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영웅(英雄)이여, 검(劍)이여! 백매(白梅)가 사계(四季) 내내 피어 있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香氣)가 좋은 차(茶)를 마실 수 있으며,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 인을 볼 수 있는 곳. 혹, 월하(月下)라면 탄금(彈琴)에 취해 볼 수도 있는 선경(仙境)이 있다. 표화궁(飄花宮). 검황성에서는 가장 귀골(貴骨)이고, 무공은 알지 못하나 무림계의 군사(軍 師) 노릇을 하는 일대재녀(一代才女) 예운령(芮雲玲)이 머물러 사는 곳이 다. 예운령은 채미원(菜薇園)에 나가 있었다. 그녀는 두 명의 시녀와 더불어 배 추밭을 가꾼다. 그녀는 연월지(燕月芝)와는 달리, 사치를 모르는 여인이었다. "내게 호미를 다오, 소소(少少)야!" 예운령은 일하기 좋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백의를 좋아한다. 그녀는 지금도 백설처럼 흰 옷을 걸치고 있었다. 질이 좋은 비단옷도 아니고, 수수한 베옷이다. 하나 예운령이 걸치고 있기에, 그 옷은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신의(神衣)로 보이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여성스러운 여인 이다. 진실이 가라앉아 있는 흑진주(黑眞珠)의 두 눈, 예지를 품고 있으면서도 좀 처럼 벌어지지 않는 진홍색 딸기빛의 입술, 희고 가늘고 긴 목덜미에, 만지 면 으스러질 듯 작고 연약한 손목을 가진 여인. 그녀는 표화궁주이고, 십대수재(十大秀才)를 이끌고 검황성의 내외단(內外 壇) 사이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다. 풍군제검대를 이끄는 무옥이 손이라면, 예운령은 검황성의 머리에 해당한 다. 최근 들어서는 강호계에 혈사(血事)가 없다. 분주히 검황성의 정문을 오가 던 기마의 행렬도 보기 힘들다. 풍운제검대의 활약으로 인해 강호계의 거마들은 거의 다 세력을 잃었다. 무옥의 탁월한 활약이 공헌한 바 컸고, 무옥이 떠나기 이전 무옥에게 늘 조 언을 하는 예운령의 예리한 판단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농부(農夫)의 여인처럼 대지 위에 있는 미녀. 그녀는 남방여인답게 아주 작 은 발을 갖고 있었다. 십 세 때 전족을 풀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완전한 전족이 되어 발의 크기가 손바닥보다도 작아졌을 것이다. "소소야, 어서 호미를 달라니까?" 예운령은 김을 매는 중이었다. 폭우가 심했는지라 이랑이 다 허물어졌다. 그리고 잡초들이 채미원 곳곳에 자라고 있었다. "얘야, 왜 아니 주느냐?" 예운령이 말할 때. "곧 비가 올 듯한데, 호미질이라니! 설마, 천하재녀 예운령이 천기(天機) 살피는 것도 잊었단 말인가?"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손 하나가 다가섰다. 작은 호미가 쥐어져 있는 손, 그 손은 예운령의 시비인 소소(少少)의 손이 아니었다. 그 손은 잘 웃을 줄 모르는 무사 무옥의 손이었다. 시녀 소소는 무옥 뒤에서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무옥은 예운령 바로 곁까지 다가섰다. 예운령은 무옥의 체온과 체취를 그제 서야 느끼고서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언제 오시었습니까, 이사형(二師兄)?" "막 왔다네, 사매!" 무옥은 호미를 예운령에게 건네 주었다. 예운령의 볼은 풋사과가 익은 사과 로 물들 듯이 붉게 물들어 갔다. 채미원의 미녀. 그녀는 무옥이 바로 앞에 있자, 본래의 차분함을 잃어버리고 호흡을 조금 거칠게 몰아쉬었다. 무옥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며시 웃었다. "설마… 닷새 만에 표화궁에 온 내게 차 한 잔 대접하지 않겠단 말인가, 사 매?" "차(茶)요?" "아마… 할 말이 많을 거야. 