 결코 중요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시며 유혹을 거뜬히 물리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이 말씀만이 가장 중요하며,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지금의 삶을 조금 더 편하게 할 뿐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순 제1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과연 내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면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주시는 주님만을 섬길 것을 다짐했으면 합니다.
용기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타키투스).
하느님의 말씀 -권태문 신부-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동안 단식하신 뒤에,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십니다. 유혹의 장소도 ‘광야’ ‘성전 꼭대기’ ‘높은 산’으로 바뀌면서, 그 성격 또한 탐욕, 부귀와 권력, 교만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어 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매번 그 유혹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로 말씀하시며, 그 악마의 유혹들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 내십니다. 이를 통해 현실의 유혹과 고통에서 경험하는 저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유혹이 올 때마다 원하는 것만을 채워달라고 했던 이기적인 모습, 때때로 그 유혹을 이겨 내려는 부단한 노력보단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이용했던 위선적인 모습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사순 시기 동안 특히 강조하는 신심행위들, 선행과 기도, 그리고 극기와 절제는 그런 악마의 유혹에 맞서 싸우기 위한 내적인 힘을 기르게 하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이해를 도울 것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반복되는 유혹,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들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치며 살아가야 합니다. 유혹을 참아 내는 극기와 절제는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재물과 권력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만이 세상의 온갖 유혹과 두려움, 고통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신앙의 진리를 겸손하게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사순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유혹 -김찬선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십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악령에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여러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악령의 유혹을 받게 하는 성령의 뜻은 무엇일까?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으라는 뜻일까? 유혹을 받으면 다 죄를 짓게 되는가? 유혹은 나쁜 것일까, 좋은 것일까?
저는 일찍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늘 사회경험을 더 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예비고사를 보게 되었을 때 좋지 않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험 보러 갈 때 술을 먹고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엉뚱할 수 있을까 생각되지만 그때 저는 인생을 조롱하는 마음과 함께 하느님이 계시고, 그리고 제가 신부가 되는 것을 하느님께서 바라신다면 술을 먹어도 시험에 붙게 하실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약 떨어지면, 그것은 당연히 신부 되지 말라는 하느님의 뜻이고. 그런데 저는 저만 술을 먹고 간 것이 아니라 몇 명을 꼬드겨 같이 술을 마시고 시험을 봤습니다. 결국 다 떨어졌는데, 저는 다시 공부해서 신부가 되었지만 그 친구들은 끝내 신부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한데 그러나 더 생각을 해보면 그렇게 미안할 일도 아닙니다. 왜냐면 그때 제가 꼬드긴 친구가 그들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소가 확고했던 친구들은 저의 꾐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성소 의지가 약했던 친구들, 그래서 저처럼 신학교에서 나가고 싶었던 친구들이 저의 꾐에 넘어간 것이고 끝내 다시 신부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란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이고, 선택한 이상 선택한 것에 최선을 다 하게 하는 것입니다. 박해 시대의 박해와 유혹은 순교자와 배교자를 갈랐습니다. 그때도 유혹자의 감언이설이 있었습니다. 배교를 하면 자신과 가족이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벼슬도 준다고. 이때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천국을 선택할 것인가, 가족과 이 세상을 선택할 것인가. 지금 저보고 선택하라면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박해상황이 되고, 그때 제가 하느님을 선택하면 하느님의 성령께서 하느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나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앞서 악령은 예수님을 유혹하고 성령은 예수님을 시험에 들게 하십니다. 우리의 주님이 이러하시니 우리도 세상에 나가게 되면 유혹을 받고 시험에 들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이란 한 편으로는 성적 미달자를 탈락시키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고 그래서 시험에 통과한 사람에게는 자격증을 주어 그것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 돈벌이를 하게 하는 것처럼 성령께서는 시험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어떤 유혹과 시련을 당하더라도 그 유혹과 시련만큼 더 강하게 하느님을 선택하게 하시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힘을 기르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 유혹을 받으신 얘기는 고대 중동 지역에서 성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누구나 치러야 했던 통과예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성숙한 자녀로 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유혹으로 단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 그 유혹과 단련을 감당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성령과 함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사실 매력의 기준은 시대나 지역 그리고 문화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떠올려보세요. 그 그림을 보면 기형적으로 보이는 엄청난 엉덩이와 풍만한 몸매의 여자들이 등장하지요. 왜냐하면 당시에는 엉덩이가 크고 풍만한 몸매가 매력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 모습이 매력의 기준이 될까요? 그렇지 않지요. 지금은 건강미라고 말하는 약간 그을린 피부, 날씬하면서도 잘 발달된 근육을 가진 사람이 선망의 대상입니다.
이렇게 시대에 따라 변하는 사람들의 매력 기준을 보면서, 후대에는 제 얼굴도 매력 덩어리라고 취급되지 않을까 라는 엉뚱한 상상도 해보게 되네요.
그런데 세상의 것들 중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준 역시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변하는 세상의 기준만을 쫓으려 하고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착각 속에서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한 남자가 속옷가게에서 여자 친구에게 생일선물로 줄 속옷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점원이 여자 친구의 사이즈를 물었을 때 남자는 ‘완벽해요’라고 대답했지요. 이 말에 점원은 날씬한 사이즈의 속옷을 싸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옷을 든 여자 친구가 나타나 자기 몸에 맞는 특대사이즈 옷으로 교환해 갔다고 하네요.
이 남자에게 있어서 가장 완벽한 몸매를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특대사이즈 옷을 입는 거구의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완벽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몸매입니다. 이 남자처럼 변하지 않는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이 세상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 삶 안에서는 변하는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유혹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뱀의 유혹에 넘어가는 원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쉽게 유혹에 넘어갑니다. 바로 세속적인 생각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유혹,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유혹들. 그러나 그 유혹들은 나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만들어주는 못하는, 오히려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유혹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악마의 유혹을 모두 이겨내십니다. 그 비결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도,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서 악마에게 절하는 것도 모두 순간의 기쁨에 불과한 유혹인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며 살면서 얻는 기쁨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악마의 이러한 유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유혹이 너무나도 달콤해서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중심을 잡고 사느냐에 따라, 아담과 하와의 모습으로 또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고 있을까요? 하느님께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됩시다.
