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원] 중원낭인 中原浪人(6) 운명이 부르는 소리

[콩 쥐]

제6장 운명이 부르는 소리


"너무도 완전한 실패다.  무옥, 그 놈은 이 일로  인해 지지자를 보다 많이 
갖게 되었고… 나는 비겁자로 낙인찍힐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흑포거한.
사자(獅子)와 같이 용맹해 보이는 거한.  그는 두 아름이 넘어 보이는 대리
석주(大理石柱) 팔십일 개(個)가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석전 아래 있었다.
바닥에는 진홍색 주단이 드넓게 깔려 있는데, 어찌나 푹신한지 디디면 발목
까지 푹 잠길 정도였다.
석전 내부를 장식한 집기들 역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이들이 걸치고 있는 의복은 하나같이 화려
했다. 지니고 있는 십팔반병기(十八班兵器) 또한 천 번 이상 단련해서 만든 
신병이기(神兵異器)들이다.
보광(寶光) 가득한 장소, 천룡전(天龍殿).
아직까지는 검황성에서  가장 많은 지지세력을 갖고  있는 무숙아가 종주로 
있는 장소이다.
무숙아는 전에 비해 말라 보였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기 위해 목숨마저 건 일대의 영웅.
무옥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는  무수한 지지자들에 휘감겨, 사자후를 터뜨
리며 척마멸사(拓魔滅邪)의 선봉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 무옥이라는 존재로 인해 그의 존재는 빠른 속도로 빛을 잃어 가고 있
었다.

'놈을 좋아했었다. 특히 놈의 천진한 눈빛을…'

우두둑－ 뚝－!

무숙아는 두 주먹에서 쇳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거머쥐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 깊고 유심한 눈빛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제는
그것이 공포스러울 정도이다. 가증스러운 놈! 속으로는 나를 살해하고 싶으
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다니… 그것이 더욱 공포스럽다.'

무숙아는 벌써 사흘째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무옥이 무엇인가를 저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옥은 한 가
지 일도 저지르지 않았다.
머리가 되어 주던 예운령이 떠나고, 수족 같던 풍운제검대가 떠나도 무옥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행동을 하고 있었다.

'놈을 거세(去勢)하려 했는데… 놈은 거세되지 않았다. 놈에게는 가공할 투
혼(鬪魂)이 있다. 죽어도 죽지 않는 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무숙아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무옥, 너는 결국 나를 그런 자로 만들려 하는구나!"

그런 자라니?
무숙아의 뇌리에는 어떠한 상념이 스쳐 가고 있단 말인가?

"좋아. 네놈이 바란다면… 해 주마!"

번쩍－!

무숙아의 눈에서는 살광(殺光)이 쏟아져 나왔다.
순간 그의  손은 품으로 들어갔다가 빠져  나왔고, 하나의 삼각소기(三角小
旗)가 끌려 나와 타오르는 진홍색 빛깔을 어지럽게 흘리기 시작했다.

천룡기(天龍旗)!

무옥이 지니고 있는 비룡무검보다는  조금 더한 권위를 지니고 있는 깃발이
다.
그것이 흔들리는 찰나, 일대에 시립해 있던 시위무사들 가운데 백팔 인(人)
이 포권을 취하며 앞쪽으로 나서고 있었다.
일사분란하게 걸어나오는 백팔 인.  이들은 포권을 거의 동시에 풀었고, 오
른손을 들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순간, 천룡전 안에는 백팔 인의 쌍동(雙童)이가 나타나고 있었다.
단아한 인상, 그리고 과묵해 보이는 청년.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제이계(第二計)를!"

"애송이를 쫓아 버리는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일백팔 인은 일제히 우렁찬 함성을 토했다.
아아, 이들은 모두 한 사람의 얼굴이지 않는가?
바로 무옥(武玉).
동시에 일백팔 인의 무옥이 나타나다니?

장관사(張管事).

주방의 십팔 관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검황성의 영웅들을 위해  영양이 많고 맛이 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을 십대
(十代)의 영광으로 여기던 사람.
무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중원에 어이해 검황성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져야 
하는지도 모르던 사람이다.
그는 처음으로 검황성에 대해 욕을 하고 있었다.

