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사산무련을 그대에게 갈대밭 가운데, 어떠한 것이 머물러 있었다. 호흡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신음 소리도 나지 않았으나, 사람이 거기 있다 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가장 강한 자다.' 무옥은 전신이 뻣뻣해짐을 느꼈다. 일백팔 인의 합격술(合擊術)을 단신으로 격파한 무옥이었으나, 신비하게 일 어나는 힘을 느끼며 석고상처럼 단단해졌다. 찌리리리릿-! 예리한 기운. 피부로 느껴지는 기운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가서는 기운이었 다. 십검풍백에게서 눈을 감고 감각을 단련받지 않았더라면, 그 기운이 다가서 는 것을 느끼지 못했으리라. '으음, 그리고… 가까운 곳에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바람에 파문이 일어나는 호수(湖水), 그리고 흔들리는 눈빛이 있었다. 흑진주처럼 까아만 두 개의 눈빛. 무옥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두 눈빛 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잘룩한 허리와 펑퍼짐한 둔부의 돌기. 사내의 차림새를 하고 있으나, 육체의 굴곡은 지극히 아름다운 추녀 하나가 갈대 사이에서 무옥을 보고 있었다. '죽여야 한다. 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이를 악무는 여인의 손에는 하나의 검이 쥐어지고 있었다. 벽뢰(碧雷). 뽑혀지면 목숨 하나를 거두어야만이 검집 안으로 되돌아간다는 마검(魔劍) 이다. 그것은 원국황실(元國皇室)의 전가보검(傳家寶劍)이다. 흰 손은 검자루를 꽈악 쥐며 땀에 축축이 젖었다. '바보같이! 내가 사내의 아름다움에 홀리다니…!' 여인은 진기를 일주천(一週天) 운용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의 숙명(宿命)을 잊을 정도로 동요하다니! 어리석게도 저 사내를 죽이면 아니된다는 마음을 먹다니…' 여인은 누구일까? 너무나도 아름다운 눈망울과, 너무나도 추악한 얼굴을 갖고 있는 여인의 몸 은 조용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죽이자! 그러면 번뇌(煩惱)도 죽으리라.' 슷-! 작은 여인은 지극히 경미한 파공성과 더불어 사라졌다. 그리고 무옥은 처음 으로 회의하는 눈빛이 되었다. "사라졌다. 나의 감각 안에서!" 그는 전율하고 있었다. 기문육가의 무공을 완벽히 터득하고 강호에 나온 무옥이다. 그는 천 인(人)의 공력을 한몸에 지니고 있고, 야수의 감각을 오감에 터득 하고 있었다. 한데, 방금 전 느낀 기이한 기운은 일순 그의 감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초감각을 발휘하기 시작할 때였다. 돌연, 그의 고막 속으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뜻밖에 재미있는 놀이를 구경하게 되는군!" 어디서 흘러드는 목소리일까? 그 소리는 천리전음술(千里傳音術)에 따라 흘러들고 있었다. "놀라지 말게. 검웅(劍雄)! 아니, 무옥(武玉)이라는 젊은이!" 목소리는 일 마장 밖에서 들려 왔다. 그렇게 먼 거리에서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당세무림계에서 열 명도 되지 않는다. 대체 누구일까? 누가 무옥에게 전음을 보내는 것일까? "노부는 승자(勝者)를 좋아하는 사람이네." "…" "이긴다면 축하하는 의미에서 예물을 주겠네. 물론, 진다면 하는 수 없는 게고!" 목소리는 점점 흐려졌다. 그것은 꿈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는 신기루 처럼 흐려졌다. '승자를 좋아한다고?' 무옥은 눈가를 꿈틀거렸다. '나를 알고 있다니… 강호의 누구일까?' 무옥의 생각이 거기에 미칠 때였다. 갑자기 등판을 향해 무엇인가가 다가섰 다. 치리리릿-!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한 줄기 푸른 번갯불이 있다. 갈대밭에서부터 폭사되어 나오는 벽뢰(碧雷)! 푸른빛은 일순 십 장 허공을 꿰뚫고 무옥의 등판 쪽으로 파고들었다. "내게 다시는 고뇌를 주지 말라!" 차디찬 목소리가 들리며 푸른빛은 하늘과 땅을 하나로 이었다. 벽력성이 일어났고, 지반에 균열이 가며 흙바람이 일어났다. 벽뢰는 땅에 흙구덩이 하나를 만들었고, 그로 인해 흙바람 자욱이 일어났 다. 한데, 무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지 않았는가? "아… 아니? 