사매 또한 그것을 알고 있겠지. 그러하기에 호 미질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것일 테고!" 한 잔의 차(茶). 무옥을 위해 달여진 용정차(龍井茶)이다. 예운령은 재빨리 궁장으로 갈아입고 서재로 들어섰고, 그 사이 소소가 무옥 에게 차를 끓여다 준 것이다. 예운령의 서재에는 무수한 서적이 있다. 이 곳은 무(武)보다는 문(文)을 사 랑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십대수재(十大秀才). 나이가 가장 적은 이라 하더라도, 이미 칠십(七十) 고령에 이른 강호의 은 현(隱賢)들을 칭한다. 이들은 바로 예운령의 사부(師父)라 할 수 있다. 예운령은 동서고금의 학문에 대해 십대수재를 통해 두루 섭렵할 수 있었고, 이 년 전부터는 십대수재가 오히려 난해한 일에 대해서 예운령에게 물을 정 도가 되었다. 묵향(墨香)과 차향. 그리고 무옥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묘한 사내의 체취. 이러한 정경이야말로 재녀 예운령이 내심으로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한 폭 의 그림일 것이다. 연월지가 없었더라면, 둘은 벌써 맺어졌을 것이다. 하나 둘 다 비슷한 성품인지라, 연정(戀情)에 대해서는 아직 한 마디도 말 한 바가 없었다. "차 맛은… 역시 좋아, 사매!" 무옥은 짧은 시간에 뜨거운 차를 훌훌 들이켰다. '핏기가 흐리다. 아아,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니신 이사형도 역시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하시다. 나는 알 수 있다. 이사형의 깊은 고뇌(苦惱)를.' 예운령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 고 무옥이 그녀를 통해 의견을 들으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무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사매가 알다시피, 나는 무사 가문 출신이 아니네. 그리고 나는 검황성의 창건에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네!" "…" "그래서 나는 열심히 했고, 뜻한 바를 이룬 것이네. 한데, 그것이 오늘 풍 운(風雲)을 일으키게 되다니! 후후… 세상은 역시 알지 못할 구석이 많은 곳 같네!" 무옥의 미소가 유난히도 고독해 보였다. "어찌할 작정이신지요?" "대사형을 만날 생각이네!" "만나서요?" "나를 의심하지 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작정이네!" "아…!" "바란다면, 성주(城主)가 되는 데 내가 적극 돕겠다고 말할 예정이네!" "그래서는 아니됩니다. 대사형은 작은 그릇입니다. 그분은 불행히도… 태상 호법 노릇을 하기에도 역부족이십니다!" 예운령의 표정에 냉기가 돌았다. 평상시에는 매우 온화하나 공적인 일에 대해서는 꽤나 차가운 데가 많은 여 인, 예운령. 그녀는 마음 속으로만 흠모하고 있는 무옥의 얼굴을 빤히 보다 예리한 어조 로 이어 말했다. "조속히 원로회의(元老會議)를 개최해야 합니다!" "원로회의?" "천하도처에 계신 검황성의 일백팔좌(一百八座) 후견장로(後見長老)들을 불 러, 대사를 의논해야만 합니다. 사실… 새벽부터 그것을 쭈욱 생각하고 있 었습니다!" "으음, 무숙아 대사형을 몰아내자는 것인가?" "모든 것을 사필귀정(事必歸正)케 하자는 것이지요." 예운령은 소매를 가볍게 뿌렸다. 순간, 한 장의 밀봉된 서찰이 탁자 위로 굴러 떨어져 내렸다. "우연히 입수한 것입니다! 지난밤, 제가 거느리고 있는 문반십이객(文班十 二客)이 입수한 것입니다!" 예운령의 눈빛은 아주 차가웠다. 그녀는 어지간한 일로 심경을 흩트리지 않는다. 노여워하기 전 한 번 더 생 각하고, 일을 벌이기 전 또 한 번 생각하는 게 바로 그녀의 장점이다. 그런 그녀의 호흡이 지금은 몹시 차갑고 거칠었다. 