"더러운! 크으으… 무공을 믿고 나이 오십에 가까운 노부를 발로 차서 다리
를 부러뜨리다니!"

장관사는 분한 듯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백 일은 앓아 누워야 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장관사.
그의 순하디순한 입에서는 거센 욕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개새끼! 그런 놈이 총검대주(總劍隊主)라니!  검황성은 썩을 대로 썩은 장
소이다!"

초홍(初紅)과 아홍(雅紅).

검황성에서는 유일한 쾌활림(快活林)의 기녀들이다.
먼 발치에서 무사들이 웃통을 벗고  연마하는 것을 보며 가슴을 졸이고, 밤
이면 땀내음 범벅이 되어  와서 두주불사하는 영웅들을 바라보며 상냥한 미
소를 짓곤 했던 두 명의 기녀.
이들은 다시는 기녀 노릇을 하지 못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초홍은 얼굴의 반이 뭉그러졌고, 아홍은  팔 하나가 꺾여 불구가 되고 말았
다.

"술잔을 제가  엎지르고서는… 흐흑… 우리들이  엎질렀다고 우리들을 이런
꼴로 만들다니!"

"기녀는 인간도 아니란 말이냐? 흐흑… 위선자들아!"

그녀들은 치를 떨며 쾌활림이 떠나가라 울부짖었다.

－ 무옥(武玉) 그는 악마다!
－ 그는 인간의 탈을 쓴 야수(野獸)!

말이란 매우 빠른 속도로 전염이 되는 역병이라 할 수가 있다.
그 말은 어두운 곳일수록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일보다 타인의 일에 대한  말일수록 내용이 과장이 되
고, 비약되기 마련이다.
드넓은 검황성은 칠 일 동안 한 사람에 대한 욕지거리로 뒤덮이고 말았다.
욕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하급무사들이었다.  숫자상으로는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검황성의 최하위 부류 사람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사
람을 향해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 무옥이란 자를 제명하라! 칠  일 사이 육백 명(名)이 불구가 되었다. 놈
에게 맞아서.
－ 그 자가 하옥(下獄)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검황성을 나서겠다!

칠 일에 걸쳐 검황성을 황폐화시킨 사람 하나가 있었다.
나이 약관 이십에,  검을 메고 일 갑자  이상 강호계를 돌아다닌, 일대기인 
이상의 지위와 명예를 얻었던 한 사람의 고독한 영웅.
상부무사들 사이에서는 일대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한 사람.
이름은 바로 무옥(武玉).
그는 너무도 철저하게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안개가 피어 오르는 호수.
검황성 외성의 담을 넘어 이십오 리 가면 발견할 수 있는 반월호(半月湖)이
다.
갈대가 호반을 뒤덮고 있고, 편월(片月)이  호수 위에 도장 찍듯 자신의 얼
굴을 찍어 넣고 있다.
물은 금빛으로 반짝거리고, 갈대는  야풍에 뉘어지며 아스라한 신음 소리를 
합창으로 흘린다.
부서져 내리는 달빛 아래, 그는 죽간(竹竿)을 왼손으로 쥐고 있었다.

"칠 일 간… 내가 검황성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고? 훗훗…!"

그는 죽간을 쳐들고 죽간의  끝에는 은사(銀絲)가, 은사의 끝에는 피둥거리
는 금린어 한 마리가 낚여 나오고 있었다.

"제길, 웃을 일이 아니오. 형이  여기 와서 멍청하게 대낚시를 호반에 드리
우는 사이, 형은 역적이 되었고… 무숙아란 잡배(雜輩)는 사제를 잘못 두어 
고민하는 일대신협으로 부각되었소. 대체 무슨 작정으로 그 위기 가운데 거
처를 떠나 여기 와서 낚시를 하오? 칠 일 전 첫 번째 일이 터졌을 때, 형이 
여기 있는 줄만 알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는 않았을 게 아니오?"