가루가 되어 부서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허공에 걸린 작은 그림자. 벽뢰검을 움켜쥐고 둥실 떠 있는 그림자는 바로 초산랑이었다. 그녀의 눈은 크게 확대되었고, 앞가슴은 터질 듯 팽팽히 부풀어올랐다. "대체 어디에 갔단 말인가?" 초산랑이 까무러칠 듯 놀라 때였다. 일순 미풍이 불며, 그녀의 뒤쪽 갈대밭에 흰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청년, 그는 바로 무옥이었다. "십천환(十天幻)은 사술인지라 한 번도 쓰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낭자 덕에 그것을 써먹게 되었소!" 무옥은 섭섭하다는 표정이었다. 십천환법(十天幻法)! 절대 쓰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가공할 수법이다. 무옥은 초산랑의 일격을 피하기 위해 십천환 중 하나인 영환법(影幻法)을 시전했던 것이다. "언… 언제 거기로 갔느냐?" 초산랑은 발끈 화를 내며 쌍수를 휘저었다. 피이이잉-! 마검 벽뢰는 소수(素手)를 떠나 무옥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거석을 쪼갤 듯한 기세로 날아드는 벽뢰! 무옥은 검이 바로 앞으로 다가서는 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호오, 부자 낭자로군? 그리 귀한 물건을 함부로 던지다니?" 그는 웃으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초산랑의 손만큼이나 흰 손이 활짝 펼쳐졌다. 우아하고 유려한 동작 가운 데, 벽뢰검의 속도가 돌연 줄어들었다. 무옥은 이전의 무옥이 아니었다. 그의 무공은 찰나적으로 배로 늘어났다. 무옥의 손에서 몽롱한 백무가 일어나면서 벽뢰검의 허리를 휘어 감는데, 그 순간 벽뢰검의 속도가 급격히 감소가 되었다. 천마접인(天魔接引). 이십팔 종 실전무예 가운데 하나이다. 팟-! 벽뢰는 무옥의 손에 쥐어졌고, 무옥의 미소는 짙어졌다. "야월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은 모양이군? 병장기로 이리도 귀한 것을 쓰 다니? 검자루에 박힌 오행신주(五行神珠)만 해도 오십만 냥은 나가겠는데?" 그가 히죽거리자. "닥, 닥쳐라! 악마!" 초산랑의 눈빛은 여지없이 흐트러졌다. 그녀는 철저히 조롱당했다는 충격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색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면구를 쓰고 있기라도 한 듯이. "하하… 살수무정(殺手無情)이라던데, 감정의 기복이 심하군?" 무옥은 더 크게 웃었다. 초산랑은 바로 그 모습에서 너무나도 큰 전율감을 맛봐야만 했다. 하이얗게 반짝거리는 흰 이가 해맑다. 관옥의 이마에는 젊음이 생기가 감돌 고 있고, 오뚝한 콧날과 단아한 입가에는 빠져 나오지 못할 유혹의 함정이 있다. '아름답다. 너무도…' 초산랑은 무옥의 외모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초산랑은 이를 악물며 내공을 십이 성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무옥! 네가 죽으면 내가 살고, 네가 살면 내가 죽는다!" 츠으으으으-! 환녀십팔변(幻女十八變). 야월화 비전의 수법으로 내공의 힘을 발휘해, 허공 가득 그림자를 흩뜨리는 수법이다. 동서남북의 하늘에 초산랑의 몸뚱이가 떠오른다. 모든 것이 다 실상(實像)으로 보이는데, 무옥은 수많은 그림자 가운데 유독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쓸 것 없소, 낭자! 낭자의 심장이 뛰는 한은, 어떠한 환술을 쓰더라도 나를 미혹시킬 수 없소이다!" 무옥은 가공할 감각으로 진짜 초산랑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장이 뛰는 한은 무옥의 이목을 속일 수 없다. 초감각은 무옥이 지닌 무수한 능력 가운데, 가장 신비한 능력이다. 츠으으- 츠으으-! 초산랑은 더욱 빠른 속도로 신형을 회전시켰다. 무수히 나타나는 환영(幻影). 어지간한 사람은 그림자가 벽을 이루며 빙글빙글 도는 데에서 의식을 혼절 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무옥은 팔짱을 낀 채 눈길만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다. "훌륭한 비마표묘(飛魔飄妙)!"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 그 곳엔 어김없이 초산랑의 두 눈이 있었다. 휘휙- 휙-! 초산랑은 더욱 빠르게 신형을 이동시켰다. 자욱한 연무가 일어났고, 바람 소리가 강하게 일어나며 청력을 어지럽혔다. 