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강호의 은자들 홍택호(洪澤湖) 변은 흰 갈대꽃의 바다였다. 바람이 불면 갈대꽃이 위로 날아오르는데, 그 모습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과 같다. 새벽의 홍택호는 일대 장관이다. 아스라히 피어 오르는 안개와 갈대꽃이 어 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들어 낸다. 이 일대에는 두 곳의 묘한 장소가 있었다. 양대 불귀(不歸)라 불리는 기이한 장소.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 다고 알려진 불회지처(不回之處)가 바로 그 곳이다. 이백여 년 전 두 명의 은자가 홍택호반을 찾았고, 그들은 자신의 은거지를 세상과 별리시키는 데 주력하며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처음 두 곳이 만들어졌을 때는 호기심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두 곳을 찾 았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그것은 잊혀졌으며, 이제는 누구도 찾아가지 않는 장소로 화하였다. <고뇌천(苦惱天)> - 시름이 있는 자는 여기에 들라! 마음 속에 번뇌(煩惱)가 심한 자는 여기 에 들라!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나올 수가 없는 천애(天涯)의 절연지(絶緣地)이 다. 그 곳은 사찰이면서도 사찰이 아니었고, 이 세상의 장소이면서 이 세상 이 아니었다. 화해(花海). 꽃의 바다에는 사계(四界)를 가리지 않고 기화요초(琪花瑤草)가 피어난다. 눈보라가 치는 겨울에도 수선화(水仙花)가 피어나고, 한여름에도 매화(梅 花)가 꽃봉오리를 터뜨린다. 백 묘(畝)에 달하는 드넓은 꽃의 바다에는 길(路)이 없다. 그리고 무작정 들어가는 사람이라면 십 보도 걷지 못하고 몽롱한 향기에 취 해 의식을 잃어버리게 되며, 깨어날 때에는 언제나 홍택호변에 있게 된다. "두 분 어르신네는 속세를 잊으셨소이다. 아마도… 어지간한 사연이 아니라 면, 강호로 출도하지 않으실 것이외다. 하물며 당세와 같이 평화로운 시기 에 두 분이 강호계로 출도한다는 것은 예측하기 힘든 일이외다. 소인은 십 칠 세까지 두 분 어르신네와 더불어 지냈소. 그분들의 가르침이 아니었더라 면 오늘날의 성취는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 외다." 사사운과 무옥은 홍택호변을 걷고 있었다. 사사운은 쉬지 않고 달리기 삼천 리(里) 만에, 옷이 땀에 흥건히 젖을 정도 가 되었다. 반면, 무옥은 이마에 땀 한 방울 매달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숨어 지내는 것은 죽을 죄라고만 하게." 무옥은 언덕 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사사운은 무옥의 인간적인 매력에 매료되었다. "그분들은 기인 중의 기인이시오. 그분들을 강호계로 끌어내려면… 어지간 한 계략으로는 아니됩니다." 사사운은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시시한 계략 따위는 필요 없네. 아마도… 내가 보낸 예물에 심히 만족해 할 걸세." "예물?" "이것을 갖다 주면 되네." 무옥은 소매에서 작은 상자 두 개를 꺼냈다. 흑단목으로 만든 나무상자 두 개. 그 안에 대체 어떠한 물건이 들어있길래, 강호를 등진 두 노기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단 말인가? 사사운은 의아한 가운데 상자 두 개를 받아 들었다. "그것을 전하고 동시에 이러한 말을 전하게. 나는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라 고." 무옥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 하여간 명하신 대로 하겠소이다." 사사운은 흑단목 상자를 품에 쥐고 위로 떠올랐다. 그는 한 마리 흑응(黑 鷹)이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는 듯, 빠른 신법을 발휘해서 언덕을 넘어갔다. 무옥은 팔짱을 낀 채 그가 사라져 가는 것을 봤다. "그들이 내 뜻을 알는지…" 항상 오색의 안개에 휘감겨 있는 뜨락이었다. 그 안에 허름한 베옷을 걸친 채 호미질을 하고 있는 늙은이 하나가 있는데, 그의 눈에는 검은 자위가 없 고 온통 흰자위뿐이었다. 화은(花隱) 천을술(天乙術). 걸어다니는 서고(書庫)라 불리는 사람이다. 그는 인간의 오욕칠정을 혐오하는 사람이고, 그로 인해 이백 년 동안 속세 에는 나가지 않는 지극히 괴팍한 사람이었다. 