환류.
그는 장도를 가슴에 안고 이끼 낀 바위 위에 서 있었다.
기실, 그도 지난 칠 일 간 공적인 일로 외부에 나가야만 했다.
모든 것은 무숙아의 가공할 암수(暗手) 아래 차근차근 진행이 되어 갔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무옥을 완전한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무옥이 한적한 반월호에서 칠 일을 보낸 이유는 단 하나.
칠 일 전, 태상호법의 서명이  찍힌 패(牌)를 들고 나타난 밀사(密使)의 비
밀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사형의 머리에서는 그런  잡스러운 발상이 나올 수  없다. 모르긴 해도,
나로 인해 거부(巨富)가  된 삼비(三秘) 중 하나인 만박서생(萬博書生)이란 
자의 발상이다!"

무옥은 의외로 태연자약했다.

"후후… 그래도 지혜만은 아직  찌꺼기나마 남아 있구려? 모든 것을 조작한
사람이 무숙아가  아니라, 만박서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훗훗… 하나 
그가 외부 인사가 아니라, 당당한 검황성의 신임장로가 되었다는 것을 아직 
모를 것이오!"

환류는 낄낄거렸고, 무옥은 처음으로 얼굴에서 평화를 깨뜨렸다.

"그들이… 공석을 차지했느냐?"

"그렇소. 칠 일 전의  일이오. 무숙아는 일인천하(一人天下)를 이룩하기 시
작했고, 이미 칠 성(成) 이룩했소. 소림하원으로 떠난 군사 예사저(芮師姐)
가 돌아오고, 풍운제검대가  세 달 후 회성한다  하더라도… 돌이키기 힘들 
정도요. 형에 대한 악성 소문은  형을 지지하던 노장로들의 신임을 깨어 버
렸소. 형이  정식으로 해명하지 않는다면, 이  지겹고 우스꽝스러운 싸움은 
무숙아의 완전한 승리로 끝을 내게 될 것이오!"

"…"

"어쩌겠소? 마지막으로 묻겠소."

"으음…!"

"기회는 아직도 있소. 오늘 밤은  특히 좋은 기회요. 나는 이미 암도(暗道)
마저 확보해 두었소. 형이 힘을 합한다면… 큭큭… 무숙아는 죽게 되오! 새
벽이 되기 전에!"

환류의 눈에서는 차가운 빛이 떠올랐다. 그는 진심으로 무숙아를 죽이려 하
고 있었다.
무옥은 그의 눈빛을 보며 입을 악물었다.

'대사형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검황성의 미래를 이끈 가장 위대한 도객
(刀客) 하나를 버린 것이다. 그는… 중원(中原)을 마비시키려 하고 있다.'

무옥은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죽이고 싶다, 그를!'

그의 손등은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처음으로 무숙아를 살해하고 싶
다는 강한 충동을 일으켰다.
부동대법(不動大法)을 수련해 마음이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무옥에게 
살심이 인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를 베고  싶다. 애검의 날에… 그  치졸한 자의 선혈을  듬뿍 먹이고 싶
다.'

무옥은 이를 악물었고, 자세를 경직시켰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강하게 불어닥친다. 꽤  낡은 백삼이 바람에 펄럭였고, 조금 단정치
못한 머리카락이 너풀거리며 얼굴을 간지렵혔다.
호수 위가 흔들리고, 달그림자가 어우러진다.
전 중원인의 희망으로 여기고 있는  꿈의 장소, 중원을 수호하고자 하는 결
의에 의해 이룩된 검황성(劍皇城).
성의 그림자도 바람에 흔들거렸다.

'나는 검황성에서 가장 강하다. 그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나는 천 인(人)을
상대로 싸우기에는 부족하고, 만  인(人)의 적은 더더구나 되지 못한다. 내
가 무숙아를 베면, 검황성은  반으로 쪼개진다. 그리고… 중원도 반으로 쪼
개진다.'

무옥은 언제부터인가 숨결을 끊었다.
고뇌하는 눈빛, 그것은 환류가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지겨워 하는 눈빛이
었다.