하나, 무옥은 여전히 초산랑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 낼 수 있었다. "설화난락(雪花亂落)-!" "…" "핫핫… 창궁혈영비(蒼穹血影飛)에 이어 과천마성(過天魔星)! 핫핫… 이번 에는 음혼불산(陰魂不散)!" 무옥의 시선은 여지없이 초산랑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몸을 높이 띄워 올려도, 바람 가운데 숨어 들어도, 초산랑은 어떻게 해서도 무옥의 시선을 따돌릴 수 없었다. 한순간. "좋아, 동귀어진(同歸於盡)이라도 하겠다!" 초산랑은 치를 떨며 운진 가운데에서 몸을 빼내며 들이닥쳤다. 우장(右掌)에서는 수라혈인(修羅血印), 좌수에서는 비선마라추(飛線魔羅鎚) 가 시전되며 십 장 안이 일순 흑풍에 뒤덮였다. 우르르르릉-! 천지개벽(天地開闢). 갈대밭이 초토화되고, 핏빛 안개가 오십여 장 안을 노을처럼 물들였다. 붉은 강기와 흰 강기가 동시에 휘몰아쳐 나가는데. "역시 명불허전이오. 낭자, 그러나 초살수가 되기에는 역전의 경험이 부족 하고 내공이 모자라는 구려." 그는 우수를 비스듬히 그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상대를 보지 않고 손을 쓰는 듯했다. 손은 초식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단조롭게 허공을 끊어 나가는데, 기이하게도 초산랑이 일으킨 두 줄기 강기 는 그 간단한 손짓 아래 철저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바로 십검풍(十劍風) 심검도(心劍道)가 아닌가? 치이이이잇-! 얼음과 불이 부딪치며 수중기가 일어나듯이, 초산랑이 일으킨 가공할 살풍 은 무옥의 일 장에 의해 여지없이 분쇄가 되었고… 초산랑의 몸은 둥실 날 아올랐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의 힘에 의해 허공으로 퉁겨진 것이다. "내… 내가 너의 십초적(十招敵)도 못 되다니… 크으으…!" 초산랑은 분해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녀는 위쪽으로 밀려 올라가는 가운데, 손을 허리춤에 댔다. 작은 비수(匕首). 자루에 달(月) 하나가 도장처럼 찍혀 있는 도신이 휘어진 비수 한 자루가 초산랑의 희고 보드라운 손에 쥐어졌다. "밤의 율법이… 나로 인해 깨어지다니…!" 초산랑은 악을 쓰며 비수를 번쩍 쳐들었다. 최후의 수법을 쓰려는 것일까? 비수로 인해 햇살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고, 차가운 기운이 일대를 늦가을 처럼 선선하게 만들었다. 야월비(夜月匕). 초산랑이 지니고 있는 최후의 병기이다. 살수(殺手)가 최후의 병기를 꺼낸다는 것은, 단 한 가지를 뜻한다. 그것은 바로 죽음(死). 그 죽음은 타인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이었다. "사부님, 소녀를 용서하십시오!" 초산랑은 흐느끼며 야월비를 가슴에 찌르려 했다. 순간, 동시에 두 줄기 지력(指力)이 날아들며 초산랑의 연마혈(軟麻穴) 두 곳이 점혈되었다. "흑…!" 초산랑은 짧은 신음 소리를 내며 허리 꺾여 떨어져 내렸고, 그 순간 무옥은 손가락을 동그랗게 오므린 채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어느 고인(高人)이오?" 그는 방금 전 일 지를 퉁겨 냈다. 그런데 그의 일 지가 초산랑의 혈도를 점하는 찰나, 또 한 사람의 혈도가 초산랑의 혈도를 점했다. 대체 누구일까? 그는 머물러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강했다. 그 기운의 주인은 무옥이 느낀 절대적 기운의 주인이었다. "후후… 고인이 아니네, 저인(低人)이네!" 목소리는 땅 속에서 들려 왔다. 보라! 지표에서 검은 흙바람이 일어나며 그것이 허공에서 뒤엉키는 가운데, 하나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을. "지둔술(地遁術)에 은마형(隱魔形)!" 무옥은 흑포괴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둔술과 은마형은 십천환에 버금 가는 수법이다. 흑의괴인의 키는 아주 컸고, 깡말랐다. 그리고 그의 두 다리는 진짜 다리가 아니라, 철족(鐵足)이었다. 야릇한 눈빛을 무옥에게 던지는 자. 그는 천리전음으로 무옥에게 말을 건넸 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중원에… 인물(人物) 하나 났군?" 괴인의 눈빛은 핏물이 고인 듯한 붉은빛이었다. 전신에서 사기(邪氣)를 흘리는 자. 그는 무옥의 헌칠한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야월화가 일 년 넘게 자네 때문에 몸살을 앓은 것도 무리는 아니군. 