마치 환류의 호흡처럼… 봉서는 무옥의 수중에서 찢어졌다. <팔지(八地)의 전군(全軍)을 십 일(日) 안에 부를 것! 그 어떠한 하명(下命)이 있더라도 즉시 이행할 수 있도록 제반의 준비를 갖 추고, 검황성에 모일 것. 단, 강호계가 알지 못하도록 은밀히 행동할 것!> 매우 힘찬 필체이다. '대사형의 글씨다.' 무옥은 입술을 질끈 물고 있었다. 무숙아, 그는 무옥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무옥을 노리고 망을 치밀히 짜고 있었다. 사실, 무숙아는 반년 전부터 반 은둔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만 만 나고 있지 무옥과 연월지, 환류, 예운령과는 얼굴도 마주 대하지 않았다. 천룡경 무숙아는 무옥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무옥이 떠돌이 마부로 강호를 전전할 때도 그는 강호의 실력자였고, 검황성 에 들어오기 이전에도 가장 수하가 많다는 뇌천장군부(雷天將軍府)의 주인 이었다. 천룡경 무숙아, 그가 마침내 무옥을 제거하기 위한 모종의 일을 시작한 것 이다. "뇌천장군부의 사병(私兵)들이 대거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이사형 을 제거하기 위해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으음…!" "일은 지극히 심각합니다." "…" "대사형은 빠른 속도로 마인(魔人)으로 화하고 있습니다. 장로원로(長老元 老)들을 제거하고, 중원대동맹을 자신의 아성(牙城)으로 만들어 중원패자 (中原覇者)가 되려 합니다. 얼마 전에는 삼비(三秘)를 끌어들였습니다. 무 려 오백만 냥(兩)의 황금을 주고!" "오, 오백만 냥?" "모두 공금(公金)이지요." "…" "대사형은 질투와 분노로 인해 이성을 잃고 있습니다. 한 일 년 정양하게 하지 않는다면, 큰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 무옥은 의자 깊이 몸을 파묻었다. '대사형… 일이 그 정도까지 갔단 말이오?' 그는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 '모두… 내 탓인 듯하오.' 무숙아는 그에게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무옥은 거의 고아로 자랐고, 가난하고 약한 마부 소년 옥아(玉兒)에 불과했 다. 무옥보다 십 년 일찍 태어났고, 이십 년 먼저 강호인이 된 무숙아는 무 옥을 아주 귀여워 해 주었고… 무옥도 그를 친형처럼 따랐었다. 무옥의 무씨 성은 사실 무숙아의 성을 따온 것이었다. 한데, 두 사람 사이는 분열되어 있었다. 철저하게… "내일 새벽, 은밀히 이사형을 뵐까 합니다. 소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 때 다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후부터는 각별히 신변을 조심하십 시오. 만에 하나, 암살자(暗殺者)가 올지 모르니!" 예운령이 조심스레 말하자. "암살자는 없을 거야. 왜냐하면, 암살당할 정도로 약한 자는 아니니까!" 대검황성(大劍皇城). 중원무림계의 방패가 되는 곳이다. 천하인들이 희망을 걸고 있는 곳. 이 곳은 언제부터인가 삼분(三分)되고 있 었다. 첫째 세력(勢力). 이들은 가장 수가 많다. 이들은 무숙아를 추종하고 있고, 자신들이 갖고 있 는 지위를 지키기 위해 혈안(血眼)이 되어 있다. 이들은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을 겁내고 있다. 이들은 검황성 창건 당시의 상부 세력으로, 하부에서부터 성장하는 제이의 세력을 지극히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이의 세력. 후기지수(後起之秀)들의 모임으로, 무옥과 환류가 이들을 대표하고 있다. 검황성의 실질적인 고수들로, 이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검황성은 이루 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혈기 넘치는 무사들은 무옥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친 지 오래이다. 