유혹 뿌리치기 -정인준 신부-
교구청 소임 중에 성지나 성당 토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대부분 비신자와는 해결이 잘 되는데 왜 그런지 신자들이 그 땅의 소유주인 경우에는 서로 어색하거나 마무리가 잘 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처음에는 실망이 크기도 했지만 “신앙과 돈은 별개”라는 말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를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돈이기 때문에 관련 공무원도 실망하는 눈치입니다. 이럴 때 돈이라는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덕도 누리고 있지만 또 어쩔 수 없이 그 그늘에서도 살아가야 하는가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유혹자는 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명예욕구로, 세상의 달콤한 가치관으로 주님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위로와 교훈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유혹 앞에서 흔들리는 나의 모습과 더불어 큰 위로를 갖게 해줍니다. 그러나 악령의 유혹 앞에 단호하신 주님은 유혹을 단호하게 끊는 용기를 갖게 합니다. 씨를 뿌리고 보면 잡초도 채소도 함께 땅에서 올라오는데, 처음에는 두 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다 좋아 보입니다. 어린 잡초를 뽑는 것은 쉽지만 때를 놓쳐 다 자란 뒤에 잡초를 뽑으려하면 소중한 채소까지 들먹이게 됩니다. “유혹은 처음에 바로 잡아야 한다”라는 어른들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유혹, 그 뿌리깊은 영혼의 적 -오상선신부- 예수님 또한 우리 보다 앞서 갖가지 유혹을 당하신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그 유혹에 넘어간 것과 달리 예수님은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제2의 아담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의 본질은 무엇인가? 첫째는, 식욕이다. 단식으로 허기져 있을 때 가장 큰 유혹은 음식의 유혹이다. 마귀는 바로 빵으로써 예수님을 유혹한다. 식욕은 이렇게 모든 유혹의 첫번째의 것이다.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은 수도자 자격이 없다>고 하신 어떤 성인의 말이 기억난다. 40대에 가장 신경써야 할 미덕이 <절제>라고 읽었다. 사실 소식하고 음식을 절제할 수 있어야만 모든 욕심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사순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식탐에서 해방되어 영적투쟁을 시작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 주기에 거룩한 시기이다. 둘째 유혹은 소유욕이다. 음식으로 배가 부르게 되면 그 다음으론 소유욕이 발동한다. 우리가 배고플 때는 없이도 잘 살았는데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니 엄청난 소비주의가 발동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식욕이 채워지면 자연스럽게 소유욕으로 넘어가게 된다. 소유욕은 끝이 없다. 비단 큰 집이나 자동차, 물건 등에 대한 소유욕만이 아니라 자식이나 사람에 대한 소유욕도 문제이다. 50대는 특히 이 소유욕을 극복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소유욕에서의 해방을 통해 더욱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50대 신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셋째 유혹은 권력욕(명예욕)이다. 사람이 먹는 것이 해결되고 덧붙여 돈도 많이 벌어 가질 것은 다 가져보고 나면 마지막으로 발동하는 것이 이 권력욕(명예욕)이다. 한국의 정치가들을 보라! 대부분이 이런 전철을 밟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정치가들이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하는 노름에 기대할 필요도 실망할 필요도 없다. 탐욕 덩어리의 사람들 앞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치란 사실 기대할게 못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돈많은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도 무슨 장(長)자리라도 하나 해보려고 덤비는 미성숙한 모습들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보게 된다. 이러한 미성숙한 욕심을 지닌 장을 맡은 신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이상한 방향으로 가게 되고 이들이 그 장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면 이상한 싸움박질을 벌이기도 한다. 특히 60대 신자들이 조심해야 할 유혹이다. 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 유혹을 받으신 것은 아닐까? 우리가 당하게 될 유혹들을 미리 보여주시고 어떻게 이런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지 그 본보기를 보여주신 것은 아닐까? 이 유혹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가운데 자리하고 있음을 무서워해야 한다. 내 안에 어떤 유혹이 이미 도사리고 있는지 잘 살펴보자. 나는 어떤 음식이든지 정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미하며 먹고 있는가? 쓸데없는 음식투정을 부리거나 맛있는 음식만 먹으려는 미식가, 탐식가는 아닌가? 내가 갖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때문에 안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말 없어도 될 것인데도 소유욕 때문에 쓸데없는 것들을 너무도 많이 사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남들보다 윗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회장님, 단장님 등 장 소리를 듣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상류층의 부류에 속하기를 바라고 아니 그런 이들과 친분을 갖는 것만으로도 내가 높아졌다고 여기지는 않는가? 우리가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빠졌던 그 뱀의 유혹에 다시 빠지는 길이고 이것을 의식하고 과감히 물리칠 때 예수님처럼 새로운 하느님 나라를 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욕심이 없는 나라이리라. 그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소명이라면 우리 먼저 이러한 욕심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아멘.
유혹 -고준석 신부-
교회는 재의 수요일로부터 부활 전야까지 40일 동안 사순절을 지내게 된다. 사순절은 부활을 준비하는 시기로써,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의 의미를 묵상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은총의 시간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신다.
첫 번째, 빵의 유혹이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이것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다.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40일씩이나 단식을 한 예수님께 돌을 빵으로 변화시켜 먹어 보라는 것은 가장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음직스런 빵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배고픔을 느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배고픔이 얼마나 커다란 고통인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두 번째는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명예에 대한 유혹이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이 유혹은 참으로 매력적인 유혹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 앞에서 무엇인가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함으로써 뽐내고 싶은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혹의 말은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겉으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척하면서 하느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이 더 드러나고 이로써 인간이 하느님이 아닌 자신이 최고가 되려는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받는 인정이나 명예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인기를 얻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거짓과 불의와 타협하고 양심을 파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세 번째로 세상의 권력과 부귀영화의 유혹이다.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마태 4,8-9).
너무나 탐스러운 유혹이다. 남을 지배하고 그 위에 우뚝 서서, 남에게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과 힘은 얼마나 탐스러운가? 그렇기에 세상의 권력과 부귀영화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이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절히 싸우고 있는가? 모든 부정부패가 이것으로 인해 생기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마태 4,10).
그렇듯 오늘 복음의 이 세 가지 유혹은 우리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유혹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먹음직스런 빵과 재물, 남에게 받고 싶은 인정과 명예, 남 위에 군림하는 힘과 권력, 그것은 참으로 매력적이고 탐나는 것들이다. 그렇듯이 모든 유혹은 그렇게 먹음직스럽고 탐스럽고 갖고 싶어 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세 가지 유혹 = 사람들의 세 가지 단점 = 예수님의 싸움 -정호 신부-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 복음은 그런 불가능이 현실이었음을 전해줍니다.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했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말할까요?