한데 그러한 초인적 무공을 지니고도 어이해, 무숙아란 자 하나 꺾지 못하고 낭 인(浪人)이 되어 떠돌았단 말인가? 설마, 무공이 지난 일 년 사이 십 배 신 장하기라도 했는가?" 괴인의 눈매는 아주 예리했다. 그는 초야삼은에 버금 가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뉘시오?" 무옥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살만큼 산 사람이고, 늙을만큼 늙은 사람이며, 못난 제자로 인해 골치를 썩히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은 세력을 도적질해 가려 하는 큰 도둑 으로 인해, 골치를 썩히는 중에 있다!" "무… 무슨 소리요?" "후후… 큰 도둑, 너는 정말로 큰 도둑이다. 너는 피도 흘리지 않고 중원을 통째로 삼키려 하고 있다. 너의 배짱이 마음에 든다!" 웃는 자. 일대에 서 있는 자는 그와 무옥뿐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은 꿇어 엎드려 있 었다. "…" "…" 모든 사람은 석상이 되었다. 밤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 그들의 상하 차이는 현격하다. 상위자는 하위자에게 죽음조차 간단히 명할 수 있는 방파가 야월화가 머무 는 사산무련이다. 흑의괴인은 바로 사산무련(四山武聯)의 총맹주(總盟主), 대륙마왕(大陸魔 王) 야월(夜月)이었다. 그는 바로 초산랑의 사부였다. "오랜만에 마음에 맞는 배포 큰 친구를 보게 되어 기쁘군. 후후… 그래, 노 부의 휘하 조직을 통째로 도둑질해 갈 작정이면서 그래, 노부의 허락조차 받지 않을 작정이었단 말인가?" 야월, 그는 웃음이 없던 사람이었는데 쉽게 웃었다. 그가 웃는 이유는, 무옥의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들기 때문이었다. 야월화(夜月花). 그 곳에는 가장 신비한 율법이 있다. 일컬어 월하율법(月下律法). 그것은 야월화가 대통(代統)을 전수하는 신비한 율법이었다. "중원에서 가장 강한 자는, 야월화를 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야월화의 월하율법이다. 삼백여 년 간, 그 율법은 유명무실했었다. 그 이유는, 불행 히도 가장 강한 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야월은 복면을 벗었다. 그의 얼굴은 상처 투성이였다. 그의 얼굴에 상처를 준 사람은 바로 패엽혼(貝葉魂)이었다. 야월화가 세력을 일으킨 이유는, 패엽혼에게 복수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야말로 밤의 무림계 중 가장 큰 비밀이었다. "산랑(山娘)이는 불행한 아이다. 그 아이는 제 얼굴도 모르고 십팔 세가 되 었다." "제 얼굴도 모르다니? 지금 얼굴은 면구의 얼굴이란 말이오? 지독하구려?" "그것은 밤의 율법이 엄하기 따름이다." "아, 밤의 율법!" "하나, 이제 밤의 율법은 깨어졌다. 바로 자네가 깬 것이다." "…" "물론, 네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율법은 깨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깨어질 때가 되었기에!" "깨어질 때라니?" "백도(白道)뿐 아니라, 흑도(黑道)마저 완전히 붕괴시킬 세력이 드디어 대 륙에 나타났다. 노부는 그 일 때문에 산랑이를 찾은 것인데… 후후… 그 일 을 하는데 산랑이보다도 적임자가 될 그대를 보게 된 것이다. 어찌 생각하 면, 야월화와 그대 사이에는 연분이 많은 듯하다!" 야월의 눈빛은 다정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극악무도한 사람인데, 기실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 다. 만에 하나, 그가 진짜 악인이었다면… 강호는 야월화의 세력만으로도 피바 람에 휘말렸을 것이다. "어떤가? 술 한 잔 하겠는가? 할 말이 조금 있네. 물론, 할 말이 없다 하더 라도 자네와 술을 마시고 싶구먼." 사산무련 총맹주는 배포가 큰 인물이었다. 그가 영도력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면, 사산무련은 거대한 세력 틈바구니 에서 유명무실해지다가 와해되었을 것이다. 사산무련에는 일급고수가 많다. 하나, 불행한 것은, 초일류 절세고수가 하 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야월만 하더라도 패엽혼과 싸운 이후 내상이 회복되지 않아 경공만 제대로 시전하지, 내공은 형편이 없었다. 게다가 초산랑에게 진원지기를 전수한 탓에 반 폐인이 되었다. 