툭- 툭-! 그는 호미로 땅을 고르며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일 없다고 전해라." "사백조(師伯祖), 그는 기문육가의 공동전인입니다." 먼 발치, 사사운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사사운은 화은 천은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기문진도가 펼쳐져 있었다. 목소리는 오갈 수 있으되, 몸 은 오갈 수가 없다. 화은은 맑은 바람(淸風)과 달빛(月光), 그리고 새 소리만이 들어오기를 허 락받은 비밀의 화원을 만들었다. 그는 영약(靈藥)과 선초(仙草)를 기르며 이백 년을 살아왔다. "일이 없대두? 그가 천자(天子)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화은은 몹시 퉁명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혜로 인해 온 천하가 평화를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천하를 위해 말 한 마디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이백 년 전, 기문육가주의 꼬임에 빠져 혈풍(血風)을 일으키는 데 동참했 다. 그 일로 인해, 노부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은 피를 보았다." "사백조, 그 때 마교총림을 분쇄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새로운 화근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타인의 일이지, 노부의 일이 아니다!" "…" "게다가 나가 봤자 별일 없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승산(勝算)보다 패산(敗 算)이 짙은 싸움이기 때문이다!" "예?" "적은 사대마류의 조종이고, 수를 다 합한다면 일백만 명 가까이 된다. 한 데, 네가 종주(宗主)로 섬기게 된 그 사람은 단 일 인(人)이라고 하지 않았 더냐?" "그, 그렇습니다. 그는 세력을 거느리고 있지 않습니다!" "녀석, 그러면 알지 않겠느냐? 그는 광인(狂人)이다. 광인이 아니고서야 단 신으로 사대마류를 격파하려 하겠느냐? 이백 년 전에는 백도의 수십만 명이 그 일을 했으나 실패했다. 한데, 마도세력은 이백 년 전보다도 거대해졌는 데… 크크…혼자서 그들을 꺾겠다고?" 화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땅에 뿌리를 내린 듯 그 자리를 떠나지 않 았다. "세상이 복잡해지며… 큭큭… 광인이 많이 생겼지. 큭큭…!" 그는 음침한 웃음을 흘리다가 갑자기 입을 딱 벌렸다. 번쩍-! 그의 두 눈에서는 백광(白光)이 뿜어졌다. "그… 그것이 무엇이냐?" 그는 대체 무엇을 보고 이리도 놀라는 것일까? 하나의 그림(書)이었다. 네 번 접힌 채 상자 안에 들어 있다가 사사운에 의해 펼쳐진 것은, 먹물 투 성이로 보이는 장난기 섞인 그림이었다. 그 안에는 성(城)이 하나 있고, 성은 매우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으 며, 안개 비슷한 것이 성의 사방을 휘감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으으… 저 그림은…?" 기묘한 그림 한 장.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화은은 뇌전에 관통당한 사람 마냥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아니, 그가 받은 충격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화해를 꾸미고 은거한 이래, 지금 이 순간처럼 놀란 적은 없었다. 화은은 어느새 손바닥에 땀을 쥐고 말았다. "대, 대체 누가… 기문학(奇門學)의 그 어떤 선인(先人)도 이루지 못했다는 허무자재(虛無自在), 무위천연(無爲天然)의 신비도해(神秘圖解)를 그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화은의 몸은 수직으로 떠올랐다. 그는 실로 빠른 속도로 사사운 앞으로 떨어져 내렸고, 예물은 그의 주름진 손아귀에 쥐어졌다. "이… 이것을 누가 그렸느냐?" "그, 그것은 그분이 그린 것입니다. 한데, 그 그림에 이놈이 모르는 신비한 뜻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 그가 그렸다고? 무옥(武玉)이란 분이?" "예!" "멍청한 녀석! 진작 말을 해야지!" 화은은 화를 벌컥 내고 위로 날아올랐다. 치리리리릿-! "그는 이미 노부의 기문진학을 파괴했다. 