숫자는 일만 정도이나, 무공은 가장 강하다. 싸움이 벌어진다면, 아마도 승 리는 무옥 측 무사들이 차지할 것이다. 세 번째 세력은, 전체를 생각하여 중재를 하려는 세력이다. 우두머리는 예운령과 십대수재. 이들은 검황성에 내분이 있을 경우, 변황의 무리들이 중원을 침공한다 여기 고… 무숙아와 무옥 사이의 알력을 약화하는 데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 었다. 또 하나의 세력이 있다면, 가장 태평스러운 세력일 것이다. 검(劍)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직 선혈(鮮血)의 의미를 모르는 명문 귀족의 후예들. 이들이 있기에 검황성은 화려하게 축조되었고, 천하에서 가장 방대 한 면적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의 대표자는 바로 연월지(燕月芝)였다. 어이된 일인지 연월지는 폐관(廢關)에 들었다. 그 오만하던 연월지가 병 (病)에 걸렸다는 것이다. 연월성궁(燕月聖宮) 사람들은 겁을 덜컥 먹고 연월지에게 천년삼왕(千年蔘 王)을 달여 먹이고, 연자탕(蓮子蕩)을 먹였다. -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테야! 절대로… 그 누구도! 연월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쓰러졌다고 했다. 그녀가 왜 비룡전(飛龍殿) 근처에서 혼절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무옥(武玉). 연월지의 격렬한 구애를 사양한 풍운아 무옥. 그는 석상이 되어 천룡전(天龍殿)에 머물러 있었다. 두 시진이 흐르는 동안 시위(侍衛)도 시비(侍婢)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옥이 왔다는 정식 통고가 있었고, 무옥 자신이 친히 천룡전 안으로 들어 섰는데에도 무숙아는 나타나지 않았다. 본시 환류는 오찬을 기해 무숙아를 살해할 예정이었다. 무옥은 환류를 가로막고 대신 자신이 왔는데, 무숙아는 무옥을 보고 싶지도 않은 듯 얼굴도 나타내지 않았다. 정오부터 노을이 질 때까지, 신월(新月)이 샐쭉한 모습으로 핏빛 노을의 막 을 찢으며 떠오를 때까지… 무옥은 무숙아가 나타나기를 끝까지 기다렸다. '대사형, 한 번 보기만 하면… 아무리 깊은 오해라도 풀릴 것이오.' 무옥은 거대한 대전에 홀로 머무르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그는 철저한 승부(勝負)의 기질을 갖고 있으면서도, 강호의 무사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학자와 비슷했다. 유심한 눈빛, 고독하고 단아해 보이는 인상. 풍운제검대주 무옥이라는 이름이 없다면, 아마도 과거에 낙방하고 쓸쓸히 떠도는 낙척서생으로 보일 것이다. 끼익-! 거대한 철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무옥이 상상하지 못한 사 람이었다. "우라질! 정말 백치구려." 툴툴거리며 천룡전 안으로 걸어드는 사람, 그는 장도(長刀)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바로 환류(桓流). 그는 애써 혈도를 풀고 제 발로 비룡전 연무관을 빠져 나왔다. 무옥은 그의 혈도를 심하게 점하지 않았고, 환류는 그 덕에 스스로의 운기 행공(運氣行功)만으로 혈도를 풀고 내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비웃는 듯한 가운데, 분노의 그늘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사형이 어디에 가 있는지도 모르고, 아직까지 여기서 기다리시오?" "대사형이 어디에 갔는지 아느냐?" "크크… 그는 즐기러 갔소!" "즐기다니!" "그는 검황십팔존자(劍皇十八尊者)라는 신입고수들과 더불어 진탕 마시러 하산(下山)했소!" "검황십팔존자라니? 