하나의 방파를 가진 인물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나 오래 유지되느냐 하는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방파의 운명(運命)이 다. 야월은 그것을 골수로 느끼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본맹은 중원천하와 오랫동안 담을 쌓고 지내 왔네." 강호춘(江湖春)의 한가운데, 야월과 무옥은 마주 앉아 대작(對酌)을 하고 있었다. 술은 독한 화주(火酒). 입 안에 부으면 목젖까지 불이 나는 듯 화끈해지는 그러한 술이다. 탁자 아래에는 텅 빈 주담자(酒曇子)가 뒹굴고 있다. 두 사람은 이미 많이 마셨다. 열 명의 대한(大漢)이 곤드레 만드레 취할 정 도의 화주(火酒)를… 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는 취기(醉氣)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중원이 우리를 무시(無視)했기 때문이라네. 밤의 자객(刺客)이 라고 천시했고, 사마외도(邪魔外道)라고 무시했던 걸세. 자네처럼…우리의 힘을 진정으로 필요로 했던 사람도 전무했었네!" 야월의 눈빛은 다정했다. 무옥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야월화란 하나의 숙명일 것이외다." "숙명?" "십팔만 리를 통틀어서 야월화만큼이나 세력이 완전히 보존되어 있는 방파 는 없소이다!" "하, 하긴… 야월화는 고금에서 가장 끈질긴 세력이지." 야월은 손을 들어 화주잔을 입가에 댔다. '이 사람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눈빛이 말해 준다.' 옷소매마저 술에 젖었다. 두 사람은 백 년을 사귄 금란지우(金蘭之友)마냥 친숙해질 수 있었다. 무옥은 외견을 보고 사람을 골라 사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고아(孤兒) 시절 천하디천한 마부(馬夫) 생활을 했었다. 굶기를 밥먹듯이 했으며, 옷섶에 이슬을 묻히며 새우처럼 구부려 잠을 자 보기도 했었다. 매도 많이 맞아 보았고, 욕설도 많이 들었다. 그는 강호의 하류층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거칠며, 억세고 포악하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화려한 처지에 있는 무사들이 갖고 있지 못한 진정한 의리(義理)와 인정(人情)이 있다는 것을 무옥은 알고 있었다. "어떤가? 맡아 주겠는가? 친구로서?" 밤이 될 때였다. 야월은 잔을 쭈욱 비우고 나서 빈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유난히도 강 한 눈빛으로 무옥을 바라봤다. "자네라면 안심하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겠네. 사실, 계집아이에게 자객 집단을 맡긴다는 것은 지극히 우려가 되는 일이거든. 자객업(刺客業)을 하 며 생활하는 무리들은 거칠고 억세다네. 그들을 명마(名馬)로 다스릴 수 있 는 사람에게는 특이한 저력이 있어야 하네. 당금 강호에서 그러한 일을 충 실히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바로 자네, 무옥뿐일 걸세!" 야월은 사람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옥의 무공 이전, 무옥의 인간(人間)이 어떠하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대한 것은 야월이 아니라, 야월화의 살수들이 진심으로 무옥 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밤에 머물렀네. 그리고 이제는… 새벽을 맞이 하고 싶네!" "새벽이요?" "후후… 새벽은 무엇으로 오는지 아는가?" "…" "새벽은 태양(太陽)과 더불어 오네. 자네는 바로… 우리 밤의 무사들이 목 놓아 기다리던 강호의 태양이네." 야월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밤의 역사(歷史)를 이룩해 왔던 사람! 그는 처음으로 하나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무옥이 나타났기에, 그 의 감추어졌던 인간성이 밤의 그늘에서부터 십오야(十五夜) 만월(滿月)이 떠오르듯이 떠오르는 것일 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패자(敗者)가 아닐세. 야월화의 힘은 극강(極强)하다네. 만 에 하나, 홍택호반에서 산랑(山娘)과 일백팔검(一百八劍)이 정녕 동귀어진 을 작정했더라면… 아마도 자네는 이길 수 없었을 걸세. 그것만은 거짓이 아니네!" 