그는 노부의 자존심을 꺾은 것이 다. 큭큭…!" 그는 안개를 가르며 사라져 갔고, 사사운은 어처구니없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모를 일이군. 어이해, 그 그림을 보자 미친 듯 행동하신단 말인가? 벌써 꺾이다니? 도대체 모르겠군." 사사운은 넋 나간 표정이 되었다. 무옥이 끄적끄적 그린 그림, 그것이 무엇이기에 화은 천을술이 그것을 보고 죽은 조상을 만난 듯 경악하며 몸을 날린단 말인가? 허무자연(虛無自然), 무위천연(無爲天然). 중원도가(中原道家) 최고의 경지이다. 이제껏 그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하 나도 없다. 사실, 화은은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 두문불출 은거를 하며 연구를 해 왔던 것이다. 신산위계(神算鬼計)의 고금제일인을 자부했고, 기문진학(奇門陣學)의 절대 자라고 자처했던 화은! 역시 그는 눈(眼)이 있는 사람이었다. 고뇌천불. 너무도 장대한 체격이 하나의 탑을 연상시킨다. 중원삼비의 하나인 축공부 도 그 앞에 서면 왜소해 보일 정도였다. 천생신력에 외가기공(外家奇功)을 익혀 기문육가주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사람. 지금 그의 철탑 같은 신체가 사시나무처럼 흔들리고 있다. 그에게 전해진 것은 붉은빛을 띠고 있는 일편옥(一片玉). 무옥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히 박혀 있는 핏빛의 옥돌이었다. 지인(指印)이 선명히 찍힌 금강혈옥(金剛血玉) 한 덩이는 고뇌천불을 떨게 했다. "으으… 십 갑자 내공(內攻)만이 금강혈옥을 훼손할 수 있다. 대잠원능력에 부동진기를 얻은 자만이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다." 고뇌천불의 고리눈이 찢어질 듯 불거져 나왔다. "아아, 마침내 위대한 중원혼이 깨어났단 말인가?" 보라!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초야삼은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고뇌천불. 그가 숨은 이유는, 패엽혼의 마공을 꺾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제껏 패엽혼의 마수(魔手)에 꺾이던 그 날 을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다. 그가 고뇌천을 만들고 은거하기 이백 성상. 그러나 그는 패엽혼의 마공을 꺾을 만한 무공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던 것은, 기다리라는 기문육가주의 말. 그런데 지금 그가 나타난 것이다. 금강혈옥에 지인을 남긴 사람, 그라면…! 고뇌천불의 거대한 몸뚱이는 어느새 이백 년 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고뇌정사 위를 수직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정말 모를 일이군. 이 세상이 피비에 젖는다 하더라도, 꼼짝도 하지 않으 실 듯하던 두 분 사백조가… 그분을 만나자마자 이팔(二八)의 소년(少年)이 된 듯 저리도 좋아하시다니! 대체 저분의 능력이 어느 정도이기에 저 고집 센 두 분 나으리들이 저분을 주인(主人), 주인 하며 따른단 말인가?' 사사운은 닭 쫓던 개 꼴이 되고 말았다. 화은 천을술, 어은(漁隱) 고뇌천불(苦惱天佛). 중원의 절대자들. 다시는 세상사에 상관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은거에 들었던 두 사람은 무 옥을 보기도 전, 무옥을 종주로 섬겼다. 천을술은 무옥의 지혜(智慧)의 한 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 신비도해에 의해 무옥의 능력을 알아보고 무옥을 주인으로 섬기게 되었고, 고뇌천불 역시 무 옥의 위대한 능력을 알아보고 이백 년 은거를 깨고 무옥 편 사람이 된 것이 다. 이들은 이백 년 전의 약속에 따라, 다시 강호로 돌아온 것이다. 무옥이 아 니었다면 그들을 죽일 수는 있어도, 그들을 굴복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화은 천을술. 그는 무옥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는 무옥과 동맹(同盟)을 맺는 것을 기꺼 이 수락하면서도 마교와의 싸움에서 이기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하는 눈치였 다. "기문육가 쪽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적어도 일만(一萬)의 일급고수(一級高 手)는 있어야 싸워 볼 만합니다!" "후후… 세상에 흔한 것이 사람이오. 