우선 악마가 예수님께 이런 유혹을 한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인류는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해 잘못된 삶을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악마의 입장에선 세상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악마의 유혹이 사실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가르칠 양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모르는 이 세상은 이미 내 생각대로, 내 방법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일종의 자신감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겁도 없이 악마는 시종일관 예수님께 자신 있게 터무니없는 유혹을 펼칩니다. 그리고 그 유혹들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삶을 너무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마가 예수님께 던진 세 가지 유혹은 예수님을 홀리기 위한 유혹이 아니라 예수님이 앞으로 펼치실 공생활에 대해 사람들의 악함에 대한 증언과 사람들의 부조리한 현실인식을 예수님께 가르쳐 ‘그것이 가능할까?’하는 질문으로 그분을 포기하게 하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가르쳐주는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옳다는 은근한 자만심마저 보입니다. 그래서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싸우셔야 할 사람들의 잘못이기도 하고 사람들의 약함을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유혹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허기진 예수님께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천사들이 받들어 줄 테니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세상 모든 나라와 화려함을 담보로 악마에게 절하라는 유혹입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은 예수님에게 당신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와 무엇으로 사람들을 가르칠 것인지, 또 결국 이미 세상은 악마의 것이니 악마의 방식에 따르라는 도전으로 끝을 맺습니다.
40일 간의 단식으로 허기지신 예수님께 돌을 빵을 만들어 보라는 유혹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근본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하신다는 것이 결국 당신 좋으라고 하는 일이 아닌가 악마는 질문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우선 당신 허기짐이라도 채우라고 악마는 예수님께 충고합니다. 이것은 또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려 한다는 현실을 증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선 네 자신부터 살려보라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들으셨던 차가운 비웃음의 질문을 이미 악마가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곧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신부터 살리는 사랑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내 놓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허기짐에도 돌을 빵이 되게 하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활 중 돌이 빵이 되게 하는 기적을 뛰어넘는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들의 허기짐에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떠올리게 됩니다. 자신의 허기짐은 돌보지 않으시고, 다른 이의 허기짐을 돌보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의 모범이 됩니다.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은 하느님 아들로서 그 자격을 증명해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가 당연히 떠받들 것이고 그것은 곧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악마는 이런 유혹을 통해 예수님께서 도대체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그들을 사로잡을 것인지, 가르칠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잘난 능력을 한 번 보여 주세요’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사람들이 능력이나 권위에 얼마나 약한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요즘 사람들은 능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되니 너도 능력을 한 번 보여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다가온 유혹을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으로 극복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진 신통방통한 능력을 사람들을 들뜨게 해서 당신을 따르게 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려 하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지 그분의 힘이나 능력, 재주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두 번째 유혹은 이번뿐만 아니라 복음서 곳곳에서 악마와 예수님이 충돌하는 부분에 자주 등장합니다. 악마는 예수님만 보면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니,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라 떠들고, 사람에게서 나갈 때 경련을 일으키는 과장된 몸짓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드러내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때 마다 ‘입을 다물라’고 말씀하곤 하십니다. 악마는 사람들이 얼마나 능력에 약한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 능력에 대한 맹신이 하느님 사랑을 훼손시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에게도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시곤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악마는 예수님께 세상 모든 것을 주겠노라고 약속하며 자신에게 고개를 숙일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이미 악마가 얼마나 사람들의 악한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며 세상이 그럴 만큼 이기적이고 죄악에 물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미 세상은 자신의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악마의 목소리는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당당합니다. 악마가 세상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세상을 차지하는 그 아름다움은 모두 악한 사람들의 싸움과 이기심의 투쟁에서 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 세상에 사랑을 심겠다니 우습다고 그러느니 차라리 나의 방법을 쓰는 것이 어떤가 하는 충고까지 악마는 서슴지 않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하시지 않았느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리이며, 희망을 두고 계시는 사람들을 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죄 많은 인간에게서도 전혀 불안함이나 의심이 아닌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느님이라는 최종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여전히 세상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악마의 주장은 세상은 자신의 것이니 하느님께 사람 전체를 포기하라는 요구요, 세상을 포기하라는 요구가 됩니다. 그러니 이 유혹이 예수님의 노기를 건드렸음은 물론이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 되돌리려는 다짐을 더욱 굳게 하는 계기가 되고 맙니다.
결국 악마는 이런 주님 곁을 떠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이 이뤄놓은 모든 악한 습관과 잘못 모두를 극복하려고 사랑 하나에 모든 것을 거셨고, 이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천사들을 시켜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악마의 유혹이 우리가 가장 약한 부분을 너무나 자세히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고 하려하고, 그것이 세상을 사는 이유인 것처럼 말하곤 합求?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도 사람됨이 아닌 능력과 재력 등의 조건을 따지는데 익숙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서로 서로 경쟁이란 이름 아래에서 서로 다투며 서열을 매기며 참으로 이기적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마져도 자신을 위해 이용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은 우리의 세 가지 단점을 말해주고 예수님께서 결국 이것을 극복하시려 하셨고, 이로 인해 돌아가셨고, 부활로써 이를 극복해주시는 싸움을 벌이셨다는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니 복음 속에 드러나는 주님의 수난이 이유가 되기도 하는 이 모든 것을 우리 안에서 극복하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 하신 유일한 가치, 곧 사랑을 우리 안에 품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악마의 치명적 유혹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 계속됩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끊임없이 사랑 하나의 힘으로 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주님이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에 확신을 가집시다.