야월은 무옥의 손을 쥐고 있었다. 두 사람의 손을 통해 상호의 체온(體溫)이 전해지고 있었다. 야월, 그는 손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우리들의 태양이 되어 주게. 자네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네." "부탁해야 할 쪽은 제 쪽입니다!" "아닐세. 노부 쪽이네. 왜냐하면, 사실 우리들은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 자(者)를 도왔네! 그것이 분하네." "그 자라니요?" "패(貝)… 엽(葉)… 혼(魂)!" 야월의 눈에서는 불이 번쩍 일어났다. 패엽혼은 마교총림(魔敎總林)의 총수(總帥)이다. 그는 이백 년 전, 피로 강 호를 휩쓴 바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목(耳目)은 천하에 골고루 퍼져 있네. 어쩌면… 야월화 안에도 그 의 이목이 존재하고 있을지 모르네!" "아…!" "그는 병법가(兵法家)이네. 그는 철저한 승부사(勝負士)이고, 전사(戰士)이 네. 그는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네." 야월화의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그의 눈빛도 흔들리고 있었다. 강호춘(江湖春). 일대에는 무수한 그림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늘 속, 나뭇가지 위, 화단(花壇)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강호춘을 포위하고 있었다. 지금은 천자(天子)라 하더라도 강호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한 여인(女人), 그녀는 진세의 축(軸) 자리에 서 있었다. 여인은 입술을 잘강잘강 씹으며 아스라한 눈망울을 강호춘 이층 창 쪽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대사부가 무옥이란 자와 죽이 맞으실 줄이야…' 초산랑(楚山娘), 그녀는 혼수혈을 점혈당했다가 무사히 깨어났다. 그녀는 대사부 대륙마왕 야월이 나타나 무옥과 단독회담을 시작했음을 알고, 노심 초사하는 중이었다. 겉보기에 그녀는 무옥을 죽이지 못해 치를 떠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말로는 형언하지 못할 야릇한 호기심. 그것은 바로 연정(戀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러한 미묘한 감정이었다. "쿨룩… 쿨룩… 강호의 거의 모든 방파는 패엽혼이 보낸 비찰(秘察)에 의해 농락을 당했네." 야월은 기침을 시작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야월화와 사산무련의 대권(大權)에 관한 일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십만대산 (十萬大山)에 있는 사산무련의 본산(本山)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자네가 낭인지로(浪人之路)에 들어서게 된 것 또한, 비찰의 농간 일 걸세!" "으으음…!" 무옥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는 절대로 놀라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늘 그렇게 추측을 하 고 있었기에… 역시 자객의 눈은 무서웠다. 야월은 무옥의 마음 깊은 곳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자네는 무숙아에게 원한을 느끼기 보다는, 그 배후에 있는 자들에게 원한 을 느끼고 있네! 그리고 자네는 검황성의 이단자라는 신분 말고, 가공할 하 나의 신분을 갖고 있을 걸세! 후후… 물론, 그것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네 만!" 야월은 기침을 해대다가 웃기 시작했다. "속일 것이 없군요!" 무옥의 입가에는 단아한 미소가 떠올랐다. 순간, 야월은 잔을 바짝 거머쥐며 무옥을 힘있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노부가 맞춰 볼까? 자네의 비밀을?" "훗훗…!" 무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야월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 "내기를 하는 것이 어떤가? 노부가 무엇인지 알아 낸다면 자네가 노부의 예 물을 받기로 하고, 맞추지 못한다면 자네 마음대로 하기로 하고!" "좋습니다!" 