"대체 나는 모르고 형은 아는  것이 뭐요? 그것을 말해 준다면, 우라질! 나
도 형처럼 침묵하겠소!"

"…"

"우라질! 내일이면 사자들이 들이닥칠  것이오. 모르긴 해도 당분간은 하옥
될 것이고, 풍운제검대주 지위를  박탈당할 것이며, 형이 애써 차지한 경좌
(卿座) 역시 빼앗길 것이오. 다시  말해, 형은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오. 큭
큭…!"

환류는 비웃고 있었다. 세월과 무림의 비리를.

"하나, 아직 시간은  있소. 형이 암살자가 된다면,  나도 암살자가 될 것이
오. 아니, 형은 하지 않아도  좋소. 내게 허락만 해 주시오. 그리고… 형이 
풍운제검대주이기에 알고 있는  지하수도(地下水道)의 지형만 일러 주시오. 
그렇게 한다면, 그 길을 따라가서 무숙아를 죽이겠소."

"…"

"아마도 그는 검난향과 발가벗고 뒹굴고 있을 것이오."

"으음…!"

"시간이 없소!"

"…"

"사실, 형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원을 위해서요."

"중원!"

무옥의 눈빛이 이 순간따라 지극히 강했다.
중원(中原), 너무나도 많은 무사들의 피를 끓게 했던 말이다.
무옥은 물끄러미 환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한 시선은 철이라도 뚫을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무옥에 대해 아무리 나쁜  마음을 먹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시
선을 보기만 하면 무옥에게 빠져들게 된다.

"중원을 위해… 그는 죽어서는 아니된다!"

"예?"

"중원을 위해 그는 있어야 한다."

"어, 어이해…?"

"훗훗… 그래도  그는 강자(强者)다. 그 어떠한  마도세력과 싸워도 꺾이지
않을 무공과 방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너도 부정 못할 것이다."

"하… 하긴!"

"만에 하나, 네가 한 가지를 약속해 준다면… 너의 고민을 풀어 주겠다!"

"약속이라니, 무엇을?"

"백 일 안에 나만한 고수가  되어 주는 것! 그래서 나를 대신해서 검황성을
보호해 주는 것!"

"무… 무슨 말이오, 대체?"

"저기 호수를 봐라. 물(水)이란 저런 것이다. 고이면 썩게 되고, 흐르면 언
제나 맑다. 저 호수가 맑은 이유는, 저 위쪽에서 물이 흘러들기 때문이다!"

무옥은 오랜만에 웃고 있었다.
이 밤(夜).
운명이 갈라지는 밤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빛과 가장 아름다운 
눈빛이 함께 반짝거리는 그러한 밤이었다.
무옥은 담담한 눈빛을 던지고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응락만 한다면, 나는 이  곳을 떠날 작정이다.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고!"

검황성을 떠난다는 말. 그것은 무숙아의 집요한 공세를 피해 달아난다는 말
과도 같다.
청천벽력!
무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환류의 얼굴이 밀랍처럼 창백하게 변했으며, 
장도를 품고 있는 두 팔은 바람 앞의 미류나무 가지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우라질! 그래, 겨우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도망이란 말이오? 제길! 대체 내
가 어이해 그대를 형이라고 부르며, 계집에게도 주지 않았던 정(情)을 주었
단 말이오? 형 같은 비겁자에게!"

비겁자.
무사라면 가장 듣고 싶지 않는 말일 것이다.
환류는 얼굴이 희어졌다 붉어질  정도로 분노를 하는데, 무옥은 이상하게도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맹수(猛獸)는 초원(草原)에 살지 않는다.  먹을 것이 많은 초원은 모든 것
을 유약하게 만들어 버린다.  맹수는 거친 황야(荒野)에 산다. 그리고 가장 
높은 하늘을 나는 매(鷹)는… 가장 빠르다. 후후…!"

"웃다니? 도망칠 작정을 하고 웃다니?"

환류는 치를 떠는데.

"너의 애도(愛刀)를 빌려 주렴!"