그런 사람도 있느냐?" "오늘 새벽에 생겼다는 구려. 크크… 나하고 이사형이 실랑이를 벌이는 그 때에… 크크… 검황성에 위대한 역사를 이룩할 십팔고수가 들어섰다는 구 려." 환류의 눈은 여전히 이글이글거렸다. 그는 누구보다도 무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옥도 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환류가 무옥만한 고수였다면, 아마도 그는 이미 검황성의 대권(大權)을 휘 어 잡고 무숙아를 처단했을 것이다. 검황십팔존자(劍皇十八尊者)! 무옥마저도 처음 듣는 명칭이다. 무숙아가 새로 끌어들인 고수 십팔 인은 무숙아가 무옥을 강하게 견제하기 위해 끌어들인 자들로, 정말 놀랍게도 무옥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들 이었다. "보겠소? 그들의 명단(名單)을? 사실… 나는 애써 혈도를 풀고 신룡전으로 가다가 나의 수하에게서 그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여기 온 것이오!" 환류는 손을 떨고 있었다. 그는 한 장의 쪽지를 내미는데, 그 위에는 십팔 인의 별호가 기록되어 있었 다. <통천인마(通天人魔), 타배마군(駝背魔君), 음령살객(陰靈煞客), 혈의유객(血衣儒客), 귀검마제(鬼劍魔帝), 사천존(死天尊), 천풍오살(天風五煞)…> 무옥은 쪽지에 가득 적힌 이름들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검을 불끈 쥐었고, 그의 미간에는 땀방울이 매달리고 있었다. "이들이 검황성 사람이 되었다니… 정말이냐?" "내가 거짓말 할 사람 같소? 우라질!" "으으, 누가… 누가 이들을 끌어냈느냐?" "검난향이라는 계집이 첫 번째 낸 꾀가 그것이라는군요. 훗훗… 이사형의 손에 잡혀 검황탑에 잡힌 거마들을 끌어내어 태상호법 휘하 고수로 만든다 는 것!" 십팔존자. 이들은 무옥이 잡아들인 강호의 거효(巨梟)들이었다. 무옥의 수하들은 그들 을 잡기 위해 무수한 피를 흘렸다. 한데 무숙아는 그들을 가차없이 자유인으로 만들었고, 그들은 무숙아에게 고마워하며 무숙아를 종주(宗主)로 섬기게 된 것이다. 무옥은 반 시진을 더 천룡전에 머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떠나는데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옥은 너무도 철저하게 무시를 당한 것이다. 꽈르르릉- 꽈앙-! 노을이 찢어지기 시작한다. 장대비가 퍼부어지며, 노을이 일순 흑막(黑幕) 으로 변화했다. 비(雨), 그리고 뇌(雷)… 검황성은 다시 한 번 폭우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폭우 속, 환류는 무옥의 그림자가 되어 따르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형(兄)의 직속호법이 될 것이오. 아무리 강한 형이라 하 더라도 측간에 갈 시간이 있고, 공상에 빠질 시간이 있을 게 아니오? 그런 때 무숙아가 암습한다면… 큭큭… 형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꺾이고 말 것이오. 그래서 내가 당분간 형의 호법이 되어 주겠소." 환류는 이제 무숙아를 대사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콰앙-! 하늘은 울부짖었고, 모든 것은 폭우에 젖고 있었다. 비룡전 일대의 목련화(木蓮花)들은 천지개벽하는 듯한 광란의 회오리 비바 람에 휘말려 모두 다 낙화(洛花)가 되고 말았다. 자야(子夜). 환류는 장도를 든 채 일대를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아마도 아침 햇살이 나타날 때 까지 그는 비룡전 일대를 떠나지 않을것이다. "골치 아픈 녀석." 무옥은 연공실 문을 닫고 틀어박혔다. 연공관에는 하나의 암도(暗道)가 있다. 무옥은 암도를 통해 석전(石殿)을 찾아 들어가고 있었다. 천장에서는 찬물이 떨어져 내리고, 사시사철을 가리지 않고 골수(骨髓)를 얼리는 빙극지기(氷極之氣)가 흐르고 있다. 