성경이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사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서공석신부- 사순 시기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전 40일 동안을 교회는 사순 시기라 부르며 전례에서 특별한 시기로 기념합니다. 40일의 사순 시기 관행은 교회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은 4세기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우리의 신앙 생활사에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태초에 인간이 유혹에 빠져 범죄 하였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후 마귀의 유혹을 체험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두 개의 이야기들은 실제 일어난 사실을 우리에게 보도하는 것이 물론 아닙니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를 위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림과 같은 구체적 이야기 안에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담은 것입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인간은 그 기원에서부터 하느님과 관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인간 생명이고 하느님이 베푸신 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불행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행동한 데에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창세기는 인간이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나무열매”를 먹는 유혹에 빠졌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바는 인간은 “먹음직하고 탐스럽고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이만 보이면, 무엇이라도 해버리는 비극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두 주인공은 하느님이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음직하고 탐스럽고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먹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행해야 하는 선과 행하지 말아야 하는 악을 판단하면서 하느님과 동료 인간 앞에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광야에서 유혹 받는 예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유혹하는 자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은 “탐스럽고 자기를 영리하게 해 주는”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어 주어서 모든 사람이 탐하는 것을 주는 하느님을 가르치라는 유혹입니다. 하느님을 이용하여 사람이 잘되는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그들로부터 환영받는 인물이 되라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것이지, 사람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두 번째의 유혹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기적을 하라는 말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신앙인들이 받는 유혹입니다. 기적한다고 소문이 나면 사람들은 많이 몰려옵니다. 가톨릭교회 안에도 교회 밖에도 그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론매체가 그런 사이비 종교집단들에 대해 보도하는 바를 가끔 봅니다. 기적은 모든 사람에게 탐스럽고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이 보이는 술수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예수님은 이 유혹도 거절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 6,16)는 구약성서 말씀을 인용하여 거절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생활 무대로 주신 이 세상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이 지니지 못한 초능력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과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한계를 지니고 그들과 더불어 삽니다.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하셔서 자기도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려 노력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받으신 세 번째 유혹은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역시 탐스러운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도 한 마디로 거절하셨습니다.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이사야서(42,1)의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먹을 것을 얻고, 하느님을 이용하여 초능력을 발휘하고, 하느님을 이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필요한 의식주(衣食住)는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권력과 부귀영화를 탐하고 그런 것을 위해 사생결단 뛰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인은 주변의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봅니다. 형제자매는 자기 자신을 뽐낼 대상도 아니고, 지배할 대상도 아닙니다. 형제자매는 위해주고 감싸주면서 더불어 살 대상입니다. 우리에게 탐스럽고 우리를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형제자매는 우리의 경쟁상대로만 보입니다. 우리가 쉽게 빠지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겪으셨다는 유혹은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겪는 일들입니다. 재물이 소중하고, 남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능력을 탐하고, 부귀영화를 꿈꾸는 우리들입니다. 성서가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사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받으셨다는 유혹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빵을 주고 기적을 주고 부귀영화를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의 두 주인공과 같이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 안에 두고 자기에게 탐스러운 것을 택하는 사람이 되라는 유혹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야기 다음에 즉시 유혹의 이야기를 갖다 놓았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타나는 예수님을 본받아 재물이나 기적이나 부귀영화를 주는 하느님을 찾지 말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그런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사람은 자기 환상을 좇아 살지 않고,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며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과 더불어 삽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생명이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광야와 같이 황량하게 살아야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 감수할 수밖에 없는 각종 실패와 병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독 등은 우리가 광야에 내던져진 순간들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사라진 상실의 순간들입니다. 광야에서 40일을 단식했다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같이 우리에게도 우리가 기진하여 허덕이는 광야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때 빵과 기적과 부귀영화를 꿈꾸지 않고 하느님을 택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 자비를 실천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 능력, 부귀영화도 우리는 언젠가 결정적으로 버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여 하느님에게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기도 없이 죄를 알 수도, 이길 수도 없다.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자유란 선택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선택은 항상 갈등과 고뇌를 동반하는 것이며, 이는 항상 유혹을 불러오는 것이다. 기도 없이 죄를 알 수 없고, 죄를 이길 수도 없다. 1. 사순절은 기도에서 시작되고 기도로 끝맺어야 한다.
지난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사순절(四旬節)이란 교회 전례 안에서는 속죄의 재계(齋戒)를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며 부활축일을 준비하는 40일을 말한다. 교회는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신자들의 머리에 재(災)를 뿌리며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하며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도록 초대한다. 막연히 "이번 사순절은 좀 잘 지내봐야지!"하는 결심만으로는 부족하다.
우선 조용히 하느님 앞에 머무는 기도의 시간을 통해 "하느님 보시기에 나는 어떤 모습인가?"를 비춰봐야 한다. 자신의 빚이 얼마인지 모르면 빚을 갚을 수 없듯이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는 그 허물을 벗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인간다움을 손상시키는 벗어버려야 할 악습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서도 먼저 기도의 시간이 요구된다.
때로는 분명히 이것은 죄인데도 죄라고 느껴지지 않는, 아니 죄(罪)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경우도 있다. 죄(罪)는 인간을 비인간화(非人間化)시키고 왜소(矮小)하게 만드는 것이다. 죄(罪)를 죄(罪)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기도는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마음의 교만은 죄를 죄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자신이 끊어버려야 할 악습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구체적인 결심을 해야한다. 아무리 구체적인 결심을 했더라도 그 결심을 살아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의 결점을 고치기 위한 자신과의 진검승부(眞劍勝負)를 할 때마다 내 자신의 힘만으로는 악(惡)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도를 통한 위로부터 오는 은총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결심을 살고 악습을 쳐 이기기 위해서도 기도는 너무나 절실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옛날부터 '기도'와 '재계(단식, 고행)'와 '희사'를 속죄의 방법으로 제시해 왔다.
2. 유혹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조건이다.
오늘 복음은 유혹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준다. 우리는 가끔 "하느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시험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원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인간에겐 죽음도 인생고도 없었을 터인데 .... "하며 인간을 시험하신 하느님을 원망하고픈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의 원조 타락의 이야기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본능이라는 하나의 행동양식을 지닌 동물과는 달리 자유를 지닌 존재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란 두 개 이상의 가능성 앞에서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동물은 '본능'이라는 하나의 행동양식 밖에 없지만, 인간은 '자유'를 지닌 존재로서 항상 선택의 갈림길에서 갈등과 고뇌를 겪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신(神)도 동물도 아닌 인간이 유혹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사에 유혹을 당하는 것은 '인간의 조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가 묘사하는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는 금기'와 쳐다보니 먹음직하여 '먹어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며 고뇌하는 모습은 바로 자유를 지닌 인간의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사순절은 인간성 회복을 위한 은총의 시기이다.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분이 참으로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의 아들'이심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받으신 빵(돈)에 대한 유혹, 자기과시와 명예에 대한 유혹, 권력과 부귀영화에 대한 유혹 등은 우리들이 세상살이에서 매일 당하는 유혹들이다.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크건 작건 간에 돈을 위한 도박과 사기, 자기과시를 위한 교만과 과소비, 권력과 명예를 위한 중상모략의 유혹을 받고 살아간다. 예수님은 유혹을 당할 때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름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신다. 유혹을 이기는 길은 내 뜻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말씀을 한치도 어김없이 지키는데 있음을 보여주신다. 하느님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히 기도하며 깨어있어야 한다. 이는 겸손 되이 하느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만은 유혹에 빠지는 지름길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고 하신다. 인간은 절제와 희생을 할 수 있는 그만큼 성숙된다고 할 수 있다. 간디는 하루에 한끼만 먹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먹고 싶은 대로 먹다 보면 모든 욕심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깊이 음미해 볼 말이다. "말(馬)이 생기면 마부 두고 싶다."는 속담이 있다. 모든 욕망은 한 줄기에 달린 감자들처럼 서로 줄줄이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악(惡)과 한번 타협하고 나면 결국 줄줄이 밀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이다.