무옥은 나직하게 말하며 달빛을 받고  있는 흰 손을 내밀어 환류가 품에 안
고 있던 장도를 손에 쥐었다.
그것은 거의 부지불식간에 벌어졌다. 환류는 손이 다가서는 것을 채 알아보
지도 못하고, 목숨보다도 귀히 여기고 있던 애도를 빼앗기고 말았다.

"대체 무슨 짓이오? 자결이라도 하겠단 말이오?"

환류는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무옥, 그의 자세가 아주  기이했다. 그는 도(刀)를 비스듬히 쳐드는 자세를 
취한 채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요한 호수(湖水).
무옥의 눈빛, 그림자는 호수에 담기고 있었다.
그리고 달빛은 그의 몸을 애무하듯이 핥았고, 그의 등 뒤로는 꽤나 긴 그림
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무… 무슨 짓이오, 그 자세는?"

환류는 격하게 소리치다가 입을 가볍게 벌렸다.
빛(光).
무옥의 손에 쥐인 장도(長刀)에서 돌연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가공할 도광이 일어나는 가운데.

"너는 먼저 나를 알아야만 한다!"

무옥은 나직이 말하며 달빛 속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리도 없이 상승기류를 타고 떠오르는 무옥의 전신에서는 환류가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잠경(潛勁)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르르르릉－!

뇌정(雷霆).
일순, 호면이 풍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살기에 찬 칼 울음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무옥의 몸뚱이는 오 장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대붕(大鵬)이 떠오르듯이, 그러나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떠오르는 무옥의 
수법은 환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검비행(馭劍飛行)의 절기였다.
중원의 최상승 수법. 아무도 얻지  못했다는 그것을 무옥은 벌써 몸에 익히
고 있었던 것이다.
일순, 무옥은 손을 쳐들었고.

치리리리－ 치리리리－!

번갯불이 토해지는 듯, 흰 빛줄기가 달빛을 가르기 시작했다.
한순간 달이 반으로 끊어지는  듯하더니, 흰 빛살이 백룡(白龍)처럼 호수면
으로 파고드는 가운데 거대하던 호수는 반으로 끊어지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릉－ 콰앙－!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치솟아 올랐다.
오 장 높이의 물보라는  호수가 도강(刀剛)으로 인해 반으로 갈라졌기 때문
에 벌어지는 괴현상이었다.
모든 것은 거의 한순간에 벌어졌다.
무옥은 사뿐히 지면으로 내려섰고, 예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환류의 가슴
에 고요히 그의 애도를 안겨 주었다.
전혀 지치지도 않은 기색과 표정, 호흡…
무인은 난생 처음으로  타인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천외비전(天外秘殿)에서 
터득한 절기를 시전한 것이다.

천뢰벽력도(天雷霹靂刀),
천불개정뢰도(天佛開頂雷刀),
풍뢰개벽참(風雷開闢斬).

무옥은 거의 동시에 세 가지 검초를 시전했고,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
을 해낸 것이다.
환류는 너무나도 기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그 정도였소?"

환류는 아래턱을 떨었다.
그는 이제야 무옥을 진짜로 알게  된 것이다. 무옥의 무공은 환류의 상상을 
세 배 초월했다.

"그 정도라면…  사성(四聖)이 힘을 합한 이상이고,  무숙아와 그의 도배는
단 십 검(劍)이면 도륙낼 수  있을 정도이며… 나 따위는 벌레로 볼 정도의 
신검지경(神劍之境)이오."

"녀석…"

무옥은 히죽 웃으며 환류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도 성내(城內)에서는 나보다  무숙아 대사형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비겁자가 되려 하는 것이다. 이제… 나를 알겠느냐?"

"알, 알 것 같기도 하오. 한데, 형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오?"

"글쎄…"

"형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오?"

"그것은… 저것이다."

무옥은 손을 천천히 쳐들었다. 그의 손에는 검은 하늘이 걸리고 있었다.

"대지(大地)에 군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한 것은 나의 적성에 맞지 않는
다. 나는 중원에서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초절정검도(超絶頂劍道)에 들어
서고 싶다."