저벅… 저벅…! 무옥은 큰 걸음걸이로 석전 깊이 들어갔다. "이 곳에 와 본 지도 오랜만이군!" 그는 거미줄 덮인 석전 구석께로 다가서고 있었다. <천외비전(天外秘殿)> 천장에는 전서(篆書)로 글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여기 천하의 비밀이 있다. 비밀을 갖는 자, 바로 중원의 하늘(天)이 되리라!> 그러한 글도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이 곳은 중원제일지이다. 이 곳은 이백 년 전, 당시 천하백도계를 좌지우 지하셨던 십오노명숙(十五老名宿)이 건립하시었다. 네 분 노선생은 이 곳을 내게 넘겨 주시었고, 내가 그분들을 대신해 이 곳의 주인 노릇을 톡톡히 하 길 바라셨다!" 무옥은 벽 앞에 이르렀다. 벽에는 벽화가 있는데, 그 안에는 옷차림이 각기 다른 십오 인의 남녀 노년 배 고수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바로 중원십오기(中原十五奇). 이 곳 검황성의 대조종이 되는 사람들로, 중원사성은 바로 그들의 이 배분 아래 제자들이었다. 소림(少林) 사불선사(思佛禪師), 무당(武當) 옥정도장(玉鼎道長), 화산(華山) 군매서생(群梅書生), 아미파(峨嵋派) 금정대상인(金頂大上人), 곤륜(崑崙) 운학대선생(雲鶴大先生) 종천(鐘天), 개방구결제자(蓋 九結弟子) 풍진취개(風塵醉蓋), 천산제일인(天山第一人) 칠금비자(七禽飛子) 만리향(萬里香), 남해장교(南海掌敎) 일섬파천황(一閃破天荒) 육령산(陸令山), 오악산인(五嶽山人) 전소석(田少石)… 몇 시대 전의 인물들. 이들은 바로 무옥의 사부들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안에는 천하 십오 파의 진전비기(眞傳秘技)가 안배(按配)되어 있다. 그 것들은 현존하고 있는 백도절기 중에서 가장 강한 것들이다. 종류는 모두 오백 종(種). 그것을 일컬어 천비오백무학(天秘五百武學)이라 하며, 훗날 우리들을 대신 해 중원천하를 지킬 인연자(因緣者)에게 그것을 전하노라. 천비오백무학을 얻는 자, 바로 중원제일인이고… 그는 운명으로 네 가지 일 을 행해야만 한다. 사대파천(四大破天). 아무도 하지 못했던 네 가지 일, 그것은 누군가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그 것을 하지 못한다면, 중원혼(中原魂)은 영원히 살아나지 못하리라!> 이백 년 전에 쓰여진 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무옥에 불과했다. 무옥이 남달리 과묵했던 이유는, 죽은 중원사성을 통해 이 곳의 후계자로 지목을 받고 나름대로 한 가지 일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중원혼(中原魂)은 네 번에 걸쳐 살해되었다. 일컬어 사대겁(四大劫). 그것을 격파하는 것이 바로 사대파천이다. 혈겁(血劫). 패엽혼(貝葉魂)이라는 마교총사(魔敎總師)가 일으킨 가장 극랄하고 잔혹했 던 피의 계절을 말한다. 그는 마공을 발휘해 십오만 고수를 모았고, 그들은 무자비하게 중원천하를 도륙내기 시작했다. 계절이 일곱 번 바뀌는 가운데 천하 백오십칠 파가 그들에게 파멸당하고, 칠만 사천 명이 죽었다. 만에 하나, 기문(奇門)의 육 은자(隱者)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중원은 완 전히 죽었을 것이다. 혈겁을 일으킨 패엽혼의 무공은 극강(極强)하다. 여 기, 그의 무공 흔적을 남기려 한다. 그러하기 위해, 노납 사불(思佛)은 스 스로의 육신을 버리노라!> 그러한 글 아래, 시신(屍身)이 하나 앉아 있었다. 깡마른 노승의 시신, 결가부좌(結跏趺座)를 틀고 합장(合掌)을 한 노승의 전신에는 무수한 흔(痕)이 있었다. 가사를 찢어 버리고, 머리 위를 그어 버린 무수한 흔적. 그것은 무수히 다 른 빛깔이었고, 각기 다른 깊이였다. 한데, 그것은 정확히 같은 순간에 만들어졌다. 중원십오기의 우두머리였던 소림사 사불선사. 그는 중원이 알지 못하고 있 는 중원의 선각자였다. <노납의 몸에는 장흔(掌痕)이 있다. 그것은 마교총림에서 가장 강한 마공에 당한 흔적이다. 