사순절은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온갖 악의 사슬에 묶여 있는 우리자신을 해방시키고 영적인 자유로움을 되찾는 은총의 시기이며, 진정한 인간성 회복의 시기이다.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시고자 성체성사로 항상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죄의 세력보다 은총의 힘이 더욱 강하다는 것을 체험하는 사순절이 되자.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지배와 사랑 -차광호 신부-
예수님의 유혹에 대한 대목은 예수님의 세례와 문맥상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을 입으신 분(마태 3,13-17)께서 이제 악마(Satan)에게 유혹(마태 4,3-10)을 받습니다. 유혹을 전후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마태 4,1)와 천사의 시중(마태 4,11)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는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통한 세례와 인도 그리고 유혹의 극복과 천사의 시중,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자기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께 내어 맡기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의탁이 자리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유혹의 절정은 엄청난 권력의 제안에 있습니다. 유혹자는 예수님께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넘겨주려 합니다. " ...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마태 4,9)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왕이 되어 권력을 가지고 군림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분께 예속되어 굴복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당시 지배 논리나 구조들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시대에 이미 엄청난 유혹의 길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마의 선택적 대안(代案)이 그처럼 강하게 개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적인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분께서는 그와 상반되는 길을 가십니다. 군림하려 하지 않고 봉사하고자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께 예속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당신 스스로 사람들에게 속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어리석고 무력한 자의 길, 어떤 허망한 몽상가의 길이었을까요? 이 길은 십자가에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배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지배자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악마로부터 오는 지배권을 거부하십니다. 그분의 거절은 세상 최고의 지배자에 맞서 싸우자는 외침입니다. 악마도 세상의 지배자들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이제 드러내놓고 싸우기를 부추깁니다.
여전히 세상은 지배 논리 가운데 있으며, 억압의 구조들이 작용하고, 소수가 다수의 희생으로 군림하며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지배” 논리는 언제나 문제 되어 오고 있습니다. 마땅히 다스리는 권한을 가지셔야할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지배자가 아니라, 종이 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억압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사랑과 자유와 의로움에 있습니다. 지배는 지배였던 것으로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지배가 사랑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적 대안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적 대안은 그 당시에만 세상 물정에 어둡고 고지식하다는 인상을 준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무 것도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지배의 논리들과 구조들은 사라져 간 것이 아니라, 더욱 세련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예상치 못한 놀라운 방법들을 발전시키며, 기술적 정밀성과 함께 작동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지배하는 자들 역시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종속 관계에 얽매여 있어야 하며, 버티어 내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은 한편으로 세상과 사회 안에서 악마적 원리로 지배하는 것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관심을 가지도록 재촉합니다. 억압과 통제와 착취라는 지배의 논리와 구조가 가져다주는 증오와 분쟁과 예속이라는 결과에 대해서 말입니다. 현재 이 모든 것들은 ‘국제화’니 ‘세계화’니 하는 허울 좋은 말 속에 담겨져 진행 중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혹을 이겨내고 사셨던 예수님의 선택적 대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지배의 논리와 구조가 봉사와 사랑으로, 타인을 위해 여기 있음으로, 그렇?그 기능을 바꾸어 나가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운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표지들은 오늘날 악마적 지배 원리들에 있어서 썩 호의적이지 않을 겁니다. 지배하는 자들은 그것을 느끼고 있으며 그리고 종교를 확실하게 달래어 무마시켜야 하는 요소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선택적 대안이 인정을 받게 될 것이라든지 또는 현존하는 지배 논리와 구조가 언젠가 종식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고 나약하게 믿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적 실천, 곧 복음을 실현하고 광야에서의 예수님을 따르려는 노력만이 지배 논리와 구조의 종식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유혹 안에서 말씀하셨던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점을 지난 시대보다 오늘날 우리가 더 의식하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유혹이란? 우리가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말로 유혹에 대하여 말한다면, 가장 먼저 죄 또는 어쩌면 성문제를 떠올리게 됩니다. 오랫동안 교회의 윤리와 도덕에서 사용하는 말투에서 그러한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는 재물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유혹으로 설명될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어떤 명성이나 지위도 그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유혹들은 정말 무엇일까요? 물론 그 유혹들은 다양합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삶 속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확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직면하면서 알게 되는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경향과 성향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사회가 마치 모든 것이 순조로운 체, 열심히 노력해서 나아지도록 조그마한 실수도 없는 체 하고 있는 것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체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교회에도 해당됩니다. 말하자면 문제없는 체 하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스스로 달래고 그래서 잠잠해지기를 바라기만 하고 있습니다. “무엇인 체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시대에 가장 심각한 유혹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유혹은 반드시 해야 할 일과 그리고 꼭 필요한 일들을 스스로 모면하도록 부추깁니다. 굳이 직무유기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그렇습니다.
또는 우리가 권위와 영향력, 그리고 명성과 자기과시에 현혹되어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더 이상 지배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그마한 우리의 능력과 가능성들로 해서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게 될지 헤아려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루어낸 실적들이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 발전으로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 자신을 잘못 평가하게 되고, 우리 자신에 대한 잘못된 모습을 형성하게 되며, 어쩌면 잘못을 저지르게 될 수 있습니다.
유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유혹이 특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을 향해 그리고 그분의 요청을 향해 있는지 없는지에 있습니다. 자기기만이기도 한 우리의 교만은 우리 주위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는 자기소외의 유혹들에서 우리가 벗어나도록 어느 누구도 그리고 사회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저희를 유혹 속에서 멸망하지 않게 하소서!” 스스로 강해지려는 유혹이 실상 가장 강한 유혹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사탄의 유혹 -홍금표 신부-
우리는 '만족'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대개의 경우 비용보다 보상이나 결과가 클 때 쓰는 말입니다. 여기서 비용과 보상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관계나 정신적인 작용까지도 포함한 말입니다만 어떻든 인간은 '보상의 극대화'와 '비용의 최소화'를 통해 만족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노력은 반대편에 서있는 대상에게는 정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상호작용 안에 있는 인간이 함께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선에서의 비용의 최소화가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과정 없는 결과나 수고 없는 결실을 바라는 우리의 끝없는 욕심을 자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 첫 주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유혹의 전제 조건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서 곳곳에서 빵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왕이심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면 빵과 권력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첫 번째 유혹을 보면 우리가 극복해야할 부분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빵 자체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돌더러 빵이 되라는 요구", 즉, 수고하지 않는 빵, 즉 비용의 지출 없는, 마치 도깨비 방망이를 가지고 빵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이 바로 극복의 대상입니다.
두 번째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마에게 절을 하면 세상의 권력과 영광을 주겠다." 악마가 상징하는 부정한 수단이나 죄스런 방법을 통한 권력추구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 권력자체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참 매력적인 요구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는 요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아마 예수님이 이러한 유의 마술적인 기적을 행했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섬기는 모든 성전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간단한 방법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음미해야할 사실은 이러한 유혹은 거부했지만 자연적 질서와 인간의 수고에 의한 과학적 발명은 우리에게 허락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터무니없는 초능력을 갖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경험했던 사탄은 결국 외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게 됩니다. 수고 없는 빵을 바라는 마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맹목적인 권력 추구, 그리고 초능력을 갖고자 하는 욕심 등, 내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욕심, 아니 모든 인간 안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욕구가 바로 사탄의 진정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단 사실은 결국 자신을 이겼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요, 내안의 탐욕의 경계와 비용과 보상에 대한 올바른 마음가짐만이 자신을 이기는 길이란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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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셨다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40일 간의’ 체험에 우리의 깊은 관심과 믿음의 눈을 돌리는 것이 좋겠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 ‘비둘기 모양으로’(3,16) 내려오셨던 ‘성령’께서 그분을 광야로 ‘인도하시어’ ‘유혹을 받게 하신다’. 그런데 이 유혹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17)는 말씀 후에 나오는 것으로 ‘메시아적’ 유혹이다. 사탄은 두 번이나 이것을 확인하려고 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3.5 절)이라고 하지 않는가?