한데 어이해, 나의 휘하에 사람이 없 는 것을 걱정하시오?" 무옥은 꽤나 태연자약했다. 그는 화은이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공청석유차(空淸石乳茶)를 말끔히 비우 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십 일 안에, 기대하고 있는 이상의 무공 수준을 가진 수하들을 보게 될 것 이오." "무슨 뜻이신지?" "후후… 나로 인해 일 년 넘게 밤잠을 설친 사람들이 있소. 나는 그들의 성 의를 생각해, 그들을 수하로 삼을 작정이오!" 무옥의 눈에서는 지혜의 빛이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천을술이라 하더라도, 무옥의 눈에 서 흐르는 그 빛의 의미만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무옥은 찻잔을 들었다. 그는 얼떨떨해 하는 천을술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훗훗… 화은은 내게 또 할 말이 있을 텐데?" "예?" "나의 초식(招式)이 내공에 비해 약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으시오? 주저 주저하는 모습이 그러한 말을 하고 싶은 눈치인 듯하군요." "저… 저는 할 말이 없게 되는군요." 화은 천을술은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그는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공은 고뇌천불에게 보냈던 일옥편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초식이었다. 패엽혼에게 기문육가와 초야삼은이 당한 이유는 내공의 열세도 있었지만, 초식의 변화에 뒤졌기 때문이었다. 패엽혼이 터득한 백팔 종의 마공, 그 현란한 변화를 막을 초식은 현재 존재 하지 않는다. 천은술은 무옥의 전신을 이미 수십 차례 훑어본 후였다. 그러나 무옥에게는 어떠한 무공을 익혔다는 특징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유심한 눈빛, 단아한 동작… 문사의 모습이나 다를 바 없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의 우수(右手)에서 떨쳐지는 일 검(劍)을 막을 사람은 … 없을 테니까!" 무옥은 무사치고는 몸이 둔중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는 쇠 내음이 흘러 나왔다. "당분간은 좌수(左手)가 큰일을 해야 하오. 이 녀석이 우수를 대신해, 큰일 을 해낼지 걱정이오." 무옥은 자신의 오른팔과 왼팔을 번갈아 흔들어 보이며 중얼거렸고, 천을술 은 그의 말뜻을 알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고뇌천불, 그는 염주를 굴리며 잔뜩 흑운이 드리워진 하늘가로 시선을 고정 시키고 있다. 천기를 살피려는 것일까? '이백 년 은거에 든 까닭은, 용을 만나기 위함이었으리라. 이번에 닥쳐 올 겁난은 그 때와는 비교도 하기 힘들 것이나, 다시는 마(魔)에 굴복당하지 않으리라. 어린 주인을 기다린 뜻, 바로 그것이리라!' 풍운! 조만간 닥쳐 올 거대한 폭풍. 그것은 천 년 무림 사상 가장 강력한 폭풍이 었다. 그리고 그 폭풍의 시작은 검황성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중원대동맹(中原大同盟)의 종주라는 영광스러운 기치 아래 벌써 십일 년에 걸쳐 중원무림계에 군림을 해 온 검황성. 이 곳의 분위기는 무옥이 있던 사절의 분위기와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첫째,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사이에 거벽(巨壁)이 쌓여져 내성과 외성을 철저하게 격리하고 있었다. 높이 칠 장(丈)에 두께가 이 장(丈). 벽은 무숙아의 뜻에 의해 쌓여졌다. 그는 만에 하나, 들어설지 모를 자객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거벽을 쌓은 것이다. 하나 그로 인해 성내에는 무수한 분열이 일어났으며, 검황성이 축성될 때 중지를 모아 이룩한 팔괘변환대진(八卦變幻大陣)은 깨어진 상태였다. 둘째, 검황성에는 새로운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두 가지 무사 집단으로, 무숙아의 친위조직이었다. 검천폭풍위(劍天暴風衛). 