노납은 달마역근경(達魔易筋經)을 참수(參修)하여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 體)가 되었는 데에도 단 일 장(掌)에 쓰러지고 말았다. 혼(魂)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천 리(里)를 달려 여기 와 적멸(寂滅)하노니… 후인은 노납의 몸에 새겨진 혈겁의 흔적을 통해, 악마세력의 가공(可恐)할 무공 수준을 판단하기 바란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 그것을 꺾을 무학을 창안하기 바란다.> 사불선사. 그는 그러한 글을 새기고 나서 패엽혼이라는 자를 찾았고, 예상했던 대로 일 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도 그는 쓰러지지 않고 여기 와 조용히 결가부좌를 틀고 해탈열반에 들었다. 혼은 죽었으되 몸은 금강불괴로 남아, 아직도 역사를 전하고 있었다. 전신에 새겨진 삼백육십오 개의 흔적. 금강불괴마저 분열시키는 악마의 강기, 그것은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가 공할 악마의 수법이었다. "아직 못 찾았습니다. 그러한 장초를 꺾을 수법을… 하나, 살아 있는 한은 찾아 내게 될 것입니다!" 무옥은 조용히 말하며 두 번째 자리로 갔다. 그 곳에도 한 구의 시신이 남 아 있었다. 옥정도장(玉鼎道長)의 시신. 그의 시신 역시 사불선사의 시신처럼 하나의 흔적을 새겨 넣고 있었다. <검겁(劍劫)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천마무후(天魔武侯)의 전설(傳說)에 의한 겁으로, 세력이 일으키는 겁 이 아니라… 단 한 자루의 마검(魔劍)이 천지를 종횡하며 일으키는 극란한 악마겁이다. 천마무후는 천축제일의 존재를 뜻하는 말이다. 그의 팔만사천검법(八萬四千 劍法)은 이미 신(神) 이상의 경지이다. 노납의 몸에 팔만사천검법의 흔적을 새기기 위해 천축까지 갔다 왔다. 흔적을 보는 자, 중원의 모든 무공을 뒤져서라도 팔만사천검법을 격파하는 검법을 창안하기 바란다.> 옥정도장의 시신에는 팔만 사천 개의 검흔이 남아 있었다. 미래를 걱정했던 중원의 선각자 옥정. 그는 훗날 중원이 천축무림계에 휩쓸 릴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몸을 살신성인(殺身成仁)해 버린 것이다. 그는 머나먼 천축국까지 가서 몸에 검흔을 새겨 왔다. 초인적인 의협심이 없었더라면, 감히 그러한 일을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아, 저는 중원백팔검보(中原百八劍譜)를 줄줄 외우는 처지인 데에도… 천마무후의 팔만사천검법을 꺾을 검초를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한데, 최근 내분이 생겨 검도수업(劍道修業)이 방해받고 있습니다." 무옥은 다시 탄식을 했다. 두 눈에서는 혜광(慧光)이 흐르고, 어깨를 타고 가공할 신기(神氣)가 흐르 고 있다. 위대한 패혼(覇魂)이 느껴지고, 인상은 강철처럼 굳어진다. 이것이야말로 아무도 모르는 무옥의 진면목이었다. 무옥은 사대파천(四大破天)의 숙명(宿命)을 갖고 있기에, 무숙아와의 알력 을 묵묵히 참아 내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의 그림. 그 안에는 천수불(千手佛)이 춤을 추고 있다. 화려한 꽃술을 흩뿌리며, 천 개의 손을 어지러이 흔들어 대며 빙그르르 도는 천수모니(千手牟尼). 차갑고도 아름다운 인상에, 냉정하면서도 고혹스러운 양면적인 모습을 겸비 한 기이한 천수모니도. 그것 역시 사대파천에 관련된 비도였다. <이 그림을 얻기 위해 곤륜제자(崑崙弟子) 팔백(八百), 개방제자(蓋幇弟子) 일천이백(一千二百), 남해제자(南海弟子) 삼천(三千)이 쓰러졌다. 이 그림은 봉황천주(鳳凰天主)의 침전에 있는 그림의 부도(副圖)로, 봉황천 이 하늘을 열기 위해 꼭 터득해야 하는 가공할 무공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일컬어 단장무(斷腸舞). 바로 화겁(花劫)이다. 