당시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명예와 품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무력도 불사하는 강력한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다. 아마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언급한 고통 받는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에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마태 16,22). 그 때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16,23). 이것은 광야의 유혹 장면을 연상케 하고 있다. 베드로가 사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유혹사화는 그리스도의 일생 전체를 압축시켜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까지 계속된 유혹이었다 (마태 27,42 참조).
예수님의 유혹은 오랜 단식 후에 빵을 얻는 것과 같은 단순하고 순수한 일로부터 우상을 숭배하도록 종용하는 본격적인 충동적 권유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려고 애쓰는 사람 누구에게나 던지는 유혹적인 발언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특히 사탄이 권력과 부라는 매력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는 완전히 사탄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묘한 유혹들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일치로써 이기신다. 그 말씀은 당신이 하시는 모든 결정의 근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정확히 세 번 ‘성서에...’(4.7.10절)라는 표현을 하시면서 당신의 결정은 이미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음을 뜻하고자 한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빵’보다도 더 갚진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물질적 차원만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사상의 참된 의미에 대한 유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 지금도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빵’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과 나눌 수 있도록 마음을 ‘회개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즉 자신을 나누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배고픔을 없애기 위해 돌을 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제1독서: 창세 2,7-9; 3,1-7: 인간들의 창조와 범죄
1독서는 인간창조 설화와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충실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 그래서 죄를 범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끝까지 충실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있다. 여기서 구원이냐 파멸이냐에 대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창세 3,3 참조). 그러나 결과가 불행하다.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하여 그 말씀을 어기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4-5절). 정말 그들은 그 열매를 먹은 후 눈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그들이 ‘알몸인 것’(7절)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꿈꾸었던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것은 사탄의 말을 들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의 행동은 죄를 낳게 되었고, 모든 세상을 파멸에로 이끌었다.
제2독서: 로마 5,12-19: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원조들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대립적인 상태를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19절). 이제 하느님의 말씀에 절대 순명하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이 회복시켜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부지런히 이루어 가는 것이 사순절을 잘 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신 장면을 다시 묵상해 본다면, 그 유혹은 예수님께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기까지 계속 괴롭혔던 유혹이었다. 바로 그 유혹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에 확고하게 근거하고 신뢰하며 그 유혹을 이기셨듯이 우리도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서 있으려 노력한다면 우리도 능히 그 유혹들을 이겨나 갈 수 있을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에 합당한 힘을 주실 것이다. 기도 중에 이러한 삶의 용기와 도우심을 청하자.
“유혹을 받는 예수님?” -배영호 신부 - 그러나 정작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혹을 당하신 사실보다는 인류구원의 목표를 확정하면서 겪었던 그분의 ‘내면적인 갈등’을 주목하게 된다. 복음사가는 유혹사화를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로 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의 체험을 ‘압축시켜’ 전하고 있다(S.치프리아니).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론 내지 구원론의 요약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명을 감지하고 세상을 바꾸고자 뜻을 세우셨는데 그 실행방법은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목숨을 걸되 당대인들이 흔히 생각하던 현세의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메시아관에 따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놀랍게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시도하신다.
‘보다 근원적이고, 보다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을 둔 때문이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단적으로, ‘인간화의 문제’ 였다. 그래서 그분은 경제, 종교, 정치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려는 그 영웅적인 야심의 유혹을 버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빚어지는 비인간화 현상을 극복하는데 삶 전체를 걸고 나섰던 것이다(송기득). 예수께서는 이 유혹을 인간과 연대하는 가운데, 아니 어쩌면 다만 인간으로서 온전히 하느님께 순명하고 신뢰하는 가운데 극복하고자 하였다. 하느님다움을 보이라는 요구에 대하여 예수는 인간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곤란한 지경에서도 그는 다만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신뢰하는 인간으로 임할 뿐이다. 그는 그 어떤 예상을 벗어난 과시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 대한 순명 안에서(극심한 단식의 수용), 그리고 하느님의 보호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 안에서 종말의 시작을 보고자 하였다. 자신을 드러내고 합리화, 정당화할 기적을 포기하고 오히려 무기력하고 멸시받는 길을 택하는 자, 곧 가시적인 징표없이 십자가에서 죽어가기까지 순명하는 아들에게서 하느님 나라는 밝아온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한편 우리는 악마의 권고가 얼마나 교묘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유혹’으로 판단하고 이겨내시기 위해 어떠한 ‘몸부림’을 벌이셨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악마로 표현되는 유혹자는 어쩌면 신보다도 신에 관하여 더 신적이다. 그는 창세기의 뱀과 동일한 논리를 편다. 성서의 말씀에 악의를 섞어놓고 본래 의미와는 달리 인용함으로써 판단과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유혹의 교묘함은 성서말씀을 오용하는 데 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필요에 의거하여 성서를 대할 때 그 위험에 빠지곤 한다. 심지어 우리는 때때로 신앙과 기도조차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득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여긴다. 나아가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하느님을 동원하기도 한다. 적을 제압하는데, 또는 자신의 독선을 증명하고 다른 이의 인정을 얻어내는데 도움을 주는 수단으로 하느님을 끌어들인다. 심지어 하느님께 협박하며 기도하는 때도 있다.