"그… 그러한 경지가 있소? 형이  지금 내게 보여 준 경지를 능가하는 경지
가?"

"있겠지. 변황(邊荒)에도 있는데, 중원에 없겠느냐?"

"변… 변황?"

환류의 머리카락이 쭈뼛 치올랐다.

'그렇다. 형은 변황을 염려하고  있다. 살아나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변황을
… 형만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아아, 나는 이제야 형을 알겠다.'

환류의 눈빛이 시뻘개지고 있었다.

"형은 나를 어린아이처럼 울게  하는구려. 형이 어이해 그 고독(孤獨)한 수
업의 여정(旅程)에 올라야만 하는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 같기도 하오. 
하여간 형은 형이오."

환류답지 않게 그는 울고 있었다.
그는 울며 환하게  웃었는데, 그렇듯 환하게 웃기는  정녕 오랜만의 일이었
다.

－ 어디로 갈 예정이오?
－ 글쎄?
－ 얼마나 떠돌 것이오?
－ 나의 검(劍)이 하늘(天)을 끊을(斷) 수 있을 때까지, 십 년이든 이십 년
이든 간에!
－ 우라질! 나도 함께 가면 아니되오? 이 좁고 지겹고 권태로운 닭장에서?
－ 너는 남아야 한다. 너는 나를 위해 비굴해져야 한다. 부탁이다. 나를 위
해 비굴해져 다오!  나를 위해, 중원을 위해!  그리고 만에 하나, 대사형이 
암살당할 수도 있으니… 그것을  막아라. 삼비(三秘)에게 절대 들키지는 말
아야 한다. 너라면… 해낼 것이다!


총순찰(總巡察) 환류(桓流).
검황성의 삼인자인 환류가 최근  들어 문제를 부지기수로 일으킨 무옥 총검
대주와 심한 언쟁을 벌이다가 술에  만취한 채 천룡전을 찾았다는 것은, 그 
일이 벌어지고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성내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
그는 무옥을 역도(逆徒)라고 욕을 했고, 무숙아는 그를 일으켜 주며 눈물을 
흘렸다던가?
노을(紅霞) 속이었다. 병마(病魔)에  사로잡혀 거동이 불편하다고 알려졌던 
연월지(燕月芝)가 퍽이나 수척한 낯색으로 비룡전 어귀로 들어선 시각은.
무옥은 뜨락을 거닐고 있는데, 매우 고독해 보였다.
오늘 하루만 해도,  이십여 명의 원로(元老)들이 그를  찾아와 그의 가공할 
방종에 대해 질책을 하고 돌아갔다.
무옥은 원로들의 말을 묵묵부답 받아넘겼기에, 원로들은 무옥을 이중인격자
라고 심하게 욕을 해댄 상태였다.
환류마저 등을 돌린 이상, 무옥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풍
운검대는 이 사정을 모르고 멀리멀리 떠나가고 있고, 소림사로 떠난 예운령 
역시 이 일을 아직 알지 못한다.
검황성의 대권(大權)은 완전히 무숙아 손에 들어간 상태였다.
어쩌면 무옥으로 인해 검황성은  오히려 단합되었다 할 수 있었다. 하여간, 
검황성의 흑풍(黑風)은 이제 도를 넘고 있었다.
무옥이 곧  제명(除名)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라 하더라도  익히 아는 일이었
다.

"나 때문인가요? 내가 부담스러워서 이 곳을 떠나려 하는 것인가요?"

연월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리고 있었다.
무옥이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그녀는  무옥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이 없었다.
무옥이 사악한 음모에 의해 반  제명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가장 많
이 운 사람은 연월지였다.
그녀의 오만은 꽤나 감소되었다.

"나는 이사형을 잘 알아요. 그대는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검황성에 피
해가 될 만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니예요. 그대는… 분명 대사형이 펼친 가공
할 음모에 걸려들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도 변명도 않다니… 혹, 저의 연정
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까?"