펼쳐질 경우, 일백 장 안이 혈화(血花)에 뒤덮이는 가공할 무공이다. 우리들의 후예는 어떻게 하든 이 그림의 절기를 꺾을 절기를 연마해야 한 다. 그림에는 하나의 허(虛)도 없고, 결점도 없다. 더욱이 봉황천의 고수들은 자패(紫貝)를 장복하여 내공이 극강하며, 경신보 행이 지극히 빨라 나타나기만 하면 잡기 힘들다. 더욱이 그들은 비조봉황(飛鳥鳳凰)을 거느리고 하루에 만 리(里)를 넘게 간 다. 봉황천은 중원에 힘을 입증하기 위해 세력을 끝없이 기르고 있다. 대륙(大陸)을 짓밟기 위해 대해(大海) 칠십이 파(派)가 뭉쳤고, 강렬한 위 계질서를 만들어 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단장화(斷腸花). 그 존재는 봉황천에서 가장 강한 존재이다. 단장화는 숙명적으로 꺾어야만 하는 상대이다.> 그것이 세 번째 파천이었다. 마지막 파천, 야겁(夜劫). 그것은 하나의 수건이었다. 달(月)과 꽃(花), 두 가지 그림이 함께 그려져 있는 혈건(血巾). 그것은 사대파천의 네 번째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야월건(夜月巾)으로, 바로 야월화(夜月花)의 무리들이 신표로 삼는 것이다. 이것을 얻기 위해 오천 명이 피를 흘렸고, 무려 이십사 개 성상이 소비되었 다. 야월건은 밤의 상징이다. 그 밤은 중원에서 가장 깊은 밤이다. 야월화의 선조들은 중원무림계에 대해 지극히 배타적이었던 대원황실(大元 皇室)의 귀족들로, 중원을 고향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 강자에게도 강하고, 약자에게도 강한 자들. 그들은 황금(黃金)만 받는다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 그들은 중원의 병적 요소이니, 그들 모두를 양민으로 만들어 중원무림계에 밤이 사라지게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후예가 할 일이다.> 야월화(夜月花), 단장화(斷腸花), 천마무후(天魔武侯), 패엽혼(貝葉魂). 일컬어 사대마류(四大魔流)이다. 이들은 동시대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고, 서로 세력을 비교해 본 바도 없 다. 공포스러운 것은, 그들의 세력이 가장 가공할 수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이고 … 중원의 그 누구에게도 그들을 꺾을 무위(武威)가 없다는 것이었다. 검황성만이 그래도 최후의 보루였다. 성이 무너지면, 그들은 지체없이 중원 으로 들어선다. 무옥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그러한 일이었다. "참아야 한다. 나를 위해서도, 대사형을 위해서도, 우리들의 전원을 위해서 도…" 무옥은 입술을 악물고 있었다. 그는 이 곳에서 오백 일을 보낸 바 있다. 그는 이 안의 모든 것을 구 성 (成) 넘게 터득했다. 무옥의 무공 수위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세 배 강했다. 그러나 그가 적으로 생각하는 존재들은 그보다 두 배 이상 강했다. 우우웅… 웅…! 무옥의 애검(愛劍)이 운다. 애검이 운다는 것은 그의 마음 속에서 살기가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검(劍)아, 울지 마라!" 무옥은 검신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이 녀석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나의 친구였다. 한데… 아아, 이것이 이 순 간따라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진다.' 무옥의 입술은 짙붉게 타올랐다. 혈겁(血劫), 검겁(劍劫), 화겁(花劫), 야겁(夜劫). 아무도 도전하지 못했던 신성불가침한 악마의 존재들. 그들이 존재하고 있는 한, 중원은 평화로울 수 없다. "아아, 검아… 울지 마라… 울지 마라!"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