무옥이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야월은 손가락으로 술을 찍었고, 그 손가락을 놀려 탁자 위에 숫자 하나를 적었다. <육(六)> 야월은 숫자를 적은 다음, 무옥을 바라봤다. 무옥은 저으기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이다!" "역시 그러하군. 훗훗… 하긴, 단신으로 일백팔검을 물리칠 만한 고수는 기 문육가(奇門六家)에서만 나올 수 있지. 기문육가는 괴팍한 방파이나, 힘에 있어서는 가장 강하거든." 야월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하여간, 두 사람은 하나가 된 셈이었다. "노부 휘하에는 도합 만이천 무사가 있네. 그 중 쓸 만한 자는 팔천 정도이 고, 자네 같은 절대고수의 눈에 들 만한 무사는 일천(一千) 남짓 하네! 그 리고 노부가 갖고 있는 밀원(密院)은 남칠성(南七省) 북육성(北六省) 통틀 어 도합 일백팔 개이네. 자네가 모두 맡게." 밤이 다하도록 두 사람은 술을 마셨고, 이야기를 했다. 새벽 안개가 강호춘의 창을 통해 밀려들 무렵, 야월은 품속에서 세 권의 책 (冊)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야월화제일비서(夜月花第一秘書)> 첫 번째 서적. 그것은 인명(人名)과 지명(地名)이 기이한 암호(暗號)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안에는 야월화의 명령에 죽고 사는 사람들의 이름과 거주지, 그리고 야 월화의 소유 아래 있는 강호의 장소가 적혀 있었다. 야월화는 활약을 했고, 그로 인해 막대한 부를 이룩했다. 황금(黃金)에 대한 것에서는 야월화와 기문육가가 쌍벽을 이룰 만했다. <강호인비록(江湖人秘錄)> 꽤나 두툼한 서적이다. 그 안에는 강호무림인들의 비밀내력이 적혀 있었다. 당세에서 서열(序列) 일천 위(位) 안에 드는 고수들과 일방(一幇)의 패주효 웅(覇主梟雄)으로 군림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특기, 그리고 그들의 식솔들, 그리고 그들이 숨겨 놓고 있는 처첩(妻妾)들, 비밀 재산의 소재지가 모두 적혀 있다. 어디 그뿐이랴? 강호의 누가 누구와 원한을 맺고 있으며 그 사연이 어떠하다는 것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세 번째 서적, 그것은 가장 얇았다. <일백팔화경(一百八花經)> 열 장도 되지 않는 양피지(羊皮紙) 고서(古書). 야월은 그것을 쥐며 손을 떨었다. "이것이야말로… 야월화에서 가장 큰 재산이네!" "예?" "만에 하나, 야월화와 사산무련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하더라도 이것만 있다 면 십 년(年) 안에 무너진 것과 똑같은 세력을 일으킬 수가 있네. 그러하기 에, 이것은 야월화의 가장 큰 재산이 되는 것이네!" 야월은 조금 피곤한 기색을 갖고 있었다. 그는 오래 전 마교총림과 싸웠고, 그로 인해 중내상을 입었다. 마약(痲藥)을 쓰지 않았더라면, 벌써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 자 초산랑이 그의 기대에 버금 가는 사람이었더라면, 그는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자결(自決)을 했을 것이다. 야월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선대에게서 물려받은 세력을 유지하고 확대시키 는 데에서는! 어쩌면 그는 무사이기 이전, 상인(商人)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안에는… 야월화에서 이름을 날렸던 일백팔 전대초살수(前代超殺手)들 의 독문비예(獨門秘藝)가 팔백 가지 적혀 있네. 그것을 한몸에 얻은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네!" "아아…!" "후후… 이 서적만 있다면 백 일 안에 천 명의 살수를 기를 수가 있네." 야월은 야릇하게 웃었다. 그가 무옥에게 건네는 서적은 강호에서 가장 피내음이 짙은 서적이다. 그 서적은 살인의 비록(秘錄)이고, 죽음의 기록이다. "그 안의 무공을 완전히 터득할 사람은… 천하에 단 한 사람! 바로 자네이 네! 이것을 자네에게 주는 이유는 그 때문이라네!" 야월은 일백팔화경을 무옥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의 손에는 진땀이 배어 있었다. 그는 급격히 약해지고 있었다. "받게. 주저하지 말게!" "받겠습니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중원(中原)을 위해서!" "좋아, 좋아! 프핫핫…!" 야월의 웃음소리와 함께 새벽 하늘이 깨어났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