연월지는 며칠 사이, 많이 수척해졌다.
그녀가 앓고  있는 병은 상사병(相思病)이었다.  그것은 어떠한 영약으로도 
치료를 할 수 없는 병이었다.
연월성궁(燕月聖宮)은 뇌천장군부만한 세력은 없으나 황금(黃金), 신병이기
(神兵異器), 기진이보(奇珍異寶), 개세영약(蓋世靈藥)…
무사라면 꿈에서라도 바라 마지않는 기진이보들이 허다하게 비장된 곳이 연
월성궁이다.
그 곳의 금력(金力)은 무너진 기문육가(奇門六家)에 버금 간다.
연월성궁 또한 검황성의 지주 중 하나였다.
눈물을 흘리는 연월지. 그녀의 일생  가운데 이 순간처럼 남의 눈에 아름답
게 보인 순간은 없을 것이다.

"지(芝)도… 소녀(少女)다운 데가 있는지 몰랐는데? 울다니…?"

무옥은 다가갔고, 소매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순간, 연월지는 처음으로 무옥의 다정한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총검대주라는 지위 때문에 늘 바쁘고, 차갑기만 했던 무옥. 그의 눈빛은 너
무나도 뜨겁고 다정스러워 보였다.

"아아…!"

연월지는 넋을 잃고 입을 가볍게 벌렸다.
무옥은 그녀의 뺨에 홍조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훗훗… 보기 좋은데, 뺨의 보조개가?"

"이사형은 좋은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
나의 눈은 틀림없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연월지 역시 미소를 되찾고 있었다.

'이분을 믿는다. 영원하도록…'

연월지는 말로는 형언 못할 안도감을 느꼈다.
무옥을 보는 순간, 그녀가 며칠간  갖고 있었던 여러 가지 번뇌는 봄눈처럼 
스러지고 마는 것이다.

둘은 일각 가량 마주 보고 있었다.
연월지는 무옥의 얼굴만 보아도 행복한 듯, 환하게 웃었다.
달이 떠오를 때, 연월지는 양 볼에 보조개를 판 채 입을 열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지요? 저 같은 말괄량이가 할 일은?"

"떠나는 것이다."

"어디로요?"

"파촉(巴蜀)으로!"

"연월성궁으로 돌아가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아아…!"

"떠날 때 나를 심하게 욕해 다오. 그러면… 그러면 된다!"

"욕을 하다니요?"

연월지는 질겁을 하는데.

"훗훗… 내가 밉지 않느냐?"

"으음…!"

연월지는 무옥의 웃음 가운데에서 깊은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다시 침묵(沈默).
이번 침묵 역시 연월지의 목소리로 인해 깨어졌다.

"운령에게는 뭐라 하지요?"

"전하지 않아도 된다."

"왜, 왜요?"

"그녀는 현명한 여인이니, 다 알 것이다."

"아…!"

연월지는 탄성을 발했다.
한 여인의 눈에 한 남자의  이처럼 위대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순간은, 역사상 이 순간뿐일 것이다.
사랑은 바로 믿음이다. 믿고 있다는  데에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었다.

"날이 차다. 돌아가라!"

무옥은 천천히 신형을 틀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거대해 보였다. 연월지는 망막 가득 떠오르는 무옥
의 뒷모습에 흠뻑 취해, 꽤 오랫동안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다음 날 새벽이 되기 전, 연월지는 무옥과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는 것이 파
다하게 소문이 났다.
연월지는 연월성궁  출신 가신(家臣)들과 더불어  칩거에 들었는데, 아마도 
그녀는 오래지 않아 검황성을 떠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 같다는 예측이 사
방에서 떠돌았다.
풍(風)… 운(雲)!
검황성이 생긴 이후,  이 날 같은 풍운은  없었다. 중원사성이 죽을 때에도 
이러한 흥분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옥, 그는 완전히 제거되었다 할 수 있다.
그의 직속 수하들은 머나먼  외단(外壇)으로 쫓겨갔고, 그의 지지자들은 무
옥에게서 무숙아 쪽으로 돌아섰다.
이제는 아무도 무옥을 돌봐 주지 않았다.