숫자는 삼천(三千), 이들은 은포(銀袍)를 걸치고 신병이기(神兵異器)를 하 나씩 지니고 있다. 이들은 무숙아의 후광 아래, 휘하의 모든 무사들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었다. 검황신풍위(劍皇神風衛). 숫자는 일천(一千), 가장 가공할 무공을 갖고 있는 자들이고, 금포(金袍)를 걸치고 있다. 이들은 내성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이 하는 일은 무숙아 주위를 철통같이 호위하는 일이었다. 검황신풍위의 우두머리는 바로 축공부(祝公夫). 그는 무숙아의 지지 아래 검황성의 대권(大權)을 장악하고 있었다. 검황성은 이전의 검황성이 아니었다. 의풍(義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지극히 괴이한 요기(妖氣)가 검황성의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자욱이 퍼지는 사악한 기운, 그 기운은 대체 어떠한 이유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강호백도에게서 등돌림을 당하고 있다고는 하나, 검황성의 규모는 여전히 거대했다. 검황성 내에서 이전의 검황성과 가장 비슷한 장소는 단 한 곳이었다. 풍운제검전(風雲帝劍殿). 검황성의 외성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십층고루(十層高樓)이다. 일대의 정경 은 지극히 화려했고, 그 안에 기거하고 있는 시비(侍婢) 종자들의 옷차림은 매우 부유해 보였다. 이 곳은 바로 풍운제검대의 팔천 무사(武士)들을 위한 새로운 거처이다. 무숙아는 풍운제검대의 무사들을 호법 이상으로 대접해 주었다. 무옥이 제거된 이상, 그들은 반발하기 쉽다. 그들의 무옥에 대한 충성심은 자타가 공인한 상태. 무숙아는 그들의 심기를 다스리기 위해 예우를 최상으로 해 주고 있다. 하나 풍운제검대는 전과 같이 거친 전포(戰袍)를 걸쳤고, 아무리 좋은 대접 을 받는다 하더라도 무숙아에게는 절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굴복한 것이 아니라 참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바로 무옥(武玉)의 화신들이었다. 그들은 천하가 인정하는 싸움의 달인들이다. 그들이 건재하는 한, 검황성은 안전하다 할 수 있다. 제검풍운대의 신임 대주는 환류(桓流). 그는 일 년 사이 꽤나 말라 보였다. 그는 무숙아의 주구(走狗)로 소문이 나 있었고, 과거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 하던 사람들은 그의 등에 대고 침을 뱉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풍운제검대 무사들도 그가 말할 때에는 언제나 그에게 냉소를 던졌다. 하나 환류는 언제나 묵묵부답이었고, 그는 타인의 평판에는 아랑곳하지 않 고 제검풍운대주로서의 일을 하고 있었다. 바람이 강한 날, 환류는 뜨락을 거닐고 있었다. 낮게 깔린 먹장구름은 달빛을 가로막았다. 환류는 굳은 신색으로 뜨락을 걸어다니는데, 허리에 매달린 장도(長刀)는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흔들흔들거렸다. '오늘도… 세 번이나 칼을 뽑고 싶었다.' 환류의 몸에서는 살기(殺氣)가 흐르고 있었다. '무숙아가 검난향과 더불어 주연을 베푸는 것을 볼 때, 칼로 그들을 참하고 싶었다. 그것을 참느라… 이렇게 되었다.' 환류는 손바닥을 펴 봤다. 그의 손바닥에는 피멍 다섯 개가 있는데, 그것은 그가 손을 꽈악 쥐느라 손 바닥에 생긴 손톱자국이었다. '두 번째의 순간은, 축공부란 위선자 놈이… 크으, 남몰래 강호의 미인을 사황성에 끌고 들어와 유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그의 눈은 죽어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은 살아 있었다. 무옥이 떠날 때보다 더 강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세 번째의 순간은, 무숙아로 인해 검황성의 세력이 지난해보다 반으로 줄 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이다.' 우둑- 뚝-! 주먹 쥐어지는 소리가 드세다. "하나, 나는 이제 알고 있다. 내가 그를 죽여서는 아니되는 것을! 그는 어 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이제야 나는 무옥형(武玉兄)이 중원을 위해 그를 베 지 않아야 했던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환류는 하나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백목련화(白木蓮花)를 좋아했던 청년. 