그분은 목표와 뜻이 분명하고 당신이 가야할 길을 내다 본 이상 더는 곁눈질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확신하고 그에 집중하는 그분에게 현실 메시아적인 변혁은 분심과 잡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광야의 시련을 통과한 사람의 내면세계에는 질서가 있다. 깊이가 있고 중심이 있다.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며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된다. 자기 위치를 알고, 주변의 군소리를 초월하고, 존재 자체의 넉넉함으로 남을 대하게 된다. 하느님의 사람은 그렇게 성숙해 간다. 그렇게 유혹의 장소와 때는 낙원이 된다. 혹시 우리 각자는 허황된 궁리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자. 우리가 유혹을 물리치는 곳도 우리에게는 낙원이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치유하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더 큰 용기를 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사순절, 그 광야와 유혹 -강길웅 신부-
우리는 다시 또 은혜의 사순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이란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40일 동안의 긴 평일을 말하며(주일은 포함되지 않음), 이 '40'이라는 숫자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단식하신 기간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던 40년을 기억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40'이라는 숫자상 의 의미로는, 부활 대축일을 준비할 수 있는 최대의 숫자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나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제 '사순 절'이라는 광야에 들어가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주님을 인도하셨고 아버지께서 직접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셨듯이 주님 은 또 우리를 '사순절'이라는 황량한 벌판으로 보내시어 당신을 만나 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 사순 시기를 은혜와 감사로 맞이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절대로 공짜는 아닙니다. 은총을 만나기 위해선 벽을 뚫고 지나가야 하며 높은 산을 올라 넘어가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유혹의 강물을 건너 가셨듯이 우리도 유혹이라는 다리를 건너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우리 나름의 십자가를 이 시기에 새롭게 짊어져야 합니다.
1독서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에 대한 말씀이 나왔습니다. 아담 과 하와에게는 낙원이 거저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영원히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스럽게도 유혹의 도전에 그만 넘어 지게 됩니다. 사탄이 너무도 교활하게 걸고 넘어오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무너지게 됩니다.
오늘 사탄이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 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사탄은 시치미를 떼고 슬쩍 돌려 물어 봄으로써 하와로 하여금 유혹에 말려들게 합니다. 이에 낚시밥에 걸린 아담은 그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헛된 세상에 눈을 뜨게 됩니다.
눈이 밝아지자 인간의 순수함이 파괴되며 하느님의 모상이 가려지게 됩니다. 하느님이 더 이상 안 보이고 세속만 보입니다. 바로 그 시간부터 인류는 불행의 늪에 빠지게 되며 원조들뿐만 아니라 후 손들 모두에게 타락된 본성을 유산으로 물려주게 됩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죽음을 불러온 것입니다 (야고 1,15).
그야말로,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이 엄청나게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낙원의 문은 닫혔고 인간의 평화는 깨졌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다 죽음의 길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세상의 미래는 완전히 절망이었으며 그리고 수백만 년 동안 그 비참한 현실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아담이 망가뜨린 세상을 누가 원상으로 복구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40주야를 단식하시며 앞으로 전개될 당신의 전도 여행에 대한 구상을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아담의 무절제한 감정을 단식으로 보속하시며 또 원조들이 걸려 넘어졌던 유혹을 성서의 말씀으로 이겨내십니다.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왔는데 이제 예수 한 사람 때문에 인간은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방법이 아주 놀랍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그 메시아의 길을 알아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기대하는 것이 오로지 빵뿐이요 또한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뿐이었습니다. 이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된 소식은 한낱 허구일 수 있으며 또한 철옹성 같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뚫고 지나간다는 것은 불가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빵 문제로 백성에게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난을 통해서 인간이 하느님을 만난다는 복을 가르치셨으며 또 한, 기존 정치 권력이나 종교 세력에 아부하지 않고 핍박받는 길을 스스로 걸어감으로써 십자가나 죽음의 은혜로써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시기에 하느님의 지혜를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인간의 지혜로 이기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그 지혜로 이기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들의 교활함과 그 술수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순절이라는 넓은 광야에서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담처럼 자주 헛된 것에만 정신과 관심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에게 가끔 문제되는 유혹이 무엇입니까. 성서를 읽고 하느님의 지혜를 찾읍시다. 그러면 지금부터 부활의 영광을 깊이 체험할 것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지숙-
한참 성경 공부에 몰두하여 온갖 주석서와 논문을 뒤적이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낼 때였습니다. 공부하는 맛에 그런대로 머리는 즐거운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은 왠지 찜찜한 게 석연치 않았습니다. 성경의 이 구절 저 대목을 빈틈없이 파헤쳐 분석하고 시대적 연관성과 역사적 사실성 여부를 따지다 보니, 내 어설픈 신앙심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추상같은 하느님 말씀의 신비는 온데간데없을 뿐더러 교리 때 배운 ‘성령의 영감’은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내내 고민이었지요. 하느님 저자와 인간 저자의 절묘한 조합이 일궈낸 역작인 성경을 알량한 인간의 학문과 언어로 담아내기는 여러 가지로 역부족임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악마와 한판 대결을 벌이시는 오늘 복음도 인간적 잣대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본문에 속합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곧장 광야로 향하십니다(1절). 사실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그들이 호된 시험과 단련을 통해 하느님 백성으로 태어난 장소입니다. 그들은 사십 년이라는 험난한 광야 여정을 거친 뒤에야 약속된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요. 오죽하면 그들이 이집트 노예살이를 그리워했겠습니까? 순간순간 찾아드는 숱한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역사적 현장을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제 발로 들어서십니다. 예수님과 성령께서 공동으로 벌이신 첫 과업은 하느님 나라의 적대 세력들과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사십 일이나 단식으로 고행하신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3,17)을 악마가 그냥 봐주고 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허기진 예수께 유혹자는 치사하게 빵으로 유혹을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3절) 빵을 구실 삼아 굶주리는 백성을 먹여 살릴 능력을 과시해 보라고 유혹합니다. 그럴듯한 이유를 핑계로, 하느님의 아들 자격을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이용하라는 요구입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도 시편까지 들먹이며,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천사들이 하느님의 아들을 받쳐주는지 증명해 보이라고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하느님을 빙자한 오만함으로 믿음을 남용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시험해 보라고, 그것도 제 자존심과 독선을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하라고 유혹합니다.