"살해해 버리면, 오히려 곤란합니다. 외단에 나가 있는 팔천 무사들이 무옥
의 복수를 하겠다며 검을 뽑고 달려들 것이 분명합니다. 무옥이란 자는, 이
런 상태로 내보내는 것이 대세를 위해 가장 좋은 처리입니다!"

말을 하는 자는 만박서생(萬博書生)이었다.
그는 천룡전주 무숙아의 문상(文相)이 된 상태였다.
무숙아는 모든 결정을 삼비(三秘)와 함께 하고 있었다. 삼비는 하나같이 가
공할 지혜와 무공, 수단을 지니고 있었다.
검황성의 어떠한 노고수도 삼비만은 못했다.
무숙아는 무거운 짐을 벗은 표정이었다.  그는 손에 축배의 잔을 들고 미소
를 짓고 있었다.

"훗훗… 하긴, 살려 주는 것도  좋지. 그 놈은 내공 일백 년 수위에 불과하
니, 혼자 몸으로는 재기할 수 없다. 훗훗… 그리고 지금쯤이면 강호의 일천 
방파(幇派)에 본좌의 서명이 적힌 배첩(配牒)이 날아들어 녀석을 강호 죄인
으로 낙인찍었을 테니… 놈은 강호에서 어떠한 동조자도 얻지 못할 것이다. 
미치광이들을 빼고는…"

무숙아의 눈빛은 흐릿했다.
그의 곁, 무림달기 검난향이 다소곳이 앉아 섬섬옥수로 무숙아의 어깨를 주
무르고 있었다.
그녀는 득의한 표정인데, 한 구석에는 꽤나 허탈하다는 표정이었다.

'용(龍)인 줄  알았는데, 호랑이(虎)도 되지  못했단 말인가? 고양이(猫)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 자가  가공할 일을 하리라 여겼는데, 그렇듯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다니…'

검난향은 묘한 심경에 빠져들었다.

'하긴, 아직 풋내기이지. 인생(人生)을 알기에는…!'

그녀는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무옥… 다른 장소에서  만난 자였다면, 처치하기보다 잡아서 색노(色奴)로
거느렸으리라. 그  자가 풍운제검대주만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자를 이런 
식으로 파멸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요사하게 웃는 가운데, 입술을 가볍게 벌렸다.

"그래도 살려 둘 수야 없습니다. 물론, 무숙아 나으리는 그 자를 관대히 용
서해 주었다고 소문이 날 것이고… 그 자는 광야(曠野)에서 조용히 죽게 될 
것입니다!"

차갑고 사악한 목소리가 무숙아의 시선을 돌리게 했다.

"표나지 않게 죽일 방법이 있느냐?"

"있습니다!"

"대체 누가…?"

"호호… 살인(殺人)에 대해서는 저희들보다 뛰어난 자들이 있습니다. 그 자
들이라면 만 리(里)를 따라가서라도  무옥을 살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들은 절대로 그 사실을 토로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 누가…?"

무숙아는 입을 가볍게 벌리다가는 인상을 경직시켰다.

'설마, 그들을…?'

무숙아는 무의식적으로 창을 보고 있었다.
창 밖 하늘에는  달(月)이 떠 있었다. 핏빛  달무리가 달을 휘감고 있었고, 
달은 그 안에서 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야월화(夜月花)?"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이라면 일 년이 걸리더라도 무옥을 추적하여 살해할
것입니다."

"으음…!"

"그 일에는 두 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옥을 멸구(滅口)시켜 후환
을 없앤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일로 인해 야월화를 견제하는 것입니다."

"견제?"

"무옥은 뛰어난 자입니다. 좀처럼  쉽게 잡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야월화 쪽 무리들은 그 일을 수치로 여길 것이고, 호호… 그러한 가운데 그
들은 중원대세에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웃음소리 가운데 밤이 익어 간다.
폐부를 푹푹 저미는 사기(死氣).
그리고 가공할 악마의 기운이 짙어 가는 가운데, 밤은 이미 깊을 대로 깊었
다.

[덕산]

잘 보고 갑니다.

[슈퍼맨]

잼 납니다

[얼음골]

고맙습니다.

[신두]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