그의 체취는 뜨락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대체 형은 어디에 있는 것이오? 아아, 날마다 형이 돌아와 나와 술을 나눠 마시는 꿈을 꾸고 있다오.' 환류의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이제껏 잘 참았으나, 아마도 오랫동안 참지 못할 듯하오. 사실, 나답지 않 게 꽤 오래 참았소!" 환류, 그가 건재하고 있기에 그래도 검황성의 틀이 유지되고 있다 할 수 있 었다. 무숙아는 술이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지경에 처해졌고, 대소사는 삼비(三 秘)의 손에서 비밀리에 처리되었다. 그들은 검황성의 금은자(金銀子)를 빼돌렸고, 그로 인해 의혈한들이 수없이 검황성을 떠나갔다. 어디 그뿐이랴? 검천폭풍위(劍天暴風衛)나 검황신풍위(劍皇神風衛)에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마도인(魔道人)들이었다. 그들의 발호로 인해, 검황성은 균열이 가고 있었다. 환류가 안간힘을 다해 막고 있기는 하나, 검황성은 뿌리째 썩어 가고 있었 다. "사람들은 이제야 안다. 무옥형의 실력을, 그가 검황성을 검황성으로 만든 사람이었음을… 사람들은 이제야 안다. 하나, 그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아 아, 그는 대체 어떤 하늘 아래 떠돌고 있단 말인가?" 환류는 밤을 잊고 있었다. 밤잠을 설치고 뜨락을 오락가락거리는 것은 그의 최근 습관이었다. - 드디어 찾아 냈습니다. 이번만은 절대로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를 경동(驚動)시키지 않기 위해 조용히 접근해 가고 있습니다. - 무옥(武玉), 그는 홍택호반의 강호춘(江湖春)이라는 주루(酒樓)에 머물 러 있습니다! - 이번만은 어김이 없이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 우리들의 이목(耳目)만은 여전히 훌륭하군. 중원이 아무리 높다고는 하나… 호호… 어찌 우리들의 이목을 벗어나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까르르 웃은 사람. 그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차림새였다. 걸치고 있는 옷은 분명 사내의 옷인데,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며 몸매의 요염함은 분명 여인이었다. 반남반녀(半男半女). 분명한 것은, 얼굴이 지극히 추악하다는 것이었다. 야월화(夜月花). 밤의 이름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밤의 율법을 지키고 있다. 그 안에는 가공할 불문율이 있는데, 그것은 태어나자마자 신축성이 좋은 면 구로 얼굴을 가린다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 사람의 개성적인 얼굴을 없애는 데에 있다. 야월화에는 사람이 없다. 야월화에 있는 것은 밤의 살수들 뿐이었다. 중원무림계의 영원한 이단자(異端者)로 불리는 무리들. 이들은 이제껏 한 번도 실패를 하지 않았고, 실수를 하지 않았다. "호호… 밤의 율법은 지켜지리라. 과거에 늘 그래 왔듯이!" 초산랑(楚山娘)이라는 여인은 남자처럼 입을 크게 벌리며 웃고 있었다. 희디흰 치열이 꽤나 아름답게 보였다. 추악의 극을 달리는 얼굴, 그 얼굴 또한 타인의 얼굴일까? 인간성이 제거된 생활을 하는 야월화의 무리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표독하다 고 알려진 여인, 초산랑. 그녀는 즐거운 듯 웃으며 허리에서 검을 끌어올렸다. 길이가 한 자 다섯 치. 이름은 벽뢰(碧雷).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꼭 한 치의 날(刃)이 필요할 뿐이지. 그 이상 을 쓴다는 것은 사치일 뿐이다!" 강호춘(江湖春). 그 곳은 얼마 전 네 사람에 의해 전세되었다. 이소이노(二少二老). 이들은 함께 어울려 술을 마셨고, 낚시질도 다녔다. 세 사람은 죽립으로 얼굴을 가렸고, 한 사람만이 본래의 얼굴을 하고 다니 는데…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한 쪽 어깨를 조금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 약간 허약해 보이나, 전체적으로 보아 어떠한 기품을 느끼게 하는 그러한 용모였다. 호숫가. 자욱하게 안개가 쳐지고 있다. 네 사람은 밤낚시를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었 다. "고기가 잘 물리는군요. 