마지막 시험은 광야의 시련이 웬 말이냐, 하느님의 아들 신분을 포기하면 세상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입니다(8-9절). 하느님의 계획과 악마의 계획을 저울질하고 있습니다. 불의하고 부당한 것이라면 그것이 제아무리 찬란하고 영광스럽다 해도 악마한테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혼을 악마에게 내맡기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일입니다. 세상 위에 군림하려다가 자유도 잃고 사랑도 잃고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신분은 생애 내내 도전을 받습니다. 광야의 유혹이라는 이 상징적 장면은 예수님이 앞으로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줍니다. 세 번 다 예수님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4절; 신명 8,3) 하느님의 아들 신분은 배고픔과 갈증의 충족을 넘어섭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이 우리 영혼의 진정한 양식이 되어줍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7절; 신명 6,16) 자신의 신분과 권위를 내세워 기적을 남발하지 않으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10절; 신명 6,13) 어떠한 목적에서건 악마와 야합하지 않으십니다. 신명기의 말씀대로 실천하시고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예수님의 세 유혹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시절 겪은 유혹과 통합니다. 구약의 모든 위대한 인물은 자신들의 신앙이 참됨을 시련 속에서 증명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광야에서 고행을 하시다니, 한낱 악마 나부랭이에게 시험을 당하시다니,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동참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피하라는 사탄의 유혹은 예수님의 앞길을 가로막았지만, 온전히 하느님의 계획에 따르시는 예수님의 소명 의지는 광야의 고행을 통해 더욱 확고해지셨습니다.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큰아들 드미트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악마와 신이 서로 싸우는 싸움터’라고요.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예수님이 겪으신 광야를 마음에 담고 사는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몸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 마음 하나 간수하기도 참으로 버겁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리의 신앙은 시험받습니다. 악마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장하여 나타납니다.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리고 선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특히 신앙인의 양심은 더욱 지키기 어렵습니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쉽게 대충 살아라, 이런 일쯤은 하느님도 봐주실 것이다, 고달플 게 뻔한 하느님의 길을 포기하라는 유혹은 우리의 양심을 무디게 만듭니다. 나약한 우리가 겪는 하찮으면서도 때로는 심각한 일상을 예수님도 광야 여정에서 겪으셨고 또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유혹자 앞에 예수님처럼 “사탄아, 물러가라.”(10절)고 당당히 외쳐보십시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유혹을 받은 곳이 낙원으로 바뀌어,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우리의 시중을 들 것입니다(11절).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예수님의 공생활철학 -박상대신부-
지난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되어 오늘 그 첫 주일을 맞이하였다. 파스카의 신비를 향한 사순 첫 주일에 들려주는 복음은 인류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공생활 준비로서의 40일간 광야생활을 언급하면서 그 마지막에 악마의 유혹과 투쟁이 있었음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인류구원계획은 이미 창조이전부터 준비된 것으로써, 때가 차자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셨으나(갈라 4,4참조), 인간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활 준비는 순전히 자신의 몫이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마태 3,13-17),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마태 4,12 이하), 즉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40일간 주야(晝夜)에 걸쳐 기도와 단식으로 ‘대피정’을 하셨다는 짤막한 언급(마태 4,1-2)과 그 마지막에 세 차례나 악마의 유혹을 받으신 내용(마태 4,3-10)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이 이야기는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 마르코는 아주 간단하게(1,12-13), 마태오(4,1-11)와 루카(4,1-13)는 거의 같은 내용으로 장황하게 기록하였다. 오늘 복음의 내용이 공관복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 예수님의 세례와 갈릴래아 전도시작 사이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이 대목이 예수님의 세례와 공생활의 시작과 무관하지 않다는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의 유혹사건이 예수님의 세례사건뿐 아니라 공생활의 시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공관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세례사건에서 확실한 것은 세례를 받은 예수님께서 비둘기 모양의 성령과 함께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을 통하여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시편 2,7 참조)로 계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는 악마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3절; 6절) 따라서 오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악마의 유혹을 받았고, 또 이를 물리쳤으며, 하느님의 아들로서 공생활을 시작함으로써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가 ‘하느님의 일’로 승격(昇格)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광야에서 보낸 40일간의 시간은 공생활을 위한 예수님의 ‘대피정’으로 간주되며, 대피정 중에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받으신 세 가지 유혹에서 ‘공생활을 위한 예수님의 다짐과 각오’, 즉 ‘예수님의 공생활철학’을 추론(推論)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추론되는 예수님의 공생활철학(公生活哲學)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 철학은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를 관통하고 담아내는 정신(精神)이요, 가치관(價値觀)이며 사고(思考)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악마의 유혹과 이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대처(對處)를 통하여 예수님의 공생활철학을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세례 때 예수님 위에 내린 비둘기 모양의 바로 그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갔다는 점과 유혹의 장소가 광야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한편으로는 야훼 하느님의 끊임없는 보살핌과 다른 한편으로는 모세를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백성의 수많은 원망과 불만, 투정과 시험(탈출 14,11; 15,24; 16,2; 17,2; 민수 11,1.4; 20,3)으로 아로새겨진 40년의 광야생활을 상기시킨다. 즉, 예수님의 광야생활 40일과 악마의 유혹사건 속에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생활의 역사가 유비적으로 담겨있다는 말이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도 없이 하느님을 원망하고 시험하며, 투정을 부리고 불만을 표했지만, 오늘 유혹을 당하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어떤 종류의 투정도 불만도 원망도 시험도 하지 않으시며, 또 이를 통하여 어떠한 기적을 구하지도(1코린 1,22) 않으신다. 이는 순전히 공생활을 위한 자신의 몫이었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취하신 공생활의 철저한 기본노선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공생활철학은 악마의 유혹과 이에 대한 대처로 정립된다. 악마의 유혹과 예수님의 대처를 각각 정리해보자. ①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돌을 빵이 되게 하라.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신명 8,3)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②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성전 꼭대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보라. 천사들이 너를 지켜 주리라.(시편 91,11-12) ->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신명 6,16) ③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 ->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 6,4-5.13-15) 예수님께서 악마의 모든 유혹을 성경의 말씀으로 대처하신 점이 특이하다. 성경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요 그분의 뜻이기도 하다.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의 정체와 예수님의 대처가 담고 있는 정신은 무엇인가? 딱 부러지게 언급된 것은 아니나 그것은 ① 빵을 만들어라: 물질의 유혹 -> 청빈, 하느님의 말씀, 진리의 정신, ② 밑으로 몸을 던져라: 기적과 시험, 권력과 특권의 유혹 -> 믿음과 봉사의 정신, ③ 엎드려 경배하라: 아부, 출세, 영달, 영광과 명예의 유혹 -> 유일신 하느님, 사람은 평등, 사랑과 인간 존엄성의 정신으로 정립될 수 있다. 예수님의 공생활철학은 이렇게 진리, 봉사, 사랑의 정신으로 요약된다. 물질의 풍요함을 누리고, 되도록 많은 힘과 능력과 권력을 쌓으며, 입신출세하여 명예와 영광을 누리고, 이를 과시하며 살아가는 것은 분명 인생의 성공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로 통하는 힌두교(Hinduism)가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필히 가져야 하는 것으로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손꼽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힌두교의 속 깊은 가르침은 다르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는 이를 가지려는 사람이 타인의 것을 취하거나 빼앗아야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기름으로 불을 꺼야 하는 원리’로 되풀이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재물과 권력과 명예는 결코 영원할 수 없고 한시적이다. 잠시 사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할 수는 있으나 영원한 것이 될 수 없는 이곳에 사람의 모든 것을 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활철학은 철저한 진리와 봉사와 사랑에 있다. 이 철학은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와 그분의 인류구원사명을 견인(牽引)하는 정신으로 드러날 것이다. 앞으로도 악마의 유혹은 다양한 각도에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계속될 것이지만, 그러나 어떠한 경우든 인류의 구원을 가져올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향한 그분의 인생여정은 바로 이들 정신으로 아로새겨질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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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