미끼가 좋은 탓이겠지요?" 체구가 지극히 장대한 사람, 그는 마치 하나의 탑(塔)과 같았다. 걸치고 있 는 옷은 낡디낡은 승복(僧服)이었고, 양 손목에는 염주(念珠)가 걸려 있었 다. 승려가 낚시를 하다니? "벌써 이천(二千)입니다!" 호미를 허리에 차고 있는 노인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피식 웃는다. "속하들은 이제 물러가야 한다는 것이 유감입니다. 주인님께서 어이해, 저 흉칙한 자들을 단신으로 가로막으시려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야월화(夜月 花)의 살수들을!" 인상이 날카로와 보이는 청년. 그는 육중한 장검 한 자루를 등에 비끄러매 고 있다. "이번 낚시는 더 큰 그물질을 위한 하나의 준비 작업일 뿐이오. 가장 위대 한 투망(投網)은, 검황성에서 벌어질 것이오. 이번 일에 있어 중요한 것은, 천기를 누설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오! 일이 어찌 되든 간에, 나의 명이 있 기 전에는 솜씨를 발휘하지 말고 암중에 만사를 처리하시오." 백포청년, 그는 나이가 가장 어려 보이는데 일행의 우두머리였다. 아아, 그는 바로 낭인(浪人) 무옥(武玉). 그는 초야삼은(草野三隱)과 더불어 벌써 칠 일을 보냈다. 그 사이, 그는 초 야삼은과 흉허물 없는 사이가 될 수 있었고… 장래의 계획을 면밀하게 세워 놓을 수 있었다. 지금 안개가 호반을 덮고 있는 가운데, 괴영이 나타나고 있었다. 슷- 슷-! 갈대밭을 따라 다가서는 자들, 수로(水路)를 따라 헤엄쳐서 다가서는 자들, 어옹(漁翁)으로 화신한 채 쾌속선(快速船)을 몰며 호반으로 다가서는 사람 들, 나무숲에 은잠(隱潛)하기 시작한 자들… 일대에는 이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이틀 전부터 무옥의 눈에 뜨일까 조심조심해 가면서 일 마장 이내를 새까맣게 뒤덮고 있었다. 타파의 무리라면 열 명만 모여도 소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지금, 일대에 모여들고 있는 자들은 이천여 명이라는 숫자에도 불구 하고,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무옥과 초야삼은이 아니라면, 그들이 일대를 포위했다는 것을 발견해 내지 도 못했을 것이다. "걱정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 떠난다는 것이!" 사사운은 살기가 강해지자, 좌불안석이 됐다. 그는 검황성행(劍皇城行)을 명령받았다. "아아, 주인의 신비한 저력은 아무래도… 아무래도 걱정입니다." 화은 천을술, 그는 파촉행(巴蜀行)을 명령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과묵한 표정의 구 척(尺) 거인(巨人) 철탑은 소림사행(少林寺行)을 명령받았다. 그는 삼은 중 가장 강하다. 하나 그는 진정으로 불도에 심취했기에, 무옥은 그의 주인 자격이라 하더라도 그에게 살인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해서 그는 소림사로 가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예운령(芮雲玲)을 암중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 것이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면, 안심하고 떠나겠소이다!" "무엇이요?" "중과부적일 때, 가차없이 도망치신다는 약속!" "훗훗… 그럴 일은 없겠으나, 대답을 바란다면 약속해 드리겠소. 사실, 탈 출하는 데에는 나를 따를 사람이 없을 거외다." 무옥의 웃음에는 가식이 없다. 오랜 고난의 세월 가운데 그의 의지는 강철같이 되었고, 기문육가의 무공을 터득한 후 그는 인간적인 미소를 찾을 수 있었다. "하여간 어서 떠나십시오. 야월화는 저만 노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율법을 미루어 보건대, 그들은 저만 노릴 것입니다!" "주인, 주인의 목숨을 야월화에게 청부한 자는 무숙아란 자이겠지요?" "글쎄…" "글쎄라니요? 뻔한 일이거늘…" "훗훗… 그가 아닌 듯하오. 말하자면… 세월(歲月)일 게요." 무옥은 다시 낚시를 호수에 던졌다. 이제까지의 대화는 의어전성술로 이루어졌다. 타인들이 보기에는 네 명의 낚시꾼이 수초(水草)가 많은 목을 지키고 앉아 